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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한 거듭난 그리스도인 중에 확고한 교리 기반이 서지 못해, 잘못된 교리의 바람에 흔들려 밀려다니는(엡 4:14)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지체들이 적지 않습니다.  종말론이 그런 분야 중 하나이며 그 안에서도 대환란이 대표적인 걸림돌입니다.예수님의 전천년 재림을 믿긴 하는데, 그 전에 신약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환란을 겪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교회 환란 통과 내지 환란 후 휴거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날만 바라며 지내도 시원찮을 판에, 그보다 먼저 적그리스도를 만날 날부터 대비한답시고 벌벌 떨고 불안해하며 ‘저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적그리스도로부터 고문을 견딜 자신은 도저히 없으니, 제발 단칼에 목숨이 끊어지게 도와주십시오’ 같은 기도나 한다면, 과연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과거에 실제로 저렇게 기도를 한 분이 있었음)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생겨난 오류입니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아서입니다. 특히 교회와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고 성경을 잘못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계 4:1의 ‘이리로 올라오라’, 렘 30:7의 ‘야곱의 고난’, 마 24:13의 ‘끝까지 견디는 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환란 성도의 부활과 휴거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으나 그들은 신약 교회 성도가 아닙니다. 둘째,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믿지 않아서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짐승의 표를 받았다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지옥불로 떨어지니 이걸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교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는 논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저주받을 행위 구원 교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셋째, 기초 영어 지식에 무지해서입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특정 교리를 교묘하게 지지하는 뉘앙스가 들어갈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그런 예를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종말론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많은 예는 계 3:10의 ‘keep from’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각 단어를 모아서 해석하든 따로 해석하든 환란의 시각 ‘그 자체를 맞닥뜨리지 않도록’ 지켜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from은 out of도 아니고 since도, during도 아닙니다. 끝으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상생활에서 겪는 박해(딤후 3:12)나 환란(행 14:22)을, 하나님의 진노인 그 전후무후한 대환란과 분간을 못 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대환란을 거쳐서 정화된 후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식의 교리까지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원래 지기로 돼 있는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니까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발상과 다를 게 없습니다.환란 전 휴거는 그리스도인이 환란과 시험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환란 통과론자들이 제일 잘못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현 세상 정부와 공권력이 아무리 악하다고 한들, 최소한 성육신한 사탄 마귀 적그리스도의 직통 정부는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도 크리스천 역시 가능한 한 순종하고 따르고, 특히 군대 징집에도 순종하라고 명령이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환란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하고 연단하기 위해 있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대환란 때 순교하겠다고 버틸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나 사회생활 착실히 잘 하고, 술자리 같은 것 단호히 거부하고 특히 이 어려운 저출산 시대에 애도 셋 이상 듬뿍 낳아서 키우라고 하세요. (대환란은 우리 주님도 출산과 육아가 재앙이라고 인정하신 때임) 세상 경륜을 나누시고, 구원 받은 성도들을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제정신으로 못 살겠고 주변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나 교리가 나돌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진노를 집행하기에 앞서, 구원 받은 우리를 남김없이 안전하게 데려 가십니다. 아멘!우리는 지하 벙커나 비상식량 따위는 전혀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그 마지막 순간까지 각자 사회의 자기 위치에서 성실하게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이런 든든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9:0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30 11:04:40 | 김용묵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느 영에서 유래되었냐에 따라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네가 누구에게 말을 하였느냐? 누구의 영이 네게서 나왔느냐? (욥 26:4)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눅 9:55.. KJV에만 제대로 적혀 있음)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계 20:12)A. 악한 행위 (마귀의 영)남이 잘 되는 걸 시샘하고 잘못 되는 걸 고소해하는 것,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것, 어떤 형태로든 살인자와 간음자의 성품, ‘나 하나쯤이야’ 하는 심보,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고 착취하고 싶어하는 심보, 배신, 변절 등...정상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나쁜 짓이라고 알 수 있는 일체의 행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쁜 짓은 전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할 줄 안다. 쇳덩어리가 제아무리 노력해도 물에 뜰 수 없듯, 사람이 원래 이런 근성이 있는 걸 어찌하겠는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B. 겉보기로 악하지는 않으나, 죽은 행위 (인간의 영)그런데 사람은 타락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가 죄라는 것과 죄의 결과가 나쁘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할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살인이나 불효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안다. 사람이 너무 타락해서 죄에 대한 책임을 질 능력조차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고 지옥에 보낼 수가 없으며, 실제로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을 못 하는 어린아이는 죽어서 지옥이 아닌 하늘로 무조건 간다.모든 사람들이 A처럼 살았다간 인류는 자멸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나름대로 죄를 억제하고 ‘제어’하는 여러 장치들을 고안해 냈다. 세상 정부와 법률, 군대, 교육 제도 같은 시스템을 만들고 각종 사상, 철학, 도덕, 교양, 인격, 예절, 명예 같은 개념을 생각해 냈다. 시스템 중에는 하나님도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도 있다.이것을 가장 강조하는 조직 중 하나는 군대이다. 국가가 공인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인 만큼 군기와 규율, 명예를 목숨처럼 강조함으로써 그 잠재적 야만성을 감추고 포장한다.B는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만큼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 정도는 알고 있다. B만으로도 언뜻 보기에 대쪽 같은 지조와 절개가 나올 수 있고 애국자, 열녀, 열사, 성인군자, 사상가, 독지가, 심지어 순교자가 나올 수 있다. B는 자부심과 자기 의를 강조하며 지극히 긍정적이다. 내게 돈만 있으면, 좋은 환경과 여건만 갖춰진다면 내 힘으로 의로워지고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개똥철학에 따라 내 소신껏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았다고 말한다.하지만 B는 선행에 대한 진짜 동기를 장담할 수 없다. 나중에는 십중팔구 가식과 위선으로 빠진다. 예를 들어, 이게 진짜 겸손인지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황금률은 ‘어차피 난 더 잃을 게 없는데 이판사판이다’(안 주고 안 받기)란 사고방식이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며, ‘긴 병 앞에 효자 없다’ 같은 한계도 드러낸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판별하지 못한다.또한 죄를 제어한답시고 인간이 만든 모든 시스템은 결국 또다른 허점을 만들어 낼 뿐이다. 가령, ‘종교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적당하게 하나 있는 게 사람 인성에 좋다’고 무심코 내뱉기에는 종교 때문에 벌어지는 폐해, 부작용도 얼마나 큰가?제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아무리 산업화가 진행되고 아무리 정치 제도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변함이 없다.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그나마 B라도 있어서 A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람을 독려하셨다. 남들보다 B의 비중이 월등히 더 높은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위인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B는 하나님의 앞에서 죽은 불완전한 행위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없다. 그저 A와 B 비율만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성경은 우리의 죄악이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조차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말하며(사 64:6), 최선의 상태에서라도 헛될 뿐이라고 말한다(시 39:5).C. 바른 믿음에서 나온 진짜 선한 행위 (하나님의 영)C는 B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더러 애써 지키라고 주어지기에 앞서, 우리 깜냥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으라고..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라고 주어졌다는 것을 인지한다.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부정적이다.우리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는다. 천지에 그분의 이름 외에 구원의 통로가 없음을 믿고, 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도록 한다.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고 나는 그분의 선을 유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위선이고 가식이고가 있을 수 없다.‘그런 식으로 살았다간 눈 뜨고 코 베인다. 바보 병신 신세 되고 사회 생활 제대로 할 수가 없어진다’고 주위에서 막 빈정거리지만... 그런 빈정거림에 성질을 내던 내 옛사람은 어차피 죽었으니 거기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사회 생활 제대로 못 하는지, 굶어죽는지는 그건 생산자인 하나님이 책임질 일이고, 난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자발적으로 잘 행하면 된다. 게다가 이 세상은 어차피 내 진짜 집이 아니며,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일 뿐이다. 진짜 좋고 영원한 집은 하늘에 따로 있다!그러니 남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손해를 보든 말든, 심지어 다른 동료 성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성경만 있으면 세상 트렌드가 어떻든 제아무리 똑똑한 지성인이 코멘트를 하든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뚜렷하다. 사도들 중에 누구는 순교하고 누구는 탈옥한 게 하나님 마음대로였듯이. 그리고 환경과 여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북한에 살든 남한에 살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도 못 챙길 정도로 너무 열악한 환경이란 없다.당연히 예수쟁이라 해도 로봇이나 좀비가 아니며, 자유 의지와 감정이 있고 육신이 있다. 늘 저런 모드로 사는 게 아니다. 육신이 자꾸 살아난다. 제일 수준이 낮은 A의 영향을 받을 일이야 잘 없겠지만(전혀 없다는 건 아님), 겉보기로 그럴싸하고 번드르한 B와 그렇지 못한 C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려는 유혹이 늘 찾아온다. 그럴 때 실수로 육신에게 기회를 또 줘 버리면(롬 13:14) 앗차 실수하는 것이며,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하면 이기고 영적 능력과 경험치가 상승하며, 예수님의 형상으로 좀더 다가가게 된다. 정신 건강에 이로운 건 부수적인 소득일 뿐이다....그렇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락한 이 악한 세상 하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경영 방식에 순응하여 믿음으로 한 선행만이..바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훗날 놀라운 보상으로 되갚아 주실 진짜 선행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C의 양만을 평가하신다. C만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금은보화로 드러난다(고전 3:12). 믿으려면 이런 걸 믿어야 한다. ‘주여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면 그분께서 믿음을 북돋워 주신다. (막 9:24)세상에서 직싸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B를 잔뜩 축적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허사가 될 것이다. 차라리 히틀러처럼 나쁜 짓 깽판 실컷 부리고 나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모를까, 저건 선행 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서 이거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B는 어차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미 좋은 평판으로 보상을 받아 버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마 6:1-2 같은. 눅 16:15, 요 12:43도 참고), 하나님이 참작하셔야 할 이유가 더욱 없다.그리고 C 게이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보상은 고사하고 구원도 못 받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인간 중에 악한 성품인 A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A를 벗어나고자 끈질기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A의 대안으로 일컬어지는 B의 한계에 맨날 좌절하곤 한다. 그럴 때 신을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이 현실을 참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아라. 하나님이 어설프고 불완전한 B라는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정말 놀랍도록 의롭고 공정한 C라는 잣대를 누구에게나 제시하셨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이 사실은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으로의 초대가 될 것이고,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다.   * * * * * * “예수 안 믿고 착하게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다 지옥 가나?” “평생 나쁜 짓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기만 하면 천당 가냐?” 부류의 복음과 관련된 온갖 유치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9:0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30 01:10:43 | 김용묵
