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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입니다. 위 마태복음 11장 22절에 '그 날에' 라고 시작합니다. 이 말은 주의날 또는 주님이 지상강림하시고 일어나는 일로 보아야 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미 모두 휴거 되었고 남겨진 자들 안에서 대 환란의 때를 끝나면서 주님앞에서 회계보고하는, 즉 환란을 통과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휴거되고 남은자들 안에서 뒤늦게나마 회심한 환란성도들과 창세에 없던 환란인지라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기독교적 모양세를 취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와 자기열심에 빠져있는 가라지들도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7년대환란 가운데 기독교라는 시스템이라는 틀안에서 종교적 행위가운데 열심을 내는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성령님의 역사가 아닌 미혹의 영을 통한 종교통합,종교화합, 또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이용당하는 그런 기독교적 행위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 볼수 있는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1절 끝부분에 보면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직접 그때의 일어날 일들을 아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 기독교적 행위들이 넘쳐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허다한 무리들이 그것에 미혹되는 일들이 발생하겠지요! 23절 끝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언(설교)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도 내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는 이런 가칭 기독교인들을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단죄하시고 판결하시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죠? 또한 확실한 것은 23절 시작에 '그 때에'라고 미래에 있을 그 시점에 적용되는 표현으로 정확하게 구분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많은 개신교회와 목사들이 종교행위과 관습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나 위 구절의 사람들을 현 개신교회와 목사, 성도들로 단정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가 다 들림받은 후에 남겨진 자들중에 나타나는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는 애초에 한번도 너희를 알았던 적이 없다 라고 미래의 일을 예수님이 복음 전파하시는 현시점에서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판단됩니다. 송재근 형제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4-08 15:38:18 | 노영기
아멘! 이런 글은 목사들이 많이 봐야 하는데.....볼 사람들은 안보고......국민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이 아침조회 시간에 훈시를 할 때면, 착한 애들만 추운 운동장에서 떨며 끝가지 듣는데, 그 말을 꼭 들어야 할 아이들은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해서 못듣더군요.
2011-04-08 13:31:30 | 류인선
개역: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개역은 "알지 못하니"라고 현재 시제로 번역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대언자 노릇을 하고 마귀를 내어쫓고 놀라운 일을 하던 하나님의 사람들도 나중에 이 사람들처럼 버림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시제가 아니라 과거 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애초에 한번도 너희를 알았던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런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거듭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2011-04-08 09:59:34 | 김문수
예전에는 개역성경도 잘 안읽고 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어느 특별한분(?)의 성경공부만 하다보니   그분의 새로운 신학(?)에만 몰두하였고 성경에 대해서는 대충대충 알았었던 것들이 너무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킹제임스 흠정역을 통해 흐릿하거나 불분명하게 알던 것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게됨을 주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하는 "디모데스쿨 성경공부"   "마태복음특강" 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까지 진도나가는데도  40분 분량으로 45회 강의가 걸릴만큼 방대한 분량을 배우고 있고   마태복음에 대해 잘못 알고있던 부분을 배우고 깨닫고 있습니다.   많이 은혜받고 놀랍고 하던중에 그중에서도  정말 제일 소름끼치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그대목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부분이고   정확하게는 23절부분이 제일 충격적이었습니다.   마 7: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And then will I profess un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e that work iniquity.       심판의 날 주님 앞에서 책망을 듣는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고, 마귀를 내쫒고,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고      항변하자 주님께서 대답하신 부분입니다.   나는 결코 너를 알았던 적이 없다. 즉 한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시는 대목입니다.   이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목사를 하고 선교사를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위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분들이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고, 마귀를 내쫒고 ,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예수님이 그들을 "한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다" 고 단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 입니까?       다시한번 혹시 내가  그 많은 사람들중에 한명이 아닌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국 칙 출판사에서 나오는 만화 전도지 "144편 비행기" 를 추천해 드립니다.   샬롬![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0: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3 17:24:45 성경교리에서 이동 됨]
