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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종교영화는 계속 이런 변개와 왜곡으로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아래 글은 퍼온글 입니다.영화 son of God의 속임수 이 영화는 The Bible이라는 미니시리즈 중에서 신약 예수님의 사역 부분을 편집하여 영화화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마켓에서 이 DVD를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화 예고편에서 예수 역할을 맡은 자가 '세상을 바꾸자'라는 말을 한 것이 수상해서 이 DVD를 사서 처음 구약부분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성경 속 예수님은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하셨지 단 한 번도 ‘세상을 바꾸자!“ 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미니시리즈에서 구약을 통해서 보여 지는 하나님은 영화 ‘노아’에서 묘사한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신처럼 보입니다. 신이 정해 놓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하여 인간은 고통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런 혹독한 시련을 주는 신에게 마지못해 억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등장할 때는 처음 등장부분이 죽음의 사신들이 서 있는 것처럼 어둡고 음산하게 묘사됩니다.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잘 훈련된 무사들처럼 칼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거의 무협지 수준입니다.   가장 눈에 거슬렸던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일단 구약에 나온 성경 인물들은 전부 지저분하고 우중충하며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들로 꾸며 놓았는데 특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늙고 자비심이 없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에 반해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젊고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자로 등장하여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질투의 눈으로 쳐다보는 얼굴이 얼마나 추하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결국 사라의 질투 때문에 쫓겨나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매우 마음 아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원래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이므로 모든 것이 상속되어야 하는데 사라의 질투심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을 위한 약속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던 모세는 약간 정신이 나간 광인처럼 몰골도 지저분하고 이상한 표정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영화 ‘십계’에서 보여주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신비스런 능력을 부여받은 미친사람이 갑자기 등장하여 헛소리를 해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처럼 보이게 합니다.   삼손에서도 삼손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을 죽이고 난 후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냐는 반문을 함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길 원하시고 좋아하는 잔인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의 모습도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고 모든 성경 속 인물들이 비성경적으로 묘사됩니다. 드라마 전체를 통해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게 나오는 여자는 하갈하고 젊은 나이의 동정녀 마리아입니다. ( 중년의 마리아 역을 맡은 사람은 이 미니시리즈 제작자 부인입니다.)   이 DVD를 보면서 이들이 이것을 제작한 목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슬람 종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게 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유대민족들에게 더욱 반발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을 갖을 수 있습니다. 또한 카톨릭 쪽에서는 역시 예수 보다 어머니 마리아가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예수의 모습이 마치 고난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나약한 아들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시작부터 이기적이고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예수는 마리아가 특별히 신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서 마리아 때문에 태어난 선지자와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 유도하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고 사랑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죄악에 대해서는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전능자 하나님은 이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가 당하는 육체적 고통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여서 영화 속에 뿌려 놓은 악한 의도들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 속에 늘 따라다니는 여자가 있다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얼마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수 년 전 베스트 셀러였던 다빈치 코드나 다른 반기독교 서적에서 말해 오던 대로 예수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통해 예수가 낳은 자식이 있다는 거짓 생각을 은밀하게 믿게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예수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 했다라고 보거나 아니면 그 신의 아들의 후손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믿음을 유도시켜서 나중에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올바른 성경적 분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한 번 보는 건데 어떠냐고 생각하겠지만 앞으로 미래에 세계를 위기에서 구할 어떤 인물이 등장하여 ‘세상을 바꿉시다!’ 라고 외친다면 이 영화를 본 믿음이 적은 자들은 영화 속 예수의 모습과 미래의 그 어떤 인물을 동일시 할 수 있을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잘못된 영화들로 인하여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세상에 심판 내리기를 좋아하는 신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을 먹는 모습이 많이 비춰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영화로 인해 잘못된 인식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어떤 인물이 미래에 등장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면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새로운 신을 설정하여 그 신을 따르고 믿자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들이 믿고 따라야 할 신은 ‘예수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나쁜 신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여 어떤 종교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예수 없이도 선하게 살면 다 구원해주는 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통합에 반대하는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고 그들은 비난 받는 것 마땅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son of God'영화를 보실 분들은 이 영화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것인지를 분명히 살펴봐야 합니다. 결코 성경 속 예수님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셔서 주변에 영화를 본 자들에게 분별하여 바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출처 : 회복교회 / 향목 http://m.cafe.daum.net/aspire7/9z5w/9522?q=%EC%98%81%ED%99%94%20son%20of%20&
2014-03-25 11:06:58 | 허광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특히 평소 알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도 대상자인 상대는 지인에게 매몰차게 거부할 수 없어 나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핑계의 내용은 보통 자신이 처한 환경에 관한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은 먹고살기도 바쁜데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거나 요즘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라 조금 한가해 지면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는 말들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등장하는 갈보리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도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극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육체의 파멸 즉 인생의 종말이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창조된 생명체는 그 생명의 연속성 안에서만 생각하고 활동하며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단절 곧 육체의 파멸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마침표 앞에 생명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최고의 공포 앞에 벌벌 떨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야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이야말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겠지만 어쩌면 이건 생각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미담은 쉽게 증폭되기 마련이고 이런 경우는 그 외에 끝끝내 복음을 거부하고 죽어갔던 다수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말 그대로 예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죽어가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복음전도자는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오히려 건강할 때보다 마음이 더 딱딱하게 굳어가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옆에 자리를 잡은 두 범죄자도 이런 죽음을 앞둔 보통 사람의 마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마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막15:32) 성경에는 분명히 단수가 아닌 복수로 두 범죄자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단순히 죽음에 다다르는 고통과 공포만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구원의 길로 돌이켜 회개하고 회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엄청난 기적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 거부할 수 없는 표징이 어이없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조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눅23: 35~37) 당시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대항하거나 사형을 받아야 하는 중범죄자들에게 행해진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갈보리(골고다) 두 범죄자의 죄목은 강도였습니다(마27:44). 아마도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범죄자라면 살인을 저지른 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거칠었고 정상적인 부부간의 애정이나 가족 안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화목함과는 거리가 먼 각박한 인생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더 많은 삶의 날수를 누릴 수 있음에도 이들은 이내 결박되고 그 죄목은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이 없이 모멸과 저주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방울의 긍휼도 허락되지 않는 이런 처절한 죽음에 뜻밖에 유일한 위안거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로 여겨졌던 예수님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의 성경 기록이 성취되기 위함이었습니다.(사53:12, 막15:28) 어쨌든 강도들의 입장에선 이들에게 집중될 것만 같았던 조롱과 비난의 화살이 모두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함께 죽어가는 죄 없는 죄수를 동정하게 될까요? 성경은 전혀 반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비열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간악한 두 범죄자는 자신들의 죽음 앞에 놓인 예상치 못한 마지막 오락을 놓치지 않고 즐기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사들과 함께 동일한 대상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이 오롯이 받아야 할 비난을 피하고 그 순간만은 죽어가는 범죄자의 굴레를 벗고 자유인들과 묘한 일체감을 즐기며 추악한 위선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 요즘 들어 특히 성경에 기록된 선명한 복음, 즉 예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명확히 제시하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그런 현상은 이전보다 점점 더 가중됩니다. 갈보리(골고다)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못 박힌 강도들처럼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답도 대책도 없는 현대인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공멸을 기다리는 자포자기의 태도입니다. 마치 이솝우화의 등장하는 덫에 의해 꼬리 잘린 여우가 정상적인 다른 여우에게 꼬리 자르기를 부추기는 심리나 게으름에 시험공부를 못한 학생이 시험문제가 몹시 어렵게 출제되어 모두가 시험을 망치기 바라는 마음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갈보리에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나 못 박힌 두 범죄자는 고작 몇십 년의 차이를 두고 사망에 삼킬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누가 형편이 더 나을 것이 없는 다 같은 공멸할 무리일 뿐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정답을 모른 채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시는 분, 그들을 파멸의 문으로 밀어 넣을 사망을 곧 정복하실 분께 마음껏 조롱과 비난을 안기고 있습니다. 