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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의료, 베리칩, 킹스맨(月刊 건강과 생명 2015년 5월호 건생時論)   차 한   사상 처음으로 내과 전공의 지원자가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병원협회가 공개한 ‘2015년도 전공의 모집현황 자료’를 보면 성형외과, 피부과 등 비급여 과목 선호도는 여전히 높은 반면 내과와 가정의학과는 정원 미달 사태를 보였다. 그 주된 이유는 원격의료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 만성질환자를 주로 보게 되는 내과, 가정의학과의 위상이 하락하게 되리라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삼십여 년 의사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쓰나미가 오기 전 발생하는 전조증상 중의 하나와 같다고 여겨진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겠지만 내과 전공의 지원자 미달 사태가 발생한 두 달 뒤 보건복지부는 현재 의료취약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원격의료 사업 대상을 2015년 말까지 140곳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농어촌 병원, 원양어선 선원, 거동이 불편한 고혈압·당뇨병 환자의 가정, 군 경계초소(GP), 교도소, 구치소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원격의료의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의료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외치며 원격의료를 결사반대 하더라도 원격의료는 (시기가 언제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시행되고야 말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IT 최강국이기 때문에 여론조성만 잘 되면 ‘미래 먹거리’라는 미명하에 놀라운 속도로 원격의료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원격의료 시스템’이란 인터넷 망과 최첨단의 IT 기술을 이용한 획기적인 진료 시스템이다. 원격의료 시스템이 정착이 되면 지금 정부에서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원격의료 곧 환자의 건강을 실시간으로 체크하여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수준을 넘어 해외에 있는 환자들을 직접 수술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원격의료 시스템 구축에 핵심이 되는 기술이 ‘베리칩’(verichip)이다. 이것은 ‘확인용 칩’(verification chip)의 약어로 미국의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사에서 지난 2001년에 공개한 상품명이다. ‘무선 송수신 식별장치’(RFID)를 내장한 쌀알 크기의 이 칩은 애완용 동물이나 가축들의 관리를 위한 전자 인식표로 사용되었는데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인간의 몸속에도 심을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2010년 3월 소위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미국의 ‘건강보험개혁법’이 통과됨으로써 (건강보험제도를 강하게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든 미국시민에게 베리칩을 이식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이 되었다. 2013년까지 준비기간을 갖고 2016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쳐 2017년부터 강제로 실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지각 있는 이들은 세계 정부가 일반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오바마케어’를 통해 베리칩의 확산을 도모한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베리칩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올 때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요즈음 장안의 화제인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 답을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듯이 사람의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해 폭력적으로 만들어 서로 살육하게 하는 등 사람의 생각과 육체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베리칩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가 아니다. 킹스맨의 주요한 두 장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고 하였지만 그 뜻은 영화의 결말과 달리 현실에서는 베리칩을 통해 온 인류가 통제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애완견에 베리칩을 주입하고 있다. 베리칩의 전신일 수밖에 없는 스마트 워치도 어느 덧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미국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원격의료 정착’과 ‘IoT(사물인터넷) 산업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베리칩 이식이 강행될 것이다. 아마도 송도 신도시가 세계적인 시범 지역이 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 베리칩을 심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신세계질서(NWO; New World Order)는 바야흐로 우리의 목전에 와 있다. 그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계13:16-18).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볼지니라. 그것은 어떤 사람의 수요,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13:16-18)
2015-05-04 10:40:47 | 관리자
그러면, 각 전치사가 사용된 문맥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36절)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아버지 입다를 만나자마자, 딸은 참담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       35절과 36절 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입다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네가 나왔구나. 아버지는 너를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된 딸은 먼저 ‘내 아버지여’라고 아버지를 부르고는 말을 잇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서원을 들으시고 암몬 족속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까 서원을 제게 행하셔요라고 동의하고 권해 드립니다. 이때 딸이 아버지에게 즉답으로 한 말은 단순히 내게(to me)입니다. -         (37절)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       입다는 이제 자기에게 생긴 커다란 운명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구나. 내가 원해서 택하는 삶은 아니지만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나도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지. 다만, 처녀로 평생을 살면서 여자로 태어나 메시야를 수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애통한 일이구나.” -       -그래서, 딸은 아버지에게 그 애통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말미를 구합니다. “내게(for me) 이 일을 행하시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의 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for me)’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       이때까지는 입다의 마음이 자기 실수로 인한 비참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39절)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실컷 애곡하고 마음의 정리와 준비를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 왔습니다. -       입다도 처음에는 예기치 못하게 딸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게 될 줄 몰라서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두 달의 기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겠습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 딸을 거룩히 구별해서 받으시겠다고 딸이 그때 집 문에서 나를 맞이하게 하셨겠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딸에게 선하게 해 주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딸에게도 이것이 더 나은 일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       그래서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with her)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가 딸과 함께(with her) 마음을 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딸은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리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동일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중의법을 사용하여 입다의 딸의 마음과 입다의 마음을 각각 37절과 39절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중의법이라는 수사법이 황진이도 알고 춘향전 작가도 알고 또 저까지도 알고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수천 년동안 말씀해오신 하나님께서 그런 걸 모르고 그냥 아니면 어휘 자랑하시려고 그렇게 다른 전치사들을 동원하셨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기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짐짓 그렇게 다른 단어로 우리에게 성경 기록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보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뒷풀이)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입다를 포함한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려면 자기에게 시간이 부족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할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입다에 대해 믿음의 본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역(개정) 성경을 쓰는 한국 교계에서는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었다고 버젓이 죽은 사실을 추가해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게 믿고, 따라서 ‘입다’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를 연결시켜 생각하기에 심히 곤란을 느낍니다. 