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좋은 자료들로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시는 분들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경읽으면서 함께 보기에 적당한 강해설교전집이나 주석서가 있으면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독립침례교회 성도가 볼만한 교리로 강해된 주석서가 어떤것이 있을지요?
2014-03-27 12:40:53 | 오영환
사도행전 13장 20절의 450년에 대하여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는 자기 신분이 노출될까 봐 은밀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에도 오류가 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구절이 있다는 쪽지를 교회 사무원에게 전달하게 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올바른 성경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지 말라고 경고 메시지까지 끝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지적한 킹제임스 성경의 명백한 오류란 다름 아닌 사도행전 13장 20절입니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이 되어 왔지만 뚜렷한 단일 해결책을 찾지 못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41절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선교 여행을 가서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유대인 조상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출현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단 문제가 되는 20절 부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6 이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이르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거할 때에 그들을 높이시며 거기서 그들을 높으신 팔로 데리고 나오시고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며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사 그들의 땅을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20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
16~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한 때부터 사무엘까지의 여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반대자들은 20절의 450년 즉 바울이 재판관들이 다스린 때라고 한 기간이 실제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 즉 그의 통치 제4년까지의 기간이 480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 되는 해 곧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지 사 년이 되는 해 시브 월 즉 둘째 달에 그가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더라(왕상6:1).
간단하게 재판관들 이후의 연대를 계산해 보면, 사울 왕의 통치 40년과 다윗 왕의 통치 40년,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3년을 포함하여 약 83년입니다(나중에 언급할 중첩 기간은 일단 무시한 것임). 여기에다 이집트 탈출 이후부터 재판관들의 통치 시작까지 약 47년의 기간이 있습니다(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땅 정복 기간 7년). 이 두 기간을 합하면 130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 반대자들은 행13:20에 기록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인 450년에 130년을 더하면 580년이 되어야 하는데 왕상6:1은 480년이라고 하므로 바로 이것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왕상6:1의 기간인 480년이 확실히 맞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행13:20에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라고 한 것은 명백하게 틀렸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정도의 연대 계산은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고전적 문제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성경 신자와 불신자가 갈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13:20의 450년에 대하여
자, 그러면 먼저 성경은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이것을 조직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열된 대로 햇수를 계산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 표는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기간을 보여 줍니다.
성경 구절
내용
기간
(년)
이교도 통치
(년)
삿3:8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팔년 동안 섬김
8
8
삿3:11
옷니엘 때에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40
삿3:14
이스라엘 자손이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김
18
18
삿3:30
그 땅에 팔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80
삿4:3
야빈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함
20
20
삿5:31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40
삿6:1
{주}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심
7
7
삿8:28
기드온 시대에 사십 년 동안 그 지역이 평온함
40
삿9:22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함
3
삿10:2
돌라가 이십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3
삿10:3
야일이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2
삿10:8
블레셋과 암몬이 십팔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함
18
18
삿12:7
입다가 육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6
삿12:9
입산이 칠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7
삿12:11
엘론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10
삿12:14
압돈이 팔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8
삿13:1
{주}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심
40
40
삿15:20
삼손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0
삼상4:18
엘리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40
총 햇수
450년
111년
이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구약성경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재판관 시대의 햇수를 정리하여 합산하면 묘하게도 ‘정확히 450년’이 나옵니다(만일 사무엘도 재판관에 넣는다면 물론 그 기간이 더 길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 행13:20의 450년 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450년이 계산되므로 논쟁을 그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상6:1의 480년과 여기의 450년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논증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이제 이 둘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불신자들이 하는 방법: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방법
자, 먼저 45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킹제임스 성경만 행13:20의 기간을 450년이라고 하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성경들도 450년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450년이라는 기간 자체는 그리스어 원어 성경에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성경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19절이나 20절에 450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50년이라는 기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 - 개역성경과 그것의 모체가 된 ASV, ASV의 현대판인 NASB, 그리고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 NIV 등 - 은 공인본문과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생각하여 원래 20절 중간에 있던 450년을 19절의 맨 끝이나 20절의 맨 앞으로 마음대로 옮겨서 다음과 같이 읽히도록 하였습니다.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사 그들의 땅을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은 450년이 걸렸고20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
“19 And when he had destroyed seven nations in the land of Canaan, he distributed their land as an inheritance- ALL OF WHICH TOOK ABOUT 450 YEARS: 20 and after these things he gave them judges until Samuel the prophet.”(NIV 개역성경 등)
즉 이들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 아니라,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한 때부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한 때까지의 기간이 450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이렇게 해야만 행13:19~20과 왕상6:1에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본인들에게도 난제인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한 것입니다. 먼저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원문에는 없는 ‘이 모든 것은’(all of which)이라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택한 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가 아니라 이삭 때부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야만 BC 1896년경의 이삭 출생부터 BC 1444년경의 가나안 땅 분배까지 약 450년이 되기 때문입니다(어셔의 연대기 기준).
하지만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하신 때부터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므로 아브라함부터가 아니라 이삭부터 그들의 조상들을 언급하는 것은 문맥에서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하자면 적어도 여기에 몇 십 년을 더해야 하고 그러면 자기들의 주장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들은 반드시 이삭부터 연대를 세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처럼 성경 자체를 마음대로 변경하고 또 기간을 세는 기점이 될 인물까지 바꾸면서 모순처럼 보이는 성경의 연대들을 억지로 맞추려 하는 것은 일단 옳지 않습니다.
2. 성경 신자들의 방법: 성경을 그대로 두고 450년과 480년을 조화시키는 방법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A) 480년을 실제 햇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의 햇수(years of redemption)로 보는 방법
위의 표에서 보듯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 450년에는 111년 동안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있습니다. 또한 사울의 통치 40년 가운데 얼마는 재판관 시대(사무엘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사무엘의 재판관 통치 기간과 사울의 왕정 통치 기간이 중첩된 때가 있었으며 그 기간이 약 11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의 통치 제4년까지의 기간은 원래 580년인데, 여기서 재판관들의 전체 통치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교도들의 통치 기간 111년을 빼고 사무엘과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중첩되는 12년을 더하면 481년이 됩니다. 이를 근거로 왕상6:1의 480년이 계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록 480년과 481년 사이에 1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햇수 계산에서 반올림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바울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약 450년’이라고 했으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분들 가운데는 중첩 기간을 25년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이 경우 494년이 나오며 이때 480년과의 차이인 14년 역시 ‘약 450년’이라는 구절의 ‘약’(about)이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왕상6:1의 480년을 실제 햇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구속의 햇수(redemption years)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는 대부분의 성경 신자들이 알고 있듯이 490년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상관하시는 때입니다. 그런데 첫 69이레 즉 483년과 마지막 한 이레 7년 사이에는 교회 시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과 상관 있는 기간을 일반적인 기간과 달리 정하실 수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되면 아담까지의 연대기를 계산할 때 왕상6:1의 480년을 580년(혹은 어떤 분은 611년)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통상적으로 알려진 어셔의 연대기 등에서 이집트 탈출 이전의 역사는 약 100~131년씩 위로 밀려나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사실 이 방법은 아주 깔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 성경대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어 많은 성경 신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B) 모세와 여호수아를 재판관으로 보고 행13:20의 450년을 모세로부터 사무엘까지의 통치 기간으로 보는 방법
이것도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 행13:20의 450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입니다.성경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명확히 재판관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정 전에 재판관으로 민족을 통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경우 모세의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의 통치 제4년까지의 480년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중첩 기간과 다윗의 통치 기간 40년, 솔로몬의 3년 등을 빼면 425년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고 이 정도면 ‘약 450년’이라는 표현에 맞는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 경우는 위의 표와 달리 사무엘의 죽음까지를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사무엘 때까지라는 것은 확실치 않은 표현입니다. 사무엘을 포함해야 할지 포함하지 말아야 할지, 포함한다면 사무엘의 어느 때까지를 포함해야 하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C) 450년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숫자들을 단순히 나열해서 더한 숫자이지 실제 햇수는 아니라고 보는 방법
매튜 헨리 등의 성경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성경에 기록된 햇수를 더해서 450년이라고 말했을 뿐이며 이 햇수는 실제로 450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흔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판관들이 다스린 기간을 450년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정확한 연도와 기간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본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그대로 제시하면서 이들의 불순종을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즉 문맥의 흐름을 보았을 때 바울의 의도는 정확히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히 450년이라고 하지 않고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사무엘도 포함해야 할지 제외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다시 말하면 왕상6:1은 분명히 연대기를 염두에 두고 정확한 햇수를 말한 것이고, 반면에 행13:20은 정확한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판관들의 연대가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대략적인 수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화자(話者)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그가 말하는 구체적인 숫자는 정확하게 인용되는 경우도 있고 대략의 수치로 인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왕상6:1과 행13:20을 서로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을 근거로 만든 위의 표에는 사실 재판관들 사이에 중첩되는 기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삿13:1에서 블레셋의 통치 기간은 40년입니다. 삿15:20에서 삼손의 통치 기간은 20년입니다. 그런데 이 40년과 20년은 서로 상관없는 기간이 아니라 블레셋의 40년 통치 기간 안에 삼손의 통치 기간 20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재판관들의 시대가 중첩되었음을 보여 주는 분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에서 입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것의 고을들과 아로엘과 그것의 고을들과 아르논 지경에 있는 모든 도시에 거한 지 삼백 년이 되었거늘 그런즉 너희가 어찌하여 그것들을 그 기간에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삿11:26)
즉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면서 헤스본을 정복한 이후로 입다까지 300년이 있었습니다. 이 300년은 왕상6:1의 480년이 실제 기간이라야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재판관들의 중첩 기간과 입다의 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행13:20의 ‘약 450년’에 해당하는 실제 햇수는 330~340년이 됩니다.
그래서 어셔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대기 학자들은 왕상6:1에 근거하여 이집트 탈출은 BC 1491년에 이루어졌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BC 1012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프레임 안에서 보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은 BC 1400년경부터 마지막 재판관인 사무엘이 죽은 BC 1060년경까지 약 341년이 됩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 외에도 문헌을 찾아보면 킹제임스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더 있습니다.
이 문제를 보면서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13:20의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라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성경 신자들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만났을 때 반드시 성경을 그대로 두고 해당 구절들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처럼 자기 생각과 성경의 햇수가 다른 경우 본문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법 행위입니다.
이런 범법 행위는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면 다음은 유명한 예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64
앞서 살펴본 대로 킹제임스 성경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경이 사도행전 13장 20절의 기간을 450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약 450년’이라는 기록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을 들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에 흠집을 내 보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꼬리 잘린 여우’의 심리와 같습니다. 이것은 사냥꾼의 덫에 꼬리가 걸려 잘린 여우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가리기 위해 동료 여우들에게 꼬리가 없으므로 편리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꼬리를 잘라 스스로 장애를 입도록 꾀었다는 우화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성경에 있는 오류가 킹제임스 성경에도 있으니 킹제임스 성경 역시 인간에 의해 개정될 수 있는 불완전한 번역본에 불과하고 완전한 성경은 있지도 않으며 필요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탁월함에 대한 무수한 증거나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 등 변개된 성경들에서 수없이 드러나는 심각한 오류와 신학적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교회들의 타락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작은 허점에 근거해 붕괴시키고자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그런 허점은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보실지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바른 성경을 통한 믿음 안에서 바르게 행하는, 지혜와 분별력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014-03-26 17:28:18 | 관리자
가끔 게시판에 질문만 올리다가 오늘은 작은 간증을 해봅니다
제가 처음 킹제임스흠정역을 알게된건 2003년인가? 후배에게 흠정역을 선물 받고 나서 입니다.
