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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 “하나님의 계시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원하고도 절대무오한 기록을 필요로 하며 영감이야말로 이 같은 필요를 만족시킨다”(맥큔).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이 구절에서 ‘모든’(All)은 라틴어로 ‘플레너리’(plenary)이며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등을 의미한다(잠30:5; 롬15:4 비교). 따라서 성경의 경우 창세기 1장 1절부터 계시록 22장 21절까지 전체를 뜻한다. 한편 ‘성경 기록’은 ‘기록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그라페’(graphe)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기록된 말씀(단어)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 주신’ 영감(verbal inspiration) 곧 축자 영감을 확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감의 목적이 성경 기록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영감의 대상은 기록된 말씀이며 결코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4:4; 출24:3-4; 사30:8 등은 성경의 모든 단어(each word)가 축자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을 뜻하며 위클리프와 틴데일은 이를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것’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단어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요, 그분께서 주신대로 기록된 것이다.”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성경 기록자는 결코 하나님이 쓰라고 주시는 개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자기 말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 안의 모든 단어를 선정해 주시는 대로 기록하였다. 한편 벧후1:20-21은 성경의 대언이 결코 사람에 의해서나 사람의 뜻에 의해 나오지 않고 성령께서 그들 위에 움직이심으로써 생겼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이 일을 시작하신 저자로서 성경의 원천이시다. 따라서 성령님은 성경 기록을 위해 능동적 역할을 하셨고 대언자들은 피동적 역할을 했다. 끝으로 영감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1) 영감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2) 영감은 하나님의 의사소통 수단이다. (3)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감이란 자필원본에만 적용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숨을 쉬며 불어내심에 따라 대언자나 사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원래의 그 말씀들을 기록하였다. 성경, 계시, 보존 참조.    
2009-07-19 02:57:12 | 관리자
  초대 교회의 몇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부여하신 기적적인 선물(고전12:10). 그들은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참된 품성을 판단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리를 선포했다(요일4:1; 요이7; 비교 행5:1-10; 13:6-12). 선물 참조.    
2009-07-19 02:56:23 | 관리자
  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용례로 사용되었다.   I. 성령님. 삼위일체의 한 인격체인 성령님은 대언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선한 사람을 움직이며 성도들의 마음에 기름 부음을 주고 생명을 주신다. 성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복을 받는다. ‘거룩하다’는 holy와 영(spirit)이 붙으면 대개 성령님으로 이해해야 하며 holy가 없더라도 Spirit처럼 대문자 S가 쓰이면 성령님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님 참조. II. 숨. 이것은 사람과 짐승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호흡을 가리키며 하나님은 숨을 주시고 생명을 취하실 때에 호흡을 가져가신다 (전3:21). III. 사람을 구성하는 세 요소인 몸과 혼과 영의 한 부분. 사람의 세 가지 본질 선도 참조(61). 이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기관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판단하는 기관이다. 모든 사람은 영을 갖고 태어나지만 구원받기 전에는 영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엡2:1). 사람 참조. 벧전3:19의 ‘감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 살면서 노아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죄인들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노아라는 선포자를 통해 그들이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셨다(벧후2:5).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에 가서 직접 선포하지 않고 바울을 통하여 하였으나 그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고 기록하는 엡2:17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IV. 천사(히1:14; 마10:1). 사두개인들은 천사나 영을 다 부인하였다(행23:8). V. 기질, 성품. 질투의 영, 음행의 영, 기도의 영, 병약하게 하는 영, 지혜와 명철의 영, 주를 두려워하는 영(호4:12; 슥12:10; 눅13:11; 사11:2). VI. 거듭난 신자들의 새로운 본성. 이런 차원의 영은 육신 혹은 육 혹은 육체와 반대가 된다(요3:6).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된 사람은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롬8:15) 육신과 함께 그것의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5:24). 영을 분별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는가 마귀에게 속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며 이로써 진리와 오류를 판단한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초기에 영을 분별하는 선물(은사)이 있음을 보여 주었고(고전12:10) 또한 사도들이 보여 준 사도의 권능에 따라 참 사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라고 하였다(고후12:12). ‘성령을 억누르는 것’(살전5:19)은 불처럼 일하시려는 성령님에게 물을 끼얹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곧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죄와 무지와 욕심 등으로 인해 성령님의 소욕을 방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성령님의 감동과 그분의 은혜를 가로막음으로 혹은 미적지근한 삶을 통해 그분의 선물(은사)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함으로 그분을 슬프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덕을 행하고 그분의 감동에 따라 바르게 행하며 감사하고 봉사함으로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성경은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한다.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전3:21) 이 구절의 영은 영이나 바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으로 여기서는 사람 및 짐승과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전3:19에 있듯이 사람이나 짐승이 다 숨을 가졌고 영을 가졌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노아의 대홍수 때에도 사람과 짐승 등 코에 생명의 숨을 가진 육체만 죽임을 당했다(창2:7; 6:17; 7:15; 7:22). 한편 하나님께서는 짐승도 영을 가졌으므로 특별히 허락을 받으면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민22에서 단 한 번 나귀가 말하는 기사를 영감으로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을 가진 나귀는 곧바로 천사를 알아보고 말을 하게 되었다. 한편 짐승의 영은 죽어서 소멸되므로 짐승은 영을 가졌으나 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상관없다.    
