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아파 본 사람 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그렇듯이 고통의 감각 또한 매우 상대적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하여 느끼는 반응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되며, 주변에서 같이 아파함으로 어느 정도 고통의 경감은 가져 올 수 있을지라도,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고통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하며, 그래서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 몸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비명과 함께 손을 떼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손은 다 타버리고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은 또한 우리의 성격 형성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크게 앓고 난 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통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조직의 세포막이 부서지면서 주변에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호르몬 같은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근처에 있는 통각전달신경세포에 신호를 보내어 그 신경세포의 반응 문턱을 낮추게 한다. 이제 반응 문턱이 낮아진 신경세포는 평상시에는 무시해 버리던 동일한 크기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반응은 뇌로 전달되어져 우리에게 통증을 느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만일 프로스타글란딘의 역할을 방해 한다면 진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먹는 ‘아스피린(aspirin)’이나 ‘이부프로펜(ibuprofen)’ 같은 성분이 들어 있는 약들이 이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함으로써 진통제로써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우리에게 타이레놀 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한 진통제도 그 안에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 이라는 성분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으며, 역시 간접적으로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진통제들은 일반적으로 몸의 통증을 억제하는 데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불안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같이 수반될 때에는 아편류 만큼 진통효과가 큰 물질은 없다. 보통 양귀비에서 추출해낸 모르핀(morphine)이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모르핀은 우리의 뇌와 척수 속에 들어가 통증 전달의 신경경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우리 몸의 통증을 전혀 못 느끼게 하는 매우 강력한 진통제로 병원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그 양을 너무 많이 늘리게 되면 우리의 뇌 속에 황홀감을 만들어 결국은 중독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힘도 가지고 있는데, 일부 십대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점점 사용 증가 추세에 있는 헤로인(heroine)도 이 모르핀의 변형체인 것을 보면 그들이 헤로인에 탐닉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중독성 때문에 만성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일지라도 의사들은 모르핀을 처방하는데 상당히 신중을 기하고 있고, 일단 처방이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 양을 조절하는데 따른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의 몸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모르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endogenous 인데, 여기에 morphine을 결합하여, endogenous morphine 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엔돌핀(endorphine)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엔돌핀은 아편 속의 모르핀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속에서 스스로 생성과 분해가 이루어짐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중독을 일으키거나 할 염려가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진통제이다. 엔돌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분비되어 우리 몸의 통증을 완화시키고 행복감을 갖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감수 해내야 할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진통의 선물도 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실 때에 병사들로부터 아편류성 진통제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들이 쓸개를 섞은 식초를 그 분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그분께서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아니 하시더라”(마 27:34)
여기에서 나오는 쓸개란 단어는 히브리어 ‘Rosh’에서 온 말로서 이 말은 보통 쓴 맛을 내는 독성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신명기 29장 18절에서는 ‘쓴 것’으로, 그리고 신명기 32장 32절에서는 ‘쓸개 포도’등과 같은 말로 붙여져 사용되고 있다. 특히 Gesenius가 쓴 히브리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양귀비를 뜻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죄수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줄 목적으로 이와 같이 쓸개를 탄 식초나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도 이와 같이 관습에 따라 일종의 모르핀과 유사한 효능을 발휘하는 아편류성 진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약을 거절하셨다. 우리 몸을 친히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직접 만드신 예수님께서 어찌 마약의 진통효과를 모르시겠는가? 하지만 그 분께서는 능히 유혹을 물리치시고 스스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사야서에 그 답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53:3)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53:4)
“그는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53: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53:5)
그렇다. 예수님께서 친히 받으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 하사 그를 고통에 두셨은즉..” (53:10)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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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고난 주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신 구원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함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자 예수님께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고통’을 일체 피하지 아니하시고, 몸소 직접 겪으셨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감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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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5 22:41:39 | 김정훈
제가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만난 지도 10년 남짓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도 많이 없고 해서 이해하는
데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출판사를 통해서 좋은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
다.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킹 제임스 영어에서 쓰인 단어들에 관한 것과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80% 이상을 만들었
던 하나님의 사람인 틴데일에 관한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경과 함께 많은 은혜를 누리셨으면 합니다.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특징을 보여 주고, 킹 제임스 영어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
1. In Awe of thy Word : 'New Age Bible Versions(뉴에이지 성경 버전들)', 'The Language of the King James Bible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를 쓰신 게일 리플링거 박사님의 책입니다. 우리말로 아직 번역되어 있는 것은 없으며, 킹 제
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탁월함과 그 특징들, 뉴 킹제임스, NIV 등의 교리와 언어학적으로서의 문제점, 킹 제임스 영어
성경에 있는 알파벳의 의미, 역사 등을 잘 설명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내용이 길므로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2. 알파벳만 알면 영단어가 보인다/최재봉/21세기북스 : 위 책에서 영감을 얻은 최재봉 형제님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의 알파벳 A부터 Z까지 알파벳 자체가 '어떤'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게일 리플링거 님의
책이 어려우신 분께서는 이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내용이 재미가 좀 없
을 수 있겠지만,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3. By Definition : 제임스 낙스 목사님께서 지으신 킹 제임스 영어 성경 중의 어려운 단어들을 영영 사전 식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저도 선물 받은 책이라서 요즘 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 Begat : 최근에 나온 책으로 영국의 David Crystal이 지은 책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 속의 영어가 요즘 현대인들, 대중
매체, 노래 등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 해외 배송을 통해 구입했
습니다.
마지막으로 틴데일의 일생과 그 당시 영국 사회의 상황과 주변 인물들(토마스 모어, 헨리 8세, 앤 불린 등)을 잘 보여주
는 번역서를 소개해 드립니다. 틴데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강력 추천해 드립니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에 대
한 여러 가지 설명도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베스트셀러/브라이언 모이너핸 지음, 김영우 옮김/민음in
앞으로는 제가 알고 있는 좋은 책들과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나누고 공유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0:1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2 12:46:27 | 송호
잠언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로운 길을 가는 자, 부지런한 자, 겸손한 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 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순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제 잠언에 기록된 내용을 한 말씀 한 말씀씩 따라가 보면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명철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잠언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결국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명철과 지식조차도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6). 그런데,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얻을 수 있으며 (9:10), 그것을 얻게 되는 자들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3:18).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하며, 이로써 ‘순종’하는 자가 ‘생명나무’를 얻게 됨이 자명 해진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담은 이에 대하여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롬 5:19)
결국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순종하는 자이며, 생명나무를 얻게 되는 자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계속해서 지혜가 으뜸가는 것이고 (4:7)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고 (4:11) 말하고 있다.
잠언에서 명철은 지혜와 거의 동등하게 사용되어져 나온다. 예를 들면 잠언 3장 13절에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니”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2:2),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4:5), “지혜가 외치지 아니 하느냐? 명철이 자기 음성을 내지 아니하느냐?” (8:1),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직접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명철들로 하늘들을 굳게 세우셨도다” (3:19)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지혜와 명철은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로 봤을 때는 거의 동의어처럼 바꿔 사용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볼 부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세운 명철을 의지하거나 (3;5), 자신의 눈에 지혜로운 자, 즉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주의하라고 (3:7) 잠언 기자는 주의를 주고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의 동의어처럼, 그러나 다른 뉘앙스로 반복과 강조의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지식은 지혜와 어떤 관계일까? 지혜로운 자는 학식 (혹은 지식)을 더하게 된다 (1:5). 지혜는 재치 있는 창안물들에 대한 지식을 찾아낸다 (8:12). 지혜로운 자들은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쌓게 된다 (10:14).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가르치게 되고 그 결과 그의 입술에 학식을 더하게 된다 (16:23).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분별 있는 자라 불릴 것인데 (16:21), 분별 있는 자 즉,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에 지식을 얻고 그 귀는 지식을 구하게 된다 (18:15).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지식도 얻거나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 즉, 지혜의 시작을 이루는 것 (9:10) - 이 이제는 잠언 기자가 적은 것처럼 지식의 시작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1:7).