지금 이싸이트도 그때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였을때 일거에요. 그당시에 흠정역의 우수함을 알고 주변에
몇명에게 선물을 해준 적이 있으며, 현재 제 아내도 그 당시에 흠정역을 선물해줬던 사람중에 한사람이였구요.
그당시에 아내와 저는 결혼전이였구,아내와 저는 명일동의 ㅇㅇ교회라는 큰교회에서 저는 성가대로 아내는
성가대 반주자로 봉사를 하던때입니다. 또한 청년부 리더로 문화선교학교 봉사로 섬기고 있었기에
목사님 하고도 교류가 많았었던때고,같은 아파트 같은동 위 아래 살고 손자한테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어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목사님에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물어봤는데, 목사님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때에 저는 잘모르는 어떤 한 성도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었는데, 목사님들과 성도들에게 " 지금 보는 성경은 다 잘못됐구 당회장 목사님 설교도 다
잘못됐다고"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다 교회에서 출교 되는 일이 발생했었습니다. 이런일로 인하여 지금의 제 아내는
성경을 펴보기도 전에 저를 경계하는 일이 벌어진거죠 ㅎㅎ 그래서 저는 그냥 사람들과의 관계는 끊고 거의 많은
시간을 혼자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는걸 좋아하게 됐죠 ,그로인해 지식도 많이 얻었고
그래도 아내에게는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의 차이점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것들에 대해 얘기를
해줬는데 , 듣는둥 마는둥 한게 이제 10년정도 세월이 지났네요,
이제 아이들도 10살 ,7살이 되어 올바른 성경지식을 알려야 하기에 더욱더 흠정역에 대해 강론을 하는데 그때마다
아내가 하는말이 " 당신이 하는말이 틀린건 아니다 ! 하지만 지식만 너무 자라고 사람과 대화하는 법은 전혀 모른다!
내용이 맞아도 대화가 하기 싫은데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지식과 행동이 균형이 전혀 맞지 않으니 이제 좀
사람들과 소통하고 섬김이 무엇인지를 좀 해봤으면 좋을거 같다" 라고 하더군요
평소 같으면, 역시 사람이 자기집에서는 인정을 못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텐데 , 이날은 이상하게 아내의 말이
마치 하나님의 대언의 말씀처럼 들리더군요...그래서 저는 그 다음날부터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계속 찾아보고 커피라도 탄다거나 안쓰는 좋은 물건들 같은거는 나누어주기도 하고,,,
몇일 그렇게 했더니 아내가 오히려 의심을 하더군요...남편이 갑자기 바뀌고 잘해주면 바람났나 의심해보라는 말들이
자꾸 생각난다는 겁니다.
몇일 동안의 제 변화로 인해 사실 바뀐거는 전혀 없었는데,,,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바뀌려고 하는것 자체가
다른사람을 바뀌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것이기에 " 결과가 없으면 그만두려고 햇었죠^^
그런데 저도 모르게 섬김을 하는중에 섬김의 즐거움을 얻게 되어 버려서 멈출수가 없게 되어 버린거에요
주는것이 받는거 보다 더 복되다는게 이런것 인건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이제는 결과와 관계없이 이런 삶이
기쁨을 얻을수 있는 삶이란걸 경험하게 되어 계속 이렇게 지내게 됐네요 .
그런데 저번달에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일이 일어 난겁니다
별다른 일이 없이 2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 제 가정은 물론 제 주변이 완전히 변화가 되는
기적이 일어 난거에요
아내는 제 변화된 모습을 보고 흠정역 성경을 보게되구 (심지어 강해 설교 까지) 주변에서도 흠정역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져서 하루는 몇가정의 집으로 초대되서 흠정역 성경에 관해 몇시간 교제하는 기회를 가질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가정은 흠정역 성경을 필요로 하는데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 연락을 했더니 김재근 목사님께서
도와 주셔서 흠정역 400주년 5권을 받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몇권을 몇가정에 드리면서 얼마나 감사가 넘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온지 3년만에 처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선물할수 있는 가정이 생긴겁니다 ㅎㅎ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앞으로 더 좋은결과가 있을줄 믿습니다.
때마침 요즘 정동수목사님의 히브리서 강해를 듣고 있는중, 6장 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원리를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라는 말씀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화의 필요성에 대해 중요성을 느끼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저 같은 고민이 있으신분이 있으심 참고 하시라고 글을 올립니다.
저도 늘 킵 바이블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서 감사하구요. 여러 지체님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2014-03-25 16:52:26 | 안석
앞으로 종교영화는 계속 이런 변개와 왜곡으로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아래 글은 퍼온글 입니다.영화 son of God의 속임수 이 영화는 The Bible이라는 미니시리즈 중에서 신약 예수님의 사역 부분을 편집하여 영화화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마켓에서 이 DVD를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화 예고편에서 예수 역할을 맡은 자가 '세상을 바꾸자'라는 말을 한 것이 수상해서 이 DVD를 사서 처음 구약부분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성경 속 예수님은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하셨지 단 한 번도 ‘세상을 바꾸자!“ 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미니시리즈에서 구약을 통해서 보여 지는 하나님은 영화 ‘노아’에서 묘사한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신처럼 보입니다. 신이 정해 놓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하여 인간은 고통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런 혹독한 시련을 주는 신에게 마지못해 억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등장할 때는 처음 등장부분이 죽음의 사신들이 서 있는 것처럼 어둡고 음산하게 묘사됩니다.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잘 훈련된 무사들처럼 칼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거의 무협지 수준입니다. 가장 눈에 거슬렸던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일단 구약에 나온 성경 인물들은 전부 지저분하고 우중충하며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들로 꾸며 놓았는데 특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늙고 자비심이 없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에 반해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젊고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자로 등장하여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질투의 눈으로 쳐다보는 얼굴이 얼마나 추하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결국 사라의 질투 때문에 쫓겨나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매우 마음 아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원래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이므로 모든 것이 상속되어야 하는데 사라의 질투심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을 위한 약속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던 모세는 약간 정신이 나간 광인처럼 몰골도 지저분하고 이상한 표정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영화 ‘십계’에서 보여주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신비스런 능력을 부여받은 미친사람이 갑자기 등장하여 헛소리를 해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처럼 보이게 합니다. 삼손에서도 삼손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을 죽이고 난 후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냐는 반문을 함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길 원하시고 좋아하는 잔인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의 모습도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고 모든 성경 속 인물들이 비성경적으로 묘사됩니다. 드라마 전체를 통해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게 나오는 여자는 하갈하고 젊은 나이의 동정녀 마리아입니다. ( 중년의 마리아 역을 맡은 사람은 이 미니시리즈 제작자 부인입니다.) 이 DVD를 보면서 이들이 이것을 제작한 목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슬람 종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게 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유대민족들에게 더욱 반발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을 갖을 수 있습니다. 또한 카톨릭 쪽에서는 역시 예수 보다 어머니 마리아가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예수의 모습이 마치 고난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나약한 아들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시작부터 이기적이고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예수는 마리아가 특별히 신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서 마리아 때문에 태어난 선지자와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 유도하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고 사랑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죄악에 대해서는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전능자 하나님은 이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가 당하는 육체적 고통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여서 영화 속에 뿌려 놓은 악한 의도들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 속에 늘 따라다니는 여자가 있다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얼마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수 년 전 베스트 셀러였던 다빈치 코드나 다른 반기독교 서적에서 말해 오던 대로 예수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통해 예수가 낳은 자식이 있다는 거짓 생각을 은밀하게 믿게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예수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 했다라고 보거나 아니면 그 신의 아들의 후손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믿음을 유도시켜서 나중에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올바른 성경적 분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한 번 보는 건데 어떠냐고 생각하겠지만 앞으로 미래에 세계를 위기에서 구할 어떤 인물이 등장하여 ‘세상을 바꿉시다!’ 라고 외친다면 이 영화를 본 믿음이 적은 자들은 영화 속 예수의 모습과 미래의 그 어떤 인물을 동일시 할 수 있을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잘못된 영화들로 인하여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세상에 심판 내리기를 좋아하는 신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을 먹는 모습이 많이 비춰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영화로 인해 잘못된 인식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어떤 인물이 미래에 등장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면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새로운 신을 설정하여 그 신을 따르고 믿자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들이 믿고 따라야 할 신은 ‘예수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나쁜 신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여 어떤 종교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예수 없이도 선하게 살면 다 구원해주는 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통합에 반대하는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고 그들은 비난 받는 것 마땅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son of God'영화를 보실 분들은 이 영화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것인지를 분명히 살펴봐야 합니다. 결코 성경 속 예수님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셔서 주변에 영화를 본 자들에게 분별하여 바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출처 : 회복교회 / 향목 http://m.cafe.daum.net/aspire7/9z5w/9522?q=%EC%98%81%ED%99%94%20son%20of%20&
2014-03-25 11:06:58 | 허광무
어느 분이 사랑침례교회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자살소식을 듣고...마음이 복잡합니다.>라는 글을 올려주셨는데
내용이 크리스천의 자살 문제라 중요하므로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861
샬롬
패스터
2014-03-24 15:20:5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 바로 보기> 강해를 소개합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525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43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53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Study to sho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
성경에는 바른 해석을 위해 반드시 나누어서 보아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이 여럿 있습니다.
1. 유대인, 이방인, 교회2.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s, 구약, 신약) 3.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4.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5. 여러 가지 심판6. 율법과 은혜7. 구원과 보상(성화) 등
이런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이 뒤틀어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서울의 '한마음 미션'에서 목요일마다 2시간씩 <성경 바로 보기>라는 제목의 성경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려면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행인도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보석 대부분은 땅을 깊이 파고 광석을 캐낸 뒤 정제해야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보석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땅을 깊이 파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보석으로 부자가 되려면 깊이 파야 한다.”(스펄전).
그래서 말씀과 교리를 공부하고 연구하여 그것으로 남을 섬기려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딤전5:17).열심을 다해 말씀 연구에 전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딤전4:16).
현재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성경 해석상의 가장 큰 문제는 각 성경 본문의 수신자와 시대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성경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다음은 지난주에 어떤 자매님이 제게 보낸 이메일입니다.
------------
안녕하세요. 목사님. 일전에 메일을 드렸었던 OOO입니다.
킵바이블에 내용을 올릴까 고민했었는데 아직 그러기엔 너무 많이 부족한지라 목사님을 한 번 더 귀찮게 하기로 하고 글을 보냅니다.
