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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형제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오현민 형제라고 합니다.   자주 들르지만 처음 인사드립니다..   ------------   제가 개인 성경공부 하는 방법은 주로 관심있는 주제(단어)를 검색하는 방법입니다.   검색한 결과물을 문서로 만들어 살펴보고, 다시 검색어를 발견해서 또 검색합니다.   물론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양한 신앙서적(에스라 성경사전 등)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   가끔 이곳에 제 개인 성경공부 결과물을 올려도 될런지요?   읽어보시고 이상한 점이 있으면 더 가르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첨부한 파일은 제가 용서라는 주제로 성경공부할 때,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있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제 개인 성경공부의 첫번째 결과물입니다.   처음 만든 이후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요즘도 가끔 수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저 안에 있는 모든 단어를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드러내기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걸 만들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주님 안에서 좋은 교제 부탁드립니다.
2012-10-22 23:29:17 | 오현민
여러분에게 1611년 판의 조판 실수들을 담은 교정 목록 파일을 통째로 드렸습니다. 누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치려 하거든 "나도 다 알고 있어! 아예 목록째 가지고 있지!"라고 말하면서 자랑스럽게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2-10-22 19:30:48 | 관리자
요즘 '그리스도예수안에'에서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400주년 기념판 성경이 1611년 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1611년 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일까요?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두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잘 읽으시면 왜 답이 둘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인쇄공의 조판 실수로 인해 여러 가지 철자 상의 실수들이 들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조금 연구한 사람들 중에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리건 박사의 유명한 글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자세히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0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50#c_   2011년에 킹제임스 성경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간한 1611년 판 영어 성경의 맨 뒤에는 1611년 원판에 있는 철자 상의 오류들을 보여 줍니다(파일 참조하기 바람). 이 명단은 'and'를 'aud'로 인쇄한 것 같은 소소한 것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명단에만도 150 여 개의 조판 실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조판 실수들은 첫 판이 인쇄된 이후에 대부분 곧바로 교정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리건 박사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한영대역 성경 부록에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약 150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현대 스타일의 영어 성경으로 안착되었습니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1611년에 잘못 조판된 부분이 다 교정되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이러한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예를 통해 잘 보여 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uthorized_King_James_Version   1611년 판1. Though I speake with the tongues of men &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e or a tinkling cymbal. 2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sie,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ove mountaines, and have no charitie, I am nothing. 3 And though I bestowe all my goods to feede the poore,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e burned, and have not charitie, it profiteth me nothing.   1769년 판(현대 판)1. Though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 or a tinkling cymbal. 2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3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이 세 구절 안에는 철자 변화가 11개, 타이프 세팅 변화(고딕체에서 로마체로,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리건 박사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로 인한 변화가 9개, 구두점의 변화가 3개, 2절에서 본문 자체의 변화가 1개(no charity 대신 not charity)가 들어 있습니다.   자, 정직하게 이 두 판을 비교해 봅시다.이 두 판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not'과 'no'를 가지고 '틀리다' 혹은 '맞다'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이것은 문법상 not이 맞는데 조판공이 no로 잘못 조판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2절과 다니엘서 11장 38절에는 1611년 판과 지금 인쇄되는 판에서 God와 god이 바뀌어 있습니다. 사43:12의 경우 원어 성경에는 god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래 없으므로 지금 나오는 성경은 god을 이탤릭체로 바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판공의 실수로 1611년 판에는 이것이 God으로 정자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조판공이 실수한 대로 God을 따르지 않고 god을 따라 번역하였습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우리는 1611년 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1611년 판을 따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판 실수요, 원본을 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는 명백한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god을 따라 번역한 것이 실제로 1611년 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다음의 사례도 보시기 바랍니다(God와 good).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19#c_   연약한 성도들에게 이런 실수들을 보여 주면서 "봐라. 1611년 판과 지금 우리가 보는 판은 다르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1611년 판을 번역한게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는 이들을 보면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과연 이런 주장이 성경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한 주장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반대를 위한 흠집내기일까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흠정역이 아닌 어떤 성경이 더 낫다는 말씀인가요? 연약한 성도들을 세워 줘도 모자랄 판에 성경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면서 통쾌해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이 과연 성경을 믿는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우리는 1611년 판을 본문으로 쓰지 않았습니다.