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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8 12:05:2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주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 2시간 강해 영상은 다음 주에 올리도록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몇 주에 걸쳐  한마음 미션에서 매주 목요일에 성경 맥잡기 시리즈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요한계시록, 모세5경의 5권, 여호수아, 사시기, 욥기, 이사야,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등의 책을 각각 2시간 정도에 걸쳐 설명하려고 합니다.   핵심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면 독자들께서 성경을 읽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28 12:01:42 | 관리자
평가 및 반론: (1)   성경 내장 사전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의 의미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인데, 나중의 창 9:1에서 뜻을 정의 내지 확신하고 그것을 창1:28에 거꾸로 가져와서 그 곳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역적용하는 원칙 위반이지 않은가요? 그 논거는 제척됩니다. (2)   흠정역에서는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채우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채택했는데, 위의 논거에서는 다른 의미 ‘다시 채우다’를 적절한 번역이라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가 다수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성’은 어떤 언어에서나 다 있지만, 이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 ‘채우다’에 ‘다시’라는 반복 개념만을 추가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다의성이란 서로 다른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다수 있는 것이고, 의미가 같은 경우에도 사용처가 다른 경우에라야 혼란이 초래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사용처에 동일한 단어를 반복성만 추가해서 쓰는 다의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 예화를 보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손님): 야, 웨이터. 물 한 잔 블라블라. (웨이터): 네. (종이컵에 물 한 잔 채워서 가져다 줍니다.) (손님):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종이컵을 테이블에 놓았는데, 물 컵에 그만 파리가 한 마리 빠져버렸습니다. 에잇! 하며 테이블 아래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야, 웨이터 물 한 잔 블라블라. (웨이터): 갔다 드렸잖아요. (손님):   물 한 잔 다시 블라블라란 뜻이야 임마. (웨이터): 그럼 애초에 물 한 잔 다시 블라블라라고 하셨어야죠. 사람 헷갈리게. (손님):   이 자식이 뭐? 블라블라는 다시 블라블라란 뜻도 있잖아. (웨이터): 그건 그렇지만, 그냥 블라블라라는 뜻도 있잖아요. 같은 단어를 쓸 거면          다시 블라블라라고 하셨으면 오해가 없죠. (손님):   뭐야 임마? 꼬박꼬박 말 대답이야? 네가 오해할 거라고 내가 어떻게 알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지! (네, 결국 자기가 개떡같이 말했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말았습니다.)   위의 예화에서는 블라블라란 단어가 가져와입니다. 가져와란 단어가 그냥 가져와란 뜻도 있고 다시 가져와란 뜻도 있어서 같은 상황에서 그 단어를 쓴다면 저런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에는 ‘채우다’도 있고 ‘다시 채우다’도 있는데 전자는 ‘사람이나 동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fill’은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수정안으로 제시하는 후자의 의미는 전자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어떤 장소에 사람이나 동물이 가득 차는 것은 단시일 내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격이 아닙니다. 일회성이죠. 특히 창세기 1장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면에, ‘다시 채우다’가 하나의 단어로 쓰이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반복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fill again’처럼 두 단어로 길게 말하지 않으려고 단어 하나에 반복 개념을 포함시켜 간편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 사용되는 경우란, 컵에 물을 다시 채운다든지, 바구니에 사과를 다시 채운다든지처럼 손쉽게 단시간 내에 반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의미라야 합니다. 창 1:28에서처럼 온 땅을 사람이 다산하고 번성하여 채우는 것과 같은 장기간이 소요되는 상황에는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혹시라도 재창조를 전제로 하고 사람이 온 땅을 다시 채우라고 표현하려면 ‘replenish again’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3)   위의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에서 ‘replenish’의 ‘다시 채우다’란 의미를 땅을 채우는 것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설사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다른 불합리가 드러납니다. 다음 예화를 보십시오.    [다시 식당] (손님):   야, 웨이터. 물 한 잔 가져와. (웨이터): 네 (손님):   (조금 있다가 다른 웨이터에게) 야, 웨이터 물 한 잔 다시 가져와. (웨이터): 네? 제가 언제 갖다 드렸던가요? (손님):   아까 다른 웨이터가 가져와서 한 잔 마셨단 말이야, 임마. (웨이터): 에이 그럼 다시란 말을 하지 마셔야죠. 사람 헷갈리게. (손님):   뭐야 임마? 내가 다시 먹는 거니까 그렇게 말했지. 그런 것도 짐작 못해?          군소리 말고 물이나 가져와! (웨이터):  (혼잣말로) 에이, 자기가 잘못 말해 놓고 괜히 나한테 뭐라고 그래. ** 아마도 웨이터는 기분 좋게 물을 갖다 주지는 않을 겁니다.   재창조를 전제로 하고 ‘다시 채우다’라는 뜻으로 읽어 보면, 비록 하나님께서는 다시 채우게 하시는 것일지라도, 아담과 이브는 처음 채우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채우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바른 화법이 아닙니다.    결론: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란 의미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채우다’란 의미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22절에는 ‘fill’을 쓰고 28절에는 ‘replenish’를 사용하신 이유를 밝히기 위해 세 가지 단서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검토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 문장의 주어가 사람 또는 하나님이면 ‘replenish’를 사용하시고, 주어가 동물이면 ‘fill’을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 때의 ‘replenish’의 의미는 ‘채우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5-04-27 20:14:20 | 최상만
그래서 창 1:22과 1:28절을 다시 찾아서 읽어 봅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22절에서는 동물들에게 바다를 채우라고만 하시고 별 다른 추가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28절은 땅을 채우라고 하신 다음 추가로 더 말씀하신 내용이 있네요. -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그러고 보니, 땅을 채우는 사람은 앞서 창조하신 생물들에 대한 정복자요 지배자네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애초부터 그렇게 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2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니까,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다른 창조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하셨구나,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별한 백성’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사람은 다른 창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창조물로 보시는 것이네요. 그래서, 사전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한데 묶어 ‘replenish’로 사용하는 것으로 표시해 두었지만, 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이 채우는 것은 ‘replenish’, 동물이 채우는 것은 ‘fill’로 구별하기를 원하셨네요. 딤후 2:15에서 성경 기록을 바르게 나누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나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경의 내장 사전에 ‘replenish’의 의미를 “사람이 채우다”라고 정의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 기록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이 정의대로  해석하면 될까요?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창 9:1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땅을 채우라고 하시는 상황이니까 ‘replenish’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은 동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의 내장 사전 정의가 여기에서도 바르게 적용된다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성경의 다른 용례들도 모두 확인해 보겠습니다.   KJB 흠정역 성경 replenish (창 1:28, KJV)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1: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창 9:1, KJV)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사 2:6, KJV) 『Therefore thou hast forsaken thy people the house of Jacob,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2:6) ¶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주어가 사람(주의 백성) 수동태 (주어 + 동사) (사 23:2, KJV)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thou whom the merchants of Zidon, that pass over the sea, have replenished.』 (23:2)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렘 31:25, KJV) 『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31:25)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주어가 하나님 (주어 + 동사 + 목적어) (겔 26:2, KJV) 『Son of man, because that Tyrus hath said against Jerusalem, Aha, she is broken that was the gates of the people: she is turned unto me: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26:2)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겔 27:25, KJV) 『The ships of Tarshish did sing of thee in thy market: and thou wast replenished, and made very glorious in the midst of the seas.』 (27:25)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replenish’가 사람 또는 하나님이 주어인 문장에서 사용되었고, 동물이 주어인 용례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정의한 ‘사람이 채우다’란 뜻에 배치되는 용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로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사례이지만, 개념상으로는 배치되지 않습니다.   ** 참고: 사전에서는 ‘replenish’의 사용 예로서 “사람이 ~으로(사람 또는 동물로) 어디를 ‘채우다’”라는 형식으로 해서, 채우는 대상을 ‘with + (동물 또는 사람)’의 부사구 형태로 사용한 예가 나와 있기도 합니다. (예: I have replenysshed my pastours with catall, and my pondes with fysshe.) 그러나, 성경의 용례는 이처럼 부사를 동반하여 ‘채우다’를 표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모두 부사구의 목적어가 주어가 된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어는 복수입니다. 수동태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수의 그 무엇이 주어를 ‘채우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도 주어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쓸 수 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22절은 목적어가 바다의 물들(the waters in the seas)이고, 28절은 땅(the earth)입니다. 바다를 채운다는 것은 바다 속을 채운다는 것이고, 땅을 채운다는 것은 지면 위를 채운다는 것이니까, 두 가지의 채우는 용기가 서로 다른 형태인 것은 사실이나, 채우는 동물이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들이 채우는 곳이 자기가 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또 이 목적어가 달라짐으로 인해 ‘채우다’의 의미로 달리 사용되는 동사를 찾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겠습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논거:  흠정역 번역에서는 22 절의 ‘fill’을 ‘채우다’로 번역하고, 28 절의 ‘replenish’도 동일하게 ‘채우다’로 번역하였는데, 동사의 단어를 다르게 쓴 이유가 있으므로 동일하게 번역하지 말고 ‘replenish’의 여러 의미 중에서 다른 뜻을 채택하는 것이 두 동사를 다른 단어로 번역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성경 기록들의 다른 구절들을 참조해 볼 때 세상은 재창조되었으며, 옛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창조된 사람이 땅을 채우는 것은 다시 채우는 것이다. 창 9:1에서도 노아의 홍수로 땅의 동물들을 쓸어버리신 후 하나님께서 똑같이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성경 내장 사전에서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replenish’의 여러가지 뜻 중에서도 이에 부합하는 뜻(다시 채우다)이 있다.   수정안: ‘채우다’로 해서는 안 되고, 당연히 ‘다시 채우다’로 번역해야 한다.   평가 및 반론: (1)   성경 내장 사전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의 의미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인데, 나중의 창 9:1에서 뜻을 정의 내지 확신하고 그것을 창1:28에 거꾸로 가져와서 그 곳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역적용하는 원칙 위반이지 않은가요? 그 논거는 제척됩니다. (2)   흠정역에서는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채우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채택했는데, 위의 논거에서는 다른 의미 ‘다시 채우다’를 적절한 번역이라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가 다수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성’은 어떤 언어에서나 다 있지만, 이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 ‘채우다’에 ‘다시’라는 반복 개념만을 추가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다의성이란 서로 다른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다수 있는 것이고, 의미가 같은 경우에도 사용처가 다른 경우에라야 혼란이 초래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사용처에 동일한 단어를 반복성만 추가해서 쓰는 다의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 예화를 보기 바랍니다.  