  Jesus is still the reason for the season and예수님은 여전히 이 절기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시며                    Wise Men still seek Him.지혜로운 자들(동쪽에서 주께 찾아온 지혜자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습니다.           CHRISTMAS BLESSINGS TO YOU AND YOUR FAMILY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성탄절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With so few days before Christmas Take time to remember: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Jesus is Better than Santa예수님은 산타보다 더 낫습니다.Santa lives at the North Pole.산타는 북극에 살지만     JESUS is everywhere.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Santa rides in a sleigh산타는 썰매를 타지만     JESUS rides on the wind and walks on the water.예수님은 바람을 타시며 물 위를 걸으십니다.       Santa comes but once a year산타는 일년에 한 번 오지만     JESUS is an ever present help.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는 도움이십니다.       Santa fills your stockings with goodies산타는 당신의 양말에 과자를 채워주지만     JESUS supplies all your needs.예수님은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Santa comes down your chimney uninvited산타는 당신 집의 굴뚝으로 무단 침입하지만     JESUS stands at your door and knocks...and then enters your heart.예수님은 당신의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며, (당신이 문을 열면) 마음 속에 들어오십니다.       You have to stand in line to see Santa당신이 산타를 만나려면 줄을 서야 하지만     JESUS is as close as the mention of His name.예수님은 그 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만큼 가까이 계십니다.       Santa lets you sit on his lap산타는 당신을 무릎에 앉히지만     JESUS lets you rest in His arms.예수님은 당신을 그 분의 팔에 쉬게 합니다.       Santa doesn't know your name, all he can say is "Hi little boy or girl, What's your name?"산타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며고작 하는 말이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라고 하지만     JESUS knew our name before we did. Not only does He know our name, He knows our address too. He knows our history and future and He even knows how many hairs are on our heads.예수님은 우리가 알려드리기 전에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우리 이름 뿐만 아니라 주소도 아시고, 우리의 과거와 미래,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아십니다.           Santa has a belly like a bowl full of jelly산타는 젤리를 가득 담은 통 같은 배를 갖고 있지만     JESUS has a heart full of love. 예수님은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All Santa can offer is HO HO HO산타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호 호 호" 하는 웃음 뿐이지만     JESUS offers health, help and hope.예수님은 우리에게 건강과 도움과 소망을 주십니다.       Santa says "You better not cry"산타는 "울지 않는 게 좋아." 라고 말하지만     JESUS says "Cast all your cares on me for I care for you.예수님은 "내가 너를 돌보고 있으니 네 모든 염려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Santa's little helpers make toys산타의 작은 조력자들(엘프들)은 장난감을 만들지만     JESUS makes new life, mends wounded  hearts,repairs broken homes and  builds mansions.예수님은 새로운 삶을 주시고, 상처입은 마음을 고치시고,파탄난 가정을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위해 거할 곳을 만드십니다.       Santa may make you chuckle but산타는 당신이 킬킬거리며 웃게 하지만     JESUS gives you joy that is your strength.예수님은 당신에게 힘이 되는 기쁨을 주십니다.       While Santa puts gifts under your tree산타는 당신의 나무 아래에 선물을 놓아두지만     JESUS became our gift and died on the tree.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사 나무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It's obvious there is really no comparison.정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We need to remember WHO Christmas is all about.우리는 성탄절이 누구에 대한 것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We need to put Christ back in Christmas.우리는 성탄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Jesus is still the reason for the season and예수님은 지금도 이 절기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시며        Wise Men still seek Him. 지혜로운 자들은 지금도 그 분을 찾습니다. May the Lord Bless and Watch over you and your loved ones this Christmas 2009 2009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복을 주시고 살피시기를 원하며       And may He prosper and bless the work of your hands in the New Year.새해에도 여러분이 하는 일들을  번창하게 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9-12-25 10:28:53 | 관리자
각 교회마다 처한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헌금에 대하여 어떤 획일화된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아래 사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에는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생일헌금, 주일헌금, 각 소속기관별 헌금, 성탄헌금, 추수감사절 헌금, 고난주간 헌금, 부활절 헌금, 맥추절 헌금, 신년감사헌금, 송구영신 감사헌금, 성전건축헌금, 장학헌금, 목양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 헌금 등... 그리고 그 중에서는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헌금봉투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교회마다 특별한 사정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있어서 일시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헌금을 드리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꼬박꼬박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세금도 아닌데 "이번 주에 헌금을 냈느냐, 안 냈느냐?" 확인 도장을 받게 하고, 심지어 헌금봉투에 성도들의 사진을 인쇄해서 넣고, 은행 적금처럼 다달이 얼마씩 분할 납부를 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정서를 작성하게 하는 것은(만약 약속대로 못 내면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한 그 성도는 얼마나 마음에 부담감과 죄책감을 느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12-23 19:25:50 | 관리자
                영상 문화 시대에 필요한 청각 교육   비디오 세대와 시각 우위의 사회   흔히들 요즈음 젊은 세대를 가리켜서 비디오 세대, 영상 세대라고 부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메신저를 이용한 채팅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매체의 보급으로 인한 사회 환경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수동적으로 듣기보다는, 능동적 감각 기관인 눈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정보를 추적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시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는 현대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공기 중에서 짧은 시간 동안 진동하다가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보존이 어렵고, 말하는 이의 발음 상태나 듣는 이의 주의집중 정도에 따라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시각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종이, 돌, 자기매체 등에 저장이 되어 동일한 내용을 여러번 반복하여 열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문자나 도형으로 표시된 정보는 소리에 비해 객관적이며 메시지의 왜곡이 적은 편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청각 정보보다는 시각 정보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 셋이 모여서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없는 호랑이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반복적으로 하면 진실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뜻인데, 이는 청각 메시지는 조작과 왜곡이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완전한 청각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것을 권유하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말하기와 듣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지만, 글을 해독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은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말"보다는 지식인의 "글"을 우대하는 유교 문화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우리 말 자체에는 듣기와 관련된 표현들보다 보기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듣기에 대해서는 "듣다, 엿듣다, 귀를 기울이다, 귀담아 듣다"와 같은 몇 가지 표현들이 있지만, 보기에 대해서는 "보다, 엿보다, 째려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쳐다보다, 내려보다, 돌아보다, 살펴보다, 깔보다, 얕보다, 넘보다, 돌보다, 봐 주다, 본때를 보여주다" 등 다양한 언어표현들이 발달해 있으며, 심지어는 시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맛이나 냄새도 "간을 보다, 맛을 보다, 맡아보다"로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통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편집 방향을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바꾸었고, 인터넷 게시물에도 사진이 없으면 "시각적 증거"(사진)를 요구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개인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서도 사진이 있어야 조회 수가 높아지고, 사진이 있어야 사람들이 믿어줍니다. 사진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는 게시판도 있으며, 이런 게시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 "짤방용"(게시물 짤림방지용, 사진이 없어 게시물이 삭제 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 사진을 억지로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시각 편향 현상을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기에 대한 오래된 기억   제가 어렸을 때에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신문에는 한자를 비롯하여 어려운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쉽게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릴 때 듣던 라디오는 어린 아이 주먹만한 건전지 8개를 직렬로 연결하여 넣어야만 진공관에 불이 켜지면서 한참 뒤에 소리가 들리는 큰 가방만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등장했고, 그 다음에는 집적회로를 사용한 소형 라디오가 시중에 보급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매체였습니다. 초창기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는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청취하는 매체였습니다. 시골에서는 이장님 댁에 있는 라디오에 스피커를 연결하여 동네 느티나무에 올려두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라디오 방송을 공유하며 들었습니다. (그래서 맥루한 같은 학자는 라디오가 고대 부족사회의 전통으로 돌아가게 하는 매체라고 합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서 족장의 말씀에 모든 부족민들이 귀를 기울이던 고대사회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지요. 히틀러가 라디오를 이용하여 독일 국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것도 바로 이런 라디오의 특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라디오가 소형화되고, 가격이 내려가고, 매체 내부에서 스피커와 같이 무거운 부분을 빼고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연결하여 듣게 하면서부터 점차 이것이 혼자서 듣는 사적인 매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그 당시에는 온 가족이 함께 라디오 앞에 모여서 뉴스를 듣고, 라디오 연속극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일곱 살 때, 저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집이 다른 집보다 형편이 넉넉했던 건 아니고, 친척 중 한 분이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미군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한국 돈으로 바꾸어 주던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텔레비전을 한 대 얻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저녁 시간만 되면 어린이 만화영화를 보려고 동네 아이들이 다 저희 집으로 몰려올 정도로 텔레비전의 인기는 대단했답니다.   (혹시, 요괴인간, 서부소년 차돌이, 해치의 모험, 이겨라 승리호, 날아라 태극호, 달려라 번개호, 타이거마스크,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그로이저 엑스, 짱가, 마린보이, 우주소년 아톰, 달려라 009, 독수리 5형제, 공룡수색대, 정의의 소년 캐산, 닐스의 모험, 밀림의 왕자 레오, 요술공주 샐리, 요술공주 밍키, 빨강머리 앤, 쾌걸 조로, 철인 28호, 이상한 나라의 삐삐 등을 즐겨보신 분이 있다면 저와 거의 비슷한 세대일 겁니다.)   그런데 볼 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보면서 웃고, 울고, 긴장하고, 환호하고 하다가 막상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언제나 뭔가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텔레비전을 볼 때에는 즐겁고 재미있지만, 실제로 그런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이 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라디오는 제게 언제나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어린이 프로그램 <무지개동산>과 라디오극 <마루치 아라치>는 제가 즐겨듣는 방송이었고, 저녁시간의 뉴스나 라디오 연속극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화려한 화면도 움직이는 영상도 없는 라디오가 제 관심을 끌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각 매체 시대에서 시각 매체 시대로   원래 인간이 처음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시각 매체인 문자가 아니라, 청각 매체인 목소리였습니다.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은 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하던 미개한 사람들이 문자가 발명된 이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문명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은 결코 돌도끼를 휘두르며 짐승을 사냥하던 원시인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고래는 제외하고)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아주 뛰어난 두뇌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시각적인 문자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a mark)"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인간이 범죄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문자 기록이 널리 보급된 것도 노아 홍수 이후의 일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았고, 기억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암기하여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말로써 전달하여 물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에 내리신 홍수 심판이 있은 후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사람들이 지녔던 우수한 능력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지식과 정보의 단절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겁니다.   