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405개
안녕하세요?   (1) 동영상 설교는 경건의 삶의 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침례교회의 설교와 연동 되어 있으며 설교 동영상 파일 자체는 다운로드 되지 않습니다.   (2) 동영상 강해는 경건의 삶의 성경강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창세기, 계시록, 성막 등이 있습니다.  동영상 파일을 바꾸지 못해서 천천히 작업이 진행되는 대로 창세기와 계시록은 올릴 것입니다. 성경강해 동영상 파일은 다운로드가 됩니다. 마음대로 복사해서 배포해도 됩니다.   (3) 설교, 강해 등의 음성 파일은 자료실의 음성 자료에서 다운받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지금 작업을 진행 중이므로 당분간 기다리셔야 합니다.    (4) 자료실의 음성, 동영상 파일은 마음대로 다운해서 배포해도 됩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리지요.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5-18 14:45:42 | 관리자
5월 12일부터 성막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성막 강해 동영상을 올리니 경건의 삶에서 성경강해를 보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05-18 14:41:1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예기치 않게 회원 가입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주말이라 할 수 없고 다음 주 월요일 이후에 고쳐서 정상적으로 가입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5월 23일(토) 현재 회원 가입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은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여전히 안 되면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알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2009-05-16 10:44:03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여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사제께서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일랜드로 가신다는 소식과 함께 제 서신을 받았음을 알리는 다정한 편지를 받고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를 읽고 저는 사제께서 제가 보낸 편지의 많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또 동시에 천주교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 것에 대해 그리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가 성경과 전통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보여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전에 제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사제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으며 저는 그때에 우리가 너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분모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제께서는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물론 천주교가 인정한 전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만이 믿음과 윤리에 관한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계시요, 그 자체가 진리이므로 신자들이 진심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성경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서 그들을 지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전통을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다양한 의견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못했던 성경의 표현들(결코 성경의 교리들이 아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주의 날’이 한 주의 첫째 날 즉 일요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경의 교부들이 만장일치로 그렇게 가르쳤고 그 이후로 어느 곳에서나(일부 파당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저는 더 이상 거기 나오는 주의 날이 일요일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들의 뒤를 이었던 사람들이, 과거에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혼자 힘으로만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 몇몇 현대의 논쟁자들보다 ‘주의 날’이라는 용어가 쓰인 용례를 더 잘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을 시인합니다. 기독교는 세기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계시의 종교가 아니며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 즉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초기의 말씀 선포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입증된 유산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대 기독교의 화려한 전통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시와 직접 마찰을 빚을 때에 저는 그것을 배격하며 오직 성경만을 믿습니다. 전통은 어려운 단어나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의 교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전통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속박할 수 있는 그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전통을 가지고 사람의 양심을 속박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며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는 위험’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수준에 놓은 사람들이 끝에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위에 올려놓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주교가 일반 백성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주시해 볼 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천주교가 펼쳐온 정책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번역해야 할 책’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천주교는 이런 중요한 책이 보통 천주교에서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읽힐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것 또한 성경보다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천주교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천주교 사제가 필리핀에서 성경을 소각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야만스런 행동이며 20세기 문명 시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신앙의 행위입니까! 사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잘못된 번역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인해 자극을 받은 천주교가 오류투성이 역본, 수세기 동안 한 번도 오류들을 수정하지 않은 역본을 널리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성경을 불태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잘못된 역본이라 하더라도 어두움 속에 갇힌 영혼에게 빛을 비추어 줄 만한 하나님의 진리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제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에게 「두에랭스성경」(Douay and Rheims Bible)을 건네준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천주교 사제들이 제게 화를 냈습니다. 이 성경에는 분명히 로마 교황의 출판 승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그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몇몇 이유 때문에 천주교는 참으로 성경을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사제께서는 “성서 공회들이 그토록 많은 성경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도대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영적인 일에서나 이 세상일에서나 그 유익은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입으로 말할 수도 없으며 펜으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그 유익은 대단합니다.” 환한 태양이 빛을 발해 박쥐나 해충을 물리치듯이 성경은 어디에서나 야만과 독재를 몰아내고 문명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도록 허용하고 장려하는 곳에서는 성경이 미신과 무지를 몰아내었습니다. 영적인 유익에 관한 한 성경이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안겨 준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복을 감히 어떻게 말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위에 떠다니던 성경책이 한 일본 귀족에게 구원과 거룩함을 가져다주었고 그로 인해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출입을 통제 당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오늘날 그 나라에서 평화롭게 선교 활동을 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성경 덕택입니다. 저는 주석이나 해석이 없는 단순한 성경만을 읽고서도 아주 추한 죄인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받은 사례를 많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 번도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국내나 국외의 선교 보고서에는 단지 성경만을 읽고 개종까지 하게 사례들 즉 거의 기적에 가까운 사례들이 가득합니다. 한국에 나간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박사는 동방의 고요한 나라의 한 마을에서 두세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한두 서신서만을 읽고서도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례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는 아직 성경 전체가 발간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의 이 적은 분량의 책들이 산골 마을까지 들어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사실 많은 선교사들이 어떤 나라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든 기반이 닦여 있고 영혼들이 깨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천주교가 미워하는 성경 보급자들이 이미 거기 먼저 들어가서 성경을 팔고 복음서 같은 성경의 일부 책자를 원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의 길을 바르게 보여 줍니다.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전통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유서 깊다할지라도 신뢰할 수 없으며 사람의 혼을 속입니다.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등불과 태양 빛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의 교리 중에서 사람의 전통이 제거하려고 하거나 애매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은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사람의 전통이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사제께서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주의 날’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신빙성 있는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을 단지 확증해 줄 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크리스천의 교리가 아니라 ‘주의 날’이라는 용어의 용례와 의미였습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은 성경의 여러 구절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는 데 도움을 주지만 성경의 교리에는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신자들이 사용했던 성경 용어의 용례를 잘 아는 것이 때로는 새로 유행하는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저의 취지는 결코 밝은 태양 빛을 보여 주기 위해 등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람의 이성에 의해 어둡게 된 캄캄한 구석의 일부를 밝히는 데에는 심지어 그 미약한 등불도 유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면서 전통들을 하나씩 하나씩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고 만일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교회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늘어날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천주교 사제가 1년 동안 오직 성경만을 읽되 매일 같이 기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경만을 읽으면서 자기가 배운 것 중에서 성경과 일치한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하기로 결심한다면 12달이 지난 후에 그는 수많은 전통적 우화들을 폐기 처분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큰 복과 깨달음을 경험하였으므로 그 이후에도 오직 성경만을 주 연구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또 완전한 날이 이를 때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나는 의인들의 길 속에서 화평과 경건함 가운데서 걷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1년 동안의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았으므로 자기가 폐기 처분한 사람의 전통과 교회의 교리들을 결코 동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때 자기가 경시했던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호흡이 있으며 빛과 진리의 말씀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하늘의 양식 창고 속에서 자기의 모든 영적인 필요가 충족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 친애하는 사제님, 부디 확신을 갖고 제가 무책임한 열성분자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는 것과 성경에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교리들에 관한 지침서들을 읽는 것은 결코 성경 그 자체를 읽는 것과 견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귀를 틀어막은 사람을 어찌 건방진 사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의 타락에 대해 경고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엄중한 권면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이 같이 경고한 후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디에다 위탁하였습니까? 전통의 권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공회의 결정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의견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다음의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시고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32절).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도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명백한 교훈을 무시하였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성경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오류투성이며 수도 없이 번복된 전통과 교회와 공회를 따라갔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만 굳게 붙드는 제가 잘못하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사제께서도 이렇게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사제님을 위해 진심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신실한 벗   해리 아이언사이드 드림 추신 - 저는 사제께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며 그래서 사제께서 더 이상 서신 교환을 원치 않으시면 다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2009-05-13 16:18:40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다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지난번 편지의 결론 부분에서 사제께서는 비록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결국 영생은 기독교의 여정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킨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적절한 예로서 사제께서는 주인의 명령을 끝까지 잘 지킨 자에게 주인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크게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결코 서로를 혼합시킬 수 없는 진리의 두 선(線)이 확연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중 한 가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왕좌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값으로 친히 사신 구원 즉 우리가 값없이 얻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로써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시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난 이 칭의의 복에 관해서 성경은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공로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행위와 공로는 이처럼 엄청난 구속(救贖)을 얻는 데 필요한 속죄 값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들은 구원받은 뒤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이 엄청난 선물을 유지하는 데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선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수고하셔서 친히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지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 명쾌한 설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제께서 성경을 펴서 로마서 3장 1절부터 5장 11절에 이르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완전히 길을 잃었음을 발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들로 인한 화목 제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더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이것에서 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요 완성된 사역으로 이미 끝이 난 사역입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미 끝난 일에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것을 망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에는 사람의 어떤 공로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도 필요 없고 성자나 천사의 중보도 필요 없으며 의식이나 예식도 물론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게 만든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유효합니다.