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명의 다리오
성경에는 다리오라는 이름의 왕이 여럿 나옵니다.
특히 바빌론의 벨사살 왕을 멸망시킨 다리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분명히 메데 사람이고 페르시아 왕국의 초대 왕으로 유대인 귀환을 명령한 왕은 고레스인데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에스라 사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1. 메대 사람 다리오(단5:31; 9:1; 11:1). 이 사람은 아스티가게스의 아들로서 메대 사람들의 왕이었으며 어머니 쪽으로 에빌므로닥과 고레스의 삼촌이었다. 그는 BC 539년에 갈대아 사람들의 벨사살 왕을 폐위시키고 2년 후에 죽을 때까지 왕좌를 차지하였으며 그 후에 왕좌는 고레스에게 넘어갔다. 그의 통치 때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다(단6:1-28). 고레스는 BC 536년에 유대인 귀환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BC 606년에 있었던 바빌론의 1차 침공 이후 70년 만에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다리오는 고레스 밑에 있던 대장으로 메대-페르시아 왕국의 일부인 갈대아 사람들의 영역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KJB에는 분명하게 그가 왕으로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단9:1).
https://www.biblegateway.com/resources/encyclopedia-of-the-bible/Darius-Mede
2. 다리오 히스타스피스. 에스라와 학개 그리고 스가랴 대언자에 의해 언급된 이 왕은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칙령을 내려 성전을 지으라고 했으나 그 후에 유보된 것을 다시 회복시켜 유대인들이 공사를 하도록 허가한 인물이다(스4:1-24; 5:1-17; 6:1-22; 7:1-28). 그는 주전 521년경에 마기승족의 왕위 찬탈자 스메르디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정부를 수사(수산)로 옮겼고 바빌론이 자기를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키자 반역을 제압하고 바빌론의 성벽을 무너뜨려 렘51:58의 예언을 성취했다.
3. 다리오 코도마누스. 느12:22에 언급된 이 왕은 페르시아의 왕들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인자한 왕이었다. 알렉산더 대제는 여러 차례 그를 패배시켰고 마침내 260년의 역사를 가진 페르시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다리오는 6년간 통치한 뒤에 자기의 장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이로써 단8:1-27에 나오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다니엘은 숫양이라는 상징으로 페르시아 왕국이 거대해지는 것을 예언했고 이 양이 뿔로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밀고 들어가나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숫양은 서쪽에서 나와 땅에 닿지 않고 온 세상을 휘저으며 다닌 염소 즉 눈과 눈 사이에 큰 뿔을 가진 염소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멸되었다. 다니엘의 예언은 역사상 일어난 일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
2017-08-12 14:36:28 | 관리자
안녕하세요?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뮤지컬 더북이 1년 내내 공연되고 있습니다.
https://musicalthebook.modoo.at/
며칠 전에 교회 밖의 한 자매님께서 뮤지컬을 보시고 후기를 보내 주셔서 소개합니다.
휴가 시즌에 가족끼리 혹은 성도들끼리 같이 관람하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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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롤라드들의 출현을 기대한다-뮤지컬 ‘더 북’ 관람 후기- 전O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공연인 뮤지컬 ‘더 북(The Book)’은 롤라드들과 가톨릭교회와의 진리 전쟁을 그리고 있다. ‘롤라드’(Lollard,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자’, ‘독버섯’이라는 뜻)는 종교기득권자들이 경멸의 의미로 부른 명칭이다. 롤라드들은 교회의 교리나 관행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사랑하여 목숨 걸고 진리를 전파했으며,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더 중시하며 그들을 이단자로 낙인찍고 박멸하려 하였다. 종신선교사로 헌신한 배우들이 열연한 ‘더 북’은 롤라드의 이야기를 통해 평신도들이 진리를 분별할 필요성과 아울러 진리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기독교는 “한 권의 책(The Book)의 종교”로 일컬어진다. 롤라드 운동이나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그 책(The Book)’이 있다. ‘그 책’을 특권층의 전유물로 삼았던 종교기득권자들에 대항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만민에게 펼쳐 놓은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성경을 성직자들만 읽으라고 주셨겠는가.
1517년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웬만한 사람은 알 만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 100년 전부터 이미 가톨릭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오직 성경’을 외치며 종교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한 롤라드 운동은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암흑기로 불리던 당시에는 성경이 귀족과 식자층만 알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평민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를 교황에게만 두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사제들은 교회의 제도와 교리와 관행을 따라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비용과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해 구원을 돈으로 사게 만들었다. 또 고해성사로 사제에게 사죄나 처분권을 주어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게 만들고, 회개를 위선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어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과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에 무지했기에 교회의 제도와 관행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 외에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아래서 평신도들도 영적으로 타락해갈 때,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저항하는 평신도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제자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하고 진리에 눈을 뜬 자들이었다. 천 년의 전통을 깨고 영어로 성경이 완역되어 읽히면서 사람들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영어로 번역된 성경의 확산을 막기 위해 번역 성경을 지닌 자들과 전하는 자들을 무참히 고문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번역 성경을 지니기만 해도 목숨을 위협받던 롤라드들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성경 66권의 이름을 취한 후 한 권씩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찰사제의 눈을 피해 특정한 비밀 장소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한 권씩 암송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적어 퍼뜨렸다. 성경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저마다 스스로 워킹바이블이 된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성경을 다운받아 볼 수 있고,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못 외우는 디지털 치매 환자들인 현대인들에게는 성경 한 권은커녕 한 장도 제대로 암기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롤라드들이 성경을 암송한 것은 들켜서 죽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성경을 전해야 했던 절박함 때문이었다. 대체 그 말씀을 전파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컸으면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통째로 다 외운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아는 것, 외운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숨 걸고 전파하며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썼다. 롤라드들의 말씀 사랑의 정신과 삶의 태도는 신앙에서조차 쉽고 편함을 숭배하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어떤 것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보기 쉽다. 밥 한 그릇 안에도 그게 식탁에 밥이 되어 오르기까지는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햇빛과 비를 주시고 곡물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씨 뿌려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노고, 도정과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가족을 부양하려는 가장의 수고와 정성껏 밥을 짓는 주부의 수고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이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책을 아무런 방해나 박해 없이 자유롭게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생명 걸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도록 번역한 사람들과 생명 걸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파한 롤라드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물려준 최고의 유산은 번역된 성경이다. 지금은 휴대가 가능한 크기로 얇고 예쁘게 제본되고 인쇄되어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지만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성경을 사려면 1억 가까운 돈을 줘야 하고, 말 두 대가 이끄는 수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성경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세기 성도가 아닌 것을 감사한다.
