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4405개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정한 가장 성경적이고 효과적인 복음 전파/구령(전도) 방법은 가정 방문과 거리 설교이다.하지만 통탄스럽게도 오늘날 이 방법을 제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은 거의 전부 이단들, 아니면 교회 간판만 달고 있으면서 전혀 건전하지 못한(은사주의 등) 교회들이다.   한쪽 집단에서는 기독교라는 타이틀과 역사적 정체성을 도둑질해 간 반면, 전도는 저렇게 극성스럽게 안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로부터 그런 쪽의 반감을 사지는 않는다. 아무리 봐도 진짜 머리 좋게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곳이다. (저기가 어딘지는 이곳의 교리 노선에 공감하는 분이라면 아주 쉽게 눈치챌 것이다)   그런데 또 반대편 집단에서는 이거 뭐 정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건전한 교회들이 차마 전파를 엄두를 못 내게 만들 정도로, 구령을 가장한 찌질한 짓은 전부 도맡아 해 놨으니, 지능안티도 정말 분야별로 골고루 다 한다. 이런 시국에서 진짜배기 예수쟁이들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띠 두르고 있는 것까지는 좋다. 그건 맞는 말이니까.그런데 인간적으로 빨간 조끼, 붉은 십자가 차림은 안 했으면 좋겠다. ㅜㅜ그런 차림은 한 1900년대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최권능 목사 같은 사람이 했으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약발이 너무 떨어졌다. =_=;;   주변으로부터 복음에 대해 온갖 삐딱한 편견으로 세뇌돼 있는 다른 불신자들의 눈높이도 좀 생각해라.차라리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이 낫다.   지하철 안에서 가끔 나이 지긋하신 중년 신사가 성경책 들고 선교 행위(?) 하는 걸 보면 참 애증이 교차한다.본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에 관한 한,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는 못할망정, 남을 뒷다리 잡고 김 빠뜨리고 분위기 깨는 짓은 절대로 안 한다. "나도 교회 다녀요, 안 주셔도 돼요"하고 전도자를 매몰차게 피하는 게 아니라, "아멘 할렐루야, 수고하십니다" 이런 격려 정도는 주변에서 누가 보든 말든 해 줄 준비가 돼 있다. 누군가가 똑바로 복음만 제대로 전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복음 전한다는 사람이 좀비가 연상될 정도로 흐리멍덩한 눈빛. 개그만화 표현을 빌리자면 눈이 죽어 있다. (메가신데루. -_-)염불하는 듯한 어눌한 말투.. 이건 뭐 구원은커녕 기겁을 하고 달아날 그런 인상이다. 담대한 것과 무례한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복음 전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것만 자꾸 보다 보면, 전도란 광신자 미친놈, 맛이 간 이단들밖에 안 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그렇게 뭔가를 선포하고 전도지 나눠 주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 없이는 못 할 일인데, 그렇게까지 하고서 겨우 한다는 말이 죄와 심판에 대한 선포는 없고 예수님의 무슨 면모를 믿으라는 말도 없고... 나눠주는 전도지를 보면 그냥 자기네 교회 자랑에다, 목사인지 무당인지 분간이 안 되는 영험하고 신령한(?) 목사 프로필들. 여자 목사 사진까지 보면 정말 민망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니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창궐하는 이단들과 극심한 반기독교 정서가 지난날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팽창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놓았다. 하나님은 아무리 자신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신다고 해도 그 과정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내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섬뜩할 정도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공의로우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교회라고 해서 죄를 묵인하고 자신의 법을 범해 가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성급히 이루게 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반대로 자기 편인 애들에게까지 공정하고 엄격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한 진짜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얼마나 추상 같은 심판주가 되실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떨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서 자동으로 때에 적절한 말을 준비할 능력이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 믿음의 선배들을 경험적으로 구축해 놓은 많은 매뉴얼(로마서의 대로 같은)과 노하우가 존재하겠으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 즉 인간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언제나 뒤바꿔 놓는 그분의 능력을 기도로 구하고 불신자들의 마음밭을 갈아 놓는 초기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욕을 먹고 핍박은 받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전달은 제대로 하고서 그 전달에 대한 반응으로 반발을 받아야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며, 겔 3:19가 말하는 면책 사유가 성립하여 수고에 대한 보상이 있지 않겠는가.[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7 20:18:41 | 김용묵
롬10:6,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그리스도를 위에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 가겠느냐= 그리스도를 다시 죽은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너무 어려워요.쉽게 이야기를 풀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5:1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6 15:52:37 | 이정순
킹제임스 성경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 그래요 !"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본인도 정보를 알아본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봅니다.정성권 형제님도 언급하셨듯이 이내 "이거 이상한 성경인 것같은데 ?"하고 바로 전화가 옵니다. (저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로 옮기면서 겪었던 저를 보는 부담스런 시선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 아는 범위내에서 설명하고 선입견을 버리고 킹제임스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하며 자료도 드립니다.하지만 기대보다는 모자라서 솔직히 낙담할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갖게되는 세상적 시각/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저 또한, 킹제임스를 너무 세상지식같이 전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됩니다.    그런데 왜 옳은 말씀을 읽으라고 전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를까요 ?믿음의 방향과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맹신하시는 분과 방향은 잘못됐지만 그쪽으로의 옅은 믿음을 가지신 분은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후자는 대화라도 좀 되지요....물리적 현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정지상태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에 맞는 일정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빠른 속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급속히 성장하시는 분도 있고 느린 속도를 가지신 분도 있으며 반면에 거의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은 점점 더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시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시는 분들은 상당한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정지상태를 거쳐 "돌이키게" 됩니다.이런 분들에게 킹제임스 소개를 처음할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돌이키도록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올까요 ?  말씀과 주님의 도우심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려주는 메신저에 불과한 아무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ord는 말씀이고 World는 word에 l이 추가된 것이라 하며 여기서 l은 lie 거짓말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말씀과 세상은 절대로 같이 공존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할때에 오해를 당하거나 세상이 우리의 열심/노력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의 능력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희망적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5 13:12:37 | 김학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유관순, 전태일 같은 열사형? 전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 유대인에게 독립을 달라!” 