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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역자 서문 1960년대 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회를 열어 종교 통합을 위한 발판을 구축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테레사 수녀의 발언으로 잘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럿이듯 구원의 길 역시 여럿이다. 이 같은 사상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남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는 사월초파일에 천주교회가 종을 치고 석가 탄생을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탄절에는 불교도들이 성탄 찬송을 불러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일간지들도 천주교의 추기경이나 불교의 주지는 참으로 아량이 많은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이제는 소위 프로테스탄트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석가탄신일을 축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자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신다면 부디 매주 일요일 일간지의 종교란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종교 통합 혹은 종교다원주의를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땅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같이 진리를 저버리고 ‘사랑, 일치, 평화, 통합’ 등을 부르짖는 종교 지도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늑대에게 양을 넘겨주는 사악한 자들입니다. 역자는 지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1985년은 우리 가족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은 해였습니다. 감리교 장로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적 열심을 갖고 교회 일을 했지만 참으로 진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여 구원은 받았지만 종교에 매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벨기에에서 사역하시는 구영재 선교사님 - 지금은 캐나다에서 사역하심 - 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종교와 복음’ 의 차이점에 대해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은 ‘종교와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우 열심히 종교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종교와 복음’에 관해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는데 그 순간 참으로 저는 큰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스스로 천주교의 유래와 본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기원이 고대 바빌론 신비 종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사와 기독교회사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에 유리하도록 미화되고 변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를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이때에 정부와 타협을 한 자들만이 공공연하게 예배 처소를 짓고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하 교회에 머무르거나 순교를 당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100년 혹은 200년이 지난 다음 북한의 교회사를 저술하는 사람은 자연히 배도한 사람들의 자료만을 갖게 될 것이며 배도한 교회의 교회사를 공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료에 근거한 교회사는 참된 교회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참된 교회사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사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00년 동안 천주교는 이 세상과 짝하며 세계의 정치 및 종교를 주도하려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 시간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결코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예루살렘을 차지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진 천주교 교황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가 온 세상에 전파될 때부터 크리스천들은 순교하는 삶을 택할지언정 자기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이단으로 내몰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는 천주교에서 나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주장하는 바로서 천주교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는 주후 313년에 생겼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기독교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따른 천주교인이었단 말입니까? ∙천주교는 구교이고 기독교는 신교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오직 한국에서만 이렇게 구분되고 있는데 결국 이 같은 구분은 천주교가 기독교의 모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개신교(改新敎)라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개신'을 믿는 것인가요? 이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같은 속임수로부터 용기 있게 뛰쳐나와야 하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부르든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주교와 기독교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에서 장로교로 가면 교회를 바꾸었다고 하지만 천주교에서 감리교 또는 장로교로 오면 '개종'(改宗)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종'은 말 그대로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요람이 결코 천주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백성으로 부르신 유대인들이 세운 유대교라는 사실입니다. 주후 33년에 시작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길이었고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길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이 수없이 많은 성도들을 죽였지만 계속해서 기독교가 흥왕하는 것을 보고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국가의 공인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이런 목적 하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고 이때 세상과 짝하고 정권과 결탁한 무리들이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 사상까지도 포용하며 천주교를 만들어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기독교에서 나간 것이지 결코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후에도 천주교는 복음대로 믿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많은 무리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종교 재판 등을 통해 수없이 죽였습니다.