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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을 가리키는 그리스말. 아람과 밧단아람 참조. 아브라함의 이동 지도 참조(13). 메소포타미아는 크게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타우르스 산에 이르는 전 지역이라 할 수 있지만 보통은 바빌로니아 위의 비옥한 지역을 가리킨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의 영토를 포함하였다. 이 지역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류 역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에덴동산 역시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아라랏은 이곳의 북쪽에 있었으며 시날 땅은 남쪽에 있었다. 여기는 족장 아브라함의 조상인 데라, 헤벨, 벨렉의 거주지였고 여기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태어났으며 이삭과 야곱의 아내와 대부분의 야곱의 며느리들이 나왔다. 한편 메소포타미아는 성경에서 재판관 시대에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괴롭힌 학대자가 거한 곳으로 나타나며(삿3:8-10) 또 다윗의 전쟁 역사에도 나오고(삼하10:16) 여기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경배를 드리고 오순절 체험을 하였다(행2:9).    
2009-05-12 13:47:23 | 관리자
  야벳의 여섯째 아들(창10:2; 시120:5). 그는 소아시아의 북동부 귀퉁이에 있던 두발 근처에서 살았으며 그곳 사람들은 큰 도시 두로와 함께 물건을 교환하였다(겔27:13; 32:26; 38:2).  
2009-05-12 13:46:49 | 관리자
  I. 욕단의 영토의 동방 경계에 있던 장소(창10:30). II. 모압의 왕. 그는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많은 조공을 바치다가 그가 죽자 곧 반역을 일으켰다(왕하1:1; 3:4-27). 아합의 아들 요람은 유다와 에돔의 도움을 받아 그와 전쟁을 하고 그의 수도에서 그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그는 포위하는 군대를 뚫고 나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성벽에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면서 자기 신들의 도움을 구하였고 이 잔인한 행위에 놀란 군대들은 자기들에게 저주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수하였다.    
2009-05-12 13:45:50 | 관리자
  ‘메롬의 물’은 요르단 강이 물을 제공하는 세 개의 호수 중 가장 북단에 있는 호수를 가리킨다(수11:5). 이 호수는 가로 세로가 각각 7-8킬로미터 정도이다. 단 족속은 이 근처의 땅을 보고 “그 땅이 매우 좋으며 거기에는 땅에 있는 것 중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삿18:9-10). 이 호수 근방에서 여호수아는 북방 가나안 족속의 왕들을 격퇴시켰다(수11:1-8).  
2009-05-12 13:45:12 | 관리자
  갈릴리의 한 지역.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싸울 때에 그곳 사람들이 자기들과 연합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저주하였다(삿5:23).  
2009-05-12 13:44:28 | 관리자
  사울 왕의 큰 딸. 그녀는 처음에 골리앗을 이긴 대가로 다윗의 신부가 될 뻔했지만 므홀라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에게 시집가게 되었다(삼상14:49; 18:17, 19). 그녀는 그에게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후에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져서 주님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삼하21:8-9). 아드리엘 참조.  
2009-05-12 13:43:56 | 관리자
  고대와 현대 동방 국가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곤충. 성경에는 메뚜기를 가리키는 말이 열 가지나 되며 이것들은 같은 종류에 속한 여러 단계의 메뚜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메뚜기가 떼를 지어 다니는 것으로 표현하며 종종 그것이 죄 지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용됨을 보여 준다(신28:38-42; 왕상8:37; 대하6:28). 이집트에서도 열 가지 재앙 중 하나로 메뚜기 떼가 날아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고 또 그것들은 우박이 남긴 땅의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먹어 치웠다(출10:4-19). 그러나 메뚜기 떼의 공포는 욜2:3-10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욜1:4에 나오는 털벌레, 메뚜기, 자벌레, 쐐기벌레 등은 히브리말에서 메뚜기가 알에서 깨어나 성충이 되기까지의 여러 형태로 볼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게 메뚜기는 정결한 곤충이었으며(레11:22) 그래서 먹어도 되었다. 마3:4에는 침례자 요한의 음식 중 하나가 메뚜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계9:7-10에는 환난기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들 즉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풀려나와 전갈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 메뚜기 같다고 표현되어 있다.    
2009-05-12 13:43:22 | 관리자
  르우벤 지파에게 속한 요르단 동쪽의 마을(수13:9, 16). 이 근처에서 다윗의 군대는 크게 승리하였으나(대상19:7) 시간이 지난 뒤에 그곳은 다시 그곳의 전 주인인 모압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민21:30; 사15:2).  
