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70개
안녕하세요?   오늘(5월 23일, 토) 지도/선도에 50여 개를 올렸고 사진 자료에 20여 개를 올렸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공개해서 나눌 것입니다. 마음대로 쓰시기 바랍니다.    사이트가 영과 혼에 시원한 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DSJ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18:41 공지사항에서 복사 됨]
2009-05-23 15:38:46 | 관리자
왕국인가, 천국인가? 한 국가의 통치 제도는 누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된다. 다시 말해 백성들 개개인이 통치 권력을 행사하면 민주국이 되고 왕이 홀로 통치하면 왕국이 된다. 그러면 성경 속의 하나님의 통치 체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여러 사람의 뜻을 물어 민주적으로 통치하실까? 아니면 홀로 주권을 행사하시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 하실까? 신구약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다(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도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신 것이다(마4:17). 그래서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은 것이다(마27:37).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 유대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언약 즉 신약을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왕국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마가복음 같은 경우 그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다. 흠정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막1:1, 14) 유대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무시하며 진실을 가리고 있다. 개역: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막1:14) 이렇게 왕국이 중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구절을 개역성경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인데 과연 그 당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제 너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흠정역: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실 개역성경으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개역성경이 ‘나라’로 번역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여기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왕국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인 것이다(마4:17). 이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이다. 흠정역: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단2:44).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셨으며 결코 우리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왕국을 의도적으로 거부했고(마23:37-39) 이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해지게 되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고 바로 왕국의 이 복음이다(마24:14). 흠정역: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위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고 세상의 끝까지 견디는 자를 말한다. 즉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들은 로마서 11장 26절 말씀 즉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이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땅에 강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신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나 교회 등이 마태복음 24장을 문맥에 상관없이 취해 선교사들을 많이 보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이것은 후천년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며 성경은 이런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선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맥에 맞지 않는 구절을 취해 내 목적에 맞도록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처음부터 이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께 가장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다. 흠정역: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행1:6) 개역: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또 다시 오역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런 번역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한국 성도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늘의 왕국의 설립과 특히 천년왕국의 도래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학자들로부터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말씀을 공부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성도들이 대부분의 구절을 ‘영적으로 비유로’ 해석한다. 성경을 - 특히 구약성경을 - 읽으면서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하나님의 치리가 이루어지는 사실로 대하지 않고 다 나하고 상관이 있는 ‘영적 QT 재료’로만 사용하기에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심오한 관이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시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무엇보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원대한 계획안에 사람의 구속(救贖)이 들어 있고 마귀의 파멸이 들어 있다. 결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존 한글 성경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모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했으므로 개역성경으로는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핵심 주제를 보여 주는 이 단어는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용 용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한편 왕국의 이해가 부족하므로 인본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악용하여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하며 인본주의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그런데 여기의 너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한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까지 하신 바리새인들 안에 - 혹은 그들의 마음 속에 - 하나님의 나라가 있단 말인가? 여기 나오는 나라 역시 왕국이다. 이것을 왕국으로 번역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자연적으로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영적 해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왕국이 성립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왕이 있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왕으로 너희 가운데 와서 거하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그들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국’(kingdom)을 ‘천국’(heaven) 혹은 ‘나라’(country)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는다.
2009-05-21 11:57:13 | 관리자
하나님의 영인가, 하나님의 신인가? 구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혹은 ‘주의 영’(the Spirit of the LORD) 등에 있는 성령님(the Spirit)은 구약성경에 28회나 나오지만 개역성경은 이것을 다 ‘신’(god)으로 번역하여 구약에서 성령님을 제거했다. 개역: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흠정역: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하나님의 신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면 ‘god of God’이 되는데 사실 이런 식으로 번역된 성경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아마 유니테리언 교도들만이 이런 번역을 취할 것이다. 구약의 ‘the Spirit’이 바로 신약의 ‘the Spirit’ 즉 동일한 성령님이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이 기독교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자기들 속에서 형성된 그 당시의 보편적 사고 체계에 따라 소위 신이 내린다는 강신(降神)의 무속신앙 개념으로 성경의 ‘성령님’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개역: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삼상10:10) 개역: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삿6:34) 따라서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던 ‘성신’은 틀리며 ‘성령’이 맞는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개역성경은 성령에 관한 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개역: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개역: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1:19) 이런 구절은 다 ‘the Spirit of Christ’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런 번역자들을 향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흠정역: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느니라(마22:29).