결국 이 모든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자가 되면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얻게 됨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꺼이 순종하기 원하는 그 지혜가 있으면 지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며 세상적인 지식 - 꼭 구원과는 직접 관계없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 유용한 지식들을 말함 - 조차도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더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오해 하듯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수행이나 명상이나 선한 행위를 통하여 명철(깨달음)을 얻어, 점차적으로 지혜에 이르게 됨이 아님을 유의 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뉴에이지와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우리가 지식에서 명철로, 명철에서 지혜의 순으로 단계별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인 '호루스의 눈'은, 우리들이 수양과 참선과 선행을 통하여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그들이 말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 지혜를 그들은 ‘광명’이라고 부르며, 거기서 소위 ‘일루미나티 (Illuminati)’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그 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순종’을 택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깨달음 가지고는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지혜를 받게 되면 (말씀에 순종을 의미) 우리는 오히려 지식에도 풍성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비밀이요 세상과 믿는 자를 구분 짓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다.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 칭함을 듣는 것은 바로 순종을 이룰 때이다. 그리고 그때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지식은 지혜를 얻으면 더 얻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더라도 위에서 부어 주는 은혜가 없이는 결단코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지혜의 근본이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는) 구원의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다! (빌립보서 2:5-11 참조).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순종함으로만 그 생명을 같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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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19:57:26 | 김정훈
현대를 가리켜 과학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과학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이 만큼,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의 혜택을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이 누리고 살고 있다. 집집마다 전기를 이용하여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며, 비행기를 타면 지구상의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단 하루면 다다를 수가 있다. 인공위성은 안방에 앉아서 전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며, 컴퓨터는 인간의 생각까지 대신하여 준다. 그런가 하면, 사시사철 언제라도 원하는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병원에 가면 심장도 새 것으로 바꾸어 준다. 그야말로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 까지 과학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과학이 우리 앞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갖고 있는 학문적 방법의 특수성에 그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은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하여, 반복되는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그 현상 배후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고 이 원리를 다시 사물에 적용함으로써,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실험적이라는 말로 환원될 수 있으리만큼, 과학에서 실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물론, 실험을 하지 않고 단지 이론만으로도 과학적 활동을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이 소위 ‘과학적’ 이라는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적으로 입증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본질상 그 성격이 다른 과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창조론이나 진화론 같이 기원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기원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과학과는 달리 현재가 아닌 ‘과거’를 다루며, 따라서 과학적 방법의 고유한 성격인 관찰과 실험을 적용할 수가 없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는 소위 ‘과학적’ 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렵지만, 현재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인 이론을 추론해 내고 그 이론의 타당성을 또한 새로운 이론에 맞추어 점검해 볼 수 있으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차이점을 고려하여, 미국 Dallas 신학교의 Norman Geisler 교수는 기원의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을 ‘기원과학 (origin science)’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도록 문명의 혜택을 제공해 주는 일반과학을 ‘기능과학 (operation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기원과학’과 ‘실험과학’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결국, 기원과학은 실험과학과는 달리 실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원의 문제는 과학적 연구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과학은 단지 그 이해를 돕는 한 방편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진화론자가 무슨 ‘과학적’ 주장을 하더라도 그 배후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 접근의 해결 방식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실험과학과 같은 권위를 갖기는 어렵다. 물론 이것은 창조론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으로 기원에 관한 문제를 절대 ‘증명’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증거’를 논할 수 있을 뿐임을 십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다고 선포한다. 과학의 눈으로 보아도 우주의 기원을 창조주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결론이다. 정직한 과학은 성경과 모순이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을 도저히 우리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분명히 보이게 하며 깨달아 알게 하고 있으니 (롬 1:20),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고 피조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기원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우주와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 발견할 수 있음이 하나의 커다란 감격이 될 뿐만 아니라, 실험과학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세세한 과학적 사실들을 통하여도 남다른 즐거움을 얻게 된다. 과학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성질로, 그리고 어떤 기전으로 그것들을 움직이게 만드셨는지를 알 수 있는 특권은 과학적 통찰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모르고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일단 하나님을 가까이 알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솜씨를 같이 느끼며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 같아서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과학자’가 아니신가~!
과학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물론 그것은 말씀에 기초한 바른 신앙 안에서 발견되고 사용되어져 갈 때에 한하여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법칙을 드러내주는 과학적 발견들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채우고 정복해 갈 뿐만 아니라 (창 1:28),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찌 이 또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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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17:54:05 | 김정훈
정목사님의 설교와 글들을 읽으며 많은 깨달음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마귀인가 귀신인가'를 읽으며 몇가지 질문을 올립니다.
1. 사탄과 마귀의 구분
2. 마귀와 마귀들의 차이점
3. 성경에 보면(한 예로)
마 8:28 또 예수님께서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스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시매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그분을 만났는데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가지 못하더라.
'마귀 들린 두 사람'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마귀는 타락한 천사인데 천사가 사람의 몸에 들어 갈 수 있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1 05:15:14 | 길공태
1. 기독교에는 왜 이리 이단이 많은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꺼리는 불신자들이 내세우는 구실 중 하나로는 “기독교계엔 왜 이리도 골치 아프게 이단들이 많냐(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 아닌 줄 내가 어떻게 확신하고 가겠냐)”가 있다.
옛날엔 본인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낙담하고 시험에 든 적에 있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만 항변하는 건 너무 나약하고 궁색해 보였다. 이에 반해 전세계적으로 잘 통합된 단일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천주교가 일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먼 훗날 성경을 통해 알게 되면서 본인은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이런 열등감이 사라졌다. 성경의 조명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과 육신의 깡만 있었다면, 본인은 과거 시대엔 분명 교황이나 종교 재판소 관원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독교에다 세상 권력을 접목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단들을 잡아 족치는 일에 열심을 냈을 것이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조무래기 이단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 기독교계의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전 11:19 같은 뜻밖의 구절이며, 대처법은 딛 3:10 정도가 고작이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 주변에만 진딧물이 들끓듯, 인간의 혼이 달린 영적 전쟁터의 입구는 ‘당연히’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험한 꼴이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그 꼴 보기 싫다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마다한다면, 마다한 사람만 손해이다!
기독교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기독교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언뜻 보기엔 이건 비논리적인 아전인수 자기도취 정신승리법 같은 주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진짜로 그것 때문이다. 왜 전세계의 신흥 종교 교주들 중에 부처나 공자, 마호메트를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자처하거나 대체한다는 부류는 넘쳐나는 걸까?
우리끼리 통하는 비유를 동원하자면 이렇다. 왜 전세계의 성경들은 NIV나 NRSV 같은 역본을 대체하지 않고 오로지 KJV하고만 자신을 비교하며, KJV만을 극복과 타도, 대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그런 맥락인 것이다.
작정을 하고 특정 이단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회심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글이라도 쓰려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 믿음만을 방어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이단들에 대해서 공부하려 애쓸 필요 없다.