2009-07-19 02:55:54 | 관리자
  유대인들은 양과 함께 염소도 많이 길렀는데(창27:9; 삼상25:2; 대하17:11) 염소는 희생 예물로 바칠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이었고(출12:5; 레3:12; 민15:27) 염소젖과 새끼는 좋은 음식물이었다(신14:4; 삿6:19; 잠27:27; 눅15:29). 또한 염소는 가죽부대를 만드는 데 흔히 사용되었다. 이교도들은 긴 뿔이 달린 염소를 루시퍼의 상징으로 보고 경배 대상으로 삼았다. 염소는 떼를 지어 살았고 그래서 영어의 flock은 많은 경우 양과 염소 떼를 의미하였다(출12:5; 레3:6; 5:6). 속죄와 속죄 염소 참조. 모세는 염소 털을 성막의 커튼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출25:4; 26:7; 35:6).    
2009-07-19 02:54:33 | 관리자
  열쇠로 문을 여닫으므로 이것은 종종 권능과 권세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엘리아김에게 주어진 다윗의 열쇠를 언급한다(사 22:22). 이런 열쇠를 지닌 자는 왕실을 다스리며 왕을 위해 섬길 자를 선택하는 권한 등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다윗의 집을 다스리는 그리스도 역시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3:7). ‘지식의 열쇠’는 율법사들이 독점한 영적 지식인데 그들은 이런 것으로 천국 문을 열고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눅11:52).    
2009-07-19 02:54:06 | 관리자
  열을 동반하는 여러 종류의 병. 모세는 반역하는 이스라엘에게 열병의 고통이 있을 것을 말하였다(레26:16).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어 즉시 낫게 하셨다(눅4:38-39).    
2009-07-19 02:53:41 | 관리자
  첫 사람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다. 열매는 태의 열매(창30:2; 신7:13), 허리의 열매(행2:30), 네 몸의 열매(시132:11; 미6:7) 등의 표현에서처럼 종종 사람의 후손, 자식 등을 뜻한다(시21:10). “그들이 자기 길의 열매를 먹는다.”(잠1:31; 사3:10; 렘6:19)는 말은 결과를 체험한다는 말이다. 자랑은 거만한 마음의 열매이다(사10:12).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이 생산하는 은혜로운 결과물이다(갈5:22-23).    
2009-07-19 02:53:16 | 관리자
  고대 사해 지역에 존재한 아스팔트 같은 물질(창6:14; 11:3; 14:10; 출2:3). 원래 Pitch는 천연으로 나는 탄화수소 화합물. 고체의 아스팔트, 액체의 석유, 기체의 천연가스 따위로 길에 깔거나 물이 새지 않게 하거나 썩지 않게 하는 데에 쓰인다. 이것은 바빌론 근처에서도 많이 나며 연료로 사용되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방주에는 이것이 방수 작용을 하였고 바벨탑의 경우에는 시멘트 역할을 하였다. 보통 이것은 단단한 고체 상태로 있지만 불을 가하면 녹아서 모르타르가 되고 굳으면 단단한 바위처럼 된다. 지금도 사해 근방에서는 이것이 발견되고 있다.    
