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죽은 윌리 리어(Willie Lear the Substitute)
위틀 소령(Major D. W. Whittle) 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노라(요한복음 15장 13절). 윌리 리어는 미국 미주리 주 팔미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때였고, 그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남부를 지지하였습니다. 북부의 세력은 팔미라 도시를 점령하고 그 구역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양쪽 세력 모두 끔찍한 폭동들을 행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 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수두룩이 기록되었습니다. 북군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집에서 쫓겨나 부당한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복수하고 적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부의 지휘관은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잡힌 시민들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게릴라 부대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리어도 그중에 한 명이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장군은 총살형을 받은 사람 중 열 명을 뽑았고, 나머지 시민들은 폭동이 그친 후 사면이나 추후 형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즉시 사형 받을 이 열 명은 제비뽑기로 뽑혔는데 다행히 리어는 거기에 들지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어의 이웃은 즉시 총살형을 받을 무리의 한명으로 뽑혔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이웃은 대가족의 가난한 가장이었는데 사형된 뒤 두고 떠날 처자식들 걱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이웃의 상황을 지켜본 리어는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어는 자기가 그 이웃을 대신하겠다고 장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열 명을 뽑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열 명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법률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 대신 대리자가 되어 죽겠다는 제의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삼 자 즉 사형 선고를 내린 자와 선고 받은 자 그리고 선고받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동의함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웃 대신 사형장에 나선 리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나머지 아홉 명과 함께 “발사!” 라는 외침과 더불어 소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리어가 흘린 피, 그리고 찢기고 망가진 그의 몸을 안으며 리어가 대신 죽어 준 그 이웃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빚졌구나. 나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해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까!” 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에게 떨어진 사형을 모면하였나요?” 라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는 대신 죽겠다는 사람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 자기가 행한 멋진 일들이 더 중요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무시하고자 했을까요? 또는 “아, 나는 나의 믿음과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인해서 살아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믿음과 나의 인격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고자 했을까요?
만약에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그 대리자의 값진 희생을 생략한 채 대답을 한다면, 그는 대신 죽어 줄 가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은 결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친구의 희생을 그렇게 무심히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살려 주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자기를 살렸다는 소식을 쉬지 않고 퍼뜨리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므로 당신의 모든 죄들이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서 당신은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삶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의 소유인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인한 구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구속자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떼놓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이루신 ‘대신 속죄의 죽음’ 이외의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다른 형태’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권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와 그분의 피 즉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그분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은 분’입니다.
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느니라(요10:11).
Taken from Gospel tract distributed by Pilgrim Tract Society, Randleman, N.C.
By Major D.W. Whittle
초역: 정아현
2013-06-05 14:04:44 | 관리자
아침에 제 아내가 읽으라고 준 글입니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같이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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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
(목회와 신학, 2004년 7월호)-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 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 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수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함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 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 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 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원본 글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4062?boardType=M®dt=20130604115719&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
2013-06-05 11:15:43 | 관리자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관한 66가지 사실
