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정동수 목사님!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님의 계시록 강해를 듣다 kjv를 알게 되어 만 3년동안 목사님의 여러가지 강해와 설교를 들으면서 공부할 수록 참 기쁨과 놀라움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성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나라에 목사님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저만 이라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kjv를 공부해서 본 교회에서 친 형님같이 지내는 장로 내외, 안수집사 내외와 교제를 통해 kjv를 보면서 함께해주고 있습니다. kjv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확신 들고 가슴이 뜨거워져 장로님이 당회(당회원 목사포함5명)에서 의제를 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려 하는데 그 시기는 아직 모르겠지만 기도하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치 믿음의 선조들이 바른 말씀을 먼저 알아 우리들에게 모든 고난을 통해서 알려 주었 듯이 저희들도 기존의 틀에서 가슴 떨리고 어렵고 힘든일이 되겠지만 믿음의 선조들의 뒤를 따라 가려 하고 그 총대를 장로님이 메려하며 저 또한 끝까지 함께 할것입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목사님의 강해를 듣던중 바른성경과 바른사본을 찾아서 (이황로 목사 번역)의 정성구 박사님 추천서 애기가 나와서 그 자료가 참 유용하겠다 싶어서 책을 구입하려 했으나 구입 할수가 없어서요.
바른성경과 바른사본을 찾아서 (이황로 목사 번역)의 정성구 박사님이 쓰신 추천서를
제 메일 yesk1107@hanmail.net로 보내 주시면 잘 사용하겠습니다.
저희 교회(합동에서 독립교단으로 변경)를 공개적으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한점을 양해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논의의 방법 시기등 앞으로도 많은 도움과 관심 배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6-04-23 16:28:17 | 김동현
2016년 4월 17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iMbZ70ppv5M
2016-04-22 10:10:46 | 관리자
2016년 4월 17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rqMvCFKP-U0
2016-04-22 10:09:48 | 관리자
안녕하세요?
1921년 11월 19일에 태어난 럭크맨 박사님은 향년 94세로 2016년 4월 2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지금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Ruckman
저는 22년 전쯤에 럭크맨 박사님을 개인적으로 한번 만난 적이 있으며 그분의 소중한 책들을 통해 지금도 거의 매주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 정확하고 방대한 성경 사본학 지식, 주옥같은 강해, 목사의 직무 등의 많은 부분을 저는 럭크맨 박사님으로부터 책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1980년대 이후 NIV 등의 현대 역본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올 때 박사님은 여러 명의 걸출한 KJB 옹호자들과 함께 꿋꿋이 서서 장수의 큰 칼로 이들을 모조리 물리치셨습니다.
생전에 박사님께서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영감과 보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신 것 대단히 감사합니다. 곧 천국에서 같이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뒤 다윗이 지은 애가의 시를 바칩니다.
사무엘기하 1장 17-27절 17 다윗이 이 애가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위해 애곡하고 18 (또 그들에게 명하여 활 다루는 법을 유다 자손에게 가르치게 하였으니, 보라, 그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19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 너의 높은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어찌 강력한 자들이 쓰러졌는가! 20 그것을 가드에서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서 알리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기뻐하거나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하노라. 21 너희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헌물을 낼 밭도 없을지어다. 마치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거기서 강력한 자의 방패 곧 그의 방패가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도다. 22 죽은 자의 피로부터 강력한 자의 기름으로부터 요나단의 활이 뒤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빈 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살아 있을 때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더니 그들이 죽을 때에도 나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이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너희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위하여 울지어다. 그가 주홍색 옷으로, 다른 즐거움으로 너희에게 옷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달아 주었도다. 25 어찌 강력한 자들이 싸움터의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오 요나단이여, 네가 너의 높은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제 요나단이여, 내가 너로 인하여 괴로워하노라. 네가 내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네가 나를 사랑함이 놀라워서 여인들의 사랑을 능가하였도다. 27 어찌 강력한 자들이 쓰러졌으며 전쟁 무기가 멸망하였는가!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과 위로가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6-04-22 10:01:41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이 2개를 시청하고 치열한 영적 싸움터에서 생존하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영어 성경 역사_01https://youtu.be/rqMvCFKP-U0
킹제임스 성경과 영어 성경 역사_02https://youtu.be/iMbZ70ppv5M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벧전5:8-9). 이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아 우리를 속박하려고 몰래 들어왔으나 우리가 그들에게 단 한 시간도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갈2:4-5).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깨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행20:29-32). 샬롬
패스터
2016-04-21 13:54:5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최근에 ‘단어 대 단어’, 즉 ‘word for word’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형식적 일치(formal equivalence)를 의미할 때도 있고 기계적 일치를 의미할 때도 있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또한 성경 원어를 번역할 때 그것을 모두 기계적으로 일치시키면 졸역이나 오역이 된다는 것도 아랫글을 통해 보여 드렸습니다.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즉 일대일 번역의 의미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manus&write_id=52
1. 단어 대 반어 번역의 의미 재확인
이와 관련해서 어떤 분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God forbid’라는 말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해서 잠시 글을 씁니다.
‘God forbid’는 킹제임스 성경에 구약에 9번, 신약에 16번 나옵니다.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구약은 스트롱 번호 2486, 신약은 3361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예를 보겠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안에서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어야 하리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이다. 그가 이 날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나이다, 하여 백성이 이렇게 요나단을 구출하였으므로 그가 죽지 아니하니라(삼상14:45).
And the people said unto Saul, Shall Jonathan die, who hath wrought this great salvation in Israel? God forbid: [as] the LORD liveth, there shall not one hair of his head fall to the ground; for he hath wrought with God this day. So the people rescued Jonathan, that he died not.
여기서 ‘God forbi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2486 hl;ylij; chaliylah {khaw-lee'-law} or chalilah {khaw-lee'-law}또는 chalilah, 하리라; 2490에서 유래한 지시형; 문자적으로‘신성을 더럽히는’것에 관하여 ;(감탄사)‘결단코 아니다!’로 사용 :- 멀리하다, 결코 아니다
일단 이것은 히브리어로 한 단어인데 영어에서는 두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흠정역은 세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이것은 개역 등도 마찬가지임).
이를 통해 보듯이 형식적 일치란 히브리어/그리스어가 한 단어이면 수용 언어가 꼭 한 단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원어 한 단어를 반드시 수용 언어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을 일대일 대응 번역, 즉 단어 대 단어 번역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번역의 기초조차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물론 대명사, 수동/능동태, 시제 등은 동일하게 번역되어야지요.
신약으로 가서 로마서 6장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the law, but under grace? God forbid.
여기서 ‘God forbid’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1. 3361 mhv me {may}제한된 부정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반면에 3756은 절대적인 부정을 나타낸다);(부사)‘아니’,(접속사)~않도록, 또한(부정적 대답【반면에 3756은 확실한 것을 기피한다】을 함축하는 의문사로서)‘~인지 아닌지’, 어느, 그러나, 참다, 하나님이 금하다, 결핍하다, ~입다, ~도 아니다, ~없이, 종종 본질적으로 같은 관계에서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3362, 3363, 3364, 3372, 3373, 3375, 3378을 보라. <마1:19;막4:5;눅18:1;요15:2>불. no, not;
2. 1096 givnomai ginomai {ghin'-om-ahee}기본동사의 연장형과 중간태;(‘발생하게’)‘되는 원인이 되다’, 즉 (재귀형)‘되다’(‘되기 시작하다’),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강조의미로) 아래와 같이 폭넓게 사용됨;일어나다, 모이다, 되다, ~에 일어나다, 스스로 행하다, (지나가기 위해)가져오다, (지나가기 위해)오게 되다, 계속하다, 나뉘다, 되었다, 끌어내다, 끝맺게 되다, 떨어지다, 끝내다, 따르다, 발견되다, 이루어지다, 하나님이 금하시다, 자라다, 일어나다, 가지다, 지키다, 만들다, 결혼하다, 되도록 정해지다, 착수하다, 지나다, 수행되다, 출판되다, 요구하다, 보이다, 취해지다, 변화하다, 사용하다, ~이 되다,~일 것이다, ~할 작정이다, 쓰여졌다 <마5:45;눅1:8;롬3:19>동. to cause to come being into;
이 두 단어를 영어는 두 단어로, 흠정역과 개역 등은 네 단어와 세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말이 바뀌면 형식적인 요소는 유지되어도 단어의 수까지 같게 할 수는 없음을 보게 됩니다.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것은 옮긴 단어의 개수가 다르니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방식의 번역이 아닐까요? 아니지요. 당연히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의 번역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원어의 뜻 그대로 형식적 일치를 이루었으니까요. 그러나 기계적으로 단어 수를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탁월한 번역, 훌륭한 번역을 지향하는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졸역을 지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희한한 번역(?)으로 잠시 우리에게 실소(失笑)를 선사하는 구글 번역기 정도나 할 일이지 지혜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를 설명하니 또 다른 분이 이렇게 묻습니다.
“영어에는 ‘God’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원어에는 없지 않습니까? ‘God’은 어디에서 왔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맞습니다. God은 성경 원어에는 원래 없습니다. 그러면 왜 들어갔을까요?
일단 ‘God forbid’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금하시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즉 영어에서는 ‘God forbid’라는 표현이 가장 강하게 금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결단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의미가 최고의 강도로 표현됩니다.