하지만 1760-1769년에 현대 영어로 확정된 영어 성경을 1611년 판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1611년 판에는 사람의 명백한 실수들이 있었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세속 사람들도 - 미국의 의회도 - 2011년을 맞아 킹제임스 성경 반포 400주년을 기념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1760-1769년이 아니라 1611년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554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교정을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렇게 교정된 성경을 가지고 실제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시기 이후로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선포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150년의 기간에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행하신 교정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소문자 g냐, 대문자 G냐는 하나님의 교정에 의해 이미 이루어져서 지금 우리 손에 확실하게 들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이 1611년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그 성경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는 이들이 늘 인용하는 분이 웨이트 박사님입니다. 이들에 의해 올해 연세가 85세이신 웨이트 박사님은 늘 우롱당하고 있습니다. 웨이트 박사님이 실제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직접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웨이트 목사님 교회에서 그분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분의 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매해 미국을 방문하면 그분의 집과 교회를 방문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그러므로 성경 보존에 관한 그분의 입장이 무엇인지 저는 확실히 압니다(<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 3-4쪽, 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2&page=2   --------------------------- D. 1611판 킹제임스 성경과 현재 킹제임스 성경 사이엔 겨우 421개의 단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현재 킹제임스 성경이 1611년의 킹제임스 성경과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사실 여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토마스 넬슨(Thomas Nelson) 출판사는 1611년도에 인쇄된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일반 로마체로 서체만 바꾸어 내놓았다. 이 책은 한때 절판되었지만 다시 출간되었다. 본래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은 독일어체로 인쇄되었다. 나에게는 독일어체로 되어 있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사진 복사본이 있다. 읽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s'가 다르다. 하지만 넬슨사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읽기 쉬운 서체로 바꾸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런 작업을 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아마 독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뉴킹제임스 역본(NKJV)은 그저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을 기초로 한 또 하나의 '판(edition)'으로서 현대인에 맞게 개정되어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초판 때인 1611년부터 NKJV가 나온 1979년까지 킹제임스 성경이 여러 번의 굵직한 변화들을 겪어 왔다는 말도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1917년에 나온 「구(舊) 스코필드 주석 성경」 - 킹제임스 성경 본문 사용 - 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는 「구(舊)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녹음테이프로 듣고 넬슨 출판사에서 나온 1611년 판 흠정역 성경은 눈으로 읽으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단어 하나하나를 비교해보았다. 나의 귀로 듣고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극히 일부분이었다. 물론 철자법은 꽤 다르다. 원판 킹제임스 성경과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 사이에는 철자법에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상당히 크다. 예를 들면 신명기 31장 1절에 "Moses went and spake these words to all Israel."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에는 'words'라는 단어가 'wordes'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비교를 하면서 다르다고 느낀 부분은 발음뿐이었다. 즉, 나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과 오늘날의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하면서 소리에 있어 몇 가지 변화를 발견했다. 그러나 모두 출력해서 확인해 본 결과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결국 차이점이라는 것은 신구약 전체에 걸쳐 발음이 다르게 나는 421개의 단어였다. 킹제임스 성경이 몇 개의 단어로 이루어졌는지 아는가? 무려 791,328개의 단어이다. 1611판 킹제임스 성경과 오늘날의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는 전체 단어들 중에 고작 발음이 다른 421개의 단어들뿐인 것이다. 이 421개의 변화들 중에서도 285개는 '형태'만 바뀐 사소한 변화들이다. 나머지 136개만 '내용'의 변화 즉 'of'나 'and'의 첨가와 같은 변화들이다. 소위 사소한 변화들의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towards'와 'toward'가 다르게 들렸다. 이렇게 달리 들린 단어들을 기록했다. 모두 세어 보니 14번이었다. 또 나는 'burnt'와 'burned'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는 총 31번으로 아주 적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나는 그것을 모두 따로 계산했다. 가령 'amongst'와 'among'의 경우 36번 있었고 'Lift up'과 'lifted up'은 51번 있었다. 'You'는 82번 'ye'로 바뀌었다. 보시다시피 아주 사소한 변화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소한 변화가 214군데 있고 여기에 기타 71군데의 다른 사소한 변화들을 합쳐서 총 285개의 형태 변화가 있다. 요약하자면, 귀로 구별할 수 있는 변화가 총 421개인데 여기서 '모양'만 다른 곳이 285군데, '내용'이 다른 곳이 136군데이다. 이 조사 자료는 모두 책자로 정리되어 구할 수 있다[B.F.T. #1294].   E. 오늘날의 킹제임스 성경은 사실상 1611판 킹제임스 성경과 같다 오늘날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이 진짜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림없는 킹제임스 성경이다. 따라서 여기에 초판과 비교해 3만, 4만, 5만개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철자법의 차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하지만 철자는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에 관한 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지금 출간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79  자신이 마치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전도사처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성경 보존에 대해 성도들이 믿고 있는 바를 어떻게든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일이 어떤 기쁨을 가져다 줍니까? 이들의 사술(詐術 혹은 邪術)에 말려드는 양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합시다.   원어의 보존을 믿는 사람이라면 웨이트 박사님처럼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완전히 보존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을 세워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성경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철자의 변화, 대소문자 변화, 고딕체에서 로마체로 타이프 세팅이 변한 것을 보여 주면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려는 이들에게 잠시도 틈을 주지 말기 바랍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이와 같은 약속에 따라 지금 우리 손에는 완전히 보존되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저희가 출간하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1611년 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셔도 됩니다. 샬롬  
