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405개
갈라디아서 5장의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즉 구원 받아 성령님이 들어온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로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지도 않았는데 이 믿음을 소유하면 문제가 생기지요. 성경에는 faith가 몇 종류가 나옵니다. 엡2의 faith와 갈5의 faith는 다르지요. 갈2:20의 faith가 바로 갈5의 faith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의 faith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faith입니다. 우리 사이트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우측 상단에 친 뒤 아래 분류에서 경건의 양식으로 가면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 시리즈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믿음 편을 가서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정론에 파묻혀서 구원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로봇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믿음을 충성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그러니 성도들이 목사에게/교회에 충성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샬롬
2011-03-02 13:43:00 | 관리자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계시해주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의 초청에 대하여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나에게 전해 주신 복음의 말씀을 통한 구원으로의 초청, 다른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신다는 그 약속이 은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8장 27절에 나오는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판단을 무시하고, 내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리모콘으로 원격 조종하여 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강제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나 선행을 요구하지 않고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 "은혜의 선물"이지, 개인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엡2:8,9). 만약 믿음 자체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전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시면 내가 믿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으시면 내가 아무리 주님을 믿으려고 해도 헛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전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은혜를 베풀어 믿음을 선물로 주기로 한 사람은 어쨌든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강제로 믿음을 심어서 구원을 받게 하실 테고, 하나님이 그에게 선물을 안 주었다면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헛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2011-03-02 13:05:36 | 김문수
만약 갈5:22,23의 믿음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믿음"이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엡2:8,9). 그런데 그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므로(님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갈5:22,23). 그래서 믿음을 얻기 위해서 우선 성령부터 받으려고 했더니 먼저 믿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엡1:13).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는데, A. 믿으려고 하니까 먼저 성령이 필요하다고 하고, (성경이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에서) B. 성령을 받으려고 하니까 성경에는 믿어야 성령을 준다고 하고... 결국 A와 B 사이에서 무한히 순환만 할 뿐, 이렇게 되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빠지니까 칼빈주의에서 고안해낸 방법이 "먼저 중생해야 믿을 수 있다"라는 선중생 교리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완전히 죽어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어떠한 영적 행위나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성령이 중생시키실 때에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라는 것이 칼빈주의 논리입니다. 이 논리대로 하면, 현재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거듭나게 했다는 것이 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선중생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구원받은 것이 됩니다. 즉 "사람은 믿음 없이 구원받는다"라는 엄청난 이단 교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믿고 나서 성령을 받는지, 성령을 받은 후 믿게 되는지는 아래 성경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갈3:2)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엡1:13).
2011-03-02 12:49:01 | 김문수
사람이 의지적으로 believe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Faith를 주신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문수 형제님께서 쓰신 글도 동의하고 구원받음에 대한 사람의 책임이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설은 비성경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믿음의 창시자와 완성자는 예수님(히브리서 12:2)이시다고 하시고 사도행전 18장 27절에선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나오더군요. (행 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려는 마음을 먹으므로 형제들이 편지를 써서 제자들에게 권면하여 그를 받아들이게 하니라. 그가 거기에 이르러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And when he was disposed to pass into Achaia, the brethren wrote, exhorting the disciples to receive him: who, when he was come, helped them much which had believed through grace: 또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고 선물이기도 하더군요. 고전12:4~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2011-03-02 12:41:48 | 김선희
예수님도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믿지 않음'에 많은 탄식을 하셨습니다. (막 16:14, 요 5:38)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나 입학하기 어려운 어느 일류 대학총장이 대학설명회에서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사람은 지금 손들면 내가 보내주겠다 라고 한다면 대부분 믿지 못하기에 손들지 않을 것입니다. 한 명이 손들었다면, 그 사람은 그 대학총장의 은혜로 대학에 그냥 합격할 수 있겠지요 대학 총장이 그 사람을 믿게 만들어서 했다기 보단,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히 그 학생이 그 대학총장의 말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 김문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2011-03-02 09:26:05 | 곽연우
그런 논리는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문제가 있는 주장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님의 주장에 의하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선물로 주어야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아서이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은 믿지 않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이 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나중에 심판을 하실 때 "그분께서 은혜를 안 줘서 믿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너는 왜 믿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며 심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볼 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까? 마태복음 3장과 7장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인지,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같은 것인지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1-03-02 04:01:32 | 김문수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싶은 그런 삶을 어른들이 특히 부모가 살아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가정예배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어른의 행동을 보고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할 일은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 보다는, 교회에서 배운 말씀대로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입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 매우 훌륭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