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버나드)가 죽는 순간에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은혜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께서는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시여, 당신의 상처만이 내가 내세울 공로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그분의 공로 위에 서 있네. 나는 더 이상 안전한 기반을 알지 못하네. 임마누엘의 땅 영광이 거하는 곳이라도 그분보다 안전하지는 못하리. 이것은 행위와 상관없는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빚더미 속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서 나지 않고 모든 신자가 선한 일을 했으므로 이로 인해 각 신자에게 빚을 지신 하나님께서 어쩔 수없이 그 빚을 갚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은 이런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며 사람의 의(義)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공로는 오직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단 번에 성취하신 사역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로는 행하는 데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공로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행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도 완전히 제외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 큰 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 2장에서도 똑같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또한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6절). 우리는 결코 이 두 원리를 혼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둘 중 하나로만 구원받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제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과 또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사 지키고 따르라고 하신 지침들에 순종할 때에 마지막 날에 이에 대한 보상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성경 구절이 영혼 구원의 문제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보상을 주실 자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제께서도 확인해 보시면 이 점을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은혜로 영생을 소유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 의롭게 된 이후에 그들의 몸에서 이룬 행위들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보상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련한 처지의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그는 본성과 행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영원히 불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그 순간 영생을 소유합니다. 저 큰 대적자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고소한다 해도 그 모든 고소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한한 효능에 의해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영원토록 구원받습니다. 전도서 3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리라.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무엇을 뺄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그에 부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이제 무한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주님께 복종해야 하며 말씀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따라 걸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제 상태가 바뀌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처럼 것을 책임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 함께 모일 때에 여기 이 땅에서 그분을 섬긴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됩니다. 보상과 그에 따른 관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 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의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딤후4:7-8).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그 날을 바라보며 그때에 거기에 자신을 위해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 일이 자기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여기서 관은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여기의 관(Crown)은 왕들이 쓰는 관(Diadem)이 아니라 경기의 승리자들에게 주는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획득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가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사제께서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도 결코 이 사실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드러난 은혜를 나타내야 하며 성령의 열매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믿음 고백이 거짓 고백이 아니라 참 고백임을 분명히 보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에 동의를 표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마음속에 받아들여 우리 속에 그 증거를 소유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선한 행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열매를 맺으며 특별히 선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이같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1-22). 사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노인이었으며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그는 장차 자기에게 씨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의 출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메시아가 이삭을 통해 오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래서 사실은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 행위를 가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유했던 믿음이 산 믿음임을 보여 준 증거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보통 ‘신실한 말’(faithful saying)이라 불리는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밀이로다.”이며 다른 하나는 디도서 3장 8절로서 “이 말은 신실한 밀이로다. 원하건대 너는 확고하게 이것들을 단언(斷言)하라. 그 목적은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진리의 양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그분에게 모든 찬양과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부지런히 선한 행위를 이루어야 한다고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선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다 같은 정도의 영적 기쁨을 맛보지는 않습니다. 그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도 보상에 관한 한 서로 다른 등급의 보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도 동일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많이 맞으며 어떤 자들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에서 쫓겨나 바깥의 어두운 곳에 즉 불 호수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지만 그들이 받는 형벌의 정도는 그들의 죄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들도 그들의 유일하신 구원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영원히 하늘나라에 거할 것이나 그 영원한 왕국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고 어떤 보상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므로 과연 누가 이와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께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실 것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성경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과연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그 믿음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제 편지가 사제님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편지에서 길게 답변을 적기보다는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제기한 문제 중 하나라도 가볍게 대하고 싶지 않으며 사제께서 제게 보낸 답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저는 사제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싶지 않으며 단도직입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15:25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네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이번에 저는 중재(Mediatorship)와 변호(Advocacy)라는 주제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명백한 말씀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5). 흔히 크리소스톰의 글로 알려져 있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설교’에 들어 있는 진술 즉 “성경 말씀과 배치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보편적(Catholic)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중보라는 주제에 관한 천주교의 교리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어거스틴은 “성경을 믿는 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중재자는 오직 한 분뿐이며 다른 중재자는 없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만일 천주교가 이와 상반된 것을 가르친다면 천주교는 결코 거룩하고도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th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될 수 없습니다. 사제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 즉 은혜와 구속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변호자와 중재자를 많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요셉이 매우 거룩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 중재자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록 사제께서 한 중재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셨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천주교의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제께서 말씀하는 것 즉 유일한 중재자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천주교 신학자들의 교리 서적이나 경건 서적에서조차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실 저는 의심이 갑니다. 천주교가 우리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밑에서 제가 인용한 구절들, 즉 교황들이 허락한 기도 모음집인 「라콜타」(Raccolta) - 리틀튼이 편집하여 권위를 부여함 - 에서 인용한 기도문들을 통해 천주교가 마리아의 위치를 극도로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 인용문들의 권위를 인정하시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왕이시요, 긍휼의 어머니시요, 우리의 생명이요 감미로움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신 이에게 찬양을 드릴지어다! 이브의 추방당한 자손들인 우리는 당신께 울부짖나이다. 우리는 이 눈물 골짜기에서 당신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탄식하나이다. 오 우리의 변호자시여, 당신의 긍휼의 눈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이제 우리가 추방되었사오니 당신의 태의 축복의 열매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오, 긍휼이 많은 분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의 동정녀 마리아시여! 오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거룩한 이시여, 우리가 당신의 보호 아래로 날아가나이다. 곤궁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간청을 멸시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항상 구하여 주옵소서. 오 영광스러운 축복의 동정녀시여.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동정심 많은 마리아여…천사들과 사람들의 존경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여…선으로 가득하신 분이시여, 항상 우리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는 분이시여, 부디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 주옵소서…거룩한 교회가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얻게 하시오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의 기쁜 피난처와 망대와 힘이 되어 주옵소서.…곤궁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시험에 빠질 때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며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위험에 처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소서…. 친애하는 마리아의 마음이시여,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내 어머니시여, 나를 내 손안에 버려두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나이다. 내가 오직 당신께만 매달리게 하옵소서. 나의 희망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지옥에서 구원하소서. 리구오리가 지은 「마리와의 영광」(Glories of Mary)에서 발췌한 다음의 인용문을 읽고 난 뒤에 마리아가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간주됨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피난처요 도움이요 은신처이시다. 고대 유대에는 여러 개의 도피성이 있어서 범죄자들이 보호받기 위해 이곳으로 도피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같은 도피성이 많지 않으며 유일한 도피성은 오직 하나 즉 마리아뿐이다. 마리아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죄인들을 징계하려 하는데 일어나서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셨다. 사실 그분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무는 우리의 복 받은 마리아 즉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그분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분이 맡아야 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리 응답을 받고 또 보호를 받는 길이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마리아께 구하면 얻을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명령에는 만물이 복종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복종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마리아의 사랑과 보호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가 말만하면 그의 아들이 모든 것을 집행한다. 천주교회는 죽어 가는 자들의 입 속에 “은혜의 어머니요, 긍휼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죽음의 시간에 나를 받아 주소서”라는 구절을 넣어주지 않는가? 이 말은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죽으면서 한 말 즉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아 주소서!”와 얼마나 다른가? 이제 다시 「라콜타」(Raccolta)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발견되는 다음의 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거룩한 동정녀시요, 하늘의 여왕이시요, 온 우주의 여주인이시요, 영원한 아버지의 딸이시며 그분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시며 성령님의 가장 사랑 받는 아내인 마리아시여, 나는 당신을 인정하며 당신을 존경하나이다! 위대하신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겸손히 기도하나이다. 하늘로 들어가실 때에 그토록 풍성하게 소유하셨던 하나님의 긍휼로서 부디 내게 은혜와 동정심을 베푸소서. 또 나를 취하사 당신의 가장 안전하고 신실한 보호막 아래 놓으시고 당신의 행복하고도 총애 받는 신하 중 하나로 삼으소서. 또한 나의 이름을 당신의 처녀 가슴에 새기시옵소서. 사제께서는 중보의 본보기로 성 요셉을 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요셉의 중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요셉에게 바친 「라콜타」(Raccolta) 기도들 가운데 들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인용문을 볼 때 과연 제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보호자이신 자애로운 요셉이시여, 우리와 성 교회를 보호하소서. 동정녀들의 수호자요 거룩한 아버지이신 요셉이시여, ‘죄 없으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신실하게 보호하신 분이시여, 내가 사랑스런 두 보증인 곧 예수와 마리아를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하며 간청하나이다. 나를 모든 불결함에서 보존하사 흠 없는 생각과 순결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항상 정조를 지키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경건 기도서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제쳐놓고 그분보다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천사들과 성자들을 중재자로 내세운 예를 수도 없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20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일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오직 그분께만 간청할 수 있다.”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한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70년에 삼위일체 이단 교리인 아리우스 주의를 비난하면서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신격의 영광을 격하시키면서도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이시다.”