일례로, 한국의 기성 교계에서는 신천지 때문에 교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신천지 출신의 위장 신자들을 가려내는 매뉴얼을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성도들을 별도로 교육시킬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자들이 성경대로만 잘 대처하면 이단들은 아무도 힘을 안 보태 주니 제풀에 지쳐 없어지게 돼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교회의 에러 복원 알고리즘인 것이다. 저런 수준 낮은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되며, 물리력, 행정력, 폭력 같은 것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교리의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방황하고, 어쩌다 혹세무민하는 이단 교리에 훅 가 버리기도 한다.그런 와중에 이 킵바이블이라든지 청지기 같은 사이트를 찾은 분이라면 일단 웰컴이다. 잘 찾아왔으며, 방향을 바르게 잡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아마도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며, 어쩌면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 진영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은 무료로 차려 놓은 자료라는 뷔페 밥상은 아주 풍부하지만, 여러분에게 일일이 떠먹여 주고 서빙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그래서, 그런 분들께 당부하는 점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라도 자신의 연령대와 신앙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건 필수이고, 또 스스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도 가능한 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작문하면서 올릴 것을 권한다.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이트에서 긴 글을 달랑 복사-붙이기만 해 놓고(혹은 링크만), 반박해 달라는 식의 성의 없는 글은 어느 사이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그건 완전 비매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분야이든 고수는 태어날 때부터 고수 딱지를 달고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묵묵히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붙고 노하우가 저절로 생길 뿐이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작은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인은 영적으로 어리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2. 나의 이단 퇴치 사례
(1)먼 옛날, 2000년 말의 일이다. 고등학생 신분이 끝나가던 시절에 본인은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둘로스 데우)라는 책을 아주 우연히 접했다. 이 책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이니, 출간된 지 몇 달쯤 뒤의 일이다.그땐 내가 비록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죽고 나면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생과 윤회가 웬 말이냐 싶었다.
그 책에 담긴 주장 중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원래 기독교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n세기경에 무슨 공회를 거치면서 이 교리가 부당하게 삭제되었다. (가톨릭이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줬구나! 세상에!)-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국가별로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불공평하기 그지없는데, 인생이 겨우 1회로 끝이라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다. 각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다.- 욥 3:11-26은 자신의 전생에 대한 회상이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다. (마 11:14)
글쓴이가 누구인지, 한국 교계에서 어떤 평판이 있는 사람인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다른 저서들을 보아하니 글쓴이는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고 이단끼가 농후한 사람이긴 하다. 그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명제 자체를 공격하는 듯했다.
본인은 사람이나 소속 교단에 대한 편견을 일체 배제하고, 주장과 교리만을 오로지 성경적으로 스스로 비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비평을 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성경 지식이 부족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인생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하는 교리를 어찌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의 선택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렸다.마치 불치병 환자를 미래에 의료 기술이 개발될 때를 염두에 두고 냉동 창고에 보관해 두듯, 본인은 그 책을 내 머릿속 냉동 창고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수많은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2003~2004년 사이에 ‘서서히’ 솔루션이 나왔다. 책의 저자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전생· 환생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내세나 부활 문맥인 구절을 어떻게 이상한 교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지 디버깅이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본인이 가장 긴 시간을 두고 혼자 힘으로 이단 교리를 교리 증명을 통해 퇴치해 낸 첫 사례가 되었다.
(2)2000~2001년 사이엔 천주교 교리도 접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형제들을 위한 천주교 이야기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아주 자상하고 박학다식한 신부와 대담을 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고, 천주교가 기독교계의 큰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로 개종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변명과 해명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면죄부가 아니고 다른 개념인데 개신교 쪽에서 악의적으로 천주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거나, 마리아 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다를 게 없다는 식. 막 6:3에 대해서도, 원어를 들이대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사촌이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고 둘러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개신교가 태생상 지닌 약점과, 그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천주교 관행을 빌미로 개신교도 결국은 천주교가 큰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진짜 교회사를 알기 전까지는 이들의 주장을 도저히 완벽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니다 싶었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나중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거기서는 고전 3:15 ‘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연옥을 거쳐서 구원받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써 놨었다! (아예 대놓고 ‘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이라는 묘사가 들어간 성경 역본도 있다)특히 본인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 옛날에 영국에서 위클리프라는 어느 악당이 갱을 만들어서 이단 교리가 들어간 잘못된 성경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3)여호와의 증인이야 일단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맹렬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도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와 배척의 대상이 돼 있다. 포교하는 모습이 좀 지적이고 논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얘들이 성경을 변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본인은 거부 모드로 들어갔다. 아직 KJV를 모르던 시절이어서 NIV를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런 변개된 역본과 비교해 봐도 이들의 신세계역 성경은 워낙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KJV 덕분에 요일 5:7과 ‘독생하신 아들’(요 1:18) 같은 아킬레스건까지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완전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게임 끝.
(4)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성경적으로 맞다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안식교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었고, 그때 본인은 지금과 같은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라든가 신· 구약 바르게 나누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문제 없이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인데 제4 계명은 그럼 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에 걸렸다.
이것은 나중에 출 31:17을 통해 완전히 결론이 났다. 성경 역본 문제가 해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십일조 문제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해결됐다. 주일 예배는 그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에서 유래된 신약 성도들의 전통일 뿐이다.
(5)다른 대부분의 이단 교리들은 pre-KJV era 때 접한 것들이고 KJV 진영 내부에서 완전히 격파에 성공한 반면, 딱 하나 KJV 진영 내부에서 접한 유일한 이단 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이다. 다른 진영이나 교계는 종말론이 더 엉망이고 전천년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런 문제로 논쟁을 할 배경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환란 통과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온갖 교회사 자료와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은 이 문제는 더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앙 논리와 상식 수준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내가 보기엔 이건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부정하는 짓이고, 자기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3. 이단 판별을 넘어서 더 큰 목표를 추구해야
본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던 2004~2005년경에는 지금과 같은 교리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교회 대환란 논쟁을 끝으로 본인은 지금까지 무슨 이단 교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하거나 싸운 적이 없다. 신앙 논리, 기독교 변증, 교리 노선에 관한 한은 완전에 가까운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가져다 준 영적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예전에는 물증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힘겹게 방어해야 했던 이단 교리들을 총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그나마 남에게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는 건, 나는 KJV를 모르던 아주 먼 옛날부터 기독교의 근간은 성경이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이 위조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관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교리가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지, 또 궁극적으로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창조· 구원· 성화· 부활·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끝나는지를 늘 검증했다. 이렇게 하면 이단에 빠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겨우 이단 교리 가려내고 논쟁이나 하려고 KJV 성경 공부를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마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목적이 오로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수준이 낮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고,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비교 잣대는 이단들도 아니요, 같은 진영 안의 다른 성도도 아니요, 예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생 중에도 일부 머리가 좋은 애는 한자와 영단어를 줄줄 외우고 수학 미적분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초등학생이 알아서 남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고, 부모가 때려서 양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영재’가 존재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10대 때 죄와 심판, 이신칭의 구원을 이해했으며 구원의 확신을 느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KJV가 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지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이단 교리의 자체 필터링 기술까지 갖췄다. 하지만 그런 교리 공부의 중심에는 ‘나’와 ‘개인적인 지적 만족’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이 내 정신 연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가 막힐 때는, 쓰는 글에 육두문자도 막 들어가고 글에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딱히 증오나 피해의식, 악이 받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사랑의 의분도 아니었다.
“남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 글 내용을 알아듣고 동지가 될 사람만 여기 알아서 붙어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가 당장 열불이 나 있는데 억지로 감정을 죽이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위선과 가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키보드 배틀이 붙었고, 검색 엔진에서 내 이름을 치면 천주교 사이트에서 내 욕을 해 놓은 게 뜰 정도로 악명(?)도 떨쳤다.