2009-05-12 13:42:52 | 관리자
  야벳의 아들인 마대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나라(창10:2). 히브리 사람들은 이 나라를 마대라 불렀으며 이곳은 카스피 해의 서쪽과 남쪽 지역에 있었고 페르시아 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아시아의 왕국들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메대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독립 왕국 중 하나이다. 여러 세기 동안 메대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통치를 받다가 주전 700년경 산헤립 시대에 반역을 일으켰고 그 뒤 강력한 국가를 형성해서 문명을 꽃피우고 부유하게 되었다(사13:17-18; 21:2-3). 이렇게 지내다가 이곳은 고레스 밑에서 페르시아와 하나가 되어 메대/페르시아 왕국을 형성하였고 그래서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이라는 말과 ‘메대와 페르시아의 연대기’라는 말이 성경 기록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에1:19; 10:2; 단6:8, 12). 그 이후로 메대와 페르시아의 관습과 종교와 문화는 하나로 합쳐졌다. 페르시아 제국 지도 참조(36). 또한 고대의 기록은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들의 조상이 같고 불의 신을 섬겼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기(Magi)라 불린 그들의 종교 제사장들은 과학을 개발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였다. 메대는 성경에서 처음에 언급될 때 아시리아의 일부로 나오며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바로 이곳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처음에는 요르단 건너편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디글랏빌레셀에 의해 끌려갔으며(대상5:26) 후에는 이스라엘의 나머지가 살만에셀에 의해 끌려갔다(왕하17:6). 그 이후의 메대의 역사는 페르시아의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나라는 주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 페르시아 참조.    
2009-05-12 13:42:18 | 관리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갈대아말로서 바빌론 왕 벨사살이 경건치 않은 연회를 베풀 때에 손이 나타나 벽에 기록한 글이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세셔서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므로 그것을 나누신다.”는 뜻이다(단5:1-31). 점성술사들은 이것을 읽고 해석하지 못했으며 결국 다니엘이 소환되어 이 글의 무서운 의미를 왕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벨사살과 그의 무리들처럼 교만하여 경건하지 않게 행하지만 그들의 과거 역사를 기록한 손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의 운명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09-05-12 13:41:02 | 관리자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가?(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 금식 제거)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마귀를 내쫓지 못했는가, 아니면 믿음이 적어서 내쫓지 못했는가? 개역: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우리 주님의 요점은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작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문맥을 보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를 내쫓는지 친히 말씀해 주신다. 흠정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그러나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예수님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고 몸을 피한다. 개역: 없음. 참으로 개역성경은 NIV 등의 다른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와 금식의 능력을 부인한다. 개역: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13:33) 흠정역: 너희는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개역: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행10:30) 흠정역: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시간까지 금식하고 아홉시에 내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보라, 한 남자가 빛나는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개역: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전7:5) 흠정역: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개역: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후6:5) 흠정역: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 마지막 예에서 먹지 못하는 것과 금식은 다르다.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누르는 것이다. 따라서 먹지 못해 배고픈 것이 반드시 금식은 아니다. 물론 금식하면 배가 고프다. 개역성경은 다른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금식의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
2009-05-11 18:08:35 | 관리자
종교를 강조함 개역성경과 현대 역본들은 “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역하면서 우상숭배를 지지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우상숭배는 사람들이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때 곧 7년 환난기에 온 땅을 가득 채울 것이다(계13:15).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이 추구하는 거꾸로 된 세상 속에서는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엄한 책망도 따뜻한 칭찬으로 바뀌게 된다.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religious)(행17:22) 흠정역: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superstitious). 킹제임스 성경이 ‘미신’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의 어근은 마귀와 상관이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서 ‘종교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드레쉐이스’(thresheis) 혹은 ‘세보마이’(sebomai)인데 이런 단어는 그 구절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아테네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열심에 도취되어 헛된 것에게 경배하는 것을 ‘종교심’이 많은 것으로 이해하는 교인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2009-05-11 18:05:41 | 관리자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 성경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기록하신 책이므로 모순이 없다. 만일 그 안에 모순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위태롭게 된다.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1:2-3) 이 구절은 말라기서 3장 1절과 이사야서 40장 3절에 있는 말씀을 마가가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앞부분 즉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는 절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이 아니고 말라기의 글이며 따라서 이것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하면 성경에 오류가 생기게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정확하게 ‘대언자들의 글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2009-05-11 18:03:58 | 관리자
우리말의 어려움 성경을 번역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우리말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비슷한 것 같은데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역: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라. 흠정역: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 개역성경에도 소멸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표현법이 맞느냐, 틀리냐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심판하셔서 '태워 없애는' 분을 뜻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소멸하다와 소멸시키다는 완전히 다르다. 소멸하다는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역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이 소멸되어 없어지신다는 뜻이 된다. 이런 부분이 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온다. 틈이 나는대로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들을 읽지만 정말로 어려움을많이 느낀다. 혹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읽다가 틀린 부분을 발견하면 알려주기 바란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그 소설을 바로 잡기 위해 20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글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리니 부족한 부분을 보면 알려주기 바란다.