2009-05-21 11:51:37 | 관리자
한 하나님인가,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특이한 것이며 사실 이 교리로 인해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마땅히 삼위일체를 가르쳐야 할 성경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믿음을 가르친다면 그 결과가 어떨 것인가?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역번역: God is one person. 딤전2:5) 흠정역: 한 하나님이 계시느니라(영어 KJV: There is one God). 개역성경처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여호와의 증인들 주장대로 하나님은 한 분 즉 아버지 하나님만 있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한 분이 아니며 아버지, 아들, 성령의 뚜렷한 세 분으로 존재하시되 이 세 분이 하나인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야말로 너무 중요한 것으로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근간이 무너지게 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주셨다. 흠정역: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그런데 개역성경은 알렉산드리아 철학을 따라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이 부분을 삭제했다.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2009-05-21 11:49:28 | 관리자
베들레헴 성경 실행화일 입니다. 앞축을 풀면 실행화일이 있는 폴더가 생성되고 이후 실행화일과 같은 폴더에 성경화일을(앞축을 풀어) 복사해 놓으면 됨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3: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0 20:57:22 | 허광무
일천 번제인가, 천 개의 번제 헌물인가?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지혜와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왕상3:4, 13) 요즘 한국 교회에서는 일천 번제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골자는 천일 동안 매일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고 기도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과거에 다니엘이 21일 동안 금식했다고 해서(단10:2-3) 지금 교회마다 ‘다니엘 작정 21일 새벽기도’를 하고 있고 또 부흥회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예수님이 40일 금식했으므로 자기도 40일 동안 금식해서 능력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 적이 있는데 이제 또 여러 무지한 목사들이 무지한 양떼를 ‘일천 번제’로 끌고 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로몬은 결코 천일 동안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흠정역: 왕이 기브온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거기로 갔더니 그것은 큰 산당이더라.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 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리니라.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는 그 당시 그곳의 산당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의 산당만이 유일하게 천 개의 번제 헌물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 천일 동안 매일같이 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성경과도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다. 어떻게 왕이 왕좌를 버리고 떠나서 근 3년 동안 번제만 드릴 수 있었겠는가? 솔로몬의 기사를 가지고 천 번 번제를 드렸다고 해석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개역성경의 공헌이 지대하다. 개역성경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헌물을 제사로 처리해서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기 나오는 ‘burnt offering’은 원래 ‘태우는 헌물’이다. 하나님께는 ‘태우는 헌물’ 즉 ‘번제 헌물’을 드리지 ‘번제’ 즉 ‘태우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경우 ‘burnt offering’ 대신 ‘burnt sacrifice’라는 말이 사용되곤 했는데(레1:3, 9, 10, 13, 14, 17 등 18 곳) 이것은 곧 ‘태우는 희생물’을 뜻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다 번제라고 번역했고 그래서 개역성경으로는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린다는 개념을 찾기 어렵다. 그 결과 솔로몬의 기사에서도 태우는 희생물 천 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천 번 드린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이런 희생 헌물에 대해 아주 쉽고 명쾌한 답을 준다. 죄를 지으면 ‘죄 헌물’(sin offering)을 드리고 법을 어겼으면 ‘범법 헌물’(trespass offering)을 드리며 하나님과 화평하기를 원하면 ‘화평 헌물’(peace offering)을, 자원해서 드리기 원하면 ‘자원 헌물’(freewill offering)을, 음식을 드리고자 하면 ‘음식 헌물’(meat offering)을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개역성경은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낙헌 예물’, ‘소제’ 등으로 어렵게 만들었으며 또한 ‘자원 헌물’을 빼고는 모두 ‘헌물’이라는 말을 없애고 전체를 뭉뚱그려 제사로 바꾸어서 원래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속건제의 ‘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원 헌물’의 경우 개역성경은 레위기 22장 21절과 23절에서 ‘자의로 드리는 예물’ 혹은 ‘낙헌 예물’이라고 해서 헌물의 개념을 살렸는데 사실 다른 모든 경우에도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영어 성경의 경우에는 NIV, NASB 등 부패된 역본들도 모두 ‘헌물’(offering)을 살리고 있다. 