옛날 음유시인들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같은 장편 대서사시를 모두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정도의 기억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된 이후,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께서 주신 암기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런 좋은 능력들을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 경우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고, 1번부터 70번까지의 반 친구들 이름을 순서대로 다 외웠고, 주요 기관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모두 다 외웠는데, 지금은 전화번호부나 수첩을 찾기도 귀찮아서, 휴대폰에 등록된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통화 연결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이나 책 등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전파된 후로는 사람들이 점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스승에게 묻고 배우며,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나 주인공과 상호작용을 하고, 책을 스승으로 삼고, 신문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들어 학자들은 인쇄술의 발명이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를 촉진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스스로 읽으며 생각할 기회라도 제공하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물은 미리 정보를 가득 채워서, 완전히 만들어진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정보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하거나, 제공되는 내용에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덧붙일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마샬 맥루한(캐나다 출신의 문명비평가, 매체사학자)의 미디어 이론에 의하면, 라디오가 제공하는 청각 정보는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시청각 정보에 비해, 정보의 정세도(definition, TV의 해상도와 같이 정보의 조밀한 정도)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진에 비해, 캐리캐쳐나 만화는 정세도가 낮으며, HDTV에 비해 흑백 아날로그 TV가 정세도가 떨어지며, 6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에 비해 30만 화소의 휴대폰 내장 카메라는 정세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정세도가 떨어지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경우, 그 정보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 수용자는 정보의 빈 여백을 메우고자 그 정보에 자발적으로 참여(invlovement)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경우에는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 카메라의 움직임과 영상 효과를 통한 자연스러운 장면 처리, 현실세계와 유사한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사실은 24분의 1초 단위의 불연속 프레임의 나열이지만)를 통해서 아주 정세도가 높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정보의 수용을 위해서 영화의 관객이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보면서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만화책으로 만들면, 만화의 한 컷과 다음 컷은 불연속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컷들 사이에는 많은 벌어진 틈(동작과 동작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은 그 사이의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신의 머리 속으로 상상하여 그 내용을 재구성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로 꾸며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하게 되면 정보의 정세도는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정보의 정세도가 떨어지는 대신 수용자는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여 이해합니다. 정보가 조밀하게 꽉 차 있는 "토끼와 호랑이"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그보다는 약간 정세도가 낮은 그림책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은 호랑이의 모습에 대해서 화면이나 그림책에 나온 그 모습으로만 지각하지, 머리 속으로 다른 모습의 호랑이는 상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옛날에 토끼 한 마리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라고 음성으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아이의 머리 속에는 바위에 기대누워 있는 호랑이가 그려지고, 다른 아이의 마음 속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호랑이가 토끼를 위협하는 장면이 떠오르고, 또 다른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토끼와 호랑이가 모두 옷을 입고 두 발로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즉, 정보의 정세도가 낮을 경우 수용자는 정보 수용과정에 자발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참여 과정을 통하여, 수용자는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그 매체에 몰입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라디오 음악방송을 들으면서 방송진행자(DJ)에게 빠져드는 것이나, 히틀러의 라디오 연설에 독일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에 동조한 것이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변정담 프로그램이라는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징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위 시간 내에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정보의 정세도, 이용의 편의성 등을 따진다면 단연 시각 매체, 그 중에서도 시청각 정보를 제공하는 영상 매체가 청각 매체보다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 매체는 시각 매체가 갖고 있지 않은 장점들, 즉 수용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며, 창의적인 사고를 촉진시키며, 수용자의 몰입을 유도한다는 좋은 점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성경 말씀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우리의 혼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벧후 2:8).   (벧후 2:8, 킹흠정) (이는 저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물론,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모두 조심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보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죄를 범하였습니다(창 3:6). 아간은 여리고 성에서 노략한 물건들을 "보고" 탐심을 일으켜 죄를 범하였습니다(수 7:21). 다윗은 지붕 위를 걷다가 이웃집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아름다우므로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 11:2).   (창 3:6, 킹흠정)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   (수 7:21, 킹흠정) 내가 노략한 물건들 중에서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좋은 옷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것들을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것들을 내 장막 한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고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니라.   (삼하 11:2, 킹흠정)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의 집 지붕 위에서 걷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   이교도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형상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기묘한 문양이 들어간 부적을 만듭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에서도 믿는 자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하고, 그 대신 성당 벽화를 그려서 성경 내용을 보여주고, 마리아 상, 성인들의 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그림, 부적, 형상들과 같은 시각 자료들을 다 파괴하도록 하셨고(민 33:52),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출 20:4).   (민 33:52, 킹흠정)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   (출 20:4, 킹흠정)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는 도마에 대해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20:29,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상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는(마 4:8), 지금도 성도들을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합니다(요일 2: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셨으며(고후 4:18), 보는 것으로 걷지 말고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5:7).   (요일 2:16, 킹흠정)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고후 4:18, 킹흠정)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고후 5:7, 킹흠정)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거듭 강조하셨고, 그 분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주로 청각 매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 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를 원하시며(신 6:4), 또한 자녀들에게 "말하여"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신 11: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강론하는 것을 듣고 울며 회개하였습니다(느 8:8-9).   (신 6:4, 킹흠정)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   (신 11:19, 킹흠정)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라.   (느 8:8-9, 킹흠정)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에서 명료하게 낭독하고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들을 듣고 울므로 디르사다인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친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날은 주 너희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애곡하지 말며 슬피 울지 말라, 하고   이처럼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교육한 방법은 시각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청각 정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시각 매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지창조의 장엄한 광경을 환상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앞으로 세상에 오실 메시야의 초상화를 그려서 집집마다 붙여놓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 분께서 원하시면 밤하늘의 별자리 배치를 바꾸어서 하늘에 요한복음 3:16 말씀을 새겨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또한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법규와 법도를 들으라"(신 5:1),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그 안의 것을 읽으라"(신 17:19), "주의 말씀을 외치라"(사 40:6),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청각을 통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문화 시대의 청각 교육   제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 아들들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제 목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아들에게 동화도 들려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편지를 써서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목소리를 들으면 배 속의 아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태동을 하곤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들들은 제 목소리를 듣고, 저를 잘 따릅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든 후에 직접 목소리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들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우기 전부터 아들들에게 성경 구절을 한 마디씩 나누어서 들려주고 그것을 외우도록 했는데 지금도 어른들 못지 않게 암송을 잘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유희왕 카드, 만화책, 컴퓨터 게임 등의 시각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기독교 서점에 데려가도 글자가 많은 책은 안 읽고, 성경 만화만 보려고 해서 큰 일입니다. 이제는 만화와 컴퓨터 대신 제 목소리로 더 많이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습니다.   비록 각종 그림과 영상물이 넘쳐나는 영상 문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저희 가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청각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매일 아침 가족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다들 한 자리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고, 제가 성경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읽고 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하거나, "내가 주께로 돌이켜야 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하며 자백하는 기도를 하거나, "이 말씀에서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믿어야 할 약속이 있는가?" 등에 대해 기도를 합니다. 밤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들들이 성경책을 들고 제게로 와서 함께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읽었더니 어느 덧 구약성경 중 시편과 잠언을 다 읽었고, 이제 며칠 후면 신약성경 읽기를 마치게 됩니다. 제 아들들은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저희 가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녀 교육의 특징은 청각 매체를 통한 말씀 교육, 즉 성경 강론과 성경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들을 부지런히 말로 가르치면서, 저 역시 청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소리내어 읽기"입니다. 저는 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크게 소리를 내어서 성경을 읽으면서 제 입으로 그 말씀을 제 귀에 들려줍니다. 이렇게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으면 눈으로 보면서 귀로도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에 말씀을 두 배로 섭취할 수 있게 되며, 성경을 읽는 도중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으며, 성경 말씀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혹시 성경을 눈으로만 보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한 번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 차이점은 직접 해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그래픽, 현란한 동영상,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에 속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주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읽으며 잠잠히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상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계 1:3, 킹흠정)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2009-12-23 18:37:46 | 관리자