단지 서원해서 전쟁 승리하고 돌아온 것 하나죠. 거기다 잘못된 서원으로 딸을 번제 헌물로 바친 비운의 사나이 정도. 인터넷에서 입다란 검색어로 찾아보면, 내용 소개는 나와 있어도 어느 한 사람 제대로 입다를 본받을 믿음의 사람으로 실질적인 내용을 소상하게 거론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 분은 솔직히 입다가 믿음의 본으로 히브리서에 올라 있지만 자기는 별로 찾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작고하신 박윤선 목사의 주석에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살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나실인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입다가 동생들에 의해 집을 쫒겨나서 돕 지방에 거하는 동안 허영심 많은 자들이 찾아와서 나다녔다는 기록을 통해 입다의 마음 속에 이복 동생들에 대한 미움의 골이 깊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쫒겨나기 전까지는 길르앗 지방의 머리인 아버지 길르앗의 슬하에서 교육도 잘 받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장남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아버지 별세 후에 집을 쫒겨나서 바깥으로 나다니면서 자신의 믿음과는 반하는 방황하는 세월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다가 장남이라고 쓴 것은 단지 저의 추정이며, 몇째 아들인지는 성경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딸을 사랑하였고 집안에서는 바깥에서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봅니다. 입다의 딸이 한 말을 볼 때, 1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그 나이에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잘 교육된 순종하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운명을 주저하지 않고 바꾸겠다고 작정하었습니다. 39절을 읽으면서 저는 산에서 애곡하고 돌아온 딸과 함께 서원 의식을 행하는 입다의 모습을 그려 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애달프고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렇게 딸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키웠을까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입다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 중에 한 사람으로 등재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움의 골이 패인 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길르앗의 머리가 된 후에도 아무런 복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자신만 믿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외동딸까지 믿음의 선한 교육을 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판을 후세에서까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승리하고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입다의 딸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이전에 이방신들을 섬기다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간구하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입다가 비천한 삶을 살다가 전쟁 승리로 일약 길르앗의 머리가 됨으로써 교만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사사로서 올바로 행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이런 일들이 생기도록 하셨을 것으로도 저는 생각합니다.     (또 뒷풀이 예고) 이 글을 읽으시고 전혀 감흥이 없으시거나, 아직도 딸이 번제 헌물로 불태워졌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5-05-02 21:17:29 | 최상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 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말(말씀)으로만 하셨습니다. (“……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네가 어디 있느냐?”) 환상으로도 꿈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는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천둥소리, 비, 우박,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을 사용하여 시청각 교육을 통한 말씀으로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신 후에는 하늘로부터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놀라운 방식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성경 기록은 또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주십니까? 율법서로, 역사서로, 잠언, 시가, 서신, 예언서로……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식 중 제가 착안하게 된 또 하나의 방식을 소개드립니다. 다만, 하나님을 선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믿으시는 분들은 동의하실 수 있으나, 하나님을 악하다고 믿으시는 분들은 결코 이해되지 않을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황진이의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 자체로는 “숲이 우거진 아무도 없는 산 위에 높이 떠 온통 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과, 그 아래 계곡을 따라 맑고 푸른 물이 거침없이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쉬임없이 흘러 가는 우리 인생은 다시금 되돌이켜 살 수 없음을 알고 여유를 내어 잠시 인생을 즐겨 보라.”는 뜻을 담은 시이며, 수학학에서는 “중의법”의 예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 시에서 벽계수는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는 맑고 푸른 물이지만, 이 시를 듣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또 명월은 밝은 달이지만 이 시(시조)를 지어서 들려주는 기생의 이름(기명)이기도 합니다.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맑고 푸른 시냇물과 밝은 달로 시의 내용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속으로 정작 나타내고자 하는 말은 벽계수와 명월이란 사람 이름들입니다.   제가 보기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중의법을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성경 기록이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입니다.   (11:30)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 (11: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11:35)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11:36)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11: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11: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11: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위의 글을 읽어 보시면,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번역의 특성상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해당 구절들을 뽑아 보았습니다.   (11:36) And she said unto him, My father, if thou hast opened thy mouth unto the LORD, do to me according to that which hath proceeded out of thy mouth; ………………… 내게 행하소서 (11:37) And she said unto her father, Let this thing be done for me: ……………… 내게 행하시되 (11:39)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wo months, that she returned unto her father, who did with her according to his vow which he had vowed: and she knew no man. 그녀에게 행하니   우리말로는 모두 ‘내게’, ’내게’, ’그녀에게’로 번역된 말들이 영어로는 ’to me’, ’for me’, ’with me’로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to’, ’for’, ’with’ 모두 ‘~에게’란 의미가 있으며, 우리말 번역처럼 ‘~에게’로 읽어서 자연스럽게 의미가 통합니다.   다만, 왜 동사가 동일한 ‘do’인데,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다른 전치사들을 사용하셨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의법을 사용하셔서 숨은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전치사의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to 전치사 1. (이동 방향을 나타내어) …로[에], …쪽으로 8. 어떤 행동의 영향을 받는 대상을 나타냄    What have you done to your hair? for 전치사 2. (…을 돕기) 위해    What can I do for you? 3. …에 대해    They are anxious for her safety. with 전치사 1. …와 함께 3. …로, …을 써서[이용하여]    Cut it with a knife. 6. …에 대해, …에(게)    With these students it's pronunciation that's the problem. 이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발음이    문제이다.    위에서 보듯이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모두 우리말로 ‘~에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for와 with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for는 ‘~을 위하여’, with는 ‘~와 함께’라는 뜻도 가지고 있죠.  
2015-05-02 21:15:25 | 최상만
답변 갑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음식에 관하여는 이견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따르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피에 대한 것도 음식과 똑같이 적용해도 될까요?