아마도 이 사례 역시 중국 성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offering’을 제사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며 그래서 제사장 계급이 일천 번제를 드리라고 강요해서 무지한 성도들의 돈을 착취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흠정역: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성경을 알아야 이런 무지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 천주교의 암흑시대가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2009-05-20 17:55:41 | 관리자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 삼위일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 한국에서도 이로 인해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으며 심지어 복음적인 교단의 목사나 지도자들도 이런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요 아내에게는 남편이요 성도들에게는 목사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이 곧 양태론이다. 또는 “물은 얼음도 되고 액체도 되고 수증기도 된다.”는 주장 역시 양태론에 근접한 진술이다. 이렇듯 양태론의 핵심은 한 하나님이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고 성령님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분명하게 이단 교리라고 말한다. 한국에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한 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이고 성령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주장하며 그래서 침례를 줄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준다.”고 한다. 이런 이론이 생기게 된 것은 전적으로 개역성경 때문이다. 이들은 요한복음 17장 11절을 근거로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이다.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개역성경에는 분명하게 예수라는 이름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이 성경대로 그렇게 믿는다고 주장해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이와 전혀 다르다. 흠정역: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흠정역 성경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로 되어 있다. 즉 개역성경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들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성경이 다르면 교리가 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역성경의 근간이 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들이 변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NIV 등도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임을 보여 주며 그 결과 예수 유일주의 같은 이단 교리가 발붙일 틈을 주고 있다. NIV: I will remain in the world no longer, but they are still in the world, and I am coming to you. Holy Father, protect them by the power of your name--the name you gave me--so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 이제 성경적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뚜렷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세 인격체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 인격체 중 하나가 없으면 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간을 생각해 보자. 시간은 반드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며 각각이 다 시간이고 이 셋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반드시 길이(x), 너비(y), 높이(z)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물체가 아니다. 아무리 얇은 것도, 작은 것도 반드시 x, y, z 세 방향의 크기를 가지며 이로써 그 물질이(혹은 공간이) 구성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삼위일체의 증거들을 우주에 많이 만들어 두셨다.
2009-05-20 17:53:56 | 관리자
베들레헴 성경을 소개합니다. 컴퓨터에 설치하여 온라인 없이 사용할 수 있고 한글 영어등 12개 정도의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검색, 성경간 비교등 각종 편의 기능도 있구요. 전체 용량이 27메가정도가 되어 첨부가 되지 않네요. 첨부 화일은 도움말 화일 입니다. 추가로 실행화일과 성경데이타(흠정역한글, 영어흠정영, 개역개정판)를 올렸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최신판의 파일도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도움말 베들레헴은 한글윈도우용 성경 검색 프로그램이다. 성구와 성경절을 편리하게 찾을 수 있고, 성경을 장별로 읽거나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으며 작성하는 문서에 쉽게 끼워넣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베들레헴은 완전 무료 프로그램이며 공개되어 있으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복사하고 배포할 수 있다. 베들레헴의 기능 1. 찾고자하는 낱말이 포함되어 있는 성경절을 찾아서 출력창에 보여 주든지, 찾은 내용을 직접 아래아 한글이나 MS Word에 보낼 수 있다. 또한 출력창에 먼저 출력한 후에 보낼 내용만 선택하여 아래아 한글이나 MS Word에 보낼 수도 있다. 2. 원하는 낱말을 찾을 때, 성경전체, 구약전체, 신약전체, 범위선택과 같이 원하는 범위를 지정하여 찾을 수 있으며,  'AND 검색', 'OR 검색' 을 지원하고 한번에 3 낱말까지 포함된 성경절을 검색할 수 있다. 3. 