                여호와를 주(LORD)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종훈님의 글에 대해 정동수 목사님께서 이미 답변을 해 주셨는데, 제가 그것과 연관하여 빠진 부분을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종훈님의 글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라는 이름은 종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진 이름이다.   2. 그들은 종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주로 섬기지만,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므로  (주종 관계가 아니므로), 여호와를 주로 부를 필요가 없지 않는가?  즉,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여호와가 주가 될 수 없으므로 그대로 여호와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각 질문 혹은 주장에 대해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에게만 주어진 이름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32:28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여호와를 주로 옮겼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개역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창 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킹흠정)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 4:26, 개역)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킹흠정)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셋이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 신 개념이 아니며, 또 그 분의 이름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며, 이스라엘 영토에 한정된 신이라면, 다른 지역에서는 힘을발휘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 중의 여호와", "땅의 한 가운데 있는 주"가 되심을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출 8:22, 개역)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킹흠정)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분리시켜 거기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것은 내가 땅의 한가운데 있는 주인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   물론, 사람들 중에는 주(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토속 신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시리아 사람들은 주(여호와)는 산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면 자기네들이 이길 줄로 알았습니다.   (왕상 20:28, 개역)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 20:28, 킹흠정)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로 나아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시리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무리를 다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니라.   요나는 자기가 이스라엘 밖으로 달아나면 주(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욘 1:3, 개역)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킹흠정)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시리아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패했고, 요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와 고래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 모두에게 주(여호와)가 되시며, 주(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45:6, 개역)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6, 킹흠정) 이것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이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렘 32:27, 개역)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킹흠정)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라.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이것은 주(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그 분을 주(여호와)라고 불렀고, 그 분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수 2:11, 개역)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킹흠정)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우리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지 아니하였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분은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2.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주(여호와)는 주가 되시는가?   이종훈님은 하나님과 본질적 주종(主從)관계를 벗어나서 부자(父子)관계를 맺은 우리에게도 여호와가주(主)가 될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시니 당연히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고생각합니다. 지금 이종훈님의 마음 속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며 종이 아닌데 여호와를 주(主)라고 불러야 하는가?"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마도 LORD와 Lord, lord 를 혼동한 데서 빚어진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 3:15, 개역)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킹흠정)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이것은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은 모든 세대에 이르는 나의 기념물이니라.(출 3:15, KJV) And God said moreover unto Moses,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the LORD God of your father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ath sent me unto you: this is my name for ever, and this is my memorial unto all generations.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신 여호와는 킹제임스성경에서 LORD 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이 이름을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도나이"(主)라고 불렀기 때문에 영어성경에서도 LORD라고 적되, 모두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8:3에 나오는 "내 주여"는 "여호와여"가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主)라고 하며,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역시 "주"라고 합니다.   (창 18:3, 개역)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창 18:3, 킹흠정) 이르되, 내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으면 원하건대 주의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고(창 18:3, KJV) And said, My Lord, if now I have found favour in thy sight, pass not away, I pray thee, from thy servant:   일반 사람들 사이에도 "주"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헷 사람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라고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모두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주"라고 합니다.   (창 23:15, 개역)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 23:15, 킹흠정) 내 주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그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니이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하니라.(창 23:15, KJV) My lord, hearken unto me: the land is worth four hundred shekels of silver; what is                 that betwixt me and thee? bury therefore thy dead.   이종훈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낼 때에는 바로 이 "아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과 종이 나오는 구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창 24:9, 개역)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킹흠정) 그 종이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넓적다리 밑에 자기 손을 넣고 그 일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KJV) And the servant put his hand under the thigh of Abraham his master, and sware to him                 concerning that matter.   여기서 주종 관계에서 "주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이를 master 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노예(종)이고 그 분이 우리의 주인(master)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할 때, 그 주(主)는 노예의 주인이라는뜻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스로 계시는 분, 상천하지의 하나님, 모든 육체의 하나님,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주(LORD)시며, 이방인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주(LORD)가 되십니다.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그것을 양태론으로 해석합니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존재가때와 장소에 따라서 상태만 바뀐다는 주장입니다. 즉,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직장에 가면 "과장님"이 되고,집에 와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식의 설명입니다. TV 부흥사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경동 목사 역시 이런 식의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상태만 바뀐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 성도들 안에 들어가시면 성령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는 하늘나라에서 성부 하나님의보좌는 공석으로 비워두었다는 이야깁니다.   (마 3:17, 킹흠정)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미리 녹음해 둔 음성이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으로 트랜스폼한 상태라 하늘에는 안 계시거든요.   그리고, 막 14:36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막 14:36, 킹흠정)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성경에도 없는 성부 고난설과 성부 사망설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막 15:37, 킹흠정)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막 15:37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신 것이므로, 안타깝게도 성부 하나님께서 사망하신 게되어 버립니다. 온 우주만물을 조화와 질서 가운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망하셨으니 정말 큰 일입니다.그런데 누가 이 죽어버린 하나님을 살릴 수 있나요?   (행 3:15, 킹흠정)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니라.   행 3:15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사망하신 겁니다. 하나님이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까? 이처럼 베뢰아의 양태론을 믿으면 이런 모순들에 빠지게 됩니다.   베뢰아의 양태론은 요약하자면,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런 잘못된 교리는 어디에서온 것일까요? 교리는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데(딤후 3:16), 잘못된 성경을 사용하면 잘못된 교리가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딤전 2:5,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킹흠정)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KJV)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개역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따르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아니라, 오직 한 분만 계신 게 되어 버립니다. 성자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그 하나님이 모습을 바꾸어나타나신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딤전 2:5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해야 합니다.   베뢰아에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같다고 합니다.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  =>  하나님의 이름 = 예수님의 이름 = 성령님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잘못 번역된 "개역 요한복음 17:11"입니다.   (요 17:11,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킹흠정)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KJV)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개역은 요한복음 17:11을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개역의 번역대로 풀어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름을 주었는데("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주었다고 합니다.성자 예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이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겁니다.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의 이름도 "예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11 말씀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가 아니라,"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입니다.   아직은 개역성경의 번역에 익숙하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의 표현이 어색하거나 낯설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하지만, 바르게 번역된 킹제임스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시다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참된 진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처럼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많은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행 17:10-11, 킹흠정) [10]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즉시 베레아로 보내니 그들이 그곳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 있는 게시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93    
2009-12-23 16:50:13 | 관리자