바른 성경을 보며 올바로 성경 해석을 하기 위해 집중하는 사이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충돌과 모순을 느꼈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어 그저 막막한 가운데 은둔 아닌 은둔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슈를 만들어 목사님과 대립할 만큼 제가 확고히 아는 상태도 아니고 자칫 경솔히 굴어 목사님께 찍히기라도(^*^) 하면 그나마 지체로서 섬기던 지역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지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에스겔 40~48장의 성전을 언급할 계기가 생겼고 그것이 앞으로 천년왕국에 세워질 왕국임을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목사님은 그건 그냥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며 실제로 세워지는 왕국이 아니고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시더군요.
아홉 장에 걸쳐 기록된 에스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시는 목사님과 성경에 있는 대로 읽고 그대로 해석하는 게 왜 틀렸는지를 묻는 저 사이에서 이견을 좁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문자대로 해석하는 이단을 경계하라는 권고(?) 혹은 충고(?)를 주시면서 자기는 세대주의적 해석을 취하지 않는 ‘개혁주의자’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이후로 서너 번의 설교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은 장로교 개혁주의를 따르는 개혁주의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상하게도 제 영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우울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왜 난 이렇게 답답한 걸까…내가 미련해서 지혜롭지 못한 결과일까…
고민하다 결국 성경 공부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어서 나왔습니다.
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결론을 내는 중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석하지 않으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제게 왜 안 오느냐고 물으실 겁니다.뭐라고 답해야 할지…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분명 목사님은 저를 불순한 성도로 이미 경계 대상으로 삼으신 것 같은데 마땅한 이유 없이 참석 안 하면 골이 더 깊어지는 건 아닐지 고민이 됩니다.
좀 도와주세요.
시간 내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위의 자매님이 당하는 고통은 바로 지금 이 시간 많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목사나 교회나 교단이 어떤 특정 신학 체계를 만든 뒤 성경을 그 틀에서만 보려다 보니 이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성도들이 있는 그대로 성경을 쉽고 바르게 이해하게 하려고 <성경 바로 보기> 강해를 마련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롬3:4)
칼빈이든 루터든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을 가르치면 그 가르침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셨으나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비유 해석(영해)으로 풀어 위의 자매님처럼 순진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천지, 안상홍 증인회,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다 이런 오류를 범하였고 정통 교회라고 하는 곳들도 성경의 많은 부분을 위의 목사처럼 해석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방황하도록 이끕니다.
앞으로 <성경 바로 보기>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존귀함을 성도들 스스로 깨달아 굽어진 것이 바르게 펴지고 진리 안에 참 평안함을 체험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 강해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한마음 미션'의 모든 지체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만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7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 {주}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주}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9 {주}의 두려움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전적으로 의로우니 10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11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시19:7-11).
1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들이 꿀보다 단 경험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3-24 14:33:47 | 관리자
십계명은 열 가지 명령(출 20:3~17)으로, 데칼로그스(Decalogues)라고 하는데, 이 말은 10을 뜻하는 그리스말(헬라어) '데카'와 말을 뜻하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로서 유대인들은 이것을 '열 가지 말씀'으로 부릅니다. 어떤 이들은 십계명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으로 은혜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십계명의 모든 조항은 첫 사람 아담부터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양심에 새겨진 도덕 법규'입니다. 넷째 명령인 안식일의 경우, 신약 성도들이 유대인들과는 달리 토요일을 강제적인 안식일로 지키지는 않지만 한 주에 하루를 거룩히 구분하고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되새긴다는 원리로 지금과 동일한 것입니다. -에스라 성경사전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이 구분한 열 가지로 되어 있으나 천주교에서는 다르게 변형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십계명
천주교 십계명
1. 다른 신을 두지 말라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우상을 섬기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지키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5. 부모에게 순종하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6. 살인하지 말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7. 도둑질을 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천주교는 성인 숭배, 유품 숭배를 비롯해 갖가지 우상숭배의 전통들을 가지고 있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 등을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하고 있는 입장이라 둘째 명령을 없애고 대신 열째 명령을 둘로 나누어 아홉째와 열째 계명으로 조작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명백히 잘못된 종교입니다.
2014-03-24 09:43:1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공지한 대로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45
이 소책자는 김재근 목사님과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홍보 위원회를 결성하여
매달 모으는 돈으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홍보 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개역성경분석> 책자(10,000부 이상)와 <킹제임스 성경 팸플릿>(20,000장 이상)을 만들어 주셔서 지금까지 아주 유용하게 홍보와 광고용으로 잘 사용해 왔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0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30
이번에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소책자를 내면서
홍보 위원회의 김재근 목사님과 여러 형제/자매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소책자가 필요한 분들은 order@KeepBible.com으로 주문해 주시면 보내겠습니다.
이메일 주문만 받습니다.
10부 이상 받아서 주변 분들에게 나누어 주실 분들만
성함, 주소, 핸드폰 번호를 명기하여 이메일로 신청하기 바랍니다.
<개역성경분석> 소책자나 성경 팸플릿이 필요하면 같이 주문하셔도 됩니다.
(국내 주문만 배송하며 배송비는 무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3-14 15:42: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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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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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4 15:42:13 | 관리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특히 평소 알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도 대상자인 상대는 지인에게 매몰차게 거부할 수 없어 나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핑계의 내용은 보통 자신이 처한 환경에 관한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은 먹고살기도 바쁜데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거나 요즘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라 조금 한가해 지면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는 말들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등장하는 갈보리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도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극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육체의 파멸 즉 인생의 종말이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창조된 생명체는 그 생명의 연속성 안에서만 생각하고 활동하며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단절 곧 육체의 파멸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마침표 앞에 생명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최고의 공포 앞에 벌벌 떨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야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이야말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겠지만 어쩌면 이건 생각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미담은 쉽게 증폭되기 마련이고 이런 경우는 그 외에 끝끝내 복음을 거부하고 죽어갔던 다수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말 그대로 예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죽어가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복음전도자는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오히려 건강할 때보다 마음이 더 딱딱하게 굳어가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옆에 자리를 잡은 두 범죄자도 이런 죽음을 앞둔 보통 사람의 마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마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막15:32)
성경에는 분명히 단수가 아닌 복수로 두 범죄자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단순히 죽음에 다다르는 고통과 공포만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구원의 길로 돌이켜 회개하고 회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엄청난 기적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 거부할 수 없는 표징이 어이없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조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눅23: 35~37)
당시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대항하거나 사형을 받아야 하는 중범죄자들에게 행해진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갈보리(골고다) 두 범죄자의 죄목은 강도였습니다(마27:44). 아마도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범죄자라면 살인을 저지른 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거칠었고 정상적인 부부간의 애정이나 가족 안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화목함과는 거리가 먼 각박한 인생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더 많은 삶의 날수를 누릴 수 있음에도 이들은 이내 결박되고 그 죄목은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이 없이 모멸과 저주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방울의 긍휼도 허락되지 않는 이런 처절한 죽음에 뜻밖에 유일한 위안거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로 여겨졌던 예수님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의 성경 기록이 성취되기 위함이었습니다.(사53:12, 막15:28) 어쨌든 강도들의 입장에선 이들에게 집중될 것만 같았던 조롱과 비난의 화살이 모두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함께 죽어가는 죄 없는 죄수를 동정하게 될까요? 성경은 전혀 반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비열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간악한 두 범죄자는 자신들의 죽음 앞에 놓인 예상치 못한 마지막 오락을 놓치지 않고 즐기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사들과 함께 동일한 대상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이 오롯이 받아야 할 비난을 피하고 그 순간만은 죽어가는 범죄자의 굴레를 벗고 자유인들과 묘한 일체감을 즐기며 추악한 위선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
요즘 들어 특히 성경에 기록된 선명한 복음, 즉 예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명확히 제시하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그런 현상은 이전보다 점점 더 가중됩니다. 갈보리(골고다)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못 박힌 강도들처럼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답도 대책도 없는 현대인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공멸을 기다리는 자포자기의 태도입니다. 마치 이솝우화의 등장하는 덫에 의해 꼬리 잘린 여우가 정상적인 다른 여우에게 꼬리 자르기를 부추기는 심리나 게으름에 시험공부를 못한 학생이 시험문제가 몹시 어렵게 출제되어 모두가 시험을 망치기 바라는 마음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갈보리에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나 못 박힌 두 범죄자는 고작 몇십 년의 차이를 두고 사망에 삼킬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누가 형편이 더 나을 것이 없는 다 같은 공멸할 무리일 뿐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정답을 모른 채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시는 분, 그들을 파멸의 문으로 밀어 넣을 사망을 곧 정복하실 분께 마음껏 조롱과 비난을 안기고 있습니다. 실상 자신들의 참모습은 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발아래 놓인 먼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그것은 어차피 누구든 정답을 모르니 같이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자는 인간의 잠재의식 깊숙이 은밀하게 존재하는 공멸의 심리와 결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독선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열심히 믿다 보면 어떤 신앙으로나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라고 외치기만 하면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은 끝이라는 해괴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결코 타협하거나 섞일 수 없습니다.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문제는 유일한 한 가지 정답만을 맞추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틀린 답만 골라 놓고도 자신은 정성을 들여 공부했으니 그 노력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역시 정답만 피해 갔으면서도 시험에 임한 태도가 진지하고 모범적이기 때문에 정답을 맞히는 것과 상관없이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무모한 믿음을 밀어붙인다면 시험공부를 전혀 안 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험지를 찢어 버리고 시험장을 뛰쳐나간 학생과 성적면에서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포악한 삶을 살든 겉으로는 선하게 살지만,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아 보려는 종교생활로 진리를 왜곡시켜 스스로 구원받을 기회를 놓아 버리든 맞이할 결과는 똑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갈보리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치리자들과 로마 군사들 모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보다 월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이 아무리 십자가형벌을 당하는 강도들보다 낫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진리를 모르고 함께 망하는 똑같은 파멸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안타까워하며 따라온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자유자들과 십자가에 매달린 두 범죄자가 포함된 파멸의 무리에서 예상 밖의 의로운 이탈자가 탄생하게 됩니다.(눅23:39~41).
앞서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 좌우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서만 한 강도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많은 안티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마치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듯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된 성경, 특히 사복음서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마치 파노라마 카메라가 촬영하듯이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오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바른 관점으로 못 박힌 한 범죄자의 회심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두 범죄자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은 분량 기록되어 있고 기록자 누가가 시간의 순서, 즉 차례대로 기록했다는 기록 원칙을 분명히 밝힌(눅1:3) 누가복음 23장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결론은 처음에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에는 분명히 두 범죄자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욕하다가(마27:44, 막15:32)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한순간에 둘 중 한 범죄자가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포악한 강도질로 인해 십자가형벌로 삶을 마무리하게 된 두 범죄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보통 백성들보다 훨씬 못한 사회적 배려를 받고 성장했을지 모릅니다. 가진 것도 없고 가정 안에서 제대로 된 양육도 받지 못하며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삶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구어나갈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두 강도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으로 당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한 소식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여러 번 소문으로 전해 듣고 혹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을 먼발치에서나마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군중들 속에서 직접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박하고 거칠고 음침한 삶을 영위하던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과는 영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요,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스런 노랫가락 정도로 여겨졌을 겁니다.
