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님 평안하신지요?^^
궁금하신 것을 물어보시는 데 염치 불고하실 것은 전혀 없습니다. ㅎ
그런데 이야기해 주신대로 해당 내용은 자료를 찾아보는 것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네요.
저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조금 기다리시면서 다른 분들의 답을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2-10 19:33:16 | 김대용
날마다 하나님아버지의 은혜가 사랑침례교회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문안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조직신학 39번째 강의 '창조'에서 다윈을 왜 '현대 동성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인가요?
제가 아무리 인터넷과 자료를 찾아봐도 알길이 없어서 염치불구하고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2015-02-10 18:57:10 | 김건
좋은 소식이네요..
베다니침례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2015-02-10 12:17:06 | 유해용
라영석 목사님! 평안하신지요?
지난번 사랑침례교회를 방문해 귀한 말씀을 전해주시고
또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다니 침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통해 동탄 지역과 그 인근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널리 전해지길 소망합니다.
2015-02-10 10:31:47 | 김대용
안녕하세요?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새 예배 처소에서 귀한 교회가 크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5-02-10 10:25:57 | 관리자
나영석 목사님, 반갑습니다.
교회가 새로운 공간에서 시작하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많은 분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리라 믿습니다.
바른 말씀을 전하는 귀한 교회로 정착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2015-02-10 10:12:05 | 김재욱
http://cafe.naver.com/realchristians
2015-02-10 08:29:46 | 고영수
베다니 침례교회 예배당 이전 소식
안녕하세요. 킵 바이블 사이트에는 처음으로 인사드리게 되었네요. 저는 베다니
침례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나영석 형제입니다.
저희 교회가 동탄에 예배당을 얻어서 3월 1일부터 새로운 장소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년 5개월 동안 수원의 미용학원에서 좋은 지체들과 모임을 형성하게 되면
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제 지역 교회로서 신약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그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예배당 장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2월의 남은 기간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잘 준비해서 3월 1일부터 새
로운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베다니 침례교회가 신약 교회로서 잘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베다니 침례교회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realchristians
베다니 침례교회 새 주소: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07-7번지 아시아 프라자 4층(동탄 복합문화 센터 근처)
문의: 나영석 010-7549-1691 (kjvbb@hanmail.net )
2015-02-10 00:38:16 | 라영석
박혜영 자매님 안녕하세요.^^김** 형제님께서 너무 잘 설명해 주셨는데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몇 가지를 첨언하도록 하겠습니다.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리고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삼중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세 가지 본질 중의 하나인 혼은 사람의 지성, 감성, 분별력, 양심, 의지,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등의 속성을 담당합니다. 성경의 혼의 용례를 보면 사람의 세 가지 본질 중의 하나인 혼을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 자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레위기 26장 11절 뒤에 15절에 나오는 “너희 혼이”의 혼도 사람의 세 가지 본질 중 하나인 혼을 가리킵니다.15절 전 11절에 나오는 “내 혼이 너희를 몹시 싫어하지 아니하리니”에서 혼은 하나님의 혼을 뜻한다고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의지를 발휘하셔서 하나님의 성막을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시며 그들을 몹시 싫어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겁니다.15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이 의지를 발휘해 하나님의 판단의 법도를 몹시 싫어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이어 16절에 하나님께서 의지를 발휘하셔서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교차하고 있는 26장의 문맥을 살펴보자면 하나님께서 의지를 발휘하시는 것을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내 혼”이란 표현으로 성경에 기록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김** 형제님께서도 답변해 주셨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팔(신33:27), 하나님의 눈(시33:18), 하나님의 귀(왕하19:16), 하나님의 입(사58:14)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팔과 눈과 귀와 입이 있다는 이 표현들은 어찌 된 것일까요? 이것은 실제 하는 하나님의 지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의인화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레위기 26장 11절의 “내 혼”즉 ‘자칫 하나님의 혼“이라 읽힐 수 있는 성경 기록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2015-02-10 00:36:20 | 김대용
주 안에서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평안을 빕니다.
요즘 제가 레위기를 읽고 있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요구하시는지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읽다가 26장 11절에 "내가 내 성막을 너희 가운데 세우며 내 혼이 너희를
몹시 싫어하지 아니하리니" 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내 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글을 올려봅니다.
늘 성실히 답변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며.....