2012-10-22 19:16:28 | 관리자
딱정벌레 이야기   구약성경에서 ‘딱정벌레’라는 말은 레위기 11장 22절에 단 한번 나옵니다.   곧 그 중에서 이것들 즉 메뚜기 종류와 흰머리 메뚜기 종류와 딱정벌레 종류와 베짱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레11:22)   [Even] these of them ye may eat; the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ald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eetle after his kind, and the grasshopper after his kind.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사람들이 가끔씩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이들은 딱정벌레(히브리어 하르골, 스트롱 번호 2728)가 틀리고, 대신 ‘귀뚜라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물론 개역성경은 이들의 주장대로 귀뚜라미라고 번역함). 또한 이들은 몇몇 주석을 들먹이면서 유대인들은 딱정벌레를 먹지 않고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안 먹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딱정벌레는 한자로 갑충(甲蟲)입니다. 즉 껍데기가 있는 벌레면 다 딱정벌레입니다.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가서 딱정벌레 항목을 보면 지구의 전체 곤충의 40%가 딱정벌레목(目)에 속하며 구체적으로는 약 35만-40만 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과 관련해서는 인류의 80%가 벌레를 음식으로 먹으며 벌레 중에서 사람의 음식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딱정벌레라고 나와 있고, 현재 344종이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딱정벌레를 식용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레위기 11장의 딱정벌레, 즉 beetle은 생물 분류법에서 장수풍뎅이 같은 한 종(種)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목(目)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딱정벌레목(目)에는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Beetle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 하르골을 바르게 딱정벌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나오므로 다른 용례를 보고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1900년대 중반의 세계적인 석학인 에드워드 힐즈 박사는 자신의 책 <킹제임스 성경 변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 보존에 관한 교리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3&page=2   1611년 이래로 온 세상에 Holy Bible로 자리 잡으며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준 성경은 유일하게 킹제임스 성경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성경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로마 카톨릭 소수사본에서 나왔습니다, 그 수많은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히브리어 하르골을 딱정벌레라고 번역해 주셨고 이들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역사를 통해 그 단어가 딱정벌레라고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해 주신다는 것은 1차적으로 그분의 입에서 나온 원어의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처럼 원어 하르골 자체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 단 한번 나오므로 아무도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히브리어 사전 자체도 어떤 사람이 기록했느냐에 따라 다른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우리는 단순하게 약 50명의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바르게 인도를 받아 그 히브리어를 딱정벌레로 바르게 번역했다고 믿습니다.   이런 것은 다음의 유명한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전도서 1장 14절, 2장 11, 17, 26절, 4장 4, 6절, 6장 9절(7회)에는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I have seen all the works that are done under the sun; and, behold, all [is] vanity and vexation of spirit.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은 뒷부분을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하였고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이 세상의 다른 역본들은 (심지어 뉴킹제임스 역본까지) 다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스트롱 번호 7306)와 ‘레우트’(스트롱 번호 7460)입니다. 잘 알다시피 루아흐는 영도 되고 바람도 되고 숨도 됩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처럼 영으로 번역해도 되고 개역성경처럼 바람으로 번역해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우트에 있습니다. 레우트라는 말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여기 전도서에만, 위에서 언급한 7구절에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다른 용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처럼 ‘영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믿든지 다른 성경들처럼 ‘바람을 잡는 것’으로 믿든지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경 보존 역사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고 믿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이것을 영적인 문제로 보았고 다른 번역자들은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철학적 문제로 보았습니다. 저자인 솔로몬이 과연 어떤 관점에서 이 단어들을 썼을지 여러분이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헛된 수고는 영을 괴롭게 하는 일인가?” 아니면 불교나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생이란 바람을 잡는 것처럼 공허하다는 뜻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킹제임스 성경 사역에 복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천주교 사본을 지지하는 현대 역본들과 번역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으므로 (물론 그들이 만든 사전들도 신뢰할 수 없으므로)  단순하게 그분의 말씀대로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 바른 번역이라고 믿습니다.   이 두 예를 통해 보셨겠지만 원어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위의 말씀은 주님께서 분명히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해 주실 것을 확증하신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주님의 보존 약속은 어디까지 미칠까요? 원본의 단어들에까지만 미칠까요? 아니면 번역본의 단어들에까지 미칠까요?   저는 분명히 말씀 보존의 약속이 일차적으로 원어에 있음을 믿습니다.그러나 여기서 끝이 나면 그 약속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유효하지 않습니다.원본의 그 단어들이 우리에게 바른 단어들로 전달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이 번역본에까지 이른다고 믿습니다. 이런 약속에 따라 온 세상의 성경들을 살펴보니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역본들이 한결같이 천주교 사본을 사용하여 삭제와 첨가 등이 일치하고 교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들을 다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보존해 주신 사본들에 근거한, 전 세계 만인의 말인 영어로 기록된 킹제임스 성경이 이 시간까지 우리에게 보존해 주신 최종적인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저의 믿음입니다.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원본주의자들이 늘 인용하는 웨이트 박사님(Dr. D. A. Waite)도 자신의 책 <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최종적이고도 유일한 권위가 됩니다. 