이러한 심리의 상태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과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를 뿐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치리자요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견됩니다. 다시 태어남의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동문서답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평소 강도질을 일삼으며 스치듯 접한 예수님의 소문과 가르침에 전혀 반응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두 강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각자가 처한 사회적 신분과 상황만 다를 뿐 진리에 응답하지 못하는 잠자는 지각의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같은 것입니다.
사탄이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이런 사람의 형편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것은 마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과도 같이 자연스럽게 자연인인 인간들에게 계승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해 나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지만 정작 가장 시급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고 사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모습은 박물관에 전시될 이미 소멸한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전히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시민의 모습입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형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강도들이 처한 진정한 위기는 처참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세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살던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나 혹은 그저 잊어버리고 사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정답을 모르고 속절없이 죽어가던 두 명의 범죄자 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은 강도는 어떻게 이런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누가복음 23장 32~46절의 기록에 해당하는 사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시간인 세시 즉 오전 9시에 갈보리(골고다)에서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며(막15:25) 예수님께서 모든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눅23:34)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는 일이 비교적 짧은 시간의 범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조롱하며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둘 다 같은 말로 예수님을 욕하는 일이 있은 후 어느 순간엔가 한 범죄자는 회심했습니다. 곧이어 회심자의 청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낙원에서 재회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여섯 시쯤 즉 정오쯤 되었습니다(눅23:43~44).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해면에 적신 식초를 드시고 그 후에 큰 소리를 외치시고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숨을 거두시는 것이 사복음서를 서로 대조해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갈보리(골고다)에서 발생한 시간 순서상의 일들입니다. 이를 볼 때 갈보리 십자가에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고 둘 다 예수님을 욕하다 후에 한 강도가 회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세시(오전 9시)부터 여섯 시(정오)까지 총 세 시간 정도입니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지만 한때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눈물을 흘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가 얼마나 불성실하게 성경을 참고하고 감독과 대본 작가 마음대로 성경 기록을 왜곡했는지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회심한 강도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점은 갈보리에 예수님과 두 범죄자가 못 박힌 후부터 둘 중 한 범죄자가 회심하고 구원받기 전까지 사복음서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기록 두 가지가 누가복음 23장에만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눅23:34).
이 기도는 시간상으로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기 전에 행해집니다(눅23:34). 사복음서를 비교하면 두 범죄자가 함께 예수님을 욕한 것은 군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기한 후의 일입니다. 이를 통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욕을 했을 정도로 두 강도 모두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강퍅해 질대로 강퍅해진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다는 말씀처럼(약5:16) 예수님의 기도가 구원받은 범죄자의 회심에 효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갈보리의 핍박자들 중 적어도 예수님께 낙원을 약속받으며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회심자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회심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좀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화자(話者)의 복잡하게 변화하는 심리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연인에게 “사랑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도 그 마음의 복잡한 심리를 따라 분류하자면 100가지 경우는 족히 넘을 겁니다. 성경 기록은 두 강도가 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하지만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두 강도의 마음 상태는 이미 그때부터 크게 차이가 나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설명이 기록된 마태복음 13장과 동일한 장면이 기록된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길가와 돌밭 혹은 바위와 가시나무들 사이와 좋은 땅 등의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좋은 땅을 제외한 3가지 종류의 마음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씨앗이 떨어져 생장하지 못하는 이유나 상황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의 형편은 제각각이고 복잡다단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분명 한순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속에 찌들어 딱딱해진 마음이 허물어지고 단단한 마음의 빗장이 열려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게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구원받은 경우가 아니라 장성하여 극히 세속적인 삶을 오랫동안 지속하던 사람의 회심은 복음의 씨앗이 생장할 수 없는 딱딱한 마음 밭의 돌멩이와 가시를 걷어내고 쟁기질을 해서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버린 밭의 토양을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범죄자는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범죄자와 비교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삶 속에서 이미 뭔가 큰 차이가 존재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도 누군가 전부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참된 믿음을 지속해서 가르쳐 주었을지 모릅니다. 또 어쩌면 그는 세상의 비정함과 시름에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복음을 전하는 곳을 가끔이라도 기웃거리며 단순한 호기심에라도 그 가르침을 종종 듣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회심한 범죄자의 고백처럼 거친 삶을 살고 똑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정당하게 십자가형벌에 처한 것은 두 강도 모두 같습니다(눅23:41). 그러나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두 강도의 마음 밭의 상태는 이미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심지어 못 박힌 후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지만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한 사람은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복음 앞에 허물어지지 않는 단단한 벽이었고 한 사람은 마치 균열이 일어나며 작은 틈으로 물이 졸졸 새어나가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강둑처럼 복음 앞에 무너질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혼이 구원받는 일은 쉽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실이나 노력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으로라도 진리의 말씀에 다가가려는 자세가 평소에 갖추어져 있거나 그 굳어진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회심의 기회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실적 위주의 스피드한 전도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거짓 결신자만 양산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쏟는 미디어 사역을 통해 바로바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역은 시나브로 열매 맺고 진리로 돌아설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 23장에만 나오는 범죄자의 십자가상 회심사건 이전에 등장하는 특별한 또 하나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처음에 예수님을 욕했던 범죄자 중 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또다시 맹렬한 어조로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입니다(눅23: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
이 부분은 분명히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던 장면과(마27:44, 막15:32) 다른 장면입니다. 앞의 두 기록은 두 범죄자가 함께 욕을 했고 누가복음 23장 39절은 한 범죄자가 욕을 하고 곧바로 회심한 범죄자의 반박이 이어지기에 강도들이 같은 말로 예수님을 모욕한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봐야 옳습니다.
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눅23:40~14)
구원받은 범죄자의 마음의 변화가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 성경 기록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회심한 범죄자가 정확히 어느 순간 구원받았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성경에 지나친 상상력을 가미해야 하기에 다소 위험하고 불필요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 가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줄기차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모습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정당한 판결로 삶의 종언이 확정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핍박자들과 합세하여 의로우신 분을 욕하고 조롱하며 그것을 삶의 마지막에 주어진 위안인 듯 착각했던 자신의 지독한 위선을 또다시 예수님을 비난하는 다른 범죄자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남의 것을 빼앗고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던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올랐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도 의연하게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는 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앞에 압도되었을 것이며 점점 몸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의 생명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있음을 직감할 때쯤 그 모든 요소들이 합력하여 위대한 복음의 권능이 그의 영과 혼을 강타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즉 다시 태어남은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가 설치해 놓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귀의 자녀로 오랜 세월 살던 딱딱한 마음의 소유자가 변화되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까지는 여러 요소가 합력하여야 하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맑은 정신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지각(understanding)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지식을 축적하고 IQ 등 두뇌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박사나 지식인들 중에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44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이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 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45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24:44~45)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그들의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 같이 걷지 말라. 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7~18)
제아무리 다양한 지식을 축적한 지식인이라도 타락한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본 모습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지각이 열리지 않았고 어두워져 있는 상태라고 명확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미담과 달리 지각이 어두워진 상태로 생사를 넘나들며 정신마저 혼미한 중환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할 가능성은 성경을 보더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적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의 마음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뉘라서 한 사람이 구원받고 못 받고를 확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퇴화하고 어두워진 지각이 열릴 가능성이 그나마도 많은 맑은 정신 상태에 놓인 사람이 구원받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바른 원칙을 제시하는 차원으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회심한 범죄자도 앞서 살펴본 대로 여섯 시쯤(정오)이 되기 전에 구원받았으며(눅23:43~44) 이후에 예수님께서 차차로 기진하시며 숨을 거두신 것을 고려하면 회심자 또한 극심한 십자가형벌의 고통 중이지만 아직 지각을 발휘할 수 있는 또렷한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육체와 이성이 생생하게 또렷한 상태로 살아 움직일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마음대로 세상을 즐기다 죽어가는 침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악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죽을 날과 시를 모르는 인간의 형편과 더불어 생각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죽음의 침상에서 구원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런 미담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마귀가 사람들의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서 쳐 놓은 함정에 불과합니다. 건강할 때, 이성이 생생하게 살아서 작동할 때, 누구에게나 바로 그때가 구원받을 수 있는 적기임이 분명합니다.
파멸이 다가오는 순간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마지막 고통은 분명히 구원받는 것에 촉매로 작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 그가 들어 마음에 축적하고 있던 복음이 생각나고 바로 옆에서 죽음의 고통 중에도 자신을 조롱하는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며 더불어 끝까지 악한 모습으로 위선의 오락을 맛보기 위해 예수님을 조롱하는 또 다른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잠자던 지각을 깨우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는 지각이 열린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죄인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눅23:40~41). 이미 그의 고백 안에는 복음이 진하게 들어있습니다.
이제 회심한 강도의 저 겸손하고도 위대한 청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눅23:42)
그는 이미 주님을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개역과 개역 개정 성경은 회심자의 고백인 ‘주여’를 ‘예수여’라고 표기하며 구원받은 강도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회심자의 고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욕하던 그의 모습은 엄청난 반전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범죄자는 이 말을 고백하기 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이미 구원받았고 43절에 예수님께서 낙원에 대한 약속을 말로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도 낙원에서 예수님과의 재회가 확정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숨 쉴 힘조차 떨어져 가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이미 구원받은 강도에게 지극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는 범죄자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고 십자가형 집행을 면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감히 사람이 죽은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대기 장소요 지금은 지하 세계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 하늘로 옮겨진(고후12:1~4, 엡 4:8~10) 낙원을 약속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이미 죽어가는 범죄자에게 낙원을 약속할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계1:18)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오직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소유하신 분이고 멸망하는 죄인에게 영존하는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며 온 우주에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 중 한 명이 구원받은 과정을 성경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죄인 즉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죄인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죄인으로 태어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절반으로 쪼개져도 죄인이 구원받을 수 없고 광대한 우주가 종이쪽처럼 휘말려도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먼지만큼도 이바지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그만큼 힘들고 창조된 존재가 창조된 존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주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고 확실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는 순간 구원의 열차에 올라타겠다는 소망은 엄격히 말해 망상에 불과합니다.
죽은 이후에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고작 몇십 년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노력하며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병들어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는 것 외에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 즉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할 수 없는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직 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죄 없는 피로만 속죄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확고하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구원받을 기회는 항상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릴 때 또한 장성한 이후에라도 모든 지각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을 때가 구원받기 훨씬 수월합니다. 구원받으려는 사람이나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이 이르게 하려는 복음전도자나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갈보리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은 세상의 시작부터 끝날까지 태어나서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딱 두 종류로 정확하게 구분되고 분리될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하고 파멸 곧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 호수에 던져질 사람들입니다.
우주가 쪼개지는 것보다 더한 반전을 경험하며 파멸의 낭떠러지 맨 끝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구원받은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그는 죄악에 찌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교훈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한사람이라도 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아 삶의 마지막 날 이루어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세상 그 어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예로운 약속의 수혜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 9:27)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2014-03-13 14:38:08 | 김대용
많은 이들이 왜 성경 신자들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바른 성경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성경 보존과 관련된 여러 가지 복잡한 주제들에 관해 논해야 하므로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최대한 명쾌하고 단순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잠22:28).
