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고 그들과 마리아와 천사들에게 기도하여 연옥에서 죄를 경감받는 것이 천주교 구원의 핵심이다.
다음은 2009년 9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성인들 기사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3/2009090302145.html?srchCol=news&srchUrl=news1
원본 자료의 사진을 보면 여의도에 설치된 천주교 제단 앙크 십자가로 된 것을 알 수 있디. 하얀 십자가만 보지 말고 그 하얀 십자가 주변의 큰 앙크 십자가를 보기 바란다. 앙크 십자가는 이집트 이교 종교의 심볼이고 뉴에이저들의 심볼이다. 천주교는 어떤 단체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한국에 도착한 일성(一聲)으로 이같이 말했다. 그가 당시 방한한 목적은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 103(位)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시성식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3명의 한국인 천주교 순교자와 한국에서 순교한 10명의 외국인이 천주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9월은 한국천주교회가 〈순교자 성월(聖月)〉로 기리는 달이다. 한국 천주교는 9월 한 달 동안 순교 성인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기린다. 올해는 특히 최양업 신부와 순교자 124명 등 125위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 심사를 교황청에 청원해 놓은 상태여서 순교자 현양에 더욱 관심이 모이고 있다.
서울대교구(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는 19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화해·나눔·증거의 축제〉를 연다. 가톨릭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의 문화행사와 함께 헌혈, 장기·골수 기증 등록운동을 벌이고 오후 3시부터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 장엄미사〉가 정진석 추기경과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마련된다. 또 25년 전 시성식 당시 제단이 설치됐던 자리에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표석〉을 설치하고 축복식도 갖는다.
▲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103위 성인 시성식’. 한국 천주교는 올해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지방 교구별 현양행사도 다양하다. 대전교구는 지난 1일 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110여명의 교구 사제, 2500여명의 수도자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충남 당진 신리성지~합덕성당~솔뫼성지의 약 8㎞ 거리를 도보로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대전교구는 또 11일 오후 7시30분부터 해미성지에서 〈제등행렬 십자가의 길 기도 및 미사〉를 갖고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 생매장당했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린다. 부산교구는 12일 삼랑진 김범우 토마스 묘소에서 죽림굴~살티~언양성당~오륜대 순교자기념성당까지 123㎞에서 〈성지 이어달리기〉 행사를 갖는다.
서울 절두산성지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도 전시실을 재정비하고 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재개관기념전을 개최한다. 성 김대건 신부가 그린 독도가 포함된 조선지도와 프랑스 신부들이 사용한 기도서·미사경본(經本) 등 미공개 소장품 79점이 전시된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9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최양업 신부 서품 160주년 기념 학술포럼을 연다. 포럼에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기조강연한다. 또 가톨릭신문사는 12일 서울 새남터성지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청소년 백일장〉을 개최한다.
▲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사진 왼쪽)와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사진 오른쪽). 한국의 聖人과 聖地에 관한 새책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윤민구 신부 지음)=103위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청원인으로 시성 수속을 담당했던 저자가 당시의 뒷이야기를 백서처럼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 한국의 103위 성인 시성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한국천주교는 시성 절차에 대한 지식과 자료준비 등이 부족했고, 교황청이 요구하는 기적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했다. 그러나 새로 뽑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호의와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저자는 "한국의 103위 성인들의 시성은 가불(假拂)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라도 103위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는 125위에 대해서 신자들이 제대로 알고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푸른역사, 1만8000원.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이충우 지음)=국내 71곳의 천주교 성지를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한 핸드북. 일간신문에서 출발하여 평화방송 보도국장,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원로 가톨릭 언론인인 저자는 《피어라 순교의 꽃》 《신앙유산 답사기》 등 저서를 통해 순교자들과 성지를 소개해왔다. 이번 저서에서는 〈해미-죽음보다 배교가 더 두려웠다〉 〈미리내-인가 불빛, 냇물과 어우러진 은하수〉 〈배티-옹기조각에 숨은 사연〉 등 각 성지의 특징을 포착한 짧은 글로 성지순례에 나설 이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들숨날숨, 7000원.
2009-09-04 14:56:53 | 관리자
이번에 한국에 개최되는 WCC와 관련해서 교황과 관련된 사진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시면 현재 및 앞으로 진행될 세상일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유추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들을 쭉보면 한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요.....
이번에 WCC를 개최하는데 앞장서신 김삼환 목사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뭐 만나서 인사하는게 어때서 ?"라고 생각하실분도 있으시겠지만, 저런 지도자급들이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인사하기도 쉽지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일반인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WCC은 여러 종교의 연합협의체입니다. 배후는 로마 카톨릭이구요.
이제 한국의 개신교도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12:2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9-04 08:16:46 | 김학준
8월 28일 북수원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김승학안수집사라는 분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분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 주치의로 15년간 있었고 거의 20년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이 분이 현지에서 조사한 결과 현재 시내산의 위치가 잘못 지정되어 있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자발 알 라우즈산이 실제의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http://www.sinaimount.com/index.html
에 가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부를 퍼왔습니다.
시내광야와 시내산
시내광야와 시내산(N28'35"42/E35'20"05)으로 간주되는 지역에는 산 아래 시내 산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가 세 갈래로 흐르고 있으며 산 아래 광야에는 사우디 정부에서 고고학지역(N28'34"53/E35'23'46)이라는 간판과 함께 110x50m의 철망으로 감싼 금송아지를 올렸던 단이 있다. 그 단에는 애굽신 하토르가 12마리나 암각되어있다. 또한 765m의 철망으로 산 전면을 고고학 간판과 감싸고 그 안에는 성막을 쳤을 것으로 확실시되는 성막터(N28'35"03/E35'22"44)와 그 주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날 때 하나님의 명령으로 12지파를 기념하는 12개의 돌기둥이 아직도 뒹굴고 있다.
시내산 봉오리 아래에는 호렙동굴이라 할 수 있는 동굴이 산 아래를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희생제를 드린 곳에는 성경말씀처럼 들어가는 입구가 동으로 향하고 동물들을 불태워 재를 모아 둔 곳과 불에 그은 흔적들이 역력하다. 단순하게 쌀을 쌀이라 하고 콩을 콩 이라하자 는 단순한 논리일 것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큰 사진으로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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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이 애굽의 시나이반도가 아니라 미디안이라는 증거
1.출2:15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머물며 2.출3:1미디안 제사장 양 무리를 치더니 광야 서편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3.출3:12 내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4.출4:18 애굽에 있는 네 형제들에게로 5.출4: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6.갈4:25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은 지금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시내산이 시나이반도의 부적합성
고센땅에서 자발무사(시내산)까지 애굽땅이다. 가까운 곳에서 11개월5일간 지낼 수 없다. 시나이반도는 미디안 광야가 아니고 애굽 땅이었다, 시나이반도는 침범당하여 남의 땅이 된 적이 없는 애굽 땅이다. 모세는 주위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6일 전쟁 후 15년간 조사 착수 후 관련증거 없음.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 48km는 비성경적이다.(출17:6) 시내산 앞에는 2만명도 앉을 자리가 없다. 홍해를 건넌 자리가 없다.