게다가 누구나 하나님을 자기 나라의 말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한, 성서는 성직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나라의 언어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모토 아래 진행된 성경번역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종교개혁 역시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불씨들이 있어왔고, 루터는 그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평범하지만 결코 진리와 믿음에 타협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등의 사제나 신학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구두수선공, 타일제조공, 푸줏간 주인, 가정주부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는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하기 위해 애썼던 무수한 롤라드들의 물밑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극심한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롤라드는 학교를 세워 롤라드를 양성해 영국 전역에 보냈다. 그들은 개인 성경공부를 장려하고,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며, 제도권이 내세우는 신조가 아닌 독자적인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또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교황과 추기경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가톨릭의 정통 교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교회는 신자의 집합체라고 보았고, 설교와 성례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회개와 제자도, 단순한 삶을 강조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개인의 갱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롤라드의 지도자들은 이동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그룹을 만들고, 구성원들은 가정방문, 술집 전도, 시장 등 공공장소에서의 설교, 식탁대화, 성경방 초대 등을 시도하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창안으로 롤라드의 성경보급운동은 더욱 확산된다. 이러한 롤라드들의 활동은 많은 평신도들에게 기독교 본질에 관해 눈을 열어주었으며 훗날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위클리프가 비판한 대로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을 기준으로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그 무엇이든지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교황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는 믿어선 안 된다. 사실 예수님은 교황도 세우지 않았고, 종교제도도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따를 대상은 교황도 교회도 총회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이고 성경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교회에 다니면 구원 받는 줄로 안다. 봉사를 좀 하거나 교회의 제도나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확신이 더하다. 그러나 성경을 펼쳐 읽지 않으면 그는 영적 소경이다. 뮤지컬 ‘더 북’에서도 롤라드의 수장 윌리엄의 가르침으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뜬 아이린이 제화공인 아버지 토마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만 가톨릭 교리에 세뇌되어 온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아이린은 이단 감찰사제 베르나르에게 쫓기다가 끝내 붙잡혀 죽는다. 가톨릭교회의 제도에 순응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롤라드를 이단시하던 토마스는 딸을 잃고 나서야 딸의 유품인 번역성경을 읽으며 비로소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또 다른 가톨릭 이단감찰 사제인 로버트는 롤라드들에게 자신과 다른 신앙의 생명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교의 명령을 거부하고 롤라드들을 변호한다. 그는 롤라드의 지도자인 윌리엄 사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중심에 성경이 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진리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데 로마가톨릭 산하의 교회는 롤라드들이 전하고자 한 것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기만하고 이단시하고 탄압한 것일까? 진리를 몰라서 탄압한 것일까?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데 누구보다도 그 일에 힘써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화형에 처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자신을 섬긴 것이다. 로마와 결탁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성경을 번역해 전해주었고 그 안에 모든 좋은 약속이 다 들어있는데도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아 중세시대 성도들처럼 무지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해진 성경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읽고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은 2000년이 넘는 역사 가운데 거듭 검증되면서 오늘날까지 왔다. 150년 전에 유럽 교회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하자 그 산산이 찢어진 말씀과 함께 교회가 다 망하고 말았다.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누구를 대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물론 개개인의 심령에도 부단히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종교개혁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항상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세속화와 무신론화,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 등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워킹 템플, 워킹 바이블이 되어 말씀을 살아내고 복음을 바르게 전해 줄 21세기의 신롤라드들을 주님은 애타게 찾고 계실 것이다. 이 종말의 때에 머지않아 우리가 성경을 갖고도 펴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성경을 펴서 읽을 수 있을 때 펼쳐 읽고 펼쳐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성경은 만인의 것이며, 지금은 만인제사장의 시대다. 신학을 하지 않은 평신도에게도 주님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은바 말씀을 맡은 종이 되도록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롤라드들이다. 600년 전 롤라드들이 100년 후의 종교개혁을 촉진했다면 21세기 신롤라드들은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이 땅을 복음으로 덮어 예수님의 재림을 촉진시킬 것이다.
뮤지컬 ‘더 북’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경외감과 두려움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당시의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진리를 분별하는 힘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진리의 말씀에 눈 떴나,나는 성경의 가치를 얼마나 아나,
나는 그 말씀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나,나는 얼마나 말씀을 알고 얼마나 외우며 얼마나 전하고 싶어 하나,나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21세기의 신롤라드인가?
2017-08-03 09:07:06 | 관리자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나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요한일서 4장 13절이 이상하다고 하여 잠시 답을 드립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4:13).
Hereby know we that we dwell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질문은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에 대한 것이며 초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 목적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구절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어는 어떤가요?영어에도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목적어가 없습니다.
이것을 “그분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영어 ‘of his Spirit’에서 ‘of’를 빼내야 하는데 원어에도 ‘of’가 들어 있으므로 빼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생략된 목적어는 성령님의 은혜, 영향력, 열매, 은사(선물) 등 그분의 영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7절 이후부터 보면 그분의 영이 주신 것 중 하나가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 압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54:07 | 관리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인가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자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확실히 믿지만,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기에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답: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예를 두 개만 들겠습니다.
1. 이사야서 6장 1-13절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한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2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 3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그 외치는 자의 음성으로 인해 문기둥들이 흔들리며 그 집이 연기로 가득하더라. 여기서 이사야는 [주](Lord) 즉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한 상태를 고백하자 주님은 그를 정결하게 해 주셨습니다(5-8절).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대답하시되, 도시들이 피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땅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며 12 또 {주}가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 땅 한가운데에 버림당하는 일이 심히 많을 때까지니라.
12절의 {주}(LORD)와 1-11절의 [주](Lord)는 같은 분입니다.
