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405개
자기 성찰 ● 정동수 청교도 목사들의 지침서 중 하나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Reformed pastor)입니다. 목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글이므로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참목자상(리처드 백스터, 최치남 옮김, 생명의 말씀사) 1. 자아 성찰의 내용 1)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 가장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충실히 배우는 사람이며, 성결한 사람만이 그 일을 온전히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며, 그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서입니다. 신학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철학의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무엇보다 그대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와 묵상에 힘쓰십시오. 하늘의 불을 받아 희생의 불꽃을 피우십시오. 3)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보라. 자신의 혀로 한 말을 그 생활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합니다. 저들은 설교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삶은 정확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강단 위에서만 목회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강단을 떠나 있을 때는 목회자임을 포기하는 셈이 됩니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행동 잘하는 목회자가 됩시다. 첫째, 아무 흠 없이 행하여 그대의 순전함을 유지하십시오. 적어도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가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의 덕스러운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손히 대하십시오. 둘째, 자선 사업을 풍성히 하십시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자가 풍성한 희생 제물을 제공합니다. 이들을 우리의 희생 제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독실한 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보라. 그대는 스스로 조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그대가 경고하고 비난하는 죄에 자신이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로는 죄를 굴복시키고 실제로는 죄를 굴복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5)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보라. 그대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로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지식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우리 역시 부지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실천하십시오. 나태함으로 인해 연약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2009-05-08 14:04:19 | 관리자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서문 ● 정동수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 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 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 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 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5-08 14:03:44 | 관리자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 ● 송인규 교수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5-08 14:03:03 | 관리자
내일(5월 4일)부터 주일마다 설교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 2년 가량 목회를 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설교를 했지만 이제 고난 당한 뒤에 다시 설교를 하면서 먼저 자세를 바로 잡고 싶어서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도서출판 규장)이라는 제목의 토저 일대기 중에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홀로 한적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드린 서약 기도를 읽었습니다. 나는 토저 같은 사람이 못되지만 그래도 토저 이상의 결심을 해야겠다고 느끼고 이렇게 그의 글을 올립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나의 영적 수준에 의해 저울질 되는 것을 두렵게 느끼면서 내가 전하는 복음이 먼저 내 안에서 내 것이 된 뒤 내 온 몸을 돌아서 내 입을 통해 나와 교회 성도들과 인터넷으로 청취하는 세계 각국의 성도들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토저의 서약 기도  오 주님!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중차대한 위기의 때에 주님은 저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흔들릴 수 없는 것들만 남도록 만국(萬國)과 온 땅과 하늘을 뒤흔드실 것입니다. 오 주님! 나의 주님! 주님은 스스로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어 저를 주님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아론처럼 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종이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주님이 저에게 안수를 허락하신 것은 마음이 완악하고 듣는 것이 더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주인 되시는 주님을 거부했으므로 종이 된 저 역시 거부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저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한탄하느라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책임을 지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알았고, 너를 구별하여 세웠고, 너를 거룩하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 갈지어다. 그리고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모두 말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누구관대 주님과 논쟁을 벌이겠습니까?제가 누구관대 주님의 주권적 선택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결정을 내리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여, 주님이 결정하소서.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하나님이시여!제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저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자비하신 하나님,제가 이 엄숙한 서약을 평생의 사역 동안 지켜서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순풍에 돛을 달든 역풍에 힘들어 하든, 살든지 죽든지 생명이 붙어 있는 한이 서약을 지키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원수가 하나님의 초장에 들어가 양들을 찢고 흩어버렸나이다.그렇지만 양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짓 목자들이 너무 많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양떼에게 닥치는 위험을 무시합니다.이런 삯군들에게 속은 양들은 가엾게도 그들을 열심히 따르지만, 그러는 동안 늑대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다가옵니다. 하나님이시여! 구하오니 제가 원수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제가 본 것을 성실하게 전하도록 제게 용기를 주소서.저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을 닮게 하소서.그러하시면, 심지어 병든 양들도 저를 통해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주 예수님주께 나아오니 저를 영적으로 준비시키소서.저에게 손을 얹으소서.신약의 선지자의 기름으로 저에게 기름 부으소서.제가 종교적 서기관이 되지 않게 하소서.제자 저의 선지자적 사명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현대의 성직자들의 얼굴에서 웬지 모르게 느껴지는 저주의 씨앗들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타협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고직업적 타성에 빠지는 저주스런 행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의 규모, 교회의 인지도, 그리고 교회의 연간 헌금 액수를 기준으로교회를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우소서.제가 흥행주(興行主)나 종교적 관리자가 아니라선지자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선지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제가 잔뜩 모여 웅성거리는 대중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저의 육신적 야망을 고쳐주소서.인기를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명예욕에서 저를 건지소서.또한 제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빈둥거리면서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여!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그리하시면 제가 기도의 장소를 찾아가서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울 것입니다.제가 과식하지 않도록, 늦잠 자지 않도록 도우소서.제가 제 자신을 훈련하여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되게 하소서. 저는 이 세상에서 수고를 많이 하고 보답을 적게 받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저는 편한 자리를 구하지 않습니다.제 삶을 더 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비열한 방법들을 거부할 것입니다.다른 사람들이 편한 길을 추구한다 할지라도,저는 그들을 가혹하게 판단하지 않고제 자신이 힘든 길을 택할 것입니다. 저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지만,그런 경우에도 차분히 대응할 것입니다.주님의 친절한 백성들이 주님의 종들에게 흔히 그러하듯이저에게도 감사의 예물을 억지로 주려고 할 때저를 붙드셔서 제가 실족하지 않게 도우소서.저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그것을 선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하시면 그것 때문에 저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그것 때문에 저의 영적 능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입니다.만일 주님께서 깊은 섭리 가운데 저로 하여금주님의 교회에서 영예를 얻게 하신다 할지라도제가 두 가지를 꼭 기억하게 하소서.첫째, 제가 주님의 가장 작은 은혜조차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게 하소서.둘째, 사람들이 저의 진짜 모습을 안다면 저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그 영예를 저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저의 남은 날들을 성별(聖別)하여 주님께 드립니다.주님의 뜻에 따라 그 날들을 짧게도 하시고 길게도 하소서.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높은 사람들 앞에 서도록 하소서.그러나 또 주님의 뜻이라면제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섬기게 하소서. 선택권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게 선택권이 있다 할지라도그 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저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종일 뿐입니다.지위와 재물과 명예보다 주님의 뜻이 제게는 더 소중합니다.하늘과 땅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할 것입니다.주님이 저를 택하시고거룩하고 높은 소명을 받는 영광을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하지만 제가 재와 먼지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제가 인류를 괴롭히는 선천적 결점과격정(激情)들을 타고난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러하오니 나의 주, 나의 구원자시여!저를 제 자신에게서 건지소서.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에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소서.저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소서.그리하시면 제가 주님의 능력 안에서 행하고주님의 의(義)를 선포할 것입니다.저는 저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주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의 메시지를 널리 전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사랑의 주님!제가 늙고 지쳐서 더 일할 수 없을 때하늘에 저의 처소를 마련하시고제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는 주님의 성도들 중 하나가 되게 하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제임스 스나이더> 중에서 ---
2009-05-08 14:02:17 | 관리자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 정동수 교회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채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보내온 글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기에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아마도 저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동감이 갈 것입니다. 2008년도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나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부담이 너무 커서 어디부터 기도해야 할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정말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권능을 가지고 굳게 서 있는 교회 말입니다. 율법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그리스도를 앞서지 않는 교회, 성경 말씀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서 고치고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교회, 기도와 말씀이라는 펀더멘탈이 강한 교회,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흥하고 사람은 쇠하는 교회, 그런 교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굳게 서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선포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인간을 인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목사님 말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친근하게 내 것을 허물없이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된 사람들,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말입니다. 주님, 지금까지 여기 저기 가까운데 먼데 다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내 요구가 너무나 큰 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임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마음고생하며 많이 기다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단다. 자유의 영으로 마음 놓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혼을 다해 나를 의식하려고 애쓰는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이다. 영과 진리로 내게 경배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가 준비해 놓았다.