성경절 찾기기능을 지원한다. 원하는 성경절을 직접 타자하여 입력하거나 성경책명 콤보박스와 장절 콤보박스에서 선택하여 입력하여 찾을 수도 있다. 또한 한 절 뿐만 아니라 이어서 몇 절까지 함께 찾아 볼 수도 있다. 사용자가 성경 번역판을 여러 개 선택하고 성경절찾기를 하면 선택한 모든 번역판의 성경절을 한꺼번에 찾아 나열해 주고 찾은 성경절의 앞뒤절이나 앞뒤장, 책으로 쉽게 이동하면서 비교 연구할 수 있다. 4. 성경 보기 기능을 지원하여 마우스 또는 키보드만 사용하여 성경을 장별로 읽거나 볼 수 있으며, 프리젠테이션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창을 동시에 띄워놓고 각 창에 서로 다른 번역판을 나오게하여 번역판을 비교하면서 편리하게 공부할 수 있다. 각 창의 성경 장절은 서로 연동되어 장절에 맞추어 따라 움직이게 된다. 연동하여 움직이는 것은 설정 또는 해제할 수 있다. 5. 지원하는 성경은 개역한글판, 개역국한문, 개역개정판(4판), 새번역(표준새번역개정판), 우리말성경, 쉬운성경, 공동번역(개정판), 한글킹제임스, 킹제임스흠정역,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 영문 KJV, NKJV, NIV, NRSV, NASB, NLT, MSG 이다. 사용자는 자신이 필요한 번역판만 받아서 사용하면 된다 6.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였을 때 빠른 메뉴가 나타나서 베들레헴의 대부분의 기능을 빠른 메뉴에서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기능을 마우스를 사용하지 않고 단축키 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7. 각 창의 크기와 위치를 기억하였다가 다음 실행시 기억된 위치와 크기로 실행되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위치와 크기로 설정하여 사용할 수 있다. 8. 성경절 출력 형식을 다양한 모양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다. 성경절 본문에 좌우에 붙일 따옴표와 장절에 붙일 부호를 사용자가 설정할 수 있으며, 장절을 앞에 또는 뒤에 붙일 수 있다. 또한 번역판 이름도 장절과 함께 나오게 할 수도 있다. 개발자 E-mail : wait4him@paran.com개발자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wait4him     베들레헴 성경 용 400주년 판은 다음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68  
2009-05-20 17:29:43 | 허광무
내 몸을 쳐야 하는가? 고대로부터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몸을 혹사시키거나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집트의 이시스, 로마의 키벨레, 그리고 에베소의 다이아나같이 피에 굶주린 여신들을 위해 사람들이 피의 제전을 열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천주교회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자기 몸을 극도로 상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고 루터 같은 경우도 이런 일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영적으로 높은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고행이 필요하다는 이교도들의 교리를 지지한다. 개역: 내가 내 몸을 쳐(I beat my body)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한국 성도들에게 보상 심리를 허용하면서 많은 은혜를 끼친 이 구절은 실제로 나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치다’(beat)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후포피아조’(hupopiazo)이며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흠정역: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자기를 치는 행위’ 즉 자학 행위는 특히 왕상18:28에서 잘 드러나는데 거기서 바알의 대언자들은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의 개념이 아니다. 흠정역: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  
2009-05-13 15:02:25 | 관리자
거세해야 하는가? 자기 학대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이제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거세(去勢)를 행하려 하며 개역성경은 이것을 지지하고 있다. 개역: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5:12)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방의 신자들을 유혹하던 거짓 대언자들이 그곳의 신자들과 교제하는 것에서 끊어지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흠정역: 나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예 잘려 나가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에서 분명히 바울 사도는 그곳 성도들이 아니라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잘려 나가기를 즉 교제에서 단절되기를 원하였다. 누군가가 자기 몸을 자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뉴에이지와 고대 신비주의 관습이다. 개역성경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번역한 부분을 NIV와 NASB 등은 ‘emasculate’(거세하다)와 ‘mutilate’(신체를 절단하다)라고 번역하여 그 의미가 거세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결국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온 현대 역본들은 고행을 통한 구원이라는 자기들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이런 두려운 일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거세 풍습은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의 기독교와 무관하며 신비 종교들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하고도 무서운 관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적인 가르침들로 인해 현대 역본들의 기반이 된 ‘부패된 그리스어 신약 사본’을 편집한 장본인인 오리겐은 스스로 자기의 몸을 잘라 내는 거세를 행했다.