원본을 가져오다 보니 좀 보기 어렵습니다.  <런던타임즈 제10강> 아홉 번 째 글자 ‘복(福)’ 자를 보겠습니다. 備 (비) 也 (야) 。  ‘福’은 무슨 뜻일까요? 복(福)은 '비야(備也)'라고 했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갖추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바로 '오복(五福)을 갖춘 것'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복' 자는 하나님이 나오고(示) 첫 번째(一) 만든 사람(口)이 나오고 에덴동산(田)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허신은 '부(富)' 자마저도 ‘복야(福也)’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자의 개념, 돈이 많은 줄 알았더니 돈이 많은 것이 참된 복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907년 전의 허신 선생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통해 참된 복은 부(富)요, 부(富)는 곧 복(福)이라 하였으니, 이 ‘부(富)’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집을 뜻하는 글자[宀]에 즉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통[丨]하셔서 천지를 덮으시고[冖] 창조하신 후에 한[一] 사람[口]을 에덴동산[田]에 두었다는 글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참된 부자는 재물의 많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쩌면 허신은 당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았는데 창세기 내용을 이렇게 한문으로 풀이하고 있었을까요?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허신은 고대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허신은 이렇게 한자 한 자 한 자에 대한 풀이를 해 나간 끝에 설문해자라는 보물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신화와 사실이 혼합된 상태라면 우리의 역사는 과연 그들의 것과 동일 내지는 유사한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단연 ‘김(金)씨’입니다.  그러나 김씨가 왜 김씨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김씨의 김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으로, 金을 자신들의 성(姓)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금을 숭배한 집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금관이나 금동관이 출토되는 곳이 옛 신라 지역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금을 자신들의 성씨로 삼은 집단은 특이하게도 신라의 지배층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원뿌리를 찾으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만주 북부에 존재했던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와 옛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바로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연의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祖王)을 주몽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시 말해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알에서 나온 아이이며,  이 난생의 아이가 여섯 부족 족장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된다는 특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대된 왕의 성은 박(朴)씨 입니다.  이것은 진한 12개국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의 군장이 박혁거세이며,  그가 진한연맹의 맹주에 오른 사실을 반영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사로국이 점차로 이웃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신라라는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신라는 진한연맹의 맹주이므로 신라인이 누구인지 알려면 먼저 진한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진(秦)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한(韓)나라로 오자 마한은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서로 부르기를 동무처럼 불렀으며,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진한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왔으므로 마한 사람들과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라인들은 고구려와 백제인들과는 다른 계통을 가진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호남과 영남 지역의 억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진은 중국 서북부의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로,  주변 환경이 농업에 부적합 하였기에 유목이 생업이었던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물론 이들이 경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토착 농경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과 진나라 출신의 유목민들이 뒤섞여 살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옛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의 임금을 소개할 때, 황(皇)과 제(帝), 왕(王)과 군(君)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임금은 같은 임금일지라도 서로 다른 격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과 군은 제후국의 수준이었고, 황과 제는 천하를 호령하는 거국적인 인물을 지칭했습니다. 제후 중에서도 영토가 제법 규모가 있고 문화를 잘 소유한 그런 제후는 왕이라고 칭하였고, 농토가 좁고 군사력이 약한 제후는 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시조인 단군을 군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방금 말씀드린 중국 임금 호칭의 격을 상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조상을 군(君)으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나 자문해볼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사학자 한분은 우리 스스로 단군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단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단군신화가 갖는 의미를 우리 2세들에게 전할 때 하나의 신화 정도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의 찬란한 고대 역사는 한낱 이야기 거리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기에서 서기로 바꿀 때 2333년을 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단군이 단 한사람이라면 어떻게 한사람이 2333년이나 살았다는 말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세종대왕 훈민정음 서문에 옛 전자 모양을 모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 훈민정음의 모양을 옛 고전(古篆)의 모양에서 본떴다 하는 대목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자(篆字)모양이 한자의 서체 중에 진시황제의 명을 받은 이사가 통일한 바로 그 전서체였다기 보다는 『환단고기1)』에 실린 가림토의 생김새는 한글 특히 훈민정음 창제 대 판본체의 한글과 비슷하기 때문에 ‘고전을 모방하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훈민정음은 가림토를 본 떠 만든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림토 문자2)는 단군 중에서도 세 번째 단군이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을 단제로 승격함과 동시에 단제 개념이 황제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개념으로 재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제가 있었고 2, 3세 황제가 있었듯이, 우리도 1대 단제가 있었고, 2, 3대 단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닌 엄연히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성경이 만든 한자와 우리의 건국신화를 결부 짓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한 영토 속에서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학문운동을 펼쳐 인내천 사상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내천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 인(人)자, 이에 내(乃)자, 하늘 천(天)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는 사상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처럼 지어졌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중국 일련의 고대사를 비교해 볼 때 동양의 문화는 둘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서 동양의 문화는 꽃피워졌을 것이고, 한자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에도 그들은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를 저는 ‘복 복(福)’ 자에서 다시 보거니와, ‘福’은 비(備)하다, 그리고 ‘현자지제야(賢者之祭也)’ 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진 사람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비(備)라고 하는 것은 ‘백순지명야(百順之名也)’라, 즉 ‘모든 순리대로 이루어진 것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복 복(福)’ 자는 단순히 로또복권에서 이루어지는 재물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루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는 말씀이 축약된 글자로 풀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示)께서 밭(田)을 주시되 한(一) 사람(口)을 창조하여 그에게 전권을 주셨다. 라는 복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시간에 ‘볼 시(示)’ 자는 ‘하나님 시(示’) 자요, ‘귀신 신(神)’ 자는 ‘하나님 신(神)’ 자로 바꿔 읽어야만 되는 까닭을 창세기의 말씀과 비교하면서 설명드렸습니다. 1) 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위 논란이 있으나, 남·북한 학계 모두 그 내용이 왜곡된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2)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는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기원전 22세기에 고조선에서 만들어졌다는 문자이다.《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에 따르면 3세 단군인 가륵 단군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는 가림토가 다른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편리한 문자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림토가 쓰였던 기록이 없고, 가림토가 씌여지거나 새겨진 유적 또한 없으며, 진위 논란이 있는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이유로 가림토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 1994년 12월 문화일보는 '잃어버린 고대문자' 가림토 문자 비석이 만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높이 2m, 너비 32cm의 탁본 한 점을 공개했다. 이는 사회학자였던 이상백(서울대학교)이 학생 시절이었던 1930년대에 만주 지역에서 직접 탁본한 것인데 정도화(진주 경상대학교)가 보관하다가 발표한 것이다.     성경이 만든 한자 제11강 <있을 재(在)>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박재성   <런던타임즈 제11강> 열 번 째 글자 ‘재(在)’ 자를 보겠습니다. 存 (존) 也 (야) 。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글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글자는 있을 재(在)자입니다. 이 있을 재(在)자의 전서체를 보면 와 같은데, 사람을 뜻하는 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하여 하와를 만들었으니 사람 인(人)자가 되었다고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 글자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땅 위에 두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허신은 ‘있을 재(在)’ 자는 ‘존야(存也)’라고 하였습니다. 있다는 뜻입니다. ‘있을 존(存)’ 자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子)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정확합니다. 오죽하면 단옥재도 이 在와 存자의 본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이 부분을 다음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을까요? ‘금인(今人) 어재존자(於在存字) 개부득기본의(皆不得其本義)’라. 이것을 풀이해보면 ‘지금 사람이,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그 본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본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자는 창세기 2장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는 ‘휼문야(恤問也)’ 라고 하였습니다. ‘恤’자는 불쌍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구휼할 휼(恤) 자이고, ‘問’ 자는 ‘물을 문(問)’ 자입니다. 또는 ‘찾을 문(問)’ 자입니다. 방문하다 할 때는 찾을 문(問) 자로 쓰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 물었습니다. 허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있을 재(在)’나 ‘있을 존(存)’은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놀라운 창세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청나라 중기의 고문학자인 단옥재도 허신으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이제야 그 원뜻을 찾아내어서 밝힌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재(在)와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다 그 본뜻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어서 에덴동산에 있게 한 사실을 이 있을 재(在) 자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잊은 채 한자를 전수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잃어버린 한자를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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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3:23:45 | 허광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와 “회개” 와 “고난” 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 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인의 은혜의 장중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올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 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을 드려 강청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을까요? 남가주 서머나교회 담임 김성수목사 책 뒷면 글에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22 10:38:17 | 허광무
다른 종교와도 다른 점 인정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이게 조용기 목사의 인터뷰 기사의 소제목입니다. 이런 사람이 목사라고 하며 사람을 우롱하는데 왜 모두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교회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종교와 대화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른 점을 인정하고 대화는 할 수 있어야지요. '기독교 아니니까 마귀'라고 해선 안 됩니다."   이게 과연 정신 있는 목사의 말일까요?   사도 바울이 타종교하고 대화하자고 했을까요? 성경은 이런 사람을 사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건이 무르 익으니까 마귀의 사자들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사가 코미디언 노릇을 하면서 돈을 긁어 모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장 아무개 목사처럼 코미디를 했을까요?   한국 교회를 망쳐 놓은 대표적인 목사들 가운데 하나가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의 샤머니즘으로 인해 적어도 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혼동 속에서 지내고 있고 그에게 베뢰아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사들이 양태론 같은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며 그의 이단 사상을 파급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데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진리가 와도 마귀의 가르침이 가로막아 거절합니다.   경배와 찬양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용산의 하용조 목사도 문제 덩어리입니다. 교회는 음악이 무너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록 음악과 댄스 부대가 동원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끝장이 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신약 교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목사들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에게 혼을 빼앗깁니다. 정신 차리고 삽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0/2009122000700.html?srchCol=news&srchUrl=news3   조용기 목사 동국대 강연내용 전문 http://www.aspire7.net/reference/cho.ht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21 19:56:29 | 관리자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의 연대기를 머릿속에 넣고 공부하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실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첨부하는 연대기를 인쇄해서 성경 안에 넣고 다니면 의문이 생기면 참조하기 바랍니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12-18 12:23:50 | 관리자