열사라고 부르기에는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며,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제자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신 것입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는지 저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상 숭배하던 동족을 책망하다 죽어간 그런 대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로 제 딴에는 ‘신성모독’이라는 구실로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따라 훗날 이루 셀 수 없는 크리스천들의 순교 행렬이 이어졌지만,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이 좀 있다 체포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대못이 박힐 게 무서워서,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괴로워한 거라고 믿는다면, 심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형은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고통스럽고 잔학한 사형 방법으로 손꼽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은 순교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한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서로 사랑하며 기쁨만을 주고받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가 오로지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잠시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차원을 넘어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분이 죄 덩어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되고 진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라고만 부르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쉽사리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2, 44)   그래도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탈진과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가 목숨을 내어 줬습니다. (요 10:15)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보다 유난히 빨리 숨을 거두었지만, 장사된 후 부활하셨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고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낱 고문과 사형 집행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저렇게 기도한 거라고 아는 건 정말...   그나저나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형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적인 원칙대로라면 인간의 죄를 사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일단 독극물 주사나 교수대, 화형 등은 아닙니다. 유혈 공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능지처참 정도로 오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이 그런 사유로 죽으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몇 차례 돌로 맞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참수는? 참수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믿음을 지킨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가깝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환란 성도들의 죽음 등. 이것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죽음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 자신보다는 그 이후의 순교자적 죽음이란 의미로 남겨 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반면 십자가형은 채찍질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유혈 공법임과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수치와 저주의 의미(신 21:23, 갈 3:13)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높게 쳐든 불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의미를 넣어 둔 것도 정말 절묘한 일치입니다. (요 3:14)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죄수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수를 극도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방법이란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신 것 역시 십자가형 자체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라는 논리가 틈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집행 방법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명절은 사형 집행은커녕 오히려 죄수를 한 명 풀어 주는 날이었고 오히려 악한 무리들부터가 명절에는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조 덕분에 기적적으로 명절 바로 직전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완전히 졸속으로 전시용으로 사형이 집행된 바람에, 옆의 두 들러리 강도는 십자가에 잠깐 폼으로 매달려 있다가 나중에 다리까지 꺾인 채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사형에 처하기에는 좀 뭔가 허했나 보죠?) 십자가형 집행으로 사형수가 죽기까지는 원래 며칠 정도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는 바로 전날 집행을 강행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의 음모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성경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 명령에 즉시 살아난 것처럼, 온 몸이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도 문자 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서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와는 달리 썩지도 않았겠죠. 시체에서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게다가 옷까지 짠하고 다시 생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밀어낼 수 없다던 돌문은 그냥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문 개방은 예수님의 무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는 전시용으로 하신 거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의 상처와 다른 채찍을 맞은 상처들은 다 사라졌지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 20:27) 이 역시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이 당한 상처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찬송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크리스천이 두고두고 묵상하고 감동 받고 영적으로 도전 받아야 할 주제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2 15:45:10 | 김용묵
궁금합니다. 늘 보고듣는 용어중에 Q.T(Quiet Time)가 말씀에 대한 명상/묵상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원래 영어적 어원을 제대로 갖고 있는건지 아니면 교회전통으로 쓰다보니 사용되온것인지요 혹시 한국사람들만이 쓰는 토속영어(콩글리쉬)는 아닌지요 검색해보면 1800년대에 누가 최초로 사용했느니등등의 정보가 보이지만 만족한 용어설명은 아닌듯합니다. 진정 올바른 역사를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많은사람들이 쓰고있고 써왔다는 이유만으로 사용되서는 안될텐데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0: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10 08:26:54 | 김규태
http://blog.naver.com/attltb/150045579497   최근의 진화론 연구결과에 의해 창조론의 주장을 아주 철저히 무시하고 논박하고 있는 페이지인데요. 시간이 되시면 적절한 반론이 될만한 글을 올려주시면 제게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믿음은 과학적 사고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무조건 도외시할 수도 없더군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6 06:41:16 | 박종철
1.   성경을 전서도 아닌 일부만을 구해다 좀 읽으려고 해도, 필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고 인건비도 지금 우리 시세로 수십만원을 줘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곳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가 목숨을 걸고 한데 모여 한 권뿐인 성경책을 읽으며 영적 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풍요 그 자체이다. 널린 게 성경책이고, 인터넷으로 위치만 입력하면 몇 초만에 원하는 성구를 바로 볼 수 있고, 단어 검색도 되고, 그것도 모자라 열몇 종류의 역본들을 줄줄이 꿰어서 한 눈에 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이 그렇게 바뀌었을진대, 지금은 성경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영적 싸움의 양상도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마귀는 과거에는 성경을 보는 대로 몰수하고 불태우는 식으로 공격했으나, 성경을 무식하게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은, 숫제 가짜 짝퉁 성경들을 마구 만들어 내서 진짜 성경을 매장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는 역정보 유포라는 대단한 첩보 전략이다.   본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나온 역본들이 내용과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의 창시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런 여러 성경을 모두 인정하실 리는 전무하다. 이는 기독교의 보안과 근간, 정체성이 걸린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이 읽는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가짜 성경을 단호하게 버리고 진짜 성경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이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구절이 없다. (마 18:11, 마 23:14, 행 8:37 등)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이 루시퍼(사 14:12)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이름인 갈보리(눅 23:33)를 찾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티로스, 유니콘, 용 등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구약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 하늘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유독 지옥만은 음부, 무덤, 스올, 하데스 따위로 정체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진짜 성경만이 판권이 없으며, 판권을 따내기 위해 다른 역본들과는 다른 어렵고 장황한 단어와 표현을 일부러 찾아 애쓴 흔적이 없다. 