시내산에 있어야할 것들
엘리야동굴: 왕상19:9
산주위지경: 출19:12
성막친 장소: 출26
12돌 기념기둥: 출24:4
바위틈: 출33:22 시94:22,왕상19:11
산에서 흐르는물: 신9:21
금송아지단: 출32
참고문헌
References and Bibliography 1.The British Museum (1997)
2.The Louvre (1990) Egyptian Antiquities Editions Scala Christiane Ziegler -General Curator in charge of the Department with the collaboration of Marie-Helene Rutshowscaya
3.Off-Road in the Hejaz (1997) Patric Pierard and Patrick Legros
4.Prehistoric Rock of Northern Saudi Arabia (1993/1414) Majeed Khan Ministry of Education Department of Antiquities and Museums Kingdom of Saudi Arabia
5.THE ROCK ART OF ARABIA (2000) SAUDI ARABIA OMAN, QATAR, THE EMIRATES & YEMEN DR. MUHAMMED ABDUL NAYEEM Department of Archaeology and Museology College of Arts, King Saud University Riyadh HYDERABAD PUBLISHERS
6.이집트 (1997) 아바스 칼라바이 한국어판 BONECHI
7. STORIES OF THE PROPHETS FROM ADAM TO MUHAMMAD (1997) (PEACE B UPON THEM) By- AHMED BAHGAT Translated by: Sheikh Muhammad Mustafa Gemea'ah Office of the Grand Imam, Sheikh Al-Azhar By- Islamic Home Publishing and Distriution
8.Gods and Pharaohs of Ancient Egypt (1998) Ancient Cultures Published by Grange Books
9.Desert Treks From Jeddah (1996) Patricia Barbor Stacey International
10.The Gold Of Exodus (1998) Coronet Books Hodder and Soughton Howard Blu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7:1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31 11:11:38 | 허광무
사람은 짐승과 달리 글로 자기의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쓰는 연습을 하면 평생토록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기계쟁이로 교육을 받아 글을 잘 못 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글의 묘미와 힘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글을 잘 써서 하나님의 진리를 통괘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의 아이들이 좋은 글을 잘 쓰면 너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보는 전문 잡지에 다음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서 한 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포스와 내공
강신호: 한전KPS(주) GT정비기술센터 고온부품팀장
요즘 흔하게 쓰는 말 중에 ‘포스가 느껴진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포스’는 선과 악의 균형을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의 대명사로서 영화 스타워즈 중 대사에 등장한다. 말 그대로 외부로 발산되는 독특한 기운(氣運)이나 힘을 의미한다. 또 개성이나 의지, 심지어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의 열망 등을 함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기존에 널리 쓰이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지배구조의 수직성이나 권위로부터 나오는 힘이라면 포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힘마저도 표현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다.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말로 무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력(功力) 이나 내공(內功)이라는 단어도 생각할 수 있다. 공력이 안과 바깥 모두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내공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 실체를 알 수 없는 힘을 통칭하면서 ‘수양과 단련의 깊은 정도’를 표현하는 말일 게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나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으니 글머리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는 듯도 하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언어를 통해 주고 받을 수 있는 의미들의 발랄함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중에는 굳이 ‘포스’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제법인데’라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힘이 있네’ 라고만 해도 충분히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고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우린 굳이 색다른 단어를 찾아내어 쓰고야 만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포스는 외국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단어이다. 공력이니 내공이니 하는 말도 무협소설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즐겼던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되새김되던 단어들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을 타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단어가 주는 의미 이상의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은 보편성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어휘밖에 쓸 수 없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식상할 것인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서로 할 말만을 주고받는 행위일 뿐이라면 그런 관계는 너무 건조할 것이다. 마치 기계나 로봇 시스템을 제어할 때처럼 명령어 몇 줄 입력해주면 되는 식의 관계라면 그건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아니다. 다행히 인간의 지적 감성적 능력은 상대방의 혀끝으로 발음되는 몇 가지 단어들로도 많은 정보를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단지 상대방의 발음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사한 단어들의 의미와 느낌으로부터 밝고 어두운 측면, 기쁘고 슬픈 측면, 선하고 악한 측면 등을 가려낸 뒤, 대응하기 위한 단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극도로 짧은 반응시간 내에 자신이 판단한 내용을 근거로 적절한 단어들을 조합해내고 얼굴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의도와 감정으로 표현한다. 이때 대화를 윤택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느냐에 따라 대화의 질과 깊이가 달라진다. 다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적당한 용언들을 분위기나 상태에 따라 제때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저 의미만을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도 짧은 말로써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시구처럼 미사여구를 섞어야 한다거나 은유법과 같은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부하거나 사무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쉬운 대화 도중에 신선하면서 톡 튀는 단어로 상대방의 감성을 자극한다면 대화의 과정이나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자주 보는 TV 드라마들은 배우들을 통해 의도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화려한 대사로 시청자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유창하고도 논리 정연한 대화들이 오가면서 감정이 빠르게 전달되다보면 보는 이들은 어느새 극중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능력에 따라 감동의 깊이는 더해진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기발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 등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는 유행어들은 시대적 상황을 담거나 대중 정서와도 일치할 때 더욱 반향이 크고 수명이 길어진다. 다양한 신조어나 줄임말의 등장과 활용 또한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핸드폰과 컴퓨터가 폭 넓게 보급되어 다양한 통신매체로서의 구실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매체들은 온전한 문장을 주고받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시간과 비트(bit) 수를 제한하고 쓴 것만큼의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질서가 갖는 헤게모니는 무의미하다. 만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격식과 맞춤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면 당장 컴퓨터와 핸드폰의 활용이 위축될 것이다. 때문에 현명한 유저들은 신조어나 줄임말과 같은 대안을 만들어 내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단어와 감정을 전달하게 위한 온갖 궁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톡톡 튀는 창의력이나 감성의 순발력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며, 당시의 문화와 정서에 동화되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인터넷 속어나 신조어가 난무하는 문화적 현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법을 무시하면서 만들어진 만큼 우리말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조어와 유행어가 담고 있는 재치와 새로운 정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면 언어란 감정을 담는 그릇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을 만들어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사회적 수요층의 공감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물론 수요층이 다양한 만큼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태로 생겨난 그릇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릇들은 밑이 좁거나 깊이가 얕아 많이 담지 못하는 그릇이다. 즉 그릇의 생김과 크기에 따라 담기는 감정의 양과 전달되는 형식이 달라질 것이고 대화와 교류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재미있고 식상하지 않은 그릇들이 많은 편이 사회를 밝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여유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과의 대화가 좀 더 즐겁듯, 밝은 표정으로 늘 진지한 사람과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지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만 그럴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재치와 유머 수준 자체가 동떨어져 있어서는 통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대방에 집중하는 총기 있는 눈빛과 매너를 통해서 만남을 유쾌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의지가 마구 발산되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포스’와 ‘내공’도 없이 남들이 그래주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9-08-15 12:02:30 | 관리자
율법주의를 부수는 것은 결코 무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교회에 대한 확신과 신약시대에 성행하는 율법주의로 인한 페단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우리의 과거와 율법주의를 부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글도 쓰고 책들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저 사람이 혹시 완전히 무정부주의자 혹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는 결코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꼭 반작용으로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의 십일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면 꼭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따서 말을 전하거나 퍼뜨립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므로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개의치 않고 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증거 구절로 내민 것은 이사야서 54장 9-10절이었습니다.
9 이것이 내게는 노아의 물들과 같으니라. 내가 다시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덮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한 것 같이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꾸짖지도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나니 10 산들이 떠나가고 작은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내 친절이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내 화평의 언약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주}가 말하노라.
구원받으면 우리가 죄를 져도 하나님이 근심하지도 않고 노하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극도의 방종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마귀의 교묘한 가르침입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앞뒤 문맥을 보면 신약시대가 지나 주의 날이 이르러(즉 재림이 이르러)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시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스라엘이 천년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과거의 오래 기간에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 온 민족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뒤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인용해서 구원받은 사람은(교회는) 죄를 지어도 더 이상 하나님이 근심하거나 노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신약과 구약을 바로 나누어야 한다고 열렬히 외치는 자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이 슬퍼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협잡꾼들에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요일2:3-4). 십계명의 대부분(안식일 제외)2. 주님을 섬기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살전4:3, 7), 술, 담배 안하고 청결하게 사는 것 등3.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분리하고 세상의 풍조에 따르지 않는 것(롬12:2), 록 음악, 옷, 세상 문화4. 지역 교회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에 지도자들이 정한 규례를 따르는 것(행15:29), 방언 안하고 교회에 깨끗하게 옷입고 가는 것 등 5. 형제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롬14:21)6. 인륜을 지키는 것
구원받았으니 규칙도 없고, 헌금도 없고, 인륜도 없고, 교회 모임도 없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속히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방종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흐려놓으니 예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이야기해도 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니 "교회에 가자"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자"고 할 때의 교회는 교회 모임을 말하지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말의 유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 드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자유는 결코 무법주의가 아닙니다.
자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하고 가릴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바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시다.
이런 협잡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시다.