일상생활에서 별(별을 달다)..이라는 말은 크게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쓰인다.한국어보다는 영어로 통용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연예인· 유명인사가 돼서 스타덤에 오르는 경우,그리고 군대에서 장군이 되는 것.이에 덧붙여 ‘별이 주렁주렁한 역전의 용사’ 이럴 때는, 감방 갔다 오는 것도 별에다 비유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군대 용어 문맥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어려운 일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군대에서 살인적으로 되기 어렵다는, 가장 높은 장성 계급의 아이콘도 별 모양이다.병장 할 때는 단순히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어른 長이지만, 소장, 중장 같은 단어는 한자가 다르다. 將이다.   한국군에 장성, 즉 장군 계급은 원스타 준장부터 시작해 포스타(사성) 대장까지 네 개가 존재한다. 오성인 원수 계급은 국군의 규모 문제도 있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백선엽 장군 명예 원수 추대는 성사됐나 무산됐나 모르겠다 -_-) 우리나라의 은인이라는 맥아더 장군은 잘 알다시피 계급이 원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징병제 하에서 그렇게도 인원이 많다는 육군조차 5~60만 명 정도밖에 안 되니 백만대군이 되려고 해도 멀었다.   부사관이나 장교 같은 간부라고 해도 겨우 하사-중사, 소위-중위 제대는 병특이나 별 차이 없는 일시직에 가까우며, 상사(부사관)라든가 최소 대위(장교) 정도는 돼야 처자식까지 군인 월급으로 먹여 살리는 장기 복무 직업 군인에 가깝다.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겠지만 군대는 정말로 사람이 늘 끊임없이 흐르는 집단이다. 나이가 찰수록 점점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 진급을 해야만 하며, 지정된 기간 안에 진급을 못 하면 제대하고 나가야 한다.   다이아나 대나무꽃(흔히 무궁화라고 하는)이 하나씩 느는 것은 병사의 작대기가 느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병과 직책으로 쳤을 때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에 이어 연대장까지 가면 대령 계급인데, 여기까지만 해도 무수히 많은 탈락자들은 마치 나이 때문에 은퇴한 운동 선수들처럼 군대를 이미 떠난 상태이다. (코치가 되는 것도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치 힘들다) 사실, 장군이 아닌 대령 예편만 해도 이미 연금도 나오고 사회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는 지위에 와 있다.   그리고 이 대령이 진급해서 장군인 준장이 된다. (맛대령이 진급해서 맛스타... 라는 삼류 쪼크가 생각나네 ㅜ.ㅜ)이런 사람들은 군 생활 경력은 이미 20여 년을 넘겨 있다. 몇 년 전의 어느 통계에 따르면, 준장 진급 경쟁률은 육사 출신의 경우 10몇 대 1, 그리고 여타 학군 출신의 경우 무려 50~60몇 대 1이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육해공을 통틀어서 장군 자체가 몇백 명--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500은 절대 안 넘음--밖에 안 되니 얼마나 좁은 자리이겠는가? 이 정도로 희소하니 스타인 것이다.   준장으로 진급하는 사람에게는 대위-소령 내지 중령-대령 진급과는 비교가 안 되는 넘사벽 별세계가 펼쳐진다. “장군의 세계에 들어오신 걸 환영합니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으며, 고급 유니폼, 장군용 권총, 고급 승용차(에쿠스던가?)가 지급된다. 출근할 때는 승용차에다 번호판을 가리고 자기 계급을 나타내는 성판을 달 수 있다. 정말 뽀대 나지 않는가? 예비군 향방작계 훈련 때 안보 강연을 하던 사람이 육사 출신으로 준장 예편한 사람이었는데.. 대단하다. ^^;;   계룡시에 있는 육본처럼 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는 준장이 하도 많아서 오히려 거기서 초소 근무나 하는 이등병이 더 희귀하고 ‘이등별’이라고 불린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장군들끼리는 군기가 이등병-병장처럼 존재하나 모르겠다.   소장인 투스타는 잘 알다시피 사단장 직책으로, 말 한마디만 하면 개인 권한으로 병사를 마음대로 휴가를 주거나 영창에 보낼 수도 있다. 이미 수천에서 만 명이 넘는 병사가 이 사람 한 명 관할이다. 박정희가 육군에서 이 계급이었으며, 그 권한은 그 당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삼성장군인 중장은 국군 전체를 통틀어 버스 한 대에 다 타는 인원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군단장 직책이 되는데, 군단장이 병사에게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오히려 사단장보다 못하다. 그런 곳까지 간섭하기에는 계급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사관학교 교장이 중장이며, 부대를 통솔하는 중장은 승용차도 잘 타지 않고 보통 헬기를 타고 날아다닌다고 한다. 일반 병사들은 군 복무 기간 내내 쓰리스타 이상급은 얼굴 볼 일도 사실상 없다.   사성장군은 딱 8명인가 9명 있다. 해· 공군에는 참모 총장이 각각 1명씩으로 유일하고 나머지는 육군의 지역별 무슨 사령관 내지 참모 총장이다.   스바르탄 화백의 <060 특수부대> 만화에서 구라-_- 내지 현실성이 없는 설정을 지적하자면 여자 사병을 비롯해 여럿 찾을 수 있는데.. 특히 별에 대한 왜곡 내지 과장이 참 심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에쿠스 몰고 다니면 될 투스타 아저씨가 웬 시내버스에나 타서, 휴가 나온 사병의 경례를 받는단 말인가? 남편이 대위인데 아내가 준장인 것도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그냥 순전히 재미로 웃자고 그리는 만화인 것이다. ^^   ‘성경에 나오는 로마 군인 백부장은 중대장, 대위 뻘 되는 계급의 군인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사실 군인이라는 게 조국을 지키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이다 보니 나라에서는 응당 군인에게 최고의 예우를 보장해 줘야 한다. 식민지를 거느리는 강대국의 군인이 된다는 건 권력을 등에 업은 출세 행로 중 하나였다. (과거 로마군, 20세기 일본군 등..-_-) 군수 산업만 해도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절대 안 망하는 철밥통이다. 그러나 의사나 법조인과 마찬가지로, 군인 역시 돈보다는 정말 명예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이든 군 복무는 애국심과 충성을 보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해당 국가의 시민권 따는 것에도 엄청난 특혜를 준다. 축구야 유능한 외국인 코치를 영입도 하지만, 군대가 민영화-_-한다거나 능력이 특출난 외국인 장군을 참모진에 영입한다는 얘기는 절대 없다. ㅋㅋ 차라리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졸병은 용병을 수입해서 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관학교를 등록금이 없어서 못 가는 나라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군인이 그런 힘과 특권을 남용해서 정치에 끼어들고, 나라 바깥을 지키는 게 아니라 자꾸 나라 안에서 간섭을 하려 들면 사정이 곤란해진다. 정치 기강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못한 나라가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이다.   성경에서는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가 그러했고(삼하 3:11), 나중에 다윗 왕과 요압 장군 사이의 관계도 그러했다. 요압은 일면 유능한 군인으로서 다윗을 도운 부하였고 건국 공신이었다. 하지만 다윗의 명령을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아서 여러 번 항명도 하고, 왕이 죽이지 말라고 한 사람까지 여럿 죽였다. 나라 지키는 데 능력이 저만한 인물이 없으니 짜르지는 못하겠고... 다윗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기에, 결국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을 축출하라는 지시를 유언으로 남길 정도였다. (구약 성경에서 어정쩡한 아군 노선을 간 대표적인 인물로 예후와 요압이 본인의 기억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생생히 남아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가 저러했을진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우리나라의 정부 수립 초기는 더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이승만의 부당한 명령에 군인의 양심을 걸고 항명했던 이종찬 참모총장이 괜히 존경 받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사욕을 이루기 위해 제멋대로 계엄을 선포하여 군대를 끌어들이기도 하고, 반대로 군인들도 장군끼리 뭉쳐서 하극상으로 정권을 뒤집어엎는 게 그때는 가능했다. 군대 조직에 대해서 좀 알고 나니까 역사가 좀더 실감이 간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이자 완전 미국물 별종인 이승만을 제외하면, 직업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정권다운 정권을 잡은 것은 무려 김영삼이 처음이다. 아들 세대가 아닌 본인이 사병 복무만 마치고 대통령이 된 사례는 노무현이 최초이다. 아무쪼록 우리나라도 군대 내지 군인이 좋은 이미지로 남아 갔으면 좋겠다. 군을 천대하는 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애국심이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2: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7 13:48:32 | 김용묵
요즘 성도들이 새로 오고 늘면서 우리의 믿음과 약속이라는 글을 올릴 필요가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사랑침례교회)는 자유로운 곳이지만 무질서한 곳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기술하였고 또 몇 가지를 서로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과 기존의 회원들이 시간이 있을 때 이 글을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책자로 된 것도 비치하겠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12-17 12:24:00 | 관리자
요즘 천사와 UFO에 관한 책을 보던중 아래와 같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펌 http://www.systemclub.co.kr/   (성경 연구를 통해 UFO는 마귀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의 징조 및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야기) 오늘 올리는 영상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서학자중 한 사람인 척 미슬러의 인터뷰로서 UFO 및 외계인과 성경과의 관계, 네피림과 노아의 방주를 통한 인류 멸절 관계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용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UFO 또는 외계인과 관련된 다양한 혼란을 정리해 주는 자료로서 새로운 시각의 정보에 대한 참고자료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4-X7usZs2wk$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2: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7 09:20:17 | 허광무
성경이 만든 한자 제 9강-신(神)   ‘천신인출 만물자야(天神 引出萬物者也)’ -하늘의 신이란 만물을 이끌어 낸 자’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여덟 번 째 글자 ‘신(神)’ 자를 보겠습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보일 시(示)가 ‘하나님 시(示)’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이번에 배우게 될 ‘神’자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이제껏 ‘神’자를 ‘귀신 신(神)’ 자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과연 이 神이 귀신일까요? 그리고 왼쪽에 위치한 부수자 示가 ‘귀신을 섬긴다’는 뜻의 시(示) 자일까요? 허신은 ‘천신인출 만물자야(天神 引出萬物者也)’ 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신이란 만물을 이끌어 낸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하고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神) 자 역시 ‘귀신 신(神)’자로 가르쳐왔던 분들께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하나님 신(神)’ 자로 바꿔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홍콩에서 출간된 한문본 성경책을 봤더니 창세기 1장 1절을 “기초신창조천지(起初神創造天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하나님의 자리에 신(神) 자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 신(神)이라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보일 시(示) 자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맨 처음 에덴동산에 한 사람을 만들어 축복하셨다는 축복 복(福)자의 변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양을 받친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라는 상(祥) 자의 변도 됩니다. 이와 같이 ‘神’과 ‘示’ 자는 귀신이나 보인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示’ 자를 풀이하면서 유독 아래의 小 자를 설문에서 ‘삼(三)’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까닭은 ‘해와 달과 별’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만물을 표현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칠 때 상량문(上樑文)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 상량문에는 龍 자와 龜 자를 서로 마주보게 썼습니다. 위에는 ‘용 용(龍)’ 자를 거꾸로 쓰고 아래에는 ‘거북 귀(龜)’ 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용이나 거북은 물에서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집에 화제를 예방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결코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조의 지혜로움을 이 상량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용 용(龍)자와 거북 귀(龜) 자 사이에 쓰인 문구가 창세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측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구는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즉 하늘의 해·달·별님은 감응하시어,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  즉 땅 위에 오복을 갖추어 내려주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삼광(三光)’은 ‘해와 달과 별’을 의미합니다. 정확히 ‘하나님 시(示)’ 자와 들어맞습니다. 오복(五福)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의미합니다. 壽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랄 겁니다. 그래서 五福의 으뜸입니다. 그 다음엔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인들 마음이 불편하거나 사고가 끊임이 없다면 가난하더라도 편히 사는 게 낫다는 명심보감의 글귀처럼 편안하게 사는 것이 두 번 번째의 복입니다. 그 다음엔 강녕(康寧)입니다. ‘康’은 건강(健康)이란 단어에서 보듯 몸이 편안함이요, ‘寧’이란 안녕(安寧)이란 말처럼 마음이 편안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호덕(攸好德)입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간다 하여도 주변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을 받는 집안이라면 결코 잘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덕을 갖추되 잠시가 아니고 오래도록 갖추라 함이 인간의 네 번째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임종(臨終)을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병사(病死)나 객사(客死)를 한다면 그 삶은 결코 잘 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오복(五福)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대로 마치는 것을 다섯 번째에 두었습니다. 이 오복 속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린 삼광(三光)에 땅위에 사는 인간의 오복(五福)이 갖추어진다는 것을 볼 때, 이 ‘하나님 시(示)’ 자가 대단히 창조적이고 과학적이며 성경과 부합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4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5 09:32:01 | 허광무
