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져서 좋아요^^
2009-12-23 18:33:01 | 송재근
전 메인 페이지를 즐겨찾기에 담아 두었었는데.. 정말 빨라졌네요..
감사합니다. 샬롬.
2009-12-23 17:14:30 | 김상희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자는 누구인가? (욥 6:14)
(욥 6:14, 개역)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욥 6:14, 킹흠정) 고난 받는 자를 그의 친구가 불쌍히 여길 것이로되 그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도다.
(욥 6:14, KJV) To him that is afflicted pity should be shewed from his friend; but he forsaketh the fear of the Almighty.
욥기 6:14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에 의하면,욥은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사람이었는데, 욥은 그런 자기의 모습(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모습)을 그의 벗이 불쌍히 여겨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좀 이상하네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을 해야지 왜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그의 친구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결 구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개역: (욥 = 피곤한 자 =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 vs (그의 벗)킹제임스흠정역: (욥 = 고난 받는 자) vs (그의 친구 =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 자)
욥기 6장은 데만사람 엘리바스의 말(욥기 4, 5장)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욥 4:1, 킹흠정) 그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응답하여 이르되,(욥 6:1, 킹흠정) 그러나 욥이 응답하여 이르되,
따라서 욥기 6:14은 욥이 그의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인데, 이 구절에서 "고난 받는 자"(개역에는 피곤한 자)는 욥이고, 그의 친구는 엘리바스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는 누구일까요?
개역성경은 고난 받는 욥이 곧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역의 주장과는 달리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욥 1:1).
(욥 1:1, 킹흠정)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하나님께서도 욥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하셨고(욥 1:8, 2:3), 사탄도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 1:9).
(욥 1:8,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
(욥 2:3,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매
(욥 1:9, 킹흠정)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가 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욥의 고난을 보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그의 친구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 19:14, 킹흠정)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고 눈먼 자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니라.
(레 25:17, 킹흠정) 그런즉 너희는 서로를 학대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 25:36, 킹흠정) 너는 그에게서 이자나 이득을 취하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네 형제가 너와 함께 살도록 하라.
(레 25:43, 킹흠정) 너는 그를 엄하게 다스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할지니라.
(신 8:6, 킹흠정) 그러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길로 걷고 그분을 두려워할지니라.
(잠 14:31, 킹흠정)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되 그분을 존경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위 말씀들에서 보는 것처럼,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 이웃을 학대하는 자, 형제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자, 종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엄하게 다루는 자, 주의 명령들에 불순종하는 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서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며 그를 노리고 구덩이를 팠습니다(욥 6:25, 27).
(욥 6:25, 킹흠정) 바른 말들은 참으로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 그런데 너희의 주장은 무엇을 책망하느냐?(욥 6:27, 킹흠정) 참으로 너희는 아버지 없는 자를 기죽게 만들며 너희 친구를 노리고 구덩이를 파는도다.
그래서 욥은 그들을 가리켜 "형편없는 위로자", "쓸모없는 의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욥 16:2, 킹흠정) 그런 것들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형편없는 위로자로다.(욥 13:4, 킹흠정) 그러나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사들이니라.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를 정죄한 그의 친구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욥기 6:14을 개역의 번역대로 읽다 보면,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욥이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정죄하며,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됩니다. 하지만, 욥기 6:14은 욥이 자기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로서,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보면 너희가 친구로서 마땅히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할텐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너희의 행동은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다"라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개역과 같이 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몰아부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욥기 6:14에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욥이 아니라, 고난받는 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욥의 친구들을 말합니다.
2009-12-23 17:07:15 | 관리자
지난번에 구매한 책을 읽느라 자주 들러지 못했는데...속도는 확실히 빨라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12-23 17:06:04 | 박준화
여호와를 주(LORD)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종훈님의 글에 대해 정동수 목사님께서 이미 답변을 해 주셨는데, 제가 그것과 연관하여 빠진 부분을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종훈님의 글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라는 이름은 종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진 이름이다.
2. 그들은 종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주로 섬기지만,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므로 (주종 관계가 아니므로), 여호와를 주로 부를 필요가 없지 않는가? 즉,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여호와가 주가 될 수 없으므로 그대로 여호와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각 질문 혹은 주장에 대해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에게만 주어진 이름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32:28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여호와를 주로 옮겼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개역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창 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킹흠정)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 4:26, 개역)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킹흠정)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셋이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 신 개념이 아니며, 또 그 분의 이름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며, 이스라엘 영토에 한정된 신이라면, 다른 지역에서는 힘을발휘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 중의 여호와", "땅의 한 가운데 있는 주"가 되심을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출 8:22, 개역)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킹흠정)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분리시켜 거기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것은 내가 땅의 한가운데 있는 주인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
물론, 사람들 중에는 주(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토속 신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시리아 사람들은 주(여호와)는 산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면 자기네들이 이길 줄로 알았습니다.
(왕상 20:28, 개역)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 20:28, 킹흠정)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로 나아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시리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무리를 다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니라.
요나는 자기가 이스라엘 밖으로 달아나면 주(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욘 1:3, 개역)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킹흠정)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시리아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패했고, 요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와 고래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 모두에게 주(여호와)가 되시며, 주(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45:6, 개역)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6, 킹흠정) 이것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이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렘 32:27, 개역)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킹흠정)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라.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이것은 주(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그 분을 주(여호와)라고 불렀고, 그 분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수 2:11, 개역)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킹흠정)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우리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지 아니하였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분은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2.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주(여호와)는 주가 되시는가?
이종훈님은 하나님과 본질적 주종(主從)관계를 벗어나서 부자(父子)관계를 맺은 우리에게도 여호와가주(主)가 될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시니 당연히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고생각합니다. 지금 이종훈님의 마음 속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며 종이 아닌데 여호와를 주(主)라고 불러야 하는가?"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마도 LORD와 Lord, lord 를 혼동한 데서 빚어진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 3:15, 개역)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킹흠정)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이것은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은 모든 세대에 이르는 나의 기념물이니라.(출 3:15, KJV) And God said moreover unto Moses,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the LORD God of your father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ath sent me unto you: this is my name for ever, and this is my memorial unto all generations.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신 여호와는 킹제임스성경에서 LORD 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이 이름을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도나이"(主)라고 불렀기 때문에 영어성경에서도 LORD라고 적되, 모두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8:3에 나오는 "내 주여"는 "여호와여"가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主)라고 하며,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역시 "주"라고 합니다.