사실 성도들에게는 삶 자체가 믿음과 여기서 나오는 실행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최종 권위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인생과 온 우주 공간의 모든 문제에서 이 성경이 최종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떻게 역본이 최종 권위가 될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최종 권위이고 킹제임스 성경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종 권위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100% 킹제임스 성경 안에 들어 있으므로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최종 권위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 22절은 껍질이 있는 딱정벌레가 맞고 전도서의 일곱 구절은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번역은 다 틀린 번역입니다. 이 구절들에 관한 한 그런 성경은 보존되지 않은 성경이요, 따라서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원어의 단어들의 보존을 믿습니다. 또한 그 원어의 단어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100% 보존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향상시켰음을 뜻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 보존된 원어의 단어들을 만민이 알아듣게 최종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서 전달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분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믿어도 됩니다. 다만 저는 말씀 보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실제 데이터들의 분석과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지금 이 시간에 우리에게 100% 보존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믿으며 누가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면 서슴없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가져갈 것입니다. 원어는 못 가져갑니다.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제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성경이 온 세상 모든 것의 최종 권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지금 이 시간까지 최대한 우리말답게 일대 일로 대응이 되게 번역해 놓은 순전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확실한 성경입니다. 확신을 가지셔도 됩니다.   참고: 웨이트 박사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 14쪽, 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2&page=2   D. 영어로 이루어진 성경 보존과 킹제임스 성경과의 관계 1. 관계 개요나는 하나님께서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영어 안에서 성경 보존을 이루셨다고 믿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성경 보존이 곧 영어 역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올바른 히브리어, 그리스어 단어들을 영어라는 언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영어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믿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가 있다. a. 첫째, 킹제임스 성경 원어 본문의 우수성 때문이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되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본문의 우수성을 말한다.b. 둘째,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우수성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당대에나 오늘날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 탁월했다. 오늘날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에 비하면 소인국 난쟁이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다.c. 셋째, 킹제임스 성경 번역 기법의 우수성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른 역본들과 차이가 있다. 다른 역본의 번역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 기법을 쓰지 않았다.d. 넷째, 킹제임스 성경 신학의 우수성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79
2012-10-22 17:52:16 | 관리자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라, 그속에 설마 비진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 이므로 일반적으로 믿게 되며 그대로 굳어져 이제는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워져 버렸네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학교 선배인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그 선배님은 신학교의 사본학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고서 저에게 답을 해주었는데 그 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배님 왈, 킹제임스성경에도 번역본의 한계로 인해 오류가 많이 있으며, 심지어 그 오류들 자세히 연구해보면 사탄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더이상 흠정역성경에 대해서는 선배님께 묻거나 답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신학체계에 갖혀서 마음을 열지 않으니, 인내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2012-10-22 13:50:03 | 양희석
목사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왜 말씀보존학회에서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안갈 따름이네요. 특히 '이기다'의 뜻으로 쓰일때는 목적어를 '사람'으로 둘 수가 없는데... 예를 들어, I won you.라고 하면, '내가 너를 얻었다'의 뜻으로만 쓰이듯... '내가 너를 이겼다'라는 표현으로 I won you. 라는 말은 없지요. 'I beat you.'는 있어도...
2012-10-20 11:51:19 | 김재원
사실 교인들이 이 글을 읽고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래도 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이나 킵바이블의 깨어있는 분들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라는 판단이 들어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형제님 말씀 맞습니다. 저 또한 성탄절 날, 가족과 함께 예수님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공감합니다.참~제 이름 '재'자는 '실을 재'입니다. 그리고 성은 울산 김씨랍니다.
2012-10-20 10:53:20 | 김재원
고전15:20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런데 말씀보존학회 성경은 끝을 '첫 열매들'로 해서 그리스도를 복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일입니다.
2012-10-20 10:00:25 | 관리자
옛날에는 저는 성경에서 착착 맞아떨어지는 부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갔는데 지금은 아예 그런 걸 초월하여 알쏭달쏭한 부분, 하나님의 비효율적인(?) 듯한 면모, 불신자들이 실족할 만한 면모에 대한 묵상을 더 하게 되더군요. 그래도 복음을 거부하는 논리들은 대부분이 형제님의 말씀처럼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이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 언제나 100% 즉결심판이 이뤄졌으면 사람은 모조리 구원받을 기회도 없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졌겠죠~!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
2012-10-20 08:14:40 | 김용묵
위에 Link 주소창을 클릭하시면 관련 동영상 "크리스마스의 진실" 볼수 있습니다. 짧아서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상당한 임팩트의 동영상입니다. 저도 보곤 섬뜩하더군요.. 게시판 용량부족으로 글을 다 못채운 채로 끝냈네요. 마지막 참고싸이트는 알 레이시박사 의 저서 '아이들의 천국'의 부록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정동수목사님께서 번역을 하신 것으로 위 크리스마스의 내용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알아야 할 것은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올린 글이니 양해바랍니다.