2009-05-08 14:01:37 | 관리자
진실 속이는 이에게 어찌 신앙 묻겠는가 ‘부실 학력’ 목회자에도 경고 메시지… 한국교회언론회 자정 촉구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인터넷판 조선일보 입력 : 2007.08.21 00:20 ‘허위학력’ 불똥이 종교계로까지 튀었다. 20여년 만에 신도 25만명을 자랑하는 한국 최대의 도시사찰로 떠오른 서울 포이동 능인선원 원장 지광(智光·57·속명 이정섭) 스님이 지난 18일 자신의 ‘서울대 공대 중퇴’ 학력이 거짓이라고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정직과 신뢰가 생명인 종교인 까지 허위학력 파문에 휩싸이면서 종교계 내에서도 ‘학력’이나 ‘경력’에 관한 ‘허위’와 ‘과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요점은 ‘이제는 종교도 성역이 아니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쪽이다.  종교계는 지금까지 사회에서의 학력, 경력보다는 성직을 맡은 이후의 능력을 우선시해 왔다. 불교계는 일단 출가한 이후에는 은사(恩師)와 수계(受戒) 여부, 그리고 교계 내의 경력만 묻고, 출가 전의 일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최근에는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등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스님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유년 시절 절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출가하는 ‘동진(童進) 출가’ 관행이 살아있는 불교계에서 50대 후반의 지광 스님은 특이한 경우였다. 지광 스님 본인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출가할 때 포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허위학력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일반 신도 입장에서 볼 때 1980~1990년대 당시 지광 스님의 ‘서울대 중퇴’ 학력은 눈에 띄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계종측은 난감해 하는 분위기이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출가 전의 학력,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는 풍토에서 이런 일이 생겨 당혹스럽다”며 “아직 종단 차원의 어떤 결정을 내린 바 없다”고 말했다. 개신교계도 ‘부실학력’에 대한 자성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개신교계의 대(對)언론관계 창구역할을 하는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는 지광 스님의 고백이 있기 전인 지난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제라도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이고 공인된 학교에서 받지 아니한 학력이나 학위에 대해서는 내세우지 말아야 하며, 이를 통하여 얻은 혜택이나 명예가 있다면 정직하게 버리거나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이 자료에서 “기독교계도 ‘단기간에 학위 받기’ ‘외국에 나가지 않고 학위 받기’ ‘논문도 제대로 써보지 않고 학위 받기’ 등의 사례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신교계의 경우, ‘우체통 신학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교단과 신학교가 난립하면서 ‘부실학력’ 목회자의 불안요소를 늘 안고 있었다. 개신교계는 현재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100여 개에 이르며 연간 4000~6000명의 목사가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60여 개 교단이 가입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한 관계자도 “20여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교만 교육인적자원부가 인가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실태파악이 잘 안 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문제는 비인가 신학교의 경우도 대부분 소속 교단은 학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엔 목사 안수 때 교단과 교회 내부적으로 학위가 문제 되지 않는다. 또 “학위가 성직자로서 영성과 리더십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조재국 교수는 “비인가이지만 교단은 인정하는 신학교를 나와서라도 목회만 한다면 문제가 적다. 교회가 커지고 목회자가 사회적인 위치를 얻으려 하면서 외국의 비인가 신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이를 통해 최종학력을 세탁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언론회 관계자는 “자료를 낸 것은 자정(自淨)을 위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며 “필요할 경우, 사례 신고를 받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중견 목회자는 “교회와 사회의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렇지만 언젠가는 교육과정에 대해 사회와 교회의 접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009-05-08 14:00:52 | 관리자
바른 목사/설교자들의 필요성 다음은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대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9-05-08 14:00:04 | 관리자
바른 목사(성도)의 자세 조지 위필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키기로 주님과 약속하고 매일 이것을 점검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글은 특히 목사들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내 자신을 쳐서 낮추는 작업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끝없이 성화의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이런 약속들을 지켜봅시다. 책상에 붙여 놓고 매일 보기 바랍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했는가,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2009-05-08 13:59:24 | 관리자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5-08 13:58:13 | 관리자
가정 같은 교회?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5-08 13:57:36 | 관리자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립니까? ● 정동수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5-08 13:57:00 | 관리자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 교회에 다니며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 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함을 느낄 때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 주실 것을 기도한다.