2009-05-13 15:00:53 | 관리자
‘없음’이 없는 성경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을 읽다가 신약의 13 구절에 ‘없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전체 절이 삭제된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한 성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구절들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왜 절 수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사실은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뜻과 맞지 않으므로 이런 구절을 다 삭제한 것이며 루터, 칼빈, 무디 등이 사용한 성경의 대본이 된 99%의 「다수 사본」들이 이런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고 단지 천주교에서 후원하는 1%의 「소수 사본」에만 이런 구절들이 삭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단 하나의 성경’ 즉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보존하셨으며 이 성경은 단 한 번의 변화도 없이 꿋꿋이 역사 속에서 그 위용을 떨치며 수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반면에 사탄은 예로부터 ‘수많은 성경들’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속여 왔다. 세계 동향을 주시할 때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이제 과연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성경 보존 문제에 관한 오랜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을 보존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009-05-13 14:59:05 | 관리자
믿음인가, 행위인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개역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못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개역: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4:6) 개역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신다. 흠정역: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줄을 알거니와 먼저 복음 선포를 받은 그들은 믿지 아니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보시지 행위의 문제로 보시지 않는다. 바른 믿음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나온다. 이런 예는 로마서 11장 32절, 로마서 15장 31절, 히브리서 3장 18절, 히브리서 4장 11절 등에서 반복되고 있다. 개역성경의 행위 신학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역: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요3:36) 흠정역: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다 보디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흠정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였는가? 하나님의 선물 즉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인가, 값을 치르고 받는 것인가? 흠정역: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the free gift)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the gift)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거저’ 주신다고 기록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은 NIV 등과 마찬가지로 ‘거저’(free)라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삭제했다(롬5:16; 5:18에서도 마찬가지임). 이 단어가 이 구절의 핵심이 아닌가? 개역성경은 조상들의 은덕으로 자손들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개역: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니니라(출20:6 참조) 흠정역: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수천 세대라는 것은 원문에도 없고 알렉산드리아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첨가한 것이다. 앞 뒤 문맥과 성경의 구원 및 은혜관이 무엇을 지지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2009-05-13 14:57:15 | 관리자
영존하는 지옥 형벌 어떤 이들은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진짜 불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뜨겁게 느끼는 그런 불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불 즉 상징적인 불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자신의 창조물을 진짜 불 속에 영원토록 던져 넣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eternal’이다. 이 말은 원래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나타낼 때 혹은 천상의 것의 우수함이나 고매함 등을 지상의 것과 비교할 때 즉 질적 비교를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개역: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eternal fire)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반면에 영어에서 양을 강조하면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을 나타낼 때는 ‘영존하는’이란 의미의 ‘everlasting’을 사용한다. 흠정역: 그러므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들을 찍어 네게서 내버리라. 네가 절뚝거리거나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존하는 불(everlasting fire)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라. 이렇게 ‘영존하다’(everlasting)를 사용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인들의 ‘영혼 멸절설’ 같은 이단 교리가 발붙일 수 없다. 영원토록 계속해서 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영혼이 멸절될 수 있는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질적으로 우수한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기도 하며 동시에 양적으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이기도 한다. 즉 질적으로 양적으로 영원무궁한 생명인 것이다. 흠정역: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5-16).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치밀하게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전달하고 있으며 그래서 믿는 자들의 최종 권위가 된다.