이렇듯, 진짜 성경의 특성만 열거해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 중 좀 색다르고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주제를 두고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판단하고자 한다. 이제 여러분은 ‘킹 제임스 성경보다 읽기도 편하고 뜻도 정확하다는’ 소위 현대 역본(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기를 쓰고서 조장하는 표현,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혐오· 기피· 거부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와 현 시국의 심각성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지성과 양심을 자극하는 명확한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증거의 열매는 당신의 결단과 행동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2.   성경은 인간의 끔찍하고 추악한 죄, 그리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모에 대해 다룰 때, 이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상상과 자극도 일으키지 않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나 모른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창 4:1), “교접의 씨” (레 15:16), “여인들의 관례.” (창 18:11) 음란한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 교육 시간에 다 배울 법한 단어조차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성인물처럼 취급되지 않게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다’(시 12:6, 시 119:140)고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대해서까지 성경의 접근성을 고려하신 것이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눅 18:16 중간)   그렇다. 하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모름지기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고(딤후 3:15)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쉽고 간결한 성경이며, 어린이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성경이다. 폭력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작 예수님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대인 어린이가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세 구절만 해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은 그렇게 기록돼 있지 않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에게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라고 영감을 주셨지, “이브와 동침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여인의 관례에 따른 것을 멈추매”라고 말하셨지 “폐경기가 지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짐승과 함께 눕는 자”라고 했지 “짐승과 성관계를 갖는 자”라고 안 했다.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와 즐겁게 논다”(창 26:8 sport)고만 했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 안 했다.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렘 2:24)라고 말씀하셨지 “발정 나서 헐떡대는 암나귀”라고 하신 적은 없다! 이래도 성경이 뜻만 통하면 괜찮은 책인가? 성경 번역에서 동적 일치 기법이 얼마나 사탄적인 생각인지 부디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바이블은, 통계에 따르면 ‘주 lord’라는 단어가 71번밖에 안 나오고(킹 제임스는 8000여 번), 마치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한 번도 주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저질이다. 그런데 sex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온다.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행음에다 비유한 예레미야, 호세아서를 이 역본으로 보면 가히 섹스 성경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 읽기 쉽고 잘 와 닿는다고 격찬을 받고 있는 <메시지> 바이블의 정체이다. (☞ 관련 링크)   NIV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알다(know)’, 개역성경도 ‘상관하다’라고 옮긴 단어를 ‘have sex with’ (창 19:5, 삿 19:22)라고 친절하게 진짜 의미를 써 놨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조명을 받으며 경건하게 묵상해야 할 성경에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나님이 정녕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셨단 말인가? 그 중 단연 압권인 예를 보이겠으니 놀라지 마시라. NIV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신약 시대가 됐는데도 아직도 할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너희를 혼동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런 문제아들은 아예 자기 X을 짤라 버렸으면(emasculate) 좋겠다.” (갈 5:12)   정말이다. 직접 책이나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시길.     기가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결국 저런 뜻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신약 역사상 성령으로 가장 충만했을 거라고 회자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성경에 음담패설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저게 도무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부패한 대화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엡 4:27, 29)고 권면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껄일 소리인가?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이 제발 교회에서 끊어지고(be cut off)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걸, 불온사상을 지닌 성경 번역자들이 cut을 능동으로 변개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성경 번역자가 아니라 성경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3.   성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 역본들의 추태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그야말로 맛만 좀 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를 든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독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만큼 성 범죄, 성 문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엄금하고 정죄하는 책은 없다. 결혼한 남녀의 1:1 부부 관계 외의 모든 성적 접촉은 음행이고, 성 정체성이 문란해 지는 것도 중죄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은, 그런 죄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정죄하고 있는 성 범죄에 대한 언급은 표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이다. 아무리 인간이 의학, 심리학으로 동성애를 합리화하려고 한들 소용없다. 하나님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롬 1:24-27) 못을 박아 버렸다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지는 동성애자 본인이 잘 알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성애자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중립적으로 불러 주기에도 너무나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꼭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자’라고 길고도 적나라하게 일컬으셨다. 영어로는 죄악의 온상 소돔의 이름을 딴 sodomit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왕들은 부임할 때마다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했지만 이런 자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그런데 구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sodomite가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미동(꽃미남 같은 남자), 내시, 남창 등으로 바꿔서 그냥 선천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남자 구실 못 하는 남자, 또 성매매를 하긴 해도 그렇게 변태 같은 느낌은 안 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까와 같은 과감하던 문체는 어디로 사라졌나?   가나안 이방 종교에는 남창· 내시가 있었다고 아무리 신학자, 고고학자들이 변명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동성연애자, 아니 남색하는 자가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1장과 더불어 성 문란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구절은 단연 고전 6:9이다. 