2011-03-02 00:08:07 | 김재근
안녕하세요. 그동안 이곳의 많은 글들을 읽고 신앙에 많은 유익을 얻었는데 이것에 대해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 글은 쓰게 된 것은 김문수형제님이 오래 전에 쓰신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엡2:8, 김문수)라는  글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글에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원을 받는 믿음 또한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엡 2:8,9를 보면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갈 5:22,23을 보면 믿음이 성령의 열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이 생겼고, 이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구원에 필요한 믿음과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필요한 믿음이 서로 다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뒤에야, 비로소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생긴다. 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내던져지느니라." (마태복음 3:8~10)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회개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말은 회개 없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오직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는 자라야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일뿐입니다. 순종에 필요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후 성령의 열매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믿음과 순종에 필요한 믿음이 서로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4:2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01 23:06:00 | 김양규
요즘 아이들을 보며 큰 걱정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도 같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가정예배를 통해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주려는데 지혜가 부족하여 쉽지가 않습니다.   혹시 가정에서 어떤 형식이나 방법으로 가정예배를 드리시는지 본문선택이나 시간 등등...   조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4:2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01 11:43:44 | 박종철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또 다른 칠 년을 여전히 그와 함께하며 섬기니라(창29:30) And he went in also unto Rachel, and he loved also Rachel more than Leah, and served with him yet seven other years. 위 구절은 more than 이 들어가는 최초의 성경 구절이며, 상황 역시 love A more than B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more than 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문법을 따라 읽으면, 야곱이 "라헬과 레아 둘 중에서" (레아에 비하여)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문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레아가 라헬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야곱이 라헬을 더 많이 사랑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 구절도 똑같은 형식의 love A more than B 형식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도 할 수 없었더라(창37:4) And when his brethren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ably unto him.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요셉(A)과 요셉의 형제들(B)이 있는데, 야곱이 그 둘 중에서 요셉(A)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고, 그 형제들도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에 대한 그 형제들의 사랑"에 비하여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정도"가 더 컸다는 뜻입니까?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Neither have I gone back from the commandment of his lips; I have esteemed the words of his mouth more than my necessary food. "주의 말씀과 음식" 이 두 가지 중에서 욥이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음식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에 비해서(?), 욥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정도가 더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69편 31절에서 ox or bullock와 비교가 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30절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문맥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람이 수소나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베드로의 사랑이 특별히 더 지극하기를 바라는 질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이 나(예수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예, 제가 딴 사람들보다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을 듣고 좋아하실 예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의 사랑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해) 좀 미지근하고, 못 미치는 것을 주님이 바라신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마26:33)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 때문에 다 실족해도, 나는 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배신하고 베드로만 주님을 끝까지 따르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사랑이 다른 제자들의 사랑보다 더 뛰어나니) 예수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이렇게 호언장담하다가 진짜 실족한 사람이 누군데 주님께서 또 다시 베드로에게 그런 어리석은 비교와 자신감을 요구하실까요? 베드로: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1,22)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을 비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의 사랑과 헌신이 요한의 사랑과 헌신보다는 더 뛰어나야 내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문맥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베드로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을 비교하려고 하는 맥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숯불 이야기를 가지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감동적인 묵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Q.T.의 묘미지요. 날이 추우므로 종들과 관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거기 서서 몸을 녹이니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더라(요18:18).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요21:9).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가 주님을 부인할 때의 그 숯불을 생각나게 하려고 예수님이 숯불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이런 식의 감동적인 Q.T.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그 때는 종들이 추워서 숯불 피운 거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구우려고 숯불을 피우신 겁니다. 전기오븐이나 가스렌지가 없는데 당연히 숯불 피워야지요. 숯불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 무슨 신비한 심리학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열심히 생각해봤자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분의 진리를 찾기 쉽게 기록해 놓으셨지, 보물 찾기 하라고 꽁꽁 숨겨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준오님이나 혹은 다른 어떤 분들이 어떤 해석을 취하건 저는 별로 상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제 해석을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경의 단어와 용법은 성경의 정의와 용례를 따른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저는 문자적(문법적), 역사적(historical), 문맥적(contextual) 해석을 따릅니다. 이준오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많은 설교가들이나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축하를 드립니다다. 그러나 스펄전이 뭐라고 했건, 매튜가 뭐라고 썼건 그게 제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주석이나 해설들은 성경 말씀과 같은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가 없기에, 저는 그것을 교회 역사 상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할 뿐 그들의 글이나 해석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지 않습니다.