2009-05-11 18:02:12 | 관리자
  비유가 아니면, 비유가 없이는?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친절한 기장(부기장?)을 만났다.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는 목사냐고 묻고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분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소개하였다. 친절한 분으로 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의 성경 해석 방법이 기묘했다. 그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3장 34-35절을 인용하였다.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모두 비유이며 심지어 창세기 이후의 모든 것이 다 비유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에게 성경을 배워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분은 신천지 신도였다. 그분의 주장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그분의 말씀은 모두 비유가 아닌가? 이것은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계룡산 도사들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바른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흠정역: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요점을 이야기할 때마다 쉬운 비유를 들어 핵심을 말씀해 주셨다. 영어로는 without a parable인데 이것이 개역성경처럼 잘못 번역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을 무지 속에 빠뜨린다. 교주에게 속아 넘어가서 궁극적으로 생명을 잃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들(words, 단어들)을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우리말이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상당히 멋있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이 도구를 사용해야 함을 느낀다.
2009-05-11 17:59:20 | 관리자
임마누엘을 부인함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 중 하나이다. 이사야서에서 처음 언급된 이 말(사7:14; 8:8)은 성경에 단 세 번 나오며 마태복음에서 성도 마태가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마1:23). 개역: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개역성경을 따르면 임마누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평범한 약속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도로 이 구절을 주지 아니하셨다. 흠정역: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비슷하게 보이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는 말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달리 번역했으므로 이런 구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2009-05-11 17:54:04 | 관리자
  먼저와 처음, 나중과 마지막 며칠 전에 우리말의 어려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특히 개역성경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을 대충 읽고 거기서 자의적인 뜻을 찾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에서 먼저와 나중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 쓸 수 있다. 표준국어 대사전은 먼저와 나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먼저: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앞서서. 예: 나 먼저 나갈게./씻기 전에 밥 먼저 먹어라 나중: 다른 일을 먼저 한 뒤의 차례. 예: 맨 나중/이 일은 다른 일 다 하고 나중에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First와 Last의 표현이 특히 복음서와 계시록에 자주 나온다. 이것은 여러 개 중의 첫 번째 것과 마지막 것을 뜻하므로 결코 먼저와 나중으로 번역될 수 없다. 마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흠정역: 그러나 처음인 자로서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자로서 처음이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지금 비교급의 먼저와 나중이 아니라 첫째와 꼴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바로 그 다음에 20장 1-16절에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세시에, 여섯시에, 아홉시에, 그리고 열한시에 나가서 사람을 모으고 그들에게 일하게 했다. 그런데 첫 번째 온 사람들과 마지막에 온 사람들이 모두 일 데나리온씩을 받게 됨으로 분쟁이 생겼다. 개역 성경은 8절에 "나중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에게 품삯을 주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 역시 "마지막에 온 자로부터 처음에 온 자에게 품삯을 주었다"고 해야 맞는다. 물론 그것이 16절의 결론이다.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흠정역: 이와 같이 마지막인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인 자가 마지막이 되리니 즉 11시에 맨 마지막에 온 사람이 이른 아침에 즉 처음 개시할 때에 온 사람이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요점이다. 이것이 먼저와 나중으로 바뀌면 9시에 온 사람이 6시에 온 사람이 되어도 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장 18절도 개역성경처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하면 큰 오역이 된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해야 맞는다. 계2:8도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자.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흠정역: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도 먼저가 영어로는 first로 되어 있다. 우리말에서는 먼저가 쓰이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엇보다 먼저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나 원어는 그런 것이 아니고 첫 번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이런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 하나님께 대한 것은 상대적인 우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우위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해야 한다. 주님 제일주의를 좋아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주님께서 하늘의 위로를 주실 줄 믿는다.
2009-05-11 17:47:45 | 관리자
성서침례교회들과 성경에 관하여 - 미국 뉴저지 중앙침례교회 이황로 목사   성서침례교회들과 성경에 관하여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우리가 적어도 성서침례교회라는 이름을 사랑한다면 무엇이 "성서"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해석도 나올 것이고 적용도 나올 것이고 선포와 전도도 나올 것입니다. 원문비평학이란 학부보다도 대학원에서 신구약총론에서 조금 다루어지는 것으로 대개의 목회자들은 그냥 지나갈 정도이며 특히 "말씀의 보존(Preservation)"에 관한 것은 웬만한 조직신학 책에서도 별로 많이 깊게 다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비평학에 관하여는 대개 유명 박사들이나 교수들이 말한 것을 거의 수용하는 편이지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되기에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 개역 성경에서 세 명이 구원받는 놀랍고 아름다운 사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타이틀이 훼손되어 있거나 삭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번역 문제가 아니라 사본의 문제이다. 눅23:42의 강도의 구원(주여 삭제), 행8:37의 내시의 구원(신앙고백하는 전체 절이 삭제), 행16:31의 빌립보 간수의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가 삭제) 등에서 보듯이 이런 경솔하고 불경한 삭제를 해도 된다는 말인가? 성서침례교회 사람들이 구령상담을 그렇게 잘한다고 하면서 롬10:9, 13을 잘 외우고 있다. 예수님을 주(=하나님)로 믿어 시인하는 것은 절대적인 조건이다. 물론 반대자들은 원래는 없었는데 누군가가 필사를 하면서 추가했다고 할 것이다. 