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당시 불순종하던 자들이 감옥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다고
되어있는데 잘 이해가 안되서요.
이구절을 카토릭에서 로사리오기도나 다른 행위를 열심히 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근거로 설명하던데요.
이 구절은 사도신경과 함께 설명하면 좋을 것입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영어와 원어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없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분께서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 원조(元祖)들이 죄를 지은 후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는 천당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을 받들어 착하게 산 구약의 성조(聖祖 - 예컨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들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천당 문을 열 때까지 어떤 곳에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을 고성소(古聖所)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그의 육신은 땅에 묻히시고 그의 영혼은 고성소에 가시어 그때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구약의 성인들을 위로하셨다.-
원래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카톨릭주의에서 주장하는 연옥 - 카톨릭 교리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다. 영혼들은 연옥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한다. 연옥이 정죄계(淨罪界, 깨끗함과 죄 사이의 경계)나 정화소(淨化所, 깨끗해지는 장소)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화의 방법으로는 ‘정화하는 불(purgatorius ignis)’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날에 내려질 불’에 근거하고 있다(두산백과사전)- 과 림보 -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지옥의 변방: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으며 그리스도교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착한 사람 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백치 등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네이버 영어 사전) - 등의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중심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 [예수님의 혼을]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 - 엄밀하게는 그분의 혼 - 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불교 용어인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 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9(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천주교회에서 굳이 밝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개신교회에서는 이것을 막으려고 할까요? 천주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례가 있고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과 벧전3:18-20을 묶고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18…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19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20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이 구절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과연 사람이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를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성경은 명백하게 사람이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벧전3:19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감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영들은 분명히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세 부류의 존재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천사들입니다. 벧후2:4와 유6은 이 천사들이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버리고 죄를 지어 지옥에서 영존하는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는 노아 당시에 죄를 지어 대홍수로 멸망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입니다(창6:4). 물론 이들도 대홍수에 휩쓸려 다 멸절되었습니다. 이 세 부류가 벧전3:19에 있는 ‘감옥에 있는 영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은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영이라 불린 적이 없으므로 여기의 영들은 천사들과 그들이 낳은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해서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선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복음을 선포하다는 의미의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선언하셨다는 의미의 ‘케륏소’입니다. 그러므로 벧전3:19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힘입어 그들에게 가셔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정죄’를 선언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에 심판 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는 결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을 가지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또 다시 선포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비성경적인 믿음입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도신경의 이 부분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보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2010-04-27 09:30:06 | 이정순
노아의 방주엔 현재 살아 남아있는 종류의 동물만 들어 간 걸까요?
아니면 성장하기 전의 작은 공룡까지 태웠다고 보는게 맞을까요?
제 생각엔 화석으로 남아 있는 동물들은 하나님의 의도로 탑승이 거부되어
멸종 됐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노아 홍수 후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공룡들이 죽어갔다라고 하는 분도 있는데
홍수 뒤 죽을 존재들을 일부러 태우셨을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 분들이 계시면 알려주세요.
가벼운 질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제가 나중에 창세기에 관한 만화를 그릴 생각이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하고 싶어서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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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8 01:59:33 | 한용희
하나님의 아들께서 묻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 사례를 제시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 ’ (마6:9)
또한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치시기 직전 기도하신 때에도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고백하셨고 그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17:6),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
뿐만 아니라 계시록에서 3장 12절을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그에게 새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는 …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고 생명을 얻으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행4:12, 롬10:9, 13, 요20:31, 요일5:11-12, 요14:13-14 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자세하게 계시되었으므로(마1: 21-13 등),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성경은 오직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을 위해 삶을 영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롬14:6, 8, 고전6:13, 빌4:7-8 등).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분명히 가장 존중(존귀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아버지의 이름을 그 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내셨다 고백하셨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달라고 간구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고 그 이름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존귀한 이름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은 더욱 존귀한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드디어 아버지께서 그 분의 생명, 진리, 영광을 온전히 보여주셨기 때문에(요1: 1-18, 14:6-7), 그리고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 하나이시므로(요일5:7)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요. 