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분이 요한일서 3장 1-8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기에 잠시 글을 씁니다.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3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 4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도 범하나니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 5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6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 8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9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절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질문은 참 단순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매일 죄를 지으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데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죄를 범하지 않느다고 말하느냐? 성도는 두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새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였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신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이 땅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죄를 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 즉 그것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 즉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16 그런즉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면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율법에 동의하노니 17 그런즉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즉 새 본성의 새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 본성의 옛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옛 사람(혹은 죄가)이 죄를 지으니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구원은 마음대로 죄를 짓는 면허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피나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7장 끝의 바울의 결론을 보기 바랍니다. 21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과 요한일서 3장을 같이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그리고 로마서 8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8-04-04 12:59:2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욥기 31장 31절의 뜻이 무어냐고 묻기에 글을 씁니다. 29 혹시 나를 미워한 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뻐하거나 그가 화를 당한 때에 내 자신을 높였던가. 30 나는 그의 혼이 저주받기를 원함으로 내 입이 죄를 짓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 혹시 내 장막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오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만족할 수 없노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무심코 31절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31장에서 욥은 자신의 의로운 과거 행적을 말합니다. 29-30절을 보면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한 자가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이어서 31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장막 사람들 즉 가족들, 친척들, 종들은 욥을 미워하는 자를 보고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만족할 수 없노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즉 그들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욥은 그를 용서하는 일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살을 먹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매튜 헨리 주석이 이를 잘 보여 주므로 영어지만 같이 올립니다. 샬롬 (*) 앞으로 1-2년 내로 마제스티 판 교정을 다 끝내고 출간하면 성경의 모호한 구절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설명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자꾸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보며 많이 배웁니다. Job 31:31He was violently urged to revenge, and yet he kept himself thus clear from it (v. 31): The men of his tabernacle, his domestics, his servants, and those about him, were so enraged at Job's enemy who hated him, that they could have eaten him, if Job would but have set them on or given them leave. "O that we had of his flesh! Our master is satisfied to forgive him, but we cannot be so satisfied." See how much beloved Job was by his family, how heartily they espoused his cause, and what enemies they were to his enemies; but see what a strict hand Job kept upon his passions, that he would not avenge himself, though he had those about him that blew the coals of his resentment. Note, (1.) A good man commonly does not himself lay to heart the affronts that are done him so much as his friends do for him. (2.) Great men have commonly those about them that stir them up to revenge. David had so, 1 Sam 24:4; 26:8; 2 Sam 16:9. But if they keep their temper, notwithstanding the spiteful insinuations of those about them, afterwards it shall be no grief of heart to them, but shall turn very much to their praise.(from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PC Study Bible Formatted Electronic Database Copyright ?2006 by Biblesoft, Inc. All Rights reserved.)
2018-03-16 13:58:36 | 관리자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 앞에서는 죄송한 말인데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느끼는 점들 중의 하나가 내가 정말 많이 무식하다는 것과 또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른다는 것과 더 나아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 넘쳐서 절대 틀릴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주 든다는 것을 요즘 깨닫습니다. 시간을 내서 귀한 설명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2018-03-12 23:26:15 | 이남규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갈라디아서 5장 14절의 성취되었다는 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하여 간단히 글을 씁니다. 질문 요약 ----------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요점은 이 구절을 왜 ‘성취되느니라’ 혹은 ‘성취되고 있느니라’가 아니라 ‘성취되었느니라’로 번역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율법이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때에 성취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마5:18). 