2015-04-27 20:12:10 | 최상만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채우라’의 영어 단어 ‘replenish’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서 이 영어단어의 뜻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두 절을 비교해 보면 우리말 번역은 둘 다 ‘채우다’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fill’과 ‘replenish’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fill’도 ‘채우다’, ‘replenish’도 ‘채우다’니까 그렇게 번역했겠고, 또 히브리어 원문에도 두 곳에 동일하게 같은 단어 ‘말레’가 사용되어 있으니까 표면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하면서 한 곳은 ‘fill’, 다른 곳은 ‘replenish’로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을 했고, 흠정역 성경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썼는데 왜 같은 우리말 단어로 번역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최종 권위로 믿는데 그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취지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는 행동 또는 동작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고, 한국은 감정이나 느낌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이 파랗다고 해도, 영어로는 blue, 퍼렇다고 하는 말도 blue, 푸르스럼하다고 하면 뭐라고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영어로는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등등 다양한 단어들을 우리는 모두 ‘타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맙니다. 그래서 영어를 번역할 때 다양한 행동을 달리 표현하는 영어 단어들을 우리말로는 일일이 구분해서 번역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기행문을 쓰면서 집을 나서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는데 “처음에는 택시 타고 버스터미널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페리 터미널까지 가서, 거기서 배 타고 제주도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한라산 기슭까지 가서, 거기서 자전거 빌려 타고 한라산 관광 코스를 돌아다녔다.”라고 썼다면,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중에서 상황에 맞는 단어들을 골라서 쓰겠죠? 그런데, 이렇게 번역된 영어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다고 합시다. 서로 다른 이 단어들을 모두 ‘타다’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죠?   창 1:28의 ‘replenish’는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창 1:22의 ‘fill’도 같은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읽는 사람이 히브리어 성경과 대조하면서 그 곳을 읽다 보니 한 곳은 ‘fill’로, 다른 곳은 ‘replenish’로 쓰여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말레’로 동일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에게 단어가 다르면 뜻이 다른데 왜 ‘말레’라고 똑같이 썼느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영어로는 다른 단어를 썼더라도 우리말로는 같은 단어 ‘채우다’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너희는 구분해서 써라. 우리는 구분 안하고 쓴다. 우리 말로는 같은 단어라서 구분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어가 발달하기 때문에 원문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 단어라 할지라도 후대에 와서 그것을 구분해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였다면,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분해서 표현하기를 원하셨다면, 어떻게든 구분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말레’란 말로 표현할 당시에는 개념상으로는 달리 생각하지만 용어가 ‘말레’라는 단어만 있어서 그 다른 개념들을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겠지만, 그것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영어로 옮길 때 다른 개념을 명확히 드러내도록 표현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면, 우리말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그것을 우리말이 수용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겠습니다. 단, 개념 자체가 정말로 다른 개념이라서 다른 단어로 구분해서 표현했는지는 먼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이면 성경의 첫 장입니다. 거기서 ‘fill’이라는 단어가 22절에서 처음 나오고, ‘replenish’라는 단어가 28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우리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보통은 사전을 참고합니다만, 성경의 단어는 성경이 스스로 사전의 역할을 하는 ‘내장 사전’ 기능을 중시합니다. 세상 사전이 알려주는 뜻을 참고로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어는 하나님의 글(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쓰셨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기가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들을 통해 말을 배우고, 하나 하나 단어의 뜻을 감으로 느껴서 체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말을 배우기 위해 사전을 참고하면서 부모가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른이 사전을 보아 가면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습득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사항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파악하면서 하나님께서 쓰신 단어들의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어린 아기의 언어 습득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그런 중에도 곳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나 표현 이 있으므로, 그러한 상황이 최초로 나올 때부터 세심히 주의해서 하나님께서 그 단어나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시고, 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위의 22절과 28절에서 다같이 ‘채우다’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두 군데에서 다른 단어를 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파란색 단어들입니다). 이럴 때 “왜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하셨는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전에 뒷 부분에 나오는 성경 기록의 용례를 먼저 참고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대로 보아야 나중의 용례로 인한 영향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문장을 자세히 비교해 보겠습니다.   (비교표)   (1)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동사 fill replenish 주어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 (동물) 남자와 여자 (사람) 목적어 the waters in the seas the earth   위의 비교표를 보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의 단서들을 하나씩 검토해 봅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 비교표를 보면 문장 (1)은 주어가 동물이다. 문장 (2)는 주어가 사람이다.   ** 이 비교를 통해 “동물이 채울 때는 ‘fill’, 사람이 채울 때는 ‘replenish’로 구분해서 사용하는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제 사전을 참고해 봅니다.   1.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Ladies and gentlemen, please replenish the hall tonight.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밤 홀을 채워 주십시오.   2.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 [다시 채우다] Susan was always ready‥to replenish the wallets. 수전은 지갑들을 다시 채우기 위해 항상 대기 상태였다.   사전의 의미 ‘1’을 보면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라고 사용 제한이 보입니다. 즉, 사람 또는 동물이 아닌 것이면 ‘채우다’라는 의미로 ‘replenish’를 쓰는 것은 잘못된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황 비교표의 문장 (2)는 사람이니까 ‘replenish’를 쓰면 바른 사용법이고, 그 뜻은 ‘채우다’가 되는군요.   그런데, 상황 비교표의 문장 (1)은 동물이니까 사전에 따르면 역시 ‘replenish’라도 되는데 ‘fill’이 사용되었네요. 처음에 이 단어들을 검토할 때에는 ‘fill’은 별 문제없이 넘어가고 왜 ‘replenish’가 사용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면 ‘relenish’를 쓴다는 것 때문에 문장 (2)는 당연한 사용법이고, 오히려 왜 문장 (1)에서는 ‘replenish’가 아니고 ‘fill’이 사용되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2015-04-27 20:07:23 | 최상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2015-04-25 23:06:30 | 최상만
성경의 문체   (1)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 (경주 고적 답사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어 경주를 찾았다. 가는 차편에 무르익은 산야도 구경할 겸 부산 해운대역에서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타는 사람들이 있는지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나처럼 관광하러 나선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이 여기 저기 몸에 지고 이고 타서는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 쿵, 쿵, 철커덕 , 철커덕, 쿵, 쿵 어릴 적 수학여행 갈 때 탔던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   (2) 드디어 토함산 정상에 오르다   버스가 석굴암까지만 운행하고 토함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가야 한다고 해서 석굴암을 둘러본 뒤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이것 저것 요긴하지 않은 무거운 것들은 배낭에서 꺼내어 버렸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앞서 가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세가 드신 분들은 길 옆에 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래도 아직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이라 내친 김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쉬지 않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이제 막 피로가 쌓여 지치나 보다 하는데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여기서 쉴 수가 없어 마지막 힘을 내어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가니, 오! 눈 앞에 탁 트인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저 멀리까지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토함산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는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속에 실렸어라 흙이 되어 남았어라님들의 하신 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 아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쳐라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향해 뻗었어라팔을 든 채 이대로 또다시 천년을 더하겠어라세월이 흐른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천년 더한 이가슴을 잊고 서게 아 아   (3) 해외 조기 교육 일화   우리 집이 호주로 이민 온 것은 큰 딸이 5학년 때였습니다. 아이들 영어 습득을 생각해서는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큰 딸이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부모들 말을 잘 따라서 학교 다녀 와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정확한 발음이 잘 안 되는 단어는 혼자서 짬나는 대로 몇백 번씩 중얼거리며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큰 딸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가고 공부도 곧잘 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 웬만큼 원어민 발음 가까이 영어를 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오후에 바깥에 나가서 있던 딸아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바깥에서 엄마랑 저녁 식사를 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메뉴니 시간이니 장소니 이야기를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는,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저는 휴대폰 소리가 커서 다 들렸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가 멋적은 듯이 “얘가 영어가 웬만큼 되니까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이 “혀가 꼬인다”고들 하죠. 두 가지 언어의 개념이 섞이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Come together with Dad.”라고 할 건데, ‘with’ 다음에 사물이 나오면 ‘가지고’라고, 사람이 나오면 ‘함께’라든지 ‘데리고’라고 해야 하는 걸 혼동해서 말이 헛나왔나 봐요. 다행히, 그런 고비를 지나고서 지금은 우리말도 영어도 막힘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위의 세 편의 짧은 이야기 중 두 편은 기행문 형식이고, 마지막 한 편은 수필 형식입니다.   기행문 형식의 두 글은 제목을 “~하다” 형식으로 적었는데, 글의 제목으로 흔히들 이렇게 동사 원형을 쓰죠.   글의 내용을 보면, 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에 현재형 표현이 섞여서 나옵니다. (1)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처음에는 과거형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현재형으로 가버렸습니다. (2)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 과거형으로 했다가 현재형, 또 과거형으로 갔다가 현재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글들을 읽으실 때 부자연스럽다거나, 문법(시제)이 틀렸네 하면서 읽으신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제를 일치시켜야 올바른 글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초등학생들이 글을 배우는 단계가 아니라면 글의 성격에 따라, 또 글의 전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의 사실 속에 현재형 시제를 섞어서 쓸 수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글의 재미나 몰입도를 높여 줍니다. 그래서, 어법상으로 이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수사 기법 또는 표현 기법이라고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마치 현재 사실처럼 묘사 또는 표현함으로써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글 속에 몰입하게 하는 기법이지요. “기행문을 쓸 때는 현재형으로 써라.” 작문 교사의 작문 지침입니다.   마지막 글은 기행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느라 글을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현재형으로 써진 부분이 있습니다.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처럼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글이 써지고, 읽으시는 분들도 했습니다, 웃었습니다, 했습니다로 쓴 것보다 더 현장감있게 읽게 됩니다. 마치 옆에 함께 있어서 보는 것처럼요.   이렇게 과거 사실인데 현재형으로 썼다고 해서 그 글을 읽는 독자가 현재 사실인가 보다 하고 읽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볼 때, 큰 것일수록 더 실감나게 보며,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에 가서 대형 TV를 보면서 웅장한 사운드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두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 앞에서 펼쳐지는 영화 화면의 스토리를 현재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생생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현실처럼 느낄 지언정, 그 장면들이 과거에 영화 촬영장에서 찍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과거 사실을 현재 사실로 기술했으니 잘못한 거다 고쳐라” 이러면 정말 갑갑한 노릇이죠.   이러한 원리로 성경 번역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어체를 사용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보다 생생한 현장감과 경우에 따라서는 장엄함을 전달하려고 수사 기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 성경 말씀 마 3:13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은 과거 사실이지만 시제를 과거로 해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로 하면 잘못된 우리말 표현입니다. 14절도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가 올바른 우리말이지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로 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였으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어 그에게 이르셨으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셨으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였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셨을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왔었어 자기 위에 내려앉았는 것을 그분께서 보셨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었어 이르셨으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위의 두 가지 번역을 각각 차분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고 보다 실감나는 번역입니까? 제가 읽어 보니 (2) 번 번역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지나간 과거 이야기가 되어서 현실감도 안 나고 우리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1) 번 번역을 읽으시면서 그 내용이 현재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아니면 과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현재 사실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를 교차 사용(시제 교체 기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문장은 원활하게 하면서도 뜻은 손상을 주지 않는 뛰어난 표현 기법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양치는 하지 않고 대신 가글만 하고 세수는 간단하게 하고서는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먹고 전철 타지 않고 택시 타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영어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  Because I got up late this morning, I did not brush my teeth, but just gargled with water instead of it and washed my face quickly, and ate only a piece of bread and butter, and went to my office not by subway but by taxi.   이 영어를 다시 시제를 정확히 살려 우리말로 직역 형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나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양치를 안 했고 그 대신 물로 가글만 했고 빨리 세수했고 버터빵 한 조각만 먹었고 전철을 탔지 않고 택시 탔고서 사무실에 갔다.   번역도 잘 되지 않네요. 아무튼 영어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과거로 바꾸어 번역하면 우스꽝스런 우리말이 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우리말의 특성을 살려서 시제를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방금 든 예는 하나의 문장에서는 마지막 말만 시제를 살려 주고 이전의 동사나 형용사는 현재형으로 사용해야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시제를 언급하는 말이 한 마디만 있어도 그 문장 안에 사용된 말들이 그것과 동일한 시제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문장에서 이런 식으로 시제를 언급하듯이, 한 문단이나 일정한 범위의 글 안에서도 시제를 파악할 수 있는 언급이 있으면 독자는 그것으로 다른 말들의 시제도 손쉽게 파악하고 글을 이해하기 때문에 영어처럼 낱낱이 시제를 맞추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우리말의 ‘시제 생략 기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공부했다’라는 단어를 표제어에서 찾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대신 ‘공부하다’만 나옵니다. 영어 사전에서도’studied’를 표제어로 찾으면 안 나옵니다. 대신 ‘study’만 나옵니다. 이른 바 ‘동사 원형’만 나오지 현재형이나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표제어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동사 원형으로 말을 하면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다.”라고 하면 그 친구가 이상하다고 볼 것입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동사 원형에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서 쓰지요. 과거 시제로는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였다.”처럼 쓰고, 현재 시제로는 “나는 지금 밥을 먹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지금 밥을 먹는다.”라고 씁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동사 원형을 쓰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밥을 먹다 말다 하니?”처럼 쓸 때도 있고, 이 글의 첫 번째 기행문 (1)의 제목처럼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라고 쓸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 경주를 찾다”라고 동사 원형을 썼다고 해서, 미래형인가 아니면 현재형인가 하면서 고민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당연히 과거를 이렇게 멋스럽게 혹은 뭔가 그럴듯하게 썼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다.”가 현대 문학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가 고어체를 채택한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의 문체 계속되는 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026 