2015-02-09 14:40:27 | 박혜영
형제님 안녕하세요.
다음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47&cate_name=%ED%9E%88%EB%B8%8C%EB%A6%AC%EC%84%9C
샬롬^^
2015-02-07 09:06:48 | 오광일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2015-02-07 08:57:55 | 권장일
익숙한 듯하면서도 좀 특이한 질문 같습니다.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성경에 나올까요?
기도에 관해서는 너무 다양한 각도의 말씀이 존재해서 명쾌한 단답이란 있을 수 없고,
이렇게 저렇게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이 되네요.
결국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는 골방에 있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이 아닐지요...
대용 형제님이 올리신 자료들에 이미 해답이 있다고 보는데, 찬찬히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언제까지'의 문제는 따로 다뤄 보면 좋을 듯합니다.
2015-01-29 14:07:58 | 김재욱
마가복음 11장 킹제임스 흠정역
22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
23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에게 이르기를,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며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하는 그것들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으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너희가 그것들을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것들을 받으리라.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하는 것이 너희에게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시리라.
26 그러나 너희가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이 형제님이 찾고 계신 답인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순간, 이미 응답받은 줄로 알고 감사드리는 것이 가장 믿음있게 사는 길 같습니다.
2015-01-28 13:26:32 | 지미 곽
김기덕 형제님 답글 감사합니다.
형제님께서 “전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쭈어 본 것이 아닌 어느 시기까지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쭈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나름 저도 형제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글을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먼저 제가 몇 번에 걸쳐 답을 해 드렸던 형제님의 질문 글을 다시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답을 올리기 전 여러 가지를 고려해 일단 질문자를 익명으로 하고 글을 올렸는데 스스로 다시 이름을 밝히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왜 제가 형제님의 물음에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요약해서 올렸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이 담긴 기도를 몇십 년이 지난 후에 들어 주실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답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고 하시면서도 언제까지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을 부담을 떨쳐 버리고 자유로움을 누리지 못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양(量)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는가 하는 질(質)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라는 부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셔요.
형제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의 분명한 답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제가 올린 글 안에 다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 형제님이 알고 태도를 바꾸어야 할 귀한 지침까지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약 2년 전부터 형제님의 질문 글을 처음 접한 기억이 납니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른 교리에 대해 계속해서 기본적인 부분을 문의하시면서 어려움을 겪으시니 저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집니다.
제가 올린 글은 결코 형제님께 부끄러움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함이고 그래서 형제님의 성함을 익명으로 하고 물음과 답변 글을 올렸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참고로 고아원을 운영했던 조지 뮐러의 경우 문제의 본질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거의 모든 경우 즉각 응답된다는 것의 상징적인 예로 왜곡시킨 출판업자들의 불찰일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은 영국 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1643년 영국 의회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집된 교회 회의가 5년 동안 회의한 결과 작성된 철저하게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신앙고백서입니다.
칼빈주의(개혁주의)에 대한 저희의 입장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해 주십시요.
1.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2.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3. 런던침례교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766
4.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칼빈주의와 대체신학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397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형제님께서 저의 댓글에 다시 답글을 올리셔도 제 답은 일단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요.
킵바이블에 항상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1-28 08:36:50 | 김대용
김형제님께서 시간을 할애하셔서 제 물음에 답글을 달아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질의한 것에 대해서 요지를 잘 못 이해하신것 같습니다.
전 어떻게 기도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여쭈어 본것이 아닌 어느 시기까지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쭈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도를 어떻게 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까지 기도를 하라는 말씀은 제가 본적이 거의 없는듯 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이 문제 해결이 되는 때까지 기도하는게 가장좋겠죠.
어떠한 경우에는 바로 응답해 주실수 있고 어떠한 경우에는 주님께서 보실 떄 안 좋으셔서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어떠한 경우에는 몇 십년이 지나서 받을 수도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기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겠죠.