라는 성경 구절의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을 조롱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연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 즉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런 구절이 주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 성도들이 결코 창조된 존재를 가리켜 자기들의 도움이요 피난처라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성경 말씀과 일치합니다. 성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1-2).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의와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마음은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인자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언제나 풍성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따른 자신의 어머니나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에게 간청할 어떤 성자나 천사 같은 중간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중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제사장으로 동정심이 많은 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가 됩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다른 어떤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하신 중재자이십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사제께서는 신자들이 땅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하늘의 성도들이 변호해 주는 것과 것으로 여기시면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그 편지의 끝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료 신자인 당신을 위해 제가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나도 당신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 곁에서 나의 중보자와 나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당신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성령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중재자와 변호자의 신분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 크리스천으로서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할 뿐이며 결코 저의 개인적인 공로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사제께서 읽으라고 보내 주신 설교 말씀 즉 사제께서 성 요셉의 중보에 관해 설교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과 저의 생각이 분명히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친근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경계할 만큼 조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어떤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바로 이 복을 원합니다. 제가 만일 천주교가 제시하는 수많은 작은 중보자들 즉 마리아와 성인과 천사들을 원하여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저는 영원토록 이 복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추신 - 저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가 천주교 성당의 사진을 정면에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정문 위에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영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마리아에게로 오라. 그녀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마리아를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여긴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닙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을 이보다 더 무섭게 왜곡할 수 있습니까?
2009-05-13 16:12:13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세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전에 약속드린 대로 오늘 저는 매우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보이는 천주교의 소위 미사라는 희생 제사 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제께서 미사를 살아 있는 성도들과 죽은 성도들의 죄로 인해 계속해서 드리는 피 없는 제사라 주장하셨습니다. 또한 사제께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적어도 2세기까지는 기름부음 받은 사제들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제단 위에서 이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의 초기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 교리 즉 교회의 전 체계의 중심이 되는 이 교리에 대해 오류를 범했겠습니까? 혹은 전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진리 속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폐기시켜야 할 그런 황당한 제도를 만드실까요? 그렇다면 ‘지옥의 문들이 그것(교회)을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등과 같은 주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받고 사실 저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진리의 영께서는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지옥의 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가 아니라 - 이미 오류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감동적인 편지의 증거를 살펴보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퍼진 이단 교리는 은혜의 언약에다 율법의 행위를 더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1세기의 이단 교리가 오늘날에는 정통 교리가 되고 말았다.”고 잘 말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즉 갈라디아 사람들의 오류가 없는 교회 공동체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이런 오류가 하나도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천주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회에는 다른 어떤 교회와는 달리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 오류가 세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인 이신 칭의 교리 즉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마치 폭풍과 같이 몰아치던 종교개혁 시대에 새로이 발견된 교리처럼 간주했으며 이것을 막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또한 골로새 지방에 몰래 기어 들어온 오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골로새서 2장에는 진리로부터 떠난 세 가지 중대한 오류가 나와 있는데 이것들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에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다음의 세 가지 중대한 오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대치하려는 이성주의 철학적 경향이며, 둘째는 은혜의 진리를 대체하려고 율법 중시 경향이며, 셋째는 가장 심각한 것으로서 머리되시는 주님을 붙들지 않고 스스로 몸을 학대하고 천사들을 숭배하는 무서운 의식주의의 제도화 경향입니다. 저는 이제 사제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께서는 이 같은 오류가 하나도 빠짐없이 현대 천주교 안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뿐 아니라 디모데전후서도 오류들이 급속히 퍼져 나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즉 그의 생전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다른 곳의 기독교회들이 아직 믿음을 굳게 잡고 있을 때에 가장 오래된 모임이 형성된 아시아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배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 점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의 초창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주의 만찬의 상과 단순한 기념 명절을 버리고 실제로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또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Biblical)이라거나 사도적(Apostolic)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물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Catholic)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 무렵에 제단이 주의 만찬의 상을 대체하고 미사라는 희생 제사가 주의 만찬을 대체했음을 보여 주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들 즉 니케아 공회 이전의 교부들 가운에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주지 않았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그 누구보다도 주의 날에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집회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초대 크리스천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플리니의 저 유명한 편지도 그가 살던 때에 여전히 그와 똑같은 일이 있었음을 사실로 보여 줄 뿐입니다. 플리니는 자기의 상관인 트라얀 황제에게 크리스천들에게서는 어떤 악도 찾아볼 수 없으며 신성 모독이나 범죄 행위를 발견할 수 없음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보낸 정탐꾼들은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찬송을 드리며 빵과 포도즙으로 구성된 간단한 식사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이 같은 단순함에서 이탈하여 그리스도의 단번 희생 제사와 그분께서 단번에 끝내신 십자가 사역에 관한 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주 후대의 일입니다. 이때에는 사도 바울이 엄중하게 예언한 대로 사나운 이리들이 그리스도의 양들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말들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들을 위탁한 곳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뿐입니다. 그는 결코 교회의 권위나 공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무오류성 같은 것에다 그들을 위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산 자나 죽은 자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를 지금도 드릴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장과 10장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 즉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희생 제사와 율법 아래서 이스라엘이 드린 모든 희생 제사 즉 그림자에 불과한 희생 제사가 생생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율법 아래서 드린 예물과 희생물은 양심에 관한 한 결코 경배하는 자를 완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희생 제사들은 단지 계속해서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천주교의 미사 즉 천주교 사제가 드리는 희생 제사의 경우에도 그래도 해당됩니다. 천주교에서 매일 같이 성체 성사 즉 미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죄는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9:11-12).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의 효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신자들의 양심은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이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께서는 이것이 천주교에서 매일 드리는 미사라는 희생 제사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께서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천주교 희생 제사의 희생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갈보리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미사의 희생물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이 시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위대하심과 우리가 그분께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만 드리는 희생 제사입니다. 우리가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은 제사장들의 사역에 의해 제단에서 드려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주 제사장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즉 빵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꾸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주장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히브리서 9장 24-26절은 이 점에 대해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여기서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 드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완벽하며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이며 그래서 복되고 완전히 끝이 난 일이므로 그분께서 결코 되풀이해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을 다 끝마쳤다는 표시로 이제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죄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셨으므로 하늘의 전능하신 아버지의 왕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시며 천주교의 제단이나 그 밖의 다른 제단에서 또 다시 자기 몸을 희생물로 드리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러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와 불법은 단 한 번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서 영원히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히10:1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사제께서 주장하는 천주교의 미사 즉 피 없는 희생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으면 사면(赦免)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이 세상의 어떤 논증으로도 이 같은 사실의 정당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데 충분하며 따라서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다시 살펴보면서 저는 사제께서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부인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천주교의 성체 성사가 주의 만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제께서는 주의 만찬이라는 말이 단지 초대 기독교인들이 교제하러 모여서 함께 나눈 공동 식사 즉 애찬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오용한 것을 꾸짖은 다음에 어떻게 주의 만찬을 지켜야 할지 사도 바울이 상세히 가르쳤다는 점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는 우리가 주의 상에서 축복의 잔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부서진 빵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의 상에서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주의 만찬입니다. 만일 사제께서 이 두 가지가 다 ‘미사라고 하는 천주교의 희생 제사’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는 사제께서 옳다고 인정하겠습니다. 주의 만찬을 천주교의 미사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며 주의 상을 천주교의 제단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기독교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와 이교도 주의가 묘하게 혼합된 혼합물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천주교의 미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단 한 줄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중대한 주제에 대한 더 이상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면 제가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려 드리려고 해도 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 신학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 하며 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편지를 맺으면서 간청하건대 부디 이 일들이 정말 그런가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가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사제의 영혼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제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십자가의 그 영원한 사역에 무엇인가를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7:32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두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저는 이제 천주교에서 소위 평신도라 불리는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의 잔을 주지 않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제께서 하신 말씀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킴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으며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고대 자료들이 사제의 주장과 배치된다는 점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주의 만찬의 요소인 빵과 잔 중에서 신도가 빵에만 참여할 것을 명한 법령은 1415년 6월 15일에 통과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천주교회에 교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령을 통과시킨 공회가 1415년 5월 29일에 교황 요한 23세를 폐위시켰으며 그 뒤 1417년 11월 11일에 가서야 그의 후임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전에는 평신도라도 빵과 잔에 다 참여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변증가들은 교황이 주의 만찬의 두 요소 즉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과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에 참여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사제들은 원래의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게 하고 평신도들은 한 요소에만 즉 빵에만 참여하게 하도록 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콘스탄스 공회의 이 법령은 그 전에 내려온 천주교의 다른 법령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황 레오’(Pope Leo the Great)는 마니 교도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하지 못한 입으로 그리스도의 몸 - 물론 그는 지금 주의 만찬의 빵을 말합니다 - 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구속한 피 - 천주교 해석에 따르면 그는 지금 잔을 가리킵니다 - 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에게 이 같이 신성을 모독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음을 알리며 이들을 사제들의 권위로 성도들의 교제권에서 추방할 것을 알리노라”(그의 41번 설교에서 인용함). 