(창 18:3, 개역)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창 18:3, 킹흠정) 이르되, 내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으면 원하건대 주의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고(창 18:3, KJV) And said, My Lord, if now I have found favour in thy sight, pass not away, I pray thee, from thy servant:
일반 사람들 사이에도 "주"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헷 사람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라고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모두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주"라고 합니다.
(창 23:15, 개역)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 23:15, 킹흠정) 내 주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그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니이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하니라.(창 23:15, KJV) My lord, hearken unto me: the land is worth four hundred shekels of silver; what is that betwixt me and thee? bury therefore thy dead.
이종훈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낼 때에는 바로 이 "아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과 종이 나오는 구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창 24:9, 개역)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킹흠정) 그 종이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넓적다리 밑에 자기 손을 넣고 그 일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KJV) And the servant put his hand under the thigh of Abraham his master, and sware to him concerning that matter.
여기서 주종 관계에서 "주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이를 master 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노예(종)이고 그 분이 우리의 주인(master)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할 때, 그 주(主)는 노예의 주인이라는뜻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스로 계시는 분, 상천하지의 하나님, 모든 육체의 하나님,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주(LORD)시며, 이방인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주(LORD)가 되십니다.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그것을 양태론으로 해석합니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존재가때와 장소에 따라서 상태만 바뀐다는 주장입니다. 즉,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직장에 가면 "과장님"이 되고,집에 와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식의 설명입니다. TV 부흥사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경동 목사 역시 이런 식의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상태만 바뀐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 성도들 안에 들어가시면 성령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는 하늘나라에서 성부 하나님의보좌는 공석으로 비워두었다는 이야깁니다.
(마 3:17, 킹흠정)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미리 녹음해 둔 음성이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으로 트랜스폼한 상태라 하늘에는 안 계시거든요.
그리고, 막 14:36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막 14:36, 킹흠정)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성경에도 없는 성부 고난설과 성부 사망설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막 15:37, 킹흠정)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막 15:37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신 것이므로, 안타깝게도 성부 하나님께서 사망하신 게되어 버립니다. 온 우주만물을 조화와 질서 가운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망하셨으니 정말 큰 일입니다.그런데 누가 이 죽어버린 하나님을 살릴 수 있나요?
(행 3:15, 킹흠정)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니라.
행 3:15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사망하신 겁니다. 하나님이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까? 이처럼 베뢰아의 양태론을 믿으면 이런 모순들에 빠지게 됩니다.
베뢰아의 양태론은 요약하자면,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런 잘못된 교리는 어디에서온 것일까요? 교리는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데(딤후 3:16), 잘못된 성경을 사용하면 잘못된 교리가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딤전 2:5,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킹흠정)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KJV)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개역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따르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아니라, 오직 한 분만 계신 게 되어 버립니다. 성자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그 하나님이 모습을 바꾸어나타나신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딤전 2:5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해야 합니다.
베뢰아에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같다고 합니다.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 => 하나님의 이름 = 예수님의 이름 = 성령님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잘못 번역된 "개역 요한복음 17:11"입니다.
(요 17:11,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킹흠정)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KJV)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개역은 요한복음 17:11을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개역의 번역대로 풀어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름을 주었는데("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주었다고 합니다.성자 예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이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겁니다.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의 이름도 "예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11 말씀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가 아니라,"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입니다.
아직은 개역성경의 번역에 익숙하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의 표현이 어색하거나 낯설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하지만, 바르게 번역된 킹제임스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시다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참된 진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처럼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많은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행 17:10-11, 킹흠정) [10]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즉시 베레아로 보내니 그들이 그곳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 있는 게시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93
2009-12-23 16:50:13 | 관리자
--------------------------------------------------------------------------------'神의 아들 → 神의 아이' 성차별 단어 퇴출되나
서울신문 원문 기사전송 2009-09-03 04:11
[서울신문]‘신의 아들’이냐, ‘신의 아이’냐.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성경책이 개정 25년 만에 재개정된다. 1일 AP통신에 따르면 NIV(New In ternational Version 뉴 인터내셔널 버전) 성경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비블리카’는 NIV성경 개정작업을 내년말까지 완료한 뒤 2011년 개정판을 인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개정 작업에서는 그동안 논란이 됐던 성차별적 단어들의 사용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진다.
비블리카는 앞서 1984년 NIV 성경의 첫 번째 개정판을 선보였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단어들을 보다 ‘양성평등적’인 단어로 대체한 별도의 번역본 ‘투데이스 뉴 인터내셔널 버전(TNIV)’을 출간한 바 있다. TNIV에서는 ‘신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는 문구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God)’로, ‘형제들(brothers)’은 ‘형제 자매들(brothers and sisters)’로 바뀌었다.
그러나 보수파 신학자들은 성경 문구를 바꾸면 성경의 원뜻을 왜곡할 수 있다는 이유로 TNIV 출간을 강력히 비판해 왔다. 비블리카는 이를 의식, 이번 개정 작업에는 더 많은 신학자와 독자들을 참여시켜 개정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진행시킨다는 계획이다. 특히 보수파 성경학자들이 1965년 설립한 단체인 ‘성경번역위원회(CBT)’에 감수를 맡기기로 해, ‘신의 아들’이란 표현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NIV 성경은 1978년 처음 발간된 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3억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http://news.nate.com/view/20090903n01148--------------------------------------------------------------------------------
성경이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표현을 "양성평등"이라는 허울좋은 핑계 하에 성별을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꾸고자 하는 NIV 번역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저렇게 양성평등을 한다면서 "아들들"을 "아이들"로 바꾸다가 그 다음에는 man 을 person이나 human being으로 바꾸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차별을 없앤다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부르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으로 변개하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아마도 조만간 이단 안상홍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성경이나 찬송도 나오게 될 겁니다.