흠정역 역시 이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처럼 단순히 “그럴 수 없느니라”로 하면 ‘결코’가 빠지므로(스트롱 3361) 번역한 문장의 힘이 쭉 빠져 본래의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롬6:16를 다른 영어 성경들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KJB: God forbidNKJV: Certainly notNASB: May it never beNIV: By no meansAMP Bible: Certainly notASV: God forbid
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표현은 KJV와 ASV의 God forbid입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우리말 흠정역은 우리말로 가장 강력하게 원어와 영어를 표현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에 대해 “왜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어에서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지만 우리말에는 그런 용례가 없습니다. 번역 시 번역자는 자기 말을 잘 알고 자국민들의 정서에 가장 부합되게 번역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그렇게 했고, 우리말 흠정역도 그렇게 했습니다.
2. 현대 사본학자(서기관들)들을 조심하라.
킹제임스 성경이 기계적 일치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현대 사본학자가 바로 메츠거(메쯔거)입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였고 마르티니, 알란드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위해 일한 사람입니다.
예수회 출신 카톨릭 추기경과 UBS(연합성서공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614
메츠거가 사용하는 유명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rejoicing과 boasting입니다. 그는 이 두 단어가 동일한 그리스어에서 나왔으므로 기계적으로 동일하게 boasting 혹은 pride로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곳에 있지만 현상이 동일하므로 일단 고전15:31, 고후2:12를 보겠습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boasting)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흠정역: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rejoicing)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boasting or pride)이라(고후2:12)
흠정역: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rejoicing)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
자, 원어를 보지 않아도 양식 있는 독자라면 바울이 이런 데서 자신을 자랑하고자 했는지,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자 했는지 금세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어에는 두 뜻이 다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 가운데 앞뒤 문맥상 이런 부분은 자랑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기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연이어 나오는 고후1:14를 보시면 명확해질 것입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흠정역: [주] 예수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 같이 우리도 너희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야지 자랑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히3:6을 보기 바랍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흠정역: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분의 집이니라.
과연 우리가 끝까지 붙잡을 것이 ‘자랑’일까요?
이 둘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스트롱 번호가 2745나 2746입니다.
스트롱 번호 2745를 가진 고전5:6; 9:15-16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흠정역: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5:6)
흠정역: 그러나 내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또 내게 이같이 해 달라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죽는 것이 누가 나의 자랑하는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보다 나으리라.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5-16)
이런 데는 당연히 자랑하는 것을 표현하므로 흠정역도 자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개역, NIV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흠정역은 앞뒤 문맥을 신실하게 살피고 같은 단어를 기쁨 혹은 자랑으로 바르게 나누어 번역하였고 다른 역본들은 기계적으로 다 자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른 역본들은 바울과 성도들을 자기 자랑만 일삼는 교만한 자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역본을 쓰는 성도들은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또 다른 구절에서는 자랑하라고 되어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데 모든 단어를 기계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은 번역을 망치고 심지어 성도의 생활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 영광인가,칭찬인가?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님 당시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다르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흠정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되 바리새인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praise)을 [하나님]의 칭찬(praise)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요12:42-43).
이들은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칭찬받는 것보다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를 달리 표현하였습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glory)을 하나님의 영광(glory)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현상이 생깁니다.
칭찬과 영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스트롱 번호 1391입니다.
1391 dovxa doxa {dox'-ah}1380의 어간에서 유래;(매우 ‘분명한’)폭넓은 적용으로(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목적어 혹은 주어)‘거룩’, 위엄, 거룩(한) 영예, 찬양, 경배 <롬1:23;고후6:8>여명. radiance, glory;
번역자들은 ‘칭찬’과 ‘영광’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앞뒤 문맥상 어느 것이 적합할까요? 당연히 ‘칭찬’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수천 군데나 나옵니다.
2-3개의 뜻 가운데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교리가 변하고 마음가짐과 태도가 변합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04 십일조를 3일 만에 드릴까요, 3년 만에 드릴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4>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7
4. 결론
1. 부디 여러분과 가족의 영적 안위를 위하여 번역을 해 보지 않은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원어 사전으로 세뇌된 채 망상 속에서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2. 특히 누가 메츠거, 알란드 등을 언급하거나 혹은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등을 인용하면서 이런 종류의 험담을 옮기거든 이 글을 보여 주고 속히 그들 쳐놓은 영적 올무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깨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행20:29-32).
3.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완전한 성경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100% 정확하고 순수하게 들어 있습니다. 읽고 비교하고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4.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원어와 영어를 몰라도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원어를 과도하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이유(원어 소프트웨어)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영어를 못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요?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7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6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7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2016-04-21 13:26:17 | 관리자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즉 일대일 번역의 의미‘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오늘 한 분이 전도서 3장 10절의 travail에 대해 질문하셔서 잠시 답을 드립니다.
또한 동시에 성경 번역 시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의 일대일 번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의 뜻이 무언인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1. 동일 단어 번역 문제
---------저는 얼마 전부터 흠정역과 영어 KJB를 같이 읽고 있습니다. 흠정역 전도서 3장 10절[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 안에서 단련 받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KJB 3장 10절I have seen the travail, which God hath given to the sons of men to be exercised in it. 두 구절을 비교했을 때, 흠정역 성경에 ‘해산의 고통’이라고 번역 되었는데 해산이라는 뜻이 KJB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궁금해서 문의를 드립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제가 읽은 ‘그리스도예수안에’의 킹제임스 흠정역 400주년 기념판은 뜻이 정확하고 가장 KJB와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했을까 생각하니 감사의 마음이 절로 밀려옵니다.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중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질의해 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수고를 인정받으면 최고의 기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좀 더 성경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알아가며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성도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분은 아마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전을 보니 ‘노고’는 ‘힘들여 수고하고 애씀’을 뜻합니다.
일단 제가 주로 아래아 한글을 쓰므로 거기 내장 사전(도구 항목의 사전 모음)에 있는 travail의 정의를 찾아보았습니다.
ᛜtrav·ail [trǝvéil, trǽveil] n. 산고(產苦), 진통; 고생, 노고; 곤란; (흔히 pl.) 노작(勞作).
travail에 대해 옥스퍼드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1. 육체적 정신적 수고 또는 아픔, 고생되는 일, 이런 것들의 결과2. 해산의 고통
라이프성경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travail: 해산의 고통, 아이를 낳을 때 산모가 겪는 고통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7249&cid=50762&categoryId=51387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travail은 ‘노고’도 되고 ‘해산의 고통’도 됩니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이야기하는 전도서의 관점에서 travail이 그냥 ‘힘들여 수고하고 애씀’보다 해산할 때 산모가 겪는 고통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하여 전도서 1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13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에 관하여 찾아보고 탐구하려고 내 마음을 쏟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 받게 하셨느니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13절의 ‘쓰라린 해산의 고통’(sore travail)과 14절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 서로 매칭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와는 전혀 문맥이 다릅니다.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3절의 수고와 14절의 바람을 잡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04
흠정역은 창38:27, 사23:4, 요16:21 등에서는 travail을 ‘해산의 고통’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앞뒤 문맥이 아기 낳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출18:8, 민20:14 등에서는 고난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따라서 어떤 단어를 어떤 단어로 번역하느냐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며 그 결과는 위에 보여 드린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의 예처럼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단어라도 번역자가 문맥을 잘 파악하여 번역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단어 대 단어로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루도록 번역한 성경이다.
전도서 1장 13절을 보면 ‘sore travail’(쓰라린 해산의 고통)이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ra’(스트롱 번호 7451)와 ‘inyan’(6045)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의역하였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travail’이라는 명사는 전도서에 8번 나옵니다(1:13; 2:23, 26; 3:10; 4:4, 6, 8; 5:14).
흠정역은 이것을 모두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며 일관성을 유지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은 수고, 노고, 재난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책에서 같은 단어를 일관성 있게 번역해야만 원 저자가 의도한 그 책의 뜻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누구의 빵이든 거저먹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중의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수고와 해산의 고통 속에서 밤낮으로 일하였나니
KJB: Neither did we eat any man's bread for nought; but wrought with labour and travail night and day, that we might not be chargeable to any of you:
개역: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에는 ‘labour and travail’이 나옵니다. 흠정역은 이것을 ‘수고와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였고 개역은 ‘수고하고 애써’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둘 다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면 사도 바울의 사역이 산고처럼 힘든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뜻과 함께 그가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이 아이를 낳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뜻을 다 포함합니다.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해산의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이를 travail로 표현하였습니다.
3. 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의 큰 차이
번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번역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단어를 기계적으로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단어 대 단어’의 일치 번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등을 뜻을 왜곡한 채 인용합니다. 즉 그 서문에서 번역자들이 기계적 일치를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어 대 단어를 번역한 성경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word for word'라는 영어 말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본의 모든 단어를 영어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번역한 성경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룬 성경입니다. 즉 주어, 목적어, 단수, 복수, 수동태, 능동태, 시제 등이 원본과 같습니다. 다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하면 반드시 추가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그런 부분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의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는 형식적 일치를 뜻합니다.