실상 자신들의 참모습은 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발아래 놓인 먼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그것은 어차피 누구든 정답을 모르니 같이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자는 인간의 잠재의식 깊숙이 은밀하게 존재하는 공멸의 심리와 결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독선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열심히 믿다 보면 어떤 신앙으로나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라고 외치기만 하면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은 끝이라는 해괴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결코 타협하거나 섞일 수 없습니다.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문제는 유일한 한 가지 정답만을 맞추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틀린 답만 골라 놓고도 자신은 정성을 들여 공부했으니 그 노력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역시 정답만 피해 갔으면서도 시험에 임한 태도가 진지하고 모범적이기 때문에 정답을 맞히는 것과 상관없이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무모한 믿음을 밀어붙인다면 시험공부를 전혀 안 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험지를 찢어 버리고 시험장을 뛰쳐나간 학생과 성적면에서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포악한 삶을 살든 겉으로는 선하게 살지만,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아 보려는 종교생활로 진리를 왜곡시켜 스스로 구원받을 기회를 놓아 버리든 맞이할 결과는 똑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갈보리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치리자들과 로마 군사들 모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보다 월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이 아무리 십자가형벌을 당하는 강도들보다 낫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진리를 모르고 함께 망하는 똑같은 파멸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안타까워하며 따라온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자유자들과 십자가에 매달린 두 범죄자가 포함된 파멸의 무리에서 예상 밖의 의로운 이탈자가 탄생하게 됩니다.(눅23:39~41). 앞서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 좌우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서만 한 강도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많은 안티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마치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듯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된 성경, 특히 사복음서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마치 파노라마 카메라가 촬영하듯이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오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바른 관점으로 못 박힌 한 범죄자의 회심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두 범죄자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은 분량 기록되어 있고 기록자 누가가 시간의 순서, 즉 차례대로 기록했다는 기록 원칙을 분명히 밝힌(눅1:3) 누가복음 23장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결론은 처음에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에는 분명히 두 범죄자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욕하다가(마27:44, 막15:32)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한순간에 둘 중 한 범죄자가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포악한 강도질로 인해 십자가형벌로 삶을 마무리하게 된 두 범죄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보통 백성들보다 훨씬 못한 사회적 배려를 받고 성장했을지 모릅니다. 가진 것도 없고 가정 안에서 제대로 된 양육도 받지 못하며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삶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구어나갈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두 강도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으로 당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한 소식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여러 번 소문으로 전해 듣고 혹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을 먼발치에서나마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군중들 속에서 직접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박하고 거칠고 음침한 삶을 영위하던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과는 영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요,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스런 노랫가락 정도로 여겨졌을 겁니다. 이러한 심리의 상태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과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를 뿐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치리자요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견됩니다. 다시 태어남의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동문서답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평소 강도질을 일삼으며 스치듯 접한 예수님의 소문과 가르침에 전혀 반응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두 강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각자가 처한 사회적 신분과 상황만 다를 뿐 진리에 응답하지 못하는 잠자는 지각의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같은 것입니다. 사탄이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이런 사람의 형편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것은 마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과도 같이 자연스럽게 자연인인 인간들에게 계승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해 나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지만 정작 가장 시급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고 사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모습은 박물관에 전시될 이미 소멸한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전히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시민의 모습입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형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강도들이 처한 진정한 위기는 처참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세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살던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나 혹은 그저 잊어버리고 사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정답을 모르고 속절없이 죽어가던 두 명의 범죄자 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은 강도는 어떻게 이런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누가복음 23장 32~46절의 기록에 해당하는 사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시간인 세시 즉 오전 9시에 갈보리(골고다)에서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며(막15:25) 예수님께서 모든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눅23:34)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는 일이 비교적 짧은 시간의 범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조롱하며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둘 다 같은 말로 예수님을 욕하는 일이 있은 후 어느 순간엔가 한 범죄자는 회심했습니다. 곧이어 회심자의 청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낙원에서 재회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여섯 시쯤 즉 정오쯤 되었습니다(눅23:43~44).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해면에 적신 식초를 드시고 그 후에 큰 소리를 외치시고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숨을 거두시는 것이 사복음서를 서로 대조해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갈보리(골고다)에서 발생한 시간 순서상의 일들입니다. 이를 볼 때 갈보리 십자가에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고 둘 다 예수님을 욕하다 후에 한 강도가 회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세시(오전 9시)부터 여섯 시(정오)까지 총 세 시간 정도입니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지만 한때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눈물을 흘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가 얼마나 불성실하게 성경을 참고하고 감독과 대본 작가 마음대로 성경 기록을 왜곡했는지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회심한 강도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점은 갈보리에 예수님과 두 범죄자가 못 박힌 후부터 둘 중 한 범죄자가 회심하고 구원받기 전까지 사복음서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기록 두 가지가 누가복음 23장에만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눅23:34).  이 기도는 시간상으로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기 전에 행해집니다(눅23:34). 사복음서를 비교하면 두 범죄자가 함께 예수님을 욕한 것은 군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기한 후의 일입니다. 이를 통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욕을 했을 정도로 두 강도 모두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강퍅해 질대로 강퍅해진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다는 말씀처럼(약5:16) 예수님의 기도가 구원받은 범죄자의 회심에 효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갈보리의 핍박자들 중 적어도 예수님께 낙원을 약속받으며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회심자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회심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좀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화자(話者)의 복잡하게 변화하는 심리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연인에게 “사랑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도 그 마음의 복잡한 심리를 따라 분류하자면 100가지 경우는 족히 넘을 겁니다. 성경 기록은 두 강도가 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하지만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두 강도의 마음 상태는 이미 그때부터 크게 차이가 나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설명이 기록된 마태복음 13장과 동일한 장면이 기록된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길가와 돌밭 혹은 바위와 가시나무들 사이와 좋은 땅 등의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좋은 땅을 제외한 3가지 종류의 마음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씨앗이 떨어져 생장하지 못하는 이유나 상황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의 형편은 제각각이고 복잡다단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분명 한순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속에 찌들어 딱딱해진 마음이 허물어지고 단단한 마음의 빗장이 열려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게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구원받은 경우가 아니라 장성하여 극히 세속적인 삶을 오랫동안 지속하던 사람의 회심은 복음의 씨앗이 생장할 수 없는 딱딱한 마음 밭의 돌멩이와 가시를 걷어내고 쟁기질을 해서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버린 밭의 토양을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범죄자는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범죄자와 비교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삶 속에서 이미 뭔가 큰 차이가 존재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도 누군가 전부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참된 믿음을 지속해서 가르쳐 주었을지 모릅니다. 또 어쩌면 그는 세상의 비정함과 시름에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복음을 전하는 곳을 가끔이라도 기웃거리며 단순한 호기심에라도 그 가르침을 종종 듣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회심한 범죄자의 고백처럼 거친 삶을 살고 똑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정당하게 십자가형벌에 처한 것은 두 강도 모두 같습니다(눅23:41). 