1. 잃어버린 자(that which was lost)[눅19:10]2. 길 잃은 양(sheep going astray)[벧전2:25]3.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without God in the world)[엡2:12]4. 멀리 떨어져 있는 자(who were far off)[엡2:13,17; 골1:21]5. 그리스도 밖에 있음(ye were without Christ)[엡2:12]6.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were not a people of God)[벧전2:10]7. 이스라엘 공영권 밖에 있는 외인(being aliens from the commonwealth of Israel)[엡2:12]8. 육체로는 이방인(Gentiles in the flesh)[엡2:11]9. 무할례자(Uncircumcision)[엡2:11]10.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낯선 자(strangers from the covenants of promise)[엡2:12]11.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는 외국인(foreigners)[엡2:19]12. 나면서부터 길을 잃고 거짓을 말함(they go astray as soon as they be born, speaking lies)[시58:3]13.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창6:5]14. 그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함(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렘17:9]15.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작정되어 있음(the heart of the sons of men is fully set in them to do evil)[전8:11]16. 불순종함(disobedient)[딛3:3]17.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음(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엡2:2]18. 이방인들의 뜻을 따라 행함(have wrought the will of the Gentiles)[벧전 4:3]19. 육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함(fulfilling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of the mind)[엡2:3]20. 정욕과 향락을 섬김(serving divers lusts and pleasures)[딛3:3]21.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숭배 가운데 살고 있음(walked in lasciviousness, lusts, excess of wine, revellings, banquetings, and abominable idolatries)[벧전4:3]22. 악의와 시기 속에 살고 있음(living in malice and envy)[딛3:3]23. 증오에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있음(hateful, and hating one another)[딛3:3]24.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요3:19]25. 사실 그 자신이 ‘어두움’임(darkness)[엡5:8]26.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마귀)를 따름(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엡2:2]27.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서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음(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고후4:4]28. 속임을 당함(deceived)[딛3:3]29. 십자가를 선포함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임(the preaching of the cross is to them that perish foolishness.)[고전1:18]30. 어리석음(foolish)[딛3:3]3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듦(he that believeth not God hath made him a liar)[요일5:10]32. 본성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고전2:14]33.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are of the works of the law)[갈3:10]34. 그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음(all our righteousnesses are as filthy rags)[사64:6]35.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않음(ye have not his word abiding in you)[요5:38]36.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아니함(he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고전2:14]37. 그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함(the carnal mind is enmity against God)[롬8:7]38.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they that are in the flesh cannot please God)[롬8:8]39.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롬3:23]40.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음(the wrath of God abides on him)[요3:36]41.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음(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th away)[시1:4]42. 사악한 행위들로 인해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enemies in your mind by wicked works)[골:21; 롬5:10]43. 정죄를 받을 것임(he that believeth not shall be damned)[막16:16]44. 사실 그는 이미 정죄 받음(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요3:17-18]45. 저주받은 자(under the curse)[갈3:10]46. 멸망하는 자(them that perish)[고전1:18]47. 마귀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devil)[요일3:10]48. 진노의 자녀(were by nature the children of wrath)[엡2:3]49. 진노의 그릇(the vessels of wrath)[롬9:22]50.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지 못함(had not obtained mercy)[벧전2:10]51.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임(ye shall die in your sins)[요8:24]52. 그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 이미 죽어 있음(who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엡2:1]53. 이름이 생명책에 없음(whosoever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계20:15]54.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he shall not see life)[요3:36]55. 불 호수에 던져질 것임(cast into the lake of fire)[계20:15]56.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자(having no hope)[엡2:12]
그러나…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God so loved the world)[요3:16; 롬5:8]58.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준비하셨음(he gave his only begotten Son)[요일2:2]59. 그의 죄는 용서될 수 있음(through his name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all receive remission of sins)[엡1:7; 행10:43]60. 그러나 그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음(not of works)[엡2:9]61. 그는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엡2:8]62. 그는 믿지 않는 분을 부를 수 없음(how then shall they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롬10:14]63. 그는 듣지 못한 분을 믿을 수 없음(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롬10:14]64.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음(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엡1:13]65.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원자로 믿기 전까지는 다시 태어날 수 없음(whosoever believeth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요일5:1]66. 이 죄인들의 이름은 ‘누구든지’임(whosoever)[요3:16, 행10:43]
2013-06-04 18:16:3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의정부에 있는 임마누엘 침례교회에서
7월 25일에 청소년 1일 캠프(컨퍼런스)를 엽니다.
http://ebc.or.kr
내용이 좋으니 아이들을 보내기 원하는 부모들께서는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담당은 이이레 목사님입니다.