허나 기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시기를 알 수가 없기에 가령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실 기도에 대해서 30년 후에 해 주시는데 제가 그 문제를 놓고 계속 30년 동안 계속 간구를 할 수도 없고 계속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제목이 있다라고 한다면 계속 그러한 기도 제목들과 새롭게 기도할 내용들이 쌓여서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서 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됩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의 경우에는 자신의 친구의 구원을 놓고 기도해서 70년 정도 지난 후에 응답이 되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주위에 한글 개역 성경을 보지만 믿음이 좋고 많은 부분 주님의 뜻 대로 잘 행하시는 형제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형제의 말로는 기도한 제목에 대해서 기도하다가 마음에 평안이 오면 응답이 된 거라고 말합니다. 더 좋은 방법은 기록된 말씀으로 받으면 더 좋다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응답된 내용의 기도에 대해서 계속 간구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시기까지 기도를 해야되는가?라는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제 질문에 요지입니다.
기도 응답이 되는 순간까지 기도해라라고 한다면 제가 뭐라고 말을 드려야 할까요.
저도 정목사님 설교에서처럼 음성으로 듣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여러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까요. 흠정역에 많은 부분 잘 아시는 분께서 답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01-28 01:52:25 | 김기덕
Q :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씀들은 많은 데 반해 언제까지 기도하라는 말씀은 거의 없는듯합니다. 제가 말씀을 잘 모르는 이유로 인해 기도할 때 응답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지킴이를 찾아보아도 기도에 대해서만 나오지 언제까지 하라는 것은 안 나오네요. 전에 순복음교회 조 목사님이 설교에서는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마음에 평안함이 오고 확신이 오고 믿음이 오면 그걸로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일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양해 바라겠습니다.
제 마음에 열의에 의해서 신학을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인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 열의는 식지도 않고 그러던 중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수많은 목사들 그중에서도 젊은 목사들을 보면 저분들은 벌써 목사가 되어서 저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데 난 나이도 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아직 신학교도 안 나왔고 참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있고 여건도 안 좋아서 신학은 할 수도 없고 제 마음의 소원은 간절한데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알게 해 달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말씀을 읽다가 사도행전 9장 10절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씀으로 강하게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씀을 받은 적이 없어서 30분 동안 울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이 매번 말씀으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 울부짖어 기도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씀에 대해 잘 아시는 성도님께서 언제까지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여쭐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려고 해도 그것이 흠정역에 있는 교리랑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성경적인 것인지, 흠정역 성경 말씀에 대해서 잘 아시는 성도님이 계시면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한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우선 아랫글과 설교 영상을 읽고 시청해 보십시요.
특히 ‘그리스도인의 기도’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어보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1.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7
2. 그리스도인의 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83
소위 '기도 응답'에 관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에 형제님과 다른 분들을 위해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기도’ 후반부의 주요 내용에 제가 몇 가지를 부연해서 아래에 글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38장에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성경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침 받고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을 방문한 바빌론 사신들에게 나라 전체를 샅샅이 공개함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에 의한 멸망이 유다 땅에 더 신속히 임하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람의 뜻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한대의 영역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먼지에 불과한 사람의 뜻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러므로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 성도들은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원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자들처럼 기도의 성취를 감히 하나님께 강요하는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벽을 다 재건한 후 하나님께 드린 느헤미야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되듯이 구약식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서 내가 형통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1 또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느13:31)
이런 구약식 기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다 하고 주인에게 그에 해당하는 만큼만의 대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종의 태도이고 종의 입장에서 구하는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모범적인 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의 이 절절한 고백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7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고후12:7~8)
그럼 고린도후서 12장의 이 말씀을 주해해 보겠습니다.