그러나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두 강도의 마음 밭의 상태는 이미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심지어 못 박힌 후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지만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한 사람은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복음 앞에 허물어지지 않는 단단한 벽이었고 한 사람은 마치 균열이 일어나며 작은 틈으로 물이 졸졸 새어나가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강둑처럼 복음 앞에 무너질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혼이 구원받는 일은 쉽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실이나 노력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으로라도 진리의 말씀에 다가가려는 자세가 평소에 갖추어져 있거나 그 굳어진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회심의 기회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실적 위주의 스피드한 전도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거짓 결신자만 양산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쏟는 미디어 사역을 통해 바로바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역은 시나브로 열매 맺고 진리로 돌아설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 23장에만 나오는 범죄자의 십자가상 회심사건 이전에 등장하는 특별한 또 하나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처음에 예수님을 욕했던 범죄자 중 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또다시 맹렬한 어조로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입니다(눅23: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 이 부분은 분명히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던 장면과(마27:44, 막15:32) 다른 장면입니다. 앞의 두 기록은 두 범죄자가 함께 욕을 했고 누가복음 23장 39절은 한 범죄자가 욕을 하고 곧바로 회심한 범죄자의 반박이 이어지기에 강도들이 같은 말로 예수님을 모욕한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봐야 옳습니다. 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눅23:40~14) 구원받은 범죄자의 마음의 변화가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 성경 기록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회심한 범죄자가 정확히 어느 순간 구원받았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성경에 지나친 상상력을 가미해야 하기에 다소 위험하고 불필요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 가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줄기차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모습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정당한 판결로 삶의 종언이 확정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핍박자들과 합세하여 의로우신 분을 욕하고 조롱하며 그것을 삶의 마지막에 주어진 위안인 듯 착각했던 자신의 지독한 위선을 또다시 예수님을 비난하는 다른 범죄자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남의 것을 빼앗고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던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올랐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도 의연하게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는 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앞에 압도되었을 것이며 점점 몸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의 생명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있음을 직감할 때쯤 그 모든 요소들이 합력하여 위대한 복음의 권능이 그의 영과 혼을 강타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즉 다시 태어남은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가 설치해 놓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귀의 자녀로 오랜 세월 살던 딱딱한 마음의 소유자가 변화되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까지는 여러 요소가 합력하여야 하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맑은 정신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지각(understanding)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지식을 축적하고 IQ 등 두뇌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박사나 지식인들 중에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44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이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 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45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24:44~45)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그들의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 같이 걷지 말라. 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7~18) 제아무리 다양한 지식을 축적한 지식인이라도 타락한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본 모습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지각이 열리지 않았고 어두워져 있는 상태라고 명확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미담과 달리 지각이 어두워진 상태로 생사를 넘나들며 정신마저 혼미한 중환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할 가능성은 성경을 보더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적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의 마음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뉘라서 한 사람이 구원받고 못 받고를 확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퇴화하고 어두워진 지각이 열릴 가능성이 그나마도 많은 맑은 정신 상태에 놓인 사람이 구원받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바른 원칙을 제시하는 차원으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회심한 범죄자도 앞서 살펴본 대로 여섯 시쯤(정오)이 되기 전에 구원받았으며(눅23:43~44) 이후에 예수님께서 차차로 기진하시며 숨을 거두신 것을 고려하면 회심자 또한 극심한 십자가형벌의 고통 중이지만 아직 지각을 발휘할 수 있는 또렷한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육체와 이성이 생생하게 또렷한 상태로 살아 움직일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마음대로 세상을 즐기다 죽어가는 침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악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죽을 날과 시를 모르는 인간의 형편과 더불어 생각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죽음의 침상에서 구원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런 미담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마귀가 사람들의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서 쳐 놓은 함정에 불과합니다. 건강할 때, 이성이 생생하게 살아서 작동할 때, 누구에게나 바로 그때가 구원받을 수 있는 적기임이 분명합니다. 파멸이 다가오는 순간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마지막 고통은 분명히 구원받는 것에 촉매로 작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 그가 들어 마음에 축적하고 있던 복음이 생각나고 바로 옆에서 죽음의 고통 중에도 자신을 조롱하는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며 더불어 끝까지 악한 모습으로 위선의 오락을 맛보기 위해 예수님을 조롱하는 또 다른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잠자던 지각을 깨우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는 지각이 열린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죄인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눅23:40~41). 이미 그의 고백 안에는 복음이 진하게 들어있습니다.   이제 회심한 강도의 저 겸손하고도 위대한 청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눅23:42) 그는 이미 주님을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개역과 개역 개정 성경은 회심자의 고백인 ‘주여’를 ‘예수여’라고 표기하며 구원받은 강도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회심자의 고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욕하던 그의 모습은 엄청난 반전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범죄자는 이 말을 고백하기 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이미 구원받았고 43절에 예수님께서 낙원에 대한 약속을 말로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도 낙원에서 예수님과의 재회가 확정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숨 쉴 힘조차 떨어져 가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이미 구원받은 강도에게 지극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는 범죄자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고 십자가형 집행을 면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감히 사람이 죽은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대기 장소요 지금은 지하 세계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 하늘로 옮겨진(고후12:1~4, 엡 4:8~10) 낙원을 약속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이미 죽어가는 범죄자에게 낙원을 약속할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계1:18)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오직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소유하신 분이고 멸망하는 죄인에게 영존하는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며 온 우주에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 중 한 명이 구원받은 과정을 성경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죄인 즉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죄인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죄인으로 태어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절반으로 쪼개져도 죄인이 구원받을 수 없고 광대한 우주가 종이쪽처럼 휘말려도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먼지만큼도 이바지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그만큼 힘들고 창조된 존재가 창조된 존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주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고 확실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는 순간 구원의 열차에 올라타겠다는 소망은 엄격히 말해 망상에 불과합니다. 죽은 이후에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고작 몇십 년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노력하며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병들어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는 것 외에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 즉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할 수 없는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직 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죄 없는 피로만 속죄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확고하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구원받을 기회는 항상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릴 때 또한 장성한 이후에라도 모든 지각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을 때가 구원받기 훨씬 수월합니다. 구원받으려는 사람이나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이 이르게 하려는 복음전도자나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갈보리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은 세상의 시작부터 끝날까지 태어나서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딱 두 종류로 정확하게 구분되고 분리될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하고 파멸 곧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 호수에 던져질 사람들입니다. 우주가 쪼개지는 것보다 더한 반전을 경험하며 파멸의 낭떠러지 맨 끝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구원받은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그는 죄악에 찌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교훈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한사람이라도 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아 삶의 마지막 날 이루어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세상 그 어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예로운 약속의 수혜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 9:27)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2014-03-13 14:38:08 | 김대용
안녕하세요.     지난주 3월 8일 토요일 오후2:30분부터 4:30분까지 진행된 모임의 소식을, 처음 시작된 1차 모임이라, 알려드립니다. 1차 모임이라서 정동수 목사님이 몸이 아프신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본 모임에 오셔서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의미 및 여러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다음과 같이 모이고자 합니다. 1) 매주 토요 오후 모임 : 대전/청주/여수의 형제/자매님들이 모여 성경 공부 및 교제 2) 격주 수요 저녁 모임 : 정동수 목사님이 당분간 성경 공부 인도 예정  3) 주일 예배 : 아직 미정이고 추후 계획   저희 모임에 대한 것은 대전/청주 흠정역 카페(http://cafe.daum.net/grace1611)를 참조하세요   감사합니다.   샬롬.  