겁도 없이 이런 무모한 생각으로 수 년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여러 글을 올렸는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와 내 글을 통해 자기 구원을 재정립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을 뜬 분들이 몇몇 생기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세가 격분한 나머지 바위에게 말로 안 하고 바위를 막대기로 쳤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려 주신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뭐, 그 시절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 열정과 패기(?) 덕분에 그때 ‘가~끔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옛날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잘 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쑥스럽다.
본인은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와 성화, 최종 완전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최근에야 정립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옳다구나 교제를 끊고 짤라 버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마음밭을 갈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나의 신앙관을 심으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어울리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믿고 행하는 모습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보면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됐다.
나의 말과 행실로 인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갈면서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저놈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저 작자가 믿는 걸 믿느니 차라리 교황, 우리 신부님 말씀을 듣겠다” 이러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결국은 눈높이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의 수위 자체에다가 물을 타라는 소리도 절대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단번 속죄, 킹 제임스 성경, 구원의 영원한 보장, 환란 전 휴거 체계를 만든 분께서 크리스천들을 바로 하늘로 안 데려가고 남겨 놓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 주고 남을 나보다 더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을 상대로 스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독교회의 reproduction(믿음의 전수와 재생산)과 error-correction(외부로부터의 이단 교리와, 교회 내부의 불화 등에 대처) 전략은 응당 이를 염두에 두고 수립되어 있다.
본인은 성경에 입각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내 영리를 위해서나 내 감정 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남을 생각해서 독자가 영적으로 잘 되고 딤전 2:4처럼 되길 원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게 독자들에게 ‘오해 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들로부터 당장 동의는 못 얻더라도 “저 녀석 정말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혼의 회심률도 옛날보다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도 이단들을 폭로하고 교리 분석하는 것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마치 튜닝의 끝은 순정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곳에 오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본인이 오랜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진리를 이렇게 공유하길 원하며, 우리 모두 질문을 올리든 간증이나 칼럼을 올리든, 그 큰 목표를 잊지 말고 온라인 공간에서 교제할 것을 감히 권해 본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22:33:24 | 김용묵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자 하여 책을 폈을 때 제일 먼저 대하는 말씀이 창세기다. 그런데 현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분이 또한 창세기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이 사실(fact)로 믿어지면 이어지는 성경의 다른 모든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셨음을 믿는 자라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이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기록된바 그대로 믿겨지느냐 하는 것은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 안의 모든 생물과, 그리고 인간을 어떤 순서와 과정으로 창조하시는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 즉, 공간(하늘)과 시간(처음에), 그리고 땅(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로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물 위에서 움직이시며 그 모습을 만드셨다 (2절). 이때 ‘움직이다’로 표현된 히브리어 ‘rachaph’는 예레미야 23장 9절에서는 ‘떨리며’로,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너풀거리며’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과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어떤 에너지가 전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상상해 보라. 마치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지구를 품고 그 안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넣으시며 지구를 빚고 있는 장엄한 창조의 모습을!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는데, 이 빛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태양 빛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성질로서의 빛 그 자체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은 물론이고 전자기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빛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 빛은 우주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며 지구를 향하여 비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분 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는 어둠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시고, 지구에는 첫째 날이 오게 된다(5절).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을 의미하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넷째 날 나오게 될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지구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저녁과 아침은 어떤 형태이든 빛을 향하여 지구가 한 바퀴 스스로 도는 자전을 하면 생기는 것이지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중에 넷째 날 이후 태양이 생길 때 지구는 이제 태양 주위로 도는 공전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훗날 이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이때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땅에 뿌리어 오랜 기간 식물이 자라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곧바로 이미 다 자란 식물이 땅에서 나오게 하셨다 (11-12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이미 그 잎사귀 안에 일정 기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이미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도 굳이 태양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있어 하등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바로 다음 날 태양을 또 만드시고, 그 태양으로 하여금 지구를 비추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 식물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양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과일 맺는 나무의 출현을 바다의 많은 생물들이 나타나고 수백만 년이 지난 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식물이 먼저라고 말함으로 진화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흥미롭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가치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서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들과 물속의 생물들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여기에서 다시 한 번 ‘bara’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히브리어에는 보통 ‘만들다(make)’혹은 ‘짓다(form)’로 번역되는 ‘asah’와 ‘yatsar’라는 동사가 따로 존재한다. 이들 단어는 ‘bara’와는 달리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을 가지고 다만 형태와 조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bara’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동물을 창조하실 때 넣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20절에 보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생명(life)’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히브리어 ‘nephesh’를 번역한 말로서, 보통 우리가 ‘혼(soul)’ 또는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식물은 비록 ‘몸(body)’은 동물처럼 흙의 요소를 비슷하게 갖고 있지만,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는 ‘혼’이 존재하지 않는 구별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다 (24-31절). 앞서 20-23절에서 동물을 만드실 때 ‘bara’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는데, 25절에서는 ‘asah’즉, ‘만드시니라(made)’를 사용하신다. 왜 그럴까? 앞에서 물과 공중에 거하는 동물들을 만드실 때 ‘nephesh’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거주지만 다른) 같은 종류의 동물을 만드실 때에‘asah’가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bara’가 다시 한 번 (27절), 그리고 ‘asah’와 함께 (26절) 동시에 사용 된다. 여기서 ‘asah’가 사용되었다는 말은 이미 다른 피조물에게도 존재하는 것 즉, 사람의 몸과 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27절에 사용된 ‘bara’는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근본적인 새로운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새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세밀하게 우리 사람을 위하여 공간과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을 미리 채우시고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오직 사람에게만 주셨다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실이다. 할렐루야!
이제 창세기 2장으로 넘어 가보자.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과정을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 그 결론을 2장 3절에 이르러서 일단락을 짓고 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며, 일부 내용 중에는 1장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창세기 2장 4절이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the generations’- 참고로, 영어 성경에는 4절에 위치한 이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어순에 따라 5절 중간에 ‘생성 세대’라는 말로 번역되어 위치하고 있다 -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toledoth)’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총 열한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을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에서 1장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고 흔히들 지적하는 부분은 2장 18-19절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동물이 먼저 창조되었고(1:21-25),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동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2:18-19),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배경 없이 단지 2장 19절만 따로 떼어서 읽게 된다면, 마치 아담이 먼저 있고 그리고 아담 앞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나오게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피조물의 창조 순서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고, 여기서는 특별한 목적 즉, 1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담을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이 밝히 드러나 있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동물들 중에서 일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데, 20절에 보니까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심을 보아 동물들로는 아담의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심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자 - 즉, 이브 -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대로 아담을 잠재우시어 여자를 창조하시게 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어 이브를 창조 하시지만 (몸과 혼), 창세기 1장 27절의 기록처럼, 이브에게도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독립적으로 주신 사실이다. 1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조하다에 히브리어 ‘bara’가 사용 됨)
그러면 2장 19절에서 아담 앞으로 나온 동물들은 어떤 종류인지 알아보자.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모든 종류의 동물 가운데서, 단지 모든 가축, 공중의 날짐승, 그리고 들의 모든 짐승(every beast of the field) 만이 아담에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2:20). 물에 사는 동물은 다 빠져 있고, 기어 다니는 동물과 땅의 짐승(beast of the earth) 또한 빠져 있다. 여기서 특별히 들(field)이란 단어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어 형성되어질 땅을 의미한다고 보여 지고, 따라서 ‘들의 모든 짐승’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서의 ‘땅의 짐승’과는 달리 아담이 앞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주 만나게 될 동물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결국 아담에게 나온 동물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아담과 근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동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한 이해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끝으로 하나만 더 생각을 같이 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7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백만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상당히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하루가 수백만 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여섯째 날 즉, 수백만 혹은 수천만 년 뒤에 출현하게 되는 곤충의 도움 없이 어떻게 꽃가루 수분을 할 수 있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천만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고 단호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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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5:44:11 | 김정훈
억울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제 아내가 저에게 시집와서 억울한 일이 참 많았었습니다.