성경 번역 기법: 형식적 일치 vs 동적 일치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84
그런데 이 경우도 히브리어/그리스어의 한 단어가 영어에서는 두 단어로 혹은 히브리어/그리스어의 두 단어가 영어에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원어와 수용 언어가 다르므로 번역에서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즉 히브리어가 5단어라고 해서 영어로 꼭 5개가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주어, 동사, 목적어, 수동태, 도치 등은 원래대로 유지되며 4개나 6개 혹은 7개 단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단어 대 단어의 번역 즉 형식적 일치의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그리스어의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을 영어로는 ‘word for word equivalence’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word for word’ 라는 말도 형식적 일치인지 기계적 일치인지 잘 구분해야만 합니다. 기계적 일치는 구글 번역기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하는 일이고 그것은 심지어 번역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한 단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자들은 앞뒤 문맥을 보고 같은 단어라도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히브리어/그리스어의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위키 백과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번역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에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King_James_Version
위 그림에서 보듯이 명사 travail은 신구약 성경에 총 31회 나옵니다(구약 26회, 신약 5회). 여기서 맨 오른쪽의 숫자는 스트롱 번호입니다. 구약의 경우 3205, 8513, 60045, 5999, 2342, 2470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다른 원어입니다. 그런데 이 원어들에는 다 해산의 고통, 수고, 노고 등의 뜻이 있으므로 번역자들은 그중에서 문맥을 보고 원어는 달라도 다 travail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킹제임스 성경이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거나 알면서도 마치 약점인 것처럼 부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만일 그런 단어들을 삭제했다면 그것은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루지 않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는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성경 중에서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가장 많이 이룬 성경입니다.
전도서만 보더라도 travail에 해당하는 원어는 6045와 5999입니다.
전3;10의 6045의 원어 사전 뜻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6045 @y:nÒ[i `inyan {in-yawn'}6031에서 유래;‘노고’, 즉(일반적으로)‘고용’, 또는(특히)‘용무’:-사무, 고생
전4:4의 5999의 원어 사전 뜻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5999 lm;[; `amal {aw-mawl'}5998에서 유래;‘수고’, 즉 ‘진저리나는 노력’;따라서(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걱정하다’:-불만, 통한, 사악, 고역, 과실, 불쌍한, 불행, 고통, 아픈, 완고함, 슬픔, 노고, 고생, 싫증나는, 사악함
보시다시피 이 둘은 다 엄청난 수고와 고통을 뜻합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것을 해산의 고통과 같은 의미로 보고 ‘travail’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대응을 기계적 일치로 보면 번역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기계적 일치 번역은 안 된다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2
4. 단어 대 단어를 기계적 일치로 여기면 번역을 망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루아흐(스트롱 번호 7307)를 봅시다. 이것은 영, 바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창세기 1:2; 6:3 등의 영(靈)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출10:13, 19에는 동풍과 서풍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 위로 자기 막대기를 내밀매 {주}께서 그 땅에 동풍(東風)을 가져오사 그 온 낮과 그 온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어 동풍이 메뚜기들을 몰아오매
자 이런 부분을 단어 대 단어의 기계적 일치를 위해 동영(東靈), 서영(西靈)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모든 영어 성경은 물론 개역성경까지도 이를 다 동풍, 서풍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단어 대 단어의 기계적 일치를 일대일 대응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우리말 성경으로 이런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spirit은 대개 ‘영’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 5장 1절의 spirit은 영으로 하면 말이 안 됩니다.
흠정역: 요르단 서쪽에 있던 아모리 족속의 모든 왕과 바닷가의 가나안 족속의 모든 왕이 우리가 건널 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요르단의 물들을 마르게 하신 것을 들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더 이상 정신이 없었더라.
KJB: And it came to pass, when all the kings of the Amorites, which were on the side of Jordan westward, and all the kings of the Canaanites, which were by the sea, heard that the Lord had dried up the waters of Jordan from before the children of Israel, until we were passed over, that their heart melted, neither was there spirit in them any more, because of the children of Israel.
흠정역 맨 끝의 “정신이 없었더라”의 정신은 영어로 spirit(스트롱 번호 7307, 루아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이 없었더라”라고 번역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어에서는 spirit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면 되지만 우리말에서는 spirit의 또 다른 뜻인 정신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개역성경 역시 이것을 정신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5.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형식적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한 성경이다.
흠정역과 개역은 뜻이 비슷하지만 흠정역은 단어 대 단어의 형식적 일치를 이루었고 개역은 단어를 삭제하였습니다. 영어의 끝 부분은 ‘neither was there spirit in them any more’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any more’를 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오데(스트롱 번호 5750)이며 뜻은 앞의 neither와 합쳐지면서 말 그대로 ‘더 이상’입니다. 이런 단어는 이미 중학교 영어 시간에 다 배우는 말입니다.
단어 대 단어의 형식적 일치를 이루려면 반드시 any more를 표현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세심하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우리말 흠정역도 같습니다. 그러나 개역은 그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형식적 일치를 벗어났습니다. 흠정역의 표현은 ‘여리고 사람들이 그 이후로 계속 정신이 없었다’는 뜻(다 죽었으니까요)이고 개역은 ‘그 당시만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단어 대 단어를 일대일 대응이 되게 번역한 성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만 그런 것이 아니라 100% 모든 구절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로 완벽히 보존된 성경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흠정역 성경은 이 성경을 우리말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로 신실하게 번역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원어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어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저처럼 번역을 하거나 목사로서 설교를 하거나 성경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용례를 살펴보기 위해 원어나 영어를 참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이미 컴퓨터로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도구는 슈퍼바이블입니다. 이것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딜럭스바이블도 있습니다(아마도 이것은 슈퍼바이블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 형태가 거의 같음). 다만 이것은 몇 년 전에 업데이트를 하면서 소수 본문 원어를 사용하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데가 많습니다. 즉 개역성경이나 NIV와 비슷합니다. 그래도 위에서 제가 보여 드린 것들은 동일함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어를 과도하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이유(원어 소프트웨어)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그래서 심지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우리말 흠정역 성경을 성실히 연구하고 성경 소프트웨어 등을 잘 활용하여 뛰어난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영어를 못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7
6. “이렇게 원전분해가 다 되어 있는데 왜 번역을 해야 할까요?”
원전 분해와 원어 사전은 말 그대로 원어의 뜻을 나열한 것입니다. 이것을 번역자가 앞뒤 문맥을 보고 신학적으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여 문장으로 만들어야 성경이 나옵니다. 이 일을 이루려면 시적인 감각, 수용 언어(자국어) 실력, 문법, 맞춤법 등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클리프 이후로 완벽한 영어 성경이 1611년에 나오기까지 무려 230여 년이 걸린 것입니다(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짐).
알렉산더 스커비가 낭독하는 영어 성경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웅장함과 시적 아름다움의 극치가 드러나 있습니다.
Alexander Scourby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낭독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41
그래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반포 이후에는 괄목할 만한 다른 역본이 나오지 않았고 1970년까지 약 360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성경으로 구원받고 신학을 정립하고 경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천주교 소수 본문에 근거를 둔 여러 가지 현대 역본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영국,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중동, 인도 등 영어권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독보적 성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번역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유언비어나 한두 사람이 망상 속에서 그런 유언비어들을 모아서 기록한 허접한 책의 부정확한 주장 – 심지어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드리는 글’ 등을 자기들 편의대로 곡해한 말 - 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독보적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려는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망상이란 말 그대로 ‘1.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 즉 망념(妄念)이며 2.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으로, 몽상 망상ㆍ체계화 망상ㆍ피해망상ㆍ과대망상 따위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보존해주신 말씀을 100% 담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의 놀라운 영광을 폄훼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넘는 검증을 거친 킹제임스 성경의 위용은 그러한 산들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6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7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2016-04-19 15:57:28 | 관리자
삼위일체 우주 (The Tri-Universe)
Henry Morris
이전의 ‘창세기로 돌아가자(Back to Genesis)’ 컬럼 란의 '삼위일체의 놀라운 진리(The Wonderful Truth of the Trinity, Acts & Facts, November 2005)”라는 제목의 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Trinity)에 대한 성경적 교리와 그것에 대한 성경의 핵심 구절들을 함께 간략히 기술했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3 페이지의 글로는 분명히 불가능하다(이 주제에 관한 한 권의 책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본질적 진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한 하나님(one God)으로서, 성부(Father), 성자(Son), 성령(Holy Spirit)의 세 위격(three Persons)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확실히 가장 독특한 것이다. 이것은 세 명의 하나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한 하나님이시다. 성경 속에 사용된 '하나님(God)”이란 단어는 가장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성자와 성령 역시 하나님으로서 인식된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 분의 분명한 개체가 아니라, 한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는 세 가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틀린 발상이다. 예를 들자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서로 대화하시는 기록이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들의 생각으로 완전히 이해되기는 어렵다(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장으로부터 그것을 믿어야 한다. 회의론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비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1+1+1은 1이 아니라 3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세 위격의 한 하나님) 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순전하게 잘 믿고 있는가?
셋이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자체가 삼위일체인 거대한 우주(universe)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우주는 놀랍게도 각각이 또한 많은 삼위일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을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하나의 모델로서(또는 유형이나, 유사하게) 우주를 창조하셨던 것은 아닐까?
숙고해 보라. 창조된 우주는 공간(Space), 물질(Matter), 시간(Time)이 서로 조화되면서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삼위일체 우주로 되어있다. 우주는 부분적으로 공간만으로, 부분적으로 물질만으로, 부분적으로 시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삼위일체는 3인조 또는 3화음이 아니라, 삼위가 하나를 의미하며, 각 부분이 전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3개 모두가 전체를 만드는 데에 요구된다. 그래서 우주는 공간 모두, 시간 모두, 그리고 물질(물질의 한 형태인 에너지를 포함하여) 모두로서 이루어진다. 사실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를 공간-물질-시간의 연속체로서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세 구성 요소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삼위일체 우주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공간은 우주 모든 곳의 배경으로서 어느 곳에나 편재한다. 그러나 물질(그리고 에너지)은 우주의 실체로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공간, 물질, 시간 대신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대체해서 집어넣고 위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라. 정확히 그 뜻이 통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은 삼차원으로 되어있고 각 차원은 모든 우주에 충만하기 때문에 공간은 그 자체가 삼위일체이다. 공간의 어떤 부분의 크기는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을 함께 곱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다. (삼위일체 수학은 1+1+1=1 이 아니라, 1×1×1=1 이다). 더 나아가, 공간은 일차원에서 확인되며, 이차원에서 보여지고, 삼차원에서 체험된다. 같은 문장에서 일차원, 이차원, 삼차원 대신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대체해 보라.