2014-03-10 13:09:31 | 김학준
    안녕하세요?   지난 2013년 8월에 시작된 모임이 벌써 8차 모임이 되었습니다. 두 가정이 모여 시작했는데, 멤버들이 조금씩 늘어나서 저희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올해 2014년에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모임이 되길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번 모임의 시간과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1.  일자와 시간 : 2014년 3월 15일(토) 저녁 7시 2.  장     소  :  **번지 Smales Rd. East Tamaki, Auckland(East Auckland) 3.  내      용  :  개역성경분석 4.  연  락  처  :  027-779-8877(최문선)          
2014-03-08 16:46:31 | 최문선
안녕하세요,   대전의 김학준 형제입니다.   지난번에 공지드린대로 대전/청주의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를 알리고자 글을 올립니다. 대전/청주의 형제/자매님들이 서로 지역상 떨어져는 있지만, 단일된 하나의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지금 15명 정도 모였는데요, 흠정역 성경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점차 모임을, 예배를 포함하여, 확대하려고 합니다. 본 모임을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고요, 대전/청주 지역에서 본 모임에 관심이 있으신 형제 자매님들은 카페에 방문하여 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 개설한 저희 모임 카페입니다.  시작된지 얼마되지않아 별 내용은 없습니다.    http://cafe.daum.net/grace1611   감사합니다.
2014-03-04 21:31:41 | 김학준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미국 달라스에 거주하는 김종설이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화 중에 있는) 지금 제 손에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킵바이블 사이트와 사랑침례교회 사이트에서 좋은 자료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미국 달라스에도 흠정역 성경으로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세워질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예수님의 공중강림이 날로 가까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죠? 달라스에도 흠정역 성경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듣고 많은 한인들이 구원받고 다시 태어날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킵바이블 사이트 운영하시는 정동수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로마서 1 : 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아멘!!!!
2014-03-02 23:13:04 | 김종설
목사님.. 오늘 드디어 성막강해를 다 들었습니다..   요즘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읽고 너무 은혜가 넘치고 기쁘네요.. 물론 마태복음 계시록 강해도 다 들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장로교를 다니고 있지만 구원에 행위를 잘해도 누구나 휴거가 안된다고 10년을 넘게 듣고 신앙생활 했는지라. 킹제임스 흠정역을 알지 못했다면 인생에 큰일이 날 뻔 했습니다..   청년/대학부 교사인데 몇 달 전부터는 청년/대학부에 킹제임스 흠정역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니는 교회목사님께 눈치는 보이지만 그래도 쫓겨난다 해도 흠정역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의 소망은 흠정역으로 대구에서 지체들이 모여서 예배보고 말씀을 나누고 싶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같은 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면 킹제임스 흠정역으로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많이 전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지역 성도들에게 알리는 게 목표가 됐습니다. 그러다 보면 누룩으로 찌든 지금의 교단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최종권위 킹제임스 흠정역으로 예배를 볼 날이 오겠지요.. 감사합니다..   대구 북구에서 최재영올림
2014-02-26 17:01:53 | 최재영
사람은 영과 육과 혼의 3분설과 영혼과 육이라는 2분설이 있는데 어떤것이 맞는지요? 또한 외국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요?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한다고 할때는...... 3분설이 맞는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2014-02-19 21:28:13 | 김영선
성경을 읽다보니, 궁금한 점이 발생되어 질문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여섯째날 땅의 짐승과 가축등과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다 "이르시되"로써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 같은데... 시편8편을 보니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으로 되어있어서 약간 헷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분명 뜻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질문드립니다.   창1: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1: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창1:11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창1:2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창조물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서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 창1:24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시편8:3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 시편8:6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사오니
2014-02-12 15:05:44 | 이종철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목사는 26세에 왕립의학협회로부터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44년 이상의 목회와 설교 사역을 통해 그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물론 이분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성경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 한계가 명확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의 초인적인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고 특히, 저 불후의 명저 ‘설교와 설교자’는 설교자가 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위대한 막대기인가를 가장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리적 한계를 지녔지만 위대한 설교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저서(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에서 성도가 궁극적으로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논한 한 부분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요한계시록 4장에서 ‘짐승’이라고 묘사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중략-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 그들은 혼합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그들이 천사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피조 된 생물의 최고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주된 기능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하게 될 만큼 고귀하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요! 그룹과 스랍, 그리고 이 짐승들에 대한 모든 성경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정해진 항거할 수 없는 처지가 운명의 사전적 의미라고 한다면 각 사람이 맨 마지막에 처하게 될 영원히 불변할 운명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윗글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가 묵상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예배가 바로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이어지는 사도 요한이 바라본 셋째 하늘의 왕좌에는 벽옥과 홍보석 같은 한 분이 좌정해 계십니다(계4;2~3). 왕좌 둘레에는 스물네 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계5:9~10) 등을 살펴볼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물네 명의 장로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도 공식 행사, 그것도 중요한 행사일수록 참여한 사람들의 자리 배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럴 때는 각 사람의 신분의 존귀함과 직책의 중함 정도에 따라 자리의 순서가 결정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왕좌 바로 옆 둘레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24자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하나님의 근위병 역할을 하는 ‘네 짐승’이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왕좌와 네 짐승과 장로들의 한가운데 그 고귀한 자리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천사들은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 밖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위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 바로 옆, 즉 창조물로서 거룩하신 창조주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도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들은 천사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천사를 실제로 보여준다면 지금 바로 미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사람들이 허다할 겁니다. 지금은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거룩한 영역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천사들도 요한계시록 천상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자리한 구원받은 성도들을 밖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할리웃이 만들어낸 히어로들을 보십시오. 소닉붐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초인적 존재인 수퍼맨이나 가슴에 원자로를 품고 철갑을 두른 가공할 위력의 아이언맨이나  사실 이들은 성경에 계시된 천사들의 권능과 존귀함과 비교하면 미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만약 실제로 나타난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온 혼을 쏟아 부으며 그들에게 열광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성경에 기록된 천사들에 견주면 기어 다니는 굼벵이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지상에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들의 사악함은 상관치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을 주었고 타락한 천사들은 자기 취향에 맞춰 마음대로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6:1~2). 이런 놀라운 존재인 천사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온 우주와 모든 곳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까지 다가설 수 있는 존귀함, 즉 이 놀라운 신분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삽니까? 매일 매일 닥치는 육신과 삶의 필요를 위해서는 온 신경이 자연스럽게 쏠리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세계를 먼지처럼 밀어젖히고 장차 우리에게 임할 변치 않을 극히 견고한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 거하게 될 한 도시입니다. 온 우주의 심장부이며 모든 처소들 중에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존귀한 이 도시에 대해 바울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땅에 중심부인 예루살렘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도시, 즉 하늘들과 땅의 모든 처소의 영원한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은 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께서 직접 그 도시의 광채가 되시는 곳입니다(계21:23). 