연합감리교단에서 만든 찬송가에는 이미 "어머니처럼 돌보시는 그리스도", "생명의 모태", "강한 어머니 하나님" 등과 같이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한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인연합감리교회 홈페이지에는 하나님의 어머니로서의 속성, 즉 하나님의 여성성을 인정하고 가르쳐야 한다는주장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남성과 여성에 대한 표현들을 왜곡, 변개시키는 배후에는 로마카톨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데, 예수님을 마리아가 낳았으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에는 "마리아 숭배"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그 로마카톨릭의 마리아숭배가 본래 고대 바빌론의 여신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이제 로마카톨릭은 NIV 성경번역자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여성성을 부각시키고,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 어머니"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여왕"(렘 7:18)을 섬겼던 것처럼,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자들을 미혹하여 그들이 만들어낸 "하늘의 여왕"을 섬기도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지, 어머니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언제나 대명사로는 he 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을 she로 표현한 예가 없습니다.
로마카톨릭의 사주를 받은 NIV 번역위원들을 중심으로 성경말씀을 변개하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진리의 말씀에 견고하게 서서 바른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2009-12-23 16:30:34 | 관리자
전 그 동안 즐겨찾기 주소를 자유게시판으로 연결해 놓아서 별 불편함을 몰랐는데, 외부에서 메인주소를 입력하면 시간이 지체되었던 게 그 때문이었군요. 이제는 확실히 접속 속도가 빨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2009-12-23 16:26:21 | 김문수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메인 페이지가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가운데 있던 "인기 순위 글"을 "나누고 싶은 글"로 바꾸었습니다.
이전에는 인기 순위를 매기기 위해 접속할 때마다 글들의 접속 건수를 세다 보니 접속이 늦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접속 시간이 많이 단축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12-23 15:43:13 | 관리자
신실한 한 형제님께서 좋은 글을 주셔서 킹제임스 성경 입문서에 넣었습니다.
이 글을 PDF 파일로 만들어 올립니다.
보시고 다른 분들에게 파일을 보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킹제임스 흠정역을 약 3년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름대로 흠정역 성경을 알리는 일에 힘쓰며 이 사역에 적게나마 합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이미 저와 같이 흠정역을 쓰시는 분들이겠지만, 흠정역이 무엇인지 찾아보다가 오시게 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이곳에는 흠정역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지만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 느낀 점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다음 글은 처음 흠정역을 쓰고 나서 정리한 것으로, 홍보를 위해 개인 홈페이지에 실었던 것을 최근에 추가, 수정한 것입니다. 이 사이트에 있는 내용들과 덜 중복되는 내용 위주로 올립니다. 예전의 저처럼 흠정역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사용을 고려중인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어, 목적어, 단수, 복수가 명확한 성경
킹 제임스 영어성경을 번역한 한글판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현재 국내에서는 두 세곳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미 많은 번역상의 실수를 드러낸 <한글 킹제임스>(말씀보존학회)는 공신력 면에서 믿을 수가 없고, 또 한 곳은 번역의 완성도 문제로 판매를 중지한 후 개정작업을 거치고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발행한 <킹제임스 흠정역>만이 믿을 수 있는 번역을 하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 바른 번역을 하고 있으면 합력해서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데, 굳이 자기의 이름을 건 자기식의 번역을 위해 많은 비용과 힘을 낭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이 성경을 보면 반복되는 소유격이나 주어 등을 있는 그대로 나오는 횟수만큼 다 번역하고 복수와 단수를 명확히 하며, 의미전달상 어쩔 수 없이 추가된 단어까지 구분해 놓고 있다. 또한 권위 있는 표현이나 기존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지만 어려운 말은 모두 쉬운 말로 교체했다. 그러나 기존 성경에 익은 독자들의 혼돈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고유명사와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적용했다. 우리가 쓰는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은 축약과 한자어가 많아 문장이 그리 길지는 않은데, 한글로 번역된 킹 제임스 흠정역은 축약된 부분을 복원시키고, 단어 대 단어로 모두 번역했기 때문에 개역개정판보다는 약간 길어진 듯한 느낌이다. 개역성경은 간결함의 장점 이전에 정확성을 먼저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오래전에 번역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간결함'이다. 그러나 어떤 장점도 명확함과 바꿀 수는 없다.
말을 줄이다 보니 한자가 등장하고. 많은 어려운 말들이 나온다. 어린 아이들은 뜻도 모르면서 무작정 외워 암송대회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외워 놓으면 다 도움이 되고 마음밭에 새겨지기도 하겠지만, 말씀은 그 외형을 아는 것보다 거기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우선 아닐까.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이 변개한 내용들
예수님이 마시지 않겠다던 것을 마셨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즙)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새롭게 마시는 그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복음서를 계속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해융(스펀지 같은 것)에 적신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나온다. 어떤 해설성경에서는 이것을 신 포도주와 계란과 물을 섞은 로마병정의 음료라고도 했고,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값싼 포도주'로도 번역하고 있는데, NIV에서는 wine vinegar, 즉 '포도 식초'나 '신 포도주'로 번역할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기고 돌아가시기 전에 포도주를 마셨다는 말씀인가? 이들은 단어를 추가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 KJV에 보면 이것을 그냥 '식초(vinegar)'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KJV 번역자들이 말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조율할 수도 없다. 변개되지 않는 본문에서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 오히려 왜곡을 위해 천주교 역본이 손질된 것이다.또 성경에는 예수님이 맛 보시고 거절하신 일종의 진통제인 '쓸개 탄 포도즙'도 나오는데, 이것도 '식초'로 같은 단어이다. 마가복음 15장 23절에서도 예수님은 몰약을 섞은 포도즙을 거절하신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제대로 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도 포도주를 드신 것이 아니라 포도즙을 드신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어디에도 '와인'을 드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려니와, 당시의 언어로 '와인'은 포도주와 포도즙에 동시에 쓰인 단어이므로 문맥을 분간해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유월절에 누룩이 든 술을 마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흠없이 완전한 희생양이 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 : 개역성경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원래는 '요한'이 아닌 '요나'의 아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고유명사가 틀린 것이므로 치명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아버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며 분노했던 것이다. 성경의 인물을 구분할 때 그의 아비를 자주 소개하는 것은 동명이인의 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보면 개역개정에서도 '바요나 시몬아'라고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요나의 '바'란 '아들'이라는 의미이므로 '요나의 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복음성가 중에 즐겨 부르곤 했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는 곡이 있는데 여태껏 잘못 불렀다니... 왜 이런 단순한 실수가 있는지 더더욱 개역성경을 신뢰하지 못하는 계기가 된다.