이 구절들에는 신약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자,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은 수난 당하기 1주일 전 쯤에 요한복음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7 ¶ 그러나 그분[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으니 38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말하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러므로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사야가 다시 말하였기 때문이라. 이르되, 40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 41 이것들은 이사야가 그분[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하였을 때에 이른 것이더라. 39-40절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바로 이사야서 6장 9-10절입니다.
여기서 41절은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은 39-40절이 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사야는 그 당시 누구를 보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은 신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재림 시에 올리브 산에 오실 것입니다. 행1:11-12를 보기 바랍니다. 11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12 그때에 그들이 올리벳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더라.
스가랴서 14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이 기록되어 있습ㄴ다.
1 보라, {주}의 날이 이르리니 사람들이 네게서 노략한 물건들을 네 한가운데서 나누리라. 2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전쟁하게 하리니 그런즉 그 도시가 함락되며 집들이 강탈을 당하고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며 그 도시의 반이 포로가 되려니와 백성의 남은 자들은 그 도시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때에 {주}께서 나아가사 그 민족들과 싸우시되 전에 전쟁의 날에 싸우신 것 같이 하시리라. 4 ¶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4절을 보면 {주}(LORD) 곧 여호와 하나님이 올리브 산에 강림하시며 주의 날(재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비교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러 구절들을 모아서 교리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조직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36:09 | 관리자
흠정역 신약 듣기 mp3 는 keepbible 웹하드에서 다운 받아서 듣고 있습니다.그런데 구약 듣기 mp3 는 어디서 다운 받는지 몰라서 문의 드립니다.
2017-07-14 12:35:49 | 김상호
이슈 (issue) !
최근에 쿰란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였는데, 책명은 《성경에서 본 출애굽 루트》이다.
이 책은 금년 2월 말경, 한국기독교출판협회가 제정한 제33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목회자료(국내) 부문에서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출애굽 루트(route)는 구약의 핵심적인 구속사의 운동으로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신 출애굽 루트 주장자들은 성경을 오용한 채 현 사우디아라비아 라오즈 산 부근에서 출애굽 루트의 산물로 보이는 고고학 자료를 기초하여 그곳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방랑한 지역이며 시내 산이 있는 곳이라 주장한다.
《성경에서 본 출애굽 루트》는 가나안을 중심해서 애굽과 현 시나이 반도의 기존 시내 산과 요단강 동편 암몬과 아모리 족속,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모압과 에돔, 그리고 남쪽 미디안(현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성경에 지리적 위치와 방향을 살펴 추적하였다.
게다가 본 책자는 성경과 과학이 접목되었다 하겠다. 이는 출애굽 루트에 관련된 모든 성구와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통해 해발과 수심, 그리고 거리(km)를 측정하여 출애굽 루트의 정확도를 높인 연구이다.
이 책은 신 출애굽 루트 주장자들이 주장하지 못하게끔 성경을 근거해서 집필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신 출애굽 루트를 주장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김승학 씨의 저서 《떨기나무》와 ‘동영상’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 반론한 것으로, 제1부 떨기나무 후기 반론, 제2부 성경에서 본 출애굽 루트, 제3부 무함마드 ․ 쿠란 순으로 되어 있다.
출애굽 루트 지도는 애굽 라암셋에서 시작하여 수에즈 만 홍해와 시내 산과 가데스 바네아를 경유하여 모압 평지까지 추적하면서 그 경로(화살표) 위에 부호를 붙여 성구를 달았고 지도를 부분적으로 오려 내용과 나란히 실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 (책은 컬러로 제작하였고 총 235쪽 분량이다).
특히 「출애굽 루트 지도」는 저자가 컴퓨터 문서작성에서 직접 그려 특허청에 특허 등록된 상태이다(등록 제30-0854431호).
도서명 : 성경에서 본 출애굽 루트
출판사 : 쿰란 출판사
저 자 : 장관흥
2017-07-10 17:34:46 | 장관흥
안녕하세요?
요즘 미국 근본주의 진영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기 바랍니다.그의 이름은 스티븐 앤더슨(Steven Anderson)입니다.
https://www.wayoflife.org/reports/steven-andersons-holocaust-denial.php
그는 독립침례교회 목사로서 유튜브에 과격한 영상들을 올리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드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여러 점에서 거짓 정보를 유포하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설교할 때 그의 얼굴을 보면 평안이 없습니다.근본주의 진영의 유명한 분들을 걸고넘어지면서 많은 사람을 적으로 여기는 표정으로 강하게 설교합니다.
물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도 바울의 행적과는 차이가 납니다.
과격하게 말하는 사람치고 사역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오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없었다.2. 이스라엘 대체 신학3. 성경적 회개 부인4. 구원의 증거가 없다는 교리 유포5. 동성애자들을 저주함(우리는 동성애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음)6. 예수님이 지옥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죗값을 치렀다.7. 언제라도 휴거가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부인
이에 대해 클라우드 형제님이 자세하게 책을 썼으니 무료로 다운받아 보기 바랍니다.
https://www.wayoflife.org/free_ebooks/what_about_steven_anderson.php
다시 이야기드립니다.
앤더슨이 100%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다만 언행이 과격하고 위에 열거한 여러 점을 볼 때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샬롬
패스터
2017-06-24 11:27:5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성경 번역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원어, 영어의 많은 단어들이 복수의 뜻을 가진 경우가 많아 기계적인 번역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는,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거기서 그분께서 흘려주신 고귀한 피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부활 믿음도 추가될 수 있으나 요점은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행위와 100%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배 출석, 새벽기도, 철야, 헌금, 구제, 선교, 전도, 침례(세례), 주의 만찬(성만찬) 같은 사람의 행위가 전혀 우리의 구원에 일조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런 것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들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이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3장 역시 이를 잘 보여 줍니다.
3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속임을 당하고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을 섬기며 악의와 시기 가운데 살고 증오하며 서로 미워하였으나 4 사람을 향한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친절과 사랑이 나타난 뒤에 5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6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 7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침례 같은 행위가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교단은 이런 구절을 사용해서 반드시 물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미국의 캠벨파 그리스도의 교회).