그러므로 율법은 지금 성취된 상태로 있을 수 없고 성취되고 있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로마서 11장 25절부터 32절 등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1장 22~33절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27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에 관하여는 그들이 너희로 인해 원수 된 자들이지만 선택에 대하여는 그들이 조상들로 인해 사랑받는 자들이니 29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을 통해 긍휼을 얻었나니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 또한 이제 믿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얻은 긍휼을 통하여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함이라. 3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라.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1. 갈5:14의 성취되었다는 말 여기서 fulfilled는 이미 성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어와 영어 자체가 이미 완료된 현재를 뜻합니다. 여기의 율법은 모세의 십계명을 말하며, 십계명은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 35 그때에 그들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큰 명령은 무엇이니이까? 하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39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40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하시니라.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십계명)의 완성 혹은 성취입니다. 그런데 마5:18의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혹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그중에 초림과 관계된 것들은 이미 이루어졌고 재림 및 천년왕국 등에 관련된 것들을 그때에 성취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관련 예언들도 그때에 성취될 것입니다. 문맥에 맞추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만을 떼어 내면 안 됩니다. 13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 14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13절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십계명의 모든 것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즉 여기의 성취는 예언 성취가 아니라 십계명이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2. 다윗 이야기 어제 어느 자매님이 구약성경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5장 5절 이는 다윗이 헷 족속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토록 {주}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고 그분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어떤 일에서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요점은 이와 같습니다. “다윗에게 여러 아내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것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그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모세를 거치면서 누구나 짓는 죄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이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였습니다. 가장 경건했던 히스기야도, 요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코 일부다처제가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허용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9절 3 ¶ 바리새인들도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하여 그분께 이르되, 남자가 무슨 이유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하매 4 그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에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 7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그녀를 버리라고 명령하였나이까? 하니 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너희 아내를 버리도록 너희를 허락하였으나 처음부터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는 일을 고의로 계획적으로 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다윗은 주님 앞에서 사악하게 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이 일부다처제를 취한 것은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일부다처제를 스스로 행했지만 고의로 사악하게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우리야의 일을 제외하고는 고의로 사악하게 다른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하시는 성령님께서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8-03-12 09:33:00 | 관리자
오!! 저도 이렇게 이해는 했습니다만 체계적으로 이리 정리 해주시니 감사가 됩니다.
좋은 말씀 잘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8-03-05 21:24:42 | 이신율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다음 구절을 보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14 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15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분은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시니라. 16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글 성경을 보면 16절의 ‘그분’은 문맥상 14절부터 이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33년 반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14, 15절을 보면 여기의 그분은 ‘앞으로 나타나실 예수님’ 즉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샬롬
2018-03-05 19:53:54 | 관리자
감사드립니다^^
2018-02-06 21:07:52 | 이신율
안녕하세요? 요한복음 4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When therefore the Lord knew how the Pharisees had heard that Jesus made and baptized more disciples than John, 왜 여기에 '그러므로'가 나오느냐고 물어서 잠시 적습니다. 사실 안 나와도 문제는 없습니다. 기존의 다른 성경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어와 영어에는 이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가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3장의 구조와 상관이 있습니다. 3장 22절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일들 뒤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들어갔고 그분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침례를 주시더라(22). 그리고 23절부터 3장의 끝 절인 36절은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즉 23-36절은 괄호로 보면 됩니다. 괄호를 빼면 4장 1절은 3장 22절과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절의 그러므로는 22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유대 땅에서 침례를 주셨으므로(이것이 그러므로임)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하여 간단히 올렸습니다. 참조하세요. 샬롬 .