샬롬
컨퍼런스 안내 Conference Information
일시 Date | 2013년 7월 25일(July 25, 2013)
장소 Location | 임마누엘 침례교회(Emmanuel Baptist Church)
주소 Address | (구)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760–3 우정프라자 8층
경기도 의정부시 장곡로 596번길 15 우정프라자 8층
주제 Theme |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세계(This is My Father’s World)
대상 | 초등학교 5학년 ~고등학교 3학년(5th~12th grade)
참가비 Registration Fee | 1인당(per person) 20,000원
입금안내 Bank Info. | 예금주 의정부임마누엘침례교회 계좌번호 NH농협 103–01–494756
문의 Contact | tel 010–9025–9155 e-mail upogrammos@naver.com Website http://ebc.or.kr
2013-06-04 17:13:08 | 관리자
혹시 서비스 개편으로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
2013-06-04 09:24: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금까지는 설교 및 강해의 경우 영상 파일과 음성 파일을 따로 올렸습니다.
또한 영상의 경우에는 wmv와 mp4 파일을 둘 다 올렸습니다.
그러나 wmv는 이제 거의 쓰지 않으므로 앞으로는 올리지 않고 mp4만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영상과 음성 파일 모두 다운로드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트래픽이 커져서 사이트 운영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상 시청을 원하면 같이 링크가 된 유튜브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모두 이렇게 하면 됩니다.
영상이나 음성 파일을 다운 받는 때에는 그림에 있듯이
위의 링크를 누르면 음성 파일이
아래 링크를 누르면 영상 파일이 다운됩니다.
조만간 작업하여 이 두 개의 링크를 없애고
음성 파일 다운로드와 영상 파일 다운로드 버튼으로 바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희 작업 팀에서 많은 양의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기적으로 설교 음성과 강해 음성 같은 메뉴는 없앨 것입니다.
하나에 음성 및 영상 다운로드와 유튜브 시청이 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운로드 버튼이 바뀌면 조만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6-03 17:47:01 | 관리자
제안 감사합니다.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샬롬
2013-06-03 15:30:13 | 관리자
복음의 핵심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매년 저는 학생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 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단 스물다섯 단어를 말해서 복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째 단어가 끝나면 그 환자는 죽게 됩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입니까?
과연 학생들은 이처럼 복음을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숨이 끊어져가는 그 사람이 올바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해서 그렇게 짧은 몇 마디 안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도 학생들이 풀어야 했던 그 문제로 돌아가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둘째, 복음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가 어떻게 그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1. 복음이 아닌 것들
1.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회의에서 “복음은 언제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을 포함하며 인간의 전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할 의무를 포함한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72년 1월 2일, p.12).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수년 전 복음전도자인 포드(Leighton Ford)는 아이오와 주의 데모인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두 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전하는 복음은 WCC의 입장과 흡사한 것으로, 복음은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미국의 수정 교회를 담당하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에서 영광으로, 자기 회의와 자기 정죄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으로 나가는 구원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슐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존중의 신학으로 선포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자기 존중: 새로운 종교개혁」(Self-Esteem: The New Reformation) p.161, 47).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3.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담당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갈보리로 초청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는 전제 하에서 제자가 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p.21)…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은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부르심이었다(p.21)…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질은 자아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15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Gospel)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인가?” 라는 물음이 뒤따릅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사람들에 관한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글자 그대로 ‘가스펠’(gospel)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서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왕국의 복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3:1-2; 4:17; 10:5-7 등). 이것은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는 그 왕국에 대한 그분의 참된 제안을 공적으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복음은 천년왕국 곧 다윗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7년 환난기에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선포될 것입니다(마24:14).
3.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의 셋째 용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Gospel of the grace of God)입니다(행20:24). 이 복음은 서신서들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즉 모든 신자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어느 저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좋은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복음전도: 성경적 접근」(Evangelism: A Biblical Approach), Cocoris, p.60).
라이리(C. Ryrie)는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나오는 복음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익한 분석을 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분께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묻힌 사실은 그분의 죽음이 사실임을 입증한다…그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죽으셨다…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이토록 큰 구원」(So Great Salvation) p.39).
그렇다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제안하십니다. 죄인은 단순히 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행16:31). 그러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그것에 속한 모든 복을 값없이 허락해 주십니다(엡1:3).