2015-05-02 19:08:34 | 송성규
안녕하세요 성경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물어보려고 합니다. 창(9:7), 레(7:26-27) 등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피든지 먹는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 아래있고 이런 명령은 율법아래있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 입니다. 그런데 행(15:28-29) 에 보면 우상에게 바친 음식, 피와 목매어 죽인것 등을 금하고 있는데 비록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지만, 아직 까지도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규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요? 답변을 하실 수 있는 성도님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05-02 18:15:10 | 송성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태복음 5장 10에 보면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란 말씀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인하여 또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성경에서는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제가 이전에 장로교회에 어떤 여 집사님을 알고 있는데 그는 자주 교회에 와서 자신이 가족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있는 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울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한번은 눈 덩이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가지고 교회에 와서 남편에게 맞았다면서 기도 부탁을 하면서 우는 것을 보았다. 그 여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집사님의 가정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봄에 모를 심는 시기라서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바쁘게 보내는 때였었다. 그런데 그 시골 장로교회에서 하필이면 그 바쁜 모심는 계절에 일주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고 있는데 그 여 집사님이 가족들이 모를 심는데도 함께 도와주지 않고 밥도 제대로 안 해주고 교회당에만 가서 있으니 남편이 하도 화가 나서 참다못해 아내를 나무람 했는데 아내는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남편에게 대들다가 그날 맞은 것이다. 내가 그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맞을 짓을 했고 오히려 하나님이 남편을 통해 그를 징계를 한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여 집사님은 자신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요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 [구원파]라고 하는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하는 곳의 박옥수 목사가 주식 사기를 쳐서 252억원을 챙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제2 심판이 5월 달에 열린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더욱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은 그 교회에 교인들이 우리 목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면서 기도모임을 하고 금식을 하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박옥수 목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금식하면서 회개를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나는 박옥수 목사가 정말 주식 사기를 쳐서 그 많은 돈을 챙겨 먹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옥수 목사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바른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옳은데 지금 박옥수 목사의 죄명은 주식 사기요 252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챙긴 혐의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신고를 한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교파의 사람들이 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집사로 일하던 사람들이 또한 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신고를 해서 법적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돈에 대해서 명확한 선이 없었으면 돈을 뜯어먹고 사기를 쳤다는 그런 일로 법정 나들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한탄하고 통탄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하고 목회를 할 자격이 없는 목회를 그만 두고 교인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성경에 어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식 사기를 치먹고 돈을 뜯어 먹어서 법정 놀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랬는가? 사도 베드로가 그랬는가? 아니면 디모데가 그랬는가? ........ 있다면 헌금 통에 있는 돈을 몰래 훔쳐 먹는 가룟 유다밖에 없다.   그런데 박옥수 목사는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우리 목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 대하여 무식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써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과 이익을 꺾어 버리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회개하라.
2015-05-02 17:39:19 | 시님사람
    (내용 추가 2015년 5월 1일)   재창조론에서 주장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막 10:6의 ‘창조의 시작부터’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6). 창세기 1:1절부터가 아니라 창세기 1:27절에서 사람을 만드신 날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스스로 이 구절이 하늘과 땅의 창조가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 ……………………….. 수정. 2015년 4월20일(내용 보충) 쉽고 단순한 진리!   그러나, 제 글에서 기술한 바처럼 이 주장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땅의 흙으로 아담만 지으셨지 처음부터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만들어 두시고 남자와 여자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쉽고도 단순하고 바른 진리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오류를 인터넷 웹사이트 첫 페이지의 상단에 커다랗게 올려서 광고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추가 글을 게재하는 것을 염려하시는 성도님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더 이상 비진리가 판치고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추가 글을 게재합니다.   목회자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한 사람인 제가 부탁드립니다. 비록 목회자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바르게 성도들을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는 일에는 목회자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협력하고, 또 누구든지 진리의 목소리가 들리면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히 그것을 수용하여 하루속히 시정조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진리를 쉽고 단순한 진리로 포장하는 것은 그냥 보고만 있기가 대단히 민망스럽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모두 많든 적든 실수가 있고, 일시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는 고치고 나면 되고, 그때부터는 모두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모자라는 한 사람의 진심에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2015-05-01 04:07:48 | 최상만