2018-02-06 16:24:18 | 관리자
설명을 읽고나니 판단의 공의로 번역한게 말씀의 뜻을 잘 전달해준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정확한 번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8-02-04 04:14:58 | 김상희
욥기 분석 책 소개(1-2장)욥과 친구들의 논쟁(3-42장) I. 첫 번째 논쟁 시리즈(3-14장) (1) 욥이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며 논쟁을 시작함(3장) (2) 엘리바스의 말(4-5장) (3) 욥의 대답(5-6장) (4) 빌닷의 말(8장) (5) 욥의 대답(9-10장) (6) 소발의 말(11장) (7) 욥의 대답(12-14장) II. 두 번째 논쟁 시리즈(15-21장) (1) 엘리바스의 말(15장) (2) 욥의 대답(16-17장) (3) 빌닷의 말(18장) (4) 욥의 대답(19장) (5) 소발의 말(20장) (6) 욥의 대답(21장) III. 세 번째 논쟁 시리즈(22-31장) (1) 엘리바스의 말(22장) (2) 욥의 대답(23-24장) (3) 빌닷의 말(25장) (4) 욥의 대답(26-31장) IV. 엘리후의 말(32-37장) V. 논쟁의 귀결(38-42장) (1)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38-41장) (2) 욥의 회개와 축복(42장)
2018-02-03 10:10:3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judgment라는 단어를 왜 판단 혹은 재판으로 하지 않고 판단의 공의 혹은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 등으로 번역했느냐고 물어서 간단히 글을 올립니다.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18:19) For I know him, that he will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and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that the LORD may bring upon Abraham that which he hath spoken of him.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5134 여기에 나오는 judgment는 히브리어 미스팟을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가진 원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4941 fP;v]mi mishpat {mish-pawt'}8199에서 유래; 본래 의미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호의적으로나 비호의적으로) 특히 ‘언도’나 공식적 선언(인간의 ‘법’, 혹은【특히】거룩한 ‘율법’, 개체적으로나 집합적으로), 그 행위, 장소, 소송, 범죄, 형벌을 포함함; 추상적으로 ‘정의’, ‘권리’나 ‘특권’(법령에 의한 것이나)이나 ‘양식’까지도 포함하여:-+반대자, 의식(예법), 고발, ×범죄, 관습, 결정, 분별, 결정하는, 부과금, 유행, 형태, 재판받다, 재판, 정당한(정의, 바르게), 법(적인)(태도), 방법, (정당한)절차, 규례, 권리, 판결, ×가치있는, +잘못된 성경에 나오는 judgment라는 말은 영어에서도 매우 특별합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사전은 아예 이 단어의 성경적 용례를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Biblical usage로 10번 항목으로 따로 떼어 놓았습니다. 가서 보니 말씀드린 대로 이 말은 정의/공의/공평을 말합니다(justice, righteousness, equity). 그런데 judgment라는 말이 판단 혹은 재판을 뜻하므로 이 말은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공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가서 보면 judgment는 말은 많은 경우 justice와 함께 나옵니다(위에 있는 창세기 18장 19절 참조, 왕상10:9; 대상18:14; 대하9:8 등 다수)).그러면서 옥스퍼드 사전은 2개의 예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틴데일 성경의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1526 Tindal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and have omit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dgment, mercy, and faith: these ought ye to have done, and not to leave the other undone. 다른 하나는 1611 Bible 즉 킹제임스 성경의 이사야서 61장 8절입니다. 나 {주}는 판단의 공의를 사랑하며 번제 헌물에 쓰기 위해 강도질하는 것을 미워하노니 내가 진리 안에서 그들의 일을 지도하며 그들과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라. For I the LORD love judgment, I hate robbery for burnt offering; and I will direct their work in truth, and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them. 보시다시피 이런 데를 그냥 재판 혹은 판단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도 모두 공의나 공도 혹은 의로 번역하였습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런데 단순히 공의 혹은 의라고 하면 righteousness로 생각이 되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judgment를 righteousness의 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판단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원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공의롭게 판단된 것들이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입니다. 이것들 역시 judgment입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8-02-02 11:19:57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앞으로 있을 성전에 대해 물으셔서 잠시 대답합니다. 1. 천년왕국의 성전은 재림 이후에 있습니다. 겔40-48장을 보세요. 2. 그런데 성경을 보면 7년 환난기에도 성전이 있고 적그리스도가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거기로 들어갑니다.어떤 이들은 이것을 환난기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7년 환난기 바로 전에 혹은 시작되면서 건축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4). 1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으매 그 천사가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은즉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계11:1-2).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7). 샬롬