또한, 이 거룩한 도시, 모든 곳의 심장부는 그 누구도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곳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우리는 이사를 하기로 한 지역의 아파트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 중 하나가 어떤 회사가 건설한 아파트인가 하는 겁니다. 인지도가 높은 대형건설사일수록 당연히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도 다른 아파트에 비해 매입비용이 높습니다. 그 어떤 아파트나 건축물 혹은 어떤 정부가 기획하고 건설한 도시와도 비교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하게 될 본향이요 최종적인 근거지가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 거주민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이렇게 창조물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약속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시는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존재로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히 분리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인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겁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1:4) 다시 언급하지만,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이 없다는 약속과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은 창조된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특혜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믿기에 우리는 구원받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때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감수하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흔들림 없이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요즈음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체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여기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과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얼마나 대접받고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영역이 아닌 눈에 보이는 환경, 조건, 경력, 사람의 능력, 학력, 재정적 준비, 인지도 등등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와 개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대접받고 있다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권능이 여러분의 지금의 삶까지 바꾸어 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상속 유업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이렇듯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과 장차 받을 축복을 잊어버리거나 별 기대 없이 매일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열중한다면 성도의 삶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지향점 없는 각박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에 절절히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오래전에 한국에서 로또가 처음 판매될 때 재미삼아 사오라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또를 사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면 주는 영수증처럼 생긴 그 얇고 작은 종이가 수백억 가치가 있는 일등 복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소유한 사람에게 그 얇고 별 볼 일 없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는 더는 쓸모없는 종이가 아닙니다. 수백억의 현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귀한 물건이 됩니다. 그것은 당첨된 복권에 부여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금으로 수백억을 은행에 예금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 순간부터 자신을 수백억의 자산가로 생각하고 그 돈의 용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극도의 흥분과 희락을 절로 경험합니다. 당첨된 복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지인에게 당첨 사실을 털어놓는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말과 전인(全人)에서 풍겨 나오는 확고한 믿음은 듣는 이가 그의 고백을 절로 신뢰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실 일등에 당첨된 복권은 같은 회차에 발행된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수많은 복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쇄된 글자가 찍힌 작은 종이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 종이에 부여된 약속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복권과 다르기에 그런 능력을 발휘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복권 속에 들어있는 약속에 대한 믿음도 사람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해서 감정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기는 극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니 눈에 보이는 각종 행사와 초현대식 교회 건물과 유명인 등 사람의 눈을 매료시키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울 도리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구원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성도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운명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참으로 적은 것을 알게 됩니다. 확률이 극히 희박한 로또 종이에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보다 더 초라한 대우를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천상에서 성도들의 사역을 눈이 떨어지라고 집중해서 보고 있는 천사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깁니다. 그동안 ‘성경지킴이’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각종 미디어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과 그로 인해 세워진 바른 교리가 있음이 전해졌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가장 부족하고 아둔한 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존된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접하고 한때 머리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했던 사람들 중에서 진리에 응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사실 적다고 봅니다. 진리에 반응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스스로 고안한 논리로 그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영상이라는 것이 참 편리하고 빠르게 진리를 전하고 있음에 감격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간편하게 진리의 가르침을 접하고 마치 홈쇼핑을 즐기듯 그것을 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도 됩니다. 영적으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지적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이미 우리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성도가 종국에 다다를 찬란한 운명을 확고히 믿고 자신의 온 생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은 진리를 접하고도 여전히 간편함을 추구하며 영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오히려 이젠 적은 지식으로 어설픈 선생 역할을 해 보려 하는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고단한 짐은 점점 가중될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전처럼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서는 더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체계가 이룩되어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휴거를 통해 교회를 불러올리실지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는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갈수록 악하고 험난해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런 고단한 삶 속에서 성도가 위안을 얻고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굳게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악해지는 배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약속,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바울처럼은 못 되더라도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위해 손해 보고 결단하고 비진리와 결별하고 분리하는 담대한 모습을 보일 때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생생하게 세상에 증명될 것이고 바울이 고대하던 운명의 종착지에서 신실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 하나하나 우리 각자에게 확정될 것이라 믿습니다.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4~25)
2014-02-11 11:32:40 | 김대용
크리스천의 사고방식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무엇이 다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 신의 존재   사실, 신의 존재 여부 자체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논쟁을 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이 분야는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신은 없다고? 그럼 너는 네 뇌를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무뇌아냐?” 라든가 “현대 과학이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무수한 미지의 영역에 신이 전혀 없을 거라고 확신 가능하냐?” 같은 당장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추측+아전인수격의 유치한 논쟁에서 크게 더 나아가질 못한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은 보통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   창조과학 같은 데서는 우주와 지구와 자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예로 들면서 그게 확률과 우연으로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직관을 많이 내세우는 편이다. 그건 성경적인 근거가 있으며(롬 1:19-20), 나 역시 직관과 양심에 근거하여 그 논조를 큰 틀에서 '지지'한다.   그러나 자연 계시는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인정한다.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10의 무려 1500승까지 찾아 봤는데도 없었다고 해서 홀수 완전수가 아예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증명된 건 아니라고 하니까. 단지, 한 혼을 움직이고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굳이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을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 뿐이다. (완전수란? 6 (1+2+3), 28 (1+2+4+7+14)처럼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이 자신과 같은 수를 말한다. 짝수 말고 홀수 완전수가 존재하는지는 완전히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없는 것으로 추측될 뿐임)   또한, 같은 논리를 동원하자면, 자연에는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틀어지고 망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처참한 살육과 약육강식도 있다. 온갖 나쁜 병균, 기생충도 있고 바이러스도 있다. 이 세상에는 전능하고 공의로운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지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때로는 신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의구심이 들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한 일, 불의한 일, 억울한 일도 많이 벌어진다. 물론 그런 것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나, 그걸로 영적 안목이 없는 불신자를 당장 충분히 설득 가능한 건 아니다.   요컨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은 자주 불거져 나오긴 하지만 과학적 측면보다는 저런 명분론· 변증법(?)