이 말씀에서 지계표(landmark)란 측량사가 사용하는 용어로서 보통은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어떤 물건을 뜻한다. 지계표 즉 랜드마크는 멀리서 보고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될 만한 대형 건물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구별하게 하는 표시를 뜻하기도 하며 항해자를 위해 사용되는 육상 경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측량에서 랜드마크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마음대로 랜드마크를 치우거나 변경하는 것은 여러 지역에서 불법이다.기독교는 그 자체에 권위를 부여하고 믿음과 실행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한 가지 문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전서(The Holy Bible)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기초가 성경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라는 이 랜드마크가 확실한지 혹은 변경되지는 않았는지 늘 신경 써야 한다.지난 2,00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며 성경을 믿는 모든 교회들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항상 공통적으로 수용해 온 그리스어 본문과 히브리어 본문, 그리고 이것들에서 번역된 역본들만을 사용해 왔다. 이런 본문은 과거의 거의 모든 교회가 받아들였기에 보통 수용 본문(Received Text)이라 불리기도 하며 또 공통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의 공인(共認) 본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지난 20세기 동안 성경 신자들은 자기들 시대에 존재하던 그리스어/히브리어 사본들을 모았는데 이것들의 99%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처럼 절대다수를 이루는 다수 사본들이 바로 이 공인 본문의 기초가 되었다.1604년에 영국의 제임스 왕(제임스 1세)은 햄튼 코트 회의에서 제네바 성경, 비숍 성경 등 기존 성경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보통 사람들의 손에 공통 성경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해서 출간할 것을 허락하였고, 그 결과로 1611년 5월 2일에 태어난 것이 바로 왕의 권위를 부여받은 킹제임스 성경이다. 제임스 왕은 영국 교회에서 50여 명의 당대 최고의 그리스어/히브리어 학자들을 선정하여 번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사도 시대부터 그 당시까지 성경대로 믿는 모든 성도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해 온 그리스어/히브리어 사본들과 거기에서 이미 번역된 여러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검토하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들이 만들어 낸 킹제임스 성경은 1611년에 반포된 이후로 지난 400년 동안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가장 많이 읽히며 가장 널리 보급된 보편적 성경이 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이전에도 공인 본문에 근거하여 번역된 여러 종류의 영어 성경이 존재하였고 또 성경 출간 빈도도 높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이후로는 그밖에 다른 영어 성경의 번역 자체가 모두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을 읽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 성경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성경이다.”라는 확신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광고나 홍보도 없이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권위역 성경>(Authorized Version)으로 온 세상에 자유로운 행로를 가지며 뻗어 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오대양 육대주를 복음화시켰으며 그 이후에 나온 여러 나라의 수많은 성경 번역의 기초가 되었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의 근간이 되었다.성경의 내용 번역은 물론 신학 용어 번역에 있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기본 역본이 없다면 상당한 혼돈과 분파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킹제임스 역본이라는 걸출한 역본이 있어서 1611년 이래 수백 년 동안 성경 역본과 신학의 기본 용어를 제공하는, 만인이 수긍하고 공인하는 기본 자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는바 이 점에 있어서 킹제임스 역본의 공헌은 잊히지 아니할 것이다. 상술하면 킹제임스 역본은 영어는 물론 세계 각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참고가 되는 제1의 통일자료로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세계적 발흥과 아울러 킹제임스 역본의 내적 우수성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톰슨대역 한영성경, 기독지혜사, 부록 1, pp.4, 1989).사실 현시대에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성경 전쟁의 실체는 다수 본문만을 수용해 온 기독교와 소수 본문만을 고집해 온 천주교의 대립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대적자 마귀가 있다면 마귀는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서고 쓰러짐은 성경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보존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시키려는 마귀의 집요한 공격이 세상의 창건 이후로 늘 존재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지상 사역 이후로 신약성경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면서 그에 비례해 말씀을 변개시키려는 마귀의 시도 또한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마귀의 공략은 주로 역사 속에서 천주교회로 알려진 바빌론 음녀 교회를 통해 실현되어 왔다.사도 시대 이후로 마귀는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등의 부패한 서기관들을 이용하여 행위 구원과 마리아 숭배를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에 적합하도록 부단히 성경 본문을 변개시켜 왔다. 주후 500년경부터 약 천 년 동안 왕권마저 능가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17년에 마르틴 루터라는 수도승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그가 공인 본문을 근거로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 힘입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교황의 천주교를 초토화시켰다. 1534년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천주교를 몰아내고 영국 국교회를 국가의 종교로 세움에 따라 천주교는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1588년에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천주교 국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대패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로 영국은 온 세상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상을 통치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 주어지면 천주교의 무지와 미신과 맹신이 다 드러나므로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은 중세 암흑시대에 성경을 금서(禁書)로 만들어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라스무스, 틴데일, 루터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라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영적 무기를 들려주셨다.특별히 성경은 1450년경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통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이에 순응하며 목숨을 내걸고 일을 수행한 신실한 성도들 노력의 금자탑이요 결정체가 바로 1611년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어인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이다. 종교개혁에 이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디오다티의 이탈리아어 성경, 올리베땅의 프랑스어 성경, 레이나/발레라의 스페인어 성경, 그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 등이 유럽 대부분 국가의 보통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천주교 안에 팽배한 미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의 회복되지 못할 정도의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이에 천주교회는 잃어버린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1540년에 로욜라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회(Jesuit)를 형성하여 반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지난 500년 동안 예수회는 유럽에서 ‘예수 없는 예수회’라 불릴 정도로 악한 일을 많이 하여 심지어 세속 역사가들에게까지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회는 성경 본문에 관하여는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도구를 개발하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포장하여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에 집어넣기 시작하였다.잘 알다시피 인쇄술의 발명 이전에는 사람들이 일일이 성경을 손으로 써서 사본들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의 손으로 필사된 사본들을 만드는 작업에는 필사자들의 피로 누적 등으로 인해 실수가 나올 수 있었다. 본문을 확정하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현존하는 사본들을 살펴보고 그런 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발견한 뒤 잘못 표기된 단어나 첨가 혹은 삭제된 단어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모아 정확한 독본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에라스무스나 베자 혹은 스테파누스와 엘지버 형제들 같은 이들은 선한 의도로 다수 사본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이런 작업을 수행하여 천주교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1,500년 동안 공통적으로 수용한 공인 본문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사본들을 비교하여 정확한 본문을 만드는 기초 작업은 선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그런데 본문 확정 작업이 직업주의에 오염된 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본문 비평이라는 학문이 될 때에는 큰 문제가 생긴다. 이런 본문 비평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 속에서 소실된 성경 본문을 자기들의 힘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본문 비평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본문을 섭리로써 보존해 주심을 믿지 않으며, 본인들의 노력으로 인간들의 창작물에 불과한 다른 고대 문학 작품을 비평하듯이 성경 본문을 비평하려 한다. 다음은 한국의 유명 본문 비평 학자의 말이다.새로운 사본들의 지속적인 발견과 본문 비평이라는 학문의 발전으로 점점 더 고대의 훌륭한 본문을 회복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우리는 성서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서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성서가 살아 움직여 우리에게 늘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죽은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텍스트이다. 성서는 가지고 다니면서 받들어 모셔야 할 책이 아니라, 읽고, 명상하고,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책이다(<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대한기독교서회, 민경식 지음, 176쪽)).성경 신자들의 눈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은 불신자와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과 타협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사람을 위대한 신학자로 추앙한다. 현재 많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본문 비평은 실은 천주교회가 종교개혁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으로 도입한 도구로서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 안에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천주교회의 본문 비평에는 내재된 원칙이 있다. 그것은 곧 후대 사본들에는 필사자들의 실수가 축적될 가능성이 크므로 오래된 사본일수록 성경의 원문에 가깝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본문 비평가들은 후대의 사본들이 아무리 많아도 상대적으로 수가 훨씬 적은 오래된 사본에 더 많은 신뢰와 권위를 준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보존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보존된 ‘시내 사본’이다. 이것들은 주후 4세기경에 필사된 것으로 여겨진다.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초기 교회들이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인 본문 사본만을 사용하였고 그 사본이 닳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조심스레 그것을 필사하고 불태워버렸다. 이런 이유로 초기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오래된 사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워낙 많은 교회들이 이런 사본들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의 99%를 차지할 정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등의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반면에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꼭두각시였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등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바티칸 도서관과 시내 수도원에 고이 간직되어 왔다. 또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값싼 파피루스에 대부분의 사본들을 필사하였기에 이것들을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바티칸 사본 등은 벨럼이라는 가죽에 필사되어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다. 개역성경이나 현대 역본들의 각주에는 종종 “더 좋은 사본 혹은 더 신뢰할 만한 사본 혹은 더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더 좋은 사본’, ‘더 신뢰할 만한 사본’, ‘더 오래된 사본’은 한결같이 천주교회의 소수 사본을 가리킨다.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신학교로 들어온 본문 비평은 19세기 후반에 절정을 이루었고,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르트(F. A. Hort) 박사에 의해 널리 파급되었다. 이들은 천주교 사상과 이교주의, 그리고 독일의 이성주의에 물든 자들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찬양하고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며 유령 길드 같은 심령술 단체를 만들어 자유주의 이교도 신학을 전파하였다. 이들은 쎄이어(J. H. Thayer)와 스미스(V. Smith) 같은 유니테리언 이단들과 함께 영국 성경 개정 위원회를 조직한 뒤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공인 본문을 교묘하게 비평하면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이론으로 수정 본문을 만들고 여기에 근거하여 1881년에 <영국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ESV)을 출간하였다. 이들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을 근거로 공인 본문을 개정하여 만든 부패한 본문은 보통 ‘비평 본문’ 혹은 ‘수정 본문’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이 케임브리지 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개역성경>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고, 그것의 미국 판인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 역시 1901년에 출간되었으나 성도들에게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그런데 한국의 개역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론이 신학문으로 추앙받던 시기에 부패한 ASV를 주요 원천으로 해서 번역되었기에 이런 불신 학자들의 잘못된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최근에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출간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복음이 전파된 이래로 공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바로 이것이 한국 성경들의 근본적인 문제이다.비록 ESV, ASV 등이 실패하였지만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뿌려놓은 성경 의심 사상은 그 이후로 신학문이라는 미명하에 줄기차게 프로테스탄트 신학교들로 파고들어가 지금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신학교가 천주교회가 만든 ‘비평 본문’을 성경 원어 강좌의 본문으로 채택하여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학교나 학계에서 설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원어 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천주교의 소수 본문을 옹호하고 있다.한편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은 마귀의 이러한 거센 공격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영국과 미국이 지배하는 영어 세상에서 ‘유일한 성경전서’(The Holy Bible)로 자리를 굳혀 왔다. 이에 마귀는 본문 비평과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성경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이 세상 미디어를 지배하는 언론 재벌 머독(R. Murdoch)이 소유한 존더밴(Zondervan)이라는 출판사를 이용하여 1970년경부터 <신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라는 사역(私譯) 성경을 만들어 냈다. 머독은 하퍼 콜린스라는 세속 출판사를 운영하며 <사탄경>(Satanic Bible)을 출간하고 있고 최근에는 토마스 넬슨 출판사를 매수하여 뉴킹제임스 역본(NKJV)을 출간하고 있다(이름에는 킹제임스가 들어가지만 이것 역시 부패된 성경임). 그는 상업적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경제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사업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수많은 광고와 함께 대규모 신학교의 교수들을 집필진으로 활용해 NIV를 홍보하면서 성경 시장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40년이 지난 지금은 현대 역본들이 미국 성경 시장의 50% 정도를 잠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 교회는 배도의 길을 걸을 것이고 마귀가 장악한 천주교회는 계속 득세하여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므로 부패된 현대 역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자들을 계속해서 낚아챌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배도하는 때에 천주교와 또 천주교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역본들의 세력을 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놓으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므로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말세에는 천주교가 주도하는 이런 대규모 배도가 당연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무리 마귀가 날뛰고 성경을 변개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구원을 흐릿하게 하며 재림과 휴거와 천국의 소망을 불투명하게 만들어도 성경 신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확고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공중에서 강림하셔서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리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성경이 지금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성경 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영국과 조금 상황이 다르다. 