2015-04-25 23:01:25 | 최상만
성경이 들려주는 기원의 연대 : 한국창조과학회가 젊은 지구 연대를 주장하는 성경적 이유 김홍석한국창조과학회 교육목사 군선교 및 성경위원회 위원장 구약학 박사 I. 서론      한국창조과학회는 공식적으로 우주와 지구의 연대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긴 연대가 아니라 매우 짧은 연대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 짧은 연대가 과학적으로 몇 년인지는 현재의 과학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 빅뱅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에 의해 우주가 탄생한 후 우주의 연대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국창조과학회회는 우주의 연대 자체에 대하여 과학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만, 빅뱅에 의한 우주탄생은 과학적 허구가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매우 젊다는 주장에 대하여,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를 보고 있는 지금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빅뱅에 의해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가 되었다는 주장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가정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관찰되는 우주는 빅뱅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질서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은하도 이미 성숙한 완벽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빅뱅이론도 계속 변해서 최근에는 가속 팽창하는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모르는 물질(dark matter)과 모르는 에너지(dark energy)로 96%를 설명해야 한다.      우주에 대한 연구가 증대되면서 우주는 기존의 우주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 등이 발견되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관찰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우주가 팽창한다고 해서 과거 한 번의 대폭발로 시간, 공간, 물질, 생명, 질서가 나왔다는 주장은 참으로 수긍이 가지 않는 단지 가설에 불가하다. 우주는 신비하다. 우주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아직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신비 앞에서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를 만나게 될 뿐이다.      사실, 젊은 연대를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발견들 가운데서도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많은 연구결과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들 역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가정(assumptions)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구와 우주의 기원연대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들은 실제 나이를 알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의 시작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연구는 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동일과정설에 입각한 가정들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연구결과들은 가정 하에 겉보기 나이(apparent age)를 측정해낼 수 있는데 이는 사용하는 시계와 가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여 수십억 년~수천 년까지 매우 다양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 세계의 시작은 자연과학연구가 설정하는 가정들과는 매우 다르다. 창1:14-19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광명체(마오르, lights)들을 ‘하늘’에 두셨다고 하시지 않고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늘’보다 더 구체적인 공간적 위치를 알려주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심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궁창’은 땅과 인접하고 있는 공간으로서 공기가 있어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대기권에 해당하는 특별한 공간이며(창1:7,8,), 이는 하늘에 속해 있으면서 땅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땅위 하늘의 궁창’(창1:20)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      창1:14-19에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으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를 의미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조된 천체의 빛들이 모두 하늘의 궁창에 위치하여, 창조된 넷째 날 그 즉시로 그 빛들은 땅을 비추었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시간해석 차원에서 보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이라 하더라도 그 빛은 창조된 그 날 즉시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만약 실제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서 창조된 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별로부터 나오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억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 우주의 천체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 빛은 지구의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별빛이 관찰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수억 년 전부터 그 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 소년기가 없이 청년 또는 성년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태양계와 우주의 모든 천체들도 성숙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갑자기 생겨나서 완벽하게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내용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창조신학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초과학적으로 시작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연대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또한 연대측정을 위하여 다양한 시계(방사성동위원소,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등)를 사용하는데, 시간측정을 위해서는 이 시계들이 일정한 속도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 시계들이 일정하게 가기 위해서는 대기 중의 방사성탄소의 비율 등 대기의 조성 비율이나 온도, 지구자기장의 세기 등의 변인들이 안정된 상태로 지속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지층과 화석 그리고 지구자기장의 세기에 대한 관찰들에 의하면 과거 지구의 환경조건들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이라는 도구는 지구와 우주의 실제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다만 일정한 가정 하에 값을 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실제 세계(real world)는 그러한 가정들과는 달리 선악과사건, 노아홍수, 바벨탑사건을 거치면서 환경은 범지구적인 범위를 넘어 우주적으로 격변이 있어왔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지구와 우주의 실제나이에 대하여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며 자연과학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주석, 해석, 주장들을 할 수 있으며, 특히 성경에 기록된 시간에 대하여는 다양한 주석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성경연대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오직 성경을 통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을까? 2.1.성경기록상의 시간의 연속성      창세기 시작 절(창 1:1)에도, 창세기의 마지막 절(창 50:26)에도 공히 시간이 기록되어있다. 특히, 창세기 1장은 시간기록으로 편만해 있다. 첫 단어는 ”태초에”(베레쉬트)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는 동시에 성경의 첫 단어이기도 하며,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이기도 하다.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태초’, ‘낮’, ‘밤’, ‘저녁’, ‘아침’, ‘첫째 날’(또는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사계절’, ‘1년’,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이라는 ‘시간 단위’들로 구성된 자세한 시간의 얼개 위에 순서대로 기록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기록자는 극소수의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하여서만 시간을 명시한다. 예를 들면,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기록한다(창 5:3). 하지만 셋을 낳은 후 800년 동안이나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면서도 셋 이후에 태어난 수많은 자녀들에 대하여는 단 한 사람도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4). 셋도 105세에 에노스를 낳은 후에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지만 에노스 이외에는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한 세대에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해당 아들의 이름과 그를 낳은 나이를 통해 시간들을 빠짐없이 연속적으로 기록함으로써 ‘태초’로부터(창 1:1) 요셉이 죽은 시간까지(창 50:26) 이어지도록 기록한다. 그렇다면 기록자는 시간 기록을 통하여 그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을 후대의 독자들 즉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의도했던 것일까? 웬함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역사적인 문제들에 빠지게 된다. 많은 고대인들은 태고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장수했다고 생각했다. 창세기 5장은 그러한 개념들을 반영하며, 인류 역사가 아주 먼 과거 속으로 소급하고 있음을 반영한다.”라고 한다.  영(E. J. Young)은 ”땅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인간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오늘날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쳐지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연대는 수백만 년이고 땅의 연대도 수백만 년이다. 성경은 솔직히 인간의 태고성의 주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연대를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록자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일어났던 순서만을 알려주려고 의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순서만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지나치게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사건을 말할 때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다. 만약 단지 족보만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만 있었다면 창세기 10장이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같이 이름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계보, 셈 계보에는 특별하게도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아들을 낳은 나이를 통해 자세하고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며, 이삭과 야곱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시간을 기록한다. 그리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시간과 애굽에 체류한 시간,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시간을 출애굽기를 거쳐 열왕기의 솔로몬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시간을 전한다. 이러한 실제로부터 성경은 창1:1의 ‘태초’로부터 끊임없이 연속적인 시간을 전하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2.2.연대에 관련된 기록들에 위치한 문학적 장치들 2.2.1. 창세기 1장 1절과 5절 사이의 시간      첫째,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살펴보면,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 최종편집자가 보여주는 본문의 구조에서 분명하고 질서정연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에 따르면, ”~째 날이니라” 뒤에는 항상 문단나누기 표기(페투하)가 배치되어 있다(창1:5,8,13,19,23,31). 그러므로 맛소라 텍스트의 최종편집자의 의도는 하루 단위로 문단을 나눈 것으로 보이고, 이는 곧 창세기 기자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분명하고 통일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통일된 형식은 기록자의 의도적인 구성으로 보인다. 문단구분 표식 페투하의 배치에 의하면, 창세기 1장 1-5절이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구조로서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은 창세기 1장 1-5절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문단 내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맛소라 본문 창세기 최종편집자의 의도적인 구문론적 구상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최초 창세기 기록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주간의 맨 첫날에 대한 서술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긴 시간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1절이 창조 주간의 처음 하루에 포함되는 활동이며 동시에 이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 사역의 시작이므로 태초의 창조사역에 대한 선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전체 서술에 있어서,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라는 서술이 의미하는 위치적인 기능과 범주는 창세기 1장 1절에 창조된 '천지' 가운데 '지'(그 땅)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서 창세기 1장 1절에 언급한 그 땅에 대하여 묘사에 해당한다. ‘그 땅’ 즉 첫 날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던 것은 이틀 후에 물 밖으로 나와야 할 땅이 아직도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혼돈'했다고 묘사한 것이며, 앞으로 식물들과 생명체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땅이 아직은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허'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2-3장을 통하여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그 이전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록한다. 아울러 이 기록은 창세기 2장 17절과 로마서 5장 17절과 6장 23절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죽음이 죄의 대가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죽음과 고통은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난 ‘죄의 대가’이다. 그런데 간격이론은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창조의 과정을 낮, 밤, 저녁, 아침, 날 등 시간과 함께 세세하게 기록하였고,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서는 아들을 낳은 나이와 수명까지 시간에 대하여 면밀하게 기록하였다. 창세기 전반에 걸쳐 창세기 기록자는 이렇게 상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창조 사이의 장구한 시간을 감추어 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시간의 상세도에 비추어 볼 때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2.2.2.창세기 1장의 하루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은유적 의미의 시간인지, 아니면 문자적 의미의 24시간 하루의 연속으로서의 엿새를 의미하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 1장의 모든 ”~째 날이니라” 앞에 배치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는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24시간 하루임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첫째 날’을 수식하면서 의미를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바로 앞에 저녁과 아침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낮과 밤의 정의(definition)를 배치하였다. 이로써 낮과 밤은 일몰과 일출에 의한 문자적 의미의 저녁과 아침임을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 5절의 ‘첫째 날’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원어 단어를 서수 ‘첫째’(리숀)가 아닌 기수 ‘하나’(에하드) 즉 ‘하루’(one day)라고 기록함으로써 여기서 ‘하루’라는 시간단위가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되고 정의된 하루가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음을 보도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구조 속에 나타나 있는 기록자의 의도를 반영한 장치들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 창세기 1장 '~째 날”에 대한 문학적 장치들>      넷째, 창세기 1장 14-19절의 하나의 문단 내에는 낮, 밤, 저녁, 아침, 넷째 날, 계절, 날, 해, 넷째 날 등 여러 시간단위들을 공존하도록 배치함으로써 기록자는 ‘넷째 날’이 24시간 하루임을 분명히 한다.      다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천체들이 창조된 바로 그 날부터 천체의 빛들은 지구의 이 땅을 비추면서 우주의 천체들과 지구의 공존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수억 년 이상 멀리 떨어져 보이는 별빛 문제에 대하여 창조신학에 따른 시공간적 이해를 제공한다.      여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태양이 만들어진 넷째 날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하루를 여전히 동일하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묘사함으로써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24시간 하루임을 강조한다.      