적인 측면에서 더 제기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독교회가 배도하고 타락하고 자유주의로 빠진다 해도 자기 존재 이유를 성립시키는 신 자체를 대놓고 부정할 정도로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껍데기만 유지한 채 변질만 되며, 하나님을 가르치긴 하나 그분의 성품을 완전히 왜곡해서 가르치게 될 뿐이다.   2. 창조-진화   여기는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진흙탕 싸움이 본격적으로 제일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기원이라는 것도 어차피 실험으로 정확하게 재연 가능한 건 아니며, 단지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마치 범죄 수사처럼 과거엔 아마 이랬을 거라고 재구성과 추적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학술논문 스타일로 쓰여진 책도 아니다. 그러나 건전한 신자라면, 성경에 양념으로 기록되어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성경이 최소한 당대의 다른 문헌에 ‘비해서’야 과학적 통찰력이 아득히 앞서갔으며 성경 저자의 식견만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진술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 성경이 너무나 평이하게 신의 존재만큼이나 당연한 듯이 창조를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성경을 읽고 믿는 신자들의 한계는 솔직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가령, 성경에 아무리 ‘땅의 원 위에 앉으신 분’(사 40:22), ‘땅을 허공에 매다시고’(욥 26:7), ‘낮과 밤이 동시에’ 같은 구절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크리스천들이 성경만 읽고서 세속 과학자들보다 더 일찍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걸 선뜻 알아채지는 못했다. 또한 창세기 1장의 연대기 문제는 같은 믿는 신자들끼리도 진영간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아 뭐 그렇다고 해서 창조를 믿는 성경 신자들이 너무 쫄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 저쪽 사람들은 창조론자를 어떻게든 바보로 만들기 위해 약간 비논리적인 비약, 비과학적인 표현, 팩트 오류 같은 것만을 찾아내어 집요하게 공략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전제조건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너의 천 대 만 대 조상은 확실하게 원숭이나 아메바냐?”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절대로 정면돌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공정한 대결이랍시고 그 함정 설정에 필요 이상으로 말려 들어갈 필요 없다.   진화론자는 어차피 기원에 대해서 딱히 이렇다 할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원시 생명체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진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아주 제한되고 미시적인 맥락에서 유기물이 합성됐거나 대진화가 관찰· 재연된 것은, 수많은 놀라운 지능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실제 자연의 생물들과는 여전히 엄청난 괴리감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든,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든 이거나 저거나 본질 개념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진술일 뿐이다.   일상생활에서야 “A가 틀렸으니 B가 자동으로 맞다” 같은 논리 전개는 억지가 맞다. 그런데 기원은 솔직히 A, B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글쎄, 기어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자면 만들 수는 있다. “신이 창조하긴 했을지 모르나 그게 꼭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같은 식으로 들이댈 수 있겠는데.. 그렇게까지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까지 굳이 설득하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로 감정만 나빠진다.   3-1. 성경의 보존과 번역   창조-진화가 자연과학 쪽의 전쟁터라면, 여기는 언어학, 고고학 같은 인문계 영역의 전쟁터이다. 사실은 기독교의 근간을 구성하는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이야말로 제일 치열하고 집요하고 처절하다. 인류 역사상 성경만치 공격을 많이 받아 온 문헌이나 종교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1) 성경이 자필 원본 이래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됐을 리가 없다고 공격하고, (2) 그 원문이 있다 해도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다고 공격한다. (1)은 원문 계층이고 (2)는 원어 계층 되겠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건 교회 댕기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심지어 목사, 신학자라는 사람들까지 그 공격에 고스란히 넘어가서 불신자· 기독안티와 다를 바 없는 성경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이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그런 허접한 텍스트를 근거로 어떻게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라고 가르칠 수 있으며, 안 그래도 요즘 교회 이미지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세상을 상대로 감히 복음 전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할 수가 있는가? 당신이 믿는 그 영감 받은 온전한 말씀은 도대체 무슨 성경이며 지금 우리 손에 있긴 한가? 문체 수준이 아니라 서로 번역과 내용이 제각각인 성경들 중에 무엇이 진짜 옳은 말씀이란 말인가?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는 진영은 이 문제에 관한 한은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있으며 비판에 대한 대안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을 믿느니 차라리 400여 년 간의 선한 열매가 분명히 있는 옛 성경 역본을 믿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기독교계에 다툼과 분열을 야기하는 고집쟁이 전투종족 집단이 절대로 아니다. 기독교를 믿을 거면 제대로 믿으려고 모 아니면 도 신앙 노선을 추구하며, 크리스천의 신앙을 최전방에서 방어하는 건전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성경은 그저 내용 요점만 두리뭉실하게 적혀 있는 도덕 경전이라고 취급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과격한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정확도와 신뢰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성경이라는 책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저 판타지일 뿐 진지하게 믿을 가치가 없다!   3-2. 성경의 무오성과 해석   앞의 (1)과 (2)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3) 팩트와 해석 차원의 공격도 무진장 많다. 왜, (a)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잔뜩 있다는 태클들 말이다. 사복음서간에 뭐가 일치 안 하고 동일 사건에 대한 진술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내부 모순이 있으며, 세속 역사 문헌 어디에도 요셉이나 모세나 출애굽 사건,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고증이 안 맞다는 식의 외부 공격도 있다. 또 (b)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든가 “가나안 민족들을 모조리 진멸하라”, “고환이 상한 자는 주께 나오지 못할지니라” 이런 것만 뚝뚝 떼어 와서 하나님이 인종 차별적이고 잔인하고 뭐 같다고 이상한 딴지 거는 얘기들도 한둘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이랴? 이제는 아예 (c) “성경 어디에도 예수 말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거나, 예수가 자기 안 믿는 사람은 다 지옥 보내 버리겠다는 공갈을 한 적은 없다”고 교리를 제멋대로 정반대로 재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난독증 수준의 억지에 비하면 “모세는 진짜 홍해를 횡단한 게 아니라 근처의 갈대밭을 건넌 거다”는 차라리 애교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에만 끌려가다 보면.. 기독교와 바이블은 진작에 외면받고 사라지고 소멸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존속해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어지간히 ‘쎈 걸’ 믿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읽으라고 부탁하고 간청을 해도 안 읽을 재미없는 책을 옛날에 악의 무리들은 왜 그리도 없애려고 발광을 했으며, 그 책을 소지하거나 읽느라 순교까지 당한 바보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던 걸까?   성경에는 왜 그렇게 적혀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의문 구절도 일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 말고 (a)에 속하는 상당수의 딴지들은 이미 반박과 해결책이 다 알려져 있으며, (b)도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 경륜 구분 같은 걸로 바르게 나누고 분간하면 성경에 왜 그런 무지막지한 말이나 모순점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오류 없이 거의 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c)는...? 대꾸할 가치도 없을 것 같다. 입만 아프다. 믿어지지 않고 믿기 싫으면 전체를 거부하고 안 믿으면 된다. 단지 취사선택을 하지 말고, 비기독교적인 자기 신념을 기독교라고 우기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떡밥을 하나 남기면서 이 주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생명의 기원만큼이나 인간의 언어의 기원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건 화석이나 방사선 원소 연대 측정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오늘날 언어학계에서는 언어의 기원은 그냥 불가지론으로 간주하고 함구하고 있다.   4. 내세   제아무리 불신자 무신론자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건 마치 “목 잘린 직후의 느낌이 어떻냐”만큼이나.. 체험해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질 못하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 접근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종교관에 의지해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회· 환생이든, 완전 소멸이든, 하늘과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보니, 옳다 그르다 같은 감정 싸움은 딱히 없다. 뭐, 굳이 하나 지적하자면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니 너네 종교는 참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정도의 딴지만 있을 뿐. 그러나 그건 협박이나 공갈이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해서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는 거지, 그 말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해코지 차원에서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리가 안 믿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만 안 받아들이고 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내세관은 그 배타적인 것 딱 하나만 받아들이고 넘기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뒤끝 없고 깔끔하고 건전하다!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귀신 없고 미신 없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류 없고, 죽은 사람 갖고 현질(=돈 내라)을 유도하는 지긋지긋한 종교 장난질이 없다! 그 대신 부활의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5. 보편적인 윤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경적 윤리관은 어지간한 세상 사람들이 ‘진보 트렌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인 수구꼴통(?)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일단 필요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다 긍정적이다. 사형제, 체벌, 나라 지키는 군대, 공권력 같은 것. 절대적인 선악 기준이 없을 때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흉악범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 피해자 유족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있어서 범죄가 줄어들었느냐, 범죄자의 교화는 어떡하냐 그딴 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의 판결은 “흉계를 품고 사람을 고의로 죽게 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인 것이다. “너 고소”가 아니라 “너 죽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흉악범도 개인적으로야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형벌에 의해 세상 하직해야 한다. 