the1 검색결과  (정관사) 1.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그, 저 I saw a dog. The dog had a piece of meat in his mouth. (2) (이미 나온 사람·사물에 관련된 것, 또는 그 부분을 언급할 때) 그 There was a large tree there. The leaves were also large. 거기에는 큰 나무가 있었다. 그 잎도 역시 컸다. (3) (이미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장소의 상황·일상 생활에서 지시 대상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명사에 붙여서) (※「그」 등으로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음) I've just been to the post office. 우체국에 갔다가 오는 참이다 (4) (한정어구를 수반하는 명사에 붙여서) the book you gave me 당신으로부터 받은 책 2. (1) (고유 명사나 그에 준하는 것에 붙여서) the Atlantic대서양   ‘the’는 학교에서 영어 배울 때 거의 처음에 알게 되는 단어이니까 다들 알고 계실 텐데, 어쨌든 문제를 풀자니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사전의 정의를 보면, 재창조론 입장에서 쓴 위의 초록색 문장에서 ‘the creation’의 ‘the’는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사용하는 ‘그’란 뜻입니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즉, 사람들)의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창조론 입장에서는 부사구가 앞에 있는 그대로 파란색 문장인데, 그 때의 ‘the’의 뜻은 사전의 의미 중 (3) (이미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장소의 상황•일상 생활에서 지시 대상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명사에 붙여서) (※「그」 등으로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음) 사용하는 ‘the’로서 ‘그’를 붙이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이 문장에서는 ‘the’가 사전의 의미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사용하는 ‘그’란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실 때의 남자와 여자가 위의 예수님 말씀에서 ‘이미 나온 명사로서 다시 언급하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온 게 아니라 뒤에 나오죠.   그러니까, 부사구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가 뒤로 가면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로 되면서 위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the’의 사전적 의미가 다른 것이 적용되게 되는군요.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성경 기록이 문장의 일부가 기록된 순서를 바꾸면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앞에 기록된 단어들을 뒤로 돌리는 것은 성경 변개가 되겠네요. 뜻을 변경시키게 되니까요.   그러면, 뒤로 돌리지 말고 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은 것이죠. 변개되지 않은 그대로가 말입니다. 원래의 위치대로 둔 상태에서의 뜻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가 아니라 그냥 창조입니다. 사전의 의미 (3)을 보면 이 경우 ‘그’라고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답니다. 우리말의 ‘그’도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있어야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니까 앞에 언급하지 않은 창조를 ‘그’라고 붙여서 해석하면 안 되겠죠. 흠정역 성경에서는 ‘그’를 붙이지 않고 잘 번역하였네요. (창조의 시작부터)라고요.   여기서 일단,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번역된 것은 올바른 번역이다. 사람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하는 것은 성경 변개에 해당된다.'는 결론을 내겠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시작부터라고 말씀하시려고 했다면 과연 어떻게 영작문을 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man(또는 me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또는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ir creation.   이렇게 표현된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영어이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사구를 뒤로 배치하지도 않으셨고, creation 뒤에 ‘man(또는 men)’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고 이의를 달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기록된 대로 ‘창조의 시작부터’입니다. 부사구를 뒤로 옮긴다든지 없는 수식어를 마음 속으로 creation 뒤에 붙여서 읽는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2015-04-30 20:54:52 | 최상만
  이제 [문제]로 돌아 갑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문제] 위의 창조의 시작부터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아십니까? 다음 셋 중에서 하나 고르시요.   (1)   6일 창조의 시작부터 (2)   사람 창조의 시작부터 (3)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부터   [틀린 답]  (2)번   그러면, 정답은 (1), (3) 중에 있습니다. 재창조론의 답은 틀렸네요.   (1)   6일 창조의 시작부터가 답일까요?   일단 그렇다고 치고, 검토해 봅시다.   6일 창조의 시작은 언제죠? - 첫째 날이요.   아담과 이브는 몇째 날에 창조되었다고요? - 여섯째 날이요.   그러면 (1)번은? - 틀렸어요.   네, (1)번도 정답이 아니네요.   그럼 정답은? - (3)번이요.   네. 학생들이 (3)번이 정답이랍니다. 왜 (3)번이 정답인지는 홍승대 형제의 게시판 글 698번 (창조의 시작부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write; These things saith the Amen, the faithful and true witnes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   바리새인들이 이혼해도 되는지 질문한 것이 대해, 막 10:6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별해서 만드셨기 때문에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에 이혼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암수로 구별해서 지으셨지만 사람처럼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들끼리 짝짓는 것이라는 뜻도 알게 되고요. 아담과 이브만 그렇게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잠이 깨어 자기 눈으로 보고 맘에 들어서 OK 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고,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남자에게 여자를 짝으로 데려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행하신 짝지어주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남편된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데려다 주신 여자, 자기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면서 백년해로할진저!     [뒷풀이]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But from the beginni (1)hngt e creation (2) m(5)  th(3)m male (4) female.   딤후 3:16에 의해 요소별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창조의 시작부터: 부사구(시간적 언급) (2) [하나님]께서는: 주어 (3) 그들을: 목적어 (사람들) (4) 남성과 여성으로: 목적보어 (5) 만드셨으니: 동사   재창조론자들의 주장: 강조를 하기 위해 부사구 “(1) 창조의 시작부터”가 문두에 있지만, 마지막으로 보내서 비강조 문장으로 고쳐 써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But (2) m(5)  th(3)m male (4) female. from the beginni (1)hngt e creation 해석: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즉, 사람들)의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재창조론자들이 고쳐 쓴 성경 기록에서 ‘the’를 주목합니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먼저 영어 단어 ‘the’를 사전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2015-04-30 20:50:59 | 최상만
창조의 시작부터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창세기 1장  (1:2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2장 (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2:8) ¶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를 거기 두셨으며 (2:15) {주} [하나님]께서 남자를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가꾸고 지키게 하셨더라. (2:16)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8) ¶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2:19)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날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 (2:21)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2:22)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4)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마가복음 10장 6절을 보겠습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문제] 위의 창조의 시작부터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아십니까? 다음 셋 중에서 하나 고르시요.   (1)   6일 창조의 시작부터 (2)   사람 창조의 시작부터 (3)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부터   이것이 대수롭지 않은 출제 문제인 것 같아도 창조론, 재창조론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1)번이 맞으면 안 되고, (2)번이 맞으면 재창조론이 무사하고, (3)번이 맞으면 재창조론이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정답이면 좋겠습니까? 사전에 정답을 선호하시면 진리를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성경 기록에 따라 답을 찾아야 합니다.   (벧후 1:19)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이제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풀이]   막 10:6-9 (10:6)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10:7)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10:8)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10:9) 그러므로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   위의 9절을 보면, ‘그러므로’가 힌트입니다. 즉,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므로, (7-8절: 둘이 결혼하되),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님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므로, (7-절: 둘이 결혼하되),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맞음  어디가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죠. 이혼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짝지어 주셨나요?   (1)   언제: 창세기 1장 여섯째 날에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심) -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창 1:27) (2)   어떻게: 창 2:19-23   어떻게 짝지어 주셨는지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코멘트 (2:18) ¶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짝을 만드실 작정을 하셨습니다. (2:19)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날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 이브를 만들기 전에 들짐승과 날짐승을 한 번 더 지으셨습니다(아마도 암컷?). 아담한테 선 보여 주시려고. 그리고 아담에게로 데려 가셨습니다. (데리고 가시기 전에 얘들아, 아담한테 잘 보여라. 너희들 자태를 맘껏 뽐내어 봐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 그런데 아담은 그들을 이성으로 보지 않고 이름만 지어 주었습니다. 그 이름들 중에는 그 어느 것도 ‘여자’란 이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짝을 못 찾았구나.”하시고 가축, 날짐승, 들짐승들을 다 물리셨습니다. (2:21)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2:22)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지금까지 아담이 헛수고만 잔뜩 했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있었죠. 저런 놈들에게 한눈 팔아 봤댔자 아무 소용 없어. 피곤하기만 하네. 잠이나 자자. 하나님께서 곤히 자는 아담에게 잘 자라고 부채질을 하셔서(?) 아담이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아담이 잠든 틈에 아담 몰래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아담이 자다가 깨어서 볼까 봐 안 보이는 곳으로 가셔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다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나 봐요. 드디어 아담이 기분 좋게 자고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자를 다 만들어 놓으셨지만, 아담을 깨우지 않으시고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려셨습니다. 혹시라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여자를 데려가면 초면인데도 성질 낼지도 모르니까요. 자, 아담이 여자를 보고 어떻게 나올까요? 바야흐로 맞선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다른 말은 다 패스. 아담이 이름을 또 짓네요. 무슨 들짐승이나 날짐승한테 하듯이 말입니다. 아, 그런데 그 이름이 ‘여자’ 드디어 짝을 만났습니다. * 위의 코멘트에는 비성경적인 행위(하나님의 말씀에 추가)가 곳곳에 가해져 있으니 새겨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나요? - 아니요. 처음에는 남자만 만드셨어요.   그럼, 그런 다음 곧바로 여자를 만드셨나요? - 아니요. 들짐승도 만들고 날짐승도 만드셨어요. 가축도요.   그런 다음 여자도 만드셨나요? - 아니요. 가축하고 들짐승하고 날짐승하고 만나서 선보고 이름 짓고 했어요.   아, 그러면 처음에 남자 만들고, 여러 번 단계를 거쳐서 제일 나중에 여자를 만드셨네요. 시간도 꽤 걸렸겠습니다. - 네에.      
2015-04-30 20:47:46 | 최상만
**글이 잘려나가서 부득이하게 나누어 올립니다. :(   그런데 두 분이 첫날 통역서비스통해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 다음주에도 오셨답니다. 할렐루야! 통역하시는 형제님이 영어도, 한국어도 본인은 언변에 능력이 없다며 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에 [순종]으로 결단하고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른 성경으로 그날 선포말씀의 본문 및 관련구절만 한글로 읽어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냐 라고 부담을 낮춰주며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한국어서비스 둘째 주에, 이런 기쁜 날을 대비해서 상비해 둔 [킹제임스흠정역]을 오신 분께 선물로 드렸더니, 얼마나 쓰다듬으시며 이리저리 펼쳐보시며 감격하시던지요. 우리말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이토록 기쁜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킹제임스성경을 만나게 된지 이제 겨우 1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일하게 보존된 아버지의 말씀을 그것도 우리말로 된 바른 성경을 이렇게 저희 손에 놓아 주시며, 또 그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저희들에게 진리를 보이시며, 친히 앞서 놀라운 것들을 행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Church: Illawarra Community Baptist Church Service: Sunday 10am (Bible Study), Morning Tea, 11am Morning Service & 5pm Evening service Address: 22 Bong Bong Road, Dapto, Australia (next to Dapto Station), (Sydney/Wollongong/Dapto/Kiama/Nowra region) Phone: 02 4262 8700 Pastor: Kevin Harris Korean Service Contact: 최보승(+61 433 260 989 / 0433 260 989) We Care About You!
2015-04-28 23:45:14 | 최보승
  Stop and let me tell you what the Lord has done for us! 제 아이들이 최근 성경학교에서 배운 노래가사인데 지금 제 마음을 꼭 맞게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 인용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호주 시드니에서 남부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져있는 [호슬리] 지역에 거주하는 최보승 자매입니다. 지난 2월에 사랑침례교회에 간략하게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기도사항이 있었는데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5461&page= ),  2주전에 그 기도가 수퍼 특급으로 응답이 되었기에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 또한 이를 계기로 호주 시드니 및 근교에 계시는 분들께도 저희 교회 한국어 서비스를 소개하오니 저희와 함께 이 은혜를 나누길 희망합니다.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리고 앞으로도 이 사역을 통해 많은 혼이 구원을 받고 또 모든 과정 하나하나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정중히 부탁 드립니다. 제 아버지께서 한국에서 지내시는 몇 개월 동안 [광주은혜침례교회] 한재석전도사님의 인도와 모든 성도님들의 따듯한 보살핌으로 [킹제임스성경]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셨습니다. 호주에 도착하시기 며칠 전 까지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 하고 무작정 배짱으로 있었는데,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성능이 그리 좋진 않지만 통역헤드폰을 몇 개 구입하고 한국어서비스를 미리 준비 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2015-04-28 23:36:40 | 최보승