이런 분들이 이를 위해 사용하는 구절은 사도행전 2장 38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말만 떼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여기서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물 침례가 구원의 수단 혹은 구원에 일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신약성경의 전체적인 구원관과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베드로의 말을 다시 보겠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여기서 중간에 들어 있는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를 빼 보면 어떨까요?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이렇게 하면 말이 됩니다. 참된 회개와 믿음은 항상 같이 다니므로 믿음으로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받는 것은 신약성경의 구원관과 일치합니다.
실제로 그리스어 구조를 보면 “회개하라”가 주동사로 되어 있고 “침례를 받아”는 보조동사로 되어 있으므로 죄들의 사면이 “회개하라”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데가 여기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적어도 두 군데가 더 있습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여기도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믿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구원 받는 믿음 이후의 일이지 ‘믿는 것’과 ‘침례를 받는 것’, 이 두 가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관련된 구절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입니다. 이제 네가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 하더라(행22;16).
여기도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을 씻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라는 주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회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도 중간에 낀 “일어나 침례를 받고”를 빼면 자연히 말이 됩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행2:38을 오역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이것을 얼핏 보면 침례교 교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리스말이나 영어의 구조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말은 다른 데서 모두 “죄들의 사면을 위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을 그런 식으로 하려면 다음처럼 해야 더 정직한 것입니다.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러나 이렇게 하면 구원 교리가 깨지므로 안 됩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죄들의 사면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말, 영어 등에 있는 것처럼, 지금 흠정역 번역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물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누가 주장하면 설명해 주고 그래도 믿지 않으면 벗어나면 됩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 교리나 교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문맥에 벗어나게 번역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위의 세 가지 예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6-22 13:03:1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수원 기쁨침례교회의 한 형제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요약한 사복음서 하모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생각되어 알려드립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6399
샬롬
패스터
2017-06-08 16:44:25 | 관리자
요한계시록에 강한 미혹이 말세에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셨는데 진화론 처럼 강한 미혹이 없지 않나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론인데 너무나도 많은 과학자라 하는 사람들이 사실 처럼 믿고 있고 학교에서는 과학인 것 처럼 가르치니 그러한 이론을 배운 젊은 학생들은 창세기를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믿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서울대를 나온 우xx교수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면서 창조론을 반대하는 영상들과 강연들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머리가 조금 아프시더라도 창조과학의 기본적인 정보는 숙지해서 자녀들이 물어보면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말고 어느정도는 이해가 되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튜브에서 좋은 정보를 찾았는데 공유하고 싶네요. 한글로 번역도 되서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번역하신 분에게 감사를 표 합니다. 이 영상에는 같은 지층 즉 공룡이 발견된 지층에서 다른 종류의 동물들, 즉 새, 양서류, 다른 파충류, 꽃, 열매 맺는 식물등, 진화론으로는 설명 될 수 없는 현재에도 살고 있는 많은 생물들의 화석을 발견한 박사님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빅 뱅을 일으켜서 자연 적으로 진화를 시켰다고 믿는 성도님들도 있는데 모든 별들, 동물들, 식물들이 자손들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다 성장한 완전한 상태로 창조가 된 겁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면 당연히 닭이 먼저라고 하실텐데 다 성장한 닭이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된 겁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이나 보리빵 5조각과 물고기 두마리가 몇천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 처럼 예수님도 무에서 유로 창조를 하셔서 스스로가 그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이 영상이 많은 성도님들의 창조사실 변호에 사용 되기를 희망합니다.
*칼 워너 박사가 밝히는 진화론의 거짓말; 살아있는 화석
https://youtu.be/dTD47rtaAlY
2017-06-06 13:13:56 | 손윤락
안녕하세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며 이를 조금 더 풀면 즉 지나침은 부족함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예 1: 영어습득과 학습적응에서 유학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는 믿음에 갓 초등학생에 입학한 어린아이까지 머나 먼 유학길에 오르더니 이젠 태아들도 덩달아 유학(?)을 떠나고 있다. 실로 ‘과유불급’이다.
예 2: 아무리 학생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뜻이라 해도 지나친 칭찬은 자제하십시오. 과유불급입니다.
이런 종류의 과유불급의 예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 성경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단어를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 무오성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단어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면 과유불급이 됩니다.
이런 종류의 과유불급을 유발하게 하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38편 2절입니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시138:2).
I will worship toward thy holy temple, and praise thy name for thy lovingkindness and for thy truth: for thou hast magnified thy word above all thy name.
이것을 아무 생각 없이 읽고 또 말씀을 높이려는 선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의 여호와나 신약의 예수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의 모든 단어들 혹은 성경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보다 혹은 예수님보다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해석과 결론이 이렇게 나면 이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씀을 해석하였다고 해도 심각한 과유불급입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예를 사용하곤 합니다.
일단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문장의 구조를 보기 바랍니다.
말씀을 이름보다 위로 더 크게 만든 분이 있으니 당연히 그분은 말씀과 이름보다 크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나님 지체보가 더 크다는 것은 문장 자체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놓거나 그 이상으로 놓는 것은 과유불급이요, 합당한 해석이나 처사가 아닙니다.
자, 그러면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이름의 용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름은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 알리는 데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예를 들어 정동수라는 이름을 말하면 저의 모든 것(집안, 학력, 직업, 가족 관계, 행한 일, 하고 있는 일, 성품)이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138:2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과 그분의 성품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삼하8:13을 봅시다.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시리아 사람 만 팔천 명을 치고 돌아올 때에 이름을 떨치니라.
이럴 때 다윗의 이름은 그가 소금 골짜기에서 시리아 사람 만 팔천 명을 치고 승리한 후 얻은 명성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이 사용된 예가 많습니다.
다음 예는 이름이 주님의 성품 즉 거룩한 성품을 표현한 것입니다.
높고 높으며 영원에 거주하고 이름이 거룩함인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For thus saith the high and lofty One that inhabiteth eternity, whose name is Holy;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은 다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또 인류를 향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알리고자 했던 모든 현현, 발표, 행위, 자신의 성품보다 명확성과 중요성 등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창조 세상이나 여러 가지 기적들도 다 주님의 이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완벽함에 대해, 그분의 목적에 대해 성경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시편 19편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3 그것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말이나 언어가 없도다. 4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갔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그분께서 해를 위하여 하늘들 안에 장막을 세우셨으므로 5 해는 자기 침소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려는 힘센 자 같이 기뻐하는도다. 6 해가 하늘 끝에서부터 나아가며 그것의 순환 회로는 하늘 끝들에까지 이르나니 해의 열기에서 숨을 것이 없도다.