마찬가지로, 시간은 미래, 현재, 과거로 구성되어 있다. 미래는 시간의 보이지 않는 근원이며, 현재는 순간순간 명확히 볼 수 있고, 과거는 이해될 수 있다. 다시 한번 미래, 현재, 과거의 단어들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대체해서 읽어 보라.
마지막으로, 물질은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 편재하는 에너지이며, 여러 형태의 측정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관측되며, 관련 현상들을 통해 체험된다. 예를 들어, 빛 에너지는 빛의 파동을 만들어내며 빛을 봄으로서 체험된다. 소리 에너지는 음파를 발생시키며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음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우주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모델화하여 각 요소들의 내부적 관계들을 맺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삼위일체들의 삼위일체(trinity of trinities)’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앞에서 주의를 준 것처럼).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놀랄만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 자신을 반향하여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일부분이라도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른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앞에서의 몇 개 단락은 ‘방어자의 스터디 성경(The Defender's study Bible, 헨리 모리스 저)’에서 로마서 1:20절을 지지하는 각주로부터 주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이 놀라운 유사성은 고든 대학(Gordon College)의 전 총장이었던 나단 우드(Nathan H. Wood) 박사가 쓴 책 ‘우주의 비밀(Secret of the Universe)’에서 처음 확인되어진다. 그 책은 20세기 초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성경주석가 중 한 명인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박사가 매우 칭송하는 서문을 썼던 책이다. 또한 그 책은 1978년 크레겔(Kregel)에 의해서 ‘우주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the Universe)’라는 제목으로 재인쇄 되었다.
그러므로 물리적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삼위일체들의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우주인 생명체는 어떠한가? 많은 주석가들이 사람은 몸(body), 혼(soul), 영(spirit)의 삼위일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 각 실체들은 실재하며 구분된다. 그러나 각각이 완전한 사람 안에 포함된다. 기도의 사람 바울은 최초에 쓴 서신서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분께서 또한 그것을 행하시리라.” (살전 5:23-24)
‘혼(soul)’은 사람의 한 부분으로 몸을 활동하도록 하는 실제적 생명(life)이다. 그리고 ‘몸(body)’은 물질들의 구성체로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이 둘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구절은 레위기 17:11절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the life of the flesh is in the blood)”. 이 구절에서 ‘생명(life)’이라는 단어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혼’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몸을 통한 피의 순환이 몸에 생명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편 몸의 영(spirit)은 몸의 ‘호흡(breath, 생기)’ 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호흡’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헬라어의 신약에서 ‘영’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끔 혼과 영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혼과 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히브리서 4:12절에서 확인되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히 4:12).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 2:7).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창 1:27). 하나님의 호흡(생명의 숨) 때문에 흙으로 된 사람의 몸과 살아있는 혼에 하나님의 형상이 불어 넣어진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이러한 유사성은 꽤 명백해 보인다. 혼은 몸의 생명이 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으나, 사람의 존재와 행동들에 기초가 된다. 이에 반해 몸은 혼의 보여지는 만져질 수 있는 현시(manifestation)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의 영은 (혼처럼)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도 없지만, 도덕적 및 심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하나님과 이성적으로 교감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동물들도 또한 혼(즉 생명)과 몸과 영(단지 호흡의 의미에서)을 소유한다. 동물들도 본능의 수준을 넘어서서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 다른 동물들과 심지어 사람들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 동물들은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태초에 동물 삼위일체가 사람 삼위일체와 비록 관련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죽음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서 발생하고,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짐승의 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고, 인생의 혼(영, spirit)은 위로 올라가서.... 신(영,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전도서 3:20-21, 12:7).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울의 기록과 일치된다.
어쨌든 우리는 사람 생명체와 동물 생명체가 사실상 삼위일체(논리적으로 삼위일체의 순서를 가진 3개의 구성요소가 각각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로 구성되어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나, 동물(몸, 생명, 영)은 그렇지 않다. 오직 남자와 여자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우주에서 삼위일체의 모습들은 현저하게 퍼져있고, 창조된 생물체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물론 어떤 것도 완벽한 것은 없다. 어떠한 삼위일체 모델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만큼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주는 실제로 각각의 삼위일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각 단위는 각기 자신의 기능을 가지고 구별된다. 그러면서 이들 세 개의 요소들은 모두 전체의 구성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각각은 전체에 퍼져 있다.
피조물들에 나타나 있는 이들 삼위일체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완벽하게 반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멋진 그리고 현실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됨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나의 설득력 있는 설명은 우주 만물이 삼위일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신중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ICR, BTG 204, 2005. 12. 1. URL : http://www.icr.org/article/2590/번역자 : IT 사역위원회
본문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62&category=B00&orderby_1=editdate%20desc&page=11
~~~~~~~~~~~~~~~~~~~~~~~~~~~~~~~~~~~~~~~~~~~~~~~~~~~~~~~~~~~~~~~~~~~~~~~위 본문의 성경 구절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으로 대체하였다.개역성경에서의 영과 혼은 거의 구분이 어렵고 혼용된채 사용되고 있다.위 본문에서의 설명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킹제임스성경이 필요함을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대 개역성경 비교구절
(창 2:7, 킹흠정)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 2: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KJV)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전 3:20, 킹흠정)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나와 모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거니와(전 3:21, 킹흠정)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전 3:20, 개역)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1, 개역)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 3:20, KJV) All go unto one place; all are of the dust, and all turn to dust again.(전 3:21, KJV) Who knoweth the spirit of man that goeth upward, and the spirit of the beast that goeth downward to the earth?
2016-04-18 15:55:25 | 허광무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저는 ‘성경 사본학과 학식의 깊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http://new.keepbible.com/KJB2/View/2WG
여기서 저는 다음을 언급하였습니다.
----------
영국 런던에서 사역하시는 무어맨 박사님은 수용 본문(TR)과 네슬레-알란드 본문의 모든 단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비교하고 다 세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네슬레-알란드 본문의 단어가 수용 본문보다 무려 2,886개나 부족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웨스트코트‐호르트 본문이 삭제한 단어보다 934개가 더 많음을 뜻합니다. 삭제된 2,886개의 그리스어 단어들을 영어 단어로 환산하면 베드로전후서와 맞먹는 분량이 됩니다.
무어맨 박사님의 이 연구는 최종적으로 2002년에 <8,000개의 차이>(8,000 Differences)라는 제목의 책(524쪽)으로 출판되었습니다. http://www.amazon.com/Differences-Between-Greek-Modern-Versions/dp/1568480547/ref=sr_1_1?s=books&ie=UTF8&qid=1459413487&sr=1-1&keywords=8000+differences 무어맨 박사님의 치열한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 드리기 위해 마태복음이 시작되는 1쪽과 계시록 마지막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오늘은 이 귀한 책 전체를 무료 PDF 파일로 올립니다.
성경이 얼마나 다른지 눈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출간한 <박사성경>은 이 8,000개 차이의 많은 부분을 킹제임스 흠정역 신약 성경 본문에 표기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new.keepbible.com/KJB7/View/4Fe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4-18 14:31:18 KJB 사본학에서 복사 됨]
2016-04-18 14:27:3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저는 ‘성경 사본학과 학식의 깊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83
여기서 저는 다음을 언급하였습니다.
----------
영국 런던에서 사역하시는 무어맨 박사님은 수용 본문(TR)과 네슬레-알란드 본문의 모든 단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비교하고 다 세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네슬레-알란드 본문의 단어가 수용 본문보다 무려 2,886개나 부족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웨스트코트‐호르트 본문이 삭제한 단어보다 934개가 더 많음을 뜻합니다. 삭제된 2,886개의 그리스어 단어들을 영어 단어로 환산하면 베드로전후서와 맞먹는 분량이 됩니다.
무어맨 박사님의 이 연구는 최종적으로 2002년에 <8,000개의 차이>라는 제목의 책(524쪽)으로 출판되었습니다. http://www.amazon.com/Differences-Between-Greek-Modern-Versions/dp/1568480547/ref=sr_1_1?s=books&ie=UTF8&qid=1459413487&sr=1-1&keywords=8000+differences 무어맨 박사님의 치열한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 드리기 위해 마태복음이 시작되는 1쪽과 계시록 마지막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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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귀한 책 전체를 무료 PDF 파일로 올립니다.
성경이 얼마나 다른지 눈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출간한 <박사성경>은 이 8,000개 차이의 많은 부분을 킹제임스 흠정역 신약 성경 본문에 표기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1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2016-04-18 14:27:3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다음 글을 번역해 주신 것입니다.