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예수님처럼 물에 잠기는 침례가 맞다고 주장한 침례교도들을 죽였으며 미사에서 사제가 주는 빵 조각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크리스천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그러다 16세기 초반에 천주교 사제였던 루터가 복음을 깨닫고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좁은 길을 걸어온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른 교회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독자는 「새 교회사」(규장문화사刊)와 「순례하는 교회」(전도출판사刊)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 신들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 내사 유대인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며, 유대교를 신봉하며 열심을 내어 크리스천들을 잡아죽이던 바울을 회심시켜 온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하셨고, 천주교 사제로 지내던 루터를 회심시켜 그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로마의 교황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니 이 어찌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이 모두 연합하여 ‘뉴에이지 시대’ 즉 ‘새 시대’의 도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거는 슬로건은 '평화와 일치'입니다. 이런 슬로건 하에서 이들은 전 세계의 종교, 문화, 교육, 정치 등을 통합하여 인간들에 의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성경은 분명히 적그리스도가 다스리게 될 뉴에이지 즉 새시대가 ‘평화’의 이름으로 도래할 것과 그 때의 징조로 기독교회에서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또 자기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 또 일어서서 통치자들의 통치자를 대적할 것이나 그가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너지리라.(단8:25) 또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할 그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살후2:3) 온 세상이 진리를 내버리고 ‘평화와 안전’을 이야기하는 이때야말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1994년에 미국의 타임지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를 베스트 셀러의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이 책은 교황 바오로 2세가 공인한 책으로 현재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믿는 바를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 주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라는 제목으로 3권으로 나누어 출판했습니다(색인 등을 제외하고 총 981쪽이며 성바오로 서점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음). 이 교리 문답서가 나오자 미국의 존스(Rick Jones)는 「로마 카톨릭 주의를  이해하자」(Understanding Roman Catholicism)라는 책을 저술하여 천주교 교리 문답서와 성경이 기본적인 교리에서부터 상호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미국 Chick 출판사, 1995년). 역자들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현 상황을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금번에 존스의 책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성경을 모르고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면 구원받을 줄 알고 교회에 충성하는 천주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천주교 교리 문답서가 서로 얼마나 모순되는가를 보여 주어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록으로 실은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천주교와 관련된 소책자 및 팜플렛 등을 번역한 것입니다. 글마다 그 출처를 밝혀 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서를 대하는 독자들께서는 역자들을 천주교에 대한 편견과 무조건적인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께 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간구하며 상아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만든 우상은 대답을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겨우 열여섯 살 난 소녀가 고해 성사 창구에 가서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유혹 받은 것 등을 말해야만 하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아뢰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한 여인이 죽은 자기 남편이 연옥에서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를 위해 미사를 드리며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갖다 바치는 것을 보고 연옥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십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금과 세마포로 치장한 교황을 신뢰하며 천국의 열쇠를 받고자 하는 것을 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을 신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독사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이방 신비 종교를 믿는 철학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너무나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을 때…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한 것입니까? 역자들은 결코 천주교인을 미워하거나 실상을 잘 모른 채 종교 통합 운동 등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인본주의 종교 체제의 진상만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인격적으로 훌륭한 천주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고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내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 개인의 구원자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주의를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축복으로 쓰여진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본서에서 사용한 성경은「권위역본」(Authorized Version)으로 알려진「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 2001년 8월 출간)임을 밝힙니다. 