미국/영국은 약 400년 동안 완전한 성경이 독주하다가 19세기 말부터 마귀의 현대 역본들이 출간되면서 야금야금 그 세력을 갉아먹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반면에 한국은 처음부터 천주교 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이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겨우 몇 년 전부터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출간되어 이제 막 성경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또한 한국에는 성경만을 믿음과 실행의 절대적 근거로 삼으려는 성도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성도들이 성경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개역성경이 가져다준 ‘한국적 기독교’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킹제임스 성경에 의한 ‘성경적 기독교’가 세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를 먼저 깨달은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 바른 성경을 한국의 성도들에게 알려 이 땅에 바른 교회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위에서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왜 우리가 킹제임스 성경만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지 몇 가지 이유를 기술하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셨다.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민23:19)하나님은 우리 같은 연약한 창조물이 아니시다.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다. 이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대해 무어라고 하셨는가?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단어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단어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단어]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하셨다.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지금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의 모든 단어가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들을 확실히 보존해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마무리하시면서 성경 변개자들을 엄중히 심판하시겠다고 경고까지 주셨다.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계22:18-19). 이처럼 성경 변개자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오늘날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만국 공통어로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계시록 22장의 말씀처럼 현대 역본들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변개를 옹호하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엄중한 심판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 보존의 약속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담은 완전한 성경이 적어도 한 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 이제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들고 비교해 보기 바란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메시지 등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일단 개역성경(개역개정)을 포함한 현대 역본들은 신약성경에서만 적어도 13구절을 완전히 삭제하고 이를 ‘없음’으로 표기해 놓았다(이 책자의 뒤표지 참조). 정직한 독자라면 ‘없음’이 없는 성경과 ‘없음’이 있는 성경들을 비교한 뒤 그것들이 다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90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몇 구절이 빠지거나 단어가 삭제되거나 첨가되어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분석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그들의 이런 주장이 거짓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또한 지금 우리는 교리의 변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지금 이 시간까지 보존할 수 있는 분이신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그분께서 무에서 유로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6일 동안 창조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 땅속에 묻혀 썩어서 몸의 모든 원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강림하실 때에 수없이 많은 성도들 몸의 원소들을 다 모아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는 부활이나 창조보다는 말씀 보존이 훨씬 더 쉬운 일이 아닌가?성도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지 아닌지 반드시 검증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쌓인 편견을 버리고 양심적으로 검증하면 할수록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모든 단어를 담고 있고 그 외의 다른 역본들은 부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그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 문제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며 평생을 연구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누구라도 성경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2. 킹제임스 성경은 왕의 명령에 따라 왕의 권위로 만들어진 유일한 성경이다.이런 사실이 완전한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현대 역본들은 여러 교파의 다양한 신학적 배경과 이권을 가진 자들을 편집위원으로 두고 있다. 그러므로 위원들은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신학과 배경에 맞게, 또한 출판업자의 의도에 맞게 본문을 번역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원래 뜻이 아니라 집필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번역이 최종 산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음행’(fornication)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오며 성도들이 음행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갈5:19; 엡5:3 등). 그런데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은 이것을 ‘부도덕’(immorality)으로 바꾸어 버렸다. 부도덕과 음행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동성애 하는 자들을 ‘sodomites’ 즉 소돔 성에서 동성애 하던 자들이라고 분명히 부르지만 NKJV 등의 현대 역본들은 이것을 ‘비뚤어진 자들’(perverted persons)로 애매모호하게 바꾸어 버렸다(왕상14:24 등).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번역하면 동성애나 음행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이 시대에서는 활발한 성경 판매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저들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단어들을 바꾸어 버렸다. NIV의 편집자 중 하나인 몰렌코트 박사는 자신이 여성 동성애자임을 온 세상에 스스럼없이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은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들끼리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번역자들이 사사로운 감정이나 신학을 번역 과정에서 집어넣을 수 없었다. 더욱이 번역하는 내용을 번역자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수십 번 일일이 검토하였으므로 사적인 번역이 생길 가능성도 없었다. 또한 제임스 왕 자신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였으므로 종종 번역을 검토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감정으로 본인들의 특정 신학이나 사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단지 연약한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여 보통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였을 뿐이다.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기 전인 1560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추종자들이 제네바 성경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만들었다. 제네바 성경 역시 공인 본문에서 번역되었지만 칼빈의 신정정치 개념을 여기 저기 집어넣어 결국 사적인 성경이 되고 말았다.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1590년경부터 미국에 넘어간 청교도들이 가져간 성경이 바로 제네바 성경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칼빈주의라는 비성경적인 사적 해석이 들어간 제네바 성경에 복을 주시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에서는 그 이후에 들어온 킹제임스 성경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모든 미국 사람들의 헌법과 정신세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면에서 왕의 명령에 의해 교리적 편견 없이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성경임을 역사가 보여 준다.제임스 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초대 영국의 왕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치적이 많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딴 성경을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남겨 주셨고, 그 결과 그는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이름이 불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제임스는 야고보라는 유대인들의 이름을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야고보는 야곱을 나타내는데 이 야곱은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성경’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에 있을까?3. 킹제임스 성경은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성경이다.이것은 실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요즘과 같은 컴퓨터 시대에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되는 현대 역본들 안에는 많은 실수들이 있어서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판이 바뀌곤 한다.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등 현대 역본들이 모두 다 이런 같은 과정을 겪었고 개역성경도 수십 차례의 변화를 겼었으며 심지어 최근에 나온 개역개정판도 나오자마자 수차례 판이 바뀌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은 철자법 변화를 반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거친 세파를 이겨내며 지금까지 완전한 본문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성경이 역사 속에서 단 하나라도 있었단 말인가?4. 모든 현대 역본들은 하나같이 다 킹제임스 성경만을 반대한다.영어권에서는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메시지 등 수백 종류의 역본들이 있다. 이런 역본들은 늘 “본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보다 좋다.”는 광고와 함께 출간된다. 어떤 현대 역본도 킹제임스 성경 이외의 다른 성경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킹제임스 성경을 공략하는 것이 그런 역본들의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성경 표지의 이름은 달라도 그 역본들이 다 천주교 사본에서 나온 사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은 가만히 보좌에 앉아 성경 전쟁을 관람하면서 조금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NASB를, 킹제임스 성경의 냄새가 나는 성경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NKJV를, 젊은이들에게는 NIV를, 아이들에게는 리빙 바이블을, 성경을 소설처럼 읽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바이블을,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의역성경인 앰플리파이드 바이블(Amplified Bible)을 던져 주고 있다. 이들이 무슨 성경을 보든지, 그것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현대 역본이기만 하면, 마귀나 교황이나 천주교에게는 모두가 남는 장사이다. 번역의 형식과 표현, 겉표지가 다를 뿐 내용은 다 같기 때문이다.5. 킹제임스 성경은 형식적 일치를 이룬 정직한 성경이다.많은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사상들을 전달해 주신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이것을 사상 영감이라고 말하며 이런 것을 믿는 분들은 성경 보존이란 사실 사상의 보존이며 따라서 번역은 사상만 전달되도록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번역 기법은 니다(Eugene Nida)에 의해 파급된 의역이다. 이들은 대충 뜻만 알아듣게 전달하면 임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리빙 바이블과 메시지이다. 또한 NIV도 절반은 의역이다. 마가복음 14장 5절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그분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치를 그리스어 원문은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NIV는 ‘1년 치 봉급’이라고 했다. 이들은 NIV의 이런 의역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년에서 안식일과 절기를 빼면 300 데나리온 정도 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NIV의 번역이 현대인들에게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는 ‘1년 치 봉급’이 아니라 ‘300 데나리온’이라는 단어들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하거나 빼거나 수정하지 않고 정확하게 ‘300 데나리온’이라고 번역한 뒤 그 뜻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경은 무작정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담은 책이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경이 아니다.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상들이 아닌 단어들에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축자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되었고, 수용 언어인 영어가 허락하는 한 원어의 단어와 영어의 단어가 서로 일치되며 문장의 형태까지도 일치되도록 번역되어 원문의 형식까지 그대로 보존된 성경이다. 원어에서 수용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는 부가적인 단어들이 불가피하게 첨가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외국 문서를 번역해 보면 누구라도 이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번역을 위해 자기들이 첨가한 단어들에 대해서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독자들은 어떤 것이 원어 성경에 있던 단어이며 어떤 것이 번역자들이 첨가한 것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은 형식적 일치 기법에 따라 번역되었으므로 독자는 원어 성경이 없어도 원어와 똑같은 형식을 유지하며 축자적으로 번역된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단어들을 그대로 읽고, 그것들을 원어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일 수 있다.그러나 모든 현대 역본들은 첨가된 단어들을 이탤릭체로 구분하지 않았고 많은 경우 의역되었으므로 독자들은 이런 역본의 단어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인지 확인할 수 없다.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은 이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단지 어감이나 읽힘성을 향상시키려고 많은 구절을 짧게 축약하고 의역했기 때문에 이런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한국 성도들에게는 바른 신학이 없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축자 번역의 원칙에 따라 우리말이 허용하는 최대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직역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기존 성경들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6. 킹제임스 성경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성경은 없다.마귀는 예수님의 출현을 막기 위해 온갖 꾀를 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충만히 찼을 때에 구약성경에 예언된 여자의 씨로서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 그분의 출생 이후에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을 죽이려 하였으나 다 실패하였고,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장사되었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자 계략을 바꾸어 신약성경에서 그분의 신성을 축소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마귀가 가장 크게 변개시킨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며 그 결과 현대 역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비해 예수님의 신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경 중에서 킹제임스 성경만큼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는 성경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 성경에 큰 복을 주셨다. 다음 표가 보여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구절들을 몇 개만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라도 쉽게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완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성경이 지금 우리 손에 있음을 확신하며 그 성경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누가 완전한 성경을 보여 달라고 말하면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이 성경을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확신 없이 믿음 생활하는 것은 드넓은 우주에서 갈 곳을 모른 채 홀로 떠도는 별똥별과 같고 망망대해를 나침반과 지도 없이 떠도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로그스던 박사의 회개의 고백이 글을 마치면서 우리는 NASB를 만든 로그스던 박사(Dr. Frank Logsdon)의 회개의 고백을 소개하려 한다. 로그스던 박사는 시카고 무디 교회에서 2년간 목회를 한 훌륭한 목사요, 성경학자였다. 그는 자기 친구인 사업가 록크맨의 권유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1901년 판 ASV를 살려 NASB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번역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번역이 완성된 뒤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자기기 만든 작품인 NASB가 실제로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는 무기임을 늦게나마 깨닫고 NASB와 관련된 자기의 행적을 회개하는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였다.