7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 {주}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주}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9 {주}의 두려움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전적으로 의로우니 10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11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12 누가 능히 자기 잘못들을 깨달으리요? 주께서는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을 지키사 고의로 짓는 죄들에서 떠나게 하시고 그 죄들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곧바르게 되어 큰 범법에서 벗어나 무죄하리이다. 14 오 나의 힘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주}여, 내 입의 말들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1-6절은 창조 세상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즉 그분의 이름입니다.
7-11절은 하나님의 말씀들이며 이 구절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들이 창조 세상보다 큼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혼을 회심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가 12-14절입니다.
시편 138편은 특히 하나님께서 다윗의 혈통을 메시아 혈통으로 삼고 그의 왕좌를 메시아 왕좌로 삼으실 것에 대해 다윗이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삼하7 참조).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것 즉 그분의 이름을 드러내는 모든 것보다 그분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말씀이라는 계시가 더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138:2에서 기초는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모든 명성과 성품이고 그 기초 위에 놓인 것은 즉 약속의 말씀을 그분께서 친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시138:2의 의미입니다.
여기의 이름은 예수나 여호와가 아니고 여기의 말씀은 성경책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심각한 과유불급이 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5-31 16:25:12 | 관리자
마태복음 13장 31~33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일년 여 동안 흠정역 성경으로 여러가지를 공부하고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많은 질문들을 말씀을 통해 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이 예수님의 겨자씨와 가루 세 말 속의 누룩 비유였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의 해설은 좀 설득력이 없이 들렸었습니다. 유명한 척 미슬러목사님은 전통적인 해석의 정 반대로 해석을 하셨었죠.
겨자씨가 나무처럼 커지는 것은 기형적인 것이고 나무에 깃드는 새들은 마귀들 또는 마귀들의 사자들이라는 것이었죠. 물론 새들이 뿌려진 말씀을 거두어 가는 것을 인용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침례교 목사님들은 누룩은 성경에서 항상 나쁜 교리등으로 해석 되어서 가루 세 말에 들어간 누룩은 좋지 않은 것으로 해석을 하셨었는데 이 두 해석들도 별로 설득력이 없이 들렸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두 비유는 "하늘의 왕국"을 비유하신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답을 얻지 못하고 머릿속에 묻어 놓았었는데 오늘 답을 얻은 것 같아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니까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겨자씨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고 나무가 된 것은 예수님의 재림 후, 온 세계에 우뚝서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상이 이스라엘의 그늘아래서 함께 영광돌리게 될 1000년 왕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나무가 왕국을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17장과 31장을 참조 하시면 대조가 될 겁니다.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를 찾아 보았는데 일년 쯤 전에 메시아닉 유대인이 같은 이해를 하셨더군요)
가루 세 말(three measures) 은 성경 전체를 검색하시면 요한 계시록에 보리 "석 되"에 같은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석 되는 3/10 입니다. 1/3 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통과하며 정련되어 예수님과재회 할 것을 스가랴 13:9 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 말이 부풀었다는 것은 보리 빵이 미디안의 군대를 멸절시키는 꿈이야기(사사기 7:13) 처럼 남겨진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적그리스도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굳건히 설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이 이해는 아직 찾아 보지 않았는데 같은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그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의문이 풀렸네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의를 하시던 하시지 않던 하나의 의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7-05-30 13:52:04 | 손윤락
좋은 영어 사전을 사용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한 분이 한 구절을 보시고 왜 킹제임스 성경을 NIV처럼 번역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KJB: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
NIV: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개역/개정/공동/바른 등: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영어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Quick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대 영어 사전에 가서 보시면 Quick은 신속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 말씀은 킹제임스 성경을 직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신속하고 권능이 있으며..’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11년경에 quick은 신속하다는 뜻이 먼저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뜻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NIV 등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원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딤후4:1
KJB: I charge thee therefore before God, and the Lord Jesus Christ, who shall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t his appearing and his kingdom;
흠정역: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여기에도 The quick이 나오며 이것 역시 산 자들로 번역해야 합니다. 물론 죽은 자는 움직이지 않기에 산 자는 그에 비해 항상 신속히(quick) 움직이지요.
성경에는 nephew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는 현대 영어 사전에서 이를 조카라고 배웠습니다.
KJB: But if any widow have children or nephews, let them learn first to shew piety at home, and to requite their parents: for that is good and acceptable before God.
흠정역: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이 먼저 집에서 효성을 보여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개역/개정/바른/공동 성경도 다 동일하게 조카가 아니라 손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1600년경에 Nephew는 주로 조카가 아니라 손자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조카가 가장 중요한 뜻이 되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런 단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므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 1828년판 웹스터 사전 등과 같이 좋은 사전을 사용해서 영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1828년 판 노아 웹스터 사전 사이트http://webstersdictionary1828.com/
불행히도 옥스퍼드 사전은 구매해야 합니다.https://www.oxforddictionaries.com/oed
아마존 DVD/CD
https://www.amazon.com/Oxford-English-Dictionary-Version-Windows/dp/0199563837/ref=sr_1_1?ie=UTF8&qid=1495605017&sr=8-1&keywords=oxford+english+dictionary+dvd
혹은 메리암 웹스터 사전을 사용하되 옛날 용례를 꼭 보기 바랍니다.https://www.merriam-webster.com/ 샬롬
패스터
2017-05-24 14:22: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존 파이퍼 목사님의 말씀 집회가 5월 30일과 31일(화요일과 수요일) 온누리 교회 양재 예배당에서 저녁 7시 30분부터 열립니다.
다른 시간은 영적 지도자 훈련 시간이고 화요일과 수요일 저녁에만 성도들을 위한 집회가 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 오시는 것 같습니다.
집회 소개
저도 파이퍼 목사님의 책들을 좋아하여 성도들에게 여러 권을 읽으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239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나요?(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https://youtu.be/qAizKmN-9fA
존 파이퍼의 시편 42편 강해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466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 해도 우리가 믿는 바와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께서 잘 분별해서 듣고 판단하면 이번 집회를 통해 유익이 있을 줄로 압니다.