역자가 이해 못하는 단어의 변경 :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말도 나온다. 예컨대 유니콘이라든지 용(dragon, 공룡)에 대한 언급은, 유니콘이 전설의 동물이라는 잘못된 지식과 사람이 살던 시대에 공룡이 안 살았다는 진화론적 선입견을 바탕으로, 유니콘은 들소로, 용은 뱀이나 시랑 등으로 독자를 위해(?) 알아서 변경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더욱 모호하게 되고 진화론에 대해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동물에게 영이 있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으로 바꾸는 등 많은 부분에서 변개를 통한 의미의 왜곡을 가져왔다.
종교성과 미신주의의 차이 :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NIV 등의 영어성경이 religious로 쓰고 있기 때문에 '종교성'이 된 것 같다. KJV에서는 superstitious, 즉 '미신적'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전체를 번역하고 있다.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이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 실태를 알고 영이 격동했다고 나온다. 또한 위의 미신적이라는 책망 뒤에 이어지는 바울의 이야기를 보면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와 훈계가 계속 나오므로 더욱 확실한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도 일부 목사들은 이 말씀을 들어서, 사람들을 훈계할 때는 우선 그들을 칭찬해야 한다면서 바울의 말을 그들에게 종교심이 많아서 하나님도 잘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치켜 세우고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래서 번역은 작은 실수 때문에 큰 개념이나 교리의 오해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 같다.
뜻이 모호하고 어려운 단어와 고유명사들이 개정된 예
개역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그리스도 예수안에 刊)
성경위치
구스
에티오피아
창세기 2:13
들소 (오역)
유니콘
민수기 23:22 등
시랑과 타조
용들과 올빼미들
이사야 23:20
발등상
발받침
이사야 66:1
기묘자
놀라우신 이
이사야 9:6
모사
계획자
이사야 9:6
묘성
플레이아데스 별무리
욥기 38:31
삼성
오리온 별자리
욥기 38:31
룻(나라 이름)
루디아(Lydia :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Luth임)
에스겔 27:10
복술자
점쟁이
사무엘상 6:2
방백
통치자
에스더 1:21
감람
올리브
마태복음 24:3
분봉왕
사분(四分)영주
마태복음 14:1
참람한 말
신성모독하는 말
마태복음 26:65
쓰스
주피터
사도행전 14:12
허메
머큐리
사도행전 14:12
자주 장사
자주색 옷감 장수
사도행전 16:14
에비구레오
에피쿠루스 학파
사도행전 17:18
스도이고
스토아 학파
사도행전 17:18
아덴
아테네
사도행전 17:1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히브리서 5:10
진설병
보여 주는 빵
히브리서 9:2
양심에 화인 맞은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디모데전서 4:2
구리장색
구리 세공업자
디모데후서 4:14
무저갱
바닥없는 구덩이
요한계시록 9:1
황충
메뚜기
요한계시록 9:2
국어 표현상의 문제점을 보완
성경을 읽으면서 뜻을 여러번 생각하다가 결국 그냥 넘어간다든지, 다른 뜻으로 오해한다든지, 사전이나 쉬운 성경을 찾아본다든지 하는 일이 있는데, 킹제임스 흠정역을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씀과 거기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나와는 관계가 먼 옛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내용이 더 많이 이해되기 때문.한 예로, 다음의 베드로 전서 2장 13~15절 말씀을 보자.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 문장들의 의미를 단번에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음은 같은 부분의 흠정역이다.
13... 너희는 주를 위해 사람의 모든 규례에 복종하되 왕에게는 최고 권위자에게 하듯 하고14...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잘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해 그분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15... 그리함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가 잘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려 함이라.
좀 길긴 하지만 훨씬 쉽다. 아니, 이제야 말이 된다. 흠정역으로 읽으면 뜻이 이해가 되고 마음에 더 와닿기 때문에 신앙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모호한 표현이 모호한 개념을 낳고 모호한 개념이 어중띤 신앙자세와 미신적 신념 등을 가져오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잘못된 번역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져온다
읽기 어렵고 뜻이 변질된 성경을 고수할 것인가? 지금까지 그 성경을 보고도 성령님은 역사하셨고 한국교회는 부흥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들이 다 무효라는 말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헛일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역성경은 오랜 세월 보존된 성경의 권위를 잘 표현했고 또 간결하면서 복음도 담겨 있어서 한국교회의 발전과 신앙인들의 영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지 우리는 완전치 못한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실수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거대한 오류의 개념들과 신앙행태를 낳고 점점 커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개역 한글판 성경은 애초부터 천주교에서 쓰는 (공인 본문이 아닌) 이집트 본문을 기초로 한 미국표준역에서 번역되었고, NIV 등의 일반적 현대역본들을 참고하여 수정되어 왔다.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마치 박정희 시대에 발표된 김민기의 음반에 '아침이슬' 같은 중요한 곡들이 빠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항을 위한 노래로 만든 중요한 의미를 지닌 노래들이 빠진 김민기의 음반은 그 나름으로 역할이 있고 감동이 있다지만 그의 핵심사상은 빠져 있다. 평론가들은 그 음반이 난도질 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본이 들어있는 음반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말하려면 원래의 음반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본래 연극 대본이므로 독서용으로는 마땅치 않아 영국의 찰스 램 남매에 의해 소설로 재구성된 것들이다. 어떤 번역서는 아예 저자를 '램'이라고 명기한 세익스피어의 책들도 있을 정도로 완전히 재창조된 것이 셰익스피어의 소설이지만 원래는 모두 희곡들이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를 연구하려면 그의 희곡을 읽어야지, 재구성된 소설만을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개 가수의 음반과 작가의 책도 이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마땅한 일 아닌가.