일곱째, 기록자는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의 문단 구분을 통해서도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하루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여덟째, 하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출 20:8~11에서 7일째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우리의 하루’ 이므로 동일 문단 내 서술된 6일 또한 ‘문자적 24시간이 하루인 6일’이다. 만약 이스라엘사람들이 24시간 하루 동안으로 지킨 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안식일을 범한 데 대한 엄중한 벌을 내리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벌은 엄중해서 죽이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출 31:15). 그러므로 안식일인 일곱째 날은 24시간 하루임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동일한 문장 내에 위치하고 있는 엿새 또한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울러, 출애굽기 31장 15-17절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 규례를 주시면서 31장 17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을 지켰으며 그것은 24시간 하루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엿새 동안이란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홉째, 창세기 1장의 그 날들은 헤아려졌으며, 성경에서 이렇게 헤아려진 경우에는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는 150회에 걸쳐 이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열째, 만일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어떤 다른 긴 시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단어들로 다른 문장을 만들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단계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엿새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기록자가 창조주간의 엿새를 긴 시간에 걸친 여섯 단계로 이해하고서도 엿새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는 창세기 1장에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11절과 31장 17절에서도 엿새 동안 이라고 기록하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에서만 하루라는 단어를 다른 곳과 달리 어떤 긴 기간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째 날”은 문자적인 의미의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2.3.창세기 5장과 11장의 긴 수명들      창세기 5장의 아담계보 기록 구조는  ”A가 x세에 B를 낳았고,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가 x+y세를 살고 죽었다.”라는 일정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에노스는 게난을 90세에 낳았다(창 5:9). 게난을 낳은 나이를 10의 1로 줄이면 9세가 되고, 1개월을 1살로 계산하면 만 7.5세에 낳은 것이 된다. 게난은 마할랄렐을 70세에 낳았다(창 5:12). 이것은 7세가 되어서도 안 되고 5.8세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다(창 5:15). 짧은 한 문단 내에 65세에 자식을 낳은 사실과 895세를 살았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기록자의 전략이다. 즉 95세가 믿기지 않아서 10분의 1로 줄이거나, 1개월을 한 살로 해석을 시도해보면 65세에 자식을 낳은 것과 조화될 수 없어 다른 어떤 해석도 불가하도록 장치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야렛은 에녹을 162세에 낳았다(창 5:18).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창 5:21). 므두셀라는 라멕을 187세에 낳았다(창 5:25). 라멕은 노아를 182세에 낳았다(창 5:28). 그리고 노아는 500세가 되어서야 야벳과 셈과 함을 낳았다(창 5:32). 아들을 낳은 나이를 모두 나열해 놓아도 아무런 수열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야 말로 들쭉날쭉 할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들을 낳은 나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구조는 나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배치한 엄격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창세기 기록자가 아담 계보의 모든 족보를 이러한 구조로 족보를 기록한 것은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로서,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담 계보의 시간, 나이와 수명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본문의 내부적인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노아홍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사건 발생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연월일을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그것은 노아 600세 되는 해 2월 17일이었다고 기록했다(창7:11). 방주에 타기 시작(2월 10일)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2월 17일), 40일 동안 줄곧 비가 내렸고(3월 27일까지), 150일 동안 물이 땅에 넘쳤으며, 150일 후에 물이 줄어들었고(2월 17일에 시작하여 5개월 동안),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10월 1일에 산봉우리가 보였고, 40일 후에(11월 11일) 까마귀를 내보냈고 비둘기도 내보냈으나 있을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으며, 7일 후에(11월 18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고, 또 7일 후에(11월 25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고, 노아 601세 1월 1일에 땅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였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다. 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에서 내렸다.      기록자는 이 사건의 시간에 대하여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실제로 그 시간들이 아니라고 가정해본다면 시간들을 기록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기록해서도 안 된다. 만약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면 시간적인 모호성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얼마든지 충분히 사건을 보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타당하다. 그것은 시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성 즉 실제로 그대로 일어났다는 문자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한 노아 계보의 이 숫자들은 노아가 600세 되던 해라는 시간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나이는 아담 계보에서 노아가 50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노아 계보의 자세한 시간기록이 보도의 사실성을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담 계보의 나이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셈 계보에서도 본문의 구성을 살펴보면, 자식을 낳은 나이와 함께 이후 몇 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는지를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것은 수명이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되도록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창 11:16-17)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464세를 산 수명을 다른 의미로 줄여서 해석해보려 한다면 34세에 아들을 낳을 나이를 함께 줄여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자적인 의미의 나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형식을 문학적 장치로 볼 때, 이는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기록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노아홍수를 기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람의 수명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900대의 나이로부터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대 아담부터 10대 노아까지는 900수를 누렸고, 노아(10대)의 아들 셈은 600세를 살았다(창 5:3-31, 11:10-11). 이후 438, 433, 464세를 살았으며 바벨탑사건이 있었던 때인 벨렉(15대)은 239세, 이후 239, 230, 148세, 19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창 11:12-32). 이렇게 나이의 점진적인 축소가 이어지면서 기록되어 있는 구조는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 기록된 수명을 어떤 비율로도 축소할 수 없으며 다만 문자적인 해석만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III.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 찾아가기 3.1. 아담-야곱까지 아담연대기 산출      창5:3-32, 7:11, 11:10, 9:28, 11:10-26, 11:32-12:4, 21:5, 25:26을 근거로 아담에서 야곱의 출생까지를 산출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0)+130(셋)+105(에노스)+90(게난)+70(마할랄레)+65(야렛)+162(에녹)+65(므두셀라)+187(라멕)+182(노아)+502(셈)+100(아르박삿)+35(셀라)+30(에벨)+34(벨렉)+30(르우)+32(스룩)+30(나홀)+29(데라)+130(아브람)+100(이삭)+60(야곱)=2168년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130세 때(창:47:9)이며, 그로부터 실제로 애굽에 체류한 기간은 430년(출 12:40)이며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출 12:41) 출애굽하였는데, 그 때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이 되는 해였다(왕상6:1).   3.2. 기원의 시간에 대한 B.C. 연대기 산출      솔로몬은 BC 970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기원의 연대가 산출된다.           BC 4174 년경으로 산출된 시간에는 공식적인 오차 범위가 내재하고 있다. 즉 누가 몇 세에 낳았다고 했기 때문에 몇 세 몇 개월 되었을 때인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 1대 아담에서 22대 야곱까지 21곳의 간격마다 최대 오차범위 1년(몇 세 몇 개월에 낳았는지 알 수 없음).      2)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가 502세인지 503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여기에 1년의 오차범위.      3) 애굽으로 내려간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몇 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의 오차를 넘을 수는 없음).      4) 출애굽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      5) 솔로몬 왕 제4년에 1년의 오차범위. 이를 모두 합하면, 1+1+1+1+21=25년.      그러므로 아무리 오차가 크더라도 +, - 25년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IV. 결론          성경은 많은 문학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자세하고 끊임없는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창1:1의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Footnotes 1) 이는 노아홍수를 겪으면서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의 지구환경과는 다르다. 따라서 궁창을 지금의 대기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2) 참조, Wenham, Genesis 1-15, 6. 창세기 1장에는 승인 관용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7회(4, 10, 12, 18, 21, 25, 31절)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3) Eugine H. Merril, 「구약의 역사적 개요」, 김인환 역(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7), 56을 참조할 것. 4) Gordon J. Wenham, Genesis 1-15 vol. 1,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Books, 1987), 134.  5) E. J.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서세일 역(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8), 48. 영은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사건이 발생한 연대기적 순서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길이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6) 창세기의 내용이 창세기라는 이름으로 최종적인 편집을 거치기 전에 기록한 최초의 창세기 기록자와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 창세기의 최종편집자는 다르겠지만, 그 의도와 의미의 전달에 왜곡이 없으며 성경 전체를 공시적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바라보고 최종편집자를 창세기 기록자와 동일시한다.7) 김두석. ”창세기 1장 1절과 2, 3절과의 관계 연구”, 「칼빈논단」, (2002): 133-158, 136-137, 150-151, 153과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23-27, 31-33, 43을 참조할 것.8) 왕대일은 창세기 2:3과 2:4의 구분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의 독법과 정경상의 형태를 따르는데, 이때 ‘페투하’의 단락 표기를 근거로 삼는다. 왕대일, 「구약신학」(서울: 도서출판 성경학연구소, 2003), 343.  9)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33.10) 참조, Archer,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 역(서울 : 생명의말씀사, 1993), 87-89 및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고영민 역(서울; 기독교문화사, 1987), 48-50.11) Rad, 「창세기」, 50-51.12)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48-50. 13) Boice, 「창세기강해I」, 문동학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78-79.14)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로마서 5장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15)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16) 참조, Schmidt, Die Schouml der Priesterschrift. 2d Ed.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67), 5, 68. ”Considerations Based on Pentateuchal Sabbath Passages.”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17)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42.1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51-52.19) Ibid. 아담 계보와 셈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수명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을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아담의 나이를 93세로 10분의 1로 하게 되면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수명은 15세(14.8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줄여서 해석할 수 없게 된다.20)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는, 창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아하르 함마뿔)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9:28 ”홍수 후에(아하르 함마뿔)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에서 ‘홍수 후’는 홍수 시작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홍수 후'를 '홍수 시작으로부터'로 보면 노아 502세에 셈을 낳은 것이 된다. 그런데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내린 시간을 기준으로 ‘홍수 후’라고 했다면 503세가 될 가능성도 있다. 노아가 502세에 셈을 낳았다면(또는 503세에 낳았다고 하더라도) 창 5:32, 창 9:24, 창 11:10을 살펴보면 노아의 아들들은 그 나이대로 야벳, 셈, 함 순이 된다. 히브리성서 맛소라텍스트는 '형인 야벳의 형제 셈'이라고 해석된다. 영어역본 KJV, NKJV, NIV 등은 '형인 야벳의 형제(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창 10:21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even to him were [children] born. [NKJV]창 10:21 And children were born also to Shem,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NIV]창 10:21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는, 창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에서 데라는 아브라함을 130세 낳았음을 알 수 있다.21) 에드윈 R. 딜레(Edwin R. Thiele), 「히브리왕들의 연대기」, 한정건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viii.
2015-04-25 16:22:28 | 허광무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Ken HamPresident of AiG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똑같이 그들이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 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심하게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 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져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March 1997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번역자 : 이종헌
2015-04-24 23:28:12 | 허광무