질문: 열왕기하 2장 24절   어린아이들이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그 아이들을 저주하여 마흔두 명이나 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놀렸다고 해서 그렇게 죽이는지...   답: 성경을 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돌이켜서 그들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하매 숲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그 아이들 중의 마흔두 명을 찢었더라.   곰들이 42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혔습니다.   15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처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자신의 사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16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더라.(대하36:15~16) 구약 시대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언자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곧 감히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온 이스라엘에 엘리야와 엘리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도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서 도시에서 나온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대언자 엘리사에게 심각한 모욕을 안깁니다. 당시 벧엘과 그 인근은 솔로몬 이후 심각한 우상숭배의 본거지요, 배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벧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394 엘리사에게 대한 어린아이들의 언행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이곳 사람들의 하나님과 그분의 대언자들에게 대한 반감과 멸시는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할 만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엘리사는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최고의 적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분명히 엘리사는 자기 임의대로 저주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했습니다(24절). 이렇게 당시의 시대상과 앞뒤 문맥을 살필 때 열왕기하 2장 23절은 단순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왜 엘리사의 저주와 그로 인한 형벌이 이들에게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상단 구글 검색을 이용하시면 다른 관련 글도 검색이 되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8 19:28:35 | 권장일
안녕하세요?   올해에도 국내 최고의 성경 소프트웨어인 딜럭스바이블 인터내셔날 버전을 15%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참조하시고 거기 있는 대로 구매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55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204   샬롬
2015-04-28 12:05:2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주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 2시간 강해 영상은 다음 주에 올리도록 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몇 주에 걸쳐  한마음 미션에서 매주 목요일에 성경 맥잡기 시리즈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요한계시록, 모세5경의 5권, 여호수아, 사시기, 욥기, 이사야,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등의 책을 각각 2시간 정도에 걸쳐 설명하려고 합니다.   핵심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면 독자들께서 성경을 읽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28 12:01:42 | 관리자
평가 및 반론: (1)   성경 내장 사전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의 의미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인데, 나중의 창 9:1에서 뜻을 정의 내지 확신하고 그것을 창1:28에 거꾸로 가져와서 그 곳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역적용하는 원칙 위반이지 않은가요? 그 논거는 제척됩니다. (2)   흠정역에서는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채우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채택했는데, 위의 논거에서는 다른 의미 ‘다시 채우다’를 적절한 번역이라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가 다수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성’은 어떤 언어에서나 다 있지만, 이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 ‘채우다’에 ‘다시’라는 반복 개념만을 추가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다의성이란 서로 다른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다수 있는 것이고, 의미가 같은 경우에도 사용처가 다른 경우에라야 혼란이 초래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사용처에 동일한 단어를 반복성만 추가해서 쓰는 다의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 예화를 보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손님): 야, 웨이터. 물 한 잔 블라블라. (웨이터): 네. (종이컵에 물 한 잔 채워서 가져다 줍니다.) (손님):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종이컵을 테이블에 놓았는데, 물 컵에 그만 파리가 한 마리 빠져버렸습니다. 에잇! 하며 테이블 아래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야, 웨이터 물 한 잔 블라블라. (웨이터): 갔다 드렸잖아요. (손님):   물 한 잔 다시 블라블라란 뜻이야 임마. (웨이터): 그럼 애초에 물 한 잔 다시 블라블라라고 하셨어야죠. 사람 헷갈리게. (손님):   이 자식이 뭐? 블라블라는 다시 블라블라란 뜻도 있잖아. (웨이터): 그건 그렇지만, 그냥 블라블라라는 뜻도 있잖아요. 같은 단어를 쓸 거면          다시 블라블라라고 하셨으면 오해가 없죠. (손님):   뭐야 임마? 꼬박꼬박 말 대답이야? 네가 오해할 거라고 내가 어떻게 알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지! (네, 결국 자기가 개떡같이 말했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말았습니다.)   위의 예화에서는 블라블라란 단어가 가져와입니다. 가져와란 단어가 그냥 가져와란 뜻도 있고 다시 가져와란 뜻도 있어서 같은 상황에서 그 단어를 쓴다면 저런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에는 ‘채우다’도 있고 ‘다시 채우다’도 있는데 전자는 ‘사람이나 동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fill’은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수정안으로 제시하는 후자의 의미는 전자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어떤 장소에 사람이나 동물이 가득 차는 것은 단시일 내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격이 아닙니다. 일회성이죠. 특히 창세기 1장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면에, ‘다시 채우다’가 하나의 단어로 쓰이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반복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fill again’처럼 두 단어로 길게 말하지 않으려고 단어 하나에 반복 개념을 포함시켜 간편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 사용되는 경우란, 컵에 물을 다시 채운다든지, 바구니에 사과를 다시 채운다든지처럼 손쉽게 단시간 내에 반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의미라야 합니다. 창 1:28에서처럼 온 땅을 사람이 다산하고 번성하여 채우는 것과 같은 장기간이 소요되는 상황에는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혹시라도 재창조를 전제로 하고 사람이 온 땅을 다시 채우라고 표현하려면 ‘replenish again’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3)   위의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에서 ‘replenish’의 ‘다시 채우다’란 의미를 땅을 채우는 것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설사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다른 불합리가 드러납니다. 다음 예화를 보십시오.    [다시 식당] (손님):   야, 웨이터. 물 한 잔 가져와. (웨이터): 네 (손님):   (조금 있다가 다른 웨이터에게) 야, 웨이터 물 한 잔 다시 가져와. (웨이터): 네? 제가 언제 갖다 드렸던가요? (손님):   아까 다른 웨이터가 가져와서 한 잔 마셨단 말이야, 임마. (웨이터): 에이 그럼 다시란 말을 하지 마셔야죠. 사람 헷갈리게. (손님):   뭐야 임마? 내가 다시 먹는 거니까 그렇게 말했지. 그런 것도 짐작 못해?          군소리 말고 물이나 가져와! (웨이터):  (혼잣말로) 에이, 자기가 잘못 말해 놓고 괜히 나한테 뭐라고 그래. ** 아마도 웨이터는 기분 좋게 물을 갖다 주지는 않을 겁니다.   재창조를 전제로 하고 ‘다시 채우다’라는 뜻으로 읽어 보면, 비록 하나님께서는 다시 채우게 하시는 것일지라도, 아담과 이브는 처음 채우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채우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바른 화법이 아닙니다.    결론: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란 의미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채우다’란 의미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22절에는 ‘fill’을 쓰고 28절에는 ‘replenish’를 사용하신 이유를 밝히기 위해 세 가지 단서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검토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 문장의 주어가 사람 또는 하나님이면 ‘replenish’를 사용하시고, 주어가 동물이면 ‘fill’을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 때의 ‘replenish’의 의미는 ‘채우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5-04-27 20:14:20 | 최상만