2009-05-08 13:56:21 | 관리자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 교회에 다니며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 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함을 느낄 때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4-03 11:56:19 성경교리에서 복사 됨]
2009-05-08 13:56:21 | 관리자
주기도문 ● 정동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예배 때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또 소그룹 모임 등에서도 모임을 끝맺을 때에 거의 대부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주류인 미국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절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이단을 감별(?)해 주는 연구소들이 몇 있는데 어떤 단체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감별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감별 방법 중의 하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외우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전통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번은 이런 단체의 소장이 미국에(호주에) 가서 이것을 주장하다가 그곳의 교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잘못을 시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 가운데는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므로 그것을 외우는 형제자매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안 외우고가 교만의 문제로 비쳐지고 안 외우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유래와 특징 등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흠정역 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흠정역). 1. 주기도문의 이름과 유래 주기도문은 실제로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5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부분이 끝난 뒤에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2.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8절 말씀에 있듯이 말을 많이 하면 신이 기도를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3. 미국의 침례교인들은 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가? 이 기도에는 신약 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부분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11절에는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런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절대로 성령님이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도 이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4.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 번역의 본문인 바티칸 사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각주 참조).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원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 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5. 주기도문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서 <대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한국 기독교(개혁신교)에서는 과거에 <대개>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은 <대개>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빼기도 합니다. 그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영어로는 for)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6. 그냥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러 준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이 이 기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 하늘의 왕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추후에 왕국이나 천년왕국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2009-05-08 13:53:45 | 관리자
    사도신경   사도신경(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도 사도신경은 개혁 교회와 근본주의 침례교회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혹은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배 시에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시각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디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중언부언으로 생각하여 하지 않음으로 역시 주를 위해서 안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의 몇몇 문제와 용어을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은 영어 사도신경과 카톨릭 사도신경, 개긴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원문에 보면 동정녀가 대문자 V를 써서'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알지만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만 해당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인 평생 동정녀(the Virgin)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분이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소위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림보설 등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주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예수님의 혼)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엄밀하게는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k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9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10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3) Holy catholic church    영문에는"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assembly)이나 종교 회의의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church" 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2세 교포 아이들(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심각하지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반드시 로마 카톨릭(Catholic) 교회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요.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의 통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죽은 카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만들어서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Holy catholic church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해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참고로 저는 중학교 때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로서`가 무엇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연서도 이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로 그 위의 구절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재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이해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지만 몇몇 부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 고특히 카톨릭주의가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을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2009-05-08 13:53:08 | 관리자
교회   교회(Church):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말 에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117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모임 혹은 일반 모임을 뜻하였고 그래서 행19:32, 39 등에서는 그렇게 번역되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대개 종교적 예배자들의 모임을 뜻하였고 그래서 심지어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모임도 광야의 교회라 불렸지만(행7:38) 물론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 세우신 신약 교회가 아니다(마16:18; 고전6:4). 교회와 왕국 선도 참조(85).대부분의 신약성경 용례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세워진 신약 교회를 뜻한다. 또 신약 교회의 의미로 쓰인 교회의 경우 대부분 한 지역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뜻하였고 로마,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교회 등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교회가 다 지역 교회였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전 우주적인 교회’ 즉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교회도 몇 군데 발견된다(히12:23). “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아래 두시며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사 교회를 위해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2-23)는 말씀에서 드러난 교회 역시 후자의 교회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전 우주적인 교회를 강조하다 보면 지역 교회의 모임과 제도를 모두 무시하는 폐단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교회가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교회가 선택 받은 자들의 모임이므로 아담 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러 구약 주석들도 이스라엘을 모두 교회로 해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침례자 요한 때부터 교회라고 주장하고 사도행전 13장 혹은 사도행전 28장 이후부터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유기체로서 예수님 당시에 수태되어 오순절 날 성령님의 침례 사역과 더불어 권능 있게 밖으로 드러났으며 휴거 때까지 이 땅에 존재한다.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신약 교회가 세워졌으므로 오순절 전에 다락방에 머물며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이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먼저 오순절 날 베드로의 말을 들은 3,000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더해졌다고 기록하고(행2:41)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게 더하셨다고 기록한다(행2:47). 따라서 누가의 기록으로는 120명의 성도들이 이미 신약 교회였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신약 교회의 핵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들이 변천기에 산 사람들임을 감안하고 또 마18:17의 교회 치리를 고려하면 비록 그들이 아직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는 않았으나 목자장이신 예수님에게 직접 배운 최초의 원시 신약 교회라고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 오순절 이후의 교회 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즉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고전12:13, 27-28; 참조 엡1:22-23; 5:30-32; 골1:18). 그러므로 교회의 출생에는 반드시 성령 침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침례자 요한에 의해 처음 예언되었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그는 자신은 물 침례를 주지만 주님은 성령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성령 침례가 미래에 있을 것을 말하였다. 그 뒤 주님은 마16:18에서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미래의 일을 말씀하셨고 부활한 뒤 승천하기 바로 전인 행1:5에서도 여전히 성령 침례가 미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때까지는 변천기에 있던 120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분의 몸에 들어가지 않았다(고전12:13). 이때에 주님은 며칠 지나면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고 실제로 10일 후 오순절에 그 일이 발생하였지만 사도행전 2장은 성령 침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는 사도행전 11장에서 고넬료가 성령 침례를 받았으며 그와 동일한 일이 오순절에 발생했음을 보여 준다(행11:15-16).한편 엡1:19-23은 교회의 출생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만 가능함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인 교회가 머리가 있기 전에 생길 수는 없다(요7:39). 지역 교회는 침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되며 믿음의 약속과 복음의 교제로 이루어진 조직으로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며 말씀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 선물(은사)이나 특권을 발휘한다(고전11:2; 행2:41-42; 20:17-28). 교회의 참된 사명은 단체 사회 활동이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롬15:26). 지역 교회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계급 체계를 거부하며 완전히 독립된 자치권을 갖는다. 교회의 유일무이한 감독자는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법정에서 서로를 소송해서는 안 된다(고전6:1).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는 믿음의 수호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며 이런 협력의 분량이나 방법은 각 지역 교회의 권한에 맡겨진다. 그리고 회원문제, 정책문제, 행정, 양육, 자선 등도 각 지역 교회가 사정에 맞게 결정할 수 있다.구원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이 세상에 대해 나그네요 순례자요 대사요 증인이 된다(고후5:18-20; 벧전1:17). 그리고 그들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선교를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마28:18-19; 막16:15; 요17:18; 행1:8).지역 교회의 직분에는 목사와 집사가 있으며 그들의 자격이나 요건 그리고 의무는 성경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딤전3:1-13; 딛1:5-11). 목사, 집사 참조. 또한 교회에는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두 가지 규례만 있을 뿐이다. 침례, 주의 만찬 참조.