또한 성령님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몰라도 그 아들의 이름을 통해 충분히 구원받고 생명을 얻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고 살 수 있는데 굳이 아버지의 이름을 알 필요가 무어냐며 반박하기도 있다. 혹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작은(귀여운) 이름 정도로 생각하여, 여호와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생각하거나 여호와를 아들의 이름보다 높은 이름으로 엄숙하게 부르면서 두려움을 가지고 대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영원한 죄사함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또는 천국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된 성경 말씀은 없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들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높여야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한편 성령님의 이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성령님의 정확한 이름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다만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 분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실 위로자(요14:26)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은혜와 진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증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에게 권능을 주시며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 가시는 분으로 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령님에 대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사역과 뜻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칭(대명사)으로 봄이 타당한 듯싶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가 마땅히 거룩히 여겨야 할 아버지의 이름을 그리고,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분명히 고백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그리고 천상에서 이기는 자 위에 새겨질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름을 몰라도 되는 것인가요? 아버지의 이름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이름이 없으신 분인가요? 하나님은 세 인격으로서 한 분이신데, 과연 이름 없으신 인격이 있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성령님의 이름에 관심이 있으신 형제, 자매님은 저를 포함한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잘 알고 더욱 존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그 이름(들)을 위해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유익이 될 좋은 길라잡이가 되는 답변들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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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7 12:20:07 | 신대준
제 아내가 성경 공부중 누가 복음 족보에 가이난(게난) 2번 나오는데 아르박삿의 아들 셀라는 성경의 오기 라고해서 성경이 잘못될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창조과학 홈에서 찾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건지 알고 싶습니다.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Cainan or Shelah?)
Answers Magazine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 – 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 – 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출처 : AiG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번역자 : IT 사역위원회[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1:1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6:39:08 | 허광무
출애굽기 25장부터 보면 성막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제가 성막을 공부할 때는 증언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 있다고 공부하고 배웠는데
정동수 목사님께서 하신 성막 강의안을 보니까
증언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다고 있네요.
전 증언 궤 속에 내용물을 이렇게 배웠거든요
"한국의 성막론은 약간의 잘못된 점이 있다.
언약궤 그니까 법궤 속에는 몇가지가 들어있는가? 3가지? 그렇다면 틀린것이다.
법궤 속에는 한가지만 들어있었다. 그것은 십계명 두 돌판이다.
출 27:21을 보라. 보면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넣으라고 되어있지 않느냐?(당시엔 개역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만나 항아리는 출 16:33을 보면 여호와 앞에라고 되어있다.
이 당시 법궤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여호와 앞이면 법궤 앞이다.
즉 만나 항아리는 법궤 속 증거판 앞이 아닌 법궤 앞이 되는 것이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마찬가지로 법궤 앞에 있다.
민 17:10을 보면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법궤 앞에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바침 해주는 증거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법궤를 성전에 안치할 때의 일을 보면 된다 (왕상 8:9)"
제가 공부할 때 이렇게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흠정역 성경으로 공부했던 구절을 보면 민 17:10은 증언 궤로 되어있는데 나머지는 증언 앞이라고 되어있어서요.
전 너무 햇갈리네요..
확실한 답변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17: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01 22:05:15 | 최형순
시편 51:4절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사였사오니 물론 모든 죄는 주 앞에서 이루어진 것을 압니다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이해가 안가요. 밧세바,우리야와 우리야의 집, 요압에게도 죄를 지은 것의 빌미를 제공했으면서말이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11 16:02:28 | 이정순
여자의 머리를 덮으라고 되어져 있는데 왜 교회는 여자들이 덮지 않나요?
긴머리가 있으면 덮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요?
항상 궁금했어요. 카톨릭에서 미사포라고 쓰는 것이 여기에 근거하는지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8 08:31:18 | 이정순
아내있는자들은 없는 자같이 되고 우는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되며,기뻐하는 자들은 기뻐하지 않는 자 같이 되고 사는 자들은 소유하지 않는 자 같이 되며 이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남용하지 않는 자처럼 되라.
바울이 결혼을 해도 좋으나 나와같이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에 이어지는 이말씀은 주를 기쁘게 하는데 마음을 쓰라는 뜻인데.이부분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세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세상의 결혼풍습을 이르는 것인지요? 아내가 있는데 없는 자 같이 되고? 표현하지 말라는 뜻인지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6 09:43:29 | 이정순
롬10:6,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그리스도를 위에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 가겠느냐= 그리스도를 다시 죽은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너무 어려워요.쉽게 이야기를 풀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5:1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6 15:52:37 | 이정순
룻기 3:16절에 시어머니가 룻에게 내 딸아, 너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이해가 잘 안돼서요. 설명 좀 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2: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8:34:10 | 이정순
(질문)창세기 49장 6절 말씀의 끝부분에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벽을 파내려갔다는 말씀의 뜻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개역에서는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비교 설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8:3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7 15:10:36 | 양경수
엘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취하여 있으려느냐? 네게서 포도주를 치우라, 하매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영이 슬픈 여자이니이다.