경상북도 김천시에 살고있는 25살 남자입니다. 11월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초등학교 4학년때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천주교 성당을 처음 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는 교회 다니시는 고모의 소개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교회(장로교)로 옮겼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가 군대에서 음모론 관련(그림자 정부 등)책을 보고 군제대후 교회를 띄엄띄엄 다니다가 몇달전부터 어느 기도원 집사님으로부터 교회를 소개받아 다니고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이 진리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을 따르자니 믿음생활이 헛된것이 되어버리고 성경의 창조론을 따르자니 과학적인 사실과 배치되는것 같아서 참 많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야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텐데 창조론이 진리인지 진화론이 진리인지 도무지 확신할수가 없으니 참 많이도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를 조용히 떠났고요.   그렇게 교회를 떠난후 어떻게 살아야 세상사람들에게 저 사람 참 잘살았다고 칭찬받을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검사의 권력과 자원봉사의 명예도 좋지만 돈이 있으면 못하는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니까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같이 기술력있는 회사를 차려서 거대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키는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있는 일로 보였습니다. 세계적인 체제가 공산주의로 바뀌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알짜 기업을 많이 만들어서 국가에 세금도 많이 내고 수출도 많이해서 국가경제 국민경제가 부유해지는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공계, 특히 공대로 가서 대학원 석사박사 과정 밟아서 옛날 에디슨이나 테슬라 같은 사람이 그랬던것 같이 기술집약형의 회사를 만들어서 키우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서 이리유카바 최라는 사람이 쓴 '그림자 정부'라는 책 시리즈를 봤었는데 그 책을 보고 놀란것이,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놀란것은 미국의 금융을 총괄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산하 연방준비은행이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축통화 달러의 발행량을 조절하고 세계금융의 룰을 만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헌법재판관이라고 할수 있는 미국의 중앙은행이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않고 월스트리트와 런던금융가의 손아귀에 있다는것은 참 뭐랄까.. 제가 이제까지 학교에서 배워왔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견고한 신뢰와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그렇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석유중심의 경제체제가 유지되는 이유, 미국이 전쟁을 계속 일으키는 이유, imf사태가 올수밖에 없는 이유.. 결국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발전의 아름다운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소수 기득권층의 부귀영화를 위한 짜고치는 고스톱판의 추악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과거 줄기세포로 유명했던 황우석 박사의 경우에도 한국의 국부가 커지는것을 원치않는 이런 세력들(음모론에서는 프리메이슨이라고 합니다만)에게 당한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돈도 진리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근데 그림자정부 책에도 공교롭게 성경과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은 유대인이며 세상의 온갖 나쁜짓은 유대인의 조종을 받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이 하고있다는 그런 말들.. 그래서 성경과 유대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가지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나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성경이 진리인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에 100%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론 아니면 창조론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있는 이 세상을 규율하는 절대법칙은 하나밖에 없기때문에.. 저는 제가 나름대로 얻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해본 결과 성경이 진리일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로마서 말씀처럼..   1년 정도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늦게나마 인사드립니다. 성경을 만화책처럼 곁에두고 읽기좋아하시는 신실하신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52: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3 14:02:34 | 정지현
본인은 어렸을 때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를 즐겨 봤었다. 얘네들은 특히 중간중간 뮤지컬처럼, 영화로 치면 Sound of Music처럼 극중에 노래까지 나오는지라 어렸을 때 정말 동심을 자극했으며 신기함을 선사했다. 도널드 덕, 미키 마우스처럼 너무 클래식한 거 말고, 90년대에 나온 장편 영화(feature film) 말이다. 가장 먼저 라이온 킹! 본인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94년은 눈과 귀를 사로잡는 명작 미디어가 유난히도 많이 등장했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납량특집 M>, 그리고 마로니에의 불멸의 명곡 <칵테일 사랑>. 중국의 액션 배우 이 연걸의 <정무문>, <보디가드>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라이온 킹>도 94년 여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이다. 흥행 성적은? 더 말이 필요 없다.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고, 전세계에서 극장 수입에 캐릭터 로열티 등으로 제작비의 20몇 배를 벌었다. 디즈니의 이런 성공 사례는, 문화 컨텐츠 하나 잘 만들면 자동차, 반도체 만드는 것보다 소자본으로도 더 대박 낼 수 있다는 예화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이 라이온 킹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사건 구성이 셰익스피어의 <햄릿>하고 비슷하지만 그래도 이건 <인어 공주>나 <알라딘> 같은 작품과는 달리, 원전이 따로 없이 디즈니가 완전히 새로운 아프리카라는 배경으로 사자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사자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그려내기 위해 직접 아프리카로 답사 여행까지 갔다고 한다. stampede라고 불리는 들소 떼 돌진 씬은 극중에서 가장 무섭고, 드디어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죽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도 당대로서는 꽤 최신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람 손으로 그 수백, 수천 마리의 들소 떼를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사실, 그 전에 Be Prepared 씬에서 하이에나 떼들이 척척 행진하는 장면은 저것보다도 더 노골적인 반복 패턴이니, 이 역시 CG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본다. 라이온 킹은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에서, 놀랍게도 북한의 IT 업체로부터 일부 외주를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stampede 씬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라이온 킹의 credit roll을 보면 한두 명 한국인 이름이 있었는데,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그게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비주얼뿐만이 아니라 라이온 킹의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는 것은 역시 음악! OST라 할 수 있는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뿐만이 아니라, 끝날 때 배경음악에 정말 홀딱 반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에 이보다 더 환희와 감동의 도가니를 선사하는 음악과 함께 끝나는 건 접하지 못했다. 어느 지점을 말하냐 하면, 삼촌 스카가 제거된 후, 심바가 Pride Rock을 오르고 구름 속에서 아버지 무파사가 “Remember!” 이렇게 말한다. 심바를 비롯한 사자들은 감격에 북받쳐오른 나머지 포효를 하고.. 그때부터 시작되는 엔딩 음악 말이다. 정말 한국인의 정서에다 비유하자면.. 35년간의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되던 그런 느낌이다. 어떤 영감을 받아서 이런 음악을 작곡해 냈을까? . . . 라이온 킹 얘기가 좀 길었고, 음악으로 치자면, 이듬해인 1995년에 발표된 <포카혼타스>도 훌륭했다. 이건 내가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된 후 역사적 의미가 200% 이상으로 뛰었다. 시간(1607년)과 공간(영국) 배경이 완전 그 제임스 1세 시절이기 때문이다! 왈츠 풍인 <금 캐러 가세>-_-;;; 그리고 <Savages>도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If I Never Knew You도 무척 훌륭한 노래이다. 비록 Colors of the Wind에 밀려서 정식 OST로는 채택이 안 되고 극중에도 삽입이 못 됐지만 OST급 곡으로 손색이 없다. <금 캐러 가세>의 노래 가사 중에는 My dear friend king Jimmy will probably build me shrine.. (노다지만 잔뜩 캐 가고 나면, 우린 떼부자가 되고 귀여운 우리 젬쑤 왕은 날 기리는 기념관도 만들어 줄 거야!) 이런 말이 있다. 번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을 아주 만만하고 애교· 익살스럽게 일컬은 뉘앙스이다. 그러니... 젬쑤 정도는 돼야 그 제임스 1세 폐하라는 걸 알 수가 있는데 저걸 자막이 다 ‘지미’라고 적어 놓으면, 그게 제임스 왕을 기리키는 걸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에는 애칭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어렸을 때 혼동하기도 했었고... 외국 동화를 번역하면서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 외에 포카혼타스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 국인 존 스미스의 성우가 멜 깁슨이라는 것. 굵직하고 안정감을 주는 좋은 목소리이다. 이 사람은 We Were Soldiers에도 나오고, 나중에 2004년엔 사비까지 털어서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 . . 끝으로, <미녀와 야수>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앞의 포카혼타스와 <미.야.>는 둘 다 벽화로 시작해서 벽화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 Beast는 원래 짐승라는 아주 우악스러운 단어인데-_- 누가 어째 ‘야수’라고 무척 서정적인 용어를 잘 만들었다. 서양식 미의 기준에 세뇌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역대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의 여러 여자 주인공 중에서 역시 <미.야.>의 주인공인 벨이 제일 예쁘다. 포카혼타스, 인어 공주, 알라딘의 자스민, 뮬란 등하고는 상대도 안 된다. ㅋㅋ 괜히 Beauty가 아니다. 극중에 미녀와 야수가 무도회장에서 같이 춤출 때 궁궐 배경이 화려한 CG로 3차원으로 잠시 비춰진다. 그리고 얘도.. 엔딩 음악이 라이온 킹 만하지는 못해도 짱이다. 마법이 풀리면서 갑자기 음악 분위기가 확 바뀐다. “Belle, it's me!” ... “It is you!” (벨, 나예요, 나! .... 야수 씨군요! ㅜ.ㅜ)사이의 은은한 음악도...;; 음악이란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진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교리-_-적으로는... 휴거가 일어나기 전에 크리스천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그 모습이 연상된다. 예쁜 주인공의 예쁜 목소리는 누가 맡았을까? 뮤지컬이 포함된 만화영화의 경우, 같은 주인공이라도 일반 목소리 성우와 노래 성우가 따로 있는 게 보통이다. Credit roll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야.>의 벨 목소리는 ‘페이그 오하라’라고 하는 1956년생의 여자 성우 겸 가수가 대사와 노래를 모두 담당했다. 사실 이게 제일 이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미.야.> 정도 되면 참 동심을 자극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화영화로 각색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인어 공주, 알라딘, 미.야 등 여러 작품 제작에 공을 세우고 월트 디즈니 명예의 전당에 이름까지 오른 한 유명한 음악가는 제작 도중에 에이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니 이 또한 참 역설적인 일이다. 이 사람의 명복을 빌며 우리는 그의 업적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추모 문구가 <미.야.> 다 끝나고 Credit roll까지 올라가고 나서 잠시 뜬다. 난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아무리 만화영화가 현란한 CG 비주얼로 승부해도, 내 기억에 지금까지 뼛속까지 남아 있는 건 역시 감동적인 음악이 남아 있는 것들이다. 그 근성과 광기가 나중에 주찬양 선교단으로 쏠렸고, 더 나중에는 철도(철도 음악-_-)로 폭발한 것이다. 음악은 성경적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수단인 반면, 한편으로 사탄 마귀란 놈도 타락하기 전에 음악의 달인이었고 악기 기술자의 원조가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2차, 3차 산업을 최초로 만들어 낸 카인의 후예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게 정말 의미심장하다. 이런 안목이 조금만 있으면, 음악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소리는 절대 할 수 없게 된다. 가사와는 완전히 별개로 음악은 그 자체가 이미 언어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음악이 사람을 어떻게 뒤흔들고 바꿔 놓을 수 있는지 궁금하면 나를 벤치마킹하면 된다. ㅋㅋ 그러니 교회에서 찬양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음악도 그 범위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다. 끝으로, 월트 디즈니.. 참 대단하다. 그 옛날에 만화만으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장편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고 실제로 이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그 사람도 젊었을 적 인생은 엄청 힘들고 불우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후세에 잊히지 않을 이름을 남기고 간 셈이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4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2 23:24:01 | 김용묵
[킹흠정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킹흠정 유1:20]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But ye, beloved, building up yourselves on your most holy faith, praying in the Holy Ghost, [킹흠정 고전14:15]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What is it then? I will pray with the spirit,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I will sing with the spirit, and I will sing with the understanding also.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책마다 나타내는 바가 각양각색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는 기도 등... 아니면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일까요?   그런데 '아! 바로 그거야' 하고 느낌이 오는 답은 잘 없었습니다. 항상 조금은 아쉬운 듯...   함께 나누어 주세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4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1 19:43:24 | 박준화