2009-08-12 12:08:06 | 관리자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
지금으로부터 꼭 1천년전인 1009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이슬람권을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 왕조의 괴짜 왕(칼리프) 알 하킴은 느닷없이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와 그 부속 건물들의 파괴를 명한다. 성묘교회는 그로부터 30년 후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훗날 약 2백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된다.
지난 6월 12일 이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가히 부정선거의 백미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선거 아닌 선거의 후폭풍으로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의 곳곳에서는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가 연일 시위를 벌였고, 극심한 유혈사태로까지 치달았다. 1979년, 친미 절대군주였던 팔레비를 쫓아내고 백발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했던 이슬람 혁명 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지난 30년간 지구 위에 가져온 변화는 돌이켜보면 정말 커다란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모하메드 사망 직후부터 거의 천년 동안이나 유럽을 압도하는 세계적인 패권과 찬란한 문화를 누렸던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서구의 식민통치 아래서 기를 펴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 많은 비이슬람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의 이미지는 ‘미개한 아랍 유목민들의 종교’ 정도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몰아내고 수백년 만에 외세의 도움이 없이 순수한 이슬람만의 이름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아마도 전 세계 10억 무슬림들에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자, 집단 카타르시스 이상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일어났던 그 해 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소련군 역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이라는 이슬람 전사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결국은 10년 만에 피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하였고, 이는 간접적으로 구소련의 붕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란의 신정체제 못지않은 이슬람 근본주의 정부인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에 의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소련군이 쫓겨나고 급기야는 무신론을 신봉하던 소련제국이 통째로 무너지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은 앞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보다 더 큰 반향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영혼 속에 불러왔다. 우리가 잘 아는 알 카에다나 오사마 빈라덴은 바로 이 사건이 빚어낸 부산물들이다.
결국 이 두 사건을 축으로 하여 지난 30년간 세계는 미·소간의 냉전체제에서 기독교 혹은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버렸다. 지난 수백년간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이슬람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오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을 전 세계적으로 뿌리며 수없이 많은 마드라사 신학교를 세계 방방곡곡의 가난한 무슬림 지역에 지어주고 있다. 이 마드라사 신학교에서는 일반 교양과정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대신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을 어릴 적부터 집중적으로 주입시킨다. 이러한 추세는 그 추구하는 이상으로 볼 때 와하비즘의 행동부대라고 할 수 있는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의 등장으로 지난 20년간 더욱 가속화되어왔다.
그 덕에 오늘날 이슬람은 외형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가장 강력하게 결속되고 있는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성숙도마저 무르익어 이슬람 혁명 후에 태어난 30세 이하 인구가 70퍼센트에 달한다는 이란에서는 그 이슬람 신정체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많은 자유를 갈망하는 욕구가 하루에 2백만이나 되는 인파를 테헤란 거리로 내보내게까지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성급한 서방 언론에서는 풀뿌리 차원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시각은 아마도 이슬람 혁명 30년 만에 보수와 개혁으로 분리된 두 대표 세력 간의 내부투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제2 단계론’일 것이다.
어떤 시각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사건으로 분명해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동안 보수·강경화 일변도로만 치닫던 이슬람 문명의 확장 가도에 앞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이번에 이란의 젊은 무슬림들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와하비즘과 알 카에다로 상징되는 폭력적, 퇴행성 이슬람주의에 맞서 이슬람 안에서도 폭넓은 자유와 공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기운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서구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거의 무지한 것에 비하면 오늘날 중동의 많은 젊은이들은 할리우드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구지향적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중동판 베이비부머라고 할 수 있는 30세 혹은 25세 이하의 젊은 층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순수한 이슬람 신앙심마저 퇴색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간의 충돌이 오늘날의 역사현실을 대변해 주는 화두라면 이슬람을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당면한 숙제 중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이슬람에 대해 너무도 아는 바가 없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 다른 점들을 열거하기에 앞서 공통된 부분들을 먼저 열거해보면 이슬람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가까운 영적 집단이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이슬람을 기독교의 이단 교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선 그들은 아브라함(이브라힘―이하 괄호 안은 기독교 용어의 코란식 표기)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으며, 아담(아담), 이브(하와), 노아(누후), 욥(아윱), 야곱(야쿱), 모세(무사), 아론(하룬), 다윗(다웃), 솔로몬(술레이만), 요나(유누스), 엘리야(일리야스), 엘리사(알야사), 스가랴(자카라), 에스겔(둘키플), 세례요한(야히야), 예수(이사) 등 모든 신·구약 인물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5가지 거룩한 책을 인정하는데 유실된 아브라함서, 구약(토우라), 시편(자불), 신약(인질),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지브릴)을 통해 하나님이 모하메드에게 암송하도록 명한 코란이 그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하나님, 즉 God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히브리어의 엘, 엘로힘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가 메시야(마식)이자 하나님의 말씀이셨음, 동정녀 탄생, 복음서의 기적들, 승천하셨음과 지금은 하나님 곁에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물론 이슬람에는 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들이 있다. 철저한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하는 부분은 삼위일체론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신격화하게 되면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논리에서이다. 이를 두고 어떤 기독교 학자들은 모하메드가 살아있을 당시 존재했던 ‘성부, 성모, 성자의 삼위일체론’에서 유래된 이단의 오류가 코란에 반영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과 마리아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들로 보는 관점이 삼위일체론으로 오해된 채 이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학자들의 주장이지 이슬람권에서도 인정받는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코란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시자,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라고는 한다.
또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코란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인 것일 뿐이며, 실제로는 결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다고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가까이에 계시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되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이 인간의 원죄와 죄사함의 필요성을 교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음과 일맥상통한다. 이슬람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늘나라의 낙원에서 사탄(이블리스)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를 받은 다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 위에 보내심을 받아 내려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절대 복종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사탄을 따라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 인류 전체에 대한 심판이 있을 때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구원론이다.
여기에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함께 믿고 기다리는바 궁극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에서도 마지막 날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지난 2~3년간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애통해 할 것으로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이 신약성경의 완성 이후에 생겨난 종교인만큼 무슬림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과연 무슬림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때 우리는 그 무슬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하기로는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무슬림과 우리들을 각각 어떻게 보실까?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다.
(필자는 최근 방글라데시에 다녀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무슬림에게 보내심을 받고 이슬람권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09-08-12 12:01:26 | 관리자
에드워즈는 자신의 64번째 결심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
119장 20절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 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하여 이것
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자."
말하자면, 애드워즈는 하나님에대한 지식을 계발하는 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개발하는 것에 힘을 기울
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진리만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결심문 30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보는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추구했던 바
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수갈채를 받거나 다른 사람과의 논쟁 능력을 기르기 위해 지식의 성장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실천......
여러분이 가진 지식에 맞게 실천하기 위해 추구하십시오. 시편 119장 100절에 의하면 이것이 더욱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
다.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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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존 파이퍼의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 -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8:2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08 13:34:39 | 김경민
사랑침례교회의 형제 자매님들께
킵바이블을 통하여 모르고 지나치곤 하던 성경구절들이 알아지고
더욱 깊은 묵상을 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성경공부 하실 때 시원한 음료수도 드시면서
열심히 하시기를 바라오며...
약소한 일금을 동봉합니다.
한번도 안면은 없습니다.
미국의 오레곤 주에서
박기영드림
(미국수표 $70을 동봉하셨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2: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03 09:13:24 | 정혜미
그리지멕 박사님이 성경말씀을 믿고 토끼의 되새김질을 발견하신 이야기를 읽고 용기를 내어 글을 적어 봅니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고개를 들고 안하무인처럼 걷는 사람도 있고, 땅에서 무엇을 주을듯이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도 있고 ,
좌우를 살펴보면 핸드백을 오른쪽에 메는 사람도 있고 왼쪽에 메는 사람도 있습니다.
1990년경부터 가방을 한쪽에 들거나 메어 어깨가 처진다하여 멜빵가방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진을 찍을 때 보면 얼굴이 좌측으로 틀어지거나 우측으로 틀어져 사진사가 머리를 살짝 돌려달라는 주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위 관찰한 내용을 머리와 몸의 연결 관계로 설명을 하면 8가지 형태가 나옵니다.