400 years later, King James Bible still stands up(2011년 1월 21일 캐나다의 유명 신문 The Star의 기사, 킹제임스 성경 400주년 반포 기념)http://www.thestar.com/news/insight/2011/01/21/400_years_later_king_james_bible_still_stands_up.html
이 글은 킹제임스 성경 400주년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2011년 1월 21일 캐나다의 유명 신문 The Star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제목처럼 내용은 “400년이란 세월이 지난 이 시간에도 킹제임스 성경이 우뚝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신실하게 번역해 주신 고 자매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샬롬
패스터
-----------400년이란 세월 이후에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킹제임스 성경
400년 전에 처음 출판된 킹제임스 성경은 고전적인 문체로 성경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표준성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1611년 이전에, 성경은 인쇄되어 나올 때 오류, 부적절한 단어, 그리고 오타들로 가득했으며 적당한 부수로 인쇄되어 루스리프식(낱장의 용지를 자유롭게 바꾸어 꽂을 수 있도록 만든 장부나 공책)은 10실링에, 제본식은 12실링에 팔렸다. 하지만 1611년, 제임스 왕의 칙허가 날인된 새로운 영어 성경이 런던에서 출판되고 그 성경은 세상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셰익스피어와 밀튼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문체와 시와 산문의 장엄한 운율을 갖춘 킹제임스 성경은 이 세상에 처음 나온 지 4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록 고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수십 개의 다른 성경들이 일정 부분 킹제임스 성경을 대체하긴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었다. 최근 킹제임스 성경의 출판기념을 축하하며 클링켄보르그(Verlyn Klinkenborg)는 킹제임스 성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게 킹제임스 성경은 필수품이 되었다(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외경이 포함된 다른 성경들이나 구약에 추가된 책들을 읽음). 이것은 수없이 팔려 나갔고 17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중반쯤에 이르기까지 킹제임스 성경은 단순히 ‘성경’(The Bible) 혹은 ‘흠정역’(Authorized Version)으로 불렸다.
토론토 대학의 토마스 피셔 레어 북 도서관의 캐어풋(Pearce Carefoote)은 “킹제임스 성경은 우리에게 글을 읽는 방법과 아름답게 글을 쓰는 방법을 확실히 알려 주었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피셔 레어 북 도서관은 킹제임스 성경의 기념일을 축하하며 90여 권의 역사적인 성경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6년 동안 계획되어 2월 7일부터 6월 3일까지 진행될 이번 전시는 매우 희귀한 1611년 킹제임스 버전과 역사 속에서 중요한 다수의 영어성경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오리지널 킹제임스 성경이 마지막으로 전시되었던 건 100년 전 캐나다에서였다. 도서관의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킹제임스 성경의 감미로운 산문과 시적 스타일은 불과 한 세대 안에 성경 자체를 상징하게 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한 치의 모순 없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사용되던 영어로 드러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캐어풋은 이전 시대의 여러 성경들 가운데서 우뚝 서게 되었다는 이유로 킹제임스 성경을 따로 놓고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킹제임스 성경과 셰익스피어가 영어 산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한다.
“피스메이커 킹”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6세였던 제임스 1세는 종교적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분명한 믿음을 얻고자 노력했던 청교도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 여전히 비슷한 면이 많았던 영국 국교회 사이의 종교적 분쟁을 가라앉히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제임스 왕은 “상충되는 모든 요구들이 화해를 이루고 모든 파벌들이 편안해지는 사회”를 갈망했다.
갈등의 뿌리 중 하나는 충돌하는 교회들끼리 서로 다른 성경을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청교도들은 제네바 성경을, 영국 국교회는 비숍 성경을 읽으며 각각 자신들의 원문이 더 우수하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1604년, 제임스 왕은 햄튼 코트 궁전에서 회의를 열어 성경의 새로운 번역본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제임스 왕은 영국 국교회 멤버로서 최고로 학식이 높고 신앙심이 깊은 47(54)명의 학자들을 모집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적을 성경의 새로운 번역본을 만드는 것이 아닌 “좋은 것을 더 좋게, 혹은 많은 좋은 것들 중에서 하나의 으뜸가는 좋은 것(one principal good one)을 만드는”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이 이 일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아주 많았다.
성직자였던 세인트 제롬이 서기 400년경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이 그 중 하나이다. 벌게이트로 알려진 이 성경은 약 1000년간 카톨릭 교회에서 사용 되었다. 옥스퍼드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는 벌게이트를 사용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1388년경에 그의 제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 다른 종교개혁자인 윌리엄 틴데일은 1526년에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최초로 인쇄하는 업적을 남겼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을 직접 번역한 틴데일은 ‘쟁기질하는 소년’까지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스타일의 영어를 사용했다.
틴데일의 번역본 중 3,000권 정도가 독일에서 인쇄되었고 많은 양이 영국으로 밀수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단으로 몰려 체포되거나 화형을 당했고, 틴데일 역시 벨기에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제임스 왕의 명령에 따라 7년간 번역을 맡았던 학자들은 틴데일의 번역본이 영감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틴데일 번역본의 80(60-70)퍼센트 정도가 킹제임스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싫어했고, 학자들도 그 성경의 오류들을 지적하는 것을 즐겼으며, 대중들도 50년 전에 출판 된 교양 있는 제네바 성경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은 보편적으로 인기가 있는 성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사용되던 단순한 영어로 쓰여 출판 된 킹제임스 성경은 많은 평민들의 눈을 열어 주었고, 1700년대에 와서는 성공회와 개신교 교회들에서 독보적인 영어번역본으로 사용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 버전을 대체하며 영어를 사용하는 학자들과 교육받은 대중들을 위한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비록 더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버전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어지고 있다. 캐어풋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사용하는 언어도 계속 변화하기를 교회 일부가 바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시와 산문의 아름다움 때문에 높이 평가를 받지만, 그 언어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는 않는다.”
God’s Secretaries: The Making Of The King James Bible의 저자인 아담 니콜슨은 이러한 평가절하를 한탄한다.
“킹제임스 성경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경험할 수 있는 전통, 지성, 목적의 아름다움과 명확성, 신념의 확고함, 그리고 압도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경건함의 결합을 영국 교회에서 경험하는 것은 현재 불가능하다.”
http://www.amazon.com/Gods-Secretaries-Making-James-Bible/dp/0060838736/ref=sr_1_1?ie=UTF8&qid=1460945630&sr=8-1&keywords=God%E2%80%99s+Secretaries%3A+The+Making+Of+The+King+James+Bible
캐나다 바이블 소사이어티의 생산 및 유통 이사 코피에테르스(Joel Coppieters)는 킹제임스 성경이 NIV나 NRSV만큼 인기가 많지는 않아도 여전히 “수요가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코피에테르스는 캐나다 바이블 소사이어티 영어 사업의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 정도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단체는 킹제임스 성경 400주년 기념 에디션을 출판하기 위해 영국 비즈니스 파트너와 협력 중에 있다(참고로 전 세계 성서공회들은 천주교의 주도로 연합성서공회의 감독들 받으므로 자연히 KJB를 많이 찍을 수 없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614
이 특별한 에디션은 윌리엄 틴데일에게 뿌리를 두고 현재까지 사용되는 “giving up the ghost,” “my brother’s keeper,” “salt of the earth,” “scapegoat,” “filthy lucre,” “sign of the times,”와 같은 킹제임스 성경의 많은 영어구절들을 강조할 예정이다.
성경의 선구자 위클리프와 틴데일은 평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그렇다면 킹제임스 성경은 왜 성공한 것일까?
코피에테르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성경을 평민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신념으로 제임스 왕이 칙령을 내렸을 때 교황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국 국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차이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왕은 교황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국 국교회의 많은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이것을 매우 좋은 영적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제임스 왕의 칙령에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2016-04-18 11:02:5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다음 글을 번역해 주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Is Psalm 12:7 a promise that God would preserve his words?
http://www.kjvtoday.com/home/does-the-second-them-in-psalm-127-refer-to-gods-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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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편 6-7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들을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킹제임스 흠정역)
시편 12편 6-7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영원히 보존하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제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이 놀라운 약속은 감히 누락시켰습니다. 같은 구절이 ESV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like silver refined in a furnace on the ground, purified seven times. 7 You, O LORD, will keep them; you will guard us from this generation forever.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NIV와 NLT 역시 ‘그들’ (5절에 언급된 학대받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 (보존)해 주시는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어에서 남성 대명사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경우는 아니지만) NASB는 인간을 선행사로 나타내는 ‘him’을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7절에 나오는 2인칭 대명사가 ‘them’(그것들)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them’ (그것들)이 ‘words of the LORD’(주의 말씀들)을 가리키는지의 여부입니다.
사전적인 분석
단어 ‘지키다’ (שׁמר)와 ‘보존하다’ (נצר)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 사람과 말씀 둘 다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지키다’ (שׁמר)는 신명기 17장 19절, 시편 119장 57절, 그리고 잠언 7장 1절에서 말씀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보존하다’ (נצר)는 (‘지키다’로도 번역 됨) 시편 105장 45절, 시편 119장 33-34절, 그리고 잠언 3장 1절에서 말씀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어의 용법을 분석하는 것이 한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주제 분석시편 12장의 주제는 사람들의 헛된 말과 하나님의 지속되는 말씀의 대비에 관한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시편 12장 전체 구절들을 ‘말씀’ 혹은 ‘말’과 관련된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 아래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1 (스미닛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주}여, 도우소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끊어지고 신실한 자들이 사람들의 자녀들 가운데서 없어지나이다.2 그들이 저마다 자기 이웃과 더불어 헛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나이다.3 {주}께서 아첨하는 모든 입술과 교만한 것들을 말하는 혀를 끊으시리니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혀로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리요? 하였도다.5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의 학대받는 것과 궁핍한 자의 탄식하는 것으로 인하여 이제 내가 일어나 그를 향해 우쭐대는 자로부터 그를 떼 내어 안전하게 두리라, 하시는도다.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8 가장 비열한 자들이 높여질 때에는 사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활보하는도다.