2012-10-19 16:12:20 | 김재원
며칠 전 처음 글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올라와 있는 글의 수준을 비교해 보면 저는 여러모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 책들과 자료를 보며 조금 조금씩 진리를 탐구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왜 이리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우리는 역사적 진리로 알고 있는 사실 또는 상식이 깨어질 때를 경험합니다. 그때 받는 충격의 느낌은 누가 뒤에서 쇠망치로 저의 머리를 세게 내리꽂는듯 한 느낌입니다. 제가 그동안 역사적 진리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맞은 줄 알았는데,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거기에 동조하는데, 자세히 분석하고 알아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거기서 오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을 알고서 받았던 느낌도 그랬습니다. 개역성경이 문제가 있는 성경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수 십년을 살아왔는데..어느 누구하나 알려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내용적인 차이보다도... 그 내용 안의 발단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사탄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쭈욱 역사해왔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사탄이 이를 두고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겠지요.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듯이... 마귀가 해도 해도 안되니까 성경변개 등 온갖 술수를 쓰며 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금의 이 지경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카톨릭에 사탄이 역사함으로서 지금까지 고도의 전략과 술책을 쓰며 그리스도의 신성함에 먹칠을 하고 우리들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 천주교의 실체를 알고서 그것이 계시록의 음녀(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실 기독교의 모태가 천주교이며, 그 안에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뉴월드오더'를 주도하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세력들을 우연히 알 기회가 있었고 관련서적을 읽고 알아가던 중,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을 움직이는 주동세력이 로마카톨릭의 '예수회'라는 것을 알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의 칙출판사에서 나오는 만화책, 알베르토시리즈를 보면 그 실체에 대해서 명확히 나와 있는데 그때 천주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종교집단인지를 재차 실감했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요. 얼마전 유튜브에서 검색 중에, '크리스마스의 진실'이라는 동영상을 보고.... 전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그것은 제게 상당한 쇼크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써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클로스 등...성탄절이 다가오면 괜히 설레고 즐겁게 보낸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는 Christ(그리스도) + Mass(미사)로 풀어쓰면 '그리스도의 미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의 '미사'의 개념을 다들 아시겠지만, 성경적이지 못하며 교리상 부적합한 요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의 어원 자체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첫번째로, 예수님은 12월 25일에 태어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2장8절을 보면,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말하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들에 거하며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라." 여기서 '양떼를 지키더라'가 포인트인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고 합니다. 한 겨울 밤에 들에서 양떼를 지킨다는 게 말이 안되지요, 3월 말~10월 말까지 양떼를 들에서 지키기 가능한 때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쯤,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백성에게 자기 도시로 가서 조세등록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조세 등록을 하게 하였는데 이 조세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 처음 한 것이더라. 모든 사람이 조세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의 도시로 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과 혈통에 속하였으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시에서 나와 유대로 올라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도시에 이르러 자기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세 등록을 하려 하였는데 그녀가 아이를 배어 배가 불렀더라. (누가 2:1-5)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동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거리를 직선 최단거리로 잡을때 120km라고 하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지역을 피해 돌아서 이동하였으므로 그 거리는 대략적으로 150~180km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평균 30km를 이동한다는 가정하에 대략 만5~6일 정도 소요된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산악지대의 지형특성과 만삭이 다 된 마리아를 봤을때 대략 10일정도는 걸렸을 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정해보지요. 만약 12월의 매서운 추위와 비가 왔을때 예수님께서 출생하셨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10일이나 되는 장거리이동을 과연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하필이면 그 시기에 모든 백성에게 조세등록을 하라고 했을까요? 마태 24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참조: 만삭이 다 된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한 거리 http://blog.naver.com/keepfuture?Redirect=Log&logNo=163621437   세 번째로, 12월 25일은 고대 바빌론 시대 이교도들의 태양신 축제일인데 세미라미스의 아들 니므롯(바알, 타무즈, 오시리스라고도 불림)이 21일 해가 가장 짧은 날에 죽었다가 24일 길어져 부활했다고 하여 25일을 탄생일로 축제하였는데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기독교의 성탄절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로마시대 때에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로 불리웠으며 이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즐겼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Tree) 또한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푸른나무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우상숭배사상으로 가득찬 이교도들의 사타니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기시하시는 푸른나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여러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역대하 28:2~4) “너희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우상들과 더불어 너희 자신을 불태우며 바위 낭떠러지 밑의 계곡에서 자녀들을 죽이는도다.”(이사야 57:5) “옛적에 내가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매 네가 이르기를, 내가 범법하지 아니하리라, 하더니 네가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돌아다니며 창녀 짓을 행하는도다.”(예레미야 2:20)   결국 12월 25일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 탄생일을 기리라는 말씀 또한 없으며 AD.354년 로마카톨릭의 리베리우스 주교에 의해 크리스마스가 공식 제정되기 이전까지 그 날을 지켰던 기독교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참고로 산타클로스는 4세기 미라(Myra)의 감독이었던 니콜라스(Nikolaas) 혹은 북극에 살면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던 이집트의 신 베스(Bes)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빨간색 털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사슴이 끄는 눈썰매를 모는 지금의 산타이미지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코카콜라 매출이 저조해지자 활성화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코카콜라가 이미지마케팅을 한 결과물이구요. 전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SANTA라는 알파벳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운데 N자를 제일 뒤에 위치시켜 보세요...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는 고대 바빌론 타무스(바알)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제일인데, 사람들은 그 기원도 모른 채 성탄절 술에 취한 채 흥청망청 떠들어대고 있으며 동시에 사탄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참고: http://blog.daum.net/ssha-1/10680124 레이시박사의 "아이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2012-10-19 15:23:09 | 김재원
인간의 입장에서 극히 상대적인 논리로 진리와 맞서려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의 죄 탓에 발생한 문제들을 끌어모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며 진리 안에 들어오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정말 그들 안에 혼이 "제발 제발 나를 살려줘~~!"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고막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물론 환청을 듣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위에 밝혀 주신 그런 고민을 통해서 믿는 우리가 진리를 모르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사망의 달음박질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전도자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오래간만에 반가운 글에 감사합니다.