이 성경을 택한 이유는 초대 교회부터 좁은 길을 걸어간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안디옥 교회가 전해 준 ‘다수 사본’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틴데일, 루터, 칼빈, 웨슬리, 무디, 스펄전 등 과거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킹제임스 성경」 혹은 ‘다수 사본’에서 번역한 성경만을 사용했으며 사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간된 성경의 대다수가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이 성경의 위력에 눌려 꼼짝 못하던 천주교는 드디어 성경 자체를 변개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역본들이 NIV, NASB, Living Bible 등이며 이러한 현대 역본들은 다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의 카톨릭 ‘소수 사본’에 근거를 둔 카톨릭 성경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전해 준 성경을 버리고 카톨릭 성경인 현대 역본들을 취하게 되면서부터 카톨릭 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보다 상세히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역자 추천 참고 도서 목록에 있는 성경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2002년 8월에 이 책의 출간을 흔쾌히 다시 허락해 준 미국 칙 출판사의 존스 형제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리고(2002년 8월) 복음의 빛으로 눈을 돌리게 해주신 구영재 선교사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신 육신의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또한 도서출판 두루마리의 깊은 배려에 감사를 드리며 주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등불을 밝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소수의 형제 자매들 위에 예수님의 평강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2009-07-03 11:16:53 | 관리자
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책 -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 - 이 나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그는 영국의 과학 전문 기자/작가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객관성을 가지고 진화론의 문제를 잘 파헤쳐 놓았습니다. 이 책이 성도 여러분과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은 Yes24의 평입니다. 참조하세요.   과학계를 지배해 온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 진화론 “우리는 어디에서 왔어요?”, “지구는 몇 살인가요?”, “나비와 코끼리의 조상이 진짜로 같아요?” 호기심이 가득한 우리의 질문에 진화론 신봉자들은 무려 ‘46억 년’ 전에 지구가 형성되었고, ‘38억 년’ 전에 원시 바다에서 지구상의 생명체가 탄생했으며,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다고 근엄하게 알려준다. 현대 지질학의 주춧돌이자 현재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진화론은 종(種)의 기원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가장 합리적인 이론으로서 무적의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진화론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면? 다윈의 이론은 자연 선택과 짝 지워진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가 38억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생물종을 변화시켰다는 개념에 의존한다. 그러나 실제 증거는 자연 선택을 통한 유전자의 변화가 극히 제한적임을 드러낸다. 현대의 지구 연대 측정법은 지구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림을, 따라서 단세포 유기체로부터 복잡한 생명체가 진화할 시간이 충분치 않음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다윈의 이론처럼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화했다면 그 사실을 입증할 화석 자료는 왜 발견되지 않는 걸까? 기린의 목이 점차적으로 길어졌다면, 왜 짧은 목의 기린 화석과 중간 목의 기린 화석, 긴 목의 기린 화석을 찾아볼 수 없는 걸까?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진화론의 딜레마 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과학 행사가 열리고 관련 도서가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정황적 증거만을 내세울 뿐 여전히 우리에게 객관적 증거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미 반세기도 전에 졸리 주커만(Solly Zuckermann)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우리의 조상이 아닌, 단지 멸종된 유인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지느러미를 이용해 걸어 다니다가 육지로 뛰어올라 육상 생물의 형태로 진화했다고 알려졌던 물고기, 실러캔스 또한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발견되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 외에도 진화론을 반박하는 수없이 많은 과학적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과학적 연구 결과를 무시하거나 은폐하려 한다. 연구집 출간을 방해하거나, 연구 자금을 받지 못하게 훼방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말이다.   10여 년의 연구 끝에 밝혀낸 진화론 신화의 허상 진화론을 하나의 신앙처럼 바라보는 과학계의 편중된 시선을 우려한 저자 리처드 밀턴이 직접 진화론 연구에 뛰어들었다. 과학 전문기자 출신의 그는 객관적인 시선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진화론이 낡은 정황 증거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취약한 이론임을 보여준다. 1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 끝에 탄생한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을 읽어나가다 보면 일종의 신화가 된 진화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예스24 제공]   저자의 말: 우선 나는 진화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정황 증거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과 결합한 우연한 돌연변이라는 신다윈주의자(neo-Darwinist)들의 주장에는 어떠한 뚜렷한 증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두 번째로, 나는 지구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 정도라고 믿는 게 아니라, 지금 인정받고 있는 연대 측정 방법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현재의 연대 측정 방법은 단지 다윈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수십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선 지구의 나이가 실제로 몇 살인지 확실히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 들어가며 중에서  
2009-07-02 11:44:47 | 관리자