2011-04-08 00:18:02 | 송재근
모든 성경은 성경 안에 해답이 있으며, 말씀의 어떤 구절이나 단어가 어렵게 느껴질 때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대개는 앞, 뒤 문맥을 살펴보시면 그 속에 그 설명이 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여기서 "일하여 드러내라."의 내용은 김문수 형제님 설명처럼 14~15절에 있습니다. (빌 2:14-15) “모든 일을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무해한 자 곧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 하라는 것이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빌 2:14-15) “모든 일을 ............... 할지니" 에 "일을 하라"는 뜻이라고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드러내는 일마저도 실상은 사람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을 보실 때 염두에 두실 것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답은 우선 가까운데서 찾으시고,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없을 때 점차적으로 범위를 넓혀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편지를 쓸 때는 수신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썼기 때문입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쓸 때 로마의 성도들이 성경사전을 찾아봐야 하거나 갈라디아서나 빌립보서를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도록 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단어 하나에만 집착하고 매달리면 전체적인 뜻을 알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집에서 나와 외출을 해서 일을 보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내 집 모양만 알아서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내 집 주변의 남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내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phibc/256
2011-03-21 22:46:10 | 류인선
네..???? 제가 적은 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만..... 제 말의 의미가 잘못 전달 됐네요... 말씀하신대로, 믿는 자의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상태를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써서 나타냈다고 생각한다는 글이었습니다..... 믿음 + 행위 = 구원 완성 이라는 말씀을 드린게 아니구... 믿음 + 행위
2011-03-19 00:25:52 | 홍석찬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바는 믿음에다가 행위를 더하여 의로움을 완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정말로 믿는 자라면 그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 행위 = 완전한 구원"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행위 구원이며, 변질된 복음입니다.
2011-03-18 10:55:38 | 김문수
네네...사실 개역개정만 읽었을 때는 성경 번역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요..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면서... 다른 성경에 대해 경계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킹제임스 한글 번역에도 신뢰가 필요했었습니다ㅜㅜ 아, 어제 확인해본 바 헬라어로 된 성경들을 봤는데, 거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성취하다, 완성하다' 라는 뜻의 단어가 사용되어 있더라구요. 하지만 이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표현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지만 행위가 합쳐짐으로(나타냄으로) 완전히 의롭게 되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완성)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행위로)보이라고 강조하죠. 빌립보서 2:12의 '이루다'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그에 합당한 행위가 따를 때야만 구원받았음이 완전하게 입증되는 것이겠죠. 이게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구원을 완성하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와 비교해봤을 때) 결론은 빌립보서의 구원을 이룬다는 뜻은 구원 받은자가 그에 맞는 행위를 함으로 구원 받았음이 나타내어 지는(행위로 입증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걸 고려해 봤을 때 킹제임스 한글 번역이 여러 정황을 잘 따져서 이해하기 쉽게 번역이 잘 되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개역개정처럼 '구원을 이루라' 라고 표현 되어 있으면 그 구절만 봤을 때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생기니까요..
2011-03-18 09:13:42 | 홍석찬
형제님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잘 설명해 주신 형제님이 계셨고 또 잘 이해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정말 말씀을 바로 알고자하는 사람인지 아님 영어를 좀 알기때문에 성경번역에 대한 신뢰보다는 의심이 앞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어가 그렇게 낯설은 언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십여년 이상을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갈고 닦은 번역을 놓고 일일히 설명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좀 무리라고봅니다. 먼저 서로의 신뢰관계가 우선시 되야하는 문제가 있고 저마다 다른 의견을 한 성경에 반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이 홈페이지에서 무수히 많은 증거로서 바른 번역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므로 이쯤이면 신뢰도를 충분이 쌓았다고 봅니다. 이제는 번역보다는 말씀의 이해와 신뢰를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에서 제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한국어로 말씀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먼저 투자하신다면 더욱 많은 깨달음이있으리라 권면합니다...