여기서 잠깐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핸드백을 오른 쪽에 메는 사람들은 왼쪽 어깨가 처지고 오른 쪽이 올라가서 왼쪽에 메면 흘러내려서 오른 쪽에 메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오른 쪽이 처진 사람, 왼쪽이 처진 사람, 고개를 들고 오른 쪽이 처진 사람,왼쪽이 처진 사람 이렇게 하면 4종류의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각각의 경우에 얼굴이 좌회전 된 사람, 우회전 된 사람 이렇게 하면 8종류의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한의사들이 주장하는 사상체질 및 팔체질에 연관시켜 보았더니 서로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체질을 처음 주장하신 동무 이제마 선생님의 동의 수세보원이란 책에 소양인은 고개를 들고 빨리 걸으며 안정감이 없으며 ,태음인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내밀고 느릿느릿 걷는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글을 경사현상에 연관시키면 고개를 든 사람은 양체질이고 고개를 숙인 사람은 음체질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상체질을 팔체질로 확장시킨 권도원박사님의 글에보면 태음인과 소양인은 부교감신경긴장형체질이고 태양인과 소음인은 교감신경긴장형체질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종합하여 설명하면 고개를 들고 우측어깨가 처진 사람은 소양인이고 ,좌측어깨가 처진 사람은 태양인이고 ,
고개를 숙이고 우측어깨가 처진 사람은 태음인, 좌측어깨가 처진 사람은 소음인이었습니다.
소양인과 태음인은 우측어깨가 처진 것으로 공통점이 있고, 태양인과 소음인은 좌측어깨가 처진 것으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태양인과 소음인은 청각이 발달하고 예민한 성격이고 ,태음인과 소양인은 고민거리도 한 귀로 들어왔다가 조금 있으면 다른 귀로 나가버린다고 표현할 정도로 즐거워 합니다. 팔체질의 권도원 박사님이 주장하신 태양인과 소음인이 교감신경긴장형 체질, 태음인과 소양인이 부교감신경긴장형체질로 양인과 음인으로 다르면서도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척추측만증도 경사현상이 나쁜 습관들이 가중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의학적인 견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치과의사입니다.
환자를 진료하면서 머리와 몸의 연결관계에서 머리뼈와 척추뼈의 연결원리를 연구하다가 치아의 역할에 의하여 8가지 경사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머리가 좌우로 조금씩 회전된 현상을 말씀드리면 얼굴이 좌회전하면 어깨를 비롯한 몸통은 우회전하고 골반을 비롯한 다리는 얼굴따라 좌회전하며 반대로 얼굴이 우회전하면 몸통은 좌회전하고 골반은 우회전하는데 이런 것은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전학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저의 조부모, 숙부, 부모, 형제 ,그리고 자녀와 외가 및 처가 쪽까지 이런 경사현상이 유전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을 조금만 관심을 갖고 관찰해보면 이런 경사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미국과 선교지를 방문해서도 경사현상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동무 이제마 선생님은 음양의 대소로 사상체질을 구분하시면서 음과 양이 조화로운 음양화평지인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것이 사실이라면 8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성경을 읽어 보았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음양이 조화로운 음양화평지인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전후, 좌우 , 회전의 경사현상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과 같은 개인적인 징계가 아닌 소돔과 같은 지역적인 징계가 아닌 ,전인류에 영향을 주는 징계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선악과 사건입니다.(창2:16~17, 3:10~13)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서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직접 들은 아담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직접 듣지 못했던 하와는 뱀이 속여서 먹었다고 고개를 들고 대답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가 고개를 숙인 사람과 고개를 든 사람 2종류의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노아 방주 사건입니다.(창7)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홍수심판으로 노아가족 여덟 식구가 방주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고개를 든 사람, 고개를 숙인 사람 2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청각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머리가 우측으로 경사하고 좌측어깨가 처지고 시각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머리가 좌측으로 경사하고 우측어깨가 처지게 됩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엄청난 홍수가운데 방주에 들어있는 노아가족은 충격으로 좌우 경사현상이 생겨나게 되어 방주를 나왔을 때는 4종류의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세 번째 언어를 혼잡하게 한 바벨탑 사건입니다.(창11)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하늘에까지 탑을 쌓겠다는 사람들의 행위에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조금 전까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서로 외면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흩어지게 됩니다. 서로 외면하고에 관심을 가지시고 보면 이 사건으로 4종류의 사람들이 머리가 좌회전, 우회전이 되어 8종류의 사람이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8종류의 사람들은 양의학적으로, 한의학적으로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을 보고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8종류의 경사현상, 8종류의 사람이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은 이것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것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성경을 읽고 답을 내보았습니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나요? 다른 설명이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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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22:42:54 | 안홍헌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평화의 비둘기가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더니,내가 평화의 비둘기를 바라보는 순간 평화의 비둘기는 멀리 사라져 버렸다"(스펄젼)
성화(행위)에 포인트를 두게 되면 오히려 평화가 사라진다내 행위에 눈을 두면 평화가 사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평화가 임한다우리는 행위의인이 아닌 신앙의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아니기에 행위를 바라보지 않는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이기에더 이상 나에게 소망을 두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율법(행위)을 무시하wk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산상수훈(하늘백성의 법)을 마음으로 사랑으로 지키는 사람이다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그러나 열매조차도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그 열매조차도 은혜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성화의 열매는 행위에 포인트를 둠으로 맺혀지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정상적으로 맺혀지기 시작한다이는 회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찌무라 간조는 1885년 매사추세츠의 애머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비정규생으로 3학년에 편입한다.이 대학에서 간조는 비로소 신앙의 스승인 제5대 총장 줄리우스 호울리 실레(J.H. Seelye)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된다실레의 따뜻함에 감동된 간조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히 죄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에게실레의 다음과 같은 권면이 회심을 일으킨다]
"우찌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되는 거야. 네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너는 어린 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놓고 나무의 성장을 확인하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채 뽑아 보는 것과같은 짓을 하고 있어. 왜 하나님과 햇볕에 맡기고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신앙 의인은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아니기에성화될 수록 오히려 자신의 부패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져만 간다성화될 수록 더욱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이 되어간다 고도로 성화된 자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보면 부패함과 무가치함만을 더욱 고백하게 될 뿐이다
많은 신자들이 혼돈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자꾸만 자신의 성화에서 안식을 얻으려고 한다그러나 우리가 설령 성자 수준으로 성화되었다할지라도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거나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절대로 신앙 의인의 안식은 자신의 성화에 있지 않다그의 안식과 확신은 자신의 행위에 있지 않다그의 안식과 확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그는 행위의인이 아니라 신앙의인 이기 때문이다
-귀하신 한 목사님의 글-[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2: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31 13:08:21 | 관리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시작할 당시의 기도문(Prayer of H. Underwood when he began his mission in Korea in 1885)
오 주님!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주님께서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앉히셨습니다.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지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그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주여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 땅을 밟으며 드린 기도-
언더우드를 장로교 선교사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의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는 세례를 주는 것 외에 거의 다 침례교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의 용기와 주님을 향한 사람에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믿음의 선한 행위도 없이 무조건 비판만 하는 사람은 평생 비판만 하다가 죽지요.
주님을 위해 긍정적인 일을 합시다.