제가 풀어본 입다 딸의 생사 여부   다들 성경 기록대로 믿으면 쉽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반대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으며 합쳐질 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우선, 상반된 견해들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상반된 견해 요약)   검토 항목 번제 헌물 NO 번제 헌물 YES 1 (30절)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서원 당시 입다 생각에 사람은 포함하지 않고 서원했다 사람도 포함했다 또는 사람을 대상으로 서원했다. 2 (31절) ‘무엇이든(whatsoever)과 그것을(it)’의 의미 사람은 포함 안 된다 사람도 포함 된다 3 (31절) 번제 헌물로 드려졌나 아니오 예 4 (37절) bewail my virginity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자기의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5 (39절)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사람은 번제 헌물로 드리지 못하므로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렸다.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대로 불로 태워 드렸다. 6 (39절)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she knew no man) 결혼하지 않았다 처녀로 죽었다 7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나흘씩 애곡한 이유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평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번제 헌물이 되어 죽게 되었기 때문 * 요약해서 언급한 것 외에 세부적으로는 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반된 견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번제 헌물로 드려졌느냐, 아니냐’입니다. 성도의 하나됨을 위하여 진실 찾기에 나서 보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일곱 명의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성경 기록이 생각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먼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느니라. (마 22:29)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하는 것을 먼저 지적하시고 나서,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대답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입다의 딸 문제를 분명하게 풀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요점 1: 성경 기록들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요점 2:  [하나님]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포인트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범위를 좁혀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라 (골 1:10)”고 권면하셨습니다.   ※ 위의 (마 22:29)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요점 1’을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고, ‘요점 2’를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으며, 두 가지 요점을 모두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습니다. (논리식 “(NOT A) AND (NOT B) = (NOT C)”의 대우(對偶) “A OR B= C”에 해당됩니다. 몰라도 됩니다.)    이제부터 시험을 보겠습니다. (시험 1) ‘요점 1’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제출된 답안지를 보니까 YES도 있고 NO도 있네요. 시험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시험 2) ‘요점 2’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이번에도 답안지에 YES도 있고 NO도 있습니다.    제출된 답안지를 토대로 (시험 1)과 (시험 2)에서의 응답 결과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번제 헌물로 드려졌으면 ‘Yes’ , 안 드려졌으면 ‘No’) 응답 유형  [하나님]을 알고 얻은 답 성경 기록들을 통해 얻은 답 설    명 A YES YES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악하시고, 인신 제사를 받는다. B NO YES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C YES NO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D NO NO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신 제사를 안 받으신다. l  (요점 1)을 사용하든 (요점 2)를 사용하든 답은 동일하게 나와야 함. 정답: (응답 유형 D) 채점관: 히브리서 기록자 (바울) 채점관 평가(추정): (응답 유형 A) 입다의 서원에 관한 성경 기록을 잘못 해석하하고, 하나님도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으시는 악한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영적인 분별력이 없음. 입다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드렸다고 함으로써 믿음의 본으로 기록한 채점관에 정면 도전하고, 차라리 입다 보다는 입다의 딸의 믿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하므로 낙제점을 줍니다.   (응답 유형 B)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는데 그것을 받으신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응답 유형 C)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라고 하면 믿지 않거나 안티 크리스천인가 봅니다. 시험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응답 유형 D) 성경 기록을 잘 해석하였고, 하나님도 올바로 알고 있어서 영적인 분별력이 좋습니다. 채점관이 히브리서에 믿음의 본이 되는 특출한 사람들 중에 입다를 올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한 믿음이 후대에까지 길이 빛나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본받으라고 한 것임.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는 것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죽는 믿음을 보였다면, 그 믿음은 아버지 입다 보다 더 훌륭한 것일 텐데 번제 헌물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다의 딸을 기록하지 않았음. 사사기 11장을 읽을 때도 입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는데 입다의 딸 이름은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서치 라이트를 입다의 딸에게 비추지 말고 입다에게 비추려는 의도임을 알아야 함. 여리고 정복 때의 창녀 라합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채점관인 나도 그 이름을 다시 거명하였지 않았는가. 입다의 딸이 숭고한 희생 정신과 투철한 믿음으로 번제 헌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면 왜 그녀의 이름이 감추어져 있겠는가.  말로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면서도, 성경 기록에 하나님께서 인신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면 성경 기록 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교묘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식인종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먼저 나서서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아 잡수신 하나님을 광고한다면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건가요? 과연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무리에게서 속히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거짓 교사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2015-04-24 19:00:27 | 최상만
왜 6일 창조에 그렇게 부담을 가질까? 김무현한국창조과학회 미주 텍사스지부장 Texas A&M 대학 교수 해양|토목 공학 박사       대부분의 현대 크리스챤들은 성경이 말하는 6일창조에 엄청난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진화론 일색의 과학이 수십억년의 우주와 지구를 과학적 사실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차피 모든 것을 자연과정(natural process)으로 설명하여야 한다. 크리스챤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초월적(supernatural)창조주를 믿는다. 그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할 부담이 없다. 단지 이 피조세계에 남아있는 창조와 설계의 흔적들을 말할 뿐이다. 재판정에서는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쪽이 엄청 부담을 갖는다. 그 증명의 부담(burden of proof)은 모든 것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진화론자들에게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챤들이 6일창조 문제에 자신을 갖고 접근하기를 바란다. 창세기의 내용 중 진화론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부분이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천지창조 내용일 것이다. 전능자를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기원과정이 수십 억 년에 걸친 자연과정(Natural Process) 만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아성이 바로 지질학적/우주적 오래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오래된 연대는 우주/지구/생명의 진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전제이다. 그들은 지난 200여 년에 걸쳐 과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 전능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의 존재나 지적설계를 철저히 배제해 왔다. 모든 기원이론은 자연주의 관점에서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그 체계 안에서만 학문의 탑들을 쌓아나갔었다. 그 결과, 모든 자연의 현상 및 기록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리적 해석을 하는 대신, 전능자의 지적설계 및 초월적 창조가 철저히 배제된 학문체계로 현대과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은 오래된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격변의 상황이 없이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균일론의 가정하에서 성립된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의 배경신념과 모순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러한 자료들은 철저히 배제/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성경적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은 철저히 왕따를 당하며 지적인 조롱과 핍박 속에 놓이게 되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로마서 15:3) 이러한 과학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dogma 때문에 많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창세기의 해석을 현 과학의 패러다임(paradigm)과 애써 끼워 맞추려는 시도와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다.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간격이론(gap theory),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그리고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그중,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 자체가 초월적 창조주가 없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복음적 신앙과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나 힌트조차 없기 때문이다. 간격이론 및 날-시대 이론은 창세기 1장을 현 과학의 오래된 우주/지구 패러다임과 애써 맞추어보려는 노력인데, 성경적 해석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현 과학의 패러다임인 진화론과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신명기 4:2) 본인도 한때 날/시대 이론이 더 그럴 듯 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능적 창조주께서 그 모든 창조를 수 십억 년에 걸쳐 철저히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에 의존해야만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증거도 없다는 사실을 안후에는 다시한번 그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게 되었다. 특히, 재림 후에 이루어질 전 우주적 재창조는 수십억 년이 아닌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주님재림 후의 재창조가 수십억년이 아닌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면, 태초의 창조도 수십억년이 걸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전능적/초월적 창조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고 과학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전능적 창조의 흔적들을 이 자연세계에 남겨 놓으셨다고 했다. 크리스챤 과학자들에게 그것을 탐구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창조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도 간략하게 그 대략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여 주셨다. 진화론적 세계관과 과학주의로 철저히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6일창조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주위사람으로부터 지성인이 아닌 맹신자라고 놀림을 받을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길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오히려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현상들도 많이 존재하며, 본인이 그랬듯이 그것들을 다 자세히 공부해 보면 성경적 창조가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인류의 모든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들은 진화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질학적 세월에 걸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노아 홍수를 전후하여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세계 모든 종족과 언어의 기원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노아홍수와 바벨탑 사건으로 더 잘 설명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창조란 것은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관점만이 절대로 옳다고 Doctrine화 하는 것이 문제가 있을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성경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며, 그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3:12 말씀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처럼 창조의 자세한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계시록의 24장로들과 같이 그 전능하신 창조주를 다음과 같이 찬양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11) 한편, 창조와 타락의 중요한 신학적 기초가 창세기 1-3장에 있기 때문에 그 내용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절대적 진리임을 믿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모세오경을 신화로 보려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은 근거도 희박한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려 하는 사단의 가장 좋은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누구든지 이 계명(구약 특히 모세오경)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19) 인간의 머리에서 추론해낸 진화론이란 가설에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애써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다음에는 6일창조외의 타협적 성경해석을 도입하는 것이 더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예를 날/시대 이론을 통해서 살펴 보려 한다.  날/시대 이론은 진화론이 거세게 과학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던 19세기에 Hugh Miller(1869)등에 의해 제안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휴 로스 (Hugh Ross) 등의 Reasons To Believe라는 단체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이 이론은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yom'이 성경에서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로도 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느 불특정한 기간'으로도 쓰일 수 있음에 주목하였다 (창세기 2:4(창조하신 때), 시편 20:1(환난날), 욥기 20:28(진노하시는 날), 전도서 7:14(형통한 날)). 그리고 또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순서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의 순서에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에서 착안하였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순서대로 점진적 창조(Progressive Creation)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한 날은 역사지질학의 한 시대 만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층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균일적으로 다 만들어 졌으므로, 노아의 대홍수를 지역적 홍수(local flood)로 본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가 결코 지역적 홍수가 아니라고 하신것에 위배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성경적 문제점들이 있다. 히브리 원어 상으로도 yom이 숫자를 나타내는 제한적 형용사(either numeral or ordinal)뒤에 쓰인 경우에는 전체 성경을 통하여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문자 그대로의 날을 의미한다 (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부연설명까지 있음). 또한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창조의 six days에 해당하는 yom의 복수형 yamin이 쓰였는데, 그와 같이 복수형이 쓰인 경우에는 한번의 예외도 없이 문자적인 날을 의미한다.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출애굽기 20:11) 특히 사람을 창조하여 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왜 특별한 이유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랜 지질학적 연대에 걸쳐, 고생대 생물들을 만드시고 다 죽이시고, 공룡을 만드시고 다 죽이시고, 그러한 과정을 밟으셨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바로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하던중 본인의 아들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날-시대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병과 고통과 살생과 싸움과 죽음이 아담의 첫 범죄 이전부터 있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낭비해가며, 이유 없이 수많은 생물들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등 가장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끄시며, 아담까지 오게 하셨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또한 인간의 불순종의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피조세계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과 파괴 등이 진행되었으므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 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창세기 3:16-19)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엇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19-23)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린도전서 15:21-22)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진화론/역사지질학 이란 유사과학에 성경해석을 애써 끼워 맞추려다 보니 오히려 창조-타락-구속-심판/완성으로 요약되는 성경의 큰 물줄기에 큰 흠집을 내게 된다. 그 엄청난 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 될수 없듯이 진화도 단지 추론이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우리 피조물이 초월자가 하신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개미들이 사람이 컴퓨터를 만들고 달나라를 가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과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바란다. 진화는 종교이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6일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바라보기 바란다.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이어서 관련 성경 구절은 개역성경임.  
2015-04-24 11:04:07 | 허광무
안녕하세요? 이곳 뉴질랜드는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서 남섬에는 눈이 오거나 북섬에는 우박이 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다시 따뜻한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밤하늘에는 쏟아질 듯한 별들의 향연을 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감상했지요. 귀뚜라미의 씨르륵거리는 소리가 제법 커져가는 뉴질랜드의 가을 밤은 깊어갑니다. 결실의 계절이라 과일 야채 가게에는 토실토실한 밤들이 그리고 길거리 참나무 아래에는 다람쥐들이 좋아하는 도토리들이 가랑잎 사이로 댁대굴댁대굴 굴러다닙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Bible Believers의 21차 모임을 <아래>와 같이 안내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최종권위로 믿고 읽는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성경신자들의 모임에 함께하는 이들이 더해지길 소망합니다.   <   아      래   >  1.  모임 일자와 시간 : 2015년 4월 26일(주일) 저녁 6시  2.  장      소  : ** Awa Road. Kumeu. Auckland  3.  내       용 : 다니엘서 8장-12장  4.  휴 대 전 화 : 027-779-8877(최 문 선)      
