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깊이 음미할 바가 많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독립 교회는 너무 독립을 하여 문제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독립을 빙자하여 무법을 이루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제재를 받지 않으니 마음대로 법을(특히 미국식 독립 교회 법을) 강제로 적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의 독립 만세는 또 다른 율법주의를 가져오고 거기 속한 성도들은 그저 답답해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신약성경의 주님에게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참된 자유가 생기지요.
이제는 성경의 관점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2009-07-24 11:57:57 | 관리자
독립 침례 교회 분석김 재근 (전주 소망 침례 교회)
우리 교회는 독립 침례 교회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킹 제임스 성경을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교회는 대부분 스스로 독립 침례 교회임을 표방합니다.
우리는 현재 ‘교단’ 없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라는 대중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단’ 있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라는 성경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 있는 개신교 예배당 앞에 ‘교단’ 명칭이 반드시 있어야 할 수식어처럼 붙어 있는 간판을 볼 때면 씁쓸함을 느낍니다.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성경보다 교단을 더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독립침례교회’라는 나의 ‘교단’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독립 침례교회’나 ‘근본주의’라는 표제가 아무리 옳은 주장이고 좋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독립 침례교회’가 뭘까요? 어디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말인가요?
‘교회론’ 관련 서적을 이것저것 뒤적여 봐도 ‘독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상의 설명을 보기 어렵습니다. 독립 침례교회가 독립하고자 하는 대상은 두 가지의 세상 권력입니다. 첫째, 국가 권력; 둘째, 종교 권력(교단).
1. 교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의 민주 국가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권력과 교회(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신정(神政)국가, 제정(祭政)일치, 국교(國敎).... 등의 모습으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신앙은 긍정적 방향이든, 부정적 방향이든 국가권력에 의해서 통제 받았습니다. 독립 침례 교회는 바로 이러한 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따라서 독립 침례 교회의 좋은 유산을 남겨 준(대개 미국과 영국)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는데, 그들이 대항했던 주요 대상은 교회를 통제하려 하는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 자세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이슬람교, 불교, 장로교, 루터교....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국교(國敎)를 찬성합니다. 이 종교들은 국교로 정해진 경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교 분리라는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 침례 교회는 국교를 반대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교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거나,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분리되기 위해서 피흘려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즉, 과거와는 달리 교회가 ‘독립’을 주장하면서 싸워야 할 주요 대상인 신앙을 통제하려는 국가 권력은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정교 분리를 명문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피 흘리며 싸워야 했으나, 지금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도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행위를 국가로부터 통제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신앙 행위가 ‘공공질서’를 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오히려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거나, 세속적 문제를 가지고 국가 권력에 대항하거나,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흘려서 지킨 훌륭한 신앙적 유산을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입니다.
아무튼 ‘독립 침례 교회’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독립’의 내용 중에서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한 가지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2. 교회가 종교 권력, 교단으로부터 독립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구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세상을 향해서 자신들의 권세를 행사하며 유명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단입니다.
때때로 교단의 권세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독의 자격을 남성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교단에서 성경을 무시한 채 여성 안수를 결정하게 되면, 그것이 ‘진리’인 양 수용됩니다. 이것이 교단의 권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교권을 잡으려고 불법도 자행합니다. 진리의 왜곡은 신자나 교회가 성경보다 교단의 권세를 더 우위에 두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교단이 대한민국 기독교계 부패의 온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 침례 교회는 이러한 종교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단체, 교단도 개별 지역 교회를 통제하거나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외부의 교권으로부터 지시 받지 않고 자유롭게 목회할 수 있습니다. 개 교회의 사역과 운영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자체적으로 결의하고 결정합니다.
따라서 독립침례교회가 주장하는 독립의 주제가 강력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교단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독립침례교회는 타 교회, 타 목회자와 수평적 연대와 교제는 하지만, 수직적 관계 속에서 지배 받거나 예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립 침례 교회가 표방하는 독립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독립 침례 교회’라는 ‘나의 교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립’이라는 신앙적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교단’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단으로부터의 독립 한 가지를 위해서 ‘독립, 독립’만을 외치는 일은 지나친 비효율적입니다.
오히려 ‘독립’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정말로 지나치게 ‘독립한 신자’를 만들어냅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하고, 교회로부터 독립하고, 다른 신자로부터 독립하고, 성경으로부터 독립하고....
신앙생활은 전 영역에서 ‘독립’(independent)보다는 ‘예속’(dependent, 의존, 종속)이 필요하며, 예속이 옳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신자들을 향해서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복종하라. (엡 5:21)
너희는 그런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라. (고전 16:16)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성령님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교회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다른 신자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킹 제임스 성경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법령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또 나이든 사람은 젊더라도 성숙한 사람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독립(獨立)보다는 예속(隸屬), 이것이 오히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신앙의 가치입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벧전 5: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모두가 서로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이제 와서는 ‘독립’이라는 말보다는 ‘예속’이라는 말이 더 맘에 와 닿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은 독립적입니까? 예속적입니까? 당신의 교회는 독립적입니까? 예속적입니까?