아래 글은 오인용목사님께서 쓰신 글 입니다.    공유하고자 올려드립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들을때 그것이 옳은 것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특히 영적인 ,종교적인 면에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한번 선택하면 거의 일생을 가기 떄문이다,( 영원까지 결국에는 가는 것이다)교회를 선택하고,  신앙을 선택하고,   믿음을 선택할때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비성경적인지를 알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육적인 선택은 탁월하다,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는 돈과 노력과 정성을 드린다,   그래서 좋은 옷과 자동차, 집과 땅,음식등을 선택하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대부분이 어리석고, 미련하다, 정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설교,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믿음과 신학 , 교회를 진지하게 ,진리에 근거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이것도 육적인 선택기준으로 해버리니 영적인 재앙을 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크고, 화려하고,  편한하고, 부담없고, 즐겁고, 유쾌하고,   흥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진리에 의한 판단이나 선택보다는 자신의 육적인  만족을 위한 선택으로 기준을 삼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교인들의 영혼과 삶에 진정 유익하고, 진리로 이끄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때 수많은 영적인 방랑자와 방황자들이 생기며 영적인 체념속에 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자신이 순례하는 지상의 기간을 제대로 영적인 돌봄과 인도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늘 일깨워줘야 하는 것이다, 분별력의 기준은 오직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분별력의 기초다, 그런 책들과 강의,.말씀 가르침, 교훈을 들어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냥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진리와 거짓을 알기위한 치열한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회자들  (목사와 전도사 등 )분별력에 있어서 점점 크게 밑으로 하향하고 있다 한순간의 효과를 바라고 결과를 바라는 그런 게으르고 ,미련한 목자들이기 넘쳐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육적인 만족과 기대, 성취, 목표를 이루는 것이지(교회성장 , 교회건축,  선교와 전도의 성장 ) 진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진리는 각자 자기가 옳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던의 영향) 분별력일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우상과 미혹의 길을 가던가 제발 성경을 어디로 보는가?   눈으로 지성으로 보는가?아니면 엉덩이나 발로 보는가? 신약교회사에서도  분별력을 잃어버린  세대가 얼마나 많았는가? 오늘 이시대의 교회는 전 교회역사상 중세시대 이후로가장 크게  분별력을 잃은  세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분별력을 가지고목회를 하고 , 신학을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진지하게 묻기를 바란다, 교회안에서 설쳐대는 미혹의 영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오인용 목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6-23 14:39:19 | 김학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주의 크기를 보여 주는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http://blog.daum.net/anstjd66/16142632   지구의 상대적인 크기를 보려면 다음의 블로그를 보기 바랍니다.   http://kr.blog.yahoo.com/usblife/1546   이 거대한 우주를 설계하여 창조하신 분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손 안에 이 거개한 우주가 놓여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샬롬.
2009-06-20 15:37:18 | 관리자
  가나안에서 태어난 레위의 세 아들 중 막내. 그는 레위 사람들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창46:11; 출6:16; 민3:17; 대상6:1). 광야에서 생활할 때 므라리 가족은 성막의 구조물을 맡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지고 가서 세우는 일을 했으며(민4:29-33; 7:8) 가나안 정복 이후에 그들에게는 요르단 너머에 열두 도시가 배정되었다(수21:7, 34-40).    
2009-06-15 00:25:49 | 관리자
  에녹의 아들. 그는 라멕의 아버지였으며 969세를 살아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았고 홍수가 생기기 바로 전에 죽었다(창5:21-22, 27).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의 물 층이 있어서 해로운 자외선을 차단하였으며 그 결과 사람의 수명이 길고 또 짐승이나 사람의 크기도 컸다. 또한 온 세상이 온화해서 심지어 극지방도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서 심지어 매머드 같은 짐승도 극지방에 살았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 사람의 수명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노아는 950세, 살라는 433세, 벨렉은 239세,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다윗은 70세를 살았고 그 이후로 평균 수명이 70-80세가 되었다(시90:10).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천년왕국 때에는 다시 수명이 증가하여 100세에 죽은 사람을 아이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한다(사65:20). 천년왕국 참조.    
2009-06-15 00:25:19 | 관리자
  I. 요셉의 장자.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후손들은 하나의 완전한 지파를 형성하고 후에 가나안 땅에서 둘로 나뉘었다. 그래서 일부는 바산 지방 즉 요르단 동쪽(북쪽)에 거하였고 다른 일부는 에브라임과 잇사갈 사이에서 요르단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에 거하였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므낫세 지파 지도 참조(19, 23). 므낫세는 야곱의 예언에 따라 재물과 권세에서 에브라임보다 훨씬 못하였다(창41:50-51; 48:1-22; 수16, 17). 지파 참조. II.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 동안 치리하였다. 그의 우상숭배와 폭정과 잔인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의 통치 제22년에 그가 바빌론에 죄수로 끌려가게 하셨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낮추었고 이에 하나님은 아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를 돌려보내 그가 다시 왕권을 유지하게 하셨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행한 악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가 숭배하던 우상들과 자기가 조언을 받던 점치는 자들을 제거하고 자기 왕국의 영적/물질적 번영을 위하여 많은 것을 개혁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 방어벽을 보수하고 유다의 견고한 도시들을 강화시켰다. 그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다가 평안히 죽어 예루살렘에 묻혔다(왕하21; 대하33). III.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할아버지(삿18:30). 요나단 참조.    
2009-06-15 00:24:07 | 관리자
  이스라엘의 열여섯 번째 왕. 그는 전에 사가랴 왕의 군대 장관이었으나 디르사에 있을 때 살룸이 왕을 죽이고 사마리아로 몸을 숨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대적하기 위해 즉시 돌아와 그를 붙잡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0년 동안 통치하면서 폭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때에 아시리아의 왕 불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그는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부유한 사람에게서 각각 오십 세겔을 취하여 1,000달란트를 바쳤다. 그는 정상적으로 죽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브가히야는 2년 동안 통치하였다(왕하15:13-22).    