2009-05-08 13:52:12 | 관리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9-05-08 13:49:55 | 관리자
목사와 집사 용어의 구분 (1) 장로(elder) - 충분히 나이 들고 연륜이 있는 사람; 영적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분별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 한 마디로 영적인 영역에서의 "백전 노장" (2) 감독(bishop) - 감독자, 관리와 감독을 맡은 사람; 특히 양무리를 지키는 자(행 20:29; 벧전5:1-4). 장로가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이라면 감독은 그 사람의 일(직무)을 설명해 준다. 딛1:5,7을 보면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같은 직무이므로). 딤전3:1에서 "사모한다(desire)"라는 말은 "자신을 내어놓는다, 열망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기꺼이 자신이 이 직무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섬기며 희생한다. 1. 장로의 자격 딤전 3:2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blameless) - 나무랄 데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하지 않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잡히지 않는"(마치 젖은 비누처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의 삶에서 흠잡을 곳이 없는가 찾고 있다고 하자. 커다란 쇄 프라이팬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이 이것을 집어서 어떤 사람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책망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프라이팬을 쥐려고 할 때 거기에 손잡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손잡이가 없으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단6:4-5) 한 아내의 남편 - 그의 결혼 상대에게 충실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는 반드시 "한 여자의 남자"이어야 하며 이혼 경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여자는 더더욱 안되지 않겠는가? 깨어 있고 - 절제하고 냉철하며 방심하지 않는 상태. 단련된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냉철하며 - 건전한 마음, 상식이 있고 진지한 "제 정신"(막 5:15)으로 무엇이든 진지하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균형이 필요하다. 일단 그는 항상 농담이나 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으로 찍혀서는 안 된다(엡 5:4). 그렇다고 가는 곳마다 무겁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진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높이는 건전한 유머감각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의바르며(of good behaviour) - 정돈되고 질서와 균형이 잡인 생활("혼돈"의 반대)을 하며 시간 활용을 잘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의 삶에는 선한 계획과 목적이 분명하다. 손님대접에 힘쓰며 - 나그네를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을 가진 자로서 형제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위하여 그 집의 문은 마음과 함께 늘 열려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나누고자 하며 이 일에 유능하고 숙련되어 있다. 딛 1:9에는 그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잡으며" 건전한 교리로 능히 권면하고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이는 강단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남을 돕고 꾸짖고 훈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고 나누는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딤전3:3 자신을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 문자적으로 "술을 안고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애주가여서는 안 된다. 음주나 건전치 못한 술문화에 찌들리고 더렵혀진 이 사회에서 술을 피하고 문제가 될만한 자리에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장로가 되려는 사람에겐 유일한 선택의 길이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 쉽게 화내거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싸움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불끈 쥔 주먹).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 개인적인 이득이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재산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책망 받을 것 없이 깨끗하다. 욕심이 없다. 인내하며 - 부드럽고, 관용적인(빌 4:5) 사람을 말한다. 온화하고 남의 감정을 고려할 줄 안다. 이 사람은 양보할 줄 알며 무엇이든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용인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진리에 대해서만은 타협하지 않는다. 말다툼하지 아니하며 - 싸우지 않는다(문자적으로 "전쟁이 없는"이란 뜻). 늘 육신적인 논쟁이나 다툼에 빠지는 사람은 안 된다. 화평한 사람(롬 12:8)을 말한다. 탐욕스럽지 아니하며 - 말 그대로 하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히 13:5)이란 뜻이다. 삶의 목적이 돈이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인 사람을 말한다. 딤전 3:4-5 자기 집을 잘 다스리고 - 가족들을 충실히 돌보며 순종하고 공손하며 예의바른(규칙을 지키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한다. 딛 1:6과 비교하기 바란다. 자녀를 부모의 적절한 통제하에 두어 방탕하다거나 제멋대로라는 비방을 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거칠고 무질서하며 반항적인 자녀를 두어서는 안 된다. 딤전 3:6 초신자는 아니되나니 - 처음 믿은 자나 새신자, 즉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안 된다. 충분히 연륜이 있고 믿음 안에서 성숙한 자라야 한다(세월의 시련을 겪은 자). 딤전 3:7 좋은 평판 - 믿지 않는 자나 믿는 자 사이에서 선한 간증을 보이는 자라야 한다.(주: 딛 1:5-9에도 감독(장로)의 자격을 다루고 있는데 내용은 딤전 3:1-7과 크게 다를 바 없다.) 2. 집사의 자격 "집사"라는 단어는 "종"을 의미하며 겸손히 지역 모임을 섬기는 자로 특별히 회중의 재정이나 물질적인 필요를 맡는 사람이다. 집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목양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온전히 자신을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드릴 수 있다(행 6:1-7). 초세기 "집사"들은 영적인 사람들이었고, 이는 스데반과 빌립이 집사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행 6:5). 빌립은 집사의 직분과(행 6:5) 함께 복음전도의 은사를 받았다(행 21:8; 엡 4:12와 비교) 행 6:3 너희 가운데 - 집사는 반드시 믿는 자, 즉 구원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 선한 평판과 간증을 보인 자라야 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 영적인 사람,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라야 한다(갈5:22-6:1; 엡 5:18). 지혜로 충만한 - 지식과 경험으로 올바르게 판단을 내리고 때마다 건전한 조치를 취하는 능력을 가진 자라는 말이다. 지혜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삶과 현안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게 하라 - 유능한 사람 혹은 직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딤전 3:8 신중하고 - 점잖고 진지하고 훌륭하며 본이 되고 간증이 좋으며 바른 인격을 갖춘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말한다.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 "말과 그 저의가 일치하는"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르게 말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의도와 겉으로 드러난 말이 일치하며, 그 말을 신뢰할 수 있고 동기가 순수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말한다. 많은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 술 중독자는 안 된다. 음주가 일으키는 여러 문제 때문에 집사는 알코올 음료를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특히 롬14:21에 나오는 대로 남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 말 그대로 "부끄러운 이익"을 챙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딤전 3:3에서 언급하였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맡겨야 한다. 딤전 3:9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 - 믿음의 신비라 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한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진리의 본체이다(유3). "믿음의 신비"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교회의 진리(딤전 3:14-16과 비교)와 관련된 믿음을 강조한다. 집사는 지역 교회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역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즉, 머리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통치하에 유기적으로 결합된 몸). 딤전 3:10 시험된 사람 - 시험을 거쳐 인정된 사람. 일단을 시간을 두고 집사의 자격이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 동안에 이 사람은 신실하게 행함으로 자신이 집사로 적합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칙은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딤전 3:6 - "초신자는 아니되나니"라는 말씀대로). 책망할 것이 없다 - 고소할 것이 없다. 일관성 있고 성실하게 살기 때문에 무슨 문제될 만한 모습이나 행동으로 교회 앞에 불려나갈 일이 없다. 딤전 3:12 한 아내의 남편 - 앞서 나온 딤전 3:2의 내용을 보라. 여자는 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한다.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 - 딤전 3:4-5의 내용을 참고할 것
2009-05-08 13:49:19 | 관리자