2007년 8월 29일
2009-07-23 14:59:26 | 관리자
성경으로 세상보기 2
뉴에이지 시대에 살면서 뉴에이지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친근한 형제인 차한 박사님께서 성경으로 세상보기 2라는 책을 통해 뉴에이지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세상보기에 이어 두 번째 나온 이 책은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에게 더욱 유용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자녀들) 앞에 닥칠 일들을 준비하며 한 번 읽어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428&detail=yes
성서 건강학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문명 속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며 살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한 박사님의 성서건강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면에서 많은 통찰력을 줍니다. 여름에 시간을 내서 읽어 보기 바랍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511&detail=yes
2009-07-22 10:09:15 | 관리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 읽기 방법'
“우리 근본주의자들(혹은 보수 주의자들)은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인다”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장합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위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그 말씀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절대로 그것들을 향상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위대한 설교자는 “성경은 다시 기록될 필요가 없고 다시 읽혀질 필요만 있다”라고 말했는데,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모두 ‘성경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확실히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책을 우리가 읽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 가 있는 병사가 고향에서 온 긴 편지를 받고는 3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할까요? 과연 그가 3페이지를 넘기고, 4페이지는 빨리 읽고, 5페이지는 대충 넘기고, 6페이지는 반만 읽을까요? 그가 나머지 페이지를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페이지로 다시 돌아갈까요?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성경 읽는 습관입니다. 사랑하는 고향과 그 편지를 쓴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의 병사는 분명히 그 편지의 모든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시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 그 안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사모하는, 자신의 군사들인 우리에게 ‘고향으로부터의 편지’를 보내셨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읽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보고 시편만 읽으라고 성경책 전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뿐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읽어야 합니다. 고린도전후서에 영감을 주셨던 저자께서 역대기상하에도 똑 같은 영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계시록뿐만 아니라 말라기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계시록 22장 21절까지 다 읽은 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임무가 끝난 양 성경을 옆으로 조용히 치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오직 두 가지 사건만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계속해서 읽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단 두 가지만 있습니다: 죽음과 휴거. 이것들 외의 다른 이유들은 정말로 나약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외칩니다. “그러나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는 깊고도 어려운 뜻을 가진 부분들이 있어요.” 어려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답을 주시도록 약 5분 정도를 드리고는 그 다음엔 답을 찾기 위해 ‘좀 더 나은 번역’ 혹은 성경 주석서를 찾아봅니다. 그들은 마치 차를 몰기 원하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차를 몰기 원합니다. 운전하기 원하는 그의 동기는 순수할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두발 자전거 타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세발자전거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운전할 수 없습니다. 성장해서야 비로소 그는 더 크고 복잡한 것을 ‘운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그것을 읽으면서도 우리은 네 번 혹은 다섯 번 혹은 여섯 번 정도 읽어야 알 수 있는 답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물론 우리는 진지하게 그 답을 원합니다. 우리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답을 다룰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 번째 혹은 열한 번째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에게 주시기로 준비해 두신 것을 처음 읽을 때에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해야만 하며 거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경 주석서들과 다른 번역서들로 가득 찬 선반은 지름길로 가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것들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저는 성경 주석서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성경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우리의 오직 한 분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대체하려는 것을 반대할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최종 권위인 성경을 읽는 시간을 늘리자고 주장합니다.
사무엘 깁 저, “성경의 뿌리와 역사”에서
2009-07-21 16:28:09 | 관리자
고대의 잉크는 진하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 마치 현 시대에 인쇄소에서 쓰는 잉크와 비슷했다(렘36:18).
보통은 분말 숯과 흑색 상아 그리고 나무 수지 등을 배합하여 잉크를 만들었고 또 검은 색 물질을 내는 물고기에서 추출한 물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록하는 사람들은 허리 띠 안에 혹은 밑에 잉크통을 차고 다녔다(겔9:2).
2009-07-20 02:09:01 | 관리자
야곱과 레아 사이의 아들(창30:18).
그는 야곱의 아홉째 아들이었으며 그의 성격과 후손에 대해서는 야곱과 모세가 예언하였다(창49:14-15; 신33:18-19). 잇사갈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54,400명이었으며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세 번째로 수가 많았다(민1:28; 26:25). 그들의 상속 지역은 동쪽으로 요르단, 서쪽으로 므낫세, 북쪽으로 스불론, 남쪽으로 에브라임 지파를 경계로 두었으며 아주 비옥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잇사갈 지파 지도 참조(19,21). 그들은 농작에 능한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용맹심과 애국심이 많은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삿5:15; 대상7:1-5; 12:32).
2009-07-20 02:08:26 | 관리자
유다의 대언자.
그는 여로보람을 대적하여 대언하고 르호보암과 아비야의 역사를 기록하였다(대하9:29; 12:15; 13:22). 여러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갔다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대언자라고 생각한다(왕상13:1-32).
성경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대상27:21; 스6:14; 슥1:1).
2009-07-20 02:07:55 | 관리자
입술을 연다는 것은 말을 시작하는 것이며(욥11:5; 32:20) 입술을 억제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다(시40:9; 잠10:19).