우리는 또한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했다며 흥분한다. 그런 교과서는 많은 부분이 변조됐지만 아마도 성경이 변개된 양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또한 동북공정의 음모가 담긴 중국의 역사책은 어떤가. 그런데 이런 책들은 아무리 폐기하고 또 새롭게 바꾸는 노력이 있어도 어딘가에서 읽히고 있다. 독도가 일본땅이며 동해가 일본해라는 표기는 아무리 오류라고 목청껏 외쳐도 어딘가에서 변질되어 계속 책으로 발행되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고 있다.
그런 것처럼 변질된 성경도 계속 어딘가에서 영향을 미치며 그야말로 그들만의 진화를 거듭하여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은 많은 중대 오류와 자잘한 실수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흠정역에서 뜻이 올바로 전달되는 예
삼위일체에 관한 명확한 번역 : 디모데전서 2장 5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것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신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There is one God'을 잘못 번역한 것인데, "한 하나님이 계시느니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게 그 말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한 하나님'은 '(세 분이 모여)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마치 세 명이 모인 '한 가족'이 한 사람이 아니듯이 말이다. one을 1로만 받아들이면 이런 결과를 낳는다.
'영'에 관한 무속적 표현의 정정 : '하나님의 신' 또는 '여호와의 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등에서 쓰인 신(神 : god)이라는 용어도 '신내림' 등으로 쓰이듯 무속적인 개념의 번역이므로 적절치 않다. Spirit of God은 '하나님의 영'으로 해야 한다.
정확한 성별 표기로 오해를 없앰 : 성경에는 성별을 명확히 번역해 놓아야 신학적, 교리적 오해가 싹트지 않는다. 성경의 천사는 모두 남자로 man이다. 이것을 '사람'으로 번역하면 천주교와 뉴 에이지에서 말하는 아기천사와 여자천사 등을 모두 인정하게 된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 1절의 감독(목사)직의 요건에 대한 말씀에 나오는 man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 뒤에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뉴 에이지 역본들이 한 '아들'을 주셨다는 말씀을 한 '아이'로 바꾸기도 하는데 작은 차이 같으나 큰 변질이다.
천사의 소속 :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주의 천사'와 타락한 루시퍼의 명령을 따르는 '마귀의 천사'를 구분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흠정역은 원문 그대로 표기함으로써 읽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없앴다.
형통하게 하는 뇌물이 아니라 '선물' : 개역개정의 잠언에도 엉뚱한 번역이 많다. 그 일례로 잠언 17장 8절을 보면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뇌물을 이용하라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가르침이다. 동류라고 할 수 있는 NIV를 보면 분명히 bribe(뇌물, 미끼, 유혹물)을 쓰고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을 보면 "선물은 그것을 가진 자의 눈에 보석 같은즉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로 나온다.
영어 킹제임스도 bribe가 아닌 gift를 쓰고 있다. 이것은 NIV 번역자들의 특성인 자의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습관에 따라, 누군가에게 주어 일을 성사시키는 선물이므로 뇌물로 본 것이다. 개역개정은 이런 성경들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같은 과오를 저지른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준 선물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이는 반드시 대가성의 뇌물이 아닐 수 있다.
열두 '영'은 열두 '군단'이다 : 개역개정판에는 예수님이 순순히 잡히실 때 제자 중 하나가 분노하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경솔한 행동을 하자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장 53절)고 하셨다고 되어 있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인데, 내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인지 해설을 보기 전에는 '열두 영'의 영(營)이 그냥 영(靈)인 줄만 알았지, 로마 병영(兵營)의 군단 편제를 뜻하는 것인 줄 몰랐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니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말은 KJV에서 legion인데, '열두 군단'으로 번역해야 한다. 만일 나처럼 오해한다면 '열두 군단'과 '열두 영(靈)'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논할 때 큰 차이이다.
사탄의 말 바꾸기 수법, 흠정역으로만 알 수 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말 바꾸기를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지만 마귀는 '반드시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또 그것을 먹으면 눈이 열리고, ('하나님과 같이'가 아닌)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속였다.
그 열매를 먹고 싶은 인간 이브의 욕심은 사탄의 질문에 들은 대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죽을까 염려하노라'라고 했다고 말을 바꾸어 전한다. 왜곡과 변질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사탄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교묘히 성경을 이용했다. 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며 그는 시편 91편 11~12절을 써 먹는다. 개역개정으로 마태복음과 시편을 비교해 보자.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장 6절, 사탄이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 부분. 개역개정)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 91:11~12, 개역개정) 배열만 좀 다를뿐 같은 내용이다. 이번엔 흠정역으로 두 곳을 비교해 본다.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4장 6절, 사탄이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 부분. 흠정역)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편 91편 11~12절, 흠정역)
어디가 다른지 언더라인이 보이는가? 시편 91편을 살펴보면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의 날개 아래를 네 거처로 삼으면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만난 모든 길에서 피하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귀는 여기에 한 마디를 살짝 끼워 넣었다. 바로 시편에 없는 말 '언제라도(any time)'이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든지 말든지 모든 길에 천사가 '언제라도' 너를 보호한다고 교묘히 바꾼 것이다.
이 부분은 KJV에는 명확히 차이가 드러나 있지만 가장 많은 변개와 삭제를 한 NIV나 NASB 의 두 영어성경을 찾아 보면 이 차이가 없다. 시편의 말을 마귀가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옮기고 있다.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언자(?) 마귀'라니.....!!
인간의 논리 전개를 위해 다양한 역본을 참조?
현대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이 여러 가지의 변개된 성경을 인용하여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여러 성경의 번역들을 예시하면서 자신들의 설득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개탄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인데, 여기저기 다양하게 번역된 예를 들어 부연설명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역자 T의 책을 예로 들어 보자. T가 자기 메시지의 신빙성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역본들을 인용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왜냐하면 말씀은 한 가지이고 사실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목회자들도 이런 영향을 받아 한 구절로도 한 편의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한 정황을 상상해 내는데 이것은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다음은 T의 책에서 옮긴 내용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에피소드에 관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앰플리파이드 성경에서는 다윗이 돌을 도시락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씀한다! 다윗은 싸우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풍을 가는 중이었다. 골리앗은 "내가 네 도시락을 먹겠다"고 허풍을 떨었지만, 정작 그는 다윗의 도시락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몰랐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에 맡겼고, 기적이 일어났다(어떤 면에서, 다윗은 '록앤롤'의 선구자(?)였다. 그가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자 거인이 넘어져 굴렀기 때문이다).