2012-10-19 13:35:32 | 김대용
네, 사람이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따라야 함을 글을 쓰면서 느꼈습니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인간의 아집과 고집, 교만, 자기 의 때문에 못 하는 것이지요.
2012-10-18 17:54:05 | 김용묵
오랜만이네요. 공감이 갑니다. 사실 하나님의 조건은 너무 쉽고 간단해서 교만한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꼬투리잡다가 자멸하기 딱 좋은 구조라고나 할까요. 결국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시스템이겠지요.
2012-10-18 13:57:19 | 김재욱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언제나 한 단어의 성경적 용례가 어떠한지 성경 전체를 찾아보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말씀보존학회의 이상한 번역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잠언 11장 3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우니라.The fruit of the righteous [is] a tree of life; and he that winneth souls [is] wise.   말씀보존학회 성경은 끝부분을 “혼들을 이겨 오는 자는 지혜로우니라.”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겨 온다’는 말은 우리말에 없는 말입니다.말 자체가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영어를 보면 win이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중고등학교에서 win은 ‘이긴다’라고 배웠으므로 이것을 살리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말이 안 되게 만드는 번역은 성경을 오히려 망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빌립보서 3장 8절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Yea doubtless, and I count all things but loss for the excellency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do count them but dung, that I may win Christ,   이 구절의 끝부분에는 win Christ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씀보존학회 식으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이겨 오고’라고 해야지요? 벌써 웃기지 않습니까?   신약성경에서 win에 해당하는 말은 켈다이노(스트롱 번호 2770)입니다.누가복음 9장 25절에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버림을 받으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켈다이노를 gai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모체인 틴데일 성경은 이 단어를 wi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win과 gain은 같은 말입니다.   KJB의 전체적인 용례를 살펴볼 때 대개 사물을 얻을 때는 gain으로, 사람(인격체)을 얻을 때는 win으로 썼습니다.   자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쓰는 21세기 영한사전으로 17세기의 영어를 해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win에 대해 다음의 용례를 보여 줍니다. 6.6 To get, obtain, acquire; esp. to get as something profitable or desired; to gain, procure. a.6.a with concrete (material) obj. Obs. or arch. exc. in specific uses: see 7 또 이것은 고어로 쓰이는 용례라고 보여 줍니다. 즉 win은 얻다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win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얻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혼들을 이겨 온다’는 이상한 번역은 킹제임스 성경을 망치는 사례입니다.   부디 우리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특히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2-10-18 13:03:25 | 관리자
킹 제임스 성경만 읽은 지 10년 가까이 되지만 저는 (부끄럽게도) 이런 이슈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집합명사여서 단수형이지만 복수로 쓰는 단어도 있고, 반대로 저렇게 복수 형태이지만 실제로 단수로 쓰는 단어도 있군요.. 정보에 감사합니다.