http://www.youtube.com/watch?v=wZBeIr1wKGY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제 나는 신미국표준역(NASB)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손을 떼려 한다. 사실 나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다. 우리는 NASB라는 잘못된 성경의 기초를 놓았다. 사실 나는 이 역본의 형식을 결정했고, 번역자들 중 몇몇과 이야기도 나누었으며, 그들과 함께 앉아 일했고 서문을 썼다. 참으로 나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NASB는 잘못된 것이며, 잘못되어도 매우 많이 잘못된 것이다. 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이 역본이 발간된 뒤에 여러 가지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나는 참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비웃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나는 NASB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같은 질문과 비평들을 무시할 수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다. NASB 안에서 삭제된 내용은 참으로 나를 두렵게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너무나 많았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이같이 변개시킨 일에 사탄의 속임수와 개입이 있었음을 의심해 봐야만 하지 않겠는가?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뒤에 나는 곧바로 NASB를 출간한 록크맨 재단의 설립자이자 내 절친한 친구인 록크맨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지금 NASB와 관련된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NASB는 참으로 내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고, 큰 혼란에 빠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나는 NASB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처음에 내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부패된 그리스어 본문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으나 지금은 다시 원상 복귀해서 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듯이,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이 같은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채 굳게 말씀을 지키고 있다. 사실 심히 변개된 그 본문에 눈을 돌리는 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결국에는 넘어지고 만다. 이제 나는 무디 성경 학교의 학장인 조지 스위팅 박사에게도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다.이제 독자께서는 권위역본 킹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옳은 성경이라고 말해도 된다. 과연 얼마나 옳을까? 100% 옳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영께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을 인도하셨음을 확신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이가 당신과 의견을 달리한다 해도 이제 당신은 스스로 서야만 한다.NKJV를 포함한 모든 현대 역본들은 영지주의 이단인 오리겐이 편집한 ‘부패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계22:18-19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수천 개의 단어를 변개하였다. 계시록은 말세 교회의 예표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여 주는데 이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이고 음탕한 교회이다(계3:14-22). 궁극적으로 이 배도한 교회는 유혹을 받아 속아 넘어가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저 음녀, 즉 자주색 옷을 입고 성도들의 피에 취한 채 짐승 위에 타고 있는 로마 카톨릭 체제와 하나로 엮이게 된다. 이런 혼합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수한 말씀을 천주교회의 부패한 말씀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저하게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진실을 보여 주면 오히려 화를 내는 수많은 이들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역사를 살펴보면 천주교회의 일원인 히틀러가 천주교회를 심히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국과 천주교회를 연합시키려 하였고 이 일을 쉽게 이루려고 멀러 주교(Bishop Ludwig Muller)를 시켜 죄나 은혜 같은 단어들을 제거한 독일어 성경을 만들게 하였다. 이 성경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히틀러와 함께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만 가르쳐 주었다. 성경 변개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처음부터 마귀는 “그래,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이브에게 물으면서(창3:1) 의심의 씨앗을 사람의 마음에 뿌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살짝 의심을 불어넣은 뒤 그는 새로운 계시를 담아, 먹기에 좋게 보이는 말들을 도입하여 사람을 멸망으로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 이런 유형의 마귀의 계략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귀는 새로 발견된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했다는 새로운 역본들을 수백 개나 만들어 여전히 사람들을 멸망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단언하건대 새로운 계시는 없다. 하나님은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지난 400년간 자신의 모든 말씀들(words)을 보존하셨다.- NASB 편집위원 로그스던 박사(Dr. Frank Logsdon)
이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옛날부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천주교회의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굳게 세워 놓은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저 랜드마크를 그대로 붙들고 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랜드마크를 물려줄 것이다.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잠22:28).
2014-03-11 11:56:41 | 관리자
환난 전 휴거라는 책을 지은 Allen Beechick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드셨습니다.
http://www.amazon.com/The-Pre-Tribulation-Rapture-Allen-Beechick/dp/0896360407/ref=sr_1_11?ie=UTF8&qid=1394428848&sr=8-11&keywords=pretribulation+rapture
이분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알려드리니 참조하세요.
http://www.rapturesolution.com/
다음은 kindle용 책입니다.
http://www.amazon.com/Rapture-Solution-Allen-Beechick-ebook/dp/B001T4YUZW/ref=la_B001KMCPCI_1_2?s=books&ie=UTF8&qid=1394428872&sr=1-2
참조하세요.
샬롬
2014-03-10 14:22:58 | 관리자
안녕하세요?
미국에는 성경 예언에 대한 분석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언을 이용해서 돈만 벌기도 하고
헛된 예측을 해서 성도들을 우습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성경 해석 면에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론을 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의 예측가들을 분석한 자료가 있으니
여기서 +로 평가된 분들의 책이나 글만 읽는 것이 좋습니다.
http://www.soundchristian.com/prophecy/who/
감사합니다.
샬롬
2014-03-10 14:10:37 | 관리자
요즘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 대한 나쁜 소식이 여기저기서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안 하면 교회 생활하기도 어려워질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라는 뇌관이 터지면서 크게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바라기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 목회의 본질을 잘 깨닫고 양들을 섬기는 자세로 목회에 임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http://m.shinmoongo.net/a.html?uid=53124
2014-03-10 14:00:0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주 3월 8일 토요일 오후2:30분부터 4:30분까지 진행된 모임의 소식을, 처음 시작된 1차 모임이라, 알려드립니다.
1차 모임이라서 정동수 목사님이 몸이 아프신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본 모임에 오셔서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의미 및 여러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다음과 같이 모이고자 합니다.
1) 매주 토요 오후 모임 : 대전/청주/여수의 형제/자매님들이 모여 성경 공부 및 교제
2) 격주 수요 저녁 모임 : 정동수 목사님이 당분간 성경 공부 인도 예정
3) 주일 예배 : 아직 미정이고 추후 계획
저희 모임에 대한 것은 대전/청주 흠정역 카페(http://cafe.daum.net/grace1611)를 참조하세요
감사합니다. 샬롬.
2014-03-10 13:09:31 | 김학준
안녕하세요?
지난 2013년 8월에 시작된 모임이 벌써 8차 모임이 되었습니다.
두 가정이 모여 시작했는데, 멤버들이 조금씩 늘어나서 저희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올해 2014년에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모임이 되길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번 모임의 시간과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1. 일자와 시간 : 2014년 3월 15일(토) 저녁 7시
2. 장 소 : **번지 Smales Rd. East Tamaki, Auckland(East Auckland)
3. 내 용 : 개역성경분석
4. 연 락 처 : 027-779-8877(최문선)
2014-03-08 16:46:31 | 최문선
요즘 대형 교회 특히 사랑의 교회 관련 글들이 매체에 종종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마도 그나마 개신교계를 인원수와 물량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대형 교회들이 내부의 부패로 인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면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계는
급격하게 위축되며 본격적인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부디 이런 일들을 통해 교회를 비즈니스로 알고 사장 행세하는 목사들이 회개하고
또 무지한 성도들이 계몽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 글은 2014년 3월 7일 자 글이고
저자는 신성남으로 되어 있습니다(목사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음).
모든 교회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3000억 호화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377
글쓴이: 신성남
“이 ‘돈’에 환장한 목사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난한 목수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느냐. 이 ‘복’에 환장한 교인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던 세례 요한을 존경한다고 말하느냐. 그리고 이 ‘건물’에 환장한 교회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정에서 모이던 초대 교회의 그 순수한 신앙을 따른다고 자랑하느냐.”
돈과 세속적 복과 그리고 교회당 건물은 이제 한국교회가 애지중지하는 애완용 우상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와 바른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글은 필자의 진심입니다.
하여튼 바벨탑처럼 높은 아방궁을 하나 세워 놓고 떼로 몰려가서 ‘솔로몬의 성전’이니 뭐니 하며 수선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냄새나는 잔칫상에 부끄러운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고 갖은 교언영색으로 두꺼운 얼굴에 서로 금칠하는 일부 거룩하신 목사님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군요.
서울에 교회당이 모자라나
몇 해 전 사랑의교회는 장소가 너무 비좁아서 신축한다고 공표했습니다. 그 심정은 필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처럼 초호화판 아방궁을 세운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처음엔 2,100억 원이라고 하던 건축비가 사전에 누구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려 3,000억 원으로 슬그머니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최종 건축비가 얼마가 될는지는 정말 며느리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요란한 잔치가 대충 끝이 났다면, 이제라도 취기를 좀 몰아내고 옆 동네 미자립 교회들을 한번 가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고작 몇십 평도 안 되는 셋방살이 작은 예배당마저 자리를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교회들이 지금 아주 널렸습니다. 즉 현재 서울에는 교회 수에 비해 교인이 부족한 것이지, 결코 교회당 건물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1960-70년 사이 전체 개신교 교인 수는 412%나 증가했고, 1970-85년 사이에도 103%나 증가했지만, 1985-95년 사이에는 그 증가율이 35%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5-2005년 사이에는 14만 4천 명이 줄어들어 급기야 -1.6%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동안 가톨릭 신도는 무려 220만 명이나 늘어나서 74.4%의 초고속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인 수는 줄고, 자리가 빈 교회들이 매년 늘어나고, 또한 은행 빚을 못 갚아 경매로 넘어가는 교회들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는 초대형 신축을 용감하게 단행했습니다. 극심한 건축 반대 여론은 그냥 무시했습니다.
자신들만이 바른 교회라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유명한 제자훈련은 도대체 왜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훈련을 했으면 이젠 장성한 제자들을 이웃 미자립 교회들에 조직적으로 파송해야 옳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실전 배치는 평생 미루고 허구한 날 비대한 몸집만 키우며 끝까지 훈련만 받다가 그냥 편안히 돌아가시겠다는 말인지요.
‘아방궁’은 중국 시황제가 위수의 남쪽에 세웠던 호화롭고 거대한 궁전입니다. 후궁들의 처소였던 이 왕궁은 수많은 미희들로 가득했으나 그 진나라는 고작 15년만에 멸망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최초로 초호화 성전을 지었지만 도리어 나중에 후궁들에 둘러싸여 음란한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금으로 성전을 치장하고 그 화려함을 자랑했으나 왕과 백성들은 오히려 메마른 광야에서 천막 생활할 때보다 더욱 극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어리석고 부패한 인생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 모양입니다.