이건 그가 인정한 대로 '특이한' 소설이다. 다윗은 도시락이 아닌 양치기의 자루에 물맷돌을 가져갔고, 골리앗은 다윗의 도시락을 본인이 먹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너(다윗)의 살을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주겠다!"고 했다. 또한 다윗은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간 것도, 소풍을 가는 마음 자세로 임한 것도 사실무근이다.
그는 왜 앰플리파이드 성경을 인용했을까? 이것은 의역성경이다. 말하자면, 벌써 노인이 됐을 다니엘이 사자굴에 빠진 이야기를 아이들용이라 해서 어이없이 꼬마 소년으로 삽화를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성경이야기'에 가깝다.
그가 조크로 덧붙인 '록앤롤'에 관한 이야기도 뜬금없다. '바위(물맷돌)'와 '구르다'라는 뜻의 Rock and roll을 말한 것인데, 20세기 중반에 디제이 알란 프리드에 의해 처음 사용된 이 말은 퇴폐적이고 강렬한 음악을 이르는 말로 남성의 성기와 차의 바퀴를 뜻하는 것으로, 카섹스를 의미하는 비속어라고 한다.
자신이 의도한 결론이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그것들을 주장과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골라 쓰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는 양심없는 과학자들이 잘 쓰는 수법으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에 합치되지 않는 결과들은 모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을 말씀에 비추어, 그리고 다른 성경적 정황이나 예표 등을 통해 유추해 내는 통찰력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소설적인 전개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T는 계속 써내려 간다. 예수님께서 배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내리셨을 때, 부정한 영 들린 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와 경배했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를 지배하고 있던 2천 마리의 마귀들은 그의 찬양(경배)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에 예수님을 본 적도 없었지만 '무언가가 그를 주님께로 끌어당겼고', '필사적으로 주님을 찾았으며', '필시 1마일은 달렸을 것'이라고 전혀 성경에 없는 말들을 써 놓았다. 이런 상상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책의 페이지를 늘이거나 1년 내내 해야 하는 설교 시간을 늘이기 위함일까?
그는 부정한 영 들린 광인(狂人)이 2천의 마귀들로 꽉 차 있었음에도 찬양할 수 있었고, 마귀들도 한 사람의 찬양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찬양의 힘은 위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광인이 와서 '경배하고 부르짖으며' 예수님께 자기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대화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마귀들의 대화로 보이며 2천의 더러운 영들이 굴복한 것은 광인의 찬양 때문이라기 보다 예수님의 나오라는 '명령'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 귀신들이 돼지 떼로 옮겨간 것도 예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전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그분의 권한과 능력을 간과하거나 축소해서는 안 된다.
물론 T를 포함한 유명한 사역자들의 가르침에는 훌륭한 부분도 있고 위대한 통찰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을 멋대로 부풀리거나 편리한 대로 추측하여 연결시키면 안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있지도 않은 수만 년 전(?)의 말 뼈다귀나 원시인의 진화 체계를 맞추기 위해 엉뚱한 시대의 것을 끼워 넣거나 원숭이뼈를 깎고 색칠까지 하는 일처럼 자칫 큰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다.아무리 위대한 사역자라도 말씀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 이 책에 국내의 인기있는 저명한 사역자들이 극찬의 추천사를 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밖에도 릭 워렌 등 많은 이들이 여러 역본을 인용하며 자기 논리를 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 하나로 이단 교리부터 모든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매우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을 다루는 일, 두려움으로 임해야
지금의 성경이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존 교단의 사람들이다. 더구나 더욱 개악된 새 성경을 기존 성경의 저작권 만료시점이 오기 전에 억지로 배포하여 의무 사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기득권층이었던 사제들처럼 이젠 교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바른 성경에 대한 자기 소신이 있다 해도 이제와서 바꿀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목사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이래서 나오는 것 같다. 교단 조직이란 곧 밥줄이며 하나님보다 무서운 것이 되었다.
바로 이런 때 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면 진리에서 떠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왜곡된 역사교과서로도 어느 정도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사실도 나와 있다. 그런데 그런 침략이 근대화에 도움을 주고 문호개방에 순기능을 했다는 주장이 황당한 것 아닌가. 지금의 성경도 모든 부분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성경은, 읽으면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듣는 통로가 돼야 한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철저히 말씀을 보존하고 전해오셨는지, 왜 그토록 작은 부분의 차이를 명확히 하라고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끝에는
"이 대언의 말씀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거기 기록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고, 빼면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 고 했다. 계시록뿐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지켜져야 하고 누구라도 마음대로 고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사탄을 본받는 짓이다.
결론적으로 기존 성경의 문제점은 약간의 물을 섞으면서 전체적으로 흐려지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소량의 독을 타 넣음으로써 습관적으로 마시는 동안은 모르지만 그 독, 즉 함정적인 메시지에 면역이 된다는 것이다.
글이 좀 길었죠? ^^
감사합니다.
2009-12-23 15:35:13 | 관리자
우 하하하 !!!!.... oooops... 오 호호호 !!!!
2009-12-23 14:29:30 | 정혜미
원본을 가져오다 보니 좀 보기 어렵습니다.
<런던타임즈 제10강> 아홉 번 째 글자 ‘복(福)’ 자를 보겠습니다.