2011-03-17 11:24:43 | 정혜미
흠~ 역시 사전보다 문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보니 '이러이러한 상태가 되어가라' 라기 보다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계속 강조되는 것 같네요. 5~12절 까지만 보면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셔서 그렇게 겸손으로 순종하셨는데 너희도 그것을 본받아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보이고, 그 뒷 구절들도 보면 역시 무언가(순종)를 하라는 뉘앙스의 말씀으로 보이네요. 성장이 아닌, 하라는 것에 촛점이 맞춰진...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어져 가라'는 뜻이라기 보단..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서 그렇게 불려지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완벽하게 성장해야만 빛들로 빛나고 생명의 말씀을 제시할 수 있는건 아니니까... 위와 같은 일을 하시는건 하나님이시라고 13절에 나오고... 12절의 work out은 문맥상으로 보면 일하여 드러내라는 뜻이 적절하네요. 다만 영한 사전들이 문제인건지... 이건 인터넷 말고 오프라인에서 더 조사해보려구요~ 잠언 17:8에서 다른 성경들은 전부 뇌물이라고 번역했지만 흠정역에서만은 선물로 번역한 것을 보고 '아 역시 이 성경은 문맥에 맞게 해석이 잘 되어있는 성경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래서 빌립보서 2:12절에 관한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신경써서 답변해주신 두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구요~^^
2011-03-17 10:41:46 | 홍석찬
work out 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입니다. work out, a. to bring about by work, effort, or action. b. to solve, as a problem. c. to arrive at by or as by calculation. d. to pay (a debt) by working instead of paying money. e. to exhaust, as a mine. f. to issue in a result. g. to evolve; elaborate. h. to amount to (a total or specified figure); add up (to): The total works out to 176. i. to prove effective or successful: Their marriage just didn't work out. j. to practice, exercise, or train, especially in order to become proficient in an athletic sport: The boxers are working out at the gym tonight. a.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다 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역과 같이 "구원을 이루라"고 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을 너희 삶으로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는 14-16절에 나옵니다. "모든 일을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무해한 자 곧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런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세상에서 빛들로 빛나며 생명의 말씀을 제시하나니" 구원받았으니 모든 일을 불평과 시비가 없이 하고, 흠없고 책망받을 것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드러나며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것을 일하여(행동으로) 드러내는 삶입니다.
2011-03-17 05:31:51 | 김문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미 속사람은 거듭나 구원을 받았구요. 이제 남는것은 겉사람의 부활입니다. 겉사람의 부활은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죠. 주님이 오실때 부활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로는 죽은자들의 부활이요- 두번째로는 산자들의 부활입니다.(살전4:16~17) 여기서 중요한것은 - 죽은자들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빌3:11)" 이와 같은 고백은 죽은자의 부활에 동참하기위해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라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라 할수있겠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2011-03-16 21:20:03 | 최홍진
그리스도 예수안에의 킹제임스 흠정역을 읽은지 3주 정도 돼가는 청년입니다.   먼저... 아래의 질문을 올리는 것은 제가 남다른(?) 구원관이 있어서도 아니고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 쓰는 글도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을 때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기길 원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몇 일동안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찾아보고 또 찾아봤지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어서 지식인에 올려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엔 워낙 다양한(?) 분들이 있기에 신뢰할 수 없어서 출판사의 홈페이지라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들르게 됐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토론중빌립보서를 보다가 의문이 생겼는데, 빌립보서 2:12 의 한글 번역에 있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 중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구원을 이루라' 라고 돼 있지요.   문맥상 여기서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구원받기 위해 계속해서 순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영어 킹제임스로 봤을 때 이 부분이 'work out' 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work out의 뜻을 찾아보니, 운동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등의 뜻이었습니다.)   이 'work out'의 뜻을 몰랐을 땐, 봐라, 킹제임스에서 한글로 일해서 드러내라고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냐 라고 했으나... 인터넷사전, 집에 있는 영어 사전, 핸드폰 사전, 모두 뒤져서 work out의 뜻을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work out이 사용된 문장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몇분동안만 찾아본게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시는 분이 해석하시는 빌립보서 외에는요...   난감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 당신이 말한대로 그런뜻이라면 있는그대로 번역해두고 뜻을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하면 되지 왜 굳이 사전에도 없는 뜻인 일하여 드러내라고 해석 되어있냐 번역은 있는 그대로 번역을 해둬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난감햇지요...   제가 생각할 때도 일하여 드러내라 라고 해석한 게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조금 과장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work out이 옛날에는 일하여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는데 요즘엔 그런 뜻으로 안 쓰이기 때문일 수도 있구... 혹은 현재 work out이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일수도 있구요...   빌립보서 3:11 에 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건 킹제임스 성경이랑 상관없이 KJV - 빌립보서 3: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라는 구절입니다. 앞뒤 구절들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같은 그런 권능을 경험하고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에 도달 하고자 한다는 고백같습니다. 