결국 TR과 비TR과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신약에서 이렇게 삭제된 양을 계산해보면 7%에 육박하는데도(4500곳 이상 변개/삭제) either A or B(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의 양이면 요한계시록과 비슷하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묻지 말고 우선 신약만을 두고 말할 때 요한계시록이 빠져도 신약전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3:16, 로마서의 길 말씀, 옥중서신들, 혹은 목회서신들이 빠져도 신약전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조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평범한 목회자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이용하여 말씀보존학회 사람들이 성서침례교회들 목회자들을 혼잡스럽게 할 수 있지만 (일부 혹은 상당수 오류 내지는 극단적인 주장을 실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신)복음주의자들과 소위 일부 근본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학설을 받아들여 친교회 목회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서 연구하여 보면 그렇게 어려운 주제만은 아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 신정통주의자들(바르트)들의 주장은 축자 영감을 부인하며 이 문제를 접근하기 때문에 1) 가장 오래된 사본이 원본에 가깝다, 2) 짧은 원문이 원본에 가깝다는 주장으로 자연적인 결론을 내린다. 초자연적인 접근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본을 오류 없이 성경기자들에게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주장은 차라리 진화론적인 접근이요, 누군가 초기에라도 성경을 변개하였다면 그렇게 변개 되고 삭제된 필사본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축자 영감은 적어도 축자 보존을 논리적으로 요구하며, 축자 보존은 축자 번역을 요구한다. 설령 보존과 번역에 있어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정확한 보존과 정확한 번역을 요구한다. 그러한 반면에 개념영감(Dynamic Inspiration)은 개념보존, 개념번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성서침례교회 목회자들과 신학교수들, 신학생들 중에 개념영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단학설. 잘 모르면 조직신학 책을 참조). 믿는다면 그는 근본주의자도,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마태4:4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말씀(every word)"과 딤후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개역 이 구절의 "감동"이란 말은 중대한 오역이다. 벧후1:21에는 기자가 "감동"을 받았고, 딤후에서는 기록이 오류 없이 "영감"을 받았다). 어쨌든 역동적 일치의 번역 기법은 축자 영감을 믿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모순과 위선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개념이 영감을 받지 않았기에 개념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개념(Dynamic Equivalency)이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에서 제한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 지상명령(마28:19-20)에서 우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구령과 더불어서 성경번역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각 언어와 문화를 모르시고 그 명령을 주지 않으셨다. 또 하나 역동적 일치로 번역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축자 영감을 믿는다면 문자적 해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에서 문자적 해석을 매우 강조한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수사법적 해석, 성경자체의 해석을 세 가지 중요원리로 삼고 이것을 일관성 있게 사용한다. 역동적일치 기법은 영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단어가 주는 액면상의 뜻을 배제한다. 이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축자 영감을 믿는다면 문자적 영감, 문자적 보존, 문자적 번역, 문자적 해석이라는 일관성 있는 입장이 된다. 반면에 개념적(=역동적)영감은, 역동적 보존, 역동적 번역, 역동적 해석으로 귀착된다. 한번 심사숙고 해볼 일이다. 복음주의자들의 고민과 모순은 영감에서 있어서는 축자 영감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번역에 있어서는 역동적(=개념적) 일치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 번역을 해야 한다. 킹제임스 성경이 바로 그렇다. Textus Receptus(=Received Text)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이시다. 요17:8을 묵상 해 보라. 이 말씀이 계속 사도행전에 반복된다. (이 정도만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성서침례친교회들은 도대체 무슨 성경을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에도 한글 개역에 해당하는 NASV/NIV가 존재하는데 주일날 예배 때 설교 때 어떤 성경을 쓰는가? 미국 친교회 안에서도 이 문제가 계속 대두되고 있고 많은 독립침례교회들도 이슈가 되고 있다. 목회자 서재에서는 여러 번역본들과 히브리/헬라어 성경을 보겠지만 강단에서 어떤 성경을 쓰고 있나?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이 자유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믿고 주장하는 대로 열등하고, 원본과 원문에서 변개 된 것이라면 그들은 강단에서 위선을 떨고 있는 셈이다. 미국 친교회의 소수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양심과 정직을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열등하다고 믿는 나머지 다른 성경을 최고로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침례교회 교회 목사라는 말이 무섭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친교회 교회들 중 어떤 교회들은 교회 이름에서 "침례"라는 말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2년 전에는 전에 빅 박사님께서 시무 하시던 교회도 템플 침례교회에서 노쓰릿지 교회로 개명했다. 어쩌면 그 교회가 변질되면서 솔직하게 안팎을 투명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서침례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도 "성서"와 "침례"라는 말을 삭제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무엇이 성경인지도 모르고,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침례라는 말도 빼는 것이 좋을 것이니까...... 세상은 십자가, 보혈, 천국, 지옥이라는 말도 싫어한다..........).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쉽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정확하고 탁월한 보존된 사본을 원문으로 채택됨 2) 당시 가장 건전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번역자로 채택됨 3) 지금까지도 가장 탁월한 히브리/헬라어를 잘 아는 번역자들이 채택됨 4) 가능한 한 최대로 역동적 일치가 아니라 문자적 일치 기법으로 번역 우리 친교회 목사님들이 우선 연구를 많이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통치 않은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제언 한국 친교회가 침례교회로서의 근본주의를 버리고 점점 (신)복음주의로 가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슈들 중의 하나는 성경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래 동안 한글 개역 성경을 사용하여 왔었고, 그 성경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현저한 차이가 있었지만, 친교회 교회들 목사님들은 그래도 킹제임스 성경이 더 좋다는 정도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실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도 처음에 1981년에 이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개역 성경에서 다소 미흡하거나 틀린 부분 또는 빠진 구절이나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들어가면 갈수록 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개역이 아닌 다른 성경이 반드시 나와야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연구조사로는 개역성경을 계속 사용하고 복을 누리며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도 NASV/NIV를 쓰면서 큰 교회 목회하고, 훌륭한 사역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자유주의 노선으로 가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논조로만 본다면 굳이 성서침례교회를 목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셨고 우리에게 보존해주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성경을 현재 가지고 있으며 사용하고 있는가? 