2018-02-01 10:32:39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히브리서 4장 12절 번역에 마치 주어가 2개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무어냐고 묻기에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12절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12절 끝에 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으로 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주어로 잘못 생각하여 번역한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 아마도 의문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영어를 보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12절의 전체 주어는 the word of God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역자들은 뒷부분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하였습니다. The word of Go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다른 성경처럼 ‘의도를 분별하니’로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The word of God discerns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말씀을 높이기 위해 a discerner라고 의인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라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13절의 그분은 말씀으로 봐도 되고(discerner) 하나님으로 봐도 됩니다. 물론 discerner가 3인칭 단수이므로 아무 문제없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12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13 Neither is there any creature that is not manifest in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naked and opened un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샬롬패스터
2017-12-21 10:19:58 | 관리자
요아스와 여호아스열왕기하 11-12장에는 유다의 여호아스(Jehoash) 왕의 기사가 나옵니다. 여호아스는 요아스(Joash)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주로 여호아스라 불립니다.그러나 기존 한글 성경에서 여호아스를 대개 요아스로 번역하다 보니 킹제임스 성경이 여호아스와 요아스 둘로 번역한 것을 두고 오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럿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왕하11-12장을 읽을 때 유다의 여호아스이면 유다의 요아스와 같은 인물로 이해하면 됩니다.뉴킹제임스, NASB 등도 킹제임스 성경과 같이 왕하 11-12장에 여호아스로 기록하였습니다.이런 것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에 대한 용례에 대한 것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인지,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인지 분별해서 읽으면 됩니다. 다음 예는 두 여호아스를 구분하기 위해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를 요아스로 지칭한 사례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왕하13:10 ¶ 유다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십육 년 동안 통치하며 샬롬패스터-------------왕하11장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왕하11:21).왕하 12장1 예후의 제칠년에 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브엘세바의 시비아더라.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아스에게 교훈을 주던 모든 때에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3 산당들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들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니라. 4 ¶ 여호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주}의 집으로 가져와 봉헌한 물건들 중에서 모든 돈 곧 계산이 끝난 모든 사람의 돈이나 모든 사람에게 정해 준 돈이나 {주}의 집에 가져오려고 어떤 사람이 마음에 정한 모든 돈을 5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가 아는 자들에게서 취하여 그 집의 어느 곳이든지 무너진 곳을 발견하거든 그 무너진 곳을 보수하라, 하였으나 6 여호아스 왕의 제이십삼년이 될 때까지 제사장들이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므로 7 여호아스 왕이 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아는 자들에게서 더 이상 돈을 받지 말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도록 그것을 넘겨주라, 하니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서 돈을 받지도 아니하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17 ¶ 그때에 시리아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와 싸워 그곳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얼굴을 고정하고 올라오려 하였으므로 18 유다 왕 여호아스가 전에 자기 조상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봉헌한 모든 거룩한 것과 자기의 거룩한 것과 또 {주}의 집의 보고와 왕의 집에서 찾은 모든 금을 취하여 시리아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2017-12-02 09:16:41 | 관리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해 파라오를 방문한 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곧 해방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2-3)
성경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대다수 역본들에서 주(LORD)로 번역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창세기에 이미 160번이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을 주로 다룬 창세기 12-50장에서 10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이에 대해 창세기 22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수년 뒤, 이삭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를 속인 자기 아들 야곱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그것을 이같이 속히 찾았느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주}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게 보내 주셨나이다, 하니”(창27:20)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내가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3)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신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모순을 보이나요? 합리적인 대답은 무엇인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창15:7; 22:14; 24:35, 40, 42, 48, 50, 51, 56; 26:22; 27:20; 49:18 등 참조).