3.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WCC나 포드(Leighton Ford)처럼 복음을 ‘죄인을 대속하는 구원의 복음’과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복음’으로 나눠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슐러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복음으로부터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맥아더처럼 구원과 성화를 혼동하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 of Christ)는 사실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제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신학적 물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이 질문은 원래 라이리 박사의 신학 과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똑똑한 몇몇 학생들은 보통 이 물음의 대답으로 스물다섯 단어로 표현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답을 제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 대답에서 부족한 것은 명확한 복음 제시에 필요한 요소들 중 첫째 요소입니다.
완전하면서도 간결하게 복음을 제시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문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예비이며 셋째는 개인의 구원 획득입니다. 첫째로, 사람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며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고 자기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몸소 짊어진 ‘죄인들의 대속 헌물’이십니다. 여기서 대속(代贖)이란 대신 속죄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음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히2:9). 하지만 그 구원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결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은 개인적으로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모두에게 값없이 제시된 구원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 제시에 필요한 이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비추어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한 후에 저는 ‘사람의 문제’와 ‘하나님의 예비’와 ‘개인적인 획득’을 모두 포함시키면서 어떻게 스물다섯 단어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보여 줍니다.
친구여,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신뢰하기 바랍니다.Friend: You have sinned. But Christ died for sinners and rose again. Trust Him alone and He will save you eternally. Do it now!
간략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시할 때 마땅히 포함해야 할 내용과 초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명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신학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복음의 증언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복음 사역을 맡기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는 그들이 세련되고 잘 교육받은 신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천박하거나 무식한 촌뜨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신학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 넘치는 사람이거나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예 소질이 없거나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께서 찾는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도구 곧 그분께서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보화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질그릇이다(「복음과 복음사역」(The Gosple and Its Ministry), p.6-7).
우리의 책임은 모든 창조물에게 구원자를 알려주고 죄들의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것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그 일을 형통하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6-03 15:27:16 | 관리자
안녕하세요 관리자님.
병점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일반 성도입니다.
정동수 목사님과 흠정역성경을 그리스도예수안에을 통해 알게 되었고 성경지킴이 사이트도 꾸준히 보고 있습니다.
물론 흠정역 성경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메일을 드린 이유는 바로 흠정역 성경의 확대 때문입니다.
흠정역 성경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기에 무엇보다 인식의 전환과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C3TV 사이트 웹바이블로 제공되던 것도 중단되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흠정역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줄었던 것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보다 더 좋은 기회들이 생기고 있구요.
이펍이나 안드로이드로 무료앱을 제공함으로 매우 유용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저는 아이폰이라 아직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흠정역 확대를 위해서 아이폰 안드로이드폰앱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앱을 통해서
흠정역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youversion이라는 앱인데요. 세계적으로 5천만 앱다운로드를 기록하고 있는 인기 앱입니다.
국내 사용자도 매우 많구요. 아이폰앱 카테고리에서도 참고 부문에서 거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애용하는 앱이고 성경앱으로는 유일하게 사용하는 앱입니다.
단순 성경읽기 제공 뿐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사용자간의 공유가 매우 활성화된 앱입니다.
따라서 흠정역을 youversion에 제공한다고 하면 기존 유버전 사용자들이 흠정역을 많이 알게되고 읽다가 보면 그 진가를
반드시 알게될 것입니다.
유버전에 현재 개역한글과 새번역 그리고 현대인의성경이 제공중인데 이중에서 무선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은 개역한글 뿐이므로 흠정역이 다운로드 가능한 오프라인모드를 지원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될 줄 믿습니다.
부가적으로 많은 사용자를 가진 성경이 당연히 판매도 많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미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오다가 그래도 혹시라도 배포 결정에 도움이 하는 생각에 적어보았습니다. 긴 내용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3-06-03 10:19:03 | 이준석
안녕하세요?
오늘(13년 6월 3일 오전) 새 파일을 올렸습니다.
주말에 한 자매님이 교정을 보시고 알려주셔서
몇 페이지에서 오탈자를 고쳤습니다.