어제 미국에 계신 한 자매님이 저와 제 아내를 위해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 왔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 주는 소망의 메시지가 담겼습니다.   요즘 육신이 힘들고 목사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깊이 생각하느라 지쳐 있습니다.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텐데....   이 자매님은 사실 남편이 중병에 걸려 본인 스스로 위로를 받아야 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오히려 부족한 저를 위로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제 정수영 목사님의 교회사 강의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간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서 다시 힘을 얻습니다.   힘을 내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합시다.   샬롬.   (*) 강이 나오며 firefly가 있는 그림의 맨 끝은 its own light이 되어야 합니다. (*) 누가 영어와 함께 번역해서 올려 주면 좋겠습니다.   Instructions    One day I asked God for instructionsOn how to live on this earth...   God brought His voice close to my ear and said…   Be like the sun.Arise early, and do not go to bed late.   Be like the moon.  Shine in the darkness, but submit to the greater light.   Be like the birds.  Eat, sing, drink, and fly.   Be like the flowers,Loving the sun, but faithful to your roots.   Be like the faithful dog, but only to your Lord.   Be like the fruit.Beautiful on the outside,and healthy on the inside.   Be like the day, which arrives and leaves without boasting.   Be like the oasis.  Give your water to the thirsty.   Be like the firefly,Although small, it casts its own light.   Be like the water,Good and transparent   Be like the river,always moving forward   And above all things,be like the heavens: A home for God.   Teach me to do your will, for you are my God.May your gracious Spirit lead me into the land of uprightness.(Psalm 143:10)   Lord, don't let me remain where I am.  Help me reach where You want me to be.   Have a beautiful weekand may God keep you always.     가르침   어느 날 나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하나님께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음성을 내 귀에가까이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와 같이 되어라.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지 말아라.   달과 같이 되어라.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되더 큰 빛에 복종하라.   새들과 같이 되어라.먹고, 노래하고, 마시고, 날아다녀라.   꽃들과 같이 되어라.해를 사랑하되, 네 뿌리에 충실하라. 충성스러운 개가 되라,오직 너의 주님께만.   과일같이 되어라.겉은 아름답게,속은 건강하게.   뽐내지 않고 도착하고 떠나가는낮과 같이 되어라.   오아시스처럼 되어라.네 물을 갈한 자들에게 나눠줘라.   반딧불이같이 되어라.비록 작지만,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물과 같이 되어라,맑고도 투명하도록.   강과 같이 되어라,항상 앞으로 나아가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국이 되어라,하나님을 위한 가정.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오니 나를 곧바른 땅으로 인도하소서.(시편 143:10) 주님, 지금 제가 있는 곳에 머물게 마시고저를 도우사 주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게 하소서.   아름다운 한 주 보내시고,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2009-12-11 19:00:41 | 관리자
오늘 오전에 읽은 글입니다.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말의 힘 ?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이 미신적인 신앙을 조장하는 것중에 하나가   말의 힘이다,말의 선포의 힘이다   긍정적인말을 해라, 말로 인정하면 이루어진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 등등말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나 무슨 부적같이 쓰도록 사람들을 미혹하고 사기를 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 선한 말을 하고, 남에게 욕을 하거나 더러운 말이나 악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상으로 나가면 미신이 되는 것이다.   어느 목사의 거짓 교리에 속아서 적극적인 사고, 긍정적인 말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목적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미신이다   오늘도 그 미신에 속아교회안에서 스스로 부자가  될 것이다돈 많이 벌것이다아파트를 살것이다시험에 합격할 것이다결혼을 잘 할 것이다자식들 잘 될 것이다교회부흥할 것이다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잘 될 것이다축복이 있을 것이다 온갓 긍적적인 말을 스스로 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어리석은 일이나 하면서 스스로 속아 허송세월 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지금 수도 없이 많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어느 목사가 퍼트린 독을 가르친 것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미혹이 된 결과다   하나님의 복이 그런식으로 온다면 그럼 방구석에 틀어박혀 일도 하지 말고 온갓 축복의 말을 하루종일 입으로 시인하고, 부르짓으면 복을 받을텐데 왜 그런식으로 하지 않을가? 그것이 일본종교인 남묘호랑교과 뭐가 다른가?다른 미신들과 이방종교들과 뭐가 다른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섬기는 것도 역시 우상숭배의 죄다   그런데 오늘도   수많은 교회 강단에서 아직도 똥오줌도 구별못하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입으로 시인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입술로 선포하라는 미신을 조장하는 목회자들이 지금도 넘처난다 그것이 과연 정상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면 되는 것이지무슨 긍정적인 말을 하고, 선포하는 것이 복을 가져다 주는가?그러면 그런 것을 가르치는 한국의 모든 목사들이 날마다 교회가 100만의 성도가 되라고 입으로 하루종일 선포하고 시인을 하면 그 교회가 100만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되는가?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와 교회치고 진짜 그렇게 되는 일도 없고, 그런 일도 생기지도 않는다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가? 한국교회의 신앙이 왜 그렇게 싸구려 천박한 미신으로 떨어지는가? 이 모든 것이 바로 적극적인 신앙, 긍정적인 신앙이라는 미신에 속은 목사들이 퍼트린 사이비 종교의 모습이다, 참된 기독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결단코 그따위 야바꾼들과 같은 미신으로 주의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게 말하라   성경의 교훈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그외에 다른 것은 없다 다른 것은 다른 복음이며, 마귀와 귀신의 가르침이다, 성경어디에 그런 말의 힘이나 긍정적인 말의 능력을 말하는가? 잠언서에 있는 구절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가?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다성경에 무식하면 용감하게 설교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말의 능력이니, 힘이나, 그따위 거짓말과 사기를 치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바알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다. 성도들도 순진하게 이제는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순종하고, 성도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비신앙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   이성과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난 미친짓을 하지 말라세상에 어디 말의 힘이 정상적인 기독교 가르침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세상의 지성인들에게 외면받는 이유중에 하나가바로 그런 것들때문이다 언제까지 무식한 사이비 순복음식의 미신을 가져야 하는가? [출처] 말의 힘? (THE BAND OF PURITANS) |작성자 퓨리탄[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4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0 10:37:51 | 김학준
김문수 형제님과 저의 공통점 - 어렸을 때부터 죄에 대한 의식이 또렷이 있었고, 고등학교 이전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예수님 영접함 - 권선징악 얘기에 영향을 받음 (완전 공감해요 ^^) - 거듭난 후에도 감정적인 변화가 전혀 없었음 - 킹 제임스 성경엔 온갖 이상한 난외주가 없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음   김 형제님께서 저보다 더 앞서 가신 것 - 킹 제임스 성경을 알기 전부터도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을 꼼꼼하고 분석적으로 읽으심. 스스로 킹 제임스 성경과 여타 성경과의 차이를 찾아내셨을 정도면...   약간의 차이점 - 그래도 부모님 중에 믿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저는 교회 생활 자체는 주일학교 때부터 약간 더 일찍 시작했음   ※ 주일학교 시절   1. 저는 주일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기존 개신교회의 생활 경험이 풍부합니다.제 특유의 자폐적이고 괴팍한 성질 때문에 교회에서도 또래 친구들하고 그렇게 잘 어울려 논 건 아니었지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하면 그 덕분에 연애나 하고 놀러 교회에 간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죄와 심판, 영원에 대해 인지하고 내가 믿는 대상이 도대체 다른 종교와 뭐가 다른지를 진지하게 혼자 생각했습니다.어렸을 때는 제가 워낙 남들하고 못 어울리고 자폐아 왕따처럼 지내서, 사는 게 힘들고 교회를 좀 인생 도피용으로 다닌 것도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제게 기존 개신교회들은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였지, 무슨 안티들처럼 피해 의식을 가질 대상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2. 비록 오랜 시간을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나일롱 신자로 살아서 간증은 못 지켰지만, 저는 기성 교회에서 제법 어렸을 때부터 확실하게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았습니다. 제가 너무 어려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어차피 선과 악도 제대로 분별 못 하는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는 구원 받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이라는 게 없고, 불신자로 산 기억도 없으며, 영접 기도도 없으며 딱 거듭난 직후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없어서 저의 구원 간증은 시시하기 그지없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저는 저와는 정반대의 과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분들의 간증을 무척 신기하게 접합니다.   ※ 고등학교 시절   3.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말 개역성경과 영어 NIV를 한 번씩 다 완독했습니다. 어차피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고 개역성경은 저같은 애가 혼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도저히 아니었기 때문에 1독은 거의 관주/주석에 의지하다시피 해서 읽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 2독에 대한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2독은 비록 변개된 성경을 읽은 것이지만 성경의 각종 영어 명칭에 익숙해짐으로써 훗날 KJV를 공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레위기에 atonement, aroma ('향기'를 뜻하는 NIV 용어. KJV는 savour를 씀)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구나, 사도행전이 무척 재미있구나 하는 식으로 각 책별 느낌을 그때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4. 고등학교 시절은 본격적으로 온갖 찬양 음반들을 가장 활발하게 찾아 듣던 때입니다. 성경에 대해 알기 전에, 찬양 분야 쪽 지식이 크게 늘었습니다. 김수지, 예수전도단, 전하세 예수, 찬미예수, 옹기장이 등 이쪽 바닥에 푹 잠겨 지냈고 우리나라 통일 찬송가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유일하게 일본인이 작사한 178장, 찬양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 패니 크로스비 여사 등 이런 식으로-_-).   5. 특히 무엇보다도 이때 저의 머리를 깊게... 어쩌면 성경 그 자체보다도 더 깊게 장악한 것은 단연 송명희, 최덕신으로 대표되는 주찬양 선교단이었죠! 11집과 10주년 모음집에 완전히 뼛속까지 심취해서 오로지 이것만 듣고, 앨범을 미친 듯이 사서 모아 수백 번을 들었습니다. 몇몇 곡은 저의 민요가 됐습니다.   "도대체 머리 구조가 어떻게 돼야 이런 곡을 작사 작곡할 수 있을까?","이때 녹음에 참여한 단원들은 연습을 어떻게 하고 어떤 심정으로 이런 곡을 불렀을까?","이 악기 소리는 무엇일까?","이 가사의 근거 성경 구절은 무엇일까?","이 곡이 처음 만들어지던 1990년대 우리나라 교계의 영적 상태는 어땠을까?" 등 별별 걸 다 생각하면서! 남들은 당시 핑클, SES 이런 것 듣고 있을 때 저만 중증 자폐증으로 이러고 있었던 것입니다.   6. 창조 과학회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 무렵입니다. 고대인들은 미개인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 노아의 홍수, 욥기 베헤못 구절 같은 지식도 이때 다 들어왔습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여호와의 증인, 천주교 같은 이단들 공부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요 1:1의 하나님(God)을 신(a god)으로 변개하고 I am을 I have been으로 변개했다는 것을 NIV와 비교하면서 분석했습니다.   ※ 대학 이후   7. 저는 우리나라 KJV 교계에서는 일종의 2세대이며, 21세기 신자입니다. 저는 제 나이에 비해 비교적 긴 교회 생활 내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말씀 보존 학회와는 전혀 인연이 없습니다. 90년대 중후반에 한국 교회가 경험한 성경 역본 논쟁에 참여하기엔 그땐 너무 어렸죠.KJV에 대해서 최초로 우연히 알게 된 곳이 이곳 keepbible의 전신인 "그리스도 예수안에" 사이트이고, 애초부터 흠정역만 봐 왔습니다."개역성경 분석"과 "죽음으로 지킨 침례"가 제 인생을 바꿔 놓은 소책자인데.. 그 무렵에 저는 이 내용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마음밭이 갈아져 있었습니다.   8. 제가 킹 제임스 성경과 세대적 진리에 몰입한 것은.. 그 가르침이 내가 지금까지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어서 확신하지 못했던 그 모든 가정들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KJV는 개역성경의 영문판뻘 되는 성경인줄로만 알았는데 성경 내용이 이렇게 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성경을 귀고리 코걸이로 갖다붙이는 게 아니라 원칙대로 문자 그대로 풀이해 줍니다. 주고 받고 인과관계가 확실하며, 하나님의 경륜, 성품을 정확하게 알게 해 줍니다. 딱 내 스타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고 남들이 걸던 수많은 딴지들이 다 답변이 되더군요. 모든 의문들이 풀렸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비성경적인 관행과 절기의 추방, 물침례, 근본주의 같은 것들은 오히려 부수적인 소득입니다.   9. 그 결과 저는 영적 상태가 대격변을 겪었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2독이 끝난 뒤, 다음엔 표준새번역, NASV 등을 다 읽어본 후 제일 어려운(?) KJV는 한참 후순위로 통독하려고 했던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전면 수정해 주신 것도 정말 큰 은혜입니다.2002년 침례 받고, 2003년 대학 시절에 대전 교회를 거쳐 2005년 지금의 진리 침례교회에 출석하던 때에 저는 이미 킹 제임스 맨으로 완전히 개조가 끝난 뒤였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영적으로 양육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지식적인 면과 비지식적인 면 모두에서 많이 부족합니다. 저와 같은 유형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오류 내지 위험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저도 익히 파악하고 있으며, 우리 KJV 진영도 충분히 경험했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적법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건 아니라는 말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라는 말씀.. 이런 평범한 말씀들의 의미를 알게 모르게 파악하면서 매일 수련하는 중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52: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07 07:32:26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