성경 비평가들과 불신자들이 이런 구절을 두고 시비를 걸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주)라는 이름을 아는 것(To know the name of the LORD’ 혹은 단순히 ‘여호와(주)를 아는 것’(To know the LORD)이라는 표현은 종종 그분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 혹은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야다’(yada)에서 유래된 ‘알다’(To know)라는 말은 종종 경험으로 확실히 습득하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소년이었을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주} 앞에서……{주}를 섬겼더라.”(삼삼2:18; 3:1)
“그가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2:26)
그런데 바로 다음 중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은 인생에서 매우 일찍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무엘기상 3장 7절에서부터 전격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참조 삼상3:11-14; 8:7-10, 22; 9:15-17; 16:1-3 등). 이 사건 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그분에 대해 알았던 것을 이 시간 이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가 그분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비교하면서 사무엘기상의 저자는 이 사건 전에는 “사무엘이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다.”(3:7)라고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처(Gleason Arch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라는 것을 알다’(to know that I am the LORD)나 또는 ‘주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LORD)는 표현은 구약에서 적어도 26번 나타나며 이 모든 경우에 이 표현은 실제 경험에 의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하단 참조 문헌, Archer 1982, pp. 66-67)
데이비스(John Davis)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에만 ‘알다’(야다)라는 표현이 주(여호와)와 관련하여 5번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경우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경우에 여호와(혹은 여호와라는 이름)를 아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어떤 행위나 행동과 관련이 있다.”(하단 참조 문헌, Davis, 4[1]:39).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6:7)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집트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출7:4~12:30), 홍해를 가르셨으며(출14), 기적으로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셨습니다(출15:22-25). 그 이후에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1-12)
몇 주가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니라.”(출29:46)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나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모세 시대 이후 수백 년이 지난 뒤 이사야가 대언했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가 말하노라. 내 백성이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잡혀갔으니 여기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주}가 말하노라.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며 날마다 계속해서 내 이름을 모독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로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니, 보라, 그것이 곧 나니라.”(사52:5-6)
이 예언이 있은 지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시고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보라, 내가 이번에 그들에게 알리리니 곧 내가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리리라. 그리하면 내 이름이 {주}인 줄 그들이 알리라.”(렘16:21)
이러한 진술들은 다 무엇을 말할까요?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역사에서 이 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것은 히브리어 관용어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실 때에 드러나는 특정한 행위나 속성에 대해 아는 것을 나타냅니다.” (Davis, 4[1]:40).
현시대에서도 누군가가 사람을 정말로 ‘알지’ 않고서도 (또는 그 사람의 직업 혹은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농구 선수 마이클 ‘에어’ 조던(Michael ‘Air’ Jordan)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들이 그가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은퇴한 지 몇 년 뒤 어떤 대회에서 그를 만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조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이름 마이클 ‘에어’ 조던으로 그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경기장에 가서 그가 자유투 라인에서 덩크슛을 넣거나 혹은 공기(에어)처럼 가볍게 날아서 슛을 넣는 것을 보고 - 그래서 그의 가운데 이름인 Jeffrey 대신 공기처럼 가볍게 몸을 놀린다는 의미의 에어(Air)가 붙었음을 알고 - 그가 나이키 신발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리지널 ‘에어 조던’ 신발은 신은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외국인들은 ‘에어 조단’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에어’ 조던이구나!”
언뜻 보기에 출애굽기 6장 3절은, 창세기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족장의 지식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특히 이름을 ‘안다’)라는 히브리어 관용구가 단순히 사람을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하셨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지키시는 분 여호와라는 이름의 온전한 의미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다음 2구절을 통해 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아담은 그 전에 이브를 몰랐을까요? 2. 요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습득해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아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Archer, Gleason L. (1982), An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Grand Rapids, MI: Zondervan).
Davis, John J. (1963), “The Patriarchs’ Knowledge of Jehovah: A Critical Monograph on Exodus 6:3,” Grace Theological Journal, 4[1]:29-43, Winter.
출처: http://apologeticspress.org/apcontent.aspx?category=6&article=1051
2017-10-24 10:16:31 | 관리자
질문 : 수아는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대답 : "유다가 거기서 수아라는 이름의 어떤 가나안 족속의 딸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그녀에게로 들어가니"(창38:2) And Judah saw there a daughter of a certain Canaanite, whose name was Shuah; and he took her, and went in unto her.
"유다의 아들들은 엘과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수아의 딸 곧 가나안 족속 여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들이더라."(대상2:3)
The sons of Judah; Er, and Onan, and Shelah: which three were born unto him of the daughter of Shua the Canaanitess. And Er, the firstborn of Judah, was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slew him.