인쇄되기 전에 알려주신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새 파일을 다운받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6-03 07:43:49 | 관리자
며칠간 자매님께서 올리신 이 글과 여러 형제 자매님들의 글들을 읽고 되세기며, 정말 많이 슬프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많은 말씀 구절들, 나의 신앙관, 깨달음... 그래서 더욱 슬펐습니다. '공학 박사'로 '교수'로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평범한 삶을 사실수 있는 정동수 목사님.그러나 이 지리하고 끝이없는 영적 전쟁터에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의 고달픈 삶'을 택하신 목사님과 그런 목사님과 함께 이 사명의 길을 함께 하시며 곁에서 지켜 보시는 사모님과 따님들...그러나 무었보다 꼼꼼하고 깐깐하시며 왜 말씀에 '없음'이나 '혹은 어떤 사본에는'이라는 문구가 있을까? 너무나 마음에 걸리고 납득이 가질않아서 하나님의 섭리로 온전히 보전해 주신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찾아 뜻이 맞는 분들과 모여서 출판사를 여시고 성경을 번역하고 어찌보면 '바른 성경'이 뭔지도 모르고 아무도 관심없던 한마디로 (바른 말씀의 불모지)와도 같던 한국 땅에 '진리에 목 마르고 갈급한 영혼들'을 향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외치라고 정동수 목사님을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들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지지 못한 각 사람들의 자아들로 인하여 (창세기6장6절 의 말씀 처럼)얼마나 슬퍼 하실까? 를 생각하니 며칠간 밤잠이 오질 않습니다. 지난 5년간... 저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이 사이트를 통하여 참된 진리를 알게 되었고 멀리서 묵묵히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지켜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더 알고자 발버둥치며 살았고, 지난주에 5년 만에 처음 '사랑침례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저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 하나 때문에 그 어떤 분도 실망 하거나 상처를 받으시는 일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다녀 왔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성경 말씀 66권을 모두 암송하고 말한다 하여도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빌립보서2장5절)의 말씀 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논쟁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 와도 같은 무의미한 '설전'으로 끝날것이며, 이 킵바이블 사이트를 지켜보고 계시는 우리가 미처 모르지만 하나님과 정동수 목사님과 킵바이블 사이트를 사랑하시는 전국과 전 세계의 많은 분들께 또다른 실망을 안겨 주지나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아무쪼록 두서없는 저의 몇마디의 글로 인해서 상처 받으시는 분들이 없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거나 불쾌하셨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2013-05-31 19:55:08 | 김건
와, 정말 유용한 책자입니다. 감사합니다.
2013-05-31 13:05:13 | 김재근
안녕하세요?
이번에 교회 자매님 남편의 장례를 치르면서 장례용 찬송과 말씀을 모은 소책자가 필요한 것으로 보여
16쪽의 소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장례 예식에 오면서 찬송과 성경을 가져 오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예식을 치를 때 이런 것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 뒤에는 간단하게 복음으로 초대하는 전도 말씀도 포함시켜
오시는 분들이 - 특히 유가족들이 - 장례식 내내
가지고 다니면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안의 찬송과 말씀 자체가 은혜가 되니 가끔씩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대로 인쇄하든지 복사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3-05-31 11:56:49 | 관리자
좋은 자료들을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DSJ
2013-05-30 11:55:04 | 관리자
(계.8:13, 요.16:13)말씀과 연결시켜, 마지막때에는 육체를 가진 사람을 구원시키기위해 해돋는 한국땅(계.7:1)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하신 진리의 성령을 육체를 입게하시고 택하신자들을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일꾼인 추수꾼 천사로 오신다는 말씀을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이 없던 1970년~ 때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생물에게 각각 여섯날개가 있으니 일곱천사중에 한천사가 일하면 여섯이 날개가 되어 도운다는 말씀을 옳다고 믿게 되었던 겄입니다. 개역성경에 변개된 말씀들을 참진리로 믿고있는 분들은 지금도 휴거를 믿지않고 죽을육체, 썩을 몸이 변화되어 천년왕국에 들어가 영생할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말씀 계.20:4~6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 영혼과, 짐승의 표를 받지않은 자들은 동일인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말씀이 개역성경으로 잘못된 해석과 믿음을 가진 분들이 속히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말씀을 보고 바른 신앙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3-05-29 21:31:23 | 김창수