나머지는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정동수[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2: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31 13:01:46 | 관리자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지금 죽으면 바로 하늘나라로 갈 확신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가?저 옆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열차들도 다 제각기 운행을 마치는 종착역 목적지가 있다. 당신은 당신 인생의 종착역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 14:1) 이 어리석은 자란, 고등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성경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죄인이라고 쓰여 있지 않다.장발장 같은 생계형 범죄자들만 죄를 지었다고 쓰여 있지 않으며, 무소불위의 독재 정치인이나 재벌들만 죄를 지었다고 쓰여 있지도 않다.한 치의 예외 없이 10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롬 3:23)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히 9:27)세상 법정은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무죄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인간의 죄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는 온통 괴로워하면서 신을 원망하고 세상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당신의 죄와 이것이 야기할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천당과 지옥은 있다. 지금 지옥을 부정하는 수많은 인본주의자들은 자기 인기몰이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당신의 혼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러는 게 절대로 아니다.무슨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작정하고 악마하고 거래라도 해서 내 혼을 팔아야 지옥에 가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그 상태 그대로 죄 가운데에 죽기만 하면 지옥은 누구라도 저절로 간다. 지옥에 가기 위해 무슨 특별히 천인공노(?)할 나쁜 짓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지옥 가기란 아주 쉽다.그런데 천당 가기도 엄청 쉽다. 구원은 어떤 사상, 가르침, 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에 있다. 당장 믿기만 하면 된다. 착한 일 한 게 나쁜 일 한 것보다 더 많으면 천당 간다는 식의 어거지가 절~대로 아니다.성경에 있는 법규와 가르침들은, 몇 개 주워듣고는 교양 있는 척 거룩한 체 허세 부리라고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우리 힘으로 이걸 다 지키기란 도저히 절대 불가능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하고, 어서 그분 앞에 항복하고 그분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로 오라고 존재하는 것이다.성경은 인간의 죄악이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의 가장 좋은 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일 뿐이다 (사 64:6).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도 없다.예수님은 우리의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교통 문제, 경제 문제, 식량 문제 따위를 해결하러 오신 게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이게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다.교회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해 본 결과, 이 멘트는 정말 몇 번이고 강조를 해야 할 것 같다 -_-)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교회 나오라고, 종교 생활 하라고 이렇게 선포를 하는 게 아니다.혹시 종교 하나 정도는 갖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맥락으로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세상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온갖 비리, 위선, 분쟁 등을 생각해 보라. 복음은 종교가 절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도 닦고 노력해서 신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지만, 복음은 인간을 먼저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요 교회의 머리이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장차 오실 심판자이다. 그분은 성경대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셨다. 언제까지나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이거나 십자가 상에 무력하게 죽어 있는 죄수가 절대로 아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그분은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도, 당신의 가장 무서운 심판자가 될 수도 있다.우리는 어차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죄인이라는 이유 자체만으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는 않는다. 살인하고 간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 대략 이런 식으로 읊으면 15분 정도는 충분히 말이 나옵니다.다만, 거리설교를 할 만한 담대함과 성경 지식과 신앙 논리가 있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잃어버려진 혼에 대한 진정한 연민과 사랑이 자동으로 생기는 건 절대 아니므로 늘 기도로 준비하고 사람들의 마음밭을 먼저 갈아 놓아야 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늘 반성 중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2: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30 10:03:14 | 김용묵
독립 침례 교회 분석김 재근 (전주 소망 침례 교회)
우리 교회는 독립 침례 교회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킹 제임스 성경을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교회는 대부분 스스로 독립 침례 교회임을 표방합니다.
우리는 현재 ‘교단’ 없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라는 대중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단’ 있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라는 성경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 있는 개신교 예배당 앞에 ‘교단’ 명칭이 반드시 있어야 할 수식어처럼 붙어 있는 간판을 볼 때면 씁쓸함을 느낍니다.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성경보다 교단을 더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독립침례교회’라는 나의 ‘교단’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독립 침례교회’나 ‘근본주의’라는 표제가 아무리 옳은 주장이고 좋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독립 침례교회’가 뭘까요? 어디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말인가요?
‘교회론’ 관련 서적을 이것저것 뒤적여 봐도 ‘독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상의 설명을 보기 어렵습니다. 독립 침례교회가 독립하고자 하는 대상은 두 가지의 세상 권력입니다. 첫째, 국가 권력; 둘째, 종교 권력(교단).
1. 교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의 민주 국가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권력과 교회(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신정(神政)국가, 제정(祭政)일치, 국교(國敎).... 등의 모습으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신앙은 긍정적 방향이든, 부정적 방향이든 국가권력에 의해서 통제 받았습니다. 독립 침례 교회는 바로 이러한 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따라서 독립 침례 교회의 좋은 유산을 남겨 준(대개 미국과 영국)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는데, 그들이 대항했던 주요 대상은 교회를 통제하려 하는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 자세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이슬람교, 불교, 장로교, 루터교....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국교(國敎)를 찬성합니다. 이 종교들은 국교로 정해진 경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교 분리라는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 침례 교회는 국교를 반대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교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거나,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분리되기 위해서 피흘려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즉, 과거와는 달리 교회가 ‘독립’을 주장하면서 싸워야 할 주요 대상인 신앙을 통제하려는 국가 권력은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정교 분리를 명문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피 흘리며 싸워야 했으나, 지금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도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행위를 국가로부터 통제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신앙 행위가 ‘공공질서’를 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오히려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거나, 세속적 문제를 가지고 국가 권력에 대항하거나,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흘려서 지킨 훌륭한 신앙적 유산을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입니다.
아무튼 ‘독립 침례 교회’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독립’의 내용 중에서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한 가지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2. 교회가 종교 권력, 교단으로부터 독립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구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세상을 향해서 자신들의 권세를 행사하며 유명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단입니다.
때때로 교단의 권세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독의 자격을 남성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교단에서 성경을 무시한 채 여성 안수를 결정하게 되면, 그것이 ‘진리’인 양 수용됩니다. 이것이 교단의 권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교권을 잡으려고 불법도 자행합니다. 진리의 왜곡은 신자나 교회가 성경보다 교단의 권세를 더 우위에 두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교단이 대한민국 기독교계 부패의 온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 침례 교회는 이러한 종교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단체, 교단도 개별 지역 교회를 통제하거나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외부의 교권으로부터 지시 받지 않고 자유롭게 목회할 수 있습니다. 개 교회의 사역과 운영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자체적으로 결의하고 결정합니다.
따라서 독립침례교회가 주장하는 독립의 주제가 강력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교단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독립침례교회는 타 교회, 타 목회자와 수평적 연대와 교제는 하지만, 수직적 관계 속에서 지배 받거나 예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립 침례 교회가 표방하는 독립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독립 침례 교회’라는 ‘나의 교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립’이라는 신앙적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교단’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단으로부터의 독립 한 가지를 위해서 ‘독립, 독립’만을 외치는 일은 지나친 비효율적입니다.
오히려 ‘독립’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정말로 지나치게 ‘독립한 신자’를 만들어냅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하고, 교회로부터 독립하고, 다른 신자로부터 독립하고, 성경으로부터 독립하고....
신앙생활은 전 영역에서 ‘독립’(independent)보다는 ‘예속’(dependent, 의존, 종속)이 필요하며, 예속이 옳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신자들을 향해서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복종하라. (엡 5:21)
너희는 그런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라. (고전 16:16)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성령님께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교회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다른 신자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킹 제임스 성경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법령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또 나이든 사람은 젊더라도 성숙한 사람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독립(獨立)보다는 예속(隸屬), 이것이 오히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신앙의 가치입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벧전 5: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모두가 서로에게 예속되어야 합니다. 이제 와서는 ‘독립’이라는 말보다는 ‘예속’이라는 말이 더 맘에 와 닿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은 독립적입니까? 예속적입니까? 당신의 교회는 독립적입니까? 예속적입니까?