그런데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이 구절이 킹 제임스 성경만치 확실하고 단호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 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명백해서 동성애자 이외의 핑계가 틈탈 여지가 도저히 없으니, 변개된 성경들도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abuser 같은 단어도 빼고 마지못해, 아주 중립적이고 그다지 도덕적인 느낌이 없는 단어인 homosexual을 삽입한 것에 그쳤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아주 직설적이고 민망하기까지 한 토박이말로 성과 관련된 죄를 폭로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고 좀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한자어로 바꿨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지옥에 간 부자를 다루는 눅 16:23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니까 어쩔 수 없이 hell을 인정했지만,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능히 이기지 못할 거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응당 음부, 하데스라는 뿌연 말로 바꿔 버린 고약한 센스이다. 지옥의 입구에는 문이 있고, 주님께서는 그 열쇠(계 1:18)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음부 권세”(마 16:18. 개역)는 도대체 뭘 뜻하는가?   그나마 NIV는 그 동성연애자에다가도 “homosexual offenders”이라고 단어를 또 바꾸어, 모든 동성애가 다 나쁘지는 않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얼마나 치떨리고 교묘한 변개인가!   고전 6:9에 역시 존재하는 effeminate, 즉, 하리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버린 남자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남아나지를 못해 있다. 전부 구약의 sodomite와 마찬가지로 남창으로 단어를 변개했다.   끝으로, fornication(음행)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도 요즘 성경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다. fornication은 주님께서 인정하신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이다. (마 5:32, 19:9) 이 단어도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창녀짓으로 바뀌었다. (대하 21:11, 사 23:17, 겔 16:29) 창녀짓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따로 언급되어 있다. (겔 16:15) 즉,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음행이란 단어를 안 쓰려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성적 부도덕함(sexual immorality)으로 바뀌었고, 어떤 데서는 그냥 sexual이라는 단어까지 빼서 의미를 훨씬 약화시켰다. 음행을 책망하는 고린도전서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리고 롬 1:29와 갈 5:19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 가운데 간음(adultery)만 남기고 음행은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음행에 대한 정죄가 희석되고 약화된 성경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선조들이 손에 쥐었던 그 성경이 결코 아니다!   4.   독자들이여, 이 모든 예가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추하고 역겹고 죄스러운 성 범죄의 실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어떠할까? 문자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치 동성애나 음행을 혐오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 읽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말을 굉장히 돌려서 번역하거나, 아예 변개· 삭제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의 음모이다! 어떻게 성경을 만드는 일에 마귀가 개입하겠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응당 돈이 되는 책장사이다. 지금이 성경을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성경으로 이익 챙기고, 덩달아 성경을 부패시키고 그 속에 독약을 타려는 음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AND와 OR의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선은 오로지 AND이다. 지극히 작은 말씀 하나만 부패시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하고 순수함은 깨져 버린다. 마귀는 성경의 무오성과 일관성을 깨뜨리고 성경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을 심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지, 성경에 “너는 사탄을 숭배할지니라”란 멍청한 구절을 넣으려고 투쟁 중인 게 결코 아니다.   근래에 영어권에서는 성별·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만을 공식 석상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죄까지 덮어 주는 제도로 오래 전부터 변질되었다. 오늘날이 얼마나 죄로 넘쳐나는 음란한 세상인가? sodomite가 gay가 되고, drunkard가 alcoholic이 되고, fornication이 free love나 pre-mature sex로 미화되는 것 말이다. 성경은 악을 악이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고(사 5:20), 이런 거짓된 입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한다(잠 17:4). 그런데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경 자체가 죄를 미화하는 단어로 물갈이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저질 성경을 읽고서 참 성경의 저자인 성령님의 조명을 어떻게 받겠으며,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 어떻게 양성되겠는가? “읽기 쉬운 우리 시대 길거리 말투”라는 광고 문구는 그 자체가 저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란 성구로 유혹을 이겨라.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한낱 인간의 고대 영어가 아니라, 지극히 절제되고 연단된 하나님의 언어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언어라서 처음에 좀 생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고어일 수는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자기 권리 따지고 외치는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 기간 대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탄생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카톨릭을 대적하던 올곧은 왕, 그것도 리처드, 찰스 같은 이름도 아니요 성경의 인물과 이름이 일치하는 제임스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질서 있게 번역되었다. 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저작권, 돈 같은 문제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번역자들은 TV, 인터넷처럼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매체가 없던 보수적이고 건전한 시절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원어 성경을 술술 외우고 성경의 원어는 물론 인접 국가들의 고대 언어들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재였다. 덕과 지식을 고루 갖추었으며,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진심으로 믿고 두려워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소설 쓰듯이 제멋대로 번역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어와 문자적 일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였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원어와 대응이 안 되는 단어를 추가할 때는 두려워서 이탤릭체 처리를 하는 정직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사상이 건전하고 올발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쓰셔서 신구약 성경을 걸출한 영어 합본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미디어(책, 신문기사, 영화, TV, 게임, 인터넷 등)를 영적으로 시험하고(prove), 저자나 번역자가 무슨 믿음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을 만들었는지 따져 보자. 성경도 예외가 아니며, 성경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자. 개역성경, NIV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과, 올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로 사상이 다르고, 믿는 영이 다르다.   지구와 온 우주가 불로 소멸된 뒤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셋째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 적혀 있을 말씀은 도대체 어느 역본 말씀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듯이,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음란한 성경으로부터 보호하자![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3 10:30:55 | 김용묵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31767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져도 어떤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이것에 대한 보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것은 먼지조차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공기의 습도와 온도 역시 철저하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것은 높이와 너비가 39.17밀리미터가 되는, 끝이 둥근 원형 유리관 속에 또 다른 작은 원형 유리관 여러 개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세상과 공기도 섞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지난 120년 동안 이것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3번뿐. 