이 두절을 얼핏 보면 수아라는 인물이 가나안 족속 남자 같기도 하고 가나안 족속 여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상2:3의 가나안 족속 여인은 수아의 딸이며 결코 수아가 아닙니다. 창38:12에도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유다의 아내 곧 수아의 딸이 죽으매"(창38:12)
And in process of time the daughter of Shuah Judah's wife died; 히브리말로도 수아는 남성 명사입니다.
물론 모든 성경 사전들도 수아가 가나안 족속 남성이라고 말하며 그의 딸을 유다가 아내로 취하였다고 기록합니다. SHUA: A Canaanite whose daughter Judah took to wife (Gen 38:2,12; 1 Chron 2:3). (from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그러므로 유다의 아내는 수아의 딸이며 수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상2:3에서 가나안 족속 여인은 곧 수아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수아는 남자이지 여자가 아닙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17-10-04 14:06: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야고보서 4장 5절의 영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약4:5)
Do ye think that the scripture saith in vain, The spirit that dwelleth in us lusteth to envy?(KJV)
킹제임스 흠정역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다른 성경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바른 성경/공동 번역 등: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시기할 정도로 사모한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느냐?
이런 구절은 앞뒤 문맥과 그 안에 사용된 단어를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4-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5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매튜 헨리 주석: 사람이 마음에서 상상하는 것은 항상 악하다(창6:5). 본성적 부패는 욕심을 부리며 시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 속의 영은 늘 악한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앨버트 반즈 주석: 야고보는 사람의 시기에 대해서 말한다(약3:16). 4절의 ‘세상과 친구 되는 것’(즉 세상과 친해지려는 영)은 곧 사람 속의 영의 시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여기의 영을 성령님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이를 위해 그들은 끝 부분의 “lusteth to envy”를 “lusteth against envy”로 바꾼다. 이리 되면 성령님께서 시기를 반대하여(against) 욕심을 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니며 주관적으로 그리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말이 허용하는 해석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여기의 영을 우리 안의 영 혹은 속성으로 보는 해석이다. 즉 우리 안의 영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번영 등을 시기할 정도로 욕심을 낸다.
재미슨 파우셋 주석: 세상과 친구가 되면 우리 영이 다른 사람들을 시기할 정도로 욕심을 낸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데 쓰이는 질투는 envy가 아니라 jealousy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열심(zeal)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열심을 내므로 질투하십니다.
또한 lust라는 말은 음욕을 품는 데 사용되는 좋지 않은 말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lust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lust를 정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For the flesh lusteth against the Spirit, and the Spirit against the flesh: and these are contrary the one to the other: so that ye cannot do the things that ye would.
여기서도 육신은 욕심을 부리지만(lust) 성령님은 그냥 육신을 대적하지, 육신을 대적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은 시기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을 겸손한 자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므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서 4장 5절의 영은 문맥으로 보나 같이 나오는 용어들(욕심, 시기 등)로 보나 사람의 영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샬롬
패스터
2017-10-04 13:47:15 | 관리자
여러 명의 다리오
성경에는 다리오라는 이름의 왕이 여럿 나옵니다.
특히 바빌론의 벨사살 왕을 멸망시킨 다리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분명히 메데 사람이고 페르시아 왕국의 초대 왕으로 유대인 귀환을 명령한 왕은 고레스인데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에스라 사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1. 메대 사람 다리오(단5:31; 9:1; 11:1). 이 사람은 아스티가게스의 아들로서 메대 사람들의 왕이었으며 어머니 쪽으로 에빌므로닥과 고레스의 삼촌이었다. 그는 BC 539년에 갈대아 사람들의 벨사살 왕을 폐위시키고 2년 후에 죽을 때까지 왕좌를 차지하였으며 그 후에 왕좌는 고레스에게 넘어갔다. 그의 통치 때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다(단6:1-28). 고레스는 BC 536년에 유대인 귀환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BC 606년에 있었던 바빌론의 1차 침공 이후 70년 만에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다리오는 고레스 밑에 있던 대장으로 메대-페르시아 왕국의 일부인 갈대아 사람들의 영역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KJB에는 분명하게 그가 왕으로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단9:1).