한편 교황 겔라시오 1세는 교황 레오보다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조리쿠스와 요한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 이것은 후에 천주교 법령집에 수록되었음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성스런 몸만을 먹고 거룩한 피의 잔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어떤 미신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진술했으므로 이런 자들은 성찬을 다 받든지 아니면 성찬에서 완전히 제외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라. 동일한 성찬물 즉 그 신비를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Corp. Jur. Can. Decre. 3:11,12). 교황 우르반 2세가 주후 1095년에 주재한 클레몬트 공회의 선언도 이와 동일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나 조심하려는 이유 이 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는 몸과 피를 동시에 받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제단에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노라.” 그 다음 세기인 주후 1118년에 교황 파스칼 2세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폰티우스에게 글을 쓰면서 성 키프리안(St. Cyprian)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키프리안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주의 몸과 피를 받을 때 주님께서 정하신 전통을 지키도록 하라. 사람의 제도를 추종하면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정하고 명하신 데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주님께서 빵을 따로 주시고 포도즙을 따로 주셨으므로 이 전통을 가르치고 성 교회에서 항상 지키도록 명령하라. 빵을 삼킬 수 없는 유아나 병자를 제외하고는 이를 지키도록 하라.’” 이런 중요한 문제를 다루면서 회의를 주재하는 교황도 없었던 종교 회의에서 네 교황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면  천주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기들의 실행과 교리가 보편적이며(Catholic) 사도적(Apostolic)이라 결코 변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천주교는 이 점에서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히 폐기시켰습니다. 사실 이것은 카톨릭 신자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이 말씀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자연스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사제가 아니면 잔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요한복음 6장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주의 만찬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이것이 단지 커다란 영적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일까요? 저는 후자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제께서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도 사제께서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채택하는 일에 있어서 역시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물론 사제께서는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회의 해석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회의 해석보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이익을 구하던 유대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그 양식을 위해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느니라”(요6:27). 사실 그들은 그분께 광야에서 자기 조상들에게 만나를 베푼 모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분께서 자기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빵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47-48절). 이 말을 듣고 불신에 찬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이에 예수께서는 이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53-54절).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무엇을 행하려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곧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심으로써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 주님은 아직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또 그분의 몸도 죽음으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께 나온 자들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한 새 생명을 이미 소유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며 57절은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아님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57절에서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그것은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분 즉 아버지를 신뢰하리라.”는 말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늘 하시던 말씀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이것이 곧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63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저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아직 제정하지도 않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분을 믿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영적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어떤 공회도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던 주님의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아직 단 한 번도 주의 만찬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온 세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 피를 마시는 것이며 이로써 영원한 생명 즉 천주교 미사를 통해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생명을 소유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천주교 신자 중에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자기가 영원한 생명 - 결코 위조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생명 - 을 소유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이 미사라는 성례전도 천주교의 다른 모든 성례전과 마찬가지로 그 참여자에게 마지막 결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기 참여해도 결국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47절)는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는 달리 확신을 갖게 됩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실례가 되지 않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사제께서는 자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큰 선물 즉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제께서는 스스로 영생을 소유하셨다고 확신하십니까? 사제께서는 천주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봉사했으며 천주교의 명령에 복종해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 사제께서는 죄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안식을 누리십니까? 사제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제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까? 오 친애하는 사제님, 만일 사제께서 이런 간단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충성을 다한 천주교회는 어찌하여 사도적 기독교를 기뻐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확신과 평화를 주지 못하는가?” 혹시 사제께서는 지금까지 길을 헤맨 것이 아닙니까? 사제께서 책임지실 일은 아니지만 실로 사제께서 속한 천주교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의 단순한 복음을 떠나서 심각한 배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저는 천주교 성찬식에서 미사의 성격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4:19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첫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A.M.S. 사제님께: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아직까지도 사제께서 보내 주신 마지막 편지 두 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들을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사정상 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에는 아파서 병석에 누워 몇 달을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만 제때에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제와 다시 편지 교환을 하기에 앞서 저는 천주교의 가르침과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양쪽을 다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뉴먼(Newman)과 치니키(Chiniquy)의 책; 기본(Gibbon)과 리틀데일(Littledale)의 책; 「카톨릭 백과사전」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글; 교부들의 글, 니케아 공회 전․후와 중세와 현대 신학자들의 서적들 등등. 사실 저는 어떤 편견 없이 또한 사실을 잘못 표현하는 일이 없이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사제와 함께 살펴보기 위해 이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예전보다 한결 더 진지하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번의 연구를 통해서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천주교 교리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 혹은 기독론 - 를 깊이 인정하는 데 대해서는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통치자와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두는 한 몸 즉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한 지체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믿는 참 신자는 모두 다 성령님의 침례를 통해 그 한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마의 주교 즉 교황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처럼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심각한 저주의 말씀을 선언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지상에서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이 이처럼 두려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갈1:6-9). 마지막에 보낸 편지에서 ‘복된 성사 안에 담긴 실제적 임재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께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복된 성찬 속에 실제로 임재합니까? 아니면 그것이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까?” 이제 저는 아주 확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와 고대의 모든 기록은 사제의 주장 즉 미사에서 빵 조각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합니다.” 저는 사제께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무모하신 분이라는 점에 사실 크게 놀랐습니다. 분명히 사제께서는 교부들과 역사에 대해 잘 아십니다. 특히 교부들의 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사제께서는 니케아 공회 이전 시대의 교부들이 어디에서도 지금 사제께서 주장하시는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천주교가 수세기 동안 그런 교리를 주장해 왔다는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가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루터도 이와 비슷한 것을 가르쳤으며 헨리 8세 이후의 일부 영국 국교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도 천주교의 교리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가르침들은 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고대의 가르침은 최근의 이러한 가르침들이 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 지금 ‘고대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의 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권위 있는 기록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사제 앞에 다 제시하면서 사제께서 가능한 한 니케아 공회 이후의 신학자들이 세워 놓은 이론은 잊어버리고 단지 이 말씀들만을 제대로 평가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제께서는 또한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이 천주교의 해석을 지지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26-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의 기사도 비슷하지만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저는 마가복음 14장 22-25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그것을 마시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성속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기사는 두 절(눅22:19-20) 밖에 되지 않습니다(17-18절은 주의 만찬이 제정되기 전에 있었던 유월절의 잔을 가리킵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사제께서 아시다시피 성도 요한은 기독교의 어떤 명절을 제정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관해서는 나중의 편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에서 주의 만찬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이제 주의 만찬에서 ‘잔’에 관하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문자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저는 한 가지를 더 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미 피를 흘리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니라”(This is my blood which is shed). 아직 피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흘렸다고 하시므로 “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흘렸다.”(which is shed)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사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잔에 담긴 액체를 가리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the fruit of the vine)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액체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했다면 사실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논제는 마가복음 기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으며 누가복음은 이를 더 강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사제께서는 과연 그때에 주님께서 “이 잔 속에 새 언약이 담겨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 잔을 마시면 새 언약을 마시는 것이다.”라고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주님께서 이 ‘잔’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고 하실 때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논리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미 그분의 몸이 우리를 위해 주어져서 희생되고 부셔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빵에 대해서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한 빵이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초기의 사도 교회들이 다 이런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배도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에 다른 어떤 의미도 첨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혼과 신성이 하나 속에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그로 인해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실재적 임재의 교리 즉 화체설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빵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넘겨진 그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구별된 그분의 피를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몸과 피의 분리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대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고전11:28). 여기서도 이것은 여전히 빵이며 잔입니다. 