이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은 그 누구도 이것에 접근할 수 없다. * * * * *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와 같다.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은 바로 이 원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질량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하게 1킬로그램이란 게 얼마나 되는 거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인 것이다. * * * * * 겨우 1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가, 거의 반도체 공장 이상의 우주 철통 보안을 받으며 애지중지 보관되는 과학계의 최고 보물인 이유는, 이게 정확하게 1kg, 아니 1kg을 정의하는 "최종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은 비행기, 인터넷, 우주선을 만들어 낸 인류의 21세기 과학 지식으로도 아직 원시적인 인공 구조물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단위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18세기쯤에는 길이의 단위도 미터 원기가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절대불변인 기준으로, 가령 "빛이 진공에서 1/xxxxx 초 동안 진행한 거리"와 같은 식으로 수 차례 정의가 바뀌었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초의 정의도 "무슨 원자가 절대 온도 0도에서 xxxxx 번 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절대불변이면서, 현대 과학 기술로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1/86400 이런 식으로 더 부정확했었습니다. 그러나 킬로그램의 정의만은 19세기에 제정된 정의를 아직까지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질량은 시간, 길이와 더불어 시공간과 물질을 기술하는 한 축으로써, 과학에서 기본 중의 기본 개념입니다. 중력이라는 개념이 가미된 무게야 디지털 저울로도 측정하지만,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한 절대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원시적인 양팔 저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kg 추 얹고, 1kg 추 얹고.. 마치 돈 내듯이. * * * * * 그래서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일종의 수치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1킬로그램이 얼마인지는 전적으로 이 구닥다리 물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이 바로 질량이라는 건 과학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예다. 독일의 한 표준 과학자는 “킬로그램은 측정과학계에서 하얀 재킷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다”고 말했다. * * * * * 세계 각국에는 이 킬로그램 원기를 정교하게 복제한 사본이 국가별로 표준 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어 복사본들의 질량을 서로 측정하여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나 대조합니다. 이게 어긋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밀리그램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금이나 귀금속 거래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원기와 복사본, 또는 복사본과 복사본 사이의 오차가 점차 커지고 있고(물론 그래 봤자 마이크로그램 단위이긴 하지만) 그 원인 및 해결 방안을 과학계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짬밥을 너무 오래 먹은 구닥다리 킬로그램 원기를 궁극적으로 퇴출시킬 목적으로, kg의 새로운 정의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이 애쓰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정의를 만들어 낸 국가 내지 학교, 연구소는 돈과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는 스타가 되겠죠. 그 방법은 절대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어디서나 재연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히브리/그리스어가 쓰였고 큐빗, 므나, 바스, 드라크마 같은 길이, 화폐, 부피, 무게 등의 단위가 쓰였습니다. 그 반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고 미터법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달러나 유로 같은 화폐가 꽤 널리 통용되는 편입니다. 세계의 공용 언어라든가 단위는, 국제 정세 및 영적 동향과도 무척 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단위의 최종 권위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는 bible believer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됩니다. 세계 각국에 샘플로 전달되어 있는 킬로그램 원기의 복사본은 성경의 필사본하고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지요! 그 약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딱히 대안이 없어서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우리나라 교계에다 비유하자면 개역성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변개, 삭제에 대해서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신자는, 마치 과학자라고 하면서 킬로그램 원기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과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_-) 과학자들은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에 견주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측량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절대무오한 말씀"에 맞춰 나의 마음과 행실을 교정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성경 자필 원본이나 KJV 1611년판 원본을 교황청 도서관 지하의 반도체 제조실 같은 벙커에다 kg 원기처럼 고이 짱박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눈으로 본 당사자의 체험보다도 더 확실하고(벧후 1:19) kg 원기보다 더 정확하고 무오한 최종 권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KJV 1611), 그 말씀의 순수성과 절대불변 보존에 대한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기독교가 존재 가능하지 않겠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6:1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31 23:33:02 | 김용묵
어제는 어느 미국 목사가 적은 다음의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태평양의 나병 요양소를 방문했다.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격리를 자청한 사람들 - 몸이 흉하게 일그러진 사람들 - 과 인사하며 나는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그 고통이란 차마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기에 간 것은 잠시나마 그들의 병을 잊게 해 주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그들의 몸은 갈 수록 더 인간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집중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일단 내면의 인간을 만나고 나니 그 뭉그러져 쇠해가는 몸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때 눈길을 돌리지 않기를 잘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남태평양 작은 섬 북단에 파묻혀 격리되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나병 요양소는 내게 교회의 한 은유가 되었다. 타락의 일그러진 피해자들 - 아직도 죄의 오물에 물들어 있는 - 이 회중석을 채우고 지도자가 되고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강단에 서서 설교까지 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나는 사역을 계속한다.   나의 추한 모습으로 인해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의인은 그분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합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병같은 죄를 가진 한 인간이 가정을 이끌고 교회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새삼 새겨봅니다. 죄로 인해 고민할 때,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느낄 때 손을 놓기 전에 한 번 읽어 보려고 여기에 올립니다. 샬롬.
2010-01-26 22:00:23 | 관리자