https://www.biblegateway.com/resources/encyclopedia-of-the-bible/Darius-Mede
2. 다리오 히스타스피스. 에스라와 학개 그리고 스가랴 대언자에 의해 언급된 이 왕은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칙령을 내려 성전을 지으라고 했으나 그 후에 유보된 것을 다시 회복시켜 유대인들이 공사를 하도록 허가한 인물이다(스4:1-24; 5:1-17; 6:1-22; 7:1-28). 그는 주전 521년경에 마기승족의 왕위 찬탈자 스메르디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정부를 수사(수산)로 옮겼고 바빌론이 자기를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키자 반역을 제압하고 바빌론의 성벽을 무너뜨려 렘51:58의 예언을 성취했다.
3. 다리오 코도마누스. 느12:22에 언급된 이 왕은 페르시아의 왕들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인자한 왕이었다. 알렉산더 대제는 여러 차례 그를 패배시켰고 마침내 260년의 역사를 가진 페르시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다리오는 6년간 통치한 뒤에 자기의 장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이로써 단8:1-27에 나오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다니엘은 숫양이라는 상징으로 페르시아 왕국이 거대해지는 것을 예언했고 이 양이 뿔로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밀고 들어가나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숫양은 서쪽에서 나와 땅에 닿지 않고 온 세상을 휘저으며 다닌 염소 즉 눈과 눈 사이에 큰 뿔을 가진 염소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멸되었다. 다니엘의 예언은 역사상 일어난 일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
2017-08-12 14:36:28 | 관리자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나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요한일서 4장 13절이 이상하다고 하여 잠시 답을 드립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4:13).
Hereby know we that we dwell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질문은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에 대한 것이며 초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 목적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구절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어는 어떤가요?영어에도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목적어가 없습니다.
이것을 “그분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영어 ‘of his Spirit’에서 ‘of’를 빼내야 하는데 원어에도 ‘of’가 들어 있으므로 빼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생략된 목적어는 성령님의 은혜, 영향력, 열매, 은사(선물) 등 그분의 영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7절 이후부터 보면 그분의 영이 주신 것 중 하나가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 압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54:07 | 관리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인가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자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확실히 믿지만,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기에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답: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예를 두 개만 들겠습니다.
1. 이사야서 6장 1-13절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한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2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 3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그 외치는 자의 음성으로 인해 문기둥들이 흔들리며 그 집이 연기로 가득하더라. 여기서 이사야는 [주](Lord) 즉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한 상태를 고백하자 주님은 그를 정결하게 해 주셨습니다(5-8절).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대답하시되, 도시들이 피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땅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며 12 또 {주}가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 땅 한가운데에 버림당하는 일이 심히 많을 때까지니라.
12절의 {주}(LORD)와 1-11절의 [주](Lord)는 같은 분입니다.
이 구절들에는 신약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자,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은 수난 당하기 1주일 전 쯤에 요한복음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7 ¶ 그러나 그분[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으니 38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말하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러므로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사야가 다시 말하였기 때문이라. 이르되, 40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 41 이것들은 이사야가 그분[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하였을 때에 이른 것이더라. 39-40절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바로 이사야서 6장 9-10절입니다.
여기서 41절은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은 39-40절이 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사야는 그 당시 누구를 보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은 신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재림 시에 올리브 산에 오실 것입니다. 행1:11-12를 보기 바랍니다. 11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12 그때에 그들이 올리벳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더라.
스가랴서 14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이 기록되어 있습ㄴ다.
1 보라, {주}의 날이 이르리니 사람들이 네게서 노략한 물건들을 네 한가운데서 나누리라. 2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전쟁하게 하리니 그런즉 그 도시가 함락되며 집들이 강탈을 당하고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며 그 도시의 반이 포로가 되려니와 백성의 남은 자들은 그 도시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때에 {주}께서 나아가사 그 민족들과 싸우시되 전에 전쟁의 날에 싸우신 것 같이 하시리라. 4 ¶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4절을 보면 {주}(LORD) 곧 여호와 하나님이 올리브 산에 강림하시며 주의 날(재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비교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러 구절들을 모아서 교리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조직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36:0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