빵과 잔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빵과 잔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의 미사를 행하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구절 속에서 드러난 주의 만찬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평신도와는 구별된 성직자 계급 혹은 거창한 고위 계급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크리스천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독교의 단순한 명절을 지키는 것뿐이며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건하게 두려움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1:11 | 관리자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요즘 옥성호 형제가 한국의 비뚤어진 기독교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맹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 옥 형제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저희 근본주의 성도들이 주장해 왔던 것인데 우리는 워낙 수가 적고 괴상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주류들이 우리 말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책을 내니 그들도 참으로 난감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맹공격이 쏟아지고 있고 이에 옥 형제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속시원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제 아내가 알려줘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옥 형제를 통해서 근본주의 신앙을 일깨우고 나중에는 킹제임스 성경까지 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옥 형제가 칼빈주의의 틀 밖으로 나와서 더 넓은 성경의 지식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게시판도 활성화 되어 있고 너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자주 가셔서 보고 격려도 하고 킹제임스 성경도 소개하고 알리기 바랍니다.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옥성호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게시판에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히 대립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옥성호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쓰고 또 ‘방언’에 대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얼마 전 제가 모 신문사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2.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조엘 오스틴,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등 미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을 실명 비판한 사실과 좀 더 명쾌한 신학적 시도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을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책을 펴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저보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구도자 예배’나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 있는 신학보다는 제 책 속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조엘 오스틴의 책들 속에 무슨 ‘신학’이 있습니까? 그 친구 스스로가 자기는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분들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무신학’ 또는 ‘얄팍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책에 대해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썼다는 점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비판 내지 아쉬움’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분들이 내는 책들을 향해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더 많이 요구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유명한 분들의 책들을 향해 좀 더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제대로 검증해왔더라면 아마도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못 잡은 강도를 시민이 잡았더니 경찰이 나타나서 시민에게 ‘강도 잡는 법’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책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폭넓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간증집’으로 넘치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나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가 이번에 나온 책과 관련해 바라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옥성호씨, 저는 당신이 고전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에 대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이런 근거로 볼 때 그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놓고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보는 논쟁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토론을 통해서 이곳에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는 옥성호는 성령을 방해하는 자이다’라는 말보다.....“왜 사랑이 없어요? 왜 당신은 기독교 안에 분열을 조장하시나요?”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듭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가 납니다. (물론 이 경우도 '더 안타깝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요....) 교회 안의 이런 식의 만연한 태도가 한국 교회를 오늘날 이 상황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부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강조했듯이... 크고 성공하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으로 가득 채운 황당무계한 책을 번역한 조용기 목사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를 성경 외에 천국에 대한 다른 계시를 들이밀며 분열을 조장하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성공했으니까요. 성공은 진리이고 선이니까요. 분별이 정죄가 아니듯이 사랑도 무조건적인 용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게 좋은거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심부기’에서 썼듯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아니....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느끼는 ‘불편함’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분열이 무엇입니까? 돌팔이 의사가 우연히 몇 명 병을 고친 후 소문이 나서 병원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돌팔이 의사의 정체를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병원에 앉아있는 환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사람 엉터리 의사에요.” 그러자 누가 벌떡 일어납니다. “환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다줍니까? 환자들에게는 특히 ‘심리적 절대 안정’이 필요한 걸 모릅니까?” 마틴 루터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는 ‘분열주의자’라는 딱지입니다. 카톨릭(원래 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 일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으로 하나 되어 잘 나가던 교회를 아예 완전히 산산조각 분열내지 않았습니까?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의 종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협력하지 않고 영국 교회 내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켰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람이 완전합니까? 빌리 그래함이라고 약점이 없겠습니까? 몇 가지 맘에 안 드는 점들은 눈 좀 감고 넘어가면 어디가 탈이 납니까? 교계를 초월해 모두가 하나되어 빌리 그래함을 선두로 ‘복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는 영국 교회에 왜 혼자 잘났다고 반대를 해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습니까? 왜 존 맥아더 목사는 그토록 ‘극단적’인 책들을 계속 씀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왜 교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근본주의자’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합니까? 가끔씩 나오는 래리 킹 쑈 같은 곳에서 좀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꼭 그렇게 고집스럽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의 냉소와 조소를 받아야 합니까? 그럴 거면 왜 TV에 나와서 기독교 망신을 시킵니까?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우리 예수님까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지켜온 각종 율법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습니까?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은 일을 하면서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교계에 일대 분열을 일으키셨습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분열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어떤지 아십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목사님이요? 물론 하는 소리는 다 틀리지요. 성경의 ‘성’자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참 저 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정말 사랑이 넘쳐요. 저 표정 한번 보세요.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런 표정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게 아니거든요. 저는 저 분 얼굴만 봐도 은혜를 받아요. 설교 필요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되요. 내 평생 저 분 설교에서 딴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는걸 못 들었어요. 참...대단해요. 다 사랑으로 용납해요. 얼마 전에는 이단들까지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였데요. 정말 은혜스러워요.” and "저 분 말이 뭐 일리는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분 목소리가 왜 저래요? 표정을 꼭 저렇게 딱딱하게 해야되요? 좀 웃으면 안되나? 말은 일리가 있는데 영 은혜가 안되요. 사랑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안타깝네요.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 아니에요?“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일치입니가? 그런데....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한 가지 덧붙이지요. 다수는 또는 주류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수는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민노당 주장이 일리는 있는데 너무 과격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말입니까? 소수는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폼을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 외침은 소수입니다. 아니, 극히 소수입니다. 소수는 외치고 또 외쳐도 들릴까 말까입니다. 저는 분열을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는 부부가 밖에서는 다정한 채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곪아 터진 관계를 터뜨리려니 우리가 잉꼬 부부인줄 알았던 이웃들이 충격받을까봐 계속 친한채 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이게 정상적인 부부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부부사이의 관계입니까? 이웃에 대한 체면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100% 맞는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옳다는 주장 속에도 반드시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랑과 연합 구호’ 때문에 나날이 실종되어가는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과 분열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치....아니 ‘무관심’이야 말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게시판에 오시는 분들은 다른 어떤 게시판들에 방문하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신 분들입니다. 그 누구도 옥성호라 ‘이렇다’라고 한다고 ‘이렇다’라고 생각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이런 글 쓰는 거 또 이런 싸움 하는거 재미없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저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합니다. 괴롭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일개 집사가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책을 많이 읽고 가장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갓피플에서도 ‘하늘의 언어’의 내용에 대해 수백 명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가는 이 상황이 안 보이십니까? 지금이 5백 년 전 종교개혁의 시기 카톨릭보다 우리 개신교가 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 때보다 말씀이 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빗 웰즈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사랑과 일치’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을 거부하자는 주장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진짜 사랑은 진리로 하나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7:17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2): 사도행전의 체험은 지금도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 ‘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2: 사도행전의 체험들이 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 나온 내용에 대개 들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과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실제 행해졌던 때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은사들은 표적의 성격을 지니며 하나님의 새 메시지 곧 신약을 전하는 자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자 표적의 은사들은 그 소임을 다했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그 동료들이 보여 주었던 기적의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기의 것을 가지고 현재의 교리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룹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 시대에 태어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바로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비로소 신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였던 모세의 법을 성취하시고 끝내셨습니다. 또 그것 대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두셨고 이 복음이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물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성전 예배 등을 행했고 사도행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하나님께 정결례를 드리는 등 율법에 따른 관행들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동차에서 기어를 바꾸셨는데 백성들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새로운 운행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일시적이나마 자신을 특별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과도기 역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교회 시대 전체의 청사진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모습의 교회를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첫째,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서신서에 나타난 역사들과 늘 같지는 않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쳐서 죽이심으로 즉각적인 교회의 징계를 보여 주셨습니다(행 5:1-11). 그러나 서신서에서 하나님은 지역 교회가 죄지은 자를 겸손하게 기도하며 징계하라고 말합니다(고전5:1-5; 고후2:5-11; 갈6:2; 살후3:6-14, 15; 딛3:10-11). 오늘날의 지역 교회는 앞에 나온 두 가지 경우처럼 차이가 있을 때에는 과도기의 사도행전의 예가 아니라 모든 것이 확정되고 이방인 교회를 향하여 주신 에베소서를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행전이 오늘날 교회의 청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식대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침례의 교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둘째 축복이라는 의견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강림이 늦어진 경우가 사도행전 2장과 8장에 등장합니다. 2장의 경우는 위에서 계속 설명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은 지 몇 년 후에 성령침례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성령 침례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장의 사마리아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이미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의 두 부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순서로 전파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성령님의 나타나심 즉 방언이나 표적으로 나타나심이 매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구원받은 후에 방언 등과 함께 임하는 두 번째 축복 즉 성령 침례에 대해 일관적인 사례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침례를 구원의 일부 즉 구원받는 즉시 신자의 몸을 가득히 채우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는 성령의 역사로 보는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의지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교리를 지지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 8, 10, 19장 중 오직 2장만이 믿는 자들이 성령을 기다린 사건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자들은 성령님을 간청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실 때를 단순히 기다렸습니다(행1:4, 5, 8). 서신서에는 성령을 받는 것, 심지어 성령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우리의 지침서는 서신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과도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서신서는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리와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신약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엡3:20). 