그런 칼을 주셨는가? 아니면 장난감 칼을 가지고 마귀에게 휘두르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시간과 노력이 매우 요구되고 머리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조금씩 접근해 가면 좋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킹제임스 성경 문제를 접근할 때, 허수아비를 치면 안 됩니다. 지금 미국에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입장들이 있고 보편적인 입장, 극단적인 입장, 이단적인 입장 등이 있습니다. 침례교회 역사를 공부할 때도 아나 뱁티스트 중에는 성경적인 재 침례교도, 극단적인 재 침례교도, 이단적인 재 침례교도 등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구분이 없이는 쓸 데 없는 시간 낭비만 합니다. 성서침례교회들이나 독립침례교회들은 성경적인 재 침례교도들에 그 역사적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결국 초대교회까지 교리적인 추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대하여도 여러 견해가 있는데, 성서침례대학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음).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종류만 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친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저명한 신학자들도 허수아비를 치는 오류를 종종 봅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에서 “주재권 구원”을 가지고 달라스신학교 라이리 박사와 그레이스 코뮤니티교회의 죤 맥아더 사이에 복잡한 말들이 오갔습니다. 라이리 박사는 신학적 입장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성경적인 입장을 주장했고, 맥아더 목사는 목회자적 입장에서 볼 때,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믿는 사람들이 다 구원 받았는가?라는 입장에서 각각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주장하지 않는 말을 가지고 공격하고 피가 터지는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주장할 때 신학적 용어의 “정의: definition"을 (조금) 다르게 내리고 말을 하니 결국 서로 허수아비만 치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이 결코 주장한 적이 없는 내용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는 말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라이리 박사의 성경적 입장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맥아더 목사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틀렸지만 그의 주장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킹제임스 성경 논쟁에서도 찬반 입장이 그러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휘말려 있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신학 접근과 논쟁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에 본인이 주장하는 그 단어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서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친교회의 목사님들 중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플로리다의 피터 럭크맨이나 한국의 이송오 박사와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오해이며 무정보 탓입니다. 나는 목사님들의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킹제임스 성경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위에서 말한 대로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 극단적 입장, 이단적인 입장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매금으로 물건을 넘기는 식으로 처리하여 이단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 몰아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곳 미국에서도 계속 연구를 하면서 입장들이 정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우선 절대화해서 말을 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면 럭크맨파, 이송오 말보회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책이나 자료들을 보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자 활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피터 럭크맨이 저술한 책의 내용 중에는 어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말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들이 엄청나게 들어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틀렸다고 믿는 것들이 있지만 성경론만 보더라도 어떤 조직 신학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탁월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말씀보존학회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그런 서적들을 번역하기 때문에 그 학회에서 나온 책들을 모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아쉬운 것은 현재 킹제임스 성경을 변호하는 책과 자료들은 80% 이상이 그 학회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친교회 목사님들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사람들의 독점이나 전매가 아닙니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씌여진 좋은 책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강하게 지지하고 심지어 그 성경만이 보존된 성경이고 가장 정확하게 번역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럭크맨 파 사람이라고 밀어붙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성경론”을 다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 성경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감(Inspiration)"에 대한 정의를 전통적인 의미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조직신학은 원래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성경과 이성(논리)를 가지고 세워져 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신학이 “조직화”되면 그 체제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침례교 신학교 개신교 신학이 다를 때가 있음을 보여 주는 이유입니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과 성경적인 침례교 신학은 “교회론”과 “종말론”이 다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수아비 치기를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침례교회들의 현황은 어떠한가? 나도 성서침례교회(행당동)에서 구원받고 자랐고 헌신, 결혼, 안수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그 영적인 자산과 경험들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국제성서침례친교회가 대다수가 아님을 한국 목사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넓게 근본적인 독립침례교회라고 보통 말하며 그 중에 BBFI가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친교권의 교회들, 신학교들이 있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미국의 근본주의 독립침례교회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왔습니다. 