2015-04-23 21:58:34 | 최문선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단어들의 뜻을 바르게 찾는 방법에 대해 잠시 글을 쓰며 재창조 논쟁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어떤 분이 ‘replenish’라는 단어가 14세기부터 ‘다시 채우다’의 뜻으로 쓰였다는 글을 보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기에 오늘은 양심이 약한 지체들을 도와야 할 책무가 있는 목사로서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전하다 보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 성경을 제시하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학교 등에서 1-2년 원어 공부를 했다고 마치 자기가 원어를 다 아는 것처럼 자랑하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무시합니다. 20-21세기의 원어학자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16-17세기 영국의 성경학자들보다 원어를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15-16세기의 조선 학자들 즉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 아래서 합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두세 살부터 오로지 한자/중국문학만 공부한 사람들이 현시대 그 어떤 한학자보다 사서삼경, 논어 등을 정확하게 잘 이해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한자/한문 자체를 내 나라말처럼 쓸 정도로 박식하였습니다. 16-17세기 영국의 성경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두세 살 때부터 그리스어/히브리어 교육을 받아 결국 왕실의 귀족이 되고 성경학자/목사 등이 되었기에 원어 구사/번역/해석의 모든 면에서 20-21세기 원어학자들보다 당연히 나을 수밖에 없습니다.   http://keepbible.com/KJB2/View/2Vx?page=6   http://keepbible.com/KJB2/View/2Wf?page=2   이런 간단한 논리는 잘 이해하면서도 단지 영어를 조금 배웠거나 혹은 한국에서 영어 교사/학원 강사 등을 했다는 이유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미국/영국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 중에는 영어 문법을 잘 모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들을 읽고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당연히 우리보다 영어 실력이 훨씬 더 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지식층의 미국 사람들마저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의 지식은 그들이 실제로 구사하는 말과 문화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해당 언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교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사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전 저자의 생각이나 시대적 배경이 사전의 단어들을 정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래서 특히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해석할 때는 16-17세기 영국 사람들의 영어 용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사전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실제 당시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한 단어의 의미를 조금 바꾸어 놓을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창조론자들이 자주 거론하며 논쟁의 소재로 삼는 ‘replenish’를 봅시다. 이 단어는 진화/윤회/재창조 등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서구 사회에 소개되던 1850년 이후로 뜻이 추가되거나 다소 바뀌면서 과거에는 없었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다시 채우다’라는 뜻이 추가되고 사용 빈도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런 단어를 접하면 1600년대 그 당시의 뜻이 무엇인지 또 1850년 이전의 미국/영국 사람들은 그 단어를 실제로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바로 그 당시의 뜻대로 이해해야 오류 없이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 사람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1800년대 미국 영어 문법의 기초를 놓은 웹스터(Noah Webster, 1758~1843) 같은 언어학자 겸 사전 편찬자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뒤 미국의 독자적인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1783년 ~ 1785년 <영문법 강화> 3권을 펴냈습니다. 또한 그는 1806년 백과사전적인 영어 사전을 발행하였고, 1828년 마침내 <노아 웹스터 영어 사전>을 간행하여 사서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미국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역사 교육에도 공헌하였습니다. 더불어 훌륭한 성도였던 그는 미국 국민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사전을 편찬하면서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라 <웹스터 사전>이라는 귀중한 사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Noah_Webster   흥미롭게도 그는 사전에 나오는 단어들의 용례를 설명할 때에 그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 있으면 해당 단어의 킹제임스 성경 구절의 용례를 사전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았고 그중에 한 권이 바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사실 오늘날의 미국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다름 아닌 킹제임스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면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이래로 200년이 지난 시점에 웹스터와 미국 사람들은 ‘replenish’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온라인에 공개된 무료 <웹스터 사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http://webstersdictionary1828.com/   이 사전은 ‘replenish’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REPLEN'ISH, verb transitive [Latin re and plenus, full.]1. To fill; to stock with numbers or abundance. The magazines are replenished with corn. The springs are replenished with water.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Genesis 1:28(창1:28).2. To finish; to complete. [Not in use.]   여기서 보듯이 1811년까지 ‘replenish’는 ‘채우다’(fill) 외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웹스터는 재창조론자들의 애용 구절인 창세기 1장 28절 즉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를 ‘replenish’의 용례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조금 안다고 해서 웹스터 같은 대가보다 잘 알 수 있을까요? 영어 성경 외에는 다른 책을 거의 구하지 못하던 그 당시 미국 사람들은 그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 원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영어 단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웹스터가 죽은 이후에 <웹스터 사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편찬되며 1900년 이후에 나오는 것들은 ‘replenish’의 뜻에 ‘다시 채우다’를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여전히 ‘채우다’라는 본래의 뜻이 먼저 나온 다음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최근에 나오는 메리암-웹스터 사전이 ‘replenish’에 대해 정의한 것입니다.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replenish   replenish: 1 a :  to fill with persons or animals :  stock  b archaic :  to supply fully :  perfect  c :  to fill with inspiration or power :  nourish 2 a :  to fill or build up again <replenished his glass>  b :  to make good :  replace   여기서도 ‘replenish’의 1, 2차 뜻은 ‘채우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지 않고 무조건 ‘다시 채우다’라고 주장하면 진실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전 및 뒤에 언급될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에 보면 ‘replenish’의 어원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replenish: Middle English replenisshen, from Anglo-French repleniss-, stem of replenir to fill, from re- + plein full, from Latin plenus — more at fullFirst Known Use: 14th century   여기에 보면 ‘replenish’는 뜻이 ‘more at full’ 즉 ‘full에서 더 많이’ 즉 ‘가득 채우다’로 되어 있고 14세기에 처음 사용된 용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replenish’의 정의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14세기부터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 사용된 것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정직한 일이 아닙니다. 조금 뒤에 옥스퍼드 사전을 통해 보여 드리겠지만 14세기부터 ‘replenish’는 거의 전적으로 ‘채우다’의 의미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를 쓰시면 그 안의 내장 사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replenish: replenish [ripléniʃ] vt.① 『∼ +목/ +목+전+명』 채우다; 다시 채우다; (연료를) 계속 공급하다, 대다; 새로 보충[보급]하다(with).② (사람·동물이 땅에) 살다, (땅을) 사람으로[동물로] 가득 채우다.┈┈•∼ one's wardrobe 의상을 사들이다.① ┈┈•∼ the fire with fuel 불에 연료를 지피다.㉺∼ed [-t] ―a. (다시) 가득해진, 가득 찬.㉺∼ment [-mənt] ―n. 보충, 보급; 보급물.replenish [ripléniʃ] vt.   일반 사전도 ‘replenish’의 1차 의미가 ‘채우다’, ‘보급하다’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채우다’는 최근에 이루어진 정의이기 때문에 2차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동아출판사 사전도 마찬가지입니다.   replenish: 1. 보충[보급]하다 2. <난로 등에> (연료를) 공급하다[대다] ((with))  3. 채우다; 다시 채우다(refill) ((with))  컵에 커피를 다시 채우다4. <토지를> 사람으로[동물로] 가득 채우다   자, 이렇게 역사의 사실을 알려주고 이야기해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분들이 있으므로 이제는 영어 사전의 원조요, 이 세상에서 가장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사전은 1000년경부터 영어가 형성되면서 모든 단어들이 사용된 용례를 문헌별, 연도별로 보여 줍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된 20권(한 권이 보통 1500페이지 정도 됨)의 이 사전에는 50만 개의 단어와 250만 개의 인용 문헌이 들어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Dictionary-Complete-Reproduced-Micrographically-slipcase/dp/0198612583/ref=sr_1_1?s=books&ie=UTF8&qid=1429246894&sr=1-1&keywords=complete+oxford+english+dictionary   컴퓨터가 없던 시절, 미국에서 영어를(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다 이 사전 세트를 구매해서 공부했습니다. 이후 컴퓨터 시대가 열리면서 이 책들의 모든 데이터와 지난 20여 년의 용례 데이터를 담은 DVD가 발매되어 현재 4판까지 나와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Oxford-English-Dictionary-Version-Windows/dp/0199563837/ref=sr_1_11?s=books&ie=UTF8&qid=1429246795&sr=1-11&keywords=oxford+english+dictionary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볼 때 어떤 단어의 뜻이 이해가 안 되면 누구라도 이 사전으로 가서 1600년경 당시의 용례를 확인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전은 어떤 특정 신학/사상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한 단어의 시대별 용례가 그 당시 문헌과 함께 있는 그대로 모두 나옵니다. 사실 이런 사전을 가진 국가는 없습니다. 이런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영어가 만국의 공용어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이 공용어를 써서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셨습니다.   OED는 여러 인용 자료를 보여 주면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은 아예 ‘바이블’(Bible)로 표기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create’라는 단어를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와 용례가 뜹니다.     물론 어떤 사전이든 한 단어의 정의는 그 단어의 가장 중요한 뜻부터 맨 먼저 보여 줍니다.   1.a 정의: 무에서 유를 만들다.용례: 1386년 초서(Chaucer)의 ‘Para. T’ 144쪽……1535년 커버데일 성경(Coverdale) 창1:1…드디어 1611년 바이블(Bible) 시51:10……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미 영국 사람들에게는(또 그들이 지배한 대영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바이블’(Bible)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 역본들은 모두 틴데일, 커버데일 등으로 표기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 1611년이라는 연도와 함께 바이블 그 자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정의는 1.b, 1.c, 2., 3., 4., 5.로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create’라는 단어의 원뜻(1차 의미)이 무엇이고, 영어 문헌에서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뜻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려면 OED를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한국 사람이 제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OED 사전 편찬자나 웹스터 같은 분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신봉하는 특정 신학이나 교리를 관철하기 위해 현대판 사전들(그중에서도 특히 자기가 원하는 정의를 담은 것)을 이용하면서 더욱이 1차 뜻은 무시하고 후대에 파생된 2차, 3차 뜻으로 성경의 단어들을 왜곡하려는 분들이 더러 있기에 이번에는 ‘replenish’를 찾아보겠습니다.   다음은 OED에 기록된 ‘replenish’의 정의입니다(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 정의 자체를 통째로 올리지만 양이 많아서 글 맨 뒤에 기록하였음).   이 단어는 총 10개의 뜻(정의)을 가지고 있고 용례는 1340년부터 나옵니다. 즉 이 단어는 14세기경에 영어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위에서 메리암-웹스터 사전이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사실 메리암-웹스트 사전 등의 원천은 OED입니다.  이 말의 1차 뜻은 1-8번, 그리고 10번 정의가 보여 주듯이 ‘채우다’입니다. 이 말은 14세기부터 그렇게 쓰였습니다.   9번의 정의는 ‘다시 채우다’인데 이 용례는 킹제임스 성경 반포 이듬해인 1612년 이후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영어 단어 ‘replenish’의 뜻입니다.   그 어떤 사전을 보든지 한 단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뜻은 많은 정의들 중에서 가장 앞에 들어 있습니다. 끝으로 갈수록 예외적이거나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정의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은 접두어 ‘re’ 무조건 ‘다시’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replenish'와 비슷한 ‘replete’란 단어를 보면 그 뜻은 ‘가득 찬’, ‘충만한’입니다. 여기에는 ‘다시’라는 뜻이 없습니다.   OED나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replete’ 역시 기원이 ‘replenish’처럼 프랑스어이며 ‘re’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가득 채우다’(more at full)라고 말합니다.   replete: Middle English, from Middle French & Latin; Middle French replet, from Latin repletus, past participle of replēre to fill up, from re- + plēre to fill — more at fullFirst Known Use: 14th century   즉 ‘re’는 ‘다시’가 아니라 ‘뜻을 강하게 하는’ 의미의 접두어입니다(more at full). 동일 사전들은 ‘replenish’도 정확히 ‘가득 채우다’(more at full)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접두어 ‘re’는 여러 뜻을 갖습니다. 다음은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의 정의입니다.   ① 라틴계의 낱말이 붙어서 ‘반복, 강의(强意), 되, 서로, 반대, 뒤, 비밀, 격리, 가버린, 아래의, 많은, 아닌, 비(非)’ 따위의 뜻을 나타냄: recognize, recede, recompense   OED는 ‘plenish’도 ‘replenish’와 동일하게 ‘채우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OED의 전체 용례를 보면 ‘replenish’, ‘replete’ 등의 경우 ‘강의(强意)’ 즉 ‘뜻을 강하게 하는’ 접두어 ‘re’가 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뜻을 조금 더 풀면 ‘확실히 가득히 채우라’가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의 ‘re’ 정의에 보면 ‘recognize’가 있습니다. 이것도 ‘다시 안다’가 아니라 ‘안다’입니다. 그런데 접두어 ‘re’가 붙어서 ‘확실히 안다’는 뜻을 갖습니다.   OED나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recognize’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recognize: modification of Anglo-French reconois-, stem of reconoistre, from Latin recognoscere, from re- + cognoscere to know — more at cognition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의 ‘re’는 ‘다시’가 아니라 ‘more’ 즉 ‘더 확실히’를 뜻합니다. 사실 영어에서는 ‘fill’과 ‘refill’처럼 접두어 ‘re’가 분명하게 ‘다시’를 뜻하는 경우보다는 ‘강의(强意)’ 즉 ‘뜻을 강하게 하는’ 경우로 사용된 예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처럼 영어에서 ‘replenish’는, 1828년의 웹스터가 내린 정의처럼, 1611년부터 1828년까지 200년 이상 오직 ‘채우라’는 뜻으로만 쓰였고, 그래서 어떤 주석서도 창세기의 ‘replenish’를 ‘재창조’의 근거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예 재창조는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개념입니다. 재창조라는 사상 자체가 유대교에 없습니다. 재창조 가능성은 1850년 이후에 진화론의 출현과 함께 과학을 신봉하는 세상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성경과 과학을 타협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비록 촐머스(혹은 찰머스) 등이 선한 뜻으로 시도했다 해도). 그 이전에는 신학 서적 어디에도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 중에 성경을 대하는 경건함으로 인해 가장 널리 읽히는 주석서는 매튜 헨리의 주석서일 것입니다. 헨리는 1662-1714년까지 살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총 6권에 달하는 주석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그는 영어 성경 자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 훌륭한 성경 신자입니다. 그 역시 창1:28의 ‘replenish’를 땅을 충만히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 단어는 ‘채우다’ 외에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Matthew_Henry   또한 미국에서는 1798-1870년까지 반즈(Albert Barnes)라는 훌륭한 주석가가 있었습니다. 이분 역시 대단한 규모의 주석서를 지었는데 창1:28의 주석을 보면 재창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그 역시 헨리처럼 사람이 번성해서 땅을 충만히 채울 것에 대해서만 기록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lbert_Barnes_(theologian) 참고로 헨리나 반즈는 청교도/장로교의 배경이 있어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해석을 여러 군데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를 빼면 어느 누구의 주석보다 경건하고 아름답게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격과 덕 그리고 학문의 측면에서는 저나 럭크맨 등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있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 ‘replenish’를 ‘채우다’로 이해하고 그렇게 주석을 썼습니다. 최소한 1870년까지는 그 뜻 외에 다른 뜻은 ‘replenish’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히브리말 자체에도 ‘다시 채우다’라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replenis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male, 스트롱 번호 4390)는 처음부터 끝까지 ‘채우다’의 의미로만 쓰였습니다.   