이 위대한 부활의 권능(엡1:19-21)은 기적 같은 일을 해 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엡3:21).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순종하고 기도하며 움직일 때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행하시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의 은사를 구할 때 행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2009-05-13 15:53:4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1):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1: 신약 시대에 방언이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표적이 아니라면 성령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릅니다. “그럼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겠네요?” 두 번째 질문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면 그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고린도전서만 보아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살펴볼 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전문가들만 모인 곳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그 어떤 다른 교제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그렇게 널린 퍼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의 근본 목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목격했고 이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임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같이 대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같은 방언의 목적을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니” 바로 전 구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유대인)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불신), 주가 말하노라.”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널리 행해진 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특하게 그리고 널리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아마도 성경 시대에 고린도 교회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목이 대상이 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고린도에서, 그것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행18:1-3). 바울은 관례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선포했습니다(행18:4). 실라와 디모데가 곧 바울과 합류했고 고린도의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행18:5). 그런데 마침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복음 선포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고, 사도들과 믿는 무리들은 회당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행18:6). 이제 그들은 복음 전도의 초점을 이방인들에게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때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행18:7). 따라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모임이 바로 자기네 옆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기의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행18:8). 이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네들의 지도자가 변절하여 교회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보의 뒤를 이은 차기 회당장이 어떻게 하든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교회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 자체를 금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그리스보의 자리를 이을 자로 뽑혔습니다(행18:17). 물론 성경은 소스데네가 복음의 확산을 막으려는 본연의 책임을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최종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서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는…” 하나님은 또 한 명의 유대인 회당장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부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교회 모임은 바로 회당 옆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지체들 중에는 전직 유대인 회당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 교회를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조치로서 이 교회에 방언의 은사,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작용할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에서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하나가 “모두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겠느냐?”입니다. 어쨌든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한 공통된 답은 “아니다”입니다. 모든 고린도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방언이 하나의 은사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은사들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모든 은사를 다 갖춘 성도는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 침례입니다. 우리는 다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고전12:13). 앞에 나온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동일한 장에서 가르쳐지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성경은 이 신약 시대에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는 모든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받았으나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1:2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0):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0: 당신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계시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까?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오순절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는 성경에 나오는 대언 - 즉 직접 말씀을 받아 대신 전하는 것 - 의 은사와 대언자가 오늘날에도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대언자는 본래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그 메시지가 미래의 있을 일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은 대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여 줍니다.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차례대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신약 성경이 완성되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알리고 싶은 모든 일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즉 주님은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사 우리가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신약 성경의 끝 부분에 친히 추신을 다셨다면 일은 간단해질 것입니다. 가령 “이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직접적인 계시는 끝이 났다”라든지 아니면 단순히 ‘끝’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간접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1-2) 이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신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는 한 방식을 쓰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는 또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주님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계시와 영감된 기록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때마다 하나씩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계시들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했습니다(물론 전체로는 완전함). 이 구절의 그리스어 어순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지금 마지막 날들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in the past)’에 쓰인 그리스어는 ‘낡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되었음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 혹은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포드사의 썬더버드 자동차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모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단어는 ‘사용하기에 오래되었다’, 즉 ‘낡았다’, ‘닳았다’, ‘바꿀 때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경찰차나 택시가 낡은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1장 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계시를 주셨던 기간이 다른 기간 - 계시의 수여 방식이 전혀 다른 기간 - 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대언자를 통하지 않습니다. 만유의 상속자요, 세상들을 만드신 분, 하나님 자신의 정확한 형상이신 그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월등한 분이 월등한 계시를 가져오십니다. 풍부함과 완전함에 있어 월등한 계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셨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처 제자들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완성하셨습니다(요16:12-15). 역사를 보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70년 내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은 사도들과 그들의 측근들이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메시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두 가지 사항을 더할까 합니다. 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되기에 적합합니다. 계시록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 세계를 꿰뚫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읽다 보면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결론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마지막 일들의 책(계시록)의 결론 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책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먼저는 성경 전체가 아닌 계시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위대한 성경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마지막 계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성경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2009-05-13 15:46:09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9): 지금도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9: 왜 병 고침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가 건강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탈 없이 잘 지내도록 몇몇 사람에게 치유(병 고침)의 은사를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을 공부해 보면 건강이 나쁜 것이 때로는 어느 특정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고후12:7-1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예).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치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시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수만이 이런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온갖 종류의 병자들에게 나아가 병자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치료하였습니다. 심지어 몸 전체를 완전히 고치기도 했습니다(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 사실 치유의 은사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입니다(히2:3-4). 그렇습니다. 치유 받은 자는 고통과 불편함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도 다른 기적들처럼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었습니다. 치유하는 자(healer)가 땅에 걸어 다닌 시간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극히 짧았습니다. 심지어 그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들이 병이 났을 때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그 당시에도 치유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바울은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4:20).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먼저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의 은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이 됩니다. 즉, 아프면 기도하고 의학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아픈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부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하나의 의학적인 처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로 쓰인 그리스어가 ‘크리오’(chrio) - 즉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에서 나온 단어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뜻함 - 가 아니라 ‘알레이파오’(aleipho) - 즉 몸을 문지르는 것 -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치유의 은사를 바라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만일 치유의 은사가 교회 시대에도 계속 된다면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확실하게 고침을 받는 것은 실로 내세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롬8:23).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몸을 구속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서 영화로운 몸을 주셔서 죄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치유를 잘한다고 크게 소문이 난 소위 크리스천 치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치유사들이 고친다는 질환들은 실제 병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거나 외적인 영양에 의해 악화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 가령 치유함을 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 상태가 완화되는 체험을 합니다. 몇몇 질환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것들은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치유 사례를 연구해 보면 증상은 완화되었으나 실제 상태는 그대로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치유사가 귀머거리나 복합골절 환자나 선천성 기형아를 고친다거나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이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설사 오늘날 능력의 치유사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그런 치유사를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심령술에 빠졌다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악한 세력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분명히 사탄이 대환난 기간 동안 그러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살후2:9-10; 계13:11-15). 마귀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낼 수 있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고후11:14-15). 치유는 표적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치유의 은사는 곧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대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더라도 치유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치유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뜨거운 기도에 응답하사 자신의 뜻 안에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으며 지금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런 은사를 받아 손만 대면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없습니다.