샬롬
패스터
2017-05-24 10:14:5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시편 49편 5절에는 조금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Psalm 49:5 Wherefore should I fear in the days of evil, when the iniquity of my heels shall compass me about?
다른 성경들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정: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바른: 나를 속이는 자의 악이 나를 둘러쌀 때에 어찌 내가 재앙의 날들을 두려워하랴?
공동: 악을 꾸미는 자들이 나를 뒤쫓고 노려보아도 이 곤경에서 나 어찌 두려워하리.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대로 발꿈치(스트롱 번호 6120)를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역해 놓으니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이 있어 글을 씁니다.
일단 1-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 모든 백성들아, 이것을 들으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2 낮은 자나 높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함께 들을지어다. 3 내 입이 지혜를 말하리니 내 마음의 묵상은 깨달음에서 나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하프를 타며 나의 은밀한 말을 열리로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먼저 요약을 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요약: 하나님 앞에서 내 죄들이 처리된 이후에 성도는 다시는 그것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1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혼을 무덤의 권능에서 구속하시리니 그분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로다. 셀라.
중요 단어: 불법(iniquity, 즉 내가 부당하게 행한 것), 발꿈치: 발의 뒷부분
설명: 내가 불법을 저지른 뒤 거기서 도망가면 내 불법은 내 뒤에(발꿈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 죄들은 어느 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나를 찾아낼 것입니다. 내가 뒤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5절의 compass라는 단어의 뜻) 나를 에워쌌고 나는 과거의 죄들에 의해 에워싸이게 되었으므로 그 죄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1-2절에 있듯이 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3-4절 역시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우리 뒤에 있고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내(시편 기자) 비유 혹은 가르침은 그것이 틀림을 입증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시 자기 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내가 이 죄들을 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죄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죄들을 다 해결하였습니다.
49편 5절: 내가 그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할까요?49편 6-11절: 이 세상의 재물 등은 이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49편 15절: 오직 하나님께서 내 혼을 구속하실 것입니다.49편 16절: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부자들이 심판 날에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잠언 11장 4절을 보기 바랍니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나 의는 사망에서 건지느니라.
이런 것을 기억하면서 시편 49편을 쭉 읽어 보기 바랍니다. 특별히 발꿈치의 불법이 우리를 에워쌀 때에도 주님이 우리의 변호자가 되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큰 평안이 있을 줄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시편 49편
1 너희 모든 백성들아, 이것을 들으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2 낮은 자나 높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함께 들을지어다. 3 내 입이 지혜를 말하리니 내 마음의 묵상은 깨달음에서 나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하프를 타며 나의 은밀한 말을 열리로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6 자기 재물을 신뢰하고 자기의 많은 부를 자랑하는 자들 중에 7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형제를 구속하거나 그를 위해 [하나님]께 대속물을 바쳐서 8 (그들의 혼을 구속하는 일은 귀중하며 그것은 영원토록 멈추어 있도다.) 9 그가 여전히 영원토록 살게 하며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할 자는 아무도 없도다.
10 지혜로운 자들이 죽고 어리석은 자와 짐승 같은 자도 그와 같이 멸망하여 자기 재물을 남들에게 남기는 것을 그가 보는도다. 11 그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은 영원히 지속되며 자기들의 거처는 모든 세대에 이를 줄로 생각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땅을 부르는도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귀함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계속 머무르지 못하나니 그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13 이처럼 그들의 길이 곧 그들의 어리석은 일이로되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그들의 말에 찬동하는도다. 셀라. 14 그들이 양같이 무덤에 놓였은즉 사망이 그들을 먹을 것이요, 곧바른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지배하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거처를 떠나 무덤에서 소멸되리로다.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혼을 무덤의 권능에서 구속하시리니 그분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부하게 되고 그의 집의 영광이 늘어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17 그가 죽을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 18 그가 비록 살면서 자기 혼을 축복하였을지라도 네가 네 자신에게 잘 행하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리로다. 19 그가 자기 조상들의 세대에게로 가리니 그들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함 가운데 거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2017-05-23 14:24:48 | 관리자
마태복음과 로마서 성막 창세기 등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성경 강해는 들 을 수 없는 건가요?
어디서 볼 수 있지요?
2017-04-23 14:23:43 | 이주성
한국장로교회의 교리적인 근거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1647년)가 영어킹제임스성경(KJB,1611년)을 기초로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내용과 이미지가 너무 많은 관계로 편집하기 어려워 아래의 링크로 전달해 드립니다.
혹 부족한 점이 있으면 이해하시고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쪼록 [성경에 관한 진실]을 가급적 많은 분들에게 알리는 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http://cafe.daum.net/jesusthinking/6Ekw/122
2017-04-18 12:14:13 | 최용주
오늘 저희 교회는 오전예배 시간에 "십자가 고통의 의미 :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눅 23:26~43) 제목의 말씀을 통해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의 무게를 생각할 때,
"내가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십자가는 얼마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것이었는지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아니 과연 내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기나 한 것인지,
아버지 목전에서 은혜와 긍휼만을 앞세우며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모습 이대로 제가 돌아갈 곳은 그분의 사랑과 공의가 완전하게 성취된 자리, 십자가뿐임을 확인하고 곧 다다를 생명의 부활의 그 날, 그 순간을 소망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다음 글은 제가 2004년도에 번역했던 짧고도 강렬한 글입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비아 돌로로사"라는 단어가 언급되었기에 공유해 봅니다.
혹시 의미의 전달이 부족하거나 성경의 묘사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고
주님의 고통받으심에 촛점을 맞추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 글은 트루먼 데이비스 박사님이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견디신 격렬한 고통을 해부학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 예수님의 고난 혹은 고통의 육체적인 양상들을 다룰 것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로부터 그분께서 조롱받고 채찍맞으시며 비아 돌로로사로 향하시던 그 길을 따라서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죽으시던 그 시간까지 따라가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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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질을 위한 준비가 집행되고 있다.
죄수의 옷이 벗겨졌고, 두 손은 머리 위에 있는 기둥에 묶였다.