備 (비) 也 (야) 。
‘福’은 무슨 뜻일까요? 복(福)은 '비야(備也)'라고 했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갖추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바로 '오복(五福)을 갖춘 것'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복' 자는 하나님이 나오고(示) 첫 번째(一) 만든 사람(口)이 나오고 에덴동산(田)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허신은 '부(富)' 자마저도 ‘복야(福也)’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자의 개념, 돈이 많은 줄 알았더니 돈이 많은 것이 참된 복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907년 전의 허신 선생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통해 참된 복은 부(富)요, 부(富)는 곧 복(福)이라 하였으니, 이 ‘부(富)’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집을 뜻하는 글자[宀]에 즉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통[丨]하셔서 천지를 덮으시고[冖] 창조하신 후에 한[一] 사람[口]을 에덴동산[田]에 두었다는 글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참된 부자는 재물의 많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쩌면 허신은 당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았는데 창세기 내용을 이렇게 한문으로 풀이하고 있었을까요?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허신은 고대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허신은 이렇게 한자 한 자 한 자에 대한 풀이를 해 나간 끝에 설문해자라는 보물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신화와 사실이 혼합된 상태라면 우리의 역사는 과연 그들의 것과 동일 내지는 유사한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단연 ‘김(金)씨’입니다. 그러나 김씨가 왜 김씨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김씨의 김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으로, 金을 자신들의 성(姓)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금을 숭배한 집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금관이나 금동관이 출토되는 곳이 옛 신라 지역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금을 자신들의 성씨로 삼은 집단은 특이하게도 신라의 지배층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원뿌리를 찾으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만주 북부에 존재했던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와 옛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바로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연의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祖王)을 주몽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시 말해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알에서 나온 아이이며, 이 난생의 아이가 여섯 부족 족장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된다는 특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대된 왕의 성은 박(朴)씨 입니다. 이것은 진한 12개국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의 군장이 박혁거세이며, 그가 진한연맹의 맹주에 오른 사실을 반영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사로국이 점차로 이웃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신라라는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신라는 진한연맹의 맹주이므로 신라인이 누구인지 알려면 먼저 진한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진(秦)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한(韓)나라로 오자 마한은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서로 부르기를 동무처럼 불렀으며,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진한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왔으므로 마한 사람들과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라인들은 고구려와 백제인들과는 다른 계통을 가진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호남과 영남 지역의 억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진은 중국 서북부의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로, 주변 환경이 농업에 부적합 하였기에 유목이 생업이었던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물론 이들이 경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토착 농경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과 진나라 출신의 유목민들이 뒤섞여 살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옛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의 임금을 소개할 때, 황(皇)과 제(帝), 왕(王)과 군(君)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임금은 같은 임금일지라도 서로 다른 격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과 군은 제후국의 수준이었고, 황과 제는 천하를 호령하는 거국적인 인물을 지칭했습니다. 제후 중에서도 영토가 제법 규모가 있고 문화를 잘 소유한 그런 제후는 왕이라고 칭하였고, 농토가 좁고 군사력이 약한 제후는 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시조인 단군을 군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방금 말씀드린 중국 임금 호칭의 격을 상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조상을 군(君)으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나 자문해볼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사학자 한분은 우리 스스로 단군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단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단군신화가 갖는 의미를 우리 2세들에게 전할 때 하나의 신화 정도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의 찬란한 고대 역사는 한낱 이야기 거리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기에서 서기로 바꿀 때 2333년을 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단군이 단 한사람이라면 어떻게 한사람이 2333년이나 살았다는 말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세종대왕 훈민정음 서문에 옛 전자 모양을 모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 훈민정음의 모양을 옛 고전(古篆)의 모양에서 본떴다 하는 대목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자(篆字)모양이 한자의 서체 중에 진시황제의 명을 받은 이사가 통일한 바로 그 전서체였다기 보다는 『환단고기1)』에 실린 가림토의 생김새는 한글 특히 훈민정음 창제 대 판본체의 한글과 비슷하기 때문에 ‘고전을 모방하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훈민정음은 가림토를 본 떠 만든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림토 문자2)는 단군 중에서도 세 번째 단군이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을 단제로 승격함과 동시에 단제 개념이 황제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개념으로 재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제가 있었고 2, 3세 황제가 있었듯이, 우리도 1대 단제가 있었고, 2, 3대 단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닌 엄연히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성경이 만든 한자와 우리의 건국신화를 결부 짓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한 영토 속에서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학문운동을 펼쳐 인내천 사상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내천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 인(人)자, 이에 내(乃)자, 하늘 천(天)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는 사상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처럼 지어졌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중국 일련의 고대사를 비교해 볼 때 동양의 문화는 둘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서 동양의 문화는 꽃피워졌을 것이고, 한자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에도 그들은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를 저는 ‘복 복(福)’ 자에서 다시 보거니와, ‘福’은 비(備)하다, 그리고 ‘현자지제야(賢者之祭也)’ 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진 사람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비(備)라고 하는 것은 ‘백순지명야(百順之名也)’라, 즉 ‘모든 순리대로 이루어진 것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복 복(福)’ 자는 단순히 로또복권에서 이루어지는 재물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루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는 말씀이 축약된 글자로 풀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示)께서 밭(田)을 주시되 한(一) 사람(口)을 창조하여 그에게 전권을 주셨다. 라는 복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시간에 ‘볼 시(示)’ 자는 ‘하나님 시(示’) 자요, ‘귀신 신(神)’ 자는 ‘하나님 신(神)’ 자로 바꿔 읽어야만 되는 까닭을 창세기의 말씀과 비교하면서 설명드렸습니다.
1) 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위 논란이 있으나, 남·북한 학계 모두 그 내용이 왜곡된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2)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는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기원전 22세기에 고조선에서 만들어졌다는 문자이다.《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에 따르면 3세 단군인 가륵 단군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는 가림토가 다른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편리한 문자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림토가 쓰였던 기록이 없고, 가림토가 씌여지거나 새겨진 유적 또한 없으며, 진위 논란이 있는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이유로 가림토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 1994년 12월 문화일보는 '잃어버린 고대문자' 가림토 문자 비석이 만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높이 2m, 너비 32cm의 탁본 한 점을 공개했다. 이는 사회학자였던 이상백(서울대학교)이 학생 시절이었던 1930년대에 만주 지역에서 직접 탁본한 것인데 정도화(진주 경상대학교)가 보관하다가 발표한 것이다.
성경이 만든 한자 제11강 <있을 재(在)>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박재성
<런던타임즈 제11강> 열 번 째 글자 ‘재(在)’ 자를 보겠습니다.