내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다만 {주} 앞에 내 혼을 쏟아 놓았을 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벨리알의 딸로 여기지 마소서.
내가 지금까지 많은 원망과 슬픔 속에서 말하였나이다, 하매
...............................................................................................................................................
한나는 영과 혼을 구별해서 말합니다.
영은 하나님을 향한 지각기관..즉, 안테나의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영이 슬프다고 하면 ,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슬픈 것이고,
혼을 쏟는다하면 영의 슬픔의 결과물인 자신의 마음 속의 한탄과 눈물을 쏟아낸다는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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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5 08:27:49 | 백화자
누가복음 2 장 34 절..
...........이 아이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제 해석으로는 성전을 무너뜨렸다가 사흘만에 다시 짓는다는 말씀과 같은 것인지..
쉬운 문장인데도 감이 안 잡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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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08:37:37 | 백화자
처녀와 영원한 동정녀
어제 KBS에서 방영한 다큐 프로그램 <인도전통 결혼식과 오남축제>를 시청했습니다. 방송 중 인도의 여신들을 그린 벽화가 화면에 잠시 나타났는데,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 눈에 띄네요. 그 장면을 보다가 아내가 "저건 분명히 힌두교의 여신인데 왜 카톨릭의 마리아와 비슷한 모습일까?"라고 묻습니다. 히슬롭이 지은 <두 개의 바빌론>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전세계에 퍼져있는 여신숭배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부부간 대화가 이사야 7:14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설교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 중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씀 중 하나가 이사야 7:14 말씀이지요. 그런데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것을 부인합니다. 또한 로마카톨릭 역본들은 이 말씀을 변개하여 "한 처녀(a virgin)"를 그들의 용어인 "성모, 영원한 동정녀"(The virgin)로 바꾸어 놓고, 이를 마리아 숭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흠정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공동번역: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젊은 여인"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가톨릭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이사야에게 분명히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셨는데,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것을 믿지 않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나 원어성경주의자들은 히브리어 "알마"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처녀" 대신 "젊은 여인"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젊은 여인을 영어로는 레이디(lady)라고도 부릅니다. 구글 검색창에 our lady 라는 단어를 입력해서 찾아보시면, 이것이 로마카톨릭에서 그들이 섬기는 "하늘의 여왕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글에서는 관사라는 것이 없어서 그냥 "처녀"라고 번역되었지만, virgin에 부정관사 a 를 붙이느냐 정관사 the 를 붙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최근에 나오는 영어 역본들이 1611년 킹제임스 성경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KJV: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사 7:14)
NKJ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Behold,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NI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NRS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Look, the young woman is with child and shall bear a son, and shall name him Immanuel.
현대 영어역본들은 KJV의 "a virgin"을 "The virgin"이나 "the young woman"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정관사 the 의 용법은 참 다양합니다. ① 앞서 나온 명사를 되풀이할 때 ②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물을 가리킬 때 ③ 뒤에 수식어가 올 때 ④ 종류 전체를 대표할 때 ⑤ 유일한 것, 천체, 방향, 계절 등 ⑥ 최상급 ⑦ 서수 앞에서 ⑧ 계량 단위를 나타낼 때 등. 그런데 이사야 7:14 말씀의 앞부분에는 한 번도 처녀나 여인을 의미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정관사 the 를 붙인 것은 여기서의 the 가 앞서 나온 어떤 명사를 한정하여 가리키는 "그, 그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a virgin은 한 처녀를 의미하지만, the virgin은 영원토록 처녀로 있는 존재, 영원한 동정녀를 의미합니다. 즉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동정녀 아스타르테, 세미라미스, 베스타, 다이아나, 키벨레 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로마카톨릭 역본들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으로 섬기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런 KJV의 "처녀"(a virgin)를 "영원한 동정녀"(The virgin)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고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나니(눅 1:47)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처녀(a virgin)였지, "성모"(the virgin)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녀는 맏아들인 예수님 이외에도 여러 형제 자매를 낳았기 때문에 영원한 동정녀가 아닙니다(막 6: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니라(막 6:3).