  주일과 안식일 (Sunday or Sabbath) 신실한 안식교인들(제 칠일 안식일 재림파)에게 권하는 성경적 답변 by  John R. Rice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매우 혼돈하고 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어려움은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지도력과 교회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안식교는 안식일이 한 주간의 일곱 번째 날이며 모든 크리스천들은 휴식과 예배의 날로 제 칠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며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표'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안식일은 제 칠일에서 첫 번째 날로 바뀌었으며 이제 모든 크리스천들은 휴식과 예배의 날로 일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논박한다. 그들은 주일을 '기독교 안식일'로, 주일학교를 '안식일학교'로 부르며, 안식일, 즉 주간의 제 칠일인 토요일에 대해 구약에 있는 모든 명령을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적용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곧 이러한 양쪽의 견해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성경은 이러한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아울러서 이러한 문제와 함께 다른 중요한 성경의 교리들과 크리스천의 실행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짐승의 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한 성경은 일요일을 '기독교 안식일' 이라든가 다른 어떤 종류의 안식일로 부르지 않는다. 1. 구약의 안식일은 제 칠일이다. 출애굽기 20:10은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것에 관하여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언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단어가 일곱 번째를 의미한다. 휴식의 안식일은 노동을 위한 육 일 뒤에 왔으며, 주간의 마지막 날로 간주되었다. 즉, 토요일이 구약의 안식일인 것이다. 2. 안식일은 구약의 계명이지 신약의 계명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성경연구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 왔다. 안식일은 모세율법의 한 부분이며,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 이외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크리스천 성도들에게 할례에 관한 계명을 지키도록 권고하거나 혹은 돼지고기나 메기 등을 금할 것을 권고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진지하게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를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그러한 설교가 의미하는 것은 "주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며, 주일을 안식일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돼지고기나 메기를 삼가고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먼저, 신약 어디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십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조항만을 제외하고는 신약에서 반복적으로(어떤 것은 매우 자주) 되풀이된다. 신약에 언급된 많은 죄들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코 한 번도 죄로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한 번도 대중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요한복음 5:18에서 엄격한 안식일 신봉자들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심이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유대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증오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낱알을 먹기 위하여 이삭을 모았을 때(마 12:1∼8) 유대인들의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성경을 주목하도록 하였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을 원치 아니하노니…"(호 6:6).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 성경을 이해했었다면 무죄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제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던 의식적 율법의 한 부분임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사도들 역시 신약시대 교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이방 개종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쓴 편지에서 안식일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도 역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들에 보내는 서신들에서 안식일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단 한 번도 암시하지 않았다! 안식일은 구약의 것이지 신약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다음의 사실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3. 안식일은 모세율법이며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약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을 뿐 아니라 구약에도 시내 산 이전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2: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마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나 그 이후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그 날에 관한 명령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에녹, 노아나 아브라함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누구도 시내 산 이전에 안식일을 지켰다든지 그것에 대하여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창세기 2:1∼3은 모세가 시내 산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이들 다섯 권의 성경을 쓸 때까지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경에서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첫 번째 사용된 시기는 출애굽기 16:23에서였고. 그 때 이후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단어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이미 시간의 단위로 한 주간을 가졌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더욱더 확실해진다.(창8:10∼12: 29:27)  출애굽기 16:23∼36에 나타난 사건을 보면 안식일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이전에는 안식일을 결코 지키지 않았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느헤미야 9:13∼14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바른 법도와 참된 율법과 선한 법규와 명령들을 그들에게 주시고 또 주의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며 주의 종 모세의 손으로 훈계와 법규와 율법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애굽에서의 핍박과 흥해를 건넜던 사건을 다시 언급한 후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내려오셔서 그의 거룩한 안식을 백성에게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모세율법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결혼, 십일조 그리고 할례처럼 모세 율법에 속한 명령이었다. 그것은 시내 산에서 '알려진' 것이었다!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 이전에는 안식일의 개념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안식일이 시내 산에서 처음으로 주어졌고 알려졌다는 이와 같은 가르침은 에스겔 20:10∼12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여 광야로 데리고 가서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를 그들에게 주며 내 법도를 보여주었고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주님께서 친히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출애굽기 16:23∼36에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안식일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4. 안식일은 특별한 표적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시내 산에서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특별한 언약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임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출애굽기 31:12∼13, 16∼17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킬지니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 영속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니라.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 에스겔 20:12은 안식일의 의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다는 설명을 되풀이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진 분명하고 반복적인 가르침을 볼 때 안식일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표적, 즉 언약으로서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이었으며, 어떤 율법시대에서도 이방인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식일을 이야기할 때에 그것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구약의 의식적 율법으로 제 칠일 즉 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다. 5.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고했다. 이제 다시 신약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대신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골로새서 2:14을 보면 손으로 쓴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규례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17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존재하는 그림자였으며, 이제 그가 오셨고 그림자는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제 칠일 안식일 재림주의자나 유대인이나 누구도 안식일로 인하여 어떠한 크리스천에 대해 판결을 내릴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부정한 고기들에 대한 명령 및 다른 의식적 율법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유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서 4:8∼11에서 바울은 명확하게 그와 같은 사실을 언급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그들에게 유대주의의 옛 속박인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 즉 구약의 의식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깨뜨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4:10∼11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  여기에서 언급된 '날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구약의 의식율법의 한 부분인 안식일이었다. 바울은 신약의 크리스천들이 구약의 안식일이나 의식적 율법의 또 다른 날과 달과 절기와 해에 구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6. 주일은 '기독교 안식일'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주일이 기독교 안식일이며, 안식일이 주간의 첫 번째 날로 바뀌어졌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주마다 특정한 하나의 날로서 규칙적인 안식일을 말하는 'Sabbath'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항상 주간의 제 칠일인 토요일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토요일을 지키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주장을 사용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에 의하여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할 때 매우 큰 혼란에 빠진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제 칠일 안식일 재림주의자의 모세율법에 대한 가르침에 의해 자주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7. 