신학부에서는 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왔는데, 신학대학원 과정에서는 헬라어 원문 선택에 있어서는 NASV/NIV의 원문인 소수사본을 채택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순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구령과 선교와 교회를 세우는데 열심이었기에 별로 사람들이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침례대학(미주리 스프링필드)은 처음에 3년 과정이었고, 후에야 대학원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다른 신학원과 마찬가지로 대학원 과정에서 모순되게 킹제임스 성경 원문(히/헬)이 아닌 다른 원문(히/헬)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밥죤스 대학(원)이나 다른 신학교에서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 침례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들고 있는 성경이 “완전한” 성경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육을 조금 더 받은 목회자들은 그렇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피터 럭크맨과 D.A. Waite(웨이트) 같은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럭크맨에 관한 경력과 결혼에 대하여는 조금 알려진 편인데, 웨이트 박사는 달라스 신학원에서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한 분(ThD)이고 퍼듀(Purdue) 대학교에서도 PhD(Greek)를 딴 대단한 학자입니다. (www.biblefortoday.org) 이런 사람들이 연구한 것을 말할 때 유식한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어쨌든 웨이트 박사는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1984년에는 인디애나 해몬드의 제일침례교회 잭 하일스 목사님이 이 문제에 접근하고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생을 크게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1995년도 후반에 플로리다의 펜사콜라 대학(www.pcci.edu)(공교롭게도 피터 럭크맨과 같은 도시)의 총장 호르튼 박사가 이 문제를 오래 동안 연구하다가 프로 킹제임스 성경 입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BBFI에서도 문제가 되어 결국 몇 년 전에는, 친교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샘 데이비슨 박사가 주장이 되어 하트랜드침례신학대학이 세워지게 됩니다(400명 정도). (한국 친교회 교회들은 더 하지만 현재 미국 BBFI도 남침례교회 목사, 초교파 목사를 친교회 강사로 세우느니, 못하느니 하고 있음. 점점 개방적으로 가고 있음). 미주리의 BBC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독립침례교회들 목회자들이 학생들을 보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학교가 킹제임스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나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모두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지만 전에는 숫자적으로 소수만이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지금은 과반수를 넘는 학교와 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믿는 학교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밥죤스 대학교(철저히 침례교적이지는 않음), 테네시템플 대학교 같은 학교들은 학생 수 감소에 대하여 위기를 느끼고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하일즈앤더슨 대학,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만 보더라도 각각 3000명, 5000명이나 되는 학생 수가 있으니 밥죤스 5000명, 테네시템플 1200명... 위축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진리가 수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적어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간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이 학교와 학생들은 피터 럭크맨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펜사콜라 대학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좋은 서적과 비디오들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조금 익숙하신 분들은 구입하여 연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고 강력하게 그 성경만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피터 럭크맨 추종자가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스트라우스 박사가 성경론과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특강에서 이 분은 보편적이며 성경적인 입장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믿고 가르치는 분입니다. 비록 밥죤스대학교에서 PhD를 받았지만 킹제임스 성경, 침례교 교리, 근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건전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물론 통역이 있을 것입니다. 가서 들어보시고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www.inchristjesus.net (전국친교회와 중복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가끔 킹제임스 성경에 관하여 거시적인 접근에서 미시적인 접근으로 가면서 기고를 하겠습니다. 미국 뉴져지 중앙침례교회 이황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여러 입장들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고 변호하는 사람들이 피터 럭크맨이나 이송오 박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번에 잠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다르게 여러 입장과 믿음이 있음을 잠간 소개하였습니다. 다음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보고 답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글을 읽는 분에게 숙제와 과제를 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여러 입장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1.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성경이 있어야 하고 현재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신약을 두고 말할 때, 다수사본(“넓게 말해서” 비잔틴 사본 또는 전통사본 Textus Receptus[약자로 TR, 영어로는 Received Text])이나 소수사본(비평사본, 웨스트코트와 홀트 사본, 네슬사본 등)에 보존되어 있는가? (다수사본[Majority Text]과 [소수사본]에 대하여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은 신약개론이나 신약총론의 설명을 참조하여 보라). 완전한 성경이 필요한가? 그것이 다수사본도 아니고 소수사본도 아니라면 번역본으로 가야할 것이다. 더욱이 원본(Original Manuscripts)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문제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보존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성경이 어떤 형태로 보존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마태5:18; 계22:18-19...19절도 개역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과 다르다. “생명의 책”인지, 아니면 “생명나무”인지 확인 해 보라. 주님은 구약에서도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신4:2; 잠30:5-6). 그런데 복음주의자들과 일부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신약에 있어서 7%나 되고 8413 군데에서 다르거나, 빠지거나, 변개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본교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무지와 불경함을 말하고 다. Everett W. Fowler, Evaluating Versions of the New Testament (Watertown: Maranatha Baptist Press, 1981), p.66. 구약까지 본다면 사본(원문) 선택과 번역기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에 2만 군데가 넘는 곳에 차이가 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본뿐 만 아니라 결국 어떤 번역본도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원본에는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이 근본주의자들 전체와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의 믿음과 신학이다. 나도 100%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사본이나 역본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존중한다. 