그 억울한 일들을 저에게 애기했었는데 저는 그냥 '참아라'. 혹은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고 넘겼습니다.
아마도 저의 그러한 행동이 제 아내의 억울함을 더 크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미안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다지 억울하다는 감정/생각을 해본적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때, 친구가 장난치는 바람에 제가 혼이 난적이 있었죠. 그때도 억울하긴 했었는데...
회사에서 승진에 누락(누락된적이 있었나?)되어도 뭐 그다지... 빨리 승진하고 싶은생각도 없었으니까요. ㅎㅎ
(뭐 세상이 그런거지 하고 넘긴것 같기도 하고요)
억울하다... 는 감정을 정확히 깨닫은 건 작년입니다.
갑작스럽게 장인어른/장모님과 같이 살게되다보니 차가 비좁더군요.
그래서 차를 좀더 큰차로 바꾸려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덜컥 꼼곰히 살펴보지도 않고 중고차를 사버렸습니다.
중고차 딜러만 믿고요. 그런데 중도차 딜러는 제가 파는 차만 꼼꼼히 살폈을뿐, 자신이 파는 차는 저만큼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덜컥 중고차를 사니, 담배를 피웠는지, 차를 오래타면 가슴이 아프고. 냄새나고
문짝은 한달만에 고장나고... 이것 저것 살피니 한마디로 바가지를 쓴 겁니다.
속상하더군요. 억울합디다.
차를 탈때마다 억울한 감정이 치솟으며 내가 참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제 잘못인데요.
이때 제 아내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잘못으로 중고차 잘못 산것도 억울한데,
잘못도 없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아내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참 미안합니다. 제가 무심하게 그냥 저 편하자고 억울함을 알아주지도 않고 살펴주지도 않은 제가 참 미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에 달려 돌아가신것을 생각할때,
저라면 참 억울했을것 같습니다.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어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범죄자중의 하나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했듯이
잘못에 합당한 보응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요. 마치 죄를 짓고 도망치는것보다 죄값을 치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신 말씀처럼 억울해 하지 않은신듯 합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여 우리의 죄들(과거의 죄, 앞으로 행할 죄들)을 완전히 제거하여 주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억울하게 식당같은곳에서 대접받거나,
억울하게 선생님깨 혼나거나, 상사에게 혼나거나.
억울하게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 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하게 시부모에게 당하거나
억울하게 내가 쓴 글이 오해를 받거나 곡해되거나
억울하게 비판받거나
억울하게 소명할 기회조차도 받지 못하고 당하거나
억울하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등등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겠습니까?
혹여 여기 자유게시판에 쓰는 글들이 논쟁이 되고, 이건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과 혹은 소소한 의견차이로 시각차이로
마음이 상하거나 등등해서 억울한 감정이 들 때
바로 그런때에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위로받고,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오길 생각해봅니다.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할때도 있지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이 세상이 그나마 덜 부패하도록 하는 세상의 소금일겁니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을까 염려하노라.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염려하노라.
P.S 만약 제가 중고차 살때의 억울함을 못 느꼈다면, 아마도 지금도 제 아내의 억울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감사합니다. 저에게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좀 더 이해하게 해주신 사건을 통해서 조금이나 제 아내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나마 알게 됨을. 그리고 제 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볼겁니다) 제가 참 미안했었고, 지금도 미안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07:59:09 | 김형욱
* 참고로 이 글은 본래 <자유게시판> #1531의 글에 달린 댓글 및 답 글의 형식으로 쓰여 졌던 것인데, 내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독립된 하나의 글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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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그 유명한 ‘짐승의 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계 13:16-17)”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 ‘그’는 큰 이적들을 행하며 (계 13:13),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고 (13:14),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죽이게 하는 자로서 (13:15), 결국 그의 정체는 ‘거짓 대언자’인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19:20).
그런데 그 거짓 대언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의 형상을 향하여 경배하도록 옭아매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짐승의 표’인데, 이것을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게 됨으로 (13:17),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표 받는 것을 쉽게 거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는 언제 이 땅에 출현하고, 거짓 대언자에 의하여 사용되어 지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짐승의 표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짐승의 표가 상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고,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앞에서 기술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모든 자 ... 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은 단지 짐승이 나타난 이후에 그가 - 즉, 거짓 대언자가 -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받게 하는 그 표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 혹은 그 이전에라도 사용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하여는 딱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 ‘표’라는 것이 어떤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라고 본다면, 짐승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이전일지라도, 그의 길을 예비하는 다른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장차 짐승의 표의 기능을 하게 될 어떤 ‘표’를 미리 기술적으로 완성 시켜 놓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미리 받게 함으로 (가령 표를 받으면 얻게 될 각종 건강 및 보안 등의 편리성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에 친숙하도록 해 놓은 뒤에, 어느 날 비로소 ‘때’가 이르렀을 때에 거짓 대언자가 이제 그 동일한 표를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로서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받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딱히 그렇다 안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위의 성경 구절을 읽고 짐승의 표는 아무래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환난 전 휴거를 이룰 성도들에게는 전혀 표를 받을 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하면 큰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에 주의가 요망 됩니다.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니 빌라도가 다음과 같이 행함이 나옵니다.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니라.” (마 27:26)
자, 십자가는 도대체 언제부터 사형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을까요? 누군가가 이 말씀을 읽고, “저는 십자가가 빌라도의 출현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이 지고 가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빌라도가 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미리 지고 다니게 하다가,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그 때에 가서 예수님도 그것을 지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빌라도가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른 설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지식을 통해 십자가 형벌이 언제부터 출현하였는지를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십자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빌라도의 출현이후부터 십자가가 나오게 되니, 따라서 그 이전에는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게 되겠지요. 바로 이와 같습니다. 빌라도가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십자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도구로 사용함으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듯이, 거짓 대언자 또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널리 퍼져 있는 ‘표’를 짐승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쓰게 됨으로 그것이 ‘짐승의 표’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도록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계시록으로 가서 13장 16-17절 말씀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16절의 표를 받게 한다는 말씀은 곧 바로 17절의 표 없는 자는 곧 매매를 못하게 된다는 말씀과 이어지면서 결국 이 뜻은, “짐승의 표란 그것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하는 표”라는 의미로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더욱이 영문 KJV 성경에는 16절과 17절 사이에 콜론 (:) 문장부호를 둠으로써, 이 두 구절의 의미가 떨어지지 않고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주목해 봐야 할 점은, 결국 거짓 대언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16절의 표는 매매통제 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하여 특별히 그가 권력을 행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받게 하도록 한다는 뜻을 의미할 뿐, 이 표가 그 전에도 유사한 목적 혹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던지 안 되었던 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성경이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단지 거짓 대언자가 짐승의 표를 받게 하여 매매를 못하게 하는 통제 수단으로 사용할 것임을 말해 줄 뿐, 그 표가 반드시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만 나오고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표의 출현과 그 표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사용되는 시점은 (비록 그것이 다른 목적일지라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음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표’와 연결된 구원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장차 ‘때’가 이르렀을 때에 짐승의 표로 사용될 어떤 형태의 ‘표’를, 휴거가 일어나기 이전일지라도 휴거로 들림 받을 성도들 또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음을 유념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때는 경배를 요구하기 전이므로 ‘표’를 받아도 믿음을 통해 이루게 될 구원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고, 경배를 요구하기 이전에 휴거가 먼저 일어난다면 결국 그 표는 구원과는 상관없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활 침해와 개인의 자유의사를 통제 또는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알고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우리 가운데는 환난을 겪고 늦게 구원 받을 성도들이 또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일지 모르는 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일 것이며, 그렇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될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 준비하며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 여분의 기름을 채워 준비된 신부로 기다리고 있으려면, 이런 시대를 정확히 읽는 지식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종말의 시대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함은 성도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요한 태도이겠지만, 요한 계시록 같은 말씀을 통해 사탄이 말세에 행할 일을 미리 알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유익하고 또 중요합니다. 지금은 거센 배도의 물결이 일고 있는 때입니다! 적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 움직임을 알고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도 뱀의 간교함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이브와 아담이 결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또한 비록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도록 강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그 어느 책보다도 사탄의 마지막 될 일과, 짐승의 표, 환난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소상히 알림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깨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짐승의 모습이 확연히 눈앞에 드러남을 주목하여, 시대의 물결을 따라 미혹되지 않고 굳건하게 믿음 승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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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19:38:11 | 김정훈
안녕하세요 진리침례교회 이우진 형제입니다.