자기 목숨 바쳐서 피해자 유족들의 한을 풀고 자기 피로 땅을 깨끗하게 해 준 뒤, 빨랑 하늘나라 가야 된다.   그리고 성(sex) 관념도 진짜 깔끔하다. (1) 결혼한 (2) 남자사람과 (3) 여자사람이 하는 것 말고는.. (1)부터 (3)까지 한 단서라도 누락되거나 바뀐 것은 전부 음행, 죄악이고 그것도 굉장히 큰 죄이다.   이런 법칙들이 온갖 인간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핑계로 문란해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인권이(특히 여성 인권)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금야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만이 열릴 뿐이다. 당장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낳은 뒤 책임감 있게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한 당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늘 이상한 통계 자료나 주고받으면서 답 없는 쳇바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윤리관의 경우, 다른 창조/진화나 성경 같은 이슈와는 달리,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크리스천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위에서 소개된 여러 아이템들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가장 크리티컬한 변수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다!   세속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만화, 인명 사전, 위키백과 같은 데서 ‘예수’를 찾아 보시라. 제아무리 개독안티라 해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는 안 그런다. 그건 역사적 증거가 너무 분명해서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이면 열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얘기로 끝난다. 아니면 부활까지도 소개는 하지만 “성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랬다고 한다, 기독경에 따르면 그랬다고 전해진다”라고 단서는 꼭 붙이고서, 우리는 저 진술에 책임 안 진다는 식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혔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쓰는 순간 그 책은 객관성을 잃고 특정 종교 집단의 교리를 대변하는 경전(?) 내지 간증집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관심사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위경이나 이상한 사료를 토대로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예수는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으며, 나중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한 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지어낸 개독안티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나 석학들도 현대의 지성인 무신론자보다 지성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얼마 못 가 쏙 들어갔다. 지금도 예수 부활을 공격하는 얘기가 강경한 개독안티 커뮤니티 위주로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 내지 창조/진화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다. 이 주제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마치 ‘내세’만큼이나,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으로 그냥 쉬쉬 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겁쟁이었던 예수님 제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예수 전하느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로 뒤바뀐 것, 고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믿음을 지킨 것,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기독교회가 수백, 수천 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우려먹는 레퍼토리이자 복음의 핵심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새마을호 열차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온 사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게 호락호락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당할 것 같은가? 아예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부활만 쏙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해서 살아난 거라면 제자들이 그걸 모를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 겨우 그런 예수님을 보고는 역전의 용사로 바뀌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담대히 증언하다가 순교까지 했다고? 에라이..   모르긴 몰라도 아폴로 계획 달 탐사 자작극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예수 기절설 같은 건 단박에 반박 가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 무신론· 회의론자이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법적으로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라는 걸 발견한 사이먼 그린리프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부활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경 전체의 실질적인 진위 여부와 여러분의 혼의 미래까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 결론   잠시 눈을 돌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당장 북한과 휴전 상태이고 대립 상태이다.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고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가끔은 대화도 시도하고 화해 무드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둘은 근본적으로 통치 체제와 지향하는 바가 180도 완전히 너무 다른 정치 집단이며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둘은 도저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하고도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있다. 경제 쪽으로는 분명 협력과 공존 관계이며, 개인적으로야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때문에 여전히 대립하고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바로 이런 세상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과 비슷한 맥락으로.. 개인간의 영적 세계에는 예수님을 두고, 생명의 기원을 두고, 성경을 두고 다양한 분쟁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도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 완전한 종전이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불씨는 언제든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얼마나 넘사벽급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췄는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건 혈과 육의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걸로 신자와 불신자끼리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싸운다거나, 한 신념을 남에게 폭력과 협박으로 강요한다거나, 그걸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다거나 해서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크리스천은 다른 불신자와도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롬 12:18).   그런데.. 종교 쪽 논쟁은 서로 싸워 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오고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감정만 나빠진다고 해서 아예 완전 입 다물고 말을 말고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고 선을 마냥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경의 판결대로라면 이건 또 다른 극단이며 크리스천의 직무유기죄로 빠진다. 성경을 읽다 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진술로 인해 그럼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은 딜레마가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리스천으로 최소한의 영적 생명력은 갖췄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개독안티와의 어떤 논쟁도 다 이길 방대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왕년에 간증 잃을 병맛 같은 행실도 많이 남겼다. 게다가 나 또한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성품을 다듬고 내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오늘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간구하고 노력을 할 뿐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복음이 무엇이고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제대로 알고서 거절하든가 반대하지, 삐쳐서 마음을 확 닫아 버리는 일은 없게 내 말에 너를 ‘위한다’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사실,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안 믿어지는 창조론이라든가 하나님의 경륜을 납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 힘으로 술· 담배를 끊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성경관· 윤리관 같은 사상을 인위로 개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을 위해 당장 가장 중요한 건 4번과 6번일 것이다. 일단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머지 믿음은 추가로 공급된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복음 전하다가 불신자가 1~3, 5번 같은 걸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 적당히 커트를 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 데에 끌려가면 힘만 빠지지 결론 절대 안 난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부족하고 여건마저 제각각 불공평(?)하게 타고나는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육신적인 스펙이 아니라 ‘믿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래도 공평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한 거다.   기독교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몇몇 전제조건 아이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에는 나름대로 상당히 건전한 원칙과 일관성과 체계가 잡혀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걸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안 믿는 건 개인 자유인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걸 남들이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이렇게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 신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2014-02-08 23:19:50 | 김용묵
안녕하세요? 뉴질랜드 최문선 자매입니다. 2014년이 밝았나 싶었는데, 벌써 2월의 3분의 1이 지나고 있네요. 여러분들은 올 초에 계획하신 일들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이곳 뉴질랜드는 낮에는 뜨겁고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합니다.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냄비에 찐 잘 익은 옥수수는 입안에서 알알이 톡톡 맛있게 터진답니다.  햇과일들이 예쁜 빛깔을 뽐내며 출하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대전 모임이 형성된다는 기쁜 소식이 들리는군요. 많은 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이라 여겨집니다.   저희도 벌써 7차 모임을 갖게 되어 <아래>와 같이 안내해 드립니다                     < 아    래 > 일자와 시간 :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저녁 7시 장  소 : ****번지 Awa road Kumeu Auckland(West Auckland) 내      용 : 개역성경분석 연 락 처: 027-779-8877(최문선)   이 내용을 보시고 뉴질랜드에 사시는 분들이 저희들과 함께하여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행복해지길 소망합니다.   이 뉴질랜드 모임을 위하여 늘 관심과 기도로 동역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함께 전합니다. 샬롬!          