그런데 위의 11절의 내용이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치 마지막 때에 부활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처럼 보여집니다. 왜 바울은 11절의 고백을 썼을지 궁금하구요. 이 구절로 구원관이 흔들리진 않지만 이에 대해 뭔가 확실히 변증할 수 없기에 질문 드립니다...    별거 아닌 것일 수 있지만 지금 이것들에 대한 확실한 변증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한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관한 질문을 인터넷에 처음 올려봅니다. 여태껏 열심히 조사하면 왠만한 것들은 다 답을 찾을 수 있었지만 빌립보서에 관한 것은 어렵네요... 아까전에도 이 질문을 올렸는데 철없이 글을 올렸던 것 사과드리구요.. 이것들에 관한 궁금증이 꼭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4:57:4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6 21:05:15 | 홍석찬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또 다른 칠 년을 여전히 그와 함께하며 섬기니라(창29:30) And he went in also unto Rachel, and he loved also Rachel more than Leah, and served with him yet seven other years. 위 구절은 more than 이 들어가는 최초의 성경 구절이며, 상황 역시 love A more than B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more than 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문법을 따라 읽으면, 야곱이 "라헬과 레아 둘 중에서" (레아에 비하여)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문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레아가 라헬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야곱이 라헬을 더 많이 사랑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 구절도 똑같은 형식의 love A more than B 형식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도 할 수 없었더라(창37:4) And when his brethren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ably unto him.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요셉(A)과 요셉의 형제들(B)이 있는데, 야곱이 그 둘 중에서 요셉(A)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고, 그 형제들도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에 대한 그 형제들의 사랑"에 비하여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정도"가 더 컸다는 뜻입니까?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Neither have I gone back from the commandment of his lips; I have esteemed the words of his mouth more than my necessary food. "주의 말씀과 음식" 이 두 가지 중에서 욥이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음식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에 비해서(?), 욥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정도가 더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69편 31절에서 ox or bullock와 비교가 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30절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문맥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람이 수소나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베드로의 사랑이 특별히 더 지극하기를 바라는 질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이 나(예수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예, 제가 딴 사람들보다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을 듣고 좋아하실 예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의 사랑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해) 좀 미지근하고, 못 미치는 것을 주님이 바라신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마26:33)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 때문에 다 실족해도, 나는 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배신하고 베드로만 주님을 끝까지 따르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사랑이 다른 제자들의 사랑보다 더 뛰어나니) 예수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이렇게 호언장담하다가 진짜 실족한 사람이 누군데 주님께서 또 다시 베드로에게 그런 어리석은 비교와 자신감을 요구하실까요? 베드로: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1,22)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을 비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의 사랑과 헌신이 요한의 사랑과 헌신보다는 더 뛰어나야 내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문맥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베드로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을 비교하려고 하는 맥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숯불 이야기를 가지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감동적인 묵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Q.T.의 묘미지요. 날이 추우므로 종들과 관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거기 서서 몸을 녹이니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더라(요18:18).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요21:9).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가 주님을 부인할 때의 그 숯불을 생각나게 하려고 예수님이 숯불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이런 식의 감동적인 Q.T.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그 때는 종들이 추워서 숯불 피운 거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구우려고 숯불을 피우신 겁니다. 전기오븐이나 가스렌지가 없는데 당연히 숯불 피워야지요. 숯불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 무슨 신비한 심리학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열심히 생각해봤자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분의 진리를 찾기 쉽게 기록해 놓으셨지, 보물 찾기 하라고 꽁꽁 숨겨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준오님이나 혹은 다른 어떤 분들이 어떤 해석을 취하건 저는 별로 상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제 해석을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경의 단어와 용법은 성경의 정의와 용례를 따른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저는 문자적(문법적), 역사적(historical), 문맥적(contextual) 해석을 따릅니다. 이준오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많은 설교가들이나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축하를 드립니다다. 그러나 스펄전이 뭐라고 했건, 매튜가 뭐라고 썼건 그게 제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주석이나 해설들은 성경 말씀과 같은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가 없기에, 저는 그것을 교회 역사 상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할 뿐 그들의 글이나 해석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지 않습니다.