로마인들은 이런 종류의 형벌에 유대법을 따르려는 어떤 시도를 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40대 이상의 채찍질을 금지하는 법을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법이 엄격히 지켜졌는가를 항상 확인했고, 39대의 채찍만 허용하기를 주장했다.
(잘 못 계수한 경우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반드시 처벌받는다)
로마 군인들은 양손에 채찍을 들고 앞을 향해 걷는다.
이것은 각 끝 부분에 두 개의 작고 둥근 납덩이가 박힌 여러 개의 무거운 가죽끈으로 이루어진 짧은 채찍이다.
그 무거운 채찍에 온 힘을 실어서 예수님의 어깨, 등, 다리를 이리저리 사정없이 되풀이하여 내리쳤다.
처음에 그 무거운 가죽끈은 피부만 상처를 내다가 매질이 계속되면 피하조직 깊숙이까지 터져 찢어져 피부의 모세혈관으로부터 피가 줄줄 흘러나오다가 마침내 근육 밑에 있는 혈관으로부터 동맥혈이 솟구쳐 뿜어져 나온다.
작고 둥근 납덩이들은 처음엔 계속되는 채찍질에 의해 살이 터져 버리는 크고 깊은 상처를 내다가,
결국에는 등껍질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너덜거리고 몸 전체의 찢어진 틈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대량 조직 출혈이 일어난다.
그 죄수가 거의 죽음에 이르면 책임을 맡은 백부장의 판단 하에 마침내 채찍질이 중단된다.
반쯤 실신한 상태의 예수님은 그 때 풀려져 그 자신의 피로 물든 돌로 포장된 길 위에 내동댕이 쳐진다.
로마군인들은 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 시골 출신 유대인에게 엄청난 조롱을 퍼붓는다.
그들은 그의 어깨에 겉옷을 거칠게 입히고 왕의 홀인 양 손에 (갈대)나뭇가지를 쥐여 준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모조작품을 완벽히 조롱하기 위해 왕관도 필요하다.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작은 다발을 만들고 긴 가시나무(보통 땔감으로 사용되는)로 덮어 씌운 후 왕관 모양으로 엮는다.
이것을 그의 머릿가죽 위에 눌러 씌웠다.
다시, 대량 출혈이 일어난다(머리카락 부위는 몸에서 가장 혈관이 많이 분포되어있는 부분중 하나이다).
그를 조롱한 후에 뺨을 마구 때렸으며, 또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고 머리를 짓이기듯 가시관을 푹 내리 눌렀다.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의 잔혹한 장난에 지쳐 버리자 그의 등에 걸쳤던 겉옷을 벗겨냈다.
이 때 이미 상처에는 피와 물(혈청)의 덩어리들이 더덕더덕 달라 붙은 채 응고되고 있었다.
외과용 붕대를 무심코 벗겨내듯이 그 핏덩이를 떼어내면 참기 어려운 큰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 거의, 마치 다시 채찍에 맞는 것 같은 그런 고통 - 그리고 상처는 다시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로마인들은 그의 겉옷을 도로 입힌다.
무거운 십자가의 가로대(patibulum)에 그의 양 어깨가 묶어졌다.
그리고 백부장의 총 지휘에 따라 사형현고를 받은 그리스도와 두 강도에 대한 로마 군병들의 사형 집행 임무,
그 느릿한 십자가의 도정이 Via Dolorosa(고난의 길)를 따라 시작된다.
똑바로 걷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나무 들보의 무게와 심한 출혈로 인한 충격이 어우러져 너무 힘들다.
그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넘어져 나뒹굴기도 한다.
표면이 거친 나무 기둥은 어깨의 찢어진 살과 근육을 도려내듯이 파고든다.
그는 일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나 사람의 근육이 견디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압박해 온다.
형집행을 서두르고싶었던 백부장은 건장한 체격의 구경꾼-북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게 한다.
예수님은 여전히 피흘리며 차갑고 끈적끈적한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골고다까지 650년의 여정이 마침내 완수되었다. 이사야 52:13~53:12, 이사야 대언자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이 예언된 후 성취되기까지 걸린 기간)
그 죄수는 유대인이 승인한 허리춤을 두르는 천조각 외에는 다시 옷이 몽땅 벗겨졌다.
십자가 형벌이 시작된다.
예수님께 약한 진통성분의 몰약을 섞은 포도주를 주어마시게 하였으나 마시기를 거절하신다.
시몬은 땅에 십자가 가로대를 내려 놓으라고 명령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가로대에 뉘여지며 어깨 뒤로 곧장 던져졌다.
그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손목을 마주 대하고 잠시 멈칫한다.
곧 철로 만들어진 무겁고 사각형 모양의 못을 손목을 뚫고 나무에 깊숙이 내리 박는다.
재빨리 그는 다른 한 쪽으로 옮겨가서 팔이 움직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아주 단단히 못 박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약간의 구부러짐이나 움직임 정도는 허용되었다.
그리고나서 십자가 가로대는 나무 꼭대기로 끌어 올려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를 그 위에 붙였다.
왼발을 오른발 위로 포개어 꽉 눌렀고 무릎은 적당히 구부러진 상태로 해놓고 두 발을 쭉 펴서 발가락들을 아래로 오게하고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해서 못을 박았다.
그 범죄자는 지금, 십자가에 못박혔다!
손목에 박힌 못들이 무게를 견디다 못해 천천히 축 늘어지기 시작할 때 극심하고 격렬한 고통이 죄를 파열 시킬 듯이 손가락과 팔을 타고 터질듯한 아픔으로 뻗쳐 오른다.
손목에 박힌 못들은 중추신경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뻗쳐오르는 고통을 피해 보려고 자신의 몸을 위로 향해 내밀어 보다가는 발을 관통해 박힌 못에 온 몸무게를 맡겨버린다.
다시, 못박혀 찢어진 발의 척골 사이의 온 신경을 통해 뻗쳐오르던 고통으로 서서히 마비가 되어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또다른 몸의 현상이 일어난다.
팔에 힘이 빠지면서 극심하고 혹독하며, 격렬하게 몰아 부치는 고통이 연이어 일어나며 심한 경련이 근육 전체에 엄습해 온다.