이곳에 쓰는 첫 글이 답글이 되었네요.
글이 길어질거 같아 답글로 달지 않고 따로 글을 올리는 점 양해해 주세요.
부족한 지식이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7절의 “그것들(them)”은 6절의 “주의 말씀들”이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뿐더러 유일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보존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학자들은 7절의 “그것들”이 5절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5절에 나온 그 누구도 그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대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NIV의 경우 7절의 “그것들(them)”을 “우리들(us)”라고 바꾸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 말씀들이 아니라 사람인 것처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히브리어 원문도 1인칭 복수대명사(us)로 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그것들(them)”이라고 3인칭 복수대명사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7절의 “그것들”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다윗의 세대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7절).
학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히브리 원문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방법 중 하나가 히브리어(혹은 그리스어) 문법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법을 통한 설명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7절의 그것들이 남성복수이고 6절의 말씀들이 여성복수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말씀들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학자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 시편 12:6-7에서는 예외적으로 받았다고 보면 그만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성이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욥기 31:11에서는 “이것은(for this)”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나 10절의 “아내”는 여성 단수입니다.
11절의 “이것은”은 9절과 10절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여성 단수인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10절에서도 여성 단수인 아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11절에서는 9절과 10절의 이야기를 남성 단수로 받고 있습니다.
즉, 욥기 31:11에서도 성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기본적으로 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경우에 따라서는 성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문법을 들먹이며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말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마세요.
특히 킹제임스성경이 어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면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시편 12편은 말(word)에 대한 것입니다.
2절- 입술, 말하다
3절- 입술, 말하다, 혀
4절- 혀
6절- 말씀들
인간의 말은 악하고 헛된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주께서 보존하셨기 때문에)는 것이 시편 12편의 내용입니다.
문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을 말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존하신다고 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설득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 1:28)
킹제임스성경은 항상 옳습니다.
부족한 지식이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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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00:59:40 | 이우진
안녕하세요 ...시편12편 7절에 대한것으로 큰 걸림돌에 직면했습니다.도움을 요청하고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시편7절의 them의 선행사가 바로 앞 6절의 words로 이해하고 있습니다.그런데요...
<문법적 논쟁에서 일단 진행된 내용입니다.>
첫째 -영어적 문법은 7절의 them이 가르키는 선행사가 6절의 words도 될수 있고 5절의 the poor이나 the needy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이건 뭐 논쟁으로 어찌해볼 만합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7절의 them이 6절의 words를 받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단어마다 문법적인 성이 있다고 합니다...7절의 them은 남성복수이고 6절의 words는 여성복수라는 겁니다. 따라서 7절에 지키시는 것은 사람들이지 말씀들이 될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6절의 words의 히브리어 문법적인 성에 대해 설명해 주실수 있으신분 부탁드립니다...
또한 6절의 silver의 히브리어 문법적인 성도 알고 계신분은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KJV>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의 학대받는 것과 궁핍한 자의 탄식하는 것으로 인하여 이제 내가 일어나 그를 향해 우쭐대는 자로부터 그를 떼 내어 안전하게 두리라, 하시는도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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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5 14:14:30 | 전성실
제 생각에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맞는 성경같아요...우리교회는 개역개정이고요... 주변의 많은 교회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안 가르치는것 같아요...
왜죠?
성경 버전 선택에서 잘못되는 엄청 큰일 아닌가요?
저희 목사님은 개역개정판이 가장 옳은 번역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 예수보혈.. 그리고 천국과 지옥! 말씀을 중점적으로 외치시는
아주 열정적인 목사님이십니다 제 느낌에 이단적 요소는 하나도 없어요...
근데 교회를 옮기는 것도 감행해야 할까요?그리고 베리칩이 악마의 숫자라고 저는 믿는데 우리 목사님은 사단의 인 이나 성령의 인 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이전엔 바코드다 말이 많았지만 그런건 없다고 말씀하셔서 혼란스럽습니다베리칩 나중에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 없는건가요?정말 궁금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0: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3 09:25:43 | 한아름
안녕 하세요...
저는 아직은 초심자 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흠정역을 알게 되어 요즘 보고 있습니다(올해구입)
문의를 드림은 궁금한점을 문의할때에 사람 마다, 교회마다 조금씩 틀리고,저 같은 초심자가 물어볼때에
어떤적은 자세히 말씀 해주시기 보다는 마치 이상 하다는 듯이 보시는 분들도 계시기에 마음놓고 질문 하기가
난감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용기를 내어 의문을 청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믿음' 과 "구원" 에대해서 궁금 합니다.
저는 믿음으로써 구원 받는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 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 은혜로(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받는다 . 라고 저희 목사 님이 저번 설교 에서 말씀 하시던데요...
"믿음으로는 받지 못하고 , 믿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라는 말씀에 ...
믿는다와 구원이 같은게 아니라 구분 된건지...
같은 말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닌것 같기도 하고 , 아직도 헷갈립니다.
믿으면 당연히 구원 받아야 하는게 아닌지요?
마치 믿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말 처럼 들려서 혼란 스럽습니다.
어느것이 올바른 말 인지 ,아님 어느것이 정확한 말 인지 부탁 드림니다. 꾸벅...[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2 16:09:56 | 김동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놀라운 주의 은혜 (Wonderful Grace of Jesus)
http://www.cyberhymnal.org/htm/w/o/wondergj.htm
개인적으로 주찬양 선교단 이후로 제일 감명깊게 들었던 찬양입니다. 세상에 당김음 하나 없이도 이렇게 명랑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찬양곡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멜로디에다가 가사에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진정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담겨 있고 예수님을 높이는 교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왜 이런 곡이 우리나라 제도권 교회의 찬송가에 수록된 적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통일, 새찬송가에 모두 없던 걸로 기억)
이 찬양은 노르웨이계 미국인인 Haldor Lillenas가 1918년에 작사· 작곡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이고 한국에서는 3· 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죠. 그는 패니 크로스비만치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Wonderful grace of Jesus만은 그가 지은 수천여 편의 찬송시 중에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곡에 대해서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첨부하는 파일은 이 찬양의 번역곡인 <놀라운 주의 은혜>의 1절을 4성부 합창으로 부른 아카펠라입니다. 요즘은 워낙 비주얼 시대여서 UCC라는 것들이 다 사진 아니면 동영상인데, 소리만 올리는 건 교회 설교가 아니면 무척 드물죠.