입술의 열매는 찬양, 감사를 뜻한다(호14:2; 히13:15). 타국인의 입술은 말이나 방언을 뜻하며(고전14:21) 거짓말하는 입술은 거짓, 거짓말, 사악함을 뜻한다(잠10:18; 17:7; 시120:2). 불타는 입술은 격렬히 말하는 것을 뜻하며(잠26:23) 입술을 내미는 것은 조롱을 뜻한다(시22:7). 둔한 입술, 부정한 입술은 하나님의 것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함을 뜻한다(출4:10; 사6:5; 렘1:6).
2009-07-20 02:07:29 | 관리자
이스라엘의 열 번째 재판관. 그는 베들레헴에서 났으며 7년 동안 재판하였고 가족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삿12:8).
2009-07-20 02:07:01 | 관리자
동방에서 입을 맞추며 문안하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다(창29:13; 룻1:14; 행20:37).
어떤 때에는 수염에 입을 맞추기도 하며(삼하20:9) 겸손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발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눅7:38) 우상들을 숭배할 때에도 형상들에게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왕상19:18; 욥31:27; 호13:2). “아들에게 입 맞추라.”(시2:12)는 말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서 연합의 입맞춤을 받는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삼상10:1). 이런 문안 법은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도 흔하였으며 초대 교회에도 그리스도인들의 평강과 사랑을 표시하는 약속의 입맞춤이 있었다(롬16:16; 벧전5:14).
2009-07-20 02:06:38 | 관리자
길르앗의 아들.
그는 야일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삿11:1-40; 12:1-15에 나온다. 그는 성급하게 자기 하나님께 맹세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딸은 결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입다를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였다(히11:32).
2009-07-20 02:06:10 | 관리자
성경에서 입은 종종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출4:16; 렘15:19).
하나님은 모세와 입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는데(민12:8) 이는 곧 자신을 드러내며 명확하게 말한 것을 뜻한다. 한편 율법은 히브리 사람들의 입에 있어야 했고 그들은 늘 그것을 반복하고 이야기하여야 했다(출13:9). 한편 그의 입의 막대기(사11:4)와 그의 입의 예리한 검(계1:16) 등은 확증시키고 규제하고 판단하는 그리스도의 말의 능력을 뜻한다(사49:2; 히4:12 비교). 한편 입을 가리키는 히브리말은 종종 명령으로 번역되었고(창45:21; 욥39:27; 전8:2) 용의 입에서 나온 영들(계16:14)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2009-07-20 02:05:40 | 관리자
이 말은 원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다’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복, 심판, 재앙 등이 이를 때에도 ‘임하다’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
2009-07-20 02:05:15 | 관리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복합 히브리말.
이것은 신성과 인성을 지닌 채 사람들과 함께 거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다(사7:14; 8:8; 마1:23).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상태를 나타내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거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2009-07-20 02:04:36 | 관리자
날마다 쓸 것.
2009-07-20 02:04:04 | 관리자
아드리아 바다 동쪽에 있는 유럽의 한 지역.
이곳은 마케도니아의 서쪽에 있었으며 바울은 여기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 지역을 통과하였다
(롬15:19).
2009-07-20 02:03:48 | 관리자
시편은 하나님의 일들을 찬양하며(시33:4; 92:5; 104:24)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일들을 자세히 보여 준다(요10:25-38).
사람의 일 혹은 행위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이 두 부류가 종종 함께 언급된다(롬13:3, 12; 히6:1, 10).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바른 행위 혹은 일을 나타내야 한다(마5:16; 계3:8). 어둠의 일들(롬13:12; 엡5:11), 육신의 일들(갈5:19)은 나쁘다. 고전3:13에서 이 말은 ‘수고하다’ 혹은 ‘일하다’를 뜻하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행한 행위나 업적 등을 말한다(고후5:10 참조). 하나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낸 자를 믿는 것이다(요6:29). 사람의 선한 일 혹은 선한 행위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엡2:8-10).
2009-07-20 02:03:21 | 관리자
봉인하기 위해 쓰는 반지. 반지, 봉인 참조.
2009-07-20 02:02:48 | 관리자
벽을 치거나 문골을 내기 위하여 기둥 사이에 가로 건너지른 나무(출12:22-23).
2009-07-20 02:02:27 | 관리자
모세의 율법은 여러 이유로 이혼을 허락했으나(신24:1-4) 우리 주님은 오직 음행의 이유 외에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마5:31-32; 19:9). 그런데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정혼 풍습과 함께 잘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허락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정혼한 상태에서 육체적 관계를 갖기 전에 다른 사람과의 음행으로 인해 여자를 버리는 것에만 해당된다. 요셉이 마리아를 버리려 했던 것도 바로 음행의 이유 때문이었으며(마1:18-19)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음행에서 난 자라는 치욕적인 평을 받았다(요8:41).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도 이혼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말2:14-16).
한 마디로 결혼한 남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다.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19:6). 결혼 참조.
2009-07-20 02:01:1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