그래서 창 1:22과 1:28절을 다시 찾아서 읽어 봅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22절에서는 동물들에게 바다를 채우라고만 하시고 별 다른 추가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28절은 땅을 채우라고 하신 다음 추가로 더 말씀하신 내용이 있네요. -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그러고 보니, 땅을 채우는 사람은 앞서 창조하신 생물들에 대한 정복자요 지배자네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애초부터 그렇게 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2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니까,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다른 창조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하셨구나,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별한 백성’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사람은 다른 창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창조물로 보시는 것이네요. 그래서, 사전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한데 묶어 ‘replenish’로 사용하는 것으로 표시해 두었지만, 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이 채우는 것은 ‘replenish’, 동물이 채우는 것은 ‘fill’로 구별하기를 원하셨네요. 딤후 2:15에서 성경 기록을 바르게 나누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나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경의 내장 사전에 ‘replenish’의 의미를 “사람이 채우다”라고 정의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 기록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이 정의대로  해석하면 될까요?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창 9:1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땅을 채우라고 하시는 상황이니까 ‘replenish’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은 동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의 내장 사전 정의가 여기에서도 바르게 적용된다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성경의 다른 용례들도 모두 확인해 보겠습니다.   KJB 흠정역 성경 replenish (창 1:28, KJV)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1: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창 9:1, KJV)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사 2:6, KJV) 『Therefore thou hast forsaken thy people the house of Jacob,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2:6) ¶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주어가 사람(주의 백성) 수동태 (주어 + 동사) (사 23:2, KJV)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thou whom the merchants of Zidon, that pass over the sea, have replenished.』 (23:2)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렘 31:25, KJV) 『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31:25)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주어가 하나님 (주어 + 동사 + 목적어) (겔 26:2, KJV) 『Son of man, because that Tyrus hath said against Jerusalem, Aha, she is broken that was the gates of the people: she is turned unto me: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26:2)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겔 27:25, KJV) 『The ships of Tarshish did sing of thee in thy market: and thou wast replenished, and made very glorious in the midst of the seas.』 (27:25)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replenish’가 사람 또는 하나님이 주어인 문장에서 사용되었고, 동물이 주어인 용례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정의한 ‘사람이 채우다’란 뜻에 배치되는 용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로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사례이지만, 개념상으로는 배치되지 않습니다.   ** 참고: 사전에서는 ‘replenish’의 사용 예로서 “사람이 ~으로(사람 또는 동물로) 어디를 ‘채우다’”라는 형식으로 해서, 채우는 대상을 ‘with + (동물 또는 사람)’의 부사구 형태로 사용한 예가 나와 있기도 합니다. (예: I have replenysshed my pastours with catall, and my pondes with fysshe.) 그러나, 성경의 용례는 이처럼 부사를 동반하여 ‘채우다’를 표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모두 부사구의 목적어가 주어가 된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어는 복수입니다. 수동태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수의 그 무엇이 주어를 ‘채우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도 주어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쓸 수 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22절은 목적어가 바다의 물들(the waters in the seas)이고, 28절은 땅(the earth)입니다. 바다를 채운다는 것은 바다 속을 채운다는 것이고, 땅을 채운다는 것은 지면 위를 채운다는 것이니까, 두 가지의 채우는 용기가 서로 다른 형태인 것은 사실이나, 채우는 동물이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들이 채우는 곳이 자기가 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또 이 목적어가 달라짐으로 인해 ‘채우다’의 의미로 달리 사용되는 동사를 찾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겠습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논거:  흠정역 번역에서는 22 절의 ‘fill’을 ‘채우다’로 번역하고, 28 절의 ‘replenish’도 동일하게 ‘채우다’로 번역하였는데, 동사의 단어를 다르게 쓴 이유가 있으므로 동일하게 번역하지 말고 ‘replenish’의 여러 의미 중에서 다른 뜻을 채택하는 것이 두 동사를 다른 단어로 번역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성경 기록들의 다른 구절들을 참조해 볼 때 세상은 재창조되었으며, 옛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창조된 사람이 땅을 채우는 것은 다시 채우는 것이다. 창 9:1에서도 노아의 홍수로 땅의 동물들을 쓸어버리신 후 하나님께서 똑같이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성경 내장 사전에서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replenish’의 여러가지 뜻 중에서도 이에 부합하는 뜻(다시 채우다)이 있다.   수정안: ‘채우다’로 해서는 안 되고, 당연히 ‘다시 채우다’로 번역해야 한다.   평가 및 반론: (1)   성경 내장 사전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의 의미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인데, 나중의 창 9:1에서 뜻을 정의 내지 확신하고 그것을 창1:28에 거꾸로 가져와서 그 곳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역적용하는 원칙 위반이지 않은가요? 그 논거는 제척됩니다. (2)   흠정역에서는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채우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채택했는데, 위의 논거에서는 다른 의미 ‘다시 채우다’를 적절한 번역이라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가 다수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성’은 어떤 언어에서나 다 있지만, 이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 ‘채우다’에 ‘다시’라는 반복 개념만을 추가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다의성이란 서로 다른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다수 있는 것이고, 의미가 같은 경우에도 사용처가 다른 경우에라야 혼란이 초래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사용처에 동일한 단어를 반복성만 추가해서 쓰는 다의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 예화를 보기 바랍니다.  