2009-07-19 02:51:50 | 관리자
  페스트 등과 같이 집단적으로 생기는 악성 돌림병. 히브리말로 역병은 온갖 질병을 가리키며 이 말은 또한 plague로도 번역되었다. 대언자들은 칼과 역병과 기근을 세 가지 주요 재앙으로 말하였으며 그것들은 대개 동시에 발생하였다(출9:15; 11:1; 왕상8:37 참조).    
2009-07-19 02:51:25 | 관리자
  이것은 누군가가 히브리어 구약 본문이나 그리스어 신약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의미한다.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들이 있었다. 성경은 아주 오래 전에 고딕, 페르시아, 콥틱(이디오피아) 언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역본’은 사실 ‘성경 기록’(Scripture)을 ‘옮긴 것’(Translation)이며 현재 우리가 역본을 지칭하여 사용하는 ‘Version’이란 단어는 원래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다시 내는 것’을 의미한다. 개역표준역(RSV)과 미국표준역(ASV) 등은 킹제임스 성경을 개정한 영어 역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ASV와 RSV는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다수 사본’이 아닌 다른 종류의 ‘소수 사본’으로부터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7-19 02:50:59 | 관리자
  구약성경에 있는 두 개의 역사서. 이 책들의 기록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성경의 처음 나오는 책들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공공 연대기 등을 사용하여 이것들을 기록하였다(대하9:29; 16:11; 20:32). 역대기상은 창조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역대기하는 솔로몬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다 왕들의 역사와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까지를 기록한다. 다만 여기에는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바로 이것이 열왕기상하와 다른 점이다. 한편 같은 왕에 대한 역사 기록들은 열왕기상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이 두 책은 주로 공적 예배에 대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성전을 짓기 위해 다윗이 예비한 것들과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한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또한 다른 왕들의 종교적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다(대상13:8-11; 대하11:13; 19:8-11; 26:16-19 등). 역대기는 사무엘기와 열왕기와 함께 읽는 것이 좋은데 이 책들은 한결같이 바른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성쇠의 주요 원인임을 강조해서 보여 준다(잠14:34). 역대기는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왕국과 관련해서 관심 있게 읽을 필요가 있다. 성경의 연대, 왕들의 연대 선도 참조(1-3, 5-6).    
2009-07-19 02:50:29 | 관리자
  여호야김 왕의 치리자들이 예레미야가 쓴 두루마리를 가져오도록 바룩에게 보낸 사자. 후에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것을 들은 왕은 펜 칼로 그것을 찢고 화로에 던져 태워 버렸다(렘36:14, 21, 23).    
2009-07-19 02:50:02 | 관리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치려 했던 장소를 가리키는 말(창22:14). 그는 창22:8에 있는 이삭의 질문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물을 예비하신다는 의미의 이런 이름을 그곳에 붙여 준 것 같다.    
2009-07-19 02:49:29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이 감히 발음하지 못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 이 이름의 앞에는 결코 관사가 쓰이지 않았고 이것은 또한 복수의 형태로 쓰이지 않았다. 마소라들에 의하면 여호와를 뜻하는 4자음 문자 즉 YHWH는 여호와로 발음된다. 마소라 참조. 이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며 따라서 이 이름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불멸하고 무한한 존재를 가리킨다(출3:14; 6:3). 하나님 참조.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나를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출6:3)는 말씀은 비록 그분께서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지셨으나(창4:26)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런 특별한 방식으로는 혹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주는 방식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고 말씀하셨다. 이 명령을 매우 두렵게 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서 그분의 이름 YHWH를 대할 때마다 눈으로 이름을 확인하고 정작 읽을 때는 주(主)를 의미하는 아도나이로 읽었다. 그러므로 이런 전통을 따라 전 세계의 대부분 성경이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고 있다. 다만 기존의 우리말 성경은 주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그대로 음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려 6,400회 이상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취하게 해 놓았고 그 결과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종종 아무 의미 없이 헛되이 취해지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기 원하는 것은 성경의 용례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主)라고 하셨음을 보여 주신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냐?(마22:44). 이 구절은 다윗이 기록한 시110:1을 마태가 인용한 것이며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 중요한 구절로서 우리 주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말로 신약성경을 주시면서 구약성경의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라고 이런 용례를 남기셨다. 왜냐하면 성도 마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분명히 주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성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롬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그가 언급한 주는 분명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구약의 대언자 요엘이 기록한 말씀과 같다(욜2:32). 이를 통해 바울 사도는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약의 주 하나님임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2009-07-19 02:47:2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