7절은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명사 ‘them’ (그것들) (대명사가 ‘them’ (그것들)이어야 한다고 잠시 가정해 보았을 때)은 6절에 나와 있는 ‘주의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시편 12편이 주의 ‘말씀들’의 우수성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일부 비평가들의 말들과는 달리 이 시편의 주요 초점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내용이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주제는 아닙니다. 시편 12편의 진정한 주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는 죄가 ‘말씀’과 관련된 행동에 제한된다는 점을 보면 명백해집니다. 만약 주제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라면, 신체적 폭력과 같은 경건하지 않은 또 다른 악덕들도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편 12편은 의도적으로 오로지 언어적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의 주제는 인간의 헛된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들의 승리입니다.
구문 분석문장구성을 보면 7절에 나온 ‘them’이 ‘the words of the LORD’ (주의 말씀들)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함을 보여 줍니다. ‘the words of the LORD’ (주의 말씀들) 혹은 비유로 제시된 ‘silver’ (은)는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명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행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선행사가 될 가능성이 적습니다.
논리적 분석논리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주의 말씀들’의 귀중함을 은에 비유한 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논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주께서 백성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강조하기 위해 주의 말씀들의 귀중함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의 말씀들의 귀중함과 백성들을 보존하심은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들의 귀중함과 하나님께서 귀중한 그것들을 보호해 주시려는 의도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적 분석시편은 시이기 때문에 비유적인 언어가 자유롭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자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자들을 영원히 보존하시겠다는 해석보다 그분의 말씀들을 보존해 주시겠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말이 되고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말씀들이 영원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자들을 영원히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나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혼들을 보존해 주시겠다는 비유적인 생각까지 고려하여 ‘억압받는 자들’이 그저 아무런 억압 받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them’을 억압받는 자들과 연관시키는 해석은 훨씬 더 많은 추측할 거리들을 남깁니다.
문법적 분석비평가들은 시편 12장 7절에 나오는 ‘보존하다’의 대명사가 ‘them’으로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 문법을 따르면 그것은 ‘them’이 아니라 3인칭 남성단수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NASB 같은 번역본들은 그 구절을 "You will preserve him from this generation forever."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가 남성단수대명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이 남긴 난외주에는, ‘히브리어: 그(he). 즉 그것들 각각 모두’ (KJV 1611)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 난외주를 참고하면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와 용법으로 쓰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단수는 복수를 참조하여 배분적으로 사용됩니다. 번역가들은 그 대명사가 문법적으로 단수여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단수 대명사인 이 단어는 의미적으로는 복수를 뜻합니다. 영어에도 그러한 대명사가 존재합니다. ‘everyone’이라는 영어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단수이지만 뜻은 복수입니다.
“I love everyone. I love them.”
‘Everyone’은 문법적으로는 단수인 단어입니다. 우리는 “Everyone is here”이라고 말하지, “Everyone are here.”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everyone’이라는 단어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복수 대명사인 ‘them’입니다. ‘Everyone’은 복수의 뜻을 가지고 있는 문법적 단수 단어 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12장 7절에 쓰인 히브리어 대명사가 문법적으로는 단수의 형태를 띤다고 해도, 그 의미는 복수입니다. 복수 ‘them’ (…keep them…)과 distributive singular (복수의 관념을 개별적으로 배분하여 가리키는 단수형) ‘him’ (…preserve them…)의 조합은 ‘each and every’ 즉 각각 그리고 모든 단어가 유지되고 보존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확실하게 해 줍니다. 번역 과정에서 ‘him’을 ‘them’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영어단어 ‘silver’나 ‘words’가 남성 인칭대명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재량적이며 용인됩니다.
성별의 일치에 관하여 남성 대명사 접미사 ‘them’ (תשׁמרם)/’him’ (תצרנו)"과 여성 대명사 접미사인 ‘words’ (אמרות)의 문법적 성별 불일치는 남성적 형태인 ‘אמר’ (emer)로 종종 쓰이는 ‘words’가 남성 의미론적 방향을 가지는 걸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시편 12장 6절에서 construct state (성별과 관련하여 아프로아시아어에서 발생하는 명사 형태)로 쓰인 ‘אמרות יהוה ‘(words of the LORD)에서의 ‘words’는 남성적 특성을 띠기 때문에 ‘words는 의미론적으로 남성적 방향을 나타냅니다.
캠벨 모르간의 증언
시편 노트: 시편 12편 기자는 6-7절에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들에 탄성을 지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키시고 보존해 주실 것을 선포한다. 7절의 ‘them’은 6절의 ‘말씀들’ 즉 주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다. 전 세계적인 부흥이나 개혁이 일어나 전 성도들이 보존되는 약속은 성경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소수의 남은 자들의 구원과 자신의 말씀들의 보존이다.
http://prophets-see-all.tripod.com/46587.htmDr. G. Campbell Morgan agreed with the rendering found in the King James Bible. He writes, "The psalmist breaks out into praise of the purity of His words, and declares that Jehovah will keep them and preserve them. The them here refers to the words. There is no promise made of widespread revival or renewal. It is the salvation of a remnant and the preservation of His own words which Jehovah promises." (Notes on the Psalms, Revell Comp., p.32).
요한 웨슬리의 증언
다음 링크에는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시편 12;7 노트가 있는데 그분도 분명히 6-7절은 말씀 보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biblehub.com/commentaries/wes/psalms/12.htm
끝으로 시편 12편에 대해서는 음영진 목사님께서 가장 자세히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잘 설명하셨으므로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firstbaptist.or.kr/default/product/01.php?com_board_basic=read_form&com_board_idx=15&top=3&sub=0&&com_board_search_code=&com_board_search_value1=&com_board_search_value2=&com_board_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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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8 10:23:13 | 관리자
2016년 4월 10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EJQMq1UTxHs
2016-04-18 08:39:35 | 관리자
2016년 4월 10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_FKQM5BJnL0
2016-04-18 08:38:45 | 관리자
2016년 4월 3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S6_dNRuREoY
2016-04-18 08:37:55 | 관리자
2016년 4월 3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VIS7QJs0IAY
2016-04-18 08:36:3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일 5:7절은 일명 "요한의 콤마" 로 알려졌으며.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에는 없습니다.
KJV 성경과 T.R. 본문을 비방하는 프린스턴대 비평 신학 박사 "메츠거"(Metzger)와 비평신학자들은 요일 5:7이 성경에 없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평신학 박사 "메츠거"는 누구인가?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칼빈은 칼빈의 주석서에서 T.R. 공인 본문을 지지하며 요한 일서 5:7절이 성경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칼빈이 이렇게 믿었다고 우리도 이렇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은 한결같이 KJV 성경과 공인분문을 전수한 성경들을 사용했고 삼위일체의 강력한 말씀인 요일 5:7절이 성경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것입니다.
""But as even the Greek copies do not agree, I dare not assert any thing on the subject.
Since, however, the passage flows better when this clause is added, and as I see that it is found in the best and most approved copies, I am inclined to receive it as the true reading. ""
(그리스어 필사본들도 어떤것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 구절이 성경에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나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요일 5;7절이 성경에 있어야 문맥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공인된 최고의 우수한 사본들(the best and most approved copies) 이 이 구절을 담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이 있어야 참 하나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믿는다.)
http://biblehub.com/commentaries/calvin/1_john/5.htm(칼빈 영어 주석)
요일 5:7절이 왜 성경에 있어야 하는가?
이황로 목사님의 "바른 성경과 바른 사본을 찾아서" 을 인용해 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늘에서 왔다.
(고전 15:47, 킹흠정)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15:47, 개정)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가톨릭)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고전 15:47, 신세계 ***증인)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며 흙으로 만들어졌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현대 역본들은 "주님"(Lord) 생략)
누가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신가?”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KJV의 이문은 다음과 같은 필사본의 증거들의 지지를 받아서 “주님”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대문자 필사본(Uncials): 코덱스 알렉산드리아 (주후 400년경), K, P. (역주: 사본 이름들). 소문자 필사본(Minuscules): 81, 104, 181, 326, 330, 436, 451, 614, 629, 1241, 1739, 1877, 1881, 1962, 1984, 1985, 2127, 2492, 2495. 모든 성구집: 모두 고전 15:47을 포함하고 있다. 고대역본들: 시리아 페쉬타(주후 170), 시리아 팔레스타인역 (주후 420), 고딕역(주후 341), 시리아 할크 렌시스역 (주후 616), 아르메니안역(주후 400).
초기 저자들: 오리겐, 바실, 크리소스톰, 맥시머스, 세릴, 유탈리우스, 데오도레트, 코스마스, 다마스커스 의 요한.
또한, 교리적으로 볼 때 어느 누구도 하늘로부터 온 자가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딤전 6:16), 모든 사람은 땅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인성조 차도 땅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늘로부터 왔다.
(요 3:13, 킹흠정)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요 3:13, 개정)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가톨릭)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요 3:13, 신세계 ***증인)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질문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데 어찌하여 동시에 하늘에 계실 수가 있다 는 말인가?
(현대 역본들은 "하늘에 있는" 이 부분을 생략)
답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동시에 두 곳에 계실 수 있고, 따라서 요한 3:13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 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부패한 바티칸사본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에 나온 NIV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증명구절을 삭제하고 있다.