제가 여자친구라도 있다면 듀엣으로 녹음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1인 4역이 됐습니다.어젯밤에 방에서 별다른 장비 없이 컴퓨터로 생목소리를 녹음해서 합성한 것입니다. ^^즐겁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링크 클릭)
듣기[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1 20:58:16 | 김용묵
1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곡과 마곡 땅과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를 향해 고정하고 그를 대적하여 대언하며
2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오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왼편은 흠정역 오른편은 개역한글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하여 흠정역과 다른 버전의 성경들을 대조해서 보는데
겔 38장에 '로스'가 나오지 않습니다
원래 원문은 어떤지 정말 궁금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5: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1 11:42:22 | 유다슬
사람들이 흔히 기도랑 예배를 동일시하기도하고 따로보기도하는데
예배는 기도와 찬양등등이다 라고들하는데
또는 예배는 2사람이상이어야한다고하고
각기 기도와 예배를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데
그럼 기독교 홀로 예배하는법은 대체 무엇인가요?
예배와 기도의 차이도 알고싶습니다.
유대교는 예배에서 각기 기도문이있었는데 기독교에서도 있나요?
기도문이있단게 기도가 뭉쳐 예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나요?
그리고 회당에서 저기도 문을 외우고 예배했다는데 그럼 유대사회에선
장애가 있어서 회당에 못나가는 사람은 예배를 못했나요? 아니면 따로 기도만하되 그것이 예배가 되진 못했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7: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0 19:08:17 | 장인철
지난 3월 2일 날짜로 <news and joy>에 실린 글을 링크로 걸어 놓습니다.
이글은 <복음과 상황> 3월호에 실린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암울한 현실입니다.
주님이 오늘 밤 오신다면 한국교회를 보고 뭐라고 말씀 하실지 상상이 되십니까?
왜 우리에게 올바른 교회가 중요한지 더욱 실감이 나십니까?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제대로 보고 알게 되면, 비로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또한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7111#21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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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8 00:03:22 | 김정훈
상징은 중요하다. 상징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지향하는 성격을 요약하여 보여 주거나, 그 조직이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일종의 뿌리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기에 국가는 물론이고, 기업이나 학교, 혹은 운동 팀 같은 조직에서 조차도 자신을 대표하는 상징을 앞에 내세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국가의 도장인 국새와 국민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게 될 1 달러 지폐에다 왜 하필이면 보기에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눈 달린 피라미드’를 그려 놓았을까? 도대체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 것일까?
미국은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여 1923년에 기념관 하나를 건립하였는데, 그 이름을 “The George Washington Masonic National Memorial"이라고 불렀으며, 그 건물의 머릿돌에는 지금도 선명하게 소위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컴퍼스와 직각자의 그림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즉, 조지 워싱턴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리메이슨들이 모임을 갖는 장소를 보통“랏지(lodge)”라고 부르는데, 그 곳에 들어가 보면 미국 1 달러 지폐에 있는 것과 동일한 모양의 ‘눈 달린 피라미드’가 장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리메이슨이 관여하는 여러 장소와 모임에는 늘 ‘눈 달린 피라미드’가 같이 따라다님을 알 수 있는데, 왜 이들은 이 상징을 그렇게 즐겨 사용하는 것일까?
그들은 피라미드 위에 있는 이 눈을 가리켜 “호루스의 눈” 혹은 다른 말로는“전시안 (All-Seeing Eye)”이라고 부르는데,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환생을 거듭하여 최고의 광명-일종의 깨달음-에 이를 때에 갖게 되는 눈을 상징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광명에 이르기 위하여 영혼이 수행하는 과정을 상징하기 때문에 호루스의 눈은 그 꼭대기에 위치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메시지가 담긴 내용들은 고대 이집트에 실제 했던 소위 “호루스의 눈 미스테리 학교”에서 빈번히 가르치던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우선 “호루스의 왼쪽 눈 학교”에서 인간의 육체를 다스리는 법을 오랜 기간 배우고, 이 과정을 다 마치고 나면 비로소 “호루스의 오른쪽 눈 학교”에 들어가 이곳에서 완전한 의식(full consciousness)에 이르는 방법과 정신으로 대화하고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 그 눈에 붙여진 호루스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의 육체적 현현이었던 ‘오시리스’가 파라오로 인간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우였던 ‘세트’가 그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고 한다. 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 조각으로 잘라서 이집트 전역에다 뿌렸는데, 오시리스의 누이이자 아내였던 ‘이시스’가 전국을 뒤져 이것을 찾아냈다. 그런데 13 조각은 찾았으나, 마지막 한 조각인 남근은 물고기가 먹어 버려 찾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인공적으로 남근을 만들어 붙이고 나머지 몸 조각과 합쳐서 오시리스를 제사 지내고, 대신 자신이 낳은 사생아‘호루스’를 오시리스의 힘을 입어 초자연적으로 잉태하였다고 선전하며 결국 호루스가 오시리스가 부활하여 환생한 몸인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여기서 이시스가 찾은 오시리스의 잘라진 몸이 13조각 이었기에 아마도 그때부터 이 숫자는 이들 신비주의 학교에서 새로운 의미 즉, ‘행운’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보여 지며, 이러한 생각은 프리메이슨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오늘날 숫자 13이 이들에게 큰 의미가 있게 되었다. 한편, 이시스가 남근을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본 따 이집트 신비주의 학교의 사원에는 입구마다 신비하고 과장된 모습으로 승화시킨 오벨리스크를 세우게 되었고, 이들의 풍습과 전통을 그대로 가져 온 프리메이슨들에 의하여 오늘날 전 세계의 주요 도시마다 즉, 뉴욕, 위싱턴 D.C., 런던, 파리, 바티칸 등등에 오벨리스크가 서 있게 되었다.
호루스는 ‘세트’와 오랜 기간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되고, 이 싸움에서 비록 최후의 승리를 하긴 하지만, 이 기간 중에 그만 세트에 의하여 왼쪽 눈 하나를 잃게 된다. 나중에 지식과 달의 신으로 알려진 ‘토트’에 의하여 잃어버린 왼쪽 눈을 회복하게 되지만, 그 눈은 검은 빛을 띄며 달을 상징하게 된 반면 오른쪽 눈은 상대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눈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로 이어지는 신화의 구성이 성경 창세기 10-11장에 나오는 니므롯의 바벨탑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화의 구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사냥꾼 니므롯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하여 역시 14조각으로 몸이 잘려져 곳곳에 흩어짐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의 부인 ‘세미라미스’가 사생아 ‘담무스’를 니므롯의 환생이라고 속여 바벨론 비밀종교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여기서 이미 신격화된 아버지와 아들처럼-이집트에서는 태양신으로, 바벨론에서는 바알신으로-그들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이시스 혹은 세미라미스 또한 여신으로 바뀌어 세상에 널리 전파되게 되는데, 인류 문명사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신의 모습-가령 인도의 데바키와 크리슈나, 카톨릭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등-은 모두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렇게 신격화 된 아버지(오시리스 혹은 니므롯)와 그의 부인(이시스 혹은 세미라미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환생인 아들(호루스 혹은 담무스)은 하나의 세트를 이뤄 모든 민족의 신화마다 비슷하거나 약간의 변형된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구성으로 말미암아 마치 하나님의 3위일체를 모방하는 듯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
이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왜 나라의 국새와 1 달러 지폐에 눈 달린 피라미드를 그려 놓았는지 이해가 되는가? 그는 프리메이슨이었고, 미국의 국가 건설 이념에 이집트 신화의 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1 달러 지폐에 나와 있는 눈 달린 피라미드를 둘러싸고 있는 문장들이 말해 주고 있듯이, “신께서 우리의 사업을 축복하실 것인데, 그 사업은 바로 ‘신세계질서’를 만드는 일”이고, 이 모든 일의 최종 목표는 호루스의 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그의 이상의 실현인 것이다.