2007년 8월 29일
2009-07-23 14:59:26 | 관리자
성경으로 세상보기 2
뉴에이지 시대에 살면서 뉴에이지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친근한 형제인 차한 박사님께서 성경으로 세상보기 2라는 책을 통해 뉴에이지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세상보기에 이어 두 번째 나온 이 책은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에게 더욱 유용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자녀들) 앞에 닥칠 일들을 준비하며 한 번 읽어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428&detail=yes
성서 건강학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문명 속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며 살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한 박사님의 성서건강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면에서 많은 통찰력을 줍니다. 여름에 시간을 내서 읽어 보기 바랍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511&detail=yes
2009-07-22 10:09:15 | 관리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 읽기 방법'
“우리 근본주의자들(혹은 보수 주의자들)은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인다”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장합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위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그 말씀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절대로 그것들을 향상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위대한 설교자는 “성경은 다시 기록될 필요가 없고 다시 읽혀질 필요만 있다”라고 말했는데,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모두 ‘성경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확실히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책을 우리가 읽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 가 있는 병사가 고향에서 온 긴 편지를 받고는 3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할까요? 과연 그가 3페이지를 넘기고, 4페이지는 빨리 읽고, 5페이지는 대충 넘기고, 6페이지는 반만 읽을까요? 그가 나머지 페이지를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페이지로 다시 돌아갈까요?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성경 읽는 습관입니다. 사랑하는 고향과 그 편지를 쓴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의 병사는 분명히 그 편지의 모든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시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 그 안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사모하는, 자신의 군사들인 우리에게 ‘고향으로부터의 편지’를 보내셨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읽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보고 시편만 읽으라고 성경책 전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뿐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읽어야 합니다. 고린도전후서에 영감을 주셨던 저자께서 역대기상하에도 똑 같은 영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계시록뿐만 아니라 말라기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계시록 22장 21절까지 다 읽은 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임무가 끝난 양 성경을 옆으로 조용히 치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오직 두 가지 사건만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계속해서 읽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단 두 가지만 있습니다: 죽음과 휴거. 이것들 외의 다른 이유들은 정말로 나약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외칩니다. “그러나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는 깊고도 어려운 뜻을 가진 부분들이 있어요.” 어려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답을 주시도록 약 5분 정도를 드리고는 그 다음엔 답을 찾기 위해 ‘좀 더 나은 번역’ 혹은 성경 주석서를 찾아봅니다. 그들은 마치 차를 몰기 원하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차를 몰기 원합니다. 운전하기 원하는 그의 동기는 순수할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두발 자전거 타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세발자전거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운전할 수 없습니다. 성장해서야 비로소 그는 더 크고 복잡한 것을 ‘운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그것을 읽으면서도 우리은 네 번 혹은 다섯 번 혹은 여섯 번 정도 읽어야 알 수 있는 답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물론 우리는 진지하게 그 답을 원합니다. 우리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답을 다룰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 번째 혹은 열한 번째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에게 주시기로 준비해 두신 것을 처음 읽을 때에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해야만 하며 거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경 주석서들과 다른 번역서들로 가득 찬 선반은 지름길로 가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것들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저는 성경 주석서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성경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우리의 오직 한 분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대체하려는 것을 반대할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최종 권위인 성경을 읽는 시간을 늘리자고 주장합니다.
사무엘 깁 저, “성경의 뿌리와 역사”에서
2009-07-21 16:28:09 | 관리자
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방법
● 토저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위에 인용한 세 구절에 주목하라.
첫 번째 구절은, 기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기도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르게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구절은 약간 다르다. 이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해야 하며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그분을 뵙거나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창조물 위로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한다.
나는 기도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며 잠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요즘은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복음주의 교회 안팎에서 많은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 목록을 적어 놓고 그분께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많은 일들을 그분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기도하며 시간 빼앗기지 말고 산책을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달라는 압력을 받고 계시다.
내가 보기에 기도는 이미 로비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로비한다.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그분께서 복 주시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빈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기를 원하며 그러한 저급한 프로젝트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여행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버스나 화물선이 아닌 호화 유람선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라디오나 편지로 기도를 요청하며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밤새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분노를 발산하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방관하실 뿐이다.
시간을 빼앗는 기도 제목도 있다
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절대로 기도 부탁을 해서는 안 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이러한 기도 제목은 듣는 이들을 난처하게 하며 참석자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리더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개 자매가 기도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녀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두 그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온 회중이 엄숙하게 무릎을 끓고 눈꺼풀을 위해 기도했다. 미소를 띠거나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꺼풀을 문지르라고 권면하고 싶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리라. 문지르기만 하면 멈출 테니까.
이러 사적인 문제를 기도 모임에 끌어들여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합심 기도’ 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합심기도는 영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반드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산만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최우선순위
말씀 속에서 기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이 시간 나는 기도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여러분 중 몇 사람은 내가 먼저 선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 제목 맨 위에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활을 쏠 때 조준하는 과녁과 같다. 마치 기도의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하는 산처럼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감히 단언하기는 이 두 가지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목표가 개인 기도든 합심 기도든 기도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반복이나 갈망 또 훈련이나 자기희생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군대에서 전략가가 사용 가능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첫 번째 목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회복
이 나라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달하는 메시지는 꾸며낸 말이 아니다. 건전한 신학 사상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점검하거나 테스트해 봐도 좋다. 다른 어떤 일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친구로 교제하다가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보잘것없고 천박하며 무능한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분은 단지 ‘위층’에 사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도와주며,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박제가 된 신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언제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신 말이다.
라디오 프로에 한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제 다 같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익살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아니면 반쯤 개종한 카우보이가 얼간이 복장을 하고 나와 숫자 카드를 튕긴 후에, “이제 제가 ‘거룩한 숫자’(holy number)를 몸으로 보여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저급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 같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었던 때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 나아갈 때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분이다. 테니스 복장으로 운동하다 말고 냅다 뛰어 들어가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후에 빠져나갈 수 는 없다.
시카고에 크리스천 남성 사업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위원회뿐 아니라 다른 모임도 많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여러 차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느 특별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임원중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와 연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지금 막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뉴잉글랜드에서 온 한 멋진 노신사가 일어서더니 “의장!”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장이 그를 보며 “좋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노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 시카고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경건하게 예배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데없는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요. 이 자리에 지금 방금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사람이 있다니요.”
곤경에 처한 의장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신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사실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전능하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이사야 대언자는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높여 “오 하나님,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자 엎어져 마치 돌처럼 굳어 그분께서 일으켜 주셔야만 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엎드려져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저는 티끌이고 재입니다. 부정한 사람이며 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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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많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값싼 하나님이다. 다양한 신학적 사상과 성가대의 노래 또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혼합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명령이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회복될 때 더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켜가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사취하는 행위이며 결국 어떤 영혼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 경우는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상한 형태의 변절자를 양산하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 즉 첫 번째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제일 먼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복음주의가 타락하여 무늬만 성경적일 뿐 인본주의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는 인간을 먼저 찾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기독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말, 인간들을 위한 행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우선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오시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잘못된 것을 뒤엎으며 인간의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자만심을 사라지게 하리라. 그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게 되리라. 이제,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광고업자들의 도움과 최신 기계들을 활용해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제일 먼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석방되는 것
반드시,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목표는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빠져 있다. 오순절교회, 근본주의 교회, 기독교 연합선교회 등 모든 교회가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당신이 속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뿐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있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마침내 회복시키실 때까지,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조차 체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의 생활 방식과 도덕관을 배우고 익히며 점차 그들이 파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교회가 이 세상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이 작업이 완결되어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원래 있던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신약 시대의 삶의 표준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복음주의가 아무리 진보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바벨론에서 더 많은 자녀들을 낳는 꼴밖에 안 된다. 개혁과 회복을 통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영광이 우리 위에 다시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바벨론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생산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셈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가 회복되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선교 사업조차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열등한’ 기독교를 해외의 토양에 이식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선교사들이여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어떤 인물을 결코 키워낼 수 없다. 성경에서도 “각각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싸구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택해 선교지로 보내 보라. 그의 머리는 온통 천박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닮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것이다. 선교사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변질된 기독교를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리라. 선교 차원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선교사들이 양성되고 그들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져 결과적으로 ‘양질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토저 목사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 그리스도인이면 다 똑같지 않은가요?”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30배, 어떤 사람은 60배, 또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는 법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큰 별이 있는가 하면 작은 별도 있고 또 어떤 별은 망원경으로라야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너희 중 어떤 이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어떤 이는 영적인 자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기독교 신앙은 고급 수준에 머물 수도 있고 적당하거나 평범한 수준 또 낮은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성경학교나 크리스천 대학, 기독교 잡지, 성경연구 모임, 세미나 등을 살펴보라. 거기서 주창하는 기독교 신앙은 삼류 즉 타락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선조들이 알고 있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체험한 고급스럽고 거룩한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신앙 말이다.