이러한 경련은 그 스스로 몸을 위로 향해 내밀어 볼려는 것을 무력화 시켜 버린다.
팔에 매달린 채 가슴 근육은 마비되고 늑간 근육도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할 수 없게 된다.
공기는 허파 속으로 들어가지만 숨을 내쉴 수는 없게 된다.
예수님은 한 번의 짧은 숨이라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마침내 이산화탄소가 폐와 혈액을 채우게 되고 경련은 부분적으로 가라앉게 된다.
간혹 발작적으로 한 번씩 그는 몸을 솟구쳐서 숨을 내쉬고 생명을 연장하는 산소를 얻는다.
이 시간 동안 다음과 같이 기록된 일곱 개의 짧은 말들을 토해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첫 번째 말씀, 그의 솔기 없는 겉옷을 서로 갖기 위하여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로마 군인들을 아래로 굽어 보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두 번째 말씀, 회개한 강도에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세 번째 말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겁에 질리고 슬픔에 젖은 젊은 요한(사랑하시는 사도)에게:
"네 어머니를 보라!"(요 19:26-27)
네 번째 울부짖음은, 시편 22편 첫 부분에 기록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무한한 아픔의 시간들, 고통의 순환, 관절이 쪼개질듯한 경련,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기절, 거친 나무에 기대어 몸을 아래 위로 움직일 때마다 잡아 찢는듯한 등의 고통으로 근육은 거의 마비될 듯하다.
그 때 또다른 고통이 시작된다.
두개골이 점점 혈청(물)으로 채워지면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극심하게 으깨어지는듯한 통증이 일어나며 심장이 압박을 당하기 시작한다.
다시 시편 22년 14절을 떠올려보자.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이제 거의 다 되어 간다.
근육 조직의 수분은 거의 다 빠져 나갔고,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 압박받는 심장은 무겁고 둔하고 느릿하게 조직 속으로 혈액을 보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극심한 고통에 빠진 허파는 공기 한 모금이라도 들이 쉴려고 헐떡이며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현저하게 탈수 상태가 된 근육조직은 절실한 수분에 대한 욕구를 뇌에 호소한다.
예수님은 숨을 헐떡이시며 다섯 번째로 외치신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예언적인 시편 22편의 다른 구절을 보자.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시 22:15)
이에 식초로 흠뻑 젖은 해면이 그의 입술로 끌어 올려졌다.
그는 분명히 아무 액체도 마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몸은 이제 최후의 순간에 다달았다.
그는 그의 온 몸의 조직을 통해 조여들어오는 죽음의 냉기를 느낀다.
이런 깨달음은 그분의 여섯 번째 말씀,
-어쩌면 고통스런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을 발언케 한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예수님의 속죄의 사역은 완수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 놓았다.
마지막으로 온 몸의 힘을 격동시켜 그분은 다시 한 번 다리를 쭉 뻗어서 못에 박혀 찢어진 그의 발에 힘껏 힘을 줘 본다.
숨을 좀 더 깊이 들이 쉰 후 그분의 일곱 번째이며 마지막 외침을 큰 소리를 소리질러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
그 나머지는 당신이 아는 바와 같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죄인을 재빨리 처치하여 십자가에서 끌어 내렸다.
십자가 형벌 종식의 일반적인 방법은 십자가 상에서 뼈를 꺾는 것, 즉 다리의 뼈를 꺾는 것이다.
이것은 죄수가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아준다.
가슴 근육의 압력으로부터 풀려 날 수 없으며 빠르게 숨막힘이 일어난다.
두 강도의 다리는 부러졌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앞에 왔을 때 그들은 뼈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죽었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 군병은 심장 내부 심막을 관통하여 위로 갈비뼈 사이 다섯 번째 공간을 그의 창으로 찌른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따르면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했다.
이와같이 심장 부근 물주머니로부터 액체의 분출이 있었으며, 심장 내부로부터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통상적인 질식에 의한 십자가 죽음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시신 확인 작업의 증거를 갖게 된 셈이다.
두개골에 물이 차오름으로써 심장에 압박과 충격이 원인이 된 심장 정지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또 하나님을 향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악의 개략을 잠시 흘깃 경험해 보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렇게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거나 침울하게 하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의 결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을 맛보아 아는 것!
그것은 속죄의 기적이며 부활의 아침에 대한 기대이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예수님을,
수천, 수만 번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습니다.
죄에 무감각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아버지,
저의 추악하고 사악한 죄와 악들을 용서해 주세요.
........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2017-04-10 01:44:26 | 신혜경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고 4백년 동안 괴롭히는 이유가
아브라함이 새를 쪼개지 않아서 라고 설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종살이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그리고 400년이라는 기간동안 실제로 요셉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동안 이런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고난이 축복이라고들 하시는데 하나님이 고난을 계획하신 건지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그리고 고난의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017-04-03 08:05:49 | 이주성
안녕하세요?
어떤 때는 성경을 읽기보다 낭독을 듣는 것이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영어의 경우 알렉산더 스커비(Alexander Scourby)의 킹제임스 성경 낭독이 가장 유명합니다. 아이들도 들으면 좋습니다.
유튜브로 요한복음 1장을 들어보기 바랍니다.https://youtu.be/Uw3dSsUh5Is
우연히 오늘 찾아보니 스커비의 음성을 담은 오디오 바이블 앱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http://scourby.com/index.html
이 앱은 이름이 ‘You Bible’입니다. 무료는 아니고 19.99달러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세계 최고의 성우라 하는 스커비가 성경을 읽어갈 때에 싱크가 된(동시에) 영어 본문이 함께 뜨므로 영어 성경을 공부하는 데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므로 인명. 지명 등을 정확하게 영어로 읽고 들으며 외울 수도 있습니다. 데모를 보기 바랍니다.
http://scourby.com/youbibledemo.php
물론 모든 영어 단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것을 CD나 DVD에 담아 100달러 이상에 판매하였습니다.
안드로이드 폰, 애플 폰 그리고 데스크탑 PC에서도 동일한 앱이 있으니 원하는 형태로 구매하면 됩니다.
홈스쿨링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특히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 다음 판이 나올 때는 이런 앱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교정보고 있고 좋은 성우를 찾고 있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7-03-28 13:40:3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