조지 워싱턴의 꿈은 이제 그 열매를 점점 더 맺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세계의 유수한 지도자들이 앞 다투어 소위 ‘니므롯의 뿔’로 알려진 사인 즉, 다른 손가락은 모두 접고 단지 검지와 새끼손가락만을 (가끔은 엄지까지 들기도 한다) 위로 치켜세우며 인사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며, 카톨릭을 포함하여 그 외 여러 다양한 종교 그룹과 기업들이 또 유명 가수들을 통하여 ‘호루스의 눈’은 우리 주변에 매우 친숙하게 다가와 있다. 고대 이방인들이 섬기던 태양신과 바알신이 또 하나의 그들이 즐겨 쓰는 상징인 불사조처럼 현대에 더 맹렬히 부활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녀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 그가 우렁찬 음성으로 힘차게 외쳐 이르되, 저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그녀가 마귀들의 처소가 되고 모든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며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도다. 모든 민족들이 그녀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즙을 마셨고 또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녀의 넘치는 사치로 말미암아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2-4)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7: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06 23:56:18 | 김정훈
* 오래된 글인데 여기에는 처음 게시하는 것 같네요.
성경에 근거한 종말론과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신문에 근거해서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태복음 24장 32절에서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내용을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규정함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종말 사건의 시점을 1948년이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림을 시기를 알면 휴거의 시기도 알 수 있다는 종말론자들이 꼭 인용하는 구절이 마태복음 24장 32절과 33절이다. 자, 그 어떤 신학적 편견 없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읽고서 이해해 보자.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라는 아무런 객관적 증거가 없다. 이러한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 없다면 마태복음 24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가?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으로 무화과나무를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경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성경에서 뽑아내서 현실세상에다 적용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이단이 사람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성경해석 수법이다. 성경에 있는 사실들을 아무렇게나 끌어내서 현실세상에다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무화과나무 잎사귀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또한 여름이 재림과 종말을 가리킨다고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겠는가.
32절 문맥은 결코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아니다. 계절이 변하는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이런 의미이다.
마태복음 24장과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신 구절을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1장 29절, 30절을 살펴보자.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거의 인용하지 않는 구절이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그것들이 싹을 내면 너희가 보고 이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너희 스스로 아나니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는 종말론자 가운데 누가복음 21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는 마태복음 24장처럼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모습을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적용하는데 방해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무화과나무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확실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나무”는 각각 어떤 나라의 건국인지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올리브나무, 종려나무, 가시나무, 포도나무, 전나무, 소나무, 뽕나무, 상수리나무, 삼나무... 이 나무들도 싹을 내면 여름이 다가오는데 오직 무화과나무만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고 다른 나무들은 그냥 나무란 말인가. 성경을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게 오류 없이 해석하는 방법은 단어를 공평하게 이해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싹을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그 지역 사람들은 다 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요점이다.
즉, 계절이 변할 때도 나무들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는 징조가 있듯이 주님의 재림에도 반드시 그 징조가 먼저 있을 것이란 말씀이다. 무화과나무가 핵심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포함해서 모든 나무의 생장이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를 보내듯이 재림 때에도 그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표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4장 전체 내용이 이것과 관련된 말씀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일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과 관련이 없다. 둘이 같은 사건임을 연결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태복음 24장 33절도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게 되면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규정하기에 급한 나머지 33절의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을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일로 설명한다. 종말론과 관련된 대부분의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해석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독해력’의 부족에 기인한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문맥과 맥락을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마태복음 24장을 1절부터 읽게 되면 33절에서 말하는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이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리에다가 말씀을 맞추지 말고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읽고 확인하는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2절]
“또 너희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터이나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말라.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 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6절]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은 고통의 시작이니라.” [8절]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33절의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들, 즉 재림 때의 표적과 종말의 표적을 말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나무들에 변화가 있듯이 재림 때도 마찬가지란 말씀이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면 재림의 때가 코앞에 이른 줄 알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34절에서 “이 세대”란 표현 때문에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는 근거를 제공한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종말의 기점으로 설정했으니 거기서부터 재림과 휴거의 시기에 대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또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 성취되리라’고 말씀하셨기에 ‘한 세대’의 길이만 알면 재림과 휴거의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많은 종말론자들이 한 세대가 얼마나 지속될지를 찾기에 분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 세대가 70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2018년이 재림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세대가 100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2048년이 재림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풀기 위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러는 사이 청중들은 서서히 불안해지고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휴거의 시기를 규정하게 되면 사람들은 점점 비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32절, 33절과 마찬가지로 34절을 해석하는데도 매우 중요하고도 단순한 성경해석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어휘와 세상의 어휘를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같다고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대 generation”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X세대, 세대차이, 실버세대, 세대교체, 부모세대, 자식세대... 등에서 말하는 세대와 동일하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치 개역성경에 나오는 ‘동방’이란 단어를 ‘동방의 아침의 나라, 코리아’에 연결시키는 오류와 같은 오류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짓이다. 성경어휘는 먼저 성경 안에서 그 뜻과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동방’은 동쪽을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세대”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으면 인터넷이나 국어사전, 온갖 주석서 따위를 뒤적거리지 말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만이라도 세대 generation 가 기록된 구절을 찾아서 읽기만 하면 누구든지 쉽게 성경에서 말하는 “세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1:1; 3:7; 11:16; 12:34,39,41-42,45; 16:4; 17:17; 23:33,36; 24:34) 이 부분은 독자들이 반드시 직접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해야만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의 세대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 성경의 세대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로 이루어진 사람들 무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하시면 ‘독사들의 새끼’ 즉, 그 자식들을 말한다. 성경의 세대는 현재 세상이 사용하는 세대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마태복음 24장 34절에서“이 세대”는 표적만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말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담에 속한 세대가 있고, 그리스도께 속한 세대가 있다. 교회는 “선택된 세대(a chosen generation)”라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장의 사건들은 1948년에 살아 있던 사람을 기준으로 ‘한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은 죽이며 돌로 치는 세대 즉, 이스라엘 민족을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복음 24장의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대나 선택된 세대가 당할 일들은 아니다.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복음 23장 35-36절]
객관적이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본문 독해나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체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겠다.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7: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06 10:48:05 | 김재근
어제 김박사님의 세미나를 듣고 이제는 정말 주님 오실날이 임-박 했음을
공감 하셨을 줄 압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상당히 혼란 스러워 하실분들도
계시리라 생각 됩니다.
관리자께서 1494 번 글에서 소개 하신 사이트의 “말세의 징조” 들에서 목록을 보면
아래와 같은 제목의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참고 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싶어 소개 합니다.
http://www.agapechurch.jp/forOmen/125213
11. 일루미나티가 2012년 1급위기는 "北 무장도발"이라고 발표하다
28. 한국 교회 목사와 프리메이슨
29. 한국인 프리메이슨 명단 (퍼옴)
37. 사탄을 숭배하는 WCC(세계교회협회)
43. 911테러는 일루미나티의 계획중의 하나
47. 종교 통합의 실체 WCC
54. 2008년도 프리메이슨 홈피에 올라온 한국인 프리메이슨
그리고 프리메이슨 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시면 아래 사이트를 참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1.hompy.com/harvest/o_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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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5 16:41:32 | 정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