2009-06-15 00:23:31 | 관리자
  므낫세 지파에게 속하고 잇사갈 지파의 경계에까지 이른 마을. 이곳은 예전에 가나안 족속들의 귀중한 도시였으며 그들은 오랫동안 여기를 점령하였다(수12:21; 17:11; 삿1:27). 이곳은 기손 근처 평야의 남서부 경계에 있었으며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는 승리의 장소로 므깃도의 물가가 나온다(삿5:19, 21). 솔로몬의 통치 때에 이곳은 강화되었으며(왕상9:15) 바로 여기에서 아하시야가 죽었고 요시야 왕도 전쟁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백성으로부터 큰 애도를 받았다(왕하9:27; 23:29; 슥12:11). 이곳은 므깃돈으로도 불린다(슥12:11).    
2009-06-15 00:22:09 | 관리자
  이집트 탈출 뒤에 히브리 여인들이 내놓은 놋 거울을 주조하여 만든 원형의 큰 그릇. 이것은 성막의 문과 태우는 헌물을 드리는 제단 사이에 있었으며 여기에 물을 담아서 제사장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하였다(출30:18-21; 38:8; 40:7). 솔로몬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사용한 큰 물두멍 외에도 희생물을 씻기 위해 열 개의 물두멍이 마련되었다(대하4:6). 각각의 물두멍은 약 1,000리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었고 아름다운 지지대 위에 놓였다(왕상7:27-39). 이것들은 성전 앞에 있는 제사장들의 뜰 안에 양쪽에 각각 다섯 개씩 놓였다(왕상7:39). 성전 참조.    
2009-06-15 00:21:39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은 물고기의 이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름이 많지 않다. 모세는 강이나 호수나 바다의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어도 되고 다른 것은 가증하다고 말했다(레11:9-12; 신14:9-10). 나일 강에는 좋은 물고기가 많았으며(출7:18-21; 민11:5) 디베랴 바다에도 역시 물고기가 많았다(눅5:5; 요21:6-11). 유대인들은 물고기를 흔하게 먹었고(마7:10) 지중해와 요르단 강에서 물고기를 얻기도 하였다(느13:16). 그들은 낚시나 창이나 그물로 고기를 잡았다(욥41:7; 사19:8-10; 암4:2). 원래 영어의 fish는 ‘물에 사는 생물’을 뜻했으며 따라서 요나를 삼킨 고래 역시 이런 차원에서 큰 물고기였다(욘1:17). 성경에는 어부들도 자주 나오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상당수가 어부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을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마4:18-2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할 때 믿음 고백의 표시로 메달이나 무덤 등에 물고기를 새겼다. 왜냐하면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다섯 글자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다섯 단어의 첫 글자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고기 상징은 이제 어느 정도 미신적인 요소를 띠게 되었다.    
2009-06-15 00:21:11 | 관리자
  팔레스타인에는 도시나 시골에 물 저장고가 많았다. 여기에서는 1년 중 반은 비가 오지 않았고 그래서 마르지 않는 강이나 샘이 거의 없었으므로 우기의 비를 물 저장고에 담아 두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이런 물 저장고들은 물탱크 혹은 연못 등으로 불렸으며 관개용수가 필요한 밭에 또 여행자를 위해 큰길의 여러 곳에 만들어졌다(시84:6). 그래서 큰 도시들은 돌로 큰 저수지를 만들어 겨울의 비를 모아 두었다. 베데스다, 실로암 참조.    