카톨릭은 첫째 날 예배를 시작하지 않았다. 안식교는 카톨릭이 안식일을 제 칠일에서 주간의 첫날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우스운 점은 어떤 카톨릭 저술가들은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는 점이다! 그러나 안식교 교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카톨릭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베드로가 첫 교황이었고 신약시대 사도들에 의해 안식일이 바뀌었으므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안식일이 바뀌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카톨릭 교회가 주일을 휴식의 날로 시행하는 시민법을 지지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카톨릭 교황들과 주권자들은 주일의 의식을 마치 구약의 안식일처럼 형식적이고 의식적으로 만듦으로써 시민법에 의해서 그것을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예배의 날로 첫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도행전 20:7은 신약시대에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  신약의 제자들이 그 주의 첫날에 만났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이들은 아마도 주의 만찬을 위해서 이 날에 정기적으로 모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을 보면 주간의 첫 날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며 주일이 종교적인 날로서 로마 카톨릭의 창안품이나 안식교의 주장처럼 '짐승의 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간의 첫 날이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불린 적이 결코 없다는 점과, 따라서 우리 역시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8. 신약의 예배일로서의 주(週)의 첫 날 신약에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났으며 또한 그들에게 설교를 했다는 많은 기록들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군중들을 모을 수 있는 시간에,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 안식일을 그 날로 사용했다는 기사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도행전 20:7에 보면 제자들이 주간의 첫 날에 만났다는 것과, 문맥상 이 모임이 주의 만찬을 위해 규칙적인 시간에 행해졌던 규칙적인 예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주(週)의 첫날'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종교적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의 일을 위하여 그들의 선물을 그 주의 첫 날에 모으도록 명령받았다.  어느 곳에서도 성경은 '주님의 날'을 안식일 즉 제 칠일이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심지어 성경은 첫 날 이외의 다른 날을 예배의 날로 사용하였다는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휴식을 위한 특별한 한 날을 명령받은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週)의 첫날을 예배의 날로 사용했다. 9. 유대의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은 오로지 신체적 휴식을 위한 날일 뿐 예배의 날은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안식일에 대한 구약의 명령들을 읽어보면 안식일이 결코 예배의 날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히브리어에서 'Sabbath'라는 단어는 '중지' 즉'휴식' 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기간 동안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종교적 모임의 관습이 생겨났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회당이나 회당 예배 관한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모세율법의 안식일은 전적으로 휴식의 날이었지 예배를 위한 날이나 혹은 교회 가는 날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간과 짐승을 위해서 칠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는 원리는 좋은 원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로 크리스천들은 일주일의 하루를 휴식의 날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시민법을 여러 번에 걸쳐서 주창했었다.  그럴 때 선택된 날은 주로 일요일이었고, 크리스천들은 그 날을 예배를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어느 특정한 날에 노동을 삼가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적이 없으며, 주간의 어떤 정해진 날에 예배를 위해서 모이라는 명령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크리스천을 위한 은혜의 문제이며 자발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10. 그러면 크리스천들은 주일(일요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크리스천들은 안식일을 지키도록 되어있는 구약의 계명에 의해 속박되지 않으므로 토요일 대신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우리는 주일(일요일)을 형식적 안식일, 즉 의식적 율법의 한 부분으로 지켜서는 안 된다.  다만 예배의 날로 자발적으로 그 날에 모일 수 있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일 것을 명령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만약 여러분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면 당신은 태양에게 바쳐진 날을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태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요일이 로마신화에서 농업의 신인 Satur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모든 날들은 하나님의 날들이며 그 날들이 어떻게 이름지어졌든지 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한 날을 일요일이라 부르든 주(週)의 첫날이라 부르든, 또는 다른 한 날을 토요일이라 부르든 주(週)의 제 칠일이라 부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주(週)의 첫 날이 일요일이라고 불리기 전에 그 날 만났었고 유대인들은 토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전에 휴식의 날로서 토요일을 지켰었다. 크리스천들은 가능한 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주일(일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주일에 회사를 쉬게 하는 고용주들은 직공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대주의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우리의 동료들을 대접하는 크리스천들로서, 은혜를 근거로 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갈 5:13)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날에 관한 그들의 자유를 그릇된 것을 행할 수 있는 허가증으로 오용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크리스천들은 이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날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는 날로 사용해야만 한다. 11. 주(週) 첫날의 영적 의미 성경에서 6은 인간의 숫자이며 7은 신적이며 완전의 숫자이다. 휴식의 안식일 다음에 이어지는 노동의 6일간은 율법 아래서 완전한 삶을 영위하려고 애쓰면서 제 칠일이 상징하는 휴식과 완전함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실패했고 누구도 지금까지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행 15:10: 롬 3:20; 길3:11) 그러나 주(週)의 첫 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신약의 크리스천은 이미 그가 어떠한 수고도 하기 전에 값없는 선물로서 구원을 소유하게 된 것이며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그의 남은 생애를 그가 사랑하는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히브리서 4:9∼10을 읽어 보라! 마가복음 16:2, 9로부터 예수님께서 주(週)의 첫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타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마리아와 다른 몇몇 사람들이 주(週)의 첫날 아직도 어두웠던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것은 주(週)의 첫 날에 해당하는 그 날 밤 어느 시각에 구세주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위대한 은혜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롬 4:25) 우리의 어떠한 수고와 율법의 행위도 없이 우리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으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4: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음이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크리스천은 은혜를 입은 것이다!   히브리서 4:9∼11을 보면 두 종류의 휴식 즉 '안식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히브리서 4:9에 있는 휴식이란 단어는 헬라어에서의 안식(Sabbath)이란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에게 잘 알려진 가르침이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가장 큰 축제일 중 하나인 유월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휴식의 개념을 나타내는데, 하나는 구원 당시에 이루어지는 휴식이며, 다른 하나는 부활 이후에 이루어지는 휴식이다. 유월절 만찬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출애굽기 12:15∼16에서 주어진 대로 7일 동안 계속된다. 이 일주일은 구원받은 이후의 크리스천의 삶의 완벽한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회심은 그 축제 초기의 유월절 양에 의해 묘사된다. 고런도전서 5:6∼8을 보라.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것을 나타낸다.  그 친교 즉 평화는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을 때 하나님께 회심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의 삶의 평화와 기쁨은 그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즉각적으로 시작된다. 무교절 첫 날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휴식의 날이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의 일로부터 쉬게 되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고 주말에 또 하나의 휴식의 날이 있었다. 인생 여정의 끝에 크리스천들은 완전한 휴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나니"(히4:9)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서 유월절 만찬과 무교절을 지켰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켜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유월절 만찬이나 무교절이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그림자들과 예표와 의식율법의 완성인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 안식일(토요일)은 행위에 따라 얻어지는 휴식의 상이다. 