하지만 신구약 말씀의 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신의 말씀이 완전하시며,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완전하게 보존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지금도 어딘가에 완전한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자도 성경을 들고 말할 때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말씀이 있고, 우리가 믿고, 선포하고 묵상하고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복음주의 목사들과 근본주의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하는 것을 지금까지 보아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성경을 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만이요 회중 모욕이요, 불경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이나 개역 성경이나 혹은 NIV/NASV/NKJV 등 가운데 어딘가에 완전한 성경이 존재하고 그것을 “짜집기”한 것이 완전한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한다. 나는 “글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한 말씀을 원본을 통해 주셨다면 그 말씀이 사본 등을 통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어야 하고, 적어도 이 시대에도 그러한 완전한 말씀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과 논리의 정당한 가르침과 결론이다. 그러한 성경이 없다면 아마 지금 그러한 성경을 만들든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방문하셨을 때, 이사야서를 찾으셨는데 그 성경은 원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사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를 “성경”이라고 인정하셨고 부르셨으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구약사본을 보실 때 공인하셨음을 믿는다. 그것은 원본도 아니었고 더욱이 칠십인역도 아니었다. (칠십인역은 상당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예수님 오시기 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학설 뿐이다). 나는 축자영감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말씀보존을 믿으며, 그리고 번역된 성경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되어 보존된 말씀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은 어떤 성경이라고 믿는가? 원본? 다수사본? 소수사본? 킹제임스 성경? 개역? 공동 번역? 새 번역? 새 표준번역, 개정 개역? NIV? NASV? NKJV? Reader's Digest Bible?.....당신이 답변하면 나도 답변해주겠다고 약속한다. 2. 어떤 사람들은 꼭 그렇게 정확한 성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축자 영감을 조소하면서 마음으로도 믿지 않고, 입술로도 비웃는 사람이다. 한국의 한신대가 대표적인 신학교요, 기장측이 해당되며 미국에서는 유니온 신학교가 해당된다. 그리고 신 정통주의는 한국의 장신대가 대표적인 신학교요, 통합측이 해당되며, 미국에서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해당된다. 그리고 키에르케골이나 칼 바르트가 대표적인 신학자들이다. 신 정통주의자들은 소위 신약에서 빨간 글자로 된 부분(어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빨간 폰트로 인쇄) 정도는 아마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생각되나 나머지는 소위 “실존”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주 악한 사람들이다. 실존주의 신학이 바로 신 정통주의 신학이요, 그들은 마음으로 축자 영감을 부인하나,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모두가 말하기를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장로교 중 합동측과 남침례교단)은 그러면서도 신 정통주의자들과 초교파적으로 같이 어울리고 집회와 강단교류를 잘 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자들 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복음주의 노선으로 가고 있는데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복음주의자로 될 것을 알고 있다. 역사의 교훈에 의하면 근본주의(Fundamental)에서 복음주의(Evangelical)로 가고, 복음주의에서 에큐메니칼(Ecumenical)로 가기가 쉽다. 한국 성서침례교회도 지금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 그런데 성경 이슈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들의 현격한 차이가 무엇인가? 복음주의 신학교들과 목회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지 않고 쓸 수도 없다. 극단적인 예외가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그 말은 정확한 말이다. 복음주의 신학교(달라스, 리버티, 남침례 신학교들, 탈봇, 트리니티 등)에서는 원본의 축자 영감은 믿지만, 사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보존을 분명히 믿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단지 성경말살정책과 핍박 밑에서 성도들이 말씀을 감추거나 생명을 걸고 카피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위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구약총론에서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학설을 신봉하는 나머지 킹제임스 성경의 저본인 다수사본이나 비잔틴사본이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NIV나 NASV보다 나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적어도 한국 친교회의 순수한 목사님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대부분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하여 말할 때 “킹제임스 성경이 좋은 것은 나도 알고 인정한다. 하지만.”이란 말은 거짓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학교에서 배울 때 결코 그렇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의 BBFI 선교사들이 초창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 최고로 잘 번역되었다고 한국 목회자들에게 말해 주었고, 순수하게 믿고 있고 아직도 미국에 있는 BBFI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거의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기에 그러한 정서나 분위기를 훼손할 수 없기에 대강 좋게 좋게 말하는 것뿐이다. 겉으로는 근본주의 노선을 지향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안은 복음주의 사람들은 결코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교육받은 복음주의 신학교의 입장을 거부한다면 그렇게 않겠지만... 나의 질문은 그들이 만일 미국에서 목회 한다면 킹제임스 성경을 쓸 것인가라는 것인데 분명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침례교회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여, 근본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 복음주의 노선을 가는데, 자신은 킹제임스 성경이 좋다, 탁월하다, 우수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공부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든지 아니면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한 부드러운 표현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복음주의자들과, 겉은 근본주의자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이라고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번역본보다 탁월한 성경이라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운 내용이 그렇지 않고, 자신도 그 배운 내용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코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순수해야 하지만 순진할 필요는 없다. 3.