(요일 5:7, 킹흠정)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 5:8, 킹흠정) 땅에 증언하는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또 이 셋은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8, 개역)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개역본엔 "하늘에", "땅에" 이런 단어들도 생략되어 있으므로 하늘과 <-- > 땅에서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함을 감추고 있다.(저의 주해입니다.)
(계속해서 바른 성경과 바른 사본을 찾아서를 인용)
요한일서 5:7, 8절은 모든 현대역본들에서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유명한 삼위일체 증명원문”이라고 불리운다. 현대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어 필사본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7세기 이전의 오직 6개 그리스어 필사본에서 7, 8절을 삭제하고 있다. (9세기 이전에는 14 필사본).
배경: 에라스무스는 1516에 출판된 그리스어 신약성경 제 1 판에서 이것을 삭제했는데, 당시 라틴 벌게이트에는 나오지만 그리스어 필사본에서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나오는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만일 이 부분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하나만 발견되더라도 복구하겠다고 동의했다.
그리스어 필사본인 코덱스 61과 629가 제시되자 그는 1522년에 그의 성경에 포함시켰다. 이 필사본들이 15세기와 16세기라는 후대의 것이라 사람들은 이 이문들이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는가?
i) 초기 교회의 저술가들:
-사이프리안, 주후 200-258년. “주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또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이 셋은 하나이니라,’고 되어 있다.” 만일 사이프리안이 요한일서 5:7을 자신의 성경에서 주후 200-258년에 인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합당한 이문(역주: 異問 혹은 독본讀本이라고도 하며 비평학에서 사로 상이점을 보이는 해당 문구를 말함: reading)구절이다.
그의 성경은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더 오래된 성경에서 필사된 것이다. 사이프리안은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지 100년 뒤에 살았다. 사이프리안은 점검해보려고 원본필사본에 접근했었을 수도 있다.
-프리스킬리안(Priscillian), 주후 350년. 스페인 감독은 요일 5:7을 인용하고 있다.
-이다시우스 클라루스(Idacius Clarus), 주후 360년, 프리스킬리안을 반박하며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 다. -바리마둠(Varimadum), 주후 380년.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주후 485년 -카시안(Cassian), 주후 435년. -빅터 비타(Victor Vita), 주후 489년. -제롬(Jerome), 주후 450년. -풀젠티우스(Fulgentius), 주후 533년. -Ps. 비질리우스(Vigilius), 주후 484년. -안스버트(Ansbert), 주후 660년.
ii) 초기 성경번역본들: 구 시리아역, 주후 170 구 라틴역, 주후 200,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이탈리아역, 4, 5세기. 이탈리아역, 7세기의 모나센시스. 이탈리아역, 9세기의 스페쿠룸. 라틴 불게이트역, 4, 5세기.
iii) 그리스어 소문자 필사본들: UBS(연합성서공회) 그리스어 신약성경, p. 824; 요한일서 5:7, 8에 관한 논쟁의 역사, p. 268. (역주: 아래 번호들은 소문자필사본의 고유번호임)
-221, 10세기. (이문異文). -636, 15세기. (여백란). -88, 12세기. (여백란). -61, 16세기. (코덱스 몬트포티아누스) -629, 14세기. (오토바니아누스). -918, 16세기. (에스코리알 필사본). -429, 14세기. (여백란). -2318, (부카레스트 필사본).
iv) 초기 자료들: 리버 아폴로제티쿠스, 주후 350년. 카르타지 회의, 주후 415년. v) 그리스어 문법이 이 구절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NIV는 7, 8절에서 문법성을 불일치시켰다.
질문 1: NIV가 요한의 콤마를 삭제하는 것이 옳다면, 7절에서 나오는 그리스어 남성 정관사 hoi [marturountes (ο. μαρτυρο.ντε. 남성복수 분사)=하늘에 증언하는 ....]가 왜 8절에 나오는 세 개의 그리스어의 중성(성 령, 물, 피)과 불일치하고 있는가? (역주: 즉, 두 단어들이 성[性: gender]이 서로 일치가 되어야 하는데 맞고 있지 않다는 뜻).
(성)령, 물, 피는 그리스어에서 모두 중성명사로 중성 정관사를 취하는데, 그렇다면, 7절에 나오는 정관사는 당연히 중성이 나와야 한다. (그러니까, 아예 7절 자체가 없다면). 하지만 7, 8절에 모두 정관사가 모두 (복수) 남성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질문 2: 7절과 8절에서 각각 남성 정관사 hoi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그것은 요한의 콤마에서 나오는데 아버지와 말씀이 두 남성명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명사와 연관되어 정관사의 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므로 뒤에 나오는 정관사들이 남성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요한의 콤마가 그리스 성경원문에 포함되어야 하기에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NIV나 NWT는 요한의 콤마를 삭제함으로 그리스어 문법상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본 대로 7절의 남성 정관사가 뒤에 나오는 8절의 세 개의 중성명사들(성령, 물, 피)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 3: 그렇다면 어찌하여 요한의 콤마가 어떤 그리스 필사본에는 없는데, 라틴 필사본에는 있게 되었는가? 첫째로, 7절과 8절의 비슷한 어구들로 끝나니, 필사자가 7절에서 정신산만해 있다가, 8절을 필사하면서 그만 요한의 콤마를 우연히 누락시켰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필사오류는 계속해서 필사하며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주후 220-270경에 그때는 그리스 크리스챤들 중에 아직 아리안 이단교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사벨리아니즘(사벨리안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한 분으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도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요한의 콤마에서 “이 세 분 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이 사벨리안의 이단교리,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은 동일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쟁 중에 위에 언급한 대로 요한의 콤마가 누락 된 그리스 필사본이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오히려 소위 정통파 사람들이 7절이 훼손된 것이 참 된 필사본이라고 쉽게 간주했을 수 있다. 그리스어를 구사했던 동방에서는 사벨리안주의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으므로, 요한의 콤마는 만장일치로 거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스페인 같은 곳의 라틴 필사본들은 사벨리안주의 영향이 그렇게 크지 않았으므로 요한의 콤마가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이 라틴 필사본에서 요한의 콤마가 강하게 제시되어 있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이유다.
자료: “KJV Defended,” E. F. Hills, p. 204-208. (역주: 이 책은 keepbible.com에서 번역하여 출간되었음)
2016-04-17 10:36:11 | 김종설
그분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Henry M. Morris
"하늘에 오르신 분이 누구냐 혹은 내려가신 분이 누구냐? 바람을 자기 주먹 안에 모으신 분이 누구냐? 물을 옷에 싸신 분이 누구냐? 땅의 모든 끝을 굳게 세우신 분이 누구냐?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잠언 30:4).
어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독생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름짓기 가운데서도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창조의 주재자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는 그도 어쩌면 하나님이 아들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고 상당히 놀랬을는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그로서는 모세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물론, 신명기 6:4에 담긴 위대한 단정의 말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를 여러 번 인용하였을 것이기에 하는 추측이다.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아들을 가진다는 말씀인가? 하고.
하나님께서 아굴을 시켜 솔로몬 왕의 잠언 중 매혹적으로 독특한 제 30장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말고는 그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아마 솔로몬이 잘 알고 신임하였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다윗과도 아는 사이였었던 것 같다. 최소한 다윗의 시편(詩片)들에 친숙하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로 주리라.' (시편 2:7, 8).
아굴도 다윗의 미래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 아마 다윗이나 솔로몬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왕좌를 영원토록 굳게 세우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 ' (사무엘하 7:13, 14; 또한 역대상 17:13).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그 영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넘어 다윗의 보다 더 위대한 후손으로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분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신약(히브리서 1:5)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 우리는 이제야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굴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물었던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책에서 이미 하나님을 일컫는 여러 이름들에 - 특히 '하나님 (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하였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The Name of the Father)
비록 아굴의 특정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약성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새 이름은 '아버지'보다 더 아래격인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버지' 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아브(ab))가 구약성경에 500번이 넘게 보이지만, 저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브 (또는 아바(abba), 아브와 동일한 뜻의 아람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때때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예컨대, 예레미아 3:19에서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시고 노예로부터 건지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아브가 되신다는 것을 환기시킨 적이 있다 (신명기 32:6).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가 있다면 -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제외하고 (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 이것이 아마도 아굴이 자기 생전에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예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자, 상황은 온전히 변하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당신의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오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밝히 드러내었고 또 드러내리니 … '(요한복음 17:1, 6, 11, 25, 26)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 (마태복음 6:9).
'아버지' (희랍어로는 pater)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하였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 (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그의 체포가 있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神格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들까지도 - 상황이 허락할 때면 - 우리들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똑같이 그 경이로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아마 이것으로서 세상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에 관한 아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이제는 아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라 불려지게 될 것이다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사 9:7, 킹흠정)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선지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서 보내셨던 때가 솔로몬과 아굴이 세상을 떠나고 근근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선지자 이사야를 시켜 저 두 가지 위대한 예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예언이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성탄절 때마다 두고두고 낭송하는 말씀이다. 즉,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곧 태어날 처녀의 아들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하나님은 이 아들의 이름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보내주셨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기억하라]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이사야 9:6).
얼마나 경이로운 이름인가!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 이 이름들처럼 합당한 이름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 분이야말로 약속되기를 유다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면서도 또한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우리를 닮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으리오.