2009-05-13 14:54:54 | 관리자
지옥인가, 음부인가? 마귀는 지옥을 숨기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음부에 갑니다.” 혹은 “스올에 갑니다.”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는가?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죽어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과 지옥으로 갔으며(눅16:19-31) - 이 구절의 음부도 음부가 아니고 지옥임 -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낙원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 즉 천국으로 옮겨졌으나(엡4:8-10; 고후5:8; 12:2-4; 히11:40) 지옥은 여전히 지옥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죽은 사람은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지옥은 성경에 54회 나오는데 개역성경은 이 중에 구약에 나오는 31번의 지옥을 모두 스올로 번역했고 신약에서도 13번만 지옥으로 번역하고 나머지는 음부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스올 혹은 음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말 큰 사전은 음부는 저승인데 저승은 ‘죽은 혼령이 가서 사는 세상으로 구천, 유명’이라고 말한다. 즉 개역성경은 번역자들의 샤머니즘으로 인해 불교 용어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개역: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잠15:11) 개역: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잠27:20) 이런 이교도 사상이 개역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리와 신학에 참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흠정역성경은 정확하게 ‘지옥과 멸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지옥의 본질을 성경에서 제거해 버렸다. 개역: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5) 흠정역: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며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지옥은 결코 불이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흠정역: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4, 46, 48).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44, 46, 48절에서 연거푸 이 사실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44, 46절은 생략했다. 단 한 번만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강조하실 때는 늘 반복을 하셨다. 흠정역: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구원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우리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셨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빠지는 것 역시 치명적이므로 그분께서는 연거푸 세 번이나 지옥의 실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거기에 가지 말 것을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44, 46절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참고로 영어의 지옥 즉 ‘hell’은 ‘감추다’ 또는 ‘덮다’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1차적으로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하 세계’를 뜻하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 지하 세계에서 악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곳’을 뜻한다. hell: The abode of the dead; the place of departed spirits; the infernal regions or lower world regarded as a place of existence after death(옥스퍼드영어사전) 그러므로 한자의 ‘지옥’(地獄) 즉 ‘땅의 감옥’이란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말 성경에 아주 근사한 용어를 허락해 주셨다. 지옥이 땅의 중심부에 있음을 성경이 말하지만 현대판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이것을 믿지 않는다. 흠정역: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39-40).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에 가셔서 고난을 당하셨다. 흠정역: (다윗이)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더니(행2:31) 그러나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지옥을 음부라고 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음은 우리나라 성도들이 자주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들어 있다. 한영 성경이나 한영 찬송가의 표지 안에 들어 있는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원래 사도신경에는 “그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있으나 번역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하였다. 우리는 결코 주문 외우듯이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으며 사실 신조 자체를 외울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기록된 말씀 이외의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지옥에 대해 바른 개념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신경을 예로 들어 설명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믿지 않은 악인들이 영원토록 살 곳은 성경에서 불 호수라 하는 곳 즉 불로 가득한 호수이며 이곳의 위치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계19:20; 20:14).
2009-05-13 14:52:55 | 관리자
공동번역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연합 작품인 공동번역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것은 사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종교일치 운동(Ecumenism)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962년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니다(E. A. Nida)와 브래드녹(W. J. Bradnock)이 한국을 방문해서 새로운 번역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형식적 일치’보다는 ‘동적 일치’ 번역을 해야 하다고 주장했으며 공동번역 위원회는 이런 원칙을 수용했다. 공동번역의 구약은 1937년도에 발행된 키텔의 Biblia Hebraica에서 번역되었으며 신약은 연합성서공회가 1966년에 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1판에서 번역되었다. 이렇게 출간된 공동번역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가 연합해서 만든 성경 중 두 번째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의역 성경(Paraphrased Bible)이며 프로테스탄트 판과 카톨릭 판이 출간되었는데 카톨릭 판에는 외경도 정경으로 들어가 있다.
2009-05-13 14:50:21 | 관리자
표준새번역 개역성경이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는 동안 대한성서공회는 새로운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번역의 필요를 느꼈다. 또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번역이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힘으로 거의 이루어진 개역성경을 대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성서공회는 외국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들이 이런 작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1983년에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표준새번역이라는 새 역본을 발간하였다. 표준새번역은 연합성서공회가 1983년에 발행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3판과 키텔(R. Kittel)이 수정한 ‘히브리어 구약성경’(Biblia Hebraica)과 거의 유사한 ‘슈투트가르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1967/1977, BHS)를 번역의 원전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표준새번역 역시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그리스어 본문과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므로 문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05-13 14:49:0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