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성경들과 소수사본의 문제는 “뉴 에이지 사상”과 천주교 성경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는 입장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신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원본의 축자 영감을 부인하고 잘 해야 부분영감이나 개념 영감을 믿으며 하나님과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다. (고후2:17; 4:2 개역만 말고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나 한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 참조).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사본과 역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그렇게 강하게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금 삭제되었다든지, 혹은 추가되었다든지, 변개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본교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라고 변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말씀선포와 순종과 사역에 있어서 대강 한다는 뜻을 결코 아니다. 다만 신학교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반대하고 경계한다. 아니 당연히 대적해야할 사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들도 반대한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 외에 다른 역본들과 사본들이 뉴 에이지 영향을 받았다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과 반박을 할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러한 것을 연구조사해서 그러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적인 눈이 밝게 뜨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영어 성경에 있어서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해야 한다(소위 KJB Only)는 사람들은 다른 성경이나 사본이 바로 뉴에이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기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무엇인지 믿고 있다.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 문제는 어떤 성경이 뉴에이지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요, 반성경적인 문화인데 그것을 추적해보면 바벨론 종교와 마귀에게까지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회자나 신학생, 성경에 관심이 있는 성도라면 킹제임스 성경 이슈와 별도로 이 문제를 연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사상과 이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것을 믿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믿으며, 객관적인 것보다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고, 범신론과 윤회설 등을 추구한다. David L. Smith,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 (Wheaton: Victor Books, 1992), p.277. 그리고 이것은 현대와 와서 모든 분야, 즉 철학, 과학, 정치, 음악, 의학, 신학, 크리스천 신학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훌륭한 책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은 G. A.립링거 박사가 저술한 것으로 “그런 구절들이 빠져 있거나 변개 되어 있어도 기본교리에는 상관이 없다”는 불경한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할 것이다. Riplinger, G. A. New Age Bible Versions. Munroe Falls: AV Publications, 1993. 립링거 여사는 유명 대학교수로 있으면 학생들을 영적으로 성경적으로도 도왔는데, 캠퍼스의 학생들이 많은 종류의 성경이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고 도전 받아 6년 동안 꼬박 연구조사하고 분류하여 쓴 책이다. (피터 럭크맨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립링거 박사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개역이나 다른 성경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도 복음주의자들은 나름대로의 설명과 변명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할 것이다. 위의 책은 말씀보존학회에서 번역했고 정동수 교수가 상권을 번역했다. 도움이 될 것이다. 말씀구절들이나 단어가 빠진 성경에서 조금 틀리게 가르쳐도 상관이 없다는 사람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로서 물론 말씀을 따라 100% 순종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4:2)”는 명령을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으며, 지상명령에서도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마지막 당부도 있으셨고, 사도 바울도 행20:27에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개역과 킹제임스 성경 다 참조)”을 주저함 없이 3년 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가르쳤다. 마5:19도 참조해 보라. 우리가 성경을 다 알지 못해서, 우리가 아는 만큼 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만 보더라도 7%의 분량, 8413 군데의 말씀들이 삭제되었거나 변개 되었는데도 “기본교리에는 상관이 없다”고 운운하는데,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부분들이 관련이 있고 성경을 부인하는 프린스톤 대학의 메츠거 박사도 상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성경들이 기본교리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어차피 그 사람은 성경의 기본교리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이고 솔직한 표현을 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기본교리가 상관이 있든 없든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인데,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교리와 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시인한 것뿐이다. 4.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여러 입장들 1)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은 성경이 아니다. 다만 여러 번역성경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당신의 취향에 맞는 성경을 선택하라. 이것은 자유주의자나 신 정통주의들, 그리고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다. 2) “나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다.” 이 사람들은 순수한 입장에서 다른 역본들보다 더 선호하고 어휘나 역사적인 의미, 고전적인 문체와 간결체 등을 좋아한다. 반드시 복음주의자나 근본주의가 아니라도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지 않는 목회자도 여기에 속한다. 3) “신구약사본들이 탁월하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 구약의 사본이 마소라 사본(예를 들면 킷텔이 처음에 편집한 사본으로서 후에 한 것과 구별)인 점, 신약의 다수사본인 점을 들어서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 하지만 이 사본들을 저본으로 하여 더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좋은 성경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 Wilbur Pickering과 “Defender's Study Bible"을 만든 Henry M. Morris 박사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Morris 박사는 미국 창조과학회를 창설한 사람이다. 그가 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주석은 매우 우수하다. 그는 NKJV의 모세5경을 번역하는 데 감독자로 요청되었지만 거절했다.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 www.icr.org에 가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그 팜플렛을 요청해 보라. **************** 성서침례친교회 안의 목사님들은 구령과 교회를 강건케 하는 일에 바쁘실 줄 압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틈을 내어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책이나 자료들을 조금씩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15년이나 걸려 지금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09-05-11 17:43:5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