2011-03-01 04:19:26 | 김문수
형제님! 킹제임스 성경의 문법은 오늘날 현대의 문법과 약간 다릅니다. 킹제임스성경은 그것이 번역된 그리스 원문의 문법체계를 최대한 따라 번역되었습니다. 그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영어 답문에 fish가 나와있는데 킹제임스 성경의 fish는 단수 혹은 대표의 성격을 갖습니다. 복수는 항상 fishes를 써왔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여러종류가 아니더라도 복수면 항상 fishes로 옵니다. 오늘날의 문법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할 때에도 five loaves and two fishes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 본문의 문법을 최대한 따랐기 때문에 than 다음에 비교의 대상만 나오고 동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콘코던스로 than을 찾아보아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편 69:31을 보면 Psa 69:31 This also shall please the LORD better than an ox or bullock that hath horns and hoofs. 현대의 문법에 따라,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 라고 해석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가 주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주를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흠정역은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두번째 의미로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요 21:15의 more than these의 해석의 논란은 형제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적어도 200년 이상되어 온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부분을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 왔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love me?" 즉,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들을 적어보자면, St Augustine부터 시작해서 제가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Spurgeon, Warren Wiersbe, Albert Barnes, Adam Clarke, John Darby, John Gill, Matthew Poole, John Wesley, Arthur Pink. 동일하게 말하는 주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Combined Bible commentary, The Greate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Daily Study Bible, People's New Testament, Jamiesson & Fausset & Brown Commentary, Robertson's Word Pictures, Treasury Scriptural Knowledge, Vincent's Word Studies. 여기서 DSB(Daily Study Bible)는 두가지 견해 즉, 물고기와 그물과 배 즉 어부의 삶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견해 모두 제시합니다. 반면 Guzik은 "fish and a fishermans's life"이라고 제시했고 Fourfold gospel(1914, J.W. McGarvey, Philip Pendleton) 역시 "fishes and this fishing business"이라고 해석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세가지 의견을 모두 언급했습니다: 물고기와 배와 그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문맥상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눅 22:31을 생각나게 합니다. 눅 22:31~32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하시니 주님은 또한 추위에 떨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주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세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베드로 개인과 연관이 있는 질문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물고기와 어부의 삶을 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베드로 뿐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배에 올라탔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기 때문에 "이들"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되면 오직 한 견해만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영어 성경처럼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지를 둘 수 있게 "이들"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011-03-01 02:01:11 | 이준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뜻이라면, 비교의 대상은 예수님과 이것들 (둘 다 love의 목적어)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랑하는 정도" 對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도"가 됩니다. 이 경우 than 뒤에 나오는 these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되어야 하며, 문법적으로 ...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do(love) 가 되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these 다음에 동사나 대동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these는 주격이 아니라 목적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사도 요한과 비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2) 15절 이후에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나(주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제자들 중에서 누가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라는 문제로 경쟁을 붙이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1-02-28 06:02:01 | 김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