룻기 3:16절에 시어머니가 룻에게  내 딸아, 너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이해가 잘 안돼서요. 설명 좀 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2: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8:34:10 | 이정순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나는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세상을 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죽는 그 과정과 고통은 인간적으로 두려울지 모르나, 죽음 그 자체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겼습니다.죄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비관/좌절/피해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 정치인, 재벌, 강대국 헐뜯기 등 -_-;;) 이 세상이 무슨 운석 충돌이나 지구 온난화 따위로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일제도 북한도 무너뜨리지 못한 이 나라 역시 결국 죄와 욕심과 불의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문제의 본질인 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겨우 죄가 초래한 최말단의 그 나쁜 ‘결과’만 어떻게든 척결하려 애쓰고 우왕좌왕하는 인본주의적인 사회/정치 단체, 각종 모임 등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특히, 죄를 근절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필요악’이 나쁘다고 없애자고 드는 정말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결코 동조하지 않게 됐습니다. (체벌, 사형 제도, 군 복무, 공권력 등) 귀신, 초능력, 불가사의, 이상한 공상 과학 내지 음모론 쪽 얘기를 들어도 현혹될 일이 없어졌으며, 온갖 미신적인 관행들에 관심이 싹 사라졌습니다.남이 안 알아 주고, 남처럼 안 했다간 나만 바보 되고 손해 보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이걸 알면, 예수만 안 믿고 착하게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됨) 우리를 창조한 절대자의 성품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그냥 기독교 경전이니까 상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구가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예수님이 겨우 입에 발린 탁상공론으로 종교놀이나 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절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쓸 거리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 가치관이 딱 잡힘으로써 제가 얻은 영적, 물질적 복과 정신 건강상의 이득,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쓸데없는 이상한 이념이나 사상, 집단, 이단 종파, 혹은 연예/오락 쪽에 심취하지 않고 사고 안 쳐서 절약된 돈과 시간은 제겐 정말 추정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매주 꼬박꼬박 교회 가는 데 드는 돈과 시간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정말 바보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3: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1:57:06 | 김용묵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느 목사가 지은 예수님의 일대기 책만을 들고 왔다. 그분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주는 글이 있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2010년 1월 24일 미국의 고향 볼티모어에서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 가지 영원한 교훈   악과 싸우는 무기 중에 진리의 검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누구든지 용감한 사람은 언제라도 이 검을 쥘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만도 하다. 이처럼 강력한 도구를 휘두르는 특권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 거짓 고소, 관계의 단절, 외로움, 좌절 등 큰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옳은 편에 서면 무서운 자기 회의와 심지어 자괴감이 자주 도진다. 진실의 손잡이를 잡기로 선택하면 영광스런 승리를 맛볼 때도 있지만 악의 역공이 놀랍도록 흉포하게 찾아와 오랜 파괴를 남길 때가 많다.   진리의 검을 들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모본에서 찾을 수 있는 네 가지 교훈을 나누고 싶다.   첫째, 자신의 사명을 알면 계속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아셨고 인기나 성공이나 박해나 위협이나 심지어 측근들의 불화 때문에 곁길로 빠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돌보시면서도 올곧게 그 사명에 집중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밝히려 노력하셨고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되풀이하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실패 때문에 궤도를 벗어나시는 일은 절대 없었다.   둘째, 악을 상대하려면 싸워야 한다. 싸움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진실 편에 서서 악에 맞서려면 싸움이 불가피하다. 때로는 꼭 해야 할 말인데, 말하기도 어렵고 상대방 쪽에서 듣기도 어렵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심한 질책이 필요한 싸움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평생에 한 번일 것이다. 악이 클수록 싸움도 강해야 한다. 대체로 이렇게 권하고 싶다. 친절한 접근이 무책임해지지 않는 한 친절로 대하되 솔직한 발언을 희생한 친절은 절대로 안 된다. 진실을 솔직히 말할 각오를 하라.   셋째, 고결한 싸움에서 담대함은 가치 있는 모험이다. 진리 편에 서려면 담대해야 한다. 반감을 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방식에 대해 비난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라. 상대방은 내용에 흠잡을 게 없으면 방식이라도 문제 삼는다. 나아가 담대하려면 강한 발언에 뒤따르는 강한 행동이 요구될 수 있다. 당신은 직장을 그만 두거나, 관계를 끝내거나, 강적과 대결하거나 두려움을 수습하거나 위협에 대항하거나 심지어 어떤 패배에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 물러서지 말라. 당신이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소심함은 나중에 후회가 되어도 담대함은 절대로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진실(진리)을 말한다고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현 세상 제체는 선행을 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상을 준다. 제임스 로웰의 말로, “진실은 영원히 단두대에 있고 악은 영원히 왕좌에 있다.” 불행히도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은 가장 잔인무도한 학대를 당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니 현실에 눈을 뜨라. 용기를 내라. 당신이 진실 편에 섰음에도 아마 그 정당성은 조만간 혹은 당신의 평생 동안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로웰의 말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그 단두대가 미래를 지배하며 흐릿한 미지의 세계 저편에 하나님이 그늘 속에 서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신다.”   희생이 따를지라도 진리의 검을 두 손으로 꼭 붙들면 큰 상이 따른다. 진실(진리)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유를 가져다준다. 진실(진리)은 만족감을 낳고 확신을 심어 주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친밀함을 길러 주며 정직을 장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으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진실(진리)은 우리를 하나님 편에 서게 한다. 진실(진리)을 위한 모든 희생에 하나님이 후히 상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이생에서는 혹 아닐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틀림없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3: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0:40:25 | 관리자
하나님께서 만든 자연은 그분의 신비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 집의 개(보스턴 테리어)를 보면 얼마나 창조의 신비가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이 비디오를 한 번 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정동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8: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1 05:26:19 | 관리자
샬롬~!! 목사님 말씀잘듣고 있는 청년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이런생각이 들어서 질문드립니다.   은사주의 은동 바로알기에서..베니힌이라든가 여라 오순절 은사운동주의에 대해서 저도 목사님말씀처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자웃음소리,장풍등등 저도 동의하는바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이런문제점이 많이 있다고 한다는것입니다. 교회에서 쓰러지고 머 이런건 많이 볼수있죠.   이런 은사운동이 마귀적인것을 알고있습니다 제가 궁굼한것은.. 그런데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회계하고 돌아오는 형제자매도 있을것입니다.   다른 이교도들도 또한 여러 중복적인 기도라던가(만트라) 이런경험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에서 베니힌 목사 은사운동에서 회계하고 구원의 감격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또한 이단중에 이초석목사의 집회에서 회계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사람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자라고 하시겠지요.   그럼 베니힌 목사님도 불법을 행하는자(이단)라 해야하나요?       제가왜 이런질문을 하냐면..   저또한 어려서 그런 체험을 경험했었습니다.   제가 어렷을때 부흥회 설교말씀듣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구원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께서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시더니  쓰러트리고,또한 방언(반복해서 할렐루야를 빨리해라 이런식)을 시키는것이었지요   10여년전 당시에 경험이 생각나서 이렇게 목사님 설교말씀듣는중에 궁굼해서 글을 씁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혼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수있습니다.     각자각자의 주관적으로 느껴지는,확신받았던 그경험과 하나님을 아실것입니다.   한목사가 지나가면 성도들이 쭉넘어지고, 장풍을 하면 넘어지는 현상은 전 성령님의 역사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사람들은 (그 마귀적인 상황)속에서 넘어지고 울부짖는 그 사람,    그상황속에서 구원에 확신이 드는 사람, 예수님을 영접한사람,결심한사람. 하나님을 만났다고하고, 하나님께로 눈물로 회계하고 돌아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꼇다고 사람들에게 간증 하고,하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다면,   아니야 아니야  그상황과 경험은 모두 마귀은 장난이야 이렇게 얘기해아할까요?? 어떻게해야할까요?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자세한 답변부탁드릴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0 11:18:56 | 허형규