개역성경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마.13:34 절 말씀에서 개역성경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었고,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에는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마치 성경말씀이 비유로 기록되었기에(특히 예언의 말씀) 진리의 성령(요.16:13)이 마지막때에 오셔서 장래일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을 참진리로 굳게 믿고 신앙하게 되는것이지요. 흠정역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가 없이는 말씀하지 아니하셨고 하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것이 허락된 제자들(마.13:36)에게는 가라지 비유를 밝히 말씀 해 주셨습니다. 저는 계.15:5절에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천사(추수꾼)가 성전으로 부터 나와서 택하신자 들을 하늘 이끝에서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개역성경의 말씀을 믿고 20여년을 신앙했습니다. 이만희 씨는 제가 과천에 들어가기 4개월전에 3년6개월이 지났는되도 이루어 지지 않음으로 이미 탈퇴하고 장막성전에서 나간 상태였지요. 계.4:6절에 네짐승에 대해 첫째짐승 사자, 둘째 짐승 송아지, 셋째짐승은 사람의 얼굴을 가졌고, 넷째짐승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더라. 는 말씀을 사.34:16절에 기록된 말씀 빠진것이없고 짝이 없는것이 없다는 말씀을 증거 하면서 사자= 사명자(렘.4:7), 송아지=일꾼(고전.9:9), 사람=육체(창.6:3), 독수리=성령
2013-05-29 21:04:42 | 김창수
형제를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시는군요..
2013-05-29 19:17:00 | 유해용
예수님을 영접한 저의 친언니는 더욱 사랑이 많아졌습니다.(언니가 읽고있는 성경은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이 아닙니다)
워낙 이기적인 저도 흠정역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언니와 안부전화 속에서...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언니를 볼때 언니가 성경말씀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잘못되어진 말씀부분으로
불안해하는구나 ..느껴져 그냥 슬퍼질때가 있습니다.
내 언니가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을지언정 불안해하며 생활하지 않길 바랍니다.
2013-05-29 16:43:15 | 목영주
제귀에는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워셔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형제님들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그의도는 다 같은 말씀들을 하고 있는것이라 여겨지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이렇게생겼어 아니야 저렇게 생겼어하고 논쟁을 하는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다같은 코끼리를 만지면서요 진리에 어긋나는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했고 무조건 사랑을 말하는것이 아니라했는대 또역시 그부분만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는것은 각개인의 생각의 폭이라 어쩔수 없는것 같읍니다 주님은 이런것으로 논쟁을 하는것을 기뻐하시지 않음으로 이부분에대해선 다시 글을 올리지 않겠읍니다 제가 말하고자하는것은 원칙적인것을 말하는것입니다 보시는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읍니다 진정한 진리와 진정한사랑은 본질상같은것입니다
2013-05-29 15:24:08 | 호소연
주신 의견에 감사합니다.진리와 사랑 사이에서 늘 고민이 많습니다.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그런데 너무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구원만 받으면 됐지, 더 이상 복잡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 됩니다.그런 생각 때문에 오늘날 교회들이 무너지고 진리가 어지러운 상태가 되었으므로 진리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진리를 너무 중요시하다 보면 성도간의 교제나 스스로를 성찰하고 성장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그렇다고 진리를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말씀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그래서 성경지킴이 킵바이블의 정체성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실천과 적용은 각자의 몫입니다.그러므로 주신 의견은 감사하나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일까지 지적하시면 곤란합니다.특히 어떤 것이 진짜 성경이냐가 중요하지 않다면 성경지킴이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며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도 별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 믿음의 이유 자체가 다른 종교인들처럼 착하게 서로 사랑하며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유연성이 종교다원화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본 사이트의 취지를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2013-05-29 14:17:1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