存 (존) 也 (야) 。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글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글자는 있을 재(在)자입니다. 이 있을 재(在)자의 전서체를 보면 와 같은데, 사람을 뜻하는 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하여 하와를 만들었으니 사람 인(人)자가 되었다고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 글자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땅 위에 두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허신은 ‘있을 재(在)’ 자는 ‘존야(存也)’라고 하였습니다. 있다는 뜻입니다. ‘있을 존(存)’ 자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子)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정확합니다. 오죽하면 단옥재도 이 在와 存자의 본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이 부분을 다음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을까요? ‘금인(今人) 어재존자(於在存字) 개부득기본의(皆不得其本義)’라. 이것을 풀이해보면 ‘지금 사람이,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그 본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본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자는 창세기 2장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는 ‘휼문야(恤問也)’ 라고 하였습니다. ‘恤’자는 불쌍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구휼할 휼(恤) 자이고, ‘問’ 자는 ‘물을 문(問)’ 자입니다. 또는 ‘찾을 문(問)’ 자입니다. 방문하다 할 때는 찾을 문(問) 자로 쓰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 물었습니다. 허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있을 재(在)’나 ‘있을 존(存)’은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놀라운 창세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청나라 중기의 고문학자인 단옥재도 허신으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이제야 그 원뜻을 찾아내어서 밝힌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재(在)와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다 그 본뜻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어서 에덴동산에 있게 한 사실을 이 있을 재(在) 자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잊은 채 한자를 전수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잃어버린 한자를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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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3:23:45 | 허광무
개역의 번역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마음의 상태"나 사람들이 평화롭게 화합하며 사는 살기좋은 세상 정도로 생각하고,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은 "왕국회관"을 만들고 자기들이 "왕국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9-12-22 12:40:50 | 김문수
한국 성경은 번역이 잘못되어 처음부터 성도들을 무지와 흑암으로 이끕니다. 천국과 하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 등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할 텐데....
2009-12-22 11:57:54 | 관리자
죄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께 대한 회개, 심판, 고난, 십자가 대신에 신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와 신념의 힘, 말의 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을 통해서 만사형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세태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고 부릅니다"라고 그 목사님께서 쓰셨는데, 말씀하시는 취지는 저도 이해를 합니다만, 이 부분은 말씀에 견고하지 못한 성도들이 읽으면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게 종말론 중에서 "우리끼리 서로 헌신하며 평화롭게 모범적으로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놓으면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잘못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성경은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했습니다. 왕국은 왕이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지,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람들이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면서 서로 사이좋게 돕고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서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 다들 혼동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2009-12-22 11:07:32 | 김문수
음성화일이 실행이 되지를 않습니다.
2009-12-22 10:42:55 | 허광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와 “회개” 와 “고난” 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 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인의 은혜의 장중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올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 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을 드려 강청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을까요?
남가주 서머나교회 담임 김성수목사 책 뒷면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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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0:38:17 | 허광무
어제 머리를 정리하러 남성미용실에 갔다가 마침 이 기사를 읽었습니다.
동국대 강연 이후로 이분에 관한 웬만한 이야기는 그리 놀랍지도 않습니다만...
이 양반이 돌아가시거나 완전히 물러나면 온갖 탈세와 비리가 쏟아질 것을 대비해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것이 구체화되어 무언가 조직화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2009-12-22 10:14:37 | 김재욱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 강연에서 한 말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천당이 이루어져야지 죽고난 다음에 천당을 바라지 마라."
=> 이 사람은 문자 그대로 실존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믿지 않고, 불교의 유심정토 사상을 믿습니다.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대중불교로써 모든 서민들이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죠."
=> 종교와의 대화? 이 사람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불신자입니다. 만약 나무아미타불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셔야 했을까요?
조용기 목사 동국대 강연내용 전문
http://www.aspire7.net/reference/cho.htm
2009-12-21 20:31:08 | 김문수
모두 가만히 있는 이유는 다 한 통속이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네요.
아니면 모두가 정신이 나갔거나..
온누리교회 신봉자인 저의 형님도 조용기 목사의 실태를 말하려 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훌륭하신 목사님이라며.. 오히려 저의 믿음을 의심하죠.
얼마전에 '오순절 은사주의 바로알기'란 책을 선물했지만 별로 반가워하지 않더군요.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말해도 절대 들으려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세상과 다를게 없는 세상의 타락한 교회를 보며 주님이 오실때가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기도 합니다.
특히 대형교회의 교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온갖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현혹하여 그들의 눈을 멀게하니 안타까울뿐입니다
소경목사가 소경들을 인도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2009-12-21 20:27:52 | 김상희
다른 종교와도 다른 점 인정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이게 조용기 목사의 인터뷰 기사의 소제목입니다.
이런 사람이 목사라고 하며 사람을 우롱하는데 왜 모두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교회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종교와 대화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른 점을 인정하고 대화는 할 수 있어야지요. '기독교 아니니까 마귀'라고 해선 안 됩니다."
이게 과연 정신 있는 목사의 말일까요?
사도 바울이 타종교하고 대화하자고 했을까요?
성경은 이런 사람을 사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건이 무르 익으니까 마귀의 사자들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사가 코미디언 노릇을 하면서 돈을 긁어 모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장 아무개 목사처럼 코미디를 했을까요?
한국 교회를 망쳐 놓은 대표적인 목사들 가운데 하나가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의 샤머니즘으로 인해 적어도 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혼동 속에서 지내고 있고
그에게 베뢰아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사들이 양태론 같은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며
그의 이단 사상을 파급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데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진리가 와도 마귀의 가르침이 가로막아 거절합니다.
경배와 찬양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용산의 하용조 목사도 문제 덩어리입니다.
교회는 음악이 무너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록 음악과 댄스 부대가 동원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끝장이 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신약 교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목사들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에게 혼을 빼앗깁니다.
정신 차리고 삽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0/2009122000700.html?srchCol=news&srchUrl=news3
조용기 목사 동국대 강연내용 전문 http://www.aspire7.net/reference/cho.ht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21 19:56:2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