2012-10-18 10:19:17 | 김용묵
*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참히 망가뜨리고 죽이는 흉악 범죄가 양지나 음지에서 무수히 저질러져 왔다. 그 중에도 죄질이 특히 나쁜 축에 드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연약한 미성년자 내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을 납치· 감금하여 여럿이서 학대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고문까지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짓이다. 영어로는 torture murder이라는 비공식 용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엔 일본에서는 일명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라 하여, 제목부터가 섬뜩한데 정말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흉악하고 인간의 마귀적인 본성이 그대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을까 싶은 torture murder가 벌어진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끼리 덕이 되는 내용은 아니니, 이 글에서 구체적인 사건 내역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5년엔 미국에서도 실비아 라이컨스(Sylvia Likens)라는 소녀가 부모 사정으로 인해 타지에서 맡겨져 키워지던 중에, 집주인 아주머니와 주변 아이들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의 학대와 왕따, 고문을 당한 끝에 겨우 1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채 경찰에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학대를 깊이 살펴보았노니,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라.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편에는 권세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전 4:1)   후자의 경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법정 증언을 바탕으로 2007년엔 엘렌 페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An American Crime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 사건도 자국 내부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건 그냥 AV 배우를 동원해서 선정적인 고어물 성인물 영화로 돈이나 벌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그 반면, 미국의 영화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불리며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아메리카라는 나라에서까지, 옛날에 이런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었다는 분노와 자성의 뉘앙스가 제목에 담긴 것 같다. 감독이 제목을 하필 왜 저렇게 뽑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난 An American Crime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다가 열받아서 차마 끝까지 못 본다고.. 모니터를 때려부수고 악역 배우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그런다. 아무 죄책감 없이 군중 심리로 피해자를 심심풀이 하듯 때리고 괴롭히고 굶기고 배에다가 불에 달군 바늘로 글씨를 새기고는... 나중에 법정에 가서는 “몰라요. 기억 안 나요. /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심한 잘못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렇게 발뺌을 하는 뻔뻔한 인간 종자를 보노라면, 누구라도 짜증과 살인 충동이 하늘로 피어오르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영화는 일본 영화와는 달리 그렇게 선정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실비아가 당한 가혹행위에 비해 영화의 묘사는 정말 정말 많이 희석되고 절제되고 수위가 완화된 것이다.   처참했던 실제 사건의 결말에 비해, 영화는 감독의 희망 사항 내지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여지를 결말에다 두리뭉실하게 남겼다. 실비아가 죽지 않고 거투르드 아줌마의 집을 탈출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는 설정이 들어간다. 그런데 다시 거투르드의 집으로 돌아가니 자기의 몸은 죽어 있고, 그와 함께 탈출한 줄 알았던 실비아도 싹 사라지고 다시 고향의 회전목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실제로 실비아는 극도의 영양실조에다 구타로 인해 발생한 뇌와 내장의 출혈이 도지면서, 목욕 도중에 사망했다.)   우울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도 단조풍의 굉장히 구슬픈 여성 아카펠라 노래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의 고통과 아픔, 슬픔으로부터 벗어난(상징적으로나마) 실비아가 혼자 회전목마에 탄 채, 다음과 같은 독백 대사를 읊는 것으로 쓸쓸하게 끝난다.   And me? I returned to the carnival. The only place I always felt save.Reverend Bill used to say, “For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뒤) 그리고 난.. 놀이동산으로 돌아왔어요. 내 마음의 유일한 고향으로요.빌 목사님은 전에 이렇게 얘기하셨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뜻하신 계획이 있으시다고.. 난 아직도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찾아 헤매는 중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본인이 보기에 이것은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실비아 같은 불쌍한 아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나?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긴 하나?”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 메시지를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거야 세상의 불신자들이 역사상 한두 번 제기해 온 의문이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상에서 흥행하는 영화들치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세워 주는 친기독교 성향의 결론으로 끝나는 게 어디 하나 있긴 하던가? 예수 믿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개념 광신자로 묘사되거나, 개나 소나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밖에 모르는 위선자, 아니면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쩔쩔매고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찌질이 루저로 나온다. 이 셋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못 하는 살인범을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하냐?”(영화 <밀양>) 같은 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거짓으로 왜곡하거나, 민감한 부분만 이상하게 배배 틀어 적용해서 오해를 사게 만들고, 뭔가 말이 안 되고 모순되고 몰상식한 것으로 전달한다.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런 왜곡에 불구하고 천주교 신부· 수녀에 대한 묘사는 교회 예배당이나 목사 쪽에 비해 월등히 더 낫다는 점도 특이한 점.   자, 대놓고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외하고, 여러분이 보았던 일반적인 세속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열거한 특성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꼭 알려 주시기 바란다. 본인도 적극 고려하도록 하겠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본인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An American Crime에서 실비아의 마지막 대사를 보아하니, 그 심상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다음 찬양이 생각 나서였다.   바로, Ron Hamilton--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중년 남자 모습이 많이 뜨는데, 그분이다--의 Rejoice in the Lord 되겠다. 가사 첫 줄에 곧바로 “하나님은 섭리나 계획 없이는 결코 역사하지 않으신다”란 말이 나오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실수도 결코 하지 않으신댄다!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When trying His servant and molding a man.Give thanks to the Lord though your testing seems long;In darkness He giveth a song.   O rejoice in the Lord. He makes no mistake.He knoweth the end of each path that I take.For when I am tried and purified,I shall come forth as gold.   이 곡은 클래식한 리듬과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는 최근인 1978년에 발표되었다.