2011-03-01 04:19:26 | 김문수
형제님! 킹제임스 성경의 문법은 오늘날 현대의 문법과 약간 다릅니다. 킹제임스성경은 그것이 번역된 그리스 원문의 문법체계를 최대한 따라 번역되었습니다. 그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영어 답문에 fish가 나와있는데 킹제임스 성경의 fish는 단수 혹은 대표의 성격을 갖습니다. 복수는 항상 fishes를 써왔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여러종류가 아니더라도 복수면 항상 fishes로 옵니다. 오늘날의 문법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할 때에도 five loaves and two fishes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 본문의 문법을 최대한 따랐기 때문에 than 다음에 비교의 대상만 나오고 동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콘코던스로 than을 찾아보아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편 69:31을 보면 Psa 69:31 This also shall please the LORD better than an ox or bullock that hath horns and hoofs. 현대의 문법에 따라,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 라고 해석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가 주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주를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흠정역은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두번째 의미로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요 21:15의 more than these의 해석의 논란은 형제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적어도 200년 이상되어 온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부분을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 왔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love me?" 즉,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들을 적어보자면, St Augustine부터 시작해서 제가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Spurgeon, Warren Wiersbe, Albert Barnes, Adam Clarke, John Darby, John Gill, Matthew Poole, John Wesley, Arthur Pink. 동일하게 말하는 주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Combined Bible commentary, The Greate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Daily Study Bible, People's New Testament, Jamiesson & Fausset & Brown Commentary, Robertson's Word Pictures, Treasury Scriptural Knowledge, Vincent's Word Studies. 여기서 DSB(Daily Study Bible)는 두가지 견해 즉, 물고기와 그물과 배 즉 어부의 삶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견해 모두 제시합니다. 반면 Guzik은 "fish and a fishermans's life"이라고 제시했고 Fourfold gospel(1914, J.W. McGarvey, Philip Pendleton) 역시 "fishes and this fishing business"이라고 해석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세가지 의견을 모두 언급했습니다: 물고기와 배와 그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문맥상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눅 22:31을 생각나게 합니다. 눅 22:31~32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하시니 주님은 또한 추위에 떨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주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세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베드로 개인과 연관이 있는 질문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물고기와 어부의 삶을 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베드로 뿐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배에 올라탔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기 때문에 "이들"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되면 오직 한 견해만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영어 성경처럼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지를 둘 수 있게 "이들"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011-03-01 02:01:11 | 이준오
킹제임스 성경 세미나 사랑침례교회에서는 박참하 목사님과 박선규 형제님을 모시고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킹제임스 성경 세미나를 엽니다. 일시: 2011년 3월 13일(일), 오후 2시부터(50분씩 2시간) 내용: 킹제임스 성경을 믿게 된 경위와 최종 권위로 믿는 이유 강사: 박참하 목사님(2시부터)         박선규 형제님(3시부터)   박참하 목사님은 인천 간석동의 말씀침례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장로교 목사님으로 지내다가 성경의 진리를 알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바른 믿음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박선규 형제님은 약 20년전부터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 및 교정에 참여하신 분입니다. 현재 인천 한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두 분이 오셔서 킹제임스 성경을 알게 된 경위, 최종 권위로 믿는 이유 등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기도와 수고로 인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흠정역 성경이 나오고 보급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제들을 위해,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1-02-28 11:18:33 | 관리자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뜻이라면, 비교의 대상은 예수님과 이것들 (둘 다 love의 목적어)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랑하는 정도" 對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도"가 됩니다. 이 경우 than 뒤에 나오는 these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되어야 하며, 문법적으로 ...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do(love) 가 되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these 다음에 동사나 대동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these는 주격이 아니라 목적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사도 요한과 비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2) 15절 이후에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나(주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제자들 중에서 누가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라는 문제로 경쟁을 붙이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1-02-28 06:02:01 | 김문수
듣고 보니 또 그렇군요ㅎ 분명한건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믿습니다. 대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뜻대로 살지않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때 책망과 부끄러움과 보상의 손실을 당할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믿음에도 다 같은 믿음이 아닌 "헛되이 믿는 믿음"이 있음을 알수있는데- (고전 15: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고전 15:2) 『By which also ye are saved, if ye keep in memory what I preached unto you, unless ye have believed in vain.』 보시다시피- 이구절에서 키포인트 핵심 단어는 "헛되이" 입니다. 이 "in vain"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말이 안되므로 엄청나게 중요한 단어임을 볼수있습니다. 즉, 믿음에도 헛되이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헛되이 믿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왜냐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1-02-28 01:12:54 | 최홍진
저는 다른 의견입니다. these는 남성 복수명사라면 두 가지 모두 가능합니다. 첫번째 물고기들과 배와 그물들 즉 예전의 어부의 삶을 의미할 수 있고 두번째는 그들 즉 베드로와 함께 했던 사람들 둘다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물고기들을 의미하는가? 과연 주님이 베드로가 물고기보다 즉 예전 어부의 삶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에 these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일까요? 이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이미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베드로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저는 이 질문이 답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실언에 대한 것입니다. 마 26:33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적절한 번역은 "이들"로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것들은 사물만 의미하나 이들은 둘다 가능합니다.
2011-02-27 21:52:55 | 이준오
본문에서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제가 아는 지식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지옥은 “불 호수”(Lake of Fire)입니다!(계 20:10-15)' 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지옥은 임시처소이고 불호수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0 : 14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그리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오늘 날로 적용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입니다(마7:21-23)! 그는 교회는 다녔지만 “바른 진리”를 무시하고 불법적인 믿음 생활을 고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가 오늘 우리에게 지옥에서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마귀는 많은 사람에게 교회를 다니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선교도 하게하지만 구원만은 받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음을 엄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부분인데요, 누가복음의 16장의 부자를,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오늘 날로 적용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입니다.'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근거가 성경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요? 본문 내용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행위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지, (누군가가 의롭게 되어 구원받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 아닌가요?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이 있다'(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면 성경 교리와 다른 것 아닌가요? 또한, '부자'가 지옥에서 편지를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됩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이 편지를 보낸다니 어디서 그런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성경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02-27 03:55:15 | 장우석
감사합니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해도 듣지 않고, 귓등으로 듣는 사람들도 많으며 교회 다니는 이들조차 심각함이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경고를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 전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2011-02-25 10:24:49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