2009-05-13 15:43:5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8): 기적의 은사는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8: 왜 기적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 자신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행하십니다. 더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치리하기 위해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양식 혹은 법칙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양식은 너무도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특별한 방법으로도 움직이십니다. 이렇듯 변칙적인 운행 방식을 보통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기적이란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흔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니라 일상사가 될 테니까요. 지구가 일정한 각도로 회전하여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도는 과정을 기적으로 분류하진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에 세 가지 커다란 기적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이 주어질 때로부터 시작되어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엘리야와 초기 대언자(선지자) 시대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상당 부분이 이때 주어졌는데 이 기간은 약 1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적의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사도들의 활동하던 때에 일어납니다. 이때가 바로 신약 성경이 주어진 시기이고 약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어셔의 연대기(Usher's dates)에 따르면 성경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약 6000년임을 보여 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 같은 역사가 옳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한 시기는 그 중 5% 정도인 320년에 불과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33년간의 지상 생애 동안에 단 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분의 전체 생애의 9%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적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성경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위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곧 사도 시대에 주어진 기적의 은사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같은 주장에 타당성이 없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일시적인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기적을 말할 때 쓰인 세 단어가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먼저 기적은 ‘능력 있는 일들’로 불리는데 이는 행위 뒤에 숨겨진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론 기적이 ‘이적’(wonders) 즉 ‘놀라운 일’이라 불리는데 이때에는 기적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기적은 ‘표적’(signs)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보여 주고자 함을 강조하기 위해 즉 기적의 첫째 목적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 만일 기적이 능력 있는 일이나 이적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항상 하나님의 일꾼과 말씀의 참됨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앞에 언급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난 시기가 성경 말씀을 주신 시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나의 대변인이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내가 표적으로 그들의 말을 확증해 주지 않느냐?” 신약 성경은 특히 기적을 표적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과 10장 37-38절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권위를 실제 자기가 행한 기적의 권능을 이용하여 입증하려 했습니다(고후12:11-12).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실성을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목격한 증인들이 기적으로 자신들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히2:3-4). 기적의 취지가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될 때 기적의 은사도 그쳤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적의 은사는 초세기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육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두어들이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논거는 기적의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우리가 기적의 은사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서 지속되는 현상으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특정 개인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2009-05-13 15:41: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7): 마귀 쫓는 것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7: 당신이 마귀들을 내쫓을 수 없다면 어떻게 마귀들을 다룹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을 강력히 그리고 단호하게 내쫓으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귀를 내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마귀와 활동과 엑소시즘(逐邪, 마귀 쫓아내는 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끈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마귀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요,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른 타락한 천사들 곧 성경에서 종종 마귀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사탄의 일을 도우며 선한 천사들의 역사를 방해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우리가 혈과 육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을 믿습니다(엡6:1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강력한 악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내쫓아야 할까요? 아니면 마귀를 쫓는 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초대 교회에만 주어진 일시적인 표적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 사항이 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주어졌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지침의 중심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마귀를 쫓아야 한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일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가 잘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해야지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마귀를 쫓는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이 가르친 바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은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전쟁을 다루는 구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과연 마귀를 쫓아내는 것(축사)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방어용 갑옷과 사탄과 마귀들을 패주시킬 공격용 무기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악한 영들의 적수가 못됩니다. 악한 영적 존재들은 힘과 능력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항하거나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려 하는 것은 마치 장난감 총으로 전함을 침몰시키려는 어린아이의 시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도다”(요일4:4)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마귀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마귀들의 능력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 머무르며 자기들의 힘을 행사하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욥의 경우처럼). 따라서 우리는 마귀들이 하나님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 시대의 믿는 자 모두 안에 내주하십니다. 승리하기 위해선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두 번째 단계는 마귀들의 공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 계획을 미리 아는 전략가는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5:8). 그리고 성경은 마귀의 공격이 간교하고 속임수로 가득하다고 말하며(엡6:11). 동시에 우리가 이런 사탄의 전략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고후2:11). 그렇다면 이 같은 전략이 무엇일까요? 악한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길 원하며 또한 말씀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기를 원합니다(창3장).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자연적인 질병의 고통과 죽음을 이용합니다(욥기; 히2:14). 악한 세력들은 악한 생각을 불어넣으며(요13:2) 이것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어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도록 합니다. 그들은 또한 ‘육’(肉)을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타고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나 휴거를 받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흔히 ‘육’이라고 부릅니다. ‘육’은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며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에 관여하려 합니다. 우리가 ‘육’에다 자신을 내어줄 때 마귀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우리를 이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육’을 통해 사탄이 우리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고후2:6-11; 엡4:25-29). 주님의 군사라면 마귀가 이러한 경로로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격을 경계하며 대항할 준비를 갖출 때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영향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길은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은 바로 이것을 위한 병기고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의 거짓말에 대항하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장에 투입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을 간파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사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한 채 전장에 들어가 악을 파악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는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들고 전장에 들어가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의심을 심습니다. 따라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탄과 마귀의 공격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적을 간파하고 적의 사악한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뒤에 우리는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공격 무기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릅니다. 사탄은 우리의 결단이나 열심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갑니다. 물론 말씀을 기억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신갑주를 원활히 움직이게 하는 윤활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마귀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009-05-13 15:39: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6): 방언은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6: 당신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까?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연구한 결과 현재 은사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논리적인 구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거의 항상 영문 모를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화자가 모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흔히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는 황홀경의 소리들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방언(타언어)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경우는 하늘의 언어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비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늘 사람의 언어였고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대부분의 언사(utterance)는 하나님의 은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 그럼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검증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서 ‘방언’(타언어:tongues)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 원어는 ‘글로싸’(glossa)이며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입 안에 있는 혀; 사람이 구사한 언어; 특별한 지역의 사투리, 즉 방언; 이해할 수 없는 말’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신 ‘글로싸’(glossa)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각각에 해당되는 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에서는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2장 4-11절의 오순절 사건인데 여기서 4절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령님을 기다린 사람들이 성령님이 임하시매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 줍니다. 6, 8절을 보면 이 다른 언어가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절날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놀란 것은 ‘각 사람마다 자기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바로 이 구절 다음에 그들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명단이 등장하며 그 각 지역은 곧 그 지역의 언어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사건은 사도행전의 나머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 줍니다. 두 번째는 10장 44-48절에 나오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일어난 기적도 사도행전 2장과 동일하게 “타언어로 말하다.”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 단어가 사도행전 2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선물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셨다는 언급이 있습니다(45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며 그 일을 자신이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오순절 사건과 비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 위에 임하신 것같이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행11:15, 17). 베드로가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도 성령님이라는 인격이지 방언의 나타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그분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것(방언)을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일한 선물을 주셨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19장 1-7절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기적도 “그들이 타언어로 말하더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그 말이 사도행전 2장이나 10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도 방언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서 나온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나 혹은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사도행전처럼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방언을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본문을 읽어 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아무래도 인간의 언어라는 결론에 더 가깝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고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누가는 가까운 동역자요, 친구 사이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 여행 때 그와 두루 동행했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글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앞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도행전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년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거기에 바울이 이미 사용했던 방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틀림없이 동일한 선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기에 누가는 그 선물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은 굳이 방언의 본질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독자들이 이미 그 선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누가가 동역자였다는 것과 바울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 누가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바울이 쓴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 등과 같은 사실들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 줍니다. ‘분명한 소리’(distinct sounds, 고전14:7-11)라는 말의 개념도 14장 21절의 인용과 14장 22절의 설명을 볼 때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 and of angels, 고전13:1)도 문장이 보여 주는 대로 하나의 가정 하에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가 ‘사람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을 한다고 했고(14:18) 실제로 모든 지식과 믿음을 가지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천사의 언어들을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 과정이 없이도 구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인간의 언어도 아니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방언의 은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2009-05-13 15:31:4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5): 왜 방언을 하지 않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히 13:8) 왜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방언을 하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어제(사도 시대) 하신 방식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지하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 시대에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오늘날에도 동일한 은사를 주실 것이고 이 일은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과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경하지 않으실 이 위대한 진리를 간과한 것일까요? 