세상에는 성경의 욥이나 요셉이나 다윗처럼, 정말 억울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멘붕 상태에서도 우리 같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긴 인고의 시간을 잘 견딘 끝에 정말로 '황금처럼' 연단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요셉은 누명이 벗겨지고 감옥에서 곧 풀려날 거라는 희망고문만 2년을 견뎌야 했다. 감옥에서 썩은 전체 기간이 2년이 아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다 그 사람들처럼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반드시 펴는 건 아니다.또한 실비아 라이컨스처럼 연단이 아니라 아예 폭력과 학대의 희생양이 된 채,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인생도 역사적으로 한둘이 아닐 것이다.찬양 가사는 세상의 참혹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저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작사자는 그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쓴 것일까?   하나님의 뜻 중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고, 당장 보기 안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 명목으로 잠시 '허락하시는 뜻'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후자에 속하는지에 대해서야 나라고 해서 뾰족한 해답을 알고 있을 리 없다.더구나 세상적으로 잘못되고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을 죄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욥의 친구들처럼), “예수 안 믿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몰상식한 짓은 난 극도로 싫어하며, 그런 식의 논리 전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논증을 못 하면 마치 귀류법처럼 간접적으로, 역으로 접근할 수는 있다.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어차피 그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신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릴 사람도 아니다. 예수님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죄인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서 십자가에서 못을 으랏차차 뽑아 내고 초자연적으로 내려와 버렸다고 해서 그들이 그분을 믿었겠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믿길 진짜로 원하시는 그 성품과 면모를 믿고 따르겠는가!?)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공개 석상에서 어떤 유명한 무신론자가 “자 신아, 네가 존재한다면 지금 3분을 줄 테니 이 공개 석상에서 날 죽여서 너의 영광을 드러내 보아라”라고 고래고래 독설을 날렸다. 성경에 기록된 그런 성품을 가진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진짜 그 무신론자를 죽여 버릴 리가 있겠냐 말이다.   솔로몬이 명판관으로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가 과학 기술을 육성해서 최첨단 유전자 감식 기술로 진짜 애엄마를 논리적으로 가려내고, 집집마다 CCTV를 설치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아이 바꿔치기 범죄 따위는 저지를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통치자로 칭송받을지 모르나, 그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온갖 비극이 찾아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역시 그걸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 직접 세상에 내려오시고, 비록 불신자들이 당장 이해나 수긍을 못 할 방법을 쓰셨지만 죄 문제도 해결하고 구원의 길도 마련해 놓으셨다. 단지 그 방법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에게 학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반박당하거나 없어질 교리를 가진 체계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라 불리는 이 세상의 참 신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안 바라고 '믿음'이라는 것 하나만 원하신다. 히 11:6을 읽어 볼 것. 피조물이 있다면 창조자가 있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이건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바라는 것치고는 너무 소박하지 않은지? (그러나 그게 소박한 요구가 아니라는 걸, 살아 보면 곧 알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북한이나 소말리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등, 모든 물리적인 여건이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조건 같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요소는 정말로 공평하다.   설령 이 세상에서는 정말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다 요절하더라도, 현세와 내세를 모두 합하면 정말로 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현세에서 못 받은 것은 죽어서 다 정산받게 된다.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정신 지체 장애인 사람에게는 아예 특별전형까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의 경륜이 아직 여전히 100% 이해는 안 가더라도, 그렇게까지 비난할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체계 하에서는 원칙과 질서가 있다.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지도 않고, 반증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의 알량한 과학으로 정체가 덥석 파악 가능한 신이야말로 허접한 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물론, 창조론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식의 증거들.. 아주 좋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부조리와 비합리도 세상엔 응당 존재하며, 그 사실을 크리스천이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가령, 이 세상엔 아름다운 생명체도 있지만 파리· 모기나 바이러스나 기생충 같은 생명체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이런 '아리까리'한 면모가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해 굴러가려는 영적 바퀴의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할 때 초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아라. 그걸 극복하는 데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논리 같은 다른 잘난 스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게 돼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그럴싸한 기독교 변증을 기대하고 있던 불신자라면 이런 무데뽀 정신승리법(?) 같은 본인의 결론에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신 걸 난들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선뜻 '믿음'을 선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거도 먼저 남겨 주셨다. 이 갈림길로 인한 유신론 무신론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나, 그 믿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 사건에 따라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버리고, 진지하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2012-10-18 09:58:52 | 김용묵
반가운 소식에 감사합니다. 남도의 귀한 모임이 날이 갈수록 풍성해지고 언젠가는 진리를 수호하는 지역교회로 열매가 맺히는 일도 기대합니다. ^.^ 저는 장로교인으로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게 된 후로 제가 사는 지역에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 복수(複數)의 지역교회를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뜻밖에 동의할 수 없는 교리와 교회 운영상의 안타까운 점을 발견해 결국 출석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목사님들의 사역을 응원해 드렸습니다. 무조건 잘못된 것을 덮자는 생각도 잘못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시대 교회들 안에 가득한 비진리들에 신음하고 또 깊이 신음한 경험이 있는 성도들은 시행착오와 아쉬운 점이 존재하지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극소수의 지역교회와 섬기는 분들에게 보다 많은 격려와 응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잘 알줄로 생각합니다. 매우 주제넘은 이야기지만 댓글을 남깁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2-10-17 12:29:17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