요약하자면, (1) 저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때에 성령님께서도 우리속에 내주하시며, 그 이후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어떠분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믿고 난후 성령을 받는 사건을 들면서 예수님을 믿을때의 성령의 역사는 밖에서 하시는 역사이고, 성령님이 내주하게 되는 사건은 믿음과 별개로 그 이후에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과도기의 사건이므로 교리화 할 수는 없지않는가..라고 했더니 어떤 사건은 오순절성령강림후 20년이 지나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과도기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고요..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는 것이더군요. 궁굼하여 문의드리오니 자세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9 12:17:39 | 박진선
※ 요약   1월 17일 오전 예배 때 우리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소개 받은 독립영화 <회복>(김종철 감독)을 그 날 저녁에 청년부 명의로 단체 관람을 했다. (뭐 그래 봤자 본인 포함해 총 5인이었지만..)   정말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내용이었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이런 기독교 컨텐츠가 외국물 번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으며 대단하고 자랑스럽다.일제 강점기 교회 수난사라든가 북한/조선족 지하 교회 이야기처럼 민족주의 정서(?)가 전혀 없이도 이렇게 감명 깊은 영상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이스라엘의 문자적 회복을 믿고 예수님의 전천년 재림을 사모하는 바이블 빌리버라면 누구라도 볼 가치가 있음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바이다.   이 정도의 감격은, 본인이 KJV 초창기에 읽은 바 있는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구영재 저)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이것도 번역서가 아닌 국내 저서라는 게 믿기 어려운 수준인 책인데, 그 책이 다루는 분야는 유럽의 종교 역사 내지 국제 정세인 반면, 저 영화는 이스라엘이라는 점이 차이이다.   ※ 첫인상   목사님께서 처음에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본인은,뭐 또 할리우드에서 쉰들러리스트라든가 아니면 비슷한 급의 시사/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나.. 유대인 관련 음모론은 다루나.. 그 정도로 짐작만 했을 뿐, 정보가 없었다.   제목이 '회복'이라고 하기에, 주찬양 선교단 극렬 매니아인 본인의 머리에 바로 뜨는 인덱싱 결과는, 그저 10집 앨범 <회복>뿐이었다.그런데 그런 게 아니고, 이 <회복>은 놀랍게도 국내에서 제작된 독립영화이다. 감독은 수십 회의 이스라엘 방문 경력을 지닌 이스라엘 전문가였다.관람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크리스천들이고 교회에서 추천을 받아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였다.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상영 전에 거의 10~15분은 온갖 광고들이 나오는데 역시 독립 영화이다 보니 그런 게 전혀 없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본인은 예전엔 영화관의 내부 모습이 철도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공항과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상영 도중에 일부 사람들이 나가거나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정차역). 들어갈 때 사람이 표를 검사한다는 것, 처음에 비상시 대처 요령이 방송된다는 것 등이 공항 내지 비행기 여행과 매우 비슷하다. ^^ 역시 경험이 안목을 키우는 것 같다.   ※ 영화 내용   예수님을 믿는 어느 유대인 가정이 괴한으로부터 폭탄 테러를 당하는 얘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이런 짓은 90% 이상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폭발 현장을 분석한 결과 이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를 전역한 사람의 소행으로 판명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자까지 군대로 징집해야 할 정도로 국방이 위태롭다.그런데 서로 그렇게도 사이가 나쁜 이스라엘과 인근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그래도 일말의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게 있다. 바로 예수님을 안 믿으며, 기독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진정한 우군인 크리스천들에 대해서 온갖 나쁜 감정을 갖고 있고 오히려 적군과 그런 사이라니!마치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친구가 되었듯이(눅 23:12), 이들 사이의 불의한 동맹은 적그리스도에게 낚여서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대다수의 불신자들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천주교니 개신교 나부랭이 따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구교 신교 할 것 없이 자신들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고 괴롭히고, 십자가 내밀면서 못살게 군 코쟁이 원수일 뿐이다. 까놓고 말해 그들은 히틀러도 기독교의 교리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기독교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정통 유대교는 국교로 강제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정통 율법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가 그렇다는 거지, 이스라엘 내부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자유주의자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나라 법에 의해서 박해 내지 벌을 받는 건 아니다. 단지 왕따가 되고 그런 유대교 신봉자들로부터 사회적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다.배척하는 짓이 너무 오버이다 싶으면 이스라엘 경찰이 출동해서 제지도 하긴 하지만.. 그들도 이런 일에서는 좀 손 떼고 싶어한다.   배척을 어느 정도 받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얼굴을 사진 찍어 간 후 전단지를 마을에다 뿌린다. 이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고 '당신들을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불순분자이니 조심하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집 앞에서 농성도 하고,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 "당신네 종교 때문에 히틀러는 지금도 외롭지 않을 거다" 같은 폭언 악담도 한다.심지어는 교회 앞에서 죽치고 앉아 농성을 하거나 예배 진행을 못 하게 난동을 부리고, 예배당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1인 시위, 침묵 시위 별 걸 다 하더라. 그 중에 엄청 과격한 사람들은 아까처럼 폭탄 배달까지..   사람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하는 종교 하나에 심취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느꼈다.새까만 정장과 모자에 긴 턱수염을 한 랍비 아저씨가 평소에는 그래도 일말의 멋이 있어 보였는데.. 저러는 모습을 보니까 싸이코처럼 보였다. -_-;;유대교 회당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는데, 거기는 오히려 천주교 성당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기도문 암송하고, 남녀 할 것 없이 머리에 면사포 뒤집어쓰고..   그들은 진짜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냥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 내지, 기존 유대교 체계에 반발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든 이단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기네 나름대로 메시야의 조건을 규정해 놓고 있는데, 지금까지 몇몇 랍비는 그 조건 중의 일부만을 충족한 경우가 있으나 완전한 메시야는 아직 안 왔다는 식이다.신약 성경도 내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는 구약 성경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유대교 환경에서, 그것도 2, 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정말 몇백 명에 불과하던 "메시야닉 쥬" --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 -- 가 지금은 1만 4천여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로마서 11장 내용이 진짜 자기네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유대인의 인터뷰를 보게 될 줄이야!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대환란 때 14만 4천 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가 준비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전도지 나눠 주고, 도로변에 현수막을 펼치면서 정말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방해도 많이 받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복음은 지금까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거라 한다.유럽은 이제 교회에 노인들밖에 안 남았고 오히려 아시아에서 역선교를 해 온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한국도 100년 전의 평양 대부흥은 이제 안드로메다로 갔고, 크리스천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중에 정작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스라엘이 꿈틀꿈틀 각성 중이다. 정말 이제 이방인 경륜은 끝이 얼마 안 남았다!   유대인의 실족과 실패만으로도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끼쳤는데, 하물며 이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복을 세상으로 나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밝아지고 그들은 일등 선민 노릇을 하게 될까? (롬 11:12)메시야닉 쥬들은.. 