OT:4390 male' (maw-lay'); or mala' (Est 7:5) (maw-law'); a primitive root, to fill or (intransitively) be full of, in a wide application (literally and figuratively):   KJV - accomplish, confirm,  consecrate, be at an end, be expired, be fenced, fill, fulfil, (be, become,  draw, give in, go) full (-ly, -ly set, tale), [over-] flow, fulness, furnish, gather (selves, together), presume, replenish, satisfy, set, space, take a [hand-] full,  have wholly.   이 단어는 구약에만 253회 나오며 다음 그림은 창세기 1장부터 레위기 12장까지의 예를 순서대로 보여 줍니다. 지면 관계상 예는 이 정도로 하고 생략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비롯해서 어떤 정통파 유대교 랍비도 ‘재창조’ 등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어 ‘말레’에는 ‘다시’라는 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려면 먼저 OED 사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그 단어의 여러 정의 중 첫 번째로 제시된 정의로 가서 1600년대 용례를 보면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특정 신학의 틀 밖에서 중립적으로 성경 말씀의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합당한 내적/외적 증거 위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온전한 것입니다.   라킨과 럭크맨의 후예들 소수를 제외하고 지금 미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성경 신자들 가운데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해석하며 재창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재창조는 사실상 구시대에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그런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저와 의견이 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객관적 사실의 토대 위에 신학을 정립함이 옳기에 제가 살펴본 것들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1. 히브리말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2. 영어가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3. 예수님께서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으신다(막10:6).4. 성경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말 자체가 없고 재창조론자들이 증거라고 하는 구절/단어들 역시 문맥 밖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왜곡된 것들임).5. 화석의 증거들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6. 역사적 유대교/기독교 주석가들의 견해가 전혀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7. 재창조는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이 땅의 죄는 아담으로 인해 들어왔고 그 이후에 사망이 생겼다(롬5:12). 9. 재창조는 19세 중후반 이후에 진화론의 노도의 물결을 막기 위해 성도들이 선한 의도로 창조해 낸 허구(fiction)이다.   마치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하게 재창조를 입증해 주는 성경으로 광고하면 그것 자체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로를 가로막습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회가 기존 교단들에 의해 이단 정죄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창1:28을 ‘다시 채우다’로 번역하여 재창조를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채우다’는 결코 킹제임스 성경만의 독특함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를 포함해서 틴데일 등 15-17세기의 성경 번역자들 가운데 아무도 재창조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부디 이제는 유익 없는 재창조 논쟁은 접어두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우리 모두 매진하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독자 스스로 판단을 내려 신학을 잘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목사인 저에게 연약한 지체들이 이런 것들을 묻기에 저는 아는 대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긍휼이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정상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 읽기http://new.cbck.org/BoardRedirect/sermon2/892 럭크맨의 극단적 세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http://keepbible.com/Cmn2/View/4CU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간극 이론, 갭 이론)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Nz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2 스코필드 성경의 창세기 재해석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0 히11:3에서 말하는 '세상들'이란?http://www.keepbible.com/Cmn1/View/42t 재창조론에 관한 7가지 의문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1 And’를 살려 창세기 1장 읽기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H 왜 둘째날에는 '좋았더라'가 없을까?http://www.keepbible.com/Cmn1/View/42u 누가 화석더미를 말했는가?http://keepbible.com/Cmn1/View/43L#c_14090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http://www.keepbible.com/Cmn1/View/43G 작금의 논쟁 배경 설명 http://www.keepbible.com/Cmn2/View/4CW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을 동시에 들으면서 http://www.keepbible.com/Study5/View/3Zr   'replenish’의 진실과 성경의 창조 정리(재창조 반박 글 모음)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 OED Replenish 정의 --------------- Replenish, v. (rɪˈplɛnɪʃ) Forms: 4–5 replenys, 5 -ysch, 5–6 -ysh(e, -yssh(e; 4–5 replenisch, -issh, 6 -ishe, 4– replenish (also 5 -esch, 6 -esh; 5 repleinsch, -pleynsch, 6 ? replynyssh). See also repleshed and replevish v.2 [f. OF. repleniss-, lengthened stem of replenir: see re- and plenish.] I.I In pa. pple., denoting a condition or state. 1.I.1 Fully or abundantly stocked with things or animals (†also sometimes extended to persons). ? Obs. (very common c 1535–1660, in a great variety of contexts.)    1340 Hampole Pr. Consc. 8908 Fayr bygyngs on ilka syde,‥with alkyn ryches replenyst.    c 1400 Mandeville (Roxb.) vii. 25 Þus es all þe cuntree replenyscht with swilk maner of fewles.    1432–50 tr. Higden (Rolls) III. 169 When kynge Cirus hade fixede his tentes‥repleneschede with victelles [etc.].    1532 G. Hervet Xenophon's Househ. (1768) 17 That these gardeines maye be‥well replenyshed with trees, and all maner of thynges.    1577 B. Googe Heresbach's Husb. iv. (1586) 171 b, A Country replenished with Gentlemen of good houses, and good house keepers.    1631 Weever Anc. Funeral Mon. 421 This religious house was‥replenished with blacke Nunnes.    1696 Whiston Th. Earth iv. (1722) 362 The Waters of the Antediluvian Earth were much more replenish'd, nay, crouded with Fish than now they are.    1741 Watts Improv. Mind i. (1801) 127 It is probable they are replenished with intellectual beings dwelling in bodies. b.I.1.b Provided, furnished, or supplied with something. Also without const. ? Obs.    1533–4 Act 25 Hen. VIII, c. 11 §1 At suche time as the saide olde fowle be mouted and not replenished with fethers to flie.    1588 Shakes. L.L.L. iv. ii. 27 His intellect is not replenished hee is onely an animall.    1650 Bulwer Anthropomet. 137 Whence Infants speak not before their mouths are replenished with teeth.    1707 Mortimer Husb. (1721) I. 266 Cattle and Fowl, wherewith the Country-Farmer is replenished.    1796 Morse Amer. Geog. I. 367 These vast and irregular heights, being copiously replenished with water.   †2.I.2 Filled, fully imbued, pervaded or possessed, with some quality or condition. Obs.    c 1374 Chaucer Boeth. i. pr. iv. 12 (Camb. MS.), They trowen þat I haue had affinite to malefice,‥bycause þat I am replenysshed and fulfylled [L. imbutus] with thy thechinges.    1483 Caxton Gold. Leg 63/1 Iosue the sone of Num was replenyssyd with the spyrite of wisdom.    1502 W. Atkynson tr. De Imitatione i. xxiv. 174 Couetyse persons shalbe replenysshed with all confusyon & penury.    1558 Warde tr. Alexis' Secr. i. 44 Death‥is‥an entring into an eternal life replenished with all joye, solace, and pleasure.    1604 T. Wright Passions iv. ii. §1. 127 A soule altogether depriued of vertue, and replenished with vice.    1633 Bp. Hall Occas. Medit. 271 How happily is hee replenished with knowledge and goodnesse!    1702 Echard Eccl. Hist. (1710) 226 Peter being now replenish'd with the Holy Ghost.   3.I.3 Physically or materially filled with some thing or things, people, etc. Also (in later use) without const.    1490 Caxton Eneydos xiv. 52, I shalle sodaynly make the ayer to wexe obscure‥replenysshed with hayle.    1555 Eden Decades Pref. (Arb.) 55 Suche owlde caues of the mynes as haue byn dygged, are ageyne replenysshed with vre.    1578 T. N. tr. Conq. W. India 74 All the streetes were replenished with people which stoode gaping and wondering.    1612 Woodall Surg. Mate Wks. (1653) 221 Generally all the earth is replenished with Brimstone.    1671 J. Webster Metallogr. xvii. 246 The Ore of Copper‥hath a leaden colour, replenished with certain yellow veins.    1727 Swift Baucis & Philem. 33 They found, 'Twas still replenish'd to the top, As if they ne'er had touch'd a drop.    1791 Cowper Iliad iv. 308 Thou alone‥Drink'st not by measure. No, thy goblet stands Replenish'd still.   †4.I.4 Full, made full, of something. Obs.    c 1400 Mandeville (Roxb.) xxi. 93 A gude ile and full replenischt of many maners of ricches.    c 1450 Lovelich Grail l. 695 Every day Repleinsched they were Of the holy gost.    1494 Fabyan Chron. v. lxxxii. 60 At sondry tymes whenne the sayd Countre was replenyshed of people.    1568 Grafton Chron. II. 684 Of whose valiaunt actes‥their eares had manye times bene fylled and replenished.†b.I.4.b Possessed of something. Obs. rare—1.    1482 Rolls of Parlt. VI. 224/1 Forsomoche that as well the Kyng‥, as other Lordes herebefore have ben gretely replenysshed of Markes and Games of Swannes. II.II In ordinary transitive uses. †5.II.5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 fill v. 5.    c 1386 Chaucer Pars. T. ⁋ 846 Trewe effect of mariage‥replenysseth hooly chirche of good lynage.    c 1400 Mandeville (1839) ix. 102 Thei wolde lye with here Fadre‥for to replenyschen the World aȝen with Peple.    1494 Fabyan Chron. vii. ccxxii. 247 This man made the newe forest‥and replenysshed it with wylde bestes.    1530 Palsgr. 687/1, I have replenysshed my pastours with catall, and my pondes with fysshe.    1596 Bacon Max. & Use Com. Law i. iv. (1636) 23 But [I] am without any remedy except I replenish the ground again with Deere.†b.II.5.b To provide fully with something. Obs.    1526 Pilgr. Perf. (W. de W. 1531) 4 b, God wrought‥the effectes of his mercy in replenysshynge them with his benefytes.    1535 Coverdale Ecclus. xxxii. 13 Geue thanks vnto him that hath‥replenished the with his goodes.    1582 Bentley Mon. Matrones ii. 30 His riches doo replenish eurie one with his goods.   †6.II.6 To occupy (a place) as inhabitants or settlers, to inhabit; to people. Obs.    c 1400 Destr. Troy 12414 Mony weghes thedur went, & wond in the toune, And Replenisshed the place & the playn londis.    1590 Spenser F.Q. iii. vi. 36 Daily they grow, and daily forth are sent Into the world, it to replenish more.    1605 Verstegan Dec. Intell. i. (1628) 13 They were mightily increased in‥Germanie, replenishing euerie quarter and part thereof.    1788 Gibbon Decl. & F. lii. V. 460 The vacant habitations were replenished by a new colony. b.II.6.b To occupy the whole of (a space or thing); = fill v. 7. Now rare.    1563 Homilies ii. Idolatry iii. (1859) 216 God is a pure Spirit, infinite, who replenisheth Heaven and Earth.    1593 Shakes. Lucr. 1357 The more she saw the blood his cheeks replenish The more she thought [etc.].    1664 Power Exp. Philos. 93 The Quicksilver cannot totally replenish and fill the Tube again.    1675 Traherne Chr. Ethics 295 Nothing but honour, and kindness, and contentment would replenish the world.    1829 Landor Imag. Conv., Scipio Æmilianus, etc., Wks. 1853 II. 249/2 A light, the pure radiance of which cheered and replenished the whole heart.   †7.II.7 To fill with food; to satisfy, satiate. Also transf. and fig. Obs.    c 1450 Lovelich Grail xlviii. 377 Nethir mete ne drynk haue we non;‥For the vessel vs repleynscheth not here.    1526 Pilgr. Perf. (W. de W. 1531) 8 All the appetytes of man shall be replenysshed with all goodnes.    1566 W. Adlington Apuleius x. (1893) 51 When I had wel replenished my self with wine.    1665 Bunyan Holy Citie 251 Wherewith she is watered and replenished, as the Earth with rain from Heaven.   †8.II.8 To fill (a place or space) with something. = fill v. 1. Obs.    c 1477 Caxton Jason 28 Ye are worthy that the ayer be replenisshed with callynges and of voyses.    a 1548 Hall Chron., Rich. III 28 b, With pitefull scriches she repleneshyd the hole mancion.    1613 Purchas Pilgrimage iv. vii. (1614) 372 Replenishing the way betweene the Temple and Pallace, with offerings of gold, siluer [etc.].    1615 G. Sandys Trav. 134 They drew out the brains at the nostrils,‥replenishing the same with preseruatiue spices. †b.II.8.b To fill (a person, the heart, etc.) with some feeling or quality. Obs.    c 1529 Wolsey in Ellis Orig. Lett. Ser. i. II. 7 The delay wherof so replenyssheth my herte with hevynes, that I can take no reste.    1552 Bk. Com. Prayer, Ordering Deacons, Replenishe them so with the trueth of thy doctryne.    1635 R. N. Camden's Hist. Eliz. i. 68 The immortall joy wherewith shee should replenish all her subjects. †c.II.8.c To fill (the mind) with some occupation.    a 1548 Hall Chron., Hen. V 35 b, Thei determined‥to replenishe the kynges brayne with some pleasante study.   9.II.9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    1612 Drayton Poly-olb. ii. 38 The naked Sea Nymphs ride Within the ouzie pooles, replenisht euery Tide.    1666 Pepys Diary 19 July, Full of wants of money and much stores to buy, for to replenish the stores, and no money to do it with.    1748 Anson's Voy. iii. viii. 370 His stores replenished, and an additional stock of provisions on board.    1776 Adam Smith W.N. ii. ii. (1869) I. 301 The coffers of such a company‥must require‥a more constant and uninterrupted exertion of expense in order to replenish them.    1832 H. Martineau Homes Abroad v. 68 Susan was always ready‥to replenish the wallets and fill the cans.    1883 C. J. Wills Mod. Persia 185 She took the little silver spoon, and replenished my inkstand with water. †b.II.9.b To fill up (a vacant office). Obs. rare.    1632 Sir T. Hawkins tr. Mathieu's Unhappy Prosperitie ii. 229 Petrus Moronus, whom Charles had drawen from the Cell, to replenish the vacant See.    1651 C. Cartwright Cert. Relig. i. 40 Though all vacancies are replenished by Ministers of the Gospel, yet the succession of the Authority was in the Bishops.   III. 10.III.10 intr. To become filled; to attain to fullness; to increase. rare.    1579–80 North Plutarch (1676) 76 The City of Athens began to replenish daily more and more, by mens repairing thither from all parts.    1673 H. Stubbe Further Vind. Dutch War 80 Her Coffers began to replenish, Her Subjects were rich.    1814 W. Taylor in Monthly Rev. LXXIV. 308 He does not luxuriate and replenish, and promise to bloom again.