은사주의자들이 히브리서 13장 8절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명백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방언의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3:8). 그 정확한 시기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방언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입니다. 성경이 분명 방언을 일시적인 것으로 말하기에 방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주의자들이 ‘어제’를 사도 시대로만 국한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왕과 대언자(선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가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거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와 연관 지으려는 사람은 자연히 ‘어제’에서 구약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 혹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방언의 은사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역사를 보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제’가 그렇게 최근에 시작되었다면 ‘영원’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겠네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어제의 시작을 사도행전으로 보고 그 이전의 인류 역사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사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우선 히브리서 13장 8절의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그분과 관련된 어떤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의 활동이나 역사하시는 방식조차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그들은 방언의 은사도 오늘날 유효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운행 방식이 변한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변화 정도가 심해 다른 직무(administration)를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 직무를 일컬어 우리는 보통 ‘세대’(dispensation) 혹은 ‘경륜’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순절 이전에는 방언의 은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운영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 늘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항상 동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히브리서 13장 8절을 그 문맥에 비추어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의 레위의 제사장 체계보다 월등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의 ‘레위 제사장 체계’로 되돌아갈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와 일관성을 모두 발견합니다. 좋은 변화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구약) 대신에 새롭고 좋은 언약(신약)을 가져오셨다는 것이고 나쁜 변화는 유대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일관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7-9절 말씀은 히브리서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깊이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라.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 13:7-9) 7절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살아생전에 그리스도께 신실했던 그들의 이전 지도자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비록 이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다음 세대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고 갔습니다. 8절은 히브리인들이 항상 신실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선배들은 갔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계십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들도 계속 신실해야 하는 동일한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9절은 적용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합하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교리들을 피하고 참된 은혜의 교리에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견고하게 해 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특정 음식(희생으로 성별된 음식물)을 먹는 의식이 히브리인들의 마음을 세워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경영 방식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 레위인들의 의식, 레위의 제사장 체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활동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것을 지속하는 것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 본질, 위치는 동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불변합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변치 않으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변치 않는다는 것이 그분의 인격과 본질에 관련된 것이지 그분의 역사와 경영 방식까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 13장 8절이 방언의 은사가 지속됨을 보증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9-05-13 15:26:5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4): 방언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4: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분명히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본인 스스로 방언을 하지 않고 심지어 오늘날 방언이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런 은사주의의 관행을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호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옹졸하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좀 더 심각하게는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고전13:8). 단지 방언이 언제 그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언제 그칠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먼저 고전13:8-12를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가지 임시적인 복이 나옵니다: 대언, 방언, 지식. 분명히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도 없어지고 지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동사의 성격상 - 즉 ‘없어지다’(done away)와 ‘사라지다’(vanish away) - 대언과 지식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부의 힘이란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대언과 지식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봅니다. 만일 그 ‘완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면 대언과 지식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9절은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완전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란 틀림없이 부분적인 것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은 지식과 대언의 완성 혹은 완성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임시 복인 방언(타언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방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동사인 ‘그치다’의 성격상 우리는 방언이 앞에 나온 대언이나 지식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끝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방언(타언어)이란 단어는 고린도전서 13장 9절과 그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방언은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완전한 것이 임하므로 대언과 지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 방언은 그 이전에 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여전히 방언이 그분의 재림 때가 아니라 재림 이전에 그칠 것이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은 방언이 종결된 시기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구인 고전14:21을 보면 외국어 방언의 표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판의 개념이 고린도서에도 적용된다면 방언의 은사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말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후 70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진노를 부으셨으며 이때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방언은 주후 70년에 지식과 대언은 주후 90년에 각각의 목적을 다 이루고 그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방언이 2세기나 그 이후의 정통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압니다. 그러나 몇몇 이단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나 집사의 자격에도 방언은 없습니다(딤전3장; 딛1장).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에 필요한 은사였다면 분명 본을 보이며 양 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마땅히 이 은사를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방언을 주장하며 이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그리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이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유효했고 실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방언 전부가 금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이런 경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방언은 그친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날 방언은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를 금하신 명령(마10:5-6) 만큼이나 교회와 무관한 사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언의 은사가 그쳤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 목적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는 목적을 거의 달성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은사주의 관행을 우리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방언을 하는 사람과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있게 되면 늘 불화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오늘날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실행의 규정을 거의 지키지 않은 채 행해지고 있습니다.
2009-05-13 15:24:20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3): 초대 교회와 성령의 역사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3: 성령 침례가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일어나는 두 번째 축복이 아니라면 왜 초대 교회 사도들은 구원받은 후 몇 년 뒤에 성령을 받게 되었을까요?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성령 침례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한 순간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즉, 성령 침례는 그 후에 -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음 -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늦추어진 성령 침례를 소위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축복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질문에 나온 사도들의 예는 소위 ‘두 번째 축복’으로서의 성령 침례를 증명해 준다고 알려진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원받았고 심지어 그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님의 침례를 경험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분명히 많은 이들은 우리 역시 이러한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치리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세대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믿는 자들을 향한 성령님의 사역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지상에 있었고 성령님은 심지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 사역에도 계셨습니다. 구약에서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몇몇 사람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님의 내주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영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 침례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세대만이 가지는 독특한 것이며 바로 오순절에 이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내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세대에서 성령님은 장막을 만드는 자나 재판관, 대언자(선지자), 왕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의 내주는 단순히 그들의 구원을 보여 준다기보다 그들이 맡은 직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맡은바 소임을 마치지 못하거나 불순종으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하면 자연히 성령님도 그를 떠나가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봅시다. 처음에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울 안에 거하셨습니다(삼상10:1-6).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주님의 영께서는 그를 떠났습니다(삼상16:14). 이 때문에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한 후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어가지 마시도록 부르짖었던 것입니다(시51:11). 다윗의 기도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두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기도는 적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자 안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롬8:9).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동안에도 성령님은 활동하고 계셨지만 아직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요7: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직전에 성령의 사역이 곧 바뀌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혹은 그들 가운데 계셨던 성령님께서 곧 제자들 안에 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7).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이 있은 뒤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7-1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행11:15, 17).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성령님께서 모든 신자 안에 영구히 거하게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 침례를 생각해 봅시다. 성령께서 침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고전12:13). 그리스도의 몸은 보편적 교회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엡1:22-23).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개개인을 교회 안으로 옮기는 일도 교회가 존재한 후에야 시작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성령 침례는 오순절 이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실 때 성령 침례를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행1장). 오순절이 오기 10일 전만 해도 성령 침례는 현실이 아닌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후 몇 년이(혹은 최소한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인데 이는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 침례가 없었고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시대에 태어나신 것처럼 율법 시대에 구원을 받았습니다(갈4:4). 그런데 그들이 구원받은 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령 침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 침례는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성령 침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는 순간에 주어지는 복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체험은 독특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두 세대 사이의 과도기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예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2009-05-13 15:22:0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