명심하라! 우리가 개혁을 완수하기 전에 양산되는 모든 책들과 잡지 또 학교들은 부패한 교회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독교 연합선교회에서 출간하는 ‘연합회 증언’이라는 잡지는 책을 발간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장과 부편집장을 비롯한 모든 편집위원들이 타락한 이류급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잡지는 이류급 잡지가 될 것이 뻔하고 또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 모두가 원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스포츠, 신문 잡지, 예를 들어 ‘라이프 잡지’나 ‘타임지’와 같은 매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씀의 정확한 의미대로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교회와 잡지, 선교사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4.5kg의 몸무게로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울부짖으며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태어나 나기도 전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각자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리갯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분께서 마땅히 전능자가 되시도록,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 교회의 패턴으로 회복되도록 말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목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인가. 사람의 인정인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산 정원에는 뱀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자아’(self)라는 뱀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독을 발하여 기도를 망쳐 놓는다. 야고보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가령, 내가 무릎을 꿇고 금식까지 해가며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하며 그분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 보았는가? 이런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의 일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분이 받으실 영광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응답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엘리야가 되어 많은 무리 앞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은근히 열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잘못된 것이 개혁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루터가 되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도우소서”라고 요청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위 행렬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회가 사탄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며 정작 승리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싸운 덕분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학교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주일학교 교사로 인정받아 “저분이 부장이셨을 때 숫자가 25명에서 39명으로 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부탁하건데, 수준을 높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
“오,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든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메노파 교도’(Mennonite,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분파)를 사용해 영광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한 단체가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또 진지하게 기도해야만 한다.
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 중 몇몇 사람은 이런 관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마비에 걸려 운동장에 나자빠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돼도 좋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차라리 ‘메리의 어린 양(Mart's little Lamb)노래의 가사를 거꾸로 부르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분께서 누군가를 사용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시면 반드시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영성인가. 게으름인가?
여러분 중 약간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성도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실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영성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맞춰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은 지난 수년 동안 최고의 예배를 구상하며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단지 게으름일 뿐이다.
누군가 예배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께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
나는 북미대륙에서 큰 교회 중 한 곳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교회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누가 와서 묻는다 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추측에 맡기고 싶다. 아무튼 그 교회의 주일 아침예배가 어떠했는지 아는가? 노상 집회였다. 약 3,500명이 운집한 길거리 모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와서 성경책 페이지를 홱 넘겨가면서, 그것도 차에 광택을 내거나 긴 낚시 여행을 마음껏 즐긴 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나와서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성’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나태와 무례함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교파, 성공회나 루터교 성직자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은 무시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전도자가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기쁜 소식입니다. 이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고 있어요.”
그러자 전도자는 급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 운동을 잠시 중단시키시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실상 이것은 비극이다. 복음 전도자가 받을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도자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쨌든 영혼을 구원했지 않소?”
그렇다. 그 전도자는 바벨론에서 인큐베이터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필요조차 없는 몸무게 4.5kg의 건강한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은 본래 태어났어야 할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로 개종만 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리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응답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소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더 많게 하신다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주님,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축복하신다 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교회에 먼저 복을 주셔서 우리가 그 흐름에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을 놓게 하소서. 저는 그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시면 좋고, 쓰지 않으신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자를 적극 후원하겠나이다.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저는 무대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비록 그 일이 무미건조한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가?
“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걷어차여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몇몇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몸서리칠 일이다.
“오,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교회 집사들이여, 진정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혹시 당신이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기도에 ‘정가표’를 붙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회복시켜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쓰신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몰리노스(1640-1697. 스페인의 신비주의자)가 한 말을 기억하라.
“기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지 못한다. 비록 사탄과 인간의 정욕이 방해한다 해도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으며 위축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소신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메노파교회, 독립교회 어디를 가든 감히 이렇게 외친다.
첫째,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되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싸구려 신이 되어버렸고 무릎 꿇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옷자락으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바르게 경배하고 예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신약 시대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문제는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 만일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계속해서 세속적인 교회를 모방하고 복음주의 교회를 타락케 하며 청년 운동이나 주도한다면 또 이 단체가 세속적인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타락한 준(準)자유주의자 계열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게 하리라.
여러분에게 기탄없이 말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앞으로 이 단체를 떠날 생각도 없다. 만약 떠나 있다면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단체가 ‘세속적’인 도구와 방법, 철학 또 관점에 완전히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참아야 할지 혹시 내가 너무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신다 해도 나는 “오 하나님! 어쨌든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성령의 불이 내려올 때 불을 받고, 복이 임할 때 복을 받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회복되며,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같은 대언자가 무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때 우리가 그 대상자 중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지 나는 모른다.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 시대의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대언자를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아마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며 마치 택시의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큰 귀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소년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택한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다가 그를 일으켜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리라. 수십억이 드나드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 않고서도 부흥과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오 하나님! 택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쓰시기로 예비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복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또 저로 하여금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 주소서. 오직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이다. 20,30대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목도한 적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고 두렵게 나타나 참석자들이 말도 크게 못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너무나 존귀하고 높으신 분이라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분으로 들은 적이 전혀 없다.
기독교 연합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가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다. 이때 설교가 끝나고 모임을 마쳤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경외감을 느껴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2009-07-17 14:33:23 | 관리자
신앙은?
● 토저
신앙은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꾸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 거룩한 지식에 조화 되도록 변화시킬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선다.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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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7 14:30:40 | 관리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변화
● 토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혜롭지 못한 젊은이를 볼 때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저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그가 성숙하게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공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시간도 그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실로 시간은 우리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변화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중에서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29:47 | 관리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
● 김재근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자의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된 일이냐?” [사도행전 2:7-8]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좋은 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으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 대장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바울 사도가 성난 군중 앞에서 히브리말로 설교하자, 그들은 한 동안 바울의 설교에 경청했습니다.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더욱 잠잠 하거늘…” [행 22:2].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언어로 진리를 전파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한국에 온 지 8개월째를 접어드는 앳된 몰몬교 선교사와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열정’과 ‘헌신’ 앞에 내 자신이 오히려 분노와 함께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흠뻑 묻어났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도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수한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주께서 맡기신 말씀을 주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전파하고자 전 생애를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주님을 위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열정과 헌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
그는 버마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영어-버마어 사전 편찬에 힘썼고, 버마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
그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국말을 하며,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식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밀고 ‘변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해서 병원 짓고, 학교만 세웠다고 비방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열정과 헌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윌리암 케리 :
그는 인도에서 사역한 인도선교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지역 언어 문법책과 사전 편찬 작업에 수고 했습니다.
윌리암 카메룬 타운젠 :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인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긴 그는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중미 과테말라 지역의 한 인디언의 한 마디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관심을 가졌고,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함께 현지 언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말과 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헌신한 사람들을 잘 새겨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고린도전서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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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7 14:25:4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8
● 스콧 휴즈
지금까지 우리는 약 1년 반에 걸쳐 무신론적 진화론이나 균일론보다는 성경적 창조론이나 대격변론이 과학적 사실들을 훨씬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을 보았다. 우주의 무한한 변화, 복잡성, 그리고 질서는 놀라우신 설계자/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으며 그분의 존재를 입증해 주고 있다. 참된 과학은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지지하며 확증하고 있고 생물체 진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신론적 진화론 사상과 관련된 성경적 사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조차도 온 세상에 넓게 퍼져있는 진화론 사상에 의해 협박을 당하고 있으며 또 이에 현혹되어 자기들의 크리스천 믿음과 진화론을 타협하고 비성경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인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과 진화론 사이에는 현저한 모순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인식한 채, 하나님께 헌신한 성경 신자들은 진화론 사상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개념은 서로 호환될 수 없으며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다. 다음의 표는 성경의 창조와 진화론이 서로 타협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창1).
자연적이며 우연한 선택 과정이 모든 것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2
세상은 지금부터 6,000년 전에 문자 그대로 6일 간에 창조되었다(창1).
세상은 매우 긴 시간(약 40 ~100억 년)에 걸쳐 진화되었다.
3
창조는 완전히 이루어졌으며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창2:3).
창조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
바다가 땅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
땅이 바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5
두 수권들(hydrospheres) 사이에 대기가 있었다(창1:7).
대기와 수권이 접해 있었다.