2014-02-08 19:23:26 | 최문선
안녕하세요.  킵바이블 형제/자매님들   이전에 공지드린 "대전 흠정역 성경모임"의 장소와 일정이 여러 형제님들의 도움을 통해 다음과 확정되어 알려드리니 참고하셔서, 관심있으신 분들은 연락을 주시거나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장소 : 서대전역 매화실  (대전역에서 서대전역으로 바뀌었습니다)2. 일시 : 2월 15일 토요일 오후 3시 (3시에서 5시까지 논의 예정)3. 기타    1) 현재까지 참석 의사를 전달해주신 대전 및 청주지역 형제/자매님들은 총 17명입니다.   2) 회의실이 15인용이라 추가 참석하실 분은 미리 연락을 주세요.  공간은 충분하니, 여분의 의자를 추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 010-2415-7069,  hjkim1611@gmail.com   감사합니다.
2014-02-08 13:27:08 | 김학준
안녕하세요   자유게시판에 이런 협조 요청글을 올려서 죄송하지만, 관련된 많은 분들이 읽으실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글을 올리니, 여러 형제/자매님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공지사항에 공지된 내용이지만, 몇몇 형제분들이 이번 대전 모임을 제안했으며 대전 및 청주 지역에서 관심있는 분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같이 논의를 해보자고 해서 이번 모임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참여의사를 말씀해주신 형제님들을 어제 저녁, 대전에서 만나 모임을 가졌습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형제님들입니다.   본 모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 공지 사항에 있으므로 이것을 참조하시면 될 것 같구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578   2월 15일 대전 모임은 1차로 대전역 근처의 회의실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원 규모에 따라 가격차이가 있어 대략적으로 나마 참여 인원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본 게시글을 올립니다. 인원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되면 적정 크기의 회의실을 예약할 계획입니다. 모임 이후에 같이 저녁 식사도 할 예정이니 이런 준비를 위해서, 본 모임에 참석 의사가 있으신 분들은 아래 메일이나 전화 문자로 가능한 한 빨리 알려주시면 예약을 진행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연락처: 010-2415-7069, hjkim1611@gmail.com   감사합니다.   샬롬.
2014-01-25 09:13:38 | 김학준
할렐루야~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사도행전에 특히 이런 표현이 많은 것 같아요...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위에 기록된 것처럼 KJB는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되어있는데, 개역성경은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되어있는데..어떤 것이 바른 해석인가요? 못하는 영어이지만, KJB는 and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Ghost.NIV는 And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로 되어있습니다. 여기를 보면 성령님의 선물 같긷도 하구요... 아니며, 성령님의 선물 = 성령님....인지 궁금합니다.. 정동수목사님의 선포된 말씀으로 영혼의 자유함과 참진리를 깨닫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2014-01-21 15:48:06 | 이종철
구원은 디지털이다.애매모호한 아날로그적인 것이 아니다.다시 태어나는 것, 구원은 확실한 실체이지 애매모호함이 아니다.(요 3:3,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태어나지 않은 것은 0 이고, 태어난 것은 1이다.사람이 만든 컴퓨터는 확실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0과 1만을 사용하여 명령과 데이터를 형성한다.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체의 유전자 DNA도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 이라는 4가지의 염기를 사용한 디지털 정보체계 이다.이것들은 다시 A-T와 D-C와 만 결합되게 되어 있어 확실한 디지털 정보 체계로 명령과 데이터를 형성한다.컴퓨터와 생명체의 정보 전달 체계가 애매모호한 아날로그 체계라면 아마도 혼돈 그 자체 일 것이다.제대로 된 통계가 생성될 수 없고, 생명체의 재 생성도 불가능 할 것이다.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요 3:3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 3:4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 3: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우리는 육적으로 어머니의 양수인 물속에서 첫 번째로 태어났고 영은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우리의 죽어있는 영은 성령에게서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우리를 혼란하게 하였던 다음(벧전 2:2, 개정)의 성경 구절로 인하여 다시 태어남의 의미가 혼미해져 어디까지 자라나야 구원에 이르는 것 인지 알 수 없게 하는 아날로그적인 성경 구절을 바른 성경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벧전 2:2, 개정)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시인하고 다시 태어난 것은 영의 상태가 0에서 1로 바뀌는 단 1회의 사건으로 영이 다시 태어난 획기적인 사건이다.구원은 애매모호한 아날로그적인 사건이 아니고 죽었던 영이 산영이 된 사건이다.다음(벧전 2:2, 킹흠정)의 성경말씀 처럼 새로 태어난 아기 이다.그리고 말씀의 젖으로(성경말씀으로) 성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축복된 신생아 이다.(벧전 2:2, 킹흠정)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구주의 보혈로, 영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하나님 나라의 신생아!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른 복 받은 신생아 이다.(고후 7:10, 킹흠정)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함을 설명하셨다.(요 3:3,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 3:4,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 3:5,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 3:7, )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영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영원히 죽을 인생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하나님은 애매모호한 것을 실어하시고 확실한 것을 좋아 하신다.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라.애매모호한 혼돈 속에서 살지 말고 확실한 말씀을 붙들어야 구원받은 자의 영이 행복하다.(약 5:12, 킹흠정) 그러나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먼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라. 이것은 너희가 정죄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2014-01-21 11:32:22 | 허광무
  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 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2014-01-18 23:48:09 | 김상진
처음 인사드려요. 이곳에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동영상 설교와 자료들을 도움만 받다가 용기내어 글을 올립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며칠전 사랑침례교회로 전화를 걸어 무작정 정동수목사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어요.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그분께 말씀만 전달드리고 끊었습니다. 후에라도 정동수목사님과 꼭꼭꼭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결교단의 한 교회에 남편이 부목사로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사모이자 유초등부전도사, 그리고 영어성경학교 강사입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천주교와 기독교는 다르다'(?제목이 맞나요) 소책자를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 꽤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제 글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몰라서 참 조심스럽네요.   오늘도 평안하시고 답글 기다리겠습니다~~^^
2014-01-18 01:53:35 | 전소영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돈으로,(성경책이 너덜너덜해져서) 400주년 기념판을 구입했습니다. 이번에 고린도전서부터 다시 읽으면 흠정역으로 3독째네요! 3독! 아- 너무 기뻐요- 종종 일에 지치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답니다. "아- 말씀이 먹고 싶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에 완전한 말씀은, 인생의 사막길을 걷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또 항상, 킵바이블에 오면 좋은 글들이 많아 프린트해서 집에 가서 읽곤 한답니다. 전, 지금 동성애 반대소설을- 4년간에 걸쳐 쓰고 있는데요- 킵바이블에 있는 글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흠정역은- 제 글 실력을, 많이 높여주었고요- 소설 쓸 때- 흠정역에서 문장을 가져와 응용하여 쓰거든요- 아- 저는 정말 하나님 말씀 없인- 못 사는 사람이에요- 육신의 고픔보다 영에 고픔을, 채우는 것이 어느새 제겐 더 큰 기쁨이 되었으니까요- 
2014-01-16 15:04:50 | 신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