로마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격화시키고자 the virgin 이라고 하지만, 유일한 것을 나타내는 정관사 the 는 그런 유한한 인간에게는 쓸 수 없고, 요한복음 14:6 말씀과 같이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the way)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the life)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2009-12-23 19:24:40 | 관리자
질문
성경강해(요한계시록, 창세기) 동영상으로 잘 경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세기 강해 26과를 공부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것 하고는 좀 상이해서 그런데요....
(창9:28-29)을 설명하면서 노아 사망후 2년 뒤에 아브라함이 출생했다고 하는데 제가 계산한바로는 40년간을 같이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노아할아버지께 영향을 많은 영향을 받아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노아의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그 후손들의 출생년도를 계산해 보겠습니다.
1. 노아의 홍수는 노아 600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창 7:6,11).
(창 7:6, 킹흠정)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2. 아르박삿은 홍수 후 2년에 태어났습니다(창 11:10).
(창 11:10, 킹흠정) 셈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에 곧 홍수 뒤 이 년이 지났을 때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러니까 노아 나이 602년일 때 태어난 것입니다.
그 후의 자손들의 출생년도를 노아 나이 OO세로 환산해 보겠습니다.일일이 적어서 덧셈식 쓰기 귀찮아서 엑셀파일로 시뮬레이션한 자료를 첨부합니다.
노아나이 기준
첫자녀출산
출생년도
아르박삿
602
35
살라
637
30
에벨
667
34
벨렉
701
30
르우
731
32
스룩
763
30
나훌
793
29
데라
822
70
데라 장남
892
데라사망
1027
=아브라함 나이
75
아브라함 출생
952
노아 사망
950
3.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그가 장남을 낳은 것이 노아 나이 892세입니다.
여기서부터 주의하셔야 됩니다. 데라는 칠십세 이후부터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는데 도대체 누구를 가장 먼저 낳았을까요?
(창 11:26, 킹흠정)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우리는 은연 중 아브라함이 장남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데라의 나이 70세에 태어난 사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성경을 "장자권 계승의 역사"로 보는 소설가 김성일씨의 [성경과의 만남] 등의 책이 영향을 미친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성경은 장남의 역사가 아니라, 두번째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아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다시 원래 족보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데라의 가족은 갈대아우르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습니다(창 11:32).
(창 11:32, 킹흠정) 데라의 생애는 이백오 년이었으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
데라의 출생년도는 노아 나이 822세인데 그가 205세까지 살았으므로, 데라가 죽은 해는 노아 나이 1027년(물론 이 시기라면 노아는 이미 죽었지만 노아력으로 계산하고 있음)이 됩니다. 데라가 죽고 나자 하란에 머물러 있던 아브라함이 가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행 7:4).
(행 7:4, 킹흠정) 이에 그가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서 나와 하란에 거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그분께서 그를 거기에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창 12:4, 킹흠정)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자, 그럼 계산을 해 볼까요? 데라가 사망한 해 = 노아 나이 1027세(이미 죽었지만 노아력으로 하자면) =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아브라함이 태어난 해는 1027 - 75 = 노아 952세 되는 해
즉, 노아 나이 952세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가 95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창 9:29, 킹흠정) 노아의 전 생애가 구백오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
그러니까 노아가 죽은 지 2년 뒤에 아브라함이 출생한 것이 맞습니다.더불어 데라가 첫 아들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892세이고, 아브라함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952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장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안에>출판사에서 발간한 [성경바로보기] 책 422쪽에 성경 연대기 표가 나옵니다.계산하기 귀찮은 분들은 그 도표를 참고로 하셔도 됩니다.
2009-12-23 19:10:54 | 관리자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자는 누구인가? (욥 6:14)
(욥 6:14, 개역)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욥 6:14, 킹흠정) 고난 받는 자를 그의 친구가 불쌍히 여길 것이로되 그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도다.
(욥 6:14, KJV) To him that is afflicted pity should be shewed from his friend; but he forsaketh the fear of the Almighty.