2009-06-15 00:20:44 | 관리자
  물은 종종 눈물을 뜻하며(렘9:1) 그래서 고난(시66:12), 재난(애3:54; 시69:1; 124:4-5), 핍박(시88:17), 적군(사8:7; 17:13) 등을 상징한다. 또 물은 자식이나 후손(민24:7), 구름(시104:3), 성령님의 새롭게 하는 능력(사12:3; 55:1; 요7:37-38)을 뜻하고 물을 쏟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호5:10) 두려움으로 인해 실신하는 것(시22:14)을 뜻한다. 깊은 물은 마음속의 권고나 조언(잠20:5), 지혜로운 자의 말(잠18:4)을 뜻한다. 땅에 쏟은 물은 죽음의 상징이고(삼하14:14) 물의 불안정성은 흔들리는 성격을 뜻한다(창49:4). 사람이 물로 난다는 것은 모태에서 물속에 있다가 태어날 때 물과 함께 나오는 자연적인 출생을 뜻한다(요3:5-6). 우물과 샘 참조.                                 물을 퍼 올리는 작업  
2009-06-15 00:20:18 | 관리자
  개인 집이나 도시의 문지기(삼하18:26; 왕하7:10; 막13:34; 요10:3). 성전의 문지기는 모두 레위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한때 4,000명이나 되었고 여러 조로 나뉘어서 문을 지켰다(대상16:42; 23:5). 그들은 모든 문을 지키고 자기들의 조 별로 성전 안에서 의무를 행하였으며(대상26:1-19; 대하8:14; 35:15) 밤에 찬양의 노래로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시134:1-3). 또한 대하23:14는 그들이 요아스를 보호하고 아달랴를 죽이는 일을 했음을 알려 준다.    
2009-06-15 00:19:51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샬롬레카” 즉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이라는 말로 문안 인사를 하였다. 이런 인사를 받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이라고 응답하였다(창29:6; 삿18:15). 성경에는 이 외에도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노라.” 혹은 “주의 복이 너와 함께 있기를 바라노라.” 등의 문안 인사가 있다. 지금도 동방 사람들은 정중하게 이런 식의 인사를 하며 어떤 때에는 문안 인사와 함께 입을 맞추거나 손이나 수염에 입을 맞추고 손을 가슴에 대고 몸을 숙였다가 위로 펴서 인사를 한다. 야곱이 에서에게 인사한 것과(창33:1-34) 또 창19:1; 23:7; 42:6; 삼하1:2; 요20:26 등을 비교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문안 인사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엘리사가 자기 종을 보내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지팡이를 올려놓게 하였을 때 길에서 인사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왕하4:29). 그와 동일한 이유로 우리 주님은 70명의 제자들에게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 인사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눅10:4).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방 사람들의 문안 인사는 겉치레로 이루어졌으므로 다음과 같은 우리 주님의 말씀은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2009-06-15 00:19:26 | 관리자
  성벽이 있는 마을의 문은 대개 나무로 만들고(삿16:3) 두꺼운 쇠나 놋으로 입히며(시107:16; 사45:2; 행12:10) 빗장으로 강화시키고(신3:5; 왕상4:13) 옆에는 탑이나 망대를 세웠다(삼하18:24, 33). 보통 성문을 취하면 도시를 점령한 것으로 보았으므로(신28:52; 삿5:8) 성문 혹은 문은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그들의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22:17). 그런 차원에서 ‘지옥의 문들’은 실제적인 문으로 볼 수도 있고 ‘지옥의 권세’ 혹은 ‘지옥’ 그 자체로 볼 수도 있다(마16:18).   성문 혹은 성문 근처에는 빈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장이 서거나 재판이 열리곤 했으며(창23:10-18; 신16:18; 21:19; 25:6-7; 룻4:1-12; 잠22:22; 암5:10-15) 또 거기서 여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창19:1). 그러므로 ‘성문에 앉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한가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술 먹는 사람들을 나타낸다(시69:12). 도시가 재앙을 당하면 사람들이 성문에서 애곡하였으며(사14:31; 렘14:2) 또 여기에서 공적 메시지가 선포되고 대언자들이 말씀을 선포했다(잠1:21; 8:3; 사29:21; 렘17:19; 26:10). 한편 성문에서 가까운 바깥에서 사람을 처형하기도 했다(왕상21:13; 행7:58; 히13:12). 교만을 통해 자기 집의 문을 높이는 자는 결국 도둑질을 하게 되어 파멸에 이른다(잠17:19). 문을 넓게 여는 것은 기쁨과 환영을 뜻하며 우리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시24:7, 9). 끝으로 새 예루살렘의 문들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땅의 도시들의 성문이 밤에 닫혀 있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곳이 빛의 세상이요 안전을 보장하는 세상임을 보여 준다(계21:25).
2009-06-15 00:18:5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