율법 아래서 만약 누군가가 그의 모든 삶이 완벽하고 율법의 모든 명령들을 이행했다면 그는 천국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선한 일에 의해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묘사하는 유대 안식일이 은혜의 시대에는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율법의 행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수고 없이 얻은 평화와 휴식을 상징하는 주(週)의 첫날에 예배를 드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대 안식일, 즉 토요일은 의식에 따른 율법이며 은혜의 시대에는 부적합한 것이다.  주(週)의 첫날이 모든 크리스천에게 적합한 것이다. 12. 안식일과 주일(일요일)의 중대한 차이점들 (1) 안식일은 오직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고, 주일은 은혜 아래 있는 신약의 크리스천들을 위한 것이다. (2) 안식일은 죽음의 형벌로 인해 강제로 시행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율법'이었지만,(민 15:32∼36) 주(週)의 첫날인 주일은 명령이나 형벌 없이 크리스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지켜지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 (3) 안식일은 신체적 휴식의 날이었으나,(출 20:10) 주일은 예배의 날이다.(행 20:7; 계 1:10) (4) 안식일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을 예표하나, 주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예표한다. 13. 크리스천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우리의 안식교 형제들은 우리를 모세의 율법의 속박으로 끌어가려고 애써왔다. 안식교인들의 대부분은 구원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달려있다고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믿는다. 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가르치는데서 그치지 않고, 종종 어떤 종류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십일조를 구원받는 방법으로, 또는 구원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가르친다.  사실 그들은 유대의 의식에 관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그 의식율법은 분명히 완성되었고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골로새서2:14∼17과 디모데전서 4:3∼5을 통하여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어떤 명령은 크리스천들에게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됨이니라." (딤전 4:4) 할례에 관해서도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분명하게 명령받았다.  "무할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으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전 7:18)  또한 안식일에 대해서도 그에 따른 명령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른 의식 율법과 함께 말살되었다. 골로새서 2:16∼17에서 주님은 특별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만약 크리스천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 아래 있다면 그는 민수기 15:32∼36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토요일에 나무를 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심지어 출애굽기 35:3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토요일에 집에서 불을 피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의식율법의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놓여 있지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거짓말과 도둑질과 간음과 살인 등의 도덕율법은 신약에 와서도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이러한 율법은 본래 나쁜 것이며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 이전이나 이후, 혹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도덕율법을 지켜야 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율법이나 도덕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오로지 그것을 근거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읽고 여러분이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당신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하기 바란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디도서 3:5은 또한 인간이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거나 그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새로 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그밖에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갈 3:13)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골 2: 16∼17) 14. 안식일이 오직 유대인을 위한 의식율법이었으며 결코 신약의 크리스천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다 확실한 증거들 (1) 성경이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골로새서 2:13∼17을 읽어보자.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위의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었을 때 완성되었고 폐지되었던 유대의 의식율법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은 '무할례' 상태에 있었고 유대인들의 '손으로 슨 규례들'은 그들을 대적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적했던 이 '손으로 쓴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지워버리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분명히 그것은 모세의 의식율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도덕율법도 폐지되었는가?  인간은 이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운가? 여러분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올바르게 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도덕율법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삭제되거나 폐지되지 않았다.  도덕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지워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능력을 상실한 것은 의식율법이었고, 그것이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을 이러한 의식율법에 대하여 누구도 판단 받을 수 없다고 16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레위기 11장은 의식율법에 관해서 말하면서 돼지고기나 혹은 양쪽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와 같이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많은 동물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의식율법에 의하면 만일 부정한 도마뱀, 달팽이, 두더지 또는 다른 동물들이 토기에 떨어졌을 때는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물은 마찬가지로 부정한 것이 되고 그 토기를 깨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레위기 11:3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먹는 모든 음식 중에서 그런 물이 스며든 것은 부정할 것이요, 그런 그릇으로 마시는 모든 음료도 부정할 것이며"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그 의식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따라서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음식의 규례로 인하여 판단 받지 않는다고  골로새서 2:16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들은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판단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제거되어졌다!  크리스천은 이들 의식율법에 의해 자신을 판단하도륵 허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17절에서 이러한 모든 의식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들의 그림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의식율법들이 하나의 그림자나 상징이나 모양이나 본보기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것들의 실체가 왔던 것이며 이전 것들은 그것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의식율법 모두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완성시키셨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의 의식인 안식일에 의해서 판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2) 유대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의식율법의 한 부분이며 결코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명령했던 것이 아니라는 두 번째 증거는 성경이 안식일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맺은 특별한 표적이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31:12∼13에서 이것은 명백한 진술이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거룩하게 하다'라는 단어는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이방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표적 이 안식일이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킬지니 ‥‥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에스겔 20: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표적이라는 것과, 안식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며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된다는 표적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의식율법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것이 아닌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명령이었다. 할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한 표적이었다. 그래서 유대의 음식물에 대한 규정과 제사와 레위족의 제사장직이 있었다. 의식율법은 오로지 유대인들을 위한 율법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식율법은 도덕율법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전 세계에 대한 명령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 역시 전 세계에 대한 것이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 또한 모든 인류에 대한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말과 도적질과 살인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백성이다. 그것은 우리 국가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특별한 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결코 없다. 아무도 도덕율법이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범위에 있어서 세계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의식율법에 대하여는 유대인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나타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한 표적인 할례를 준수한다.  