6
최초의 생명체는 땅에 있었다(창 1:11).
생명체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7
최초의 생물은 육상 식물이었다(창1:11).
수생 유기체가 처음으로 진화되었다.
8
지구가 태양과 별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4~19).
태양과 별들이 지구보다 먼저 있었다.
9
과수(果樹)가 물고기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1, 20-21).
물고기가 과수보다 먼저 있었다.
10
모든 별이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16).
별들은 각각 다른 시대에 진화되었다.
11
새들과 물고기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20~21).
물고기는 새가 나타나기 수백만 년 전에 진화되었다.
12
새들이 곤충보다 먼저 있었다(창1:20-31; 레11장).
곤충이 새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3
고래가 파충류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0-31).
파충류가 고래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14
조류 다음에 파충류가 있었다(창1:20-31).
파충류 다음에 조류가 있었다.
15
사람이 창조된 후에 비가 내렸다(창2:5).
비가 사람보다 먼저 있었다.
16
남자 다음에 여자가 창조되었다(창2:21~22).
유전학에 따르자면, 여자 다음에 남자가 생겼다.
17
빛이 창조되고 그 뒤에 태양이 만들어졌다(창1:3~19).
태양이 만들어진 후 빛이 나왔다.
18
식물이 창조된 후 태양이 창조되었다(창1:11~19).
태양이 형성된 후 식물이 나타났다.
19
풍부하고 다양한 수생식물이 일시에 모두 창조되었다(창1:20~21).
수생물체는 초기의 단일 유기체로부터 점차로 진화되었다.
20
사람의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창2:9).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21
사람에게는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는 권리가 있다(창1:28).
대부분의 생명체는 인간이 진화되기 이전에 멸종되었다.
22
인간의 식성은 본래 초식이었다(창1:29).
인간의 식성은 본래 육식이었다.
23
완전히 결정되어 구별되는 종류들이 있었다(창1:11-12, 21, 24-25; 고전 15:38~39).
생명체의 형태는 계속해서 변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24
인간의 원죄는 죽음을 가져왔다(롬5:12).
투쟁과 죽음은 인간이 진화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이 같이 직접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들 외에도, 무신론적 진화론과 성경적 기독교 사이에는 일반적 원리에 있어서도 확실한 차이점들이 있다.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8).
진화론의 열매는 마귀가 주관하는 이 세상 시스템에서 여러 가지 믿음과 행위로 나타났다. 진화론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지적/철학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암처럼 널리 퍼져있는 상대주의윤리를 위한 기초를 확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도, 무신론,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고 성도덕상의 자유주의를 촉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로 인류의 일반적 복지와 정신문화는 이러한 자연주의/인본주의 철학이 생산한 결과로 인해 큰 피해를 받아 왔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책임 있는 창조물이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동기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아무런 목적도 없는 진화 과정에 의해 생긴 생산물로 간주하게 되면 사람은 모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면제받게 되며, 이 경우에 사람은 단순히 자연에서 우연히 생겨난 한 생산물이 되며 기껏 해 봐야 지적 동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악한 행동이, 그가 예전에 동물이었으며 아직도 그 속성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온 인류가 계속해서 이러한 논리로 치닫는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곧 그 자신만이 소유한 유일한 능력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도덕적 개혁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이 만든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 바뀔 수 없으며, 오직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잡아 줄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3-7)
진화론은 특히 윤리와 도덕이라는 영역에서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에서 잘 드러난 성경적 윤리는 틀림없이 모든 윤리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연함/무질서의 진화 과정이 우리의 창조주라면 윤리의 절대성에 대해 전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시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신윤리(新倫理), 좀 더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윤리 부재’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사상/철학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현대 윤리의 타락이 진화론 사상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널리 파급되고 있는 윤리 붕괴 현상은 모든 윤리 기준을 휩쓸어버리고 있는 체계, 즉 진화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같이 한탄할 수밖에 없는 악한 추세를 해결할 수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순수와 회개와 성경적 표준과 원리로 되돌아가려는 진정한 마음 자세를 갖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진화론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많은 난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깊이 생각해 본 문제들만으로도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형태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거절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무신론적 진화론과 타협하고자 하여 개발된 유신론적 진화론은 결코 성경적 기독교와 화해할 수도 없으며 화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최종 결론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모든 생물체가 우연의 과정 속에서 진화했다는 관점과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에 의해 종류마다 독특하게 창조되었다는 관점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적/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생명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관찰이나 실험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화론과 성경적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 실험에 의해서 그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 두 개념은 한결 같이 믿음의 문제이지 결코 과학의 문제가 아니며 종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 철학이며, 따라서 믿음을 요구한다. 사실 진화론의 경우에는 ‘믿음’이라는 말보다 ‘쉽사리 믿는 성질’(경신, 輕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와이송 박사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정의는 특별히 진화론에 더 적합하다.
실로 진화론은 많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우연에 의해 무엇인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타파해 버리는 L-단백질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내버려두었더라면 대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을 DNA 암호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형성되었다는 믿음, 진화론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화학적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아미노산 등을 마구잡이로 파괴시키고 말았을 초기의 불리한 지구 환경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생물이 발생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열역학의 법칙들을 포함한 대자연계의 법칙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실제로 진화론자들에게 항상 더 많은 문제만 가져다주는 과학의 진보들이 이제는 진화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무자비하게도 오직 두 개의 이야기, 곧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시켜주는 이야기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확률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고정된 종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해서 진화론을 확증해 줄 것이라는 믿음, 진화론자들에게 이중의 부정 효과를 가져다주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시대를 통해 동식물의 종류들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음을 잘 보여 주며 또한 과도기 중간연결고리를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오직 전 세계적 대홍수가 있었음을 잘 증언하고 있는 화석들이 언젠가는 진화에 대해 유리한 증언을 하리라는 믿음, 언제나 파멸과 붕괴만을 가져오는 시간이라는 인자가 언젠가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믿음 등.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 과학적이며 확고히 정립된 사실로 묘사되어 온 것과는 달리, 실제로 진화론은 비이성적이며 셀 수 없이 많은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가설이다. 반면에 성경적 창조론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과 일치하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대한 지적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도 확실한 과학적 증거는 참으로 많다.
진화론은 최근 몇 해 동안 우리 사회에 큰 문젯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과 실로 깊은 관련이 있다. 무신론적 진화론을 추종하는 믿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거부했으며 또한 성경 자체의 메시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여기에 바로 사탄의 속임수라는 아주 심각한 위협이 놓여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진화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구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불필요한 존재임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혀 소망 없는 미래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그러나 성경이 전해주는 소식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다. 바로 이 복음 안에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 그리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확실한 영생의 약속들이 들어 있다(요3:6).
이제 진화론의 붕괴는 엄연한 사실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크리스천들의 연구 조사를 통해 과학적인 것으로 입증된 성경적 사실들은 마침내 생명체의 진화라는 마귀의 피상적 속임수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사실에 입각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타당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올바른 변명 거리가 되지 못한다. 성경적 창조와 대격변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너무나 풍부하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거부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해서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로 많은 이들이 “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여러 가지 지적 난제들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항하려 하는 그들의 도덕적 반항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을 맺기 전에 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그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경쟁을 해가면서 그 재단사가 임금님의 옷을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격찬만 했다. 그러나 한 순진한 어린아이는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어요.”라고 단순하게 사실을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이 바로 진화론과 비슷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격찬을 늘어놓지만 실제로 진화론은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은 채 우리 눈앞에 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사람들이 진화론의 붕괴를 알리지 않으면 짐승들이 이를 알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도 네게 밝히 알려주리라.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7-10)
이 글을 끝내면서, 파스칼의 ‘유명한 내기’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던 파스칼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든지 혹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만일 당신이 이 내기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쪽에 당신의 삶 전체를 건다면, 그리고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혹시라도 당신이 틀린다 해도 당신은 결코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한편 당신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일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더욱이 당신이 옳지 않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즉, 이 경우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손해인 경우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지금도 당신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잃고자 하는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기 바란다.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실수투성이 개념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안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독자께서 시간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는 여러분의 창조주/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맞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13:8).
2009-07-17 14:19: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