2015-04-23 12:26:0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교 새내기 때 교내 선교단체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학생입니다. 처음 2여년 간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기쁨을 누리며 열심히 말씀 공부나 암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2여년이 지난 후에 문득, 내가 보는 이성경이 정말 진짜일까? 예수님이 정말 계셨을까? 하는 많은 의심들이 올라왔고,1년 정도는 그런 생각을 끊어버리지 못하며 스스로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지역교회를 다시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 나갔습니다. 의심으로 괴로웠던 시간이 너무 힘들었기에 "죽을 때까지 구약, 신약 이 성경 두개만을 무조건 믿어야지.무조건 성경만 답이야" 다짐하면서 다시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부딪친 문제는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의 행위나 노력, 열심 등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제가 죄인이라는 것은 깊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내게 진정한 믿음이 있었나? 라는 물음에 스스로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내 내면의 믿음과 과거의 생활들을 깊이 돌이켜보았는데 물론 특별한 고뇌 없이 즐겁게 신앙생활을 했던 적도 있었겠지만 제 안에는 크고 작은 의심이 있었던 것들만 더 확대되어 떠올랐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어떠하심, 속성만을 (ex) 예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의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 예수님의 존재 자체까지 때때로 의심하는 나인데., 지금도 스스로 '너 정말 믿어?' 하고 자문하면, 자신이 없는 나인데...   그래서 몇번 씩 영접기도도 해봤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믿는다고 했는데, 성경외에 다른 생각을 안해보려고 집중도 해보고 하면서 열심히 믿는다고 했는데 혹시 하나님께서는 '너의 믿음은 의심이 섞여있다. 너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구원을 주지 않으셨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둘곳 없이 초조한 생활을 또 1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 씩 구원의 확신과 관련된 말씀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8-9이나 계시록 3:20을 생각해보면서,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래.. 아마 하나님은 믿음의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거야..하며 위안을 삼아보다가도 근데 의심이 섞인 믿음을 믿음으로 보실까? 의심과 믿음은 반댓말이잖아! 의심과 믿음이 어떻게 공존해? 도마에게도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셨으니,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아니야? 라고 스스로 물어보면 다시 걱정이 되며 무너지고 맙니다.   또 할 수 있거든 살려주십시오(?) 라고 말하던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일이 없다, 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책망도 떠오르며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영접기도를 했을 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기보단 나의 의심섞인 믿음? 믿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그 무언가?로 인해 구원을 주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런 문제들까지 다  껴안고 해결해주시려고 한거야! 생각했다가도.. 여전히.. 뭔가 불안하고, 내가 잘못생각한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도 생각이 많이 치우져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나의 믿음없음을 용납해주실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또 다시 의문을 제기해보면 구원을 확신하기가 어려운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인터넷에 이런 문제들을 검색해서 자료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우연히 keepbible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성경 Q&A에서 여러 성경버전들을 통해 굉장히 세심하게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로써 도움을 청해봅니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혜민 올림.       
2015-04-22 16:55:07 | 한혜민
6일 창조와 시간에 대하여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정의하기 어려운 물리적 현상이다.그리고 시간은 주관적이기도 하고 객관적이기도 하다.뜨거운 열판위에서는 1초도 길게 느껴지지만 사랑하는 이와의 하루는 짧게만 느껴진다.그러나 시계라는 측정 장치로 재면 객관적으로 짧고 길고가 확실하게 측정이 된다.또 짧은 시간 내에 수백만 건의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는 1초도 긴 시간이고.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의 1초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객관성을 띠지만.시간을 이용하는 객체에 대해서는 한없는 주관성을 띤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의 6일도 시간의 주관성을 강조할수도 있을 것 같다.시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보는 그런 하루(시간을)를 그렇게 정한 것 일 뿐이다. 창세기 2장 5절에 보면"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 하니라. 그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구절만 따로 읽어 보면 지루한 아주 긴 시간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구절은 셋때 날 식물을 만드시고 그 후 여섯째 날 사람과 동물을 만드신 날 이전의 3일 중의 어떤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하 2장7절부터의 사건을 보면 사람(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세우시고,  동산을 지키고 선악과에 대한 설명을 하시고,  아담에게 모든 창조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아담의 우수한 창의력이 돋 보인다),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셨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 일련의 과정이 무척 긴 것으로 느껴지지만 여섯째 날 하루 중의 일부에 불과한 몇 시간으로 보인다. 아마도 3장의 뱀의 유혹 사건도 창조의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은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처음에 시간, 공간, 물질을 같이 창조 하셨다.하나님은 시간 영역 박에 계신 분이고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창조 6일 중간에 긴 시간을 집어넣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한 번의 창조 그리고 실패 후 그 무덤위에 세상을 다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창조를 하신 후 어떤 시점에 사탄의 작용(아담의 불순종)이 있어 완전한 창조물에 금이 간 것이다. 그리고 사탄도 하늘나라에서 세상으로 쫗겨나 공중의 권세를 잡게 된 것이다(사탄의 타락은 창조 이전 사건으로 보인다) .   눅 10: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엡 2: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고 천년왕국을 지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사람들이다.마귀에 의해 금이 가 있는 처음 하늘과 처음의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지금의 땅(헌 하늘과 헌 땅)은 초기 창조후 폐허를 정리한 잔해 더미 위에 다시 만든 땅이 아니고 그냥 처음(6일 창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땅이다.   계 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하나님이 계신 곳(하늘나라)과 세상(창조물)의 시간은 결코 1:1로 대응 될 수 없는 것이다.   (출 20:11)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31:17)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하라.
2015-04-22 13:51:32 | 허광무
창조의 시작부터   (1) “Creation” 단어의 뜻.    Creation(창조)은 창조하다(create)의 명사형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집니다. (a)창조,창시,신설. (b) 발생 (c) 창작,창조물 (d) 세계,(집합적)만물   (2) 성경에서는 어디 어디에 쓰였나요? 총 6번 쓰였습니다.   (막 10:6)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막 10:6)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막 13:19) 그 날들에 고난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세계가 시작된 때부터 이때까지 그런 고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막 13:19) 『For in those days shall be affliction, such as was no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which God created unto this time, neither shall be.』   (롬 1:20)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롬 1:20) 『For the invisible things of him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롬 8:22) 또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2) 『For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groaneth and travaileth in pain together until now.』   (벧후 3:4)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벧후 3:4) 『And saying, Where is the promise of his coming? for since the fathers fell asleep, all things continue as they wer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계 3:14)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계 3:14)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write; These things saith the Amen, the faithful and true witnes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   6번의 용례를 보면, Creation은 -       “하나님의 창조세계” -       또는 “창조물” -       또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         (3) 하나님의 창조가 끝났나요? 아니요.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는 진행 중이십니다.   (사 65:17) 『¶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며 생각나지 아니하리라.』 (렘 31:22) 『¶ 오 너 타락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떠돌아다니려느냐? {주}가 새 일을 땅에 창조하였으니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둘러싸리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4) 그러면, “창조의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는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또는 세계 또는 하나님의 창조행위 의 시작부터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래 막10:6절은 무슨 뜻입니까?   (막 10:6)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막10:6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진행하고 계신 창조행위의 시작시점에 또는 창조세상의 시작 시점에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창조의 시작 시점, 즉, 6천년 전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습니다.      
2015-04-22 08:46:53 | 홍승대
마가복음 16 : 9 ¶ 이제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일찍 일어나신 뒤에 전에 친히 몸속에서 일곱 마귀를 내쫓아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니라.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성경 보다보니 즐거운 구절이 하나 있어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도 되나 싶어 질문 드려요.   주의 첫날 주님께서 일찍 일어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드셨다는 부분은 주님은 먹는 것이 필요 없으시지만 교제를 위해 드셨다고 이해하며 읽었는데 부활의 몸을 가지고도 잠을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실상은 부활의 몸도 맛있는 것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잠을 통해 세포를 재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신자가 되어 이제야 편하게 신뢰의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었는데 복병을 만났습니다. 시간 나시는 분 설명좀 부탁드려요~
2015-04-22 07:34:47 | 김호진
안녕하세요 역대하와 열왕기하 상이한데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문의 드립니다. 아하스왕이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후 아시리아왕에게 도움을 청한 이후의 내용이 상이합니다.   열왕기하 16:8 주의 집과 왕의 집의 보고에서 찾은 은과 금을 취하여 아시리아 왕에게 예물을 보내매              16:9 아시리아 왕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 아시리아 왕이 올라와 다마스쿠스를 쳐서 점령하고 그곳의 백성을 포로로 사로잡아 기르로 데려가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역대하 28:20 아시리아 왕 딜갓빌네셀이 그에게 이르러 그를 괴롭게 하고 그를 강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21 아하스가 주의 집과 왕의 집과 통치자들에게서 일부를 취하여 아시리아 왕에게 주었으나 그가 그를 돕지 아니하였더라   전 성경에 오류가 없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다만 상이해 보이는 두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2015-04-21 20:42:14 | 김춘섭
          신념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녜요.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에요. 스스로 있는 자에겐 신념 따윈 없어요. 나는 나고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종잡을 수 없는 그분 자존의 사실 그 자체가 그냥 진리이기에 하나님 그분의 창조물로서 아니 새로운 창조물로서  우린 혼란일 수 없는 하나님과 창조자 그분의 섭리로 보존해 주신 말씀들을 진리로 믿어야 산다는 것 밖에. 하여 이 구절들은 서로 소모하다가 다 패배자가 되는 혼돈에 빠지라고 주신 말씀이 아녜요. 어언 지식 쌓기의 시간을 다 마쳤노라고 하는  시간 많은 자들의 우쭐케 하는 신념을 은어처럼 세워주기 위함도 아녜요. 다만 이 구절들은 하나님은 창조자요 그분 입술 아래 지칭되고 질서 된 모든 것들 그래요 시간마저도 바람마저도 그분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환히 드러내지요.   우리 화평의 창시자 앞에서 이 구절들을 다시 낭독해 보아요. 우리 해석하여 뱉은 밀어의 말들이 말씀보다 더 훌륭하였었다는 그 신념을 진리로 심판하실 심판자 앞에서 큰 음향으로 틀어놔 보아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    그래요 이제 우리 사람의 신념에 배반을 주고 하나님의 진리를 믿어요. 낭독하였고 들었고 믿고 있나요?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던 형체가 없고 공허하였던  땅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던 깊음의 표면에 있었던 어둠이 그저 창조세계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잘 기거하고 거처로 삼을 단 한 번 창조된 최초 골자요 토대였다는 것을 더 이상도 아닌 골자요 토대인 것을.                       ㅁㅁ시편 146 : 6(kjb) 그분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영원히 진리를 지키시고   ㅁㅁ욥기 38 : 4(kjb)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2015-04-16 17:11:02 | 나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