또한 우리는 제사와 절기와 유대의 음식물 금기법을 지키며 이러한 것들은 선택받은 백성인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표적들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받았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표적이다. 그 표적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상징인 의식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민족으로 구별하셨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은 분명히 의식율법의 일부였다. (3)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 엄수는 명백히 의식율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새겨진 도덕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율법은 세계 보편적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마음에 새겨 놓으셨다. 로마서 2:14∼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며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렇게 심판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이루어지리라." 당신은 이방인들이 비록 율법이나 성경이나 복음전파를 전혀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들 안에서 증거하는 양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아프리카의 흑인도 살인, 거짓말, 도둑질 그리고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것이 잘못임을 안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어느 곳에 있는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도덕율법을 새겨 놓으셨고, 그들이 이 율법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심판의 날에 그들을 불리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흑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던 어떤 야만인이 살인이나 도둑질이 나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러한 이방의 야만인이 보편적으로 인류의 마음에 새겨진 어떤 것에 의해 자기 부족의 남자아이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에 관한 문제도 들어보지 못한 그 사람의 양심이 쇠고기나 양고기를 먹는 것은 옳은 것이며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의식율법은 오로지 유대인에 대한 것이지 도덕율법의 경우처럼 사람들 마음에 보편적으로 새겨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안식일이 의식율법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양심은 7일 가운데 한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만 하고 이 휴식의 날은 토요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누군가 이방인에게 안식일에 관하여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지었다거나 하는 인식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양심은 분명히 그에게 그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은 인류의 마음에 새겨진 도덕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의도된 의식율법이다. (4) 유대 안식일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적합했지만 특히 추운 겨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출애굽기 35:3에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명한 명령이 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그들의 집에 불을 전혀 피울 수 없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는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곤란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미국의 북부지역이나 캐나다 그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다른 지역에서 그것은 엄청난 시련이 될 것이다.  안식교인들 뿐 아니라 유대의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매주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민수기 15:32∼36은 안식일에 나무를 했던 한 남자가 의식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떻게 돌에 맞아 죽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구약과 똑같은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받았다면 토요일날 삽으로 화덕에 석탄을 퍼 넣는 안식교인들은 틀림없이 유죄이다.  사실상 토요일에 어떤 종류의 불이든 켜는 사람은 이 의식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과 모닥불에 점화하는 것에는 어떤 도덕적 차이점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흑은 손잡이를 돌려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점화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불을 점화하는 것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은 안식일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분명히 그것은 의식율법이며 구세주께서 죽으시기 전에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유대인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팔레스타인이 아닌 어떤 나라에도 결코 명령하지 않으셨다. (5)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의식율법이며 크리스천들에 대한 명령이 아니었다는 다섯 번째 증거는 안식일이 자전하는 세계에 동시적으로 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날짜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결정된다. 지구 표면 위의 어떤 지점이 자전하여 똑같은 태양 빛을 받는 매 순간은 또 다른 날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를 자정에 시작하든 일몰 때에 시작하든 그 하루는 지구의 원주 위에 있는 모든 점에서 각각 다른 시각에 시작된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는 자정일 때 시카고에서는 오후 11시, 덴버에서는 오후 10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오후 9시가 된다.  그리고 지구의 반대편은 12시간이 늦거나 빠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면, 일주하는 날들 동안의 그 사람의 하루는 보통의 하루보다 길어지지만, 일주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한 하루를 잃어버린다. 즉 그는 집에 머물러 있던 사람보다 하루를 적게 갖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동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면, 일주하는 날들 동안의 그 사람이 경험하는 하루의 길이는 보통의 하루보다 더 짧아지지만, 일주가 끝났을 때 그는 한 번 더 태양을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머물렀던 사람보다는 하루를, 서쪽으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보다는 이틀을 더 갖게 된다. 집에 머물렀던 사람은 일정한 횟수만큼 태양을 지나쳤고, 서쪽을 향해 태양과 함께 일주했던 사람은 태양을 지나쳐 가는 한 번의 기회를 놓쳤으며, 태양을 향하여 동쪽으로 갔던 사람은 태양을 한 번 더 지나쳤다.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안식일로서 제 칠일을 지키려고 애쓴다면 집에 머물렀던 사람이 토요일을 지키게 될 때 서쪽으로 간 사람은 일요일을, 동쪽으로 간 사람은 금요일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항상 제 칠일을 엄수하기 위해 동일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의상, 국제 날짜변경선은 태평양 지도상에 고정되어 있다. 어떤 배가 서쪽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금요일 저녁 자정 무렵에 그들이 국제 날짜변경선에 접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때는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아니 여러분이 만일 원한다면 유대인들이 그들의 안식일을 일몰 때에 시작했던 것처럼 금요일 일몰 시로 그 시기를 정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배가 국제 날짜변경선에 다가와서 그 선을 건넜을 때 시간은 갑자기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변해버린다.  토요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그 동일한 배가 다음 주에 금요일이 막 끝나갈 무렵에 국제 날짜변경선 쪽으로 유대의 안식일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반대방향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동쪽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다가 날짜변경선을 건너는 순간 시간은 갑자기 금요일에서 목요일로 변하게 된다. 토요일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금요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날짜 변경선을 동쪽 방향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동일한 날을 두 번 가지며, 서쪽 방향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완전히 하루를 잃어버리게 된다.
2009-05-08 13:48:31 | 관리자
"기독교의 중심은 성경이고,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공의를 이루기 위해 아들을 죄로 삼아 내버리는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전1:18). 다음은 간단하게 십자가의 목적을 정리한 것이다. 이것이 뼈에 사무치도록 음미하고 마음 속에 그 의미를 넣으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을 맞춘 유일한 십자가 사건이 좀 더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 1. 십자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한다. 무한한 분의 무한한 가치의 피와 생명에 의해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가 무한하게 만족되었다(골2:14-15 ; 엡2:13)2.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을 선포한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희생을 나타낸다(요3:16; 엡5:2). 우리 주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20:28).3.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선포한다(롬5:1; 고후5:19).4. 십자가는 구약과 신약을 통합시킨다. 유대인과 이방이 하나가 되게 되었다(엡2:14-15). 교회라는 유기체가 생기게 되었다. 5. 십자가는 마귀의 일을 멸한다(요일3:8).6. 십자가는 마귀의 무기인 사망을 폐하고 부활을 가져온다(히2:14-18).7. 십자가는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들에게 구원과 권능을 준다(고전1:18).8.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1:30). a.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단 한 번에 영원히 제거하는 수단(히9:15; 10:10)b.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수단c. 영적인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지혜를 드러내는 수단(골2:15-16)d. 창세 전에 세운 계획을 시간 속에서 이루는 수단(행2:23; 계13:8)
2009-05-08 13:47:2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