그의 이름을 '놀라우신 이(기묘자) (the Wonderful)' 라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기적적'이라는 뜻이 있다. 기적적인 개념과 처녀 몸에서의 탄생을 빼고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육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을 것이기에 유일하게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이름은 진정 '놀라우신 이'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도 이 사람처럼 말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놀라우신 이(기묘자) (Wonderful)'와 '조언자(모사) (Councillor)' - 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놀라우신(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놀라우신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강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존하는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골로새서 1:16), 그리고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통치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재자(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 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의 이름 곧 그를 일컬을 이름은 이것이니 곧 주 우리의 의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질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천사 같은 유다의 처녀와 약혼 중에 있던 어느 소박한 목수한테 가브리엘 (Gabriel)천사를 보내셨다. 이 두 약혼자들은 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비록 임신 중이지만 여전히 청순한 처녀이고,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룰 사명을 부여받았노라고 알렸다.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 때보다도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져서 비슷한 말씀을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누가복음 1:31) 라고 전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런즉 또한 네게서 태어날 그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리라'(누가복음 1:35) 라고 놀라운 진술을 부언하였다.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 (the 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 (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분께는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기록된 한 이름이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19:16). 그리고 그가 우리의 영원하신 왕으로서 돌아오실 때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1:15).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아직은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 말하자면, 세례명이라 할까 - 그 이름은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 (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사도행전 2:36)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존경하려면 앞에 언급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이름들을 다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그런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그를 명예롭게 받들어야 하는 이름이 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보혈로 되찾은 이 세상으로 언젠가는 권세와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개선하시는 모습을 예언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었다. 그 때 그는 주님이 앞으로 오실 세상에서 불릴 경이로운 이름 세 가지를 들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 (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다. 즉,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되도다…'(요한계시록 22:6), 그것은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영원히 신실하시고 참되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 (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왕들의 왕, 주들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위대한 날에 전 우주는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이름을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일러준 그의 인간의 이름을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Lord Jesus Christ)' 이시다. 그리고 그 많은 그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나님의 책을 마치는 데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이 하신 이 아름다운 말씀으로 마감하는 것이 적절하였으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Henry M.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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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CR URL : http://www.icr.org/bible/tracts/hissonsname.html번역자 : IT사역위원회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40
킹제임스흠정역 교정본 입니다.
2016-04-15 17:41:31 | 허광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하여 창조과학회에 올라온글.
성경 구절은 개역성경으로 기재된 부분을 킹제임스흠정역으로 대체하였습니다.원본의 영문 Henry M. Morris 박사님은 킹제임스성경을 보시는 분 입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The Bible and Jesus Christ)
Henry M. Morris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그를 구주로, 그리고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위임한 위대한 사역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 28:19, 20).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분이 명령(분부)하신 '모든 것'을 그가 가르쳐 주신대로 모든 족속들에게 가르쳐야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권위자이신 까닭은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6).
그분이 가르쳐주신 모든 진리 중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교의(doctrines)가 있어서, 나머지 모든 교의들이 이에 의존합니다. 그 하나는 성경의 말씀이 갖는 글자 그대로의 무오성 (verbal inerrancy of Scripture) 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이루신 특별한 창조(special creation)입니다.
문제는 이 무오설의 진리를 믿는 많은 크리스천들도 그 창조 교의의 뜻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창조 교의의 뜻에 대한 그 권위를 수용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그런 다음 창조에 관해서는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분이 이 땅(지구)에 계시는 동안, 그에게는 구약성경만 있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그분이 성경의 말씀들을 하나님에게서 오는 오류 없는 말씀으로서 수용하셨다는 것을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 참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말씀들이 참이고, 또 권위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컨대, 결혼과 이혼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최초의 남편과 아내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셨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태복음 19:4-6).
여기서 주님은 창세기 1:27과 2:24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최초의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해 상호보완적인 설명으로서, 주님은 그 설명들을 진리로 그리고 서로 양립하는 것으로 수용하시고, 모든 미래의 결혼에 대한 신성한 모범으로 설정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때, 그분은 성경 말씀들 가운데서 적절한 구절을 인용하시는 것만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마태복음 4: 4,7,10, 사탄의 질문에 각각 신명기 8:3, 6:16; 10:20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는 ”기록되었으되…” 하고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에 의한 말씀으로 글자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냥 생각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그분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자칭한다고 하여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을 때, 그분은 시편 82장 6절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하였노라, 하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그분께서 신들이라 하셨으며 또 성경 기록은 깨뜨리지 못할진대 아버지께서 거룩히 구별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인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그에게, 네가 신성모독한다, 하느냐?” (요한복음 10:34-36).
그분의 주장은 전적으로 시편 82:6에 있는 한 단어, 즉 '신들'(gods) 이라는 단어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 5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
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일점(one jot)' 이란 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중에서 가장 작은 글자이고, '일획(one tittle)' 이란 것은 두 개의 유사한 모양을 한 글자들 사이를 변별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던 작은 표시였습니다. 구약성경 안에 있는 성령 감동의 말씀들 가운데서도 이보다 더 강렬한 표현방법을 쓴 진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진술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진실한 크리스천들은 그의 본을 따라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안목을 견지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관한 한, 그분은 당신의 말씀들이 정확하게 보전될 것임을 우리들에게 확실히 하였습니다.
”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13:31).
사실상 신약의 모든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요한복음 16:13).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신약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 19).
그냥 관념만이 아니고 '이 책의 말씀'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혹시라도 어느 누가 이 경고의 말씀이 그리스도한테서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까 저어함인지, 그 다음 절이 이렇게 밝혀줍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절대무오의 말씀이란 것을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고 또 좇기를 소망하는 우리는 마땅히 그분이 행하시던 바와 같이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믿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던 그분의 선지자들은 물론 그분의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inspiration)으로 쓰였다는 점과 성경의 무오성(infallibility)과 권위(authority)를 믿어야 하는 데는, 이것 말고도 물론 다른 이유들이 많습니다. 성경의 저자들 (모세, 이사야, 바울 등등)은 모두 한결 같이 그런 권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루어진 예언의 말씀들이라면 수백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랄만한 과학적 통찰도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성경의 역사기록들은 알려진 세속사의 모든 사실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성경에 담긴 독특하고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는 최소한 1500 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하여 40 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일치되고 일관된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쓰여진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넓고 넓은 온 세계에서 이와 같은 책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증거보다도 더 위대한 증거는 그리스도(삼위일체 신격에서 두 번째 인격)께서 성경 속의 모든 말씀에 담긴 오류 없는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역사성을, 특히 창조를 설명하면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살펴본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19:3-8 참조). 예수님은 또한 의인 아벨의 살해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마태복음 23:35)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시 노아 시대의 세계적 규모의 대홍수가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6, 27).
이 사건이 어떤 특정 지역에 한정되었을는지 모른다는 관념을 그는 이 사건을 그의 재림과 비교하는 것으로써 부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24:39). 그리스도께서 전 지구적 대홍수(global flood)로 믿으셨던 것이 사실인 이상, 오늘날의 '점진적 창조주의자들(progressive creationists)'도 자신들이 옹호하는 '국지적 홍수(local flood)' 개념을 재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생존시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적 대재앙의 역사성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17:29).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권속들에게 기적같이 내리신 만나 (요한복음 6:32), 불타는 수풀 속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사건(누가복음 20:37),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 (요한복음 3:14), 독특한 솔로몬의 지혜 (마태복음 12:42),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 (마태복음 12:40), 다니엘의 놀라운 예언들 (마태복음 24:15), 그리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 모든 말씀들을 낱낱이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수백만 년 전이 아니고) 최근에 이루어진 창조 때부터 있었던 사실도 가르쳤습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마가복음 10:6).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그곳에 계셨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로부터 46 억년 후에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들에게 억지로 이 오래된 연대를 믿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최근 창조의 진실성을 이렇게 암시하셨습니다.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누가복음 11:50).
즉,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창세 그 순간부터 유혈의 수난을 받고 있다는 말씀은, 창세 이후 46 억년이 지난 후로부터 그랬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다가오는 ”..그 날들에 고난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創初) 세계가 시작된 때부터 이때까지 그런 고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마가복음 13:19) 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창조 이래로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권속들 위에 자질구레한 환난이 많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중에서 단 한 자라도 그 진실성에 의문을 품는 크리스천들에게, 또는 몇몇 현행 과학적 주장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성경을 억지로 풀어보려는 (베드로후서 3:16) 크리스천들에게, 또한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사사로이 풀어보려는 (베드로후서 1:20) 크리스천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즉, 그들은 과연 주님 앞에서 그러는 이유를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로마서 14:12)
라고 하신 로마서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날이 왔을 때, 그리스도가 믿고 가르치셨던 것을 믿고 가르쳤다고 회계보고(직고)할 수 있는 입장이 최선이 아닐까요? 창세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종교지도자들을 반박할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들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5:47).
그분은 ”성경 기록은 깨뜨리지 못할진대” (요한복음 10:3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성경을 폐하려 애쓸 것입니다. 새시대주의자들 (New Ager)과 신비주의자들도 성경을 폐하려 들는지 모릅니다. 세속주의자들이나 쾌락주의자들도 성경을 폐하려 할 것입니다. 온갖 형태의 회의론자들과 심지어 타협적인 크리스천들까지도 성경을 폐하려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폐할 수 없습니다!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
* Dr. Morris 는 ICR의 창시자이며 명예회장입니다.
출처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6&series_id=A0004&orderby_1=editdate%20desc&page=1
원본 : www.icr.org/i/pdf/btg/btg-125.pdf
2016-04-15 12:13:00 | 허광무
2016년 4월 10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i4x8ldEGlw
2016-04-14 11:03:5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