당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 안에 가시”에 대해 어떤 성경 주석가는 갈라디아서 4장 13~14절과 함께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육신의 질병이며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죽다 살아난 후(행14:19~20) 뇌를 다친 바울이 얻게 된 ‘간질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아 신약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의 기록자가 되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열정적으로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 상실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르 떨며 청중들 앞에서 쓰러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하던 바울 자신에게는 그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말한 “육체 안의 가시”가 간질이었는지 안질이었는지 아니면 질병이 아닌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고통과 고민을 안겼던 무엇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에도 큰 장애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명적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자신이 세 번이나 간절하게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고후12:9) 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으로 주어진 은혜와 사역의 성과를 통해 자칫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따뜻한 배려라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육체 안의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요, 마치 진주조개가 아픔을 참고 품은 모래가 보석이 되듯이 고난이 주는 믿음의 훈장이며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키는 무기임을 깨닫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의 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우리는 연약하므로 때때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되고 장애가 되는 어떤 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와 별개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바로 이런 명확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초연하게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감사함으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약식 기도의 자세, 즉 종의 기도를 청산하고 신약 시대 성도의 기도,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소위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각종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은사주의 시스템과 이미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이런 표현은 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하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이 해결되었다.’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에 있어서 절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원리를 적용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의 핵심은 그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분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존중하고 존귀하게 여겨드리며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에 경외감을 느끼며 떨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하는 것, 밥 먹는 것, 길을 걷는 것, 숨 쉬는 것, 잠자는 것 등 온종일 생활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기도와 예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28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종일 불안과 초조함에 떨며 사람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에 열을 올려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양(量)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는가 하는 질(質)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사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가르쳐 주는지와 그 안에 담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혹은 온종일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되고 목에서 무쇠솥을 긁어내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열정적인 기도는 도리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빌립보서 4장 6~7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대해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소원하는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구약 시대 성도들의 자세와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 그 기도에 대한 100%의 분명한 응답이 약속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구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에게 7절의 답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분명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만사형통이나 소위 조지 뭘러식의 반드시 문제를 해결 받는 특급 기도 비결을 통한 바로바로식 응답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는 문제가 해결되든 아니든,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혹은 해결 받는 것이 연기가 되었든 그런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의 영과 혼을 충만하게 채우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고정하도록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 생활을 통해 맛 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탁월한 설교를 매우 모자란 실력을 통해 글로 풀어 놓은 부족한 답변이나마 부디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께서 물어오신 기도에 답변은 이것으로 갈무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답변은 형제님의 글을 통해 제가 느끼고 알려드리고 싶은 몇 가지와 함께 정리해 다음에 다시 별도의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답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하신 분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익명으로 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요.
2015-01-27 18:05:02 | 김대용
예,저희와 함께 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2015-01-22 18:35:59 | 최문선
1월 25일에 예정되었던 모임이 멤버들의 사정으로 두 주 뒤인 2월8일 주일 저녁 6시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5-01-22 18:33:20 | 최문선
형제님, 안녕하세요?
검색이 익숙하지 않으면 있는 자료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지요.^^
첫째 질문은 이 글에 답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의 여덟번째 사람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57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온 것이 맞지만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늘의 왕국을 거부함으로써 무산된 것입니다.
다음 내용은 예수님의 초림 때 오려던 엘리야가 7년 환난 때 두 증인 중 하나로 올 수 있다는 견해를 다룬 내용입니다.
=== 하나님이 보내신 두 증인 (계시록 11장 1~14절) ===
이 부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삽입된 괄호장이다. 이것을 앞뒤 내용에 끼워넣어 시간 흐름을 판단하면 안 된다. 계시록에는 이런 괄호장이 많으며 시간의 흐름에 맞게만 기록하지 않는 것은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계시록 11장 1절에는 천사가 나오는데, 이 천사도 10장의 힘센 천사로서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으매 그 천사가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은즉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 (계11:1~2)
이스라엘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의미는 그들이 여전히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이런 악함이 극에 달했을 때 환난이 그들에게 찾아옵니다. 유대인들이 애써 성전을 지었으나 이것은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게 됩니다. 바로 이 성전에 적그리스도가 들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는 자신을 하나님이라 일컫게 하고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 (살후2:4)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두 증인에 관한 이 부분 역시 나팔 심판의 연속선상이 아닌 괄호로 삽입된 부분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대언하리라.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라. (계11:3~4)
이 두 증인은 그저 환난기에 일어날 선포자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이단 종파들에서는 해괴한 사적 해석에 의한 주장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두 증인을 성경적으로 풀면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4만 4천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서 나와 이방인들에게 왕국의 복음을 선포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는 반면, 두 증인의 사역은 철저히 이스라엘 땅의 역사와 유대인들의 구원, 그리고 메시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장차 죽임을 당하는 곳이 영적인 소돔과 고모라이며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곳 즉 예루살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계11:8). 또한 두 증인 중 하나는 엘리야의 영으로 오는데 이것은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눅1:17).