자기 동족이 지금까지 이방인들로부터 당한 설움을 이제 자기들한테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동족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자기를 박해하는 게 신명기 13장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신명기 13장이 아니라 신명기 18:15가 적용된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역시 유대인들은 지금도 표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민족인가 보다. 예수님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꿈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체험으로 표적을 보고 곧장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영화 중에 줄을 잇는다. 영화 앞부분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 그 사람도 정말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물론 이들이 다 바르게 믿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영화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아직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여전히 사도행전 15장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님을 배출하였으나 수천 년을 예수님 없이 지내 온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흐름!모세오경을 골수로 암기하면서 자란 그들이 스스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기적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한다.유대인의 덕을 본 이방인 중 하나로서, 본인에게 큰 도전과 유익이 되는 다큐멘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영어 무진장 잘 한다는 건 엄청 부러웠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말싸움까지 유창한 영어로... =_=;;영화 중에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데, 원래 오리지널 구절은 이렇다.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6) 이상 이것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9 10:50:51 | 김용묵
흥미로운 영상입니다. 진화론의 거두인 도킨스가 진화의 증거를 묻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합니다. 마지막에 뭐라고 하는것 같은데 영어 울렁증이 있는 저로서는 잘 모르겟구요 출처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튼 진화론진영의 선두에 서 있는 도킨스 조차 즉각적으로 대답할 진화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참 흥미롭네요^^   http://tvpot.daum.net/my/ClipView.do?ownerid=gQ5ptBmBE1Q0&clipid=8205839&lu=v_title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8 06:28:45 | 박종철
(질문)창세기 49장 6절 말씀의 끝부분에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벽을 파내려갔다는 말씀의 뜻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개역에서는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비교 설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8:3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7 15:10:36 | 양경수
인간과 매우 흡사한 얼굴을 한 새끼양이 터키에서 죽은 채로 태어났답니다. 비타민 A가 부족하면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데..과연 비타민 A의 부족으로 이런 인간의 얼굴을 닮은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 있는건지... 짐 바브웨에서도 이런 유사한 일이 있었고.. 당시 관리는 인간과 암염소의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났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괴한 생명체들..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진행되고 있을 인간복제의 실패작들은 아닐까요. 과거 노아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천사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결과물들은 아닐까요 얼마전 지방중고등부 학생들에게 UFO와 천사에 관한 진실을 살짝 맛만 보여줬었는데.. 이런 기사를 보니 생각이 남달라지는군요.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3186728&code=41191111&cp=nv1[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6 18:31:46 | 박종철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이상기)은 15일 오후 3시, 연구원 내 자원동 앞 '실험동물 위령비'에서 연구목적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위로하는 '실험동물 위령제'를 연다. 오늘 위령제에서는 실험동물들이 즐겨먹는 사료와 과일 등을 정성껏 제물로 차려 헌화와 분향할 예정이다.   이상기 연구원장은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 신약, 백신 등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동물을 통해 약효와 독성실험을 하고 있다"며 "명을 못다한 실험동물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위령제를 개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연구원은 연간 마우스, 랫드, 토끼 등 3종 3만여마리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2005년 언제적 신문 기사) * * * * * * * *   명절에 조상 산소나 차례상 앞에서 꾸벅 절한다든가 (차라리 살아 계신 부모님 앞에서 큰절 올리는 건 영적으로 문제될 것 없습니다),기우제 지내고, 영화 촬영이라든가 선박 항해 같은 거사를 추진하기 전에 사람들이 한데 모여 돼지 머리 얹어다가 고사 지내는 것..   여기에 대해서 어지간한 크리스천들은 쉽게 판단을 내립니다.미신적이다, 그런 짓 전혀 할 필요 없다, 심지어는 우상숭배다 이런 식으로.   그렇다면, 저 동물 위령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인류의 질병 치료을 목적으로 신약 개발 실험용으로 죽어가는 동물들 말입니다.그거 연구하는 연구원들도, 비록 불신자이긴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과 종교심은 있어서 연구소 뒤뜰에다 위령비도 세워 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답니다.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 쉽사리 미신, 우상숭배 따위로 치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죠?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성경적으로는 저것도 앞서 든 예와 별 차이 없는 "쎄임쎄임"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져 피를 쏟으며 처참하게 죽어 나가던 구약 시대 유대교 성전 뒤뜰에, 하나님께서 동물 위령비 세워 놓으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는지를..!   인간 때문에 동물이 불쌍하게 죽은 건 이미 아담과 이브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육체의 생명은 피, 죄사함을 위해 필요한 것은 피흘림 등등... 이 모든 성경 법칙을 시청각 교육으로 가르침과 동시에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제공하기 위해 피흘려 죽은 동물이 원조입니다. 아마 그 동물도 양이었을 것입니다. (창 3:21)   동물이 안 죽었으면 사람 본인이 자기 죄 가운데에 죽어야만 했고, 죽어서 지옥 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제도가 잔인하네, 동물이 불쌍하네 하는 식의 투정을 부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가족처럼 키우던 어린양을 제단에 올려서 목을 따고 피를 쏟아냄으로써, 인간이 지은 죄가 이렇게 뼈아프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유대인들은 매번 눈으로 봤습니다. 남은 부위를 불에다 새까맣게 태움으로써 죄의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이 그런 곳임을 실감했습니다.   이걸 보고 잔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데,사람이 진짜 피흘려 죽어 마땅한 걸 동물로 대신 감당하게 한 게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이지,정말 잔인한 건, 자기 자식 새끼--동물이 아닌 사람--를 인신공양으로 불에다 던지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주변의 마귀 종교들이었습니다. (레 18:21, 왕하 16:3, 17:17 등)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동물들 포함)을 다스리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지 말라" (성경에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곡식을 밟고 있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역시 세 번) 처럼, 살아 있는 동물을 부려 쓸 때는 하나님도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명령하지만,   식용이나 헌물 등 잡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동물을 최소한도로 죽이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개 잡아서 보신탕 해 먹든, 의학 연구용으로 동물 죽이든 예외가 아니며 해충 구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죠. 동물과 사람 사이에 엄연히 차별을 두고 있는 성경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동물 속죄 헌물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 10장이 명쾌한 이론 설명을 해 줍니다. "동물 죽는 게 불쌍해서 위령비 세울 정도이면,예수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이나 '주의 만찬'으로 꼬박꼬박 잘 기념하고, 죄나 짓지 말고 살아라."가 성경이 말하는 해답인 것입니다.   다만, 단순히 동물을 죽이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종, 유전자 자체를 혼잡하게 하고 제멋대로 뒤섞고 망가뜨리는 시도는 어떤 형태로든 심판과 재앙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 짐작하셨겠지만, 저 밑에 김** 형제님의 <개념없는 인간=동물 토론회> 글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소개합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5 22:01:39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