2015-04-27 20:12:10 | 최상만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채우라’의 영어 단어 ‘replenish’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서 이 영어단어의 뜻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두 절을 비교해 보면 우리말 번역은 둘 다 ‘채우다’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fill’과 ‘replenish’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fill’도 ‘채우다’, ‘replenish’도 ‘채우다’니까 그렇게 번역했겠고, 또 히브리어 원문에도 두 곳에 동일하게 같은 단어 ‘말레’가 사용되어 있으니까 표면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하면서 한 곳은 ‘fill’, 다른 곳은 ‘replenish’로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을 했고, 흠정역 성경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썼는데 왜 같은 우리말 단어로 번역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최종 권위로 믿는데 그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취지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는 행동 또는 동작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고, 한국은 감정이나 느낌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이 파랗다고 해도, 영어로는 blue, 퍼렇다고 하는 말도 blue, 푸르스럼하다고 하면 뭐라고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영어로는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등등 다양한 단어들을 우리는 모두 ‘타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맙니다. 그래서 영어를 번역할 때 다양한 행동을 달리 표현하는 영어 단어들을 우리말로는 일일이 구분해서 번역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기행문을 쓰면서 집을 나서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는데 “처음에는 택시 타고 버스터미널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페리 터미널까지 가서, 거기서 배 타고 제주도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한라산 기슭까지 가서, 거기서 자전거 빌려 타고 한라산 관광 코스를 돌아다녔다.”라고 썼다면,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중에서 상황에 맞는 단어들을 골라서 쓰겠죠? 그런데, 이렇게 번역된 영어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다고 합시다. 서로 다른 이 단어들을 모두 ‘타다’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죠?   창 1:28의 ‘replenish’는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창 1:22의 ‘fill’도 같은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읽는 사람이 히브리어 성경과 대조하면서 그 곳을 읽다 보니 한 곳은 ‘fill’로, 다른 곳은 ‘replenish’로 쓰여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말레’로 동일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에게 단어가 다르면 뜻이 다른데 왜 ‘말레’라고 똑같이 썼느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영어로는 다른 단어를 썼더라도 우리말로는 같은 단어 ‘채우다’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너희는 구분해서 써라. 우리는 구분 안하고 쓴다. 우리 말로는 같은 단어라서 구분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어가 발달하기 때문에 원문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 단어라 할지라도 후대에 와서 그것을 구분해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였다면,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분해서 표현하기를 원하셨다면, 어떻게든 구분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말레’란 말로 표현할 당시에는 개념상으로는 달리 생각하지만 용어가 ‘말레’라는 단어만 있어서 그 다른 개념들을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겠지만, 그것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영어로 옮길 때 다른 개념을 명확히 드러내도록 표현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면, 우리말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그것을 우리말이 수용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겠습니다. 단, 개념 자체가 정말로 다른 개념이라서 다른 단어로 구분해서 표현했는지는 먼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이면 성경의 첫 장입니다. 거기서 ‘fill’이라는 단어가 22절에서 처음 나오고, ‘replenish’라는 단어가 28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우리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보통은 사전을 참고합니다만, 성경의 단어는 성경이 스스로 사전의 역할을 하는 ‘내장 사전’ 기능을 중시합니다. 세상 사전이 알려주는 뜻을 참고로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어는 하나님의 글(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쓰셨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기가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들을 통해 말을 배우고, 하나 하나 단어의 뜻을 감으로 느껴서 체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말을 배우기 위해 사전을 참고하면서 부모가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른이 사전을 보아 가면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습득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사항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파악하면서 하나님께서 쓰신 단어들의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어린 아기의 언어 습득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그런 중에도 곳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나 표현 이 있으므로, 그러한 상황이 최초로 나올 때부터 세심히 주의해서 하나님께서 그 단어나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시고, 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위의 22절과 28절에서 다같이 ‘채우다’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두 군데에서 다른 단어를 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파란색 단어들입니다). 이럴 때 “왜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하셨는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전에 뒷 부분에 나오는 성경 기록의 용례를 먼저 참고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대로 보아야 나중의 용례로 인한 영향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문장을 자세히 비교해 보겠습니다.   (비교표)   (1)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동사 fill replenish 주어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 (동물) 남자와 여자 (사람) 목적어 the waters in the seas the earth   위의 비교표를 보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의 단서들을 하나씩 검토해 봅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 비교표를 보면 문장 (1)은 주어가 동물이다. 문장 (2)는 주어가 사람이다.   ** 이 비교를 통해 “동물이 채울 때는 ‘fill’, 사람이 채울 때는 ‘replenish’로 구분해서 사용하는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제 사전을 참고해 봅니다.   1.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Ladies and gentlemen, please replenish the hall tonight.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밤 홀을 채워 주십시오.   2.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 [다시 채우다] Susan was always ready‥to replenish the wallets. 수전은 지갑들을 다시 채우기 위해 항상 대기 상태였다.   사전의 의미 ‘1’을 보면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라고 사용 제한이 보입니다. 즉, 사람 또는 동물이 아닌 것이면 ‘채우다’라는 의미로 ‘replenish’를 쓰는 것은 잘못된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황 비교표의 문장 (2)는 사람이니까 ‘replenish’를 쓰면 바른 사용법이고, 그 뜻은 ‘채우다’가 되는군요.   그런데, 상황 비교표의 문장 (1)은 동물이니까 사전에 따르면 역시 ‘replenish’라도 되는데 ‘fill’이 사용되었네요. 처음에 이 단어들을 검토할 때에는 ‘fill’은 별 문제없이 넘어가고 왜 ‘replenish’가 사용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면 ‘relenish’를 쓴다는 것 때문에 문장 (2)는 당연한 사용법이고, 오히려 왜 문장 (1)에서는 ‘replenish’가 아니고 ‘fill’이 사용되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2015-04-27 20:07:23 | 최상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19:26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25 23:06:30 | 최상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2015-04-25 23:06:30 | 최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