11장 4절의 올리브나무와 등잔대는 성경의 다른 곳에도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세 차례에 걸쳐 돌아왔는데 1차 귀환은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에스라, 세 번째는 느헤미야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에 내가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그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 두 올리브나무는 무엇이니이까? 하고 또 내가 다시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두 금관을 통해 자기들 밖으로 금 기름을 비우는 이 두 올리브나무 가지는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것들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느냐? 하매 내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이에 그가 이르되, 이들은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들로 온 땅의 주 곁에 서는 자들이니라, 하더라. (슥4:11~14)
포로 생활 이후의 성전 재건 때 일어선 두 사람은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요세덱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그 일을 할 때에 사탄 마귀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1)
이를 통해 우선 계시록의 두 증인은 어떤 세력 같은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사탄의 방해가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등장하는 두 증인도 사람들이며 그들에게도 환난기 성전이 재건된 7년 환난기에 동일한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스가랴 4장 14절에서처럼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들로 온 땅의 주 곁에 서는 자들'이며 계시록 11장 4절은 이들을 가리켜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의 두 증인이 누구인지는 11장 5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음 말씀은 이들을 훼방하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킬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이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리라. 이들이 하늘을 닫을 권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물들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계11:5)
자기들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불을 내리고, 하늘을 닫을 권능으로 비가 내리지 않게 하고, 물들에 대한 권능이 있어서 그것을 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고…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약에서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갈멜 산 등에서 바알의 대언자들에게 불을 내리고, 하나님께 구하여 3년 반(42개월, 1,260일)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한 엘리야(약5:17), 그리고 고라의 자손들에게 불을 내린 모세(민16), 물을 피로 만들고,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한 모세입니다.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초림 때 변화산에서 나타난 이들도 모세와 엘리야였기 때문에 재림 때에도 이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두 증인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자들 중 하나일 것이므로 에녹을 염두에 두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방인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의 땅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사역(8절)에 등장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한편 모세는 물론 죽었었지만 신명기 34장 5~7절에 보면 그가 죽을 때도 여전히 강건한 상태였으며, 주께서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모세를 묻으셨으나 아무도 이 날까지 그의 돌무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의 몸을 우상으로 떠받들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것입니다. 또한 유다서 9절에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모세는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런 정황들로 보아 모세가 부활했음을 추측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엘리야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지만 한 가지, 그가 침례자 요한으로 이미 왔던 것이 아니냐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요한이 엘리야의 영으로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 하니라. (눅1:17)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온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9~21절에 보면 침례자 요한 자신은 자기가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왕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침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그것(하늘의 왕국)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와야 할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11:14)
이 말씀은 하늘의 왕국이 임하기 전에 선포자로서 엘리야가 와야 하는 것은 맞는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천년왕국으로 연기되었고, 그 때문에 엘리야의 영으로 온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며, 장차 천년왕국이 임할 때 다시 엘리야가 (두 증인 중 하나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초림 때 선포된 하늘의 왕국을 그들이 받아들였다면 침례자 요한은 와야 할 사람 엘리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산 호렙에 갔었고, 각종 기적을 행했으며, 구약시대 대언자들의 대표격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환난기의 후반부 3년 반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데,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을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마칠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며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이리니 그들의 죽은 몸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라.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그곳은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서 나온 자들이 그들의 죽은 몸을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들의 죽은 몸을 무덤에 두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대언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11:7~10)
적그리스도는 이들을 일시적으로 이기고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이스라엘 땅에 버려져서 사흘 반 동안 구경거리가 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구경하게 되는데, 아마도 TV 뉴스 등을 통해 전 세계가 그들을 지켜보며 하나님의 갖가지 이적으로 사람들을 멸한 두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며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두 증인은 사흘 반 후에 부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영께서 그들 속에 들어가시므로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서니 그들을 보던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그들이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하고 말씀하시는 큰 음성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계11:11~12)
이들은 자기 발로 일어설 뿐만 아니라 마치 예수님처럼 구름에 가려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런 광경은 세계인들에게 충격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들이 죽었다가 부활할 도시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그 시각에 큰 지진이 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으로 사람들 중의 칠천 명이 죽었더라. 그 남은 자들이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계11:13)
이 놀라운 사건과 지진으로 7천 명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때 남은 자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이런 결과는 두 증인이 선포한 복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환난기의 후반부에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피난처로 도피했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입니다.
작은 책의 계시와 후반부 3년 반 동안 일하게 될 두 증인의 괄호 부분이 이렇게 끝나게 됩니다.
-출처 : 요한계시록 바로 알기(그리스도예수안에)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 글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침례자 요한도 지옥 갔다는 신천지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263
2015-01-18 21:27:03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