욥기 6:14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에 의하면,욥은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사람이었는데, 욥은 그런 자기의 모습(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모습)을 그의 벗이 불쌍히 여겨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좀 이상하네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을 해야지 왜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그의 친구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결 구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개역: (욥 = 피곤한 자 =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 vs (그의 벗)킹제임스흠정역: (욥 = 고난 받는 자) vs (그의 친구 =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 자)
욥기 6장은 데만사람 엘리바스의 말(욥기 4, 5장)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욥 4:1, 킹흠정) 그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응답하여 이르되,(욥 6:1, 킹흠정) 그러나 욥이 응답하여 이르되,
따라서 욥기 6:14은 욥이 그의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인데, 이 구절에서 "고난 받는 자"(개역에는 피곤한 자)는 욥이고, 그의 친구는 엘리바스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는 누구일까요?
개역성경은 고난 받는 욥이 곧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역의 주장과는 달리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욥 1:1).
(욥 1:1, 킹흠정)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하나님께서도 욥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하셨고(욥 1:8, 2:3), 사탄도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 1:9).
(욥 1:8,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
(욥 2:3,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매
(욥 1:9, 킹흠정)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가 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욥의 고난을 보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그의 친구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 19:14, 킹흠정)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고 눈먼 자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니라.
(레 25:17, 킹흠정) 그런즉 너희는 서로를 학대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 25:36, 킹흠정) 너는 그에게서 이자나 이득을 취하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네 형제가 너와 함께 살도록 하라.
(레 25:43, 킹흠정) 너는 그를 엄하게 다스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할지니라.
(신 8:6, 킹흠정) 그러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길로 걷고 그분을 두려워할지니라.
(잠 14:31, 킹흠정)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되 그분을 존경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위 말씀들에서 보는 것처럼,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 이웃을 학대하는 자, 형제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자, 종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엄하게 다루는 자, 주의 명령들에 불순종하는 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서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며 그를 노리고 구덩이를 팠습니다(욥 6:25, 27).
(욥 6:25, 킹흠정) 바른 말들은 참으로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 그런데 너희의 주장은 무엇을 책망하느냐?(욥 6:27, 킹흠정) 참으로 너희는 아버지 없는 자를 기죽게 만들며 너희 친구를 노리고 구덩이를 파는도다.
그래서 욥은 그들을 가리켜 "형편없는 위로자", "쓸모없는 의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욥 16:2, 킹흠정) 그런 것들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형편없는 위로자로다.(욥 13:4, 킹흠정) 그러나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사들이니라.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를 정죄한 그의 친구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욥기 6:14을 개역의 번역대로 읽다 보면,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욥이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정죄하며,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됩니다. 하지만, 욥기 6:14은 욥이 자기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로서,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보면 너희가 친구로서 마땅히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할텐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너희의 행동은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다"라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개역과 같이 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몰아부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욥기 6:14에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욥이 아니라, 고난받는 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욥의 친구들을 말합니다.
2009-12-23 17:07:15 | 관리자
마27:44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
눅23: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강도 두 명도 함께 못박힌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도 강도 하나는 구원받고 나머지 하나는 못받은것으로 알고있는데
마태복음 구절에는 '강도들'이 같은 말로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와있어서
언뜻 내용이 모순되게 보이는것 같아서요..;;
물론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만.. 제 머리로는 잘 이해가 안되서;;
이곳에서 항상 많은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58: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21 19:20:51 | 정지현
성경강해(요한계시록, 창세기) 동영상으로 잘 경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세기 강해 26과를 공부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것 하고는 좀 상이해서 그런데요....
(창9:28-29)을 설명하면서 노아 사망후 2년 뒤에 아브라함이 출생했다고 하는데
제가 계산한바로는 40년간을 같이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노아할아버지께 영향을 많은 영향을 받아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3:0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7 16:26:17 | 황준호
[흠정역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을 통해 율법을 헛되게 만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KJB]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상기의 구절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또 듣는 구절입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이해가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1. 지금 교회시대에서의 율법의 의미는 어떻습니까?.....은혜의 시대이니까 율법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지...
2.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고 돌아가셨다는 뜻인지...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56:1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02 12:54:21 | 박준화
[마11:12]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개역]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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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해석 또는 설교를 들어보면, 천국은 영적전쟁을 해서 침노하여 빼앗아서 들어간다고 합니다.[제임스 데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또 킹흠정역에서는 폭력배라는 단어가 있는데...폭력배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의미하는지요?
상기의 구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부탁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23:5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1-07 17:37:26 | 박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