결국, 그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여자와 사치와 향락밖에 없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들 또한 간통과 호사와 공금 횡령으로 온 동네 망신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완공된 서초예배당을 보며 ‘일단 짓고 나면 땡이다’ 하며 혹시 기뻐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엄청난 은행 빚의 상환 등 진짜 어려움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9천 명이 모이던 제자교회가 담임목사의 부정행위가 들통난 후에는 2천 명 이하로 급감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우선 당장 교회의 회복을 갈망하는 ‘마당기도회’에 대한 치졸한 방해와 압력을 즉시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런 난관은 더욱 구체화될 것입니다.
몇 해 전 ‘거룩한 땅 밟기’ 운운하며 새 예배당 부지에 빨간 리본들을 잔뜩 깔아 놓고 서낭당처럼 신성시 하던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기존 강남예배당의 마당을 쓰레기장 취급하며 별로 거룩하지 못 한 행동을 하시는 것인지요. 이젠 그 ‘거룩한 땅’마저 토사구팽을 하시나요. 이는 너무 모순적인 처사가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출입문을 용접하고 높은 담을 올리며 갖은 수단 다 동원해도 결국 양들의 의로운 분노를 막기는 힘들 것입니다.
삽질로 망한 중세 교회
사전을 찾아 보니, ‘삽질’이란 말은 ‘쓸모 없는 일을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용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국교회의 예배당 대형화를 통한 건축 경쟁 행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단어는 드물 듯 합니다.
같은 소리음이라도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 사용하면 듣기 싫은 소음이나 잡음이 됩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규모와 용도가 적절한 건축은 예술이지만, 실속 없는 허장성세용 건축은 삽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기성 면죄부까지 팔며 무리하게 추진한 초대형 건물 ‘성베드로성당’의 공사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공교회가 저지른 무분별한 건물 삽질의 아주 원조 격인 셈이지요. 당시 교회의 내부는 썩고 또 썩어 있었는데 오히려 외형만 키우고 겉치장에 열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루터의 그 묵직한 쇠망치가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 현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또 못질해야 정신을 차릴까요.
어두웠던 중세 천 년 동안 그 시대 교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고작 삽질 사역의 유산인 대형 건물들뿐입니다. 이스탄불의 그 거대한 성소피아성당도 이젠 관광용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한 때 융성했던 유럽의 개신교도 형편은 비슷합니다. 큰 건물들만 딸랑 남겨 놓고 지금은 거의 다 망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모텔, 식당, 상가, 그리고 술집 등 다른 용도로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 속의 수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귀한 헌금을 허비하며 이렇게 허망하게 변해 버릴 건물에 열심히 삽질하다가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하면 언제나 망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사가 보여 주는 냉엄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팔아 가난한 신도들 장바구니 돈까지 짜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 빚까지 돌려 막으며 대형 건축을 하는 행위가 그보다 무엇이 더 나은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 한쪽에서는 계속 문을 닫고 있는데 말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의 푼돈을 걷어 허름한 초막이라도 하나 지은 적이 있으셨던가요.
과연 서초동의 그 무슨 쇼핑몰같이 생긴 사치스런 벽돌 덩어리 속에서 종의 형체로 낮게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정신과 가난한 목수의 마음을 진정으로 잘 전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과거 거대한 헤롯성전 안의 상인들처럼 본격적으로 좌판이라도 한번 멋있게 펼쳐 보려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처럼 크고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절대로 잊지 마십시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고상한 아방궁에서 철 따라 냉난방 틀어 놓고 품위있는 예배를 즐기는 동안, 같은 시각 다른 한편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천 길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힘든 삶을 버티고 있는 줄 진정 알기나 하시는지요.
반면에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풍족지 않은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에 먼저 힘을 쏟았습니다. 전도나 선교를 위한다는 허구적인 명분으로 자신들을 위한 대형 예배당 건축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정작 배우고 닮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의 검소한 사역이건만, 많은 대형 교회들은 하필이면 삽질하다 망한 중세 교회를 닮아 가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경향교회, 제자교회, 왕성교회, 경서교회, 광성교회, 그리고 사랑의교회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십시요.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교회가 ‘물 반, 고기 반’으로 아주 차고 넘칩니다. 이를 보면 배도적인 목사 귀족화, 신도 우민화, 건물 대형화, 복음 기복화, 그리고 교회 사유화에서 자유로운 대형 교회가 요즘 과연 몇이나 되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중세 삽질의 부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려면 ‘왕궁’으로 가야 하고, 선지자를 만나려면 ‘광야’로 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눅7:24-26).”
예수님과 제자들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틈만 나면 아방궁 같은 건물을 세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라면, 신도들이 그 광야에서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들이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요즘 왜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고 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어떤 교회에는 부드러운 긴 옷 입은 자들만이 설치고, 정녕 선지자는 보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줍지 않은 박사모를 쓴 자들은 넘치는데, 예수님 고난의 가시관은 잘 보여 주지 않습니다. 물질적 축복은 넘치게 노래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한 반복성 건물 삽질과 기만적 가르침에 염증이 나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진정한 악성 안티는 일부 무신론적 논객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귀족 교회의 ‘거짓된 목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만, 이 종교 상인들은 반대로 신도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은 신축된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이야말로 성베드로성당에서 종지부를 찍었던 그 ‘중세적 원조 삽질’의 화려한 부활이 아닌가 그리 의심하고 있습니다.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고작 나귀 새끼를 타셨는데, 초대형 건축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은행 빚을 지고 있는 교회의 목사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고, 기사가 딸린 최고급차를 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대형 콘도를 분양받아 골프치며, 비싼 특급 호텔에 가서 운동한다면 이게 정말 종의 모습일까요. 게다가 거액의 두 자녀 유학비까지 모두 교회 돈을 가져다 채웠다고 하는데 정말 듣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난 것입니까. 모두 순진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 바치라고 뜨겁게 설교하고 그 주머니를 열심히 흔들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신도들이 무슨 돈 내는 기계인가요. 입만 열면 ‘하나님께 바치라’며 설레발 치던 소중한 헌금을 엉뚱하게 목사가 사치를 떠는 데에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담임목사는 한 부목사가 나이 드신 성도들에게 모리배처럼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며 폭력적 언사를 하는 행위도 마냥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목사는 한 여성도가 집단 폭행 당하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았다지요. 이처럼 담임목사에게 애완견처럼 충성하는 부목사들 중 상당수가 군목 출신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군견’도 저런 짓은 안 할 것입니다. 물론 군 사역에 성실히 수고하시는 다른 군목님들께는 너무 민망한 일입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들 중에는 ‘의전’을 핑계로 최고급차를 굴리는 분들이 제법 많다고 하던데, 이게 종이 할 처신인가요. 하여간에 하늘 아래에 의전이 필요한 종놈이 있다는 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은 눈물 연기와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진정 자숙하기를 원한다면, 만날 성도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려 하지 말고 목사들부터 손수 그 비싼 차들을 팔아서 실용적인 차로 바꾸고 남은 은행빚이나 조금이라도 더 갚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30년간 영국 교회는 무려 5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약 30% 이상의 교인 수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건물 삽질에 비해 신도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 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건물 확장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의 바른 성장입니다. 큰 건물들만 잔뜩 세워 놓고 무너지고 있는 유럽 개신교를 보십시요. 건물 성장은 결코 교회 성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일부 목회자들은 목사 말 잘 듣고 헌금 잘하는 맹신도를 키워 교회 외형만 확장할 궁리를 행여라도 하지 말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바른 성도를 키우는 데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전 건축’이라는 기만적 명분을 빙자한 경쟁적 건축을 이제 즉시 멈추기 바랍니다. 건물이나 재력 또는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미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타락한 교회일 뿐입니다.
서초동의 그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아무리 잘난 건물이라도 감히 성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만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삽질로 목회하던 목사님들은 더 이상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요. 목회자로서 그런 거짓말은 면죄부 판매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해야 비로소 진정한 교회 성장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2014-03-07 18:55:42 | 관리자
오늘 또 이런 글이 들어와서 소개합니다.
사랑의 교회가 소위 목사 찬양가를 만들었다가 폐기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곳곳에서 생기는데
이런 배경엔 성도들의 무지가 큰 몫을 합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며 진리 안에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사랑의교회 '목사님 찬가' 만들어....권사들 반대로 폐기 (국민일보 김지방기자)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175967414&qb=7IKs656R7J2YIOq1kO2ajCDrqqnsgqzri5gg7LCs6rC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xEgJU5Y7twsstzAv3lssssssso-507515&sid=UxmT7XJvLBwAABziCW4
“뜨거운 찬양, 거대한 비전, 따듯한 사랑…” 사랑의교회 ‘목사님 찬가’ 논란
[쿠키 사회]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담임 오정현 목사를 위한 ‘찬가’를 만들었던 사실이 공개됐다.
인터넷 카페 ‘사랑의교회 소통과 회복을 위한 사랑넷’에 최근 한편의 노래 악보가 올라왔다. 제목은 ‘주님께서 세우신 목사님’이었다.
‘찬양 충만 우리 목사님 하이 프레이즈(Hi Praise) 깊은 기도로 모든 성도 하나되어 주께 영광 찬양드리네. 비전메이커(Vision Maker) 우리 목사님, 창조 은사 아이디어맨, 예배 속에 생기 불어 2007년 부흥 기대해.’
여기까지가 1절 노랫말. 후렴구는 이랬다.
‘목사님 뜨거운 찬양, 목사님 거대한 비전, 목사님 순수한 열정, 목사님 따듯한 사랑,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드리세.’
모두 3절까지 있는 이 노래에는 ‘2006년 스승의 날 축복송’이라고 표시돼 있다. 이 노래는 2006년 스승의 날 때 사랑의교회 성경공부 모임을 이끄는 ‘순장’들의 모임에서 악보가 배포돼 실제 연습까지 했으나, 일부 명예권사를 비롯한 성도들이 교회를 찾아가 항의하는 바람에 실제 교회 공식 순서에서 불리진 않았다고 한다. 이 악보를 공개한 이는 순장 모임의 임원들이 나서서 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사랑의교회 당회는 지난달 30일 오 목사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노스웨스트대학 박사 학위 논문 표절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했다. 최근 노스웨스트대가 ‘오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학위 수여는 취소하지 않기로 했다’는 공식 의견을 전해온 바 있다. 오 목사는 표절 문제에 책임을 지고 지난 3월부터 6개월 간 주일 설교를 중단한 상태다.
사랑의교회 부교역자들은 “불과 90 여일 앞으로 다가온 서초예배당 입당과 교회의 질서와 화평의 회복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당회장권이 원활히 수행되어야 할 때”라며 사실상 오 목사의 조기 복귀를 바라는 청원서를 29일 당회에 제출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오는 9일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신축 공사의 공공도로 지하 점유 문제에 대한 1심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출처:국민일보 쿠키뉴스 (2013년 7월 2일)
2014-03-07 18:46:09 | 관리자
프렌차이즈 교회의 실상과 허상을 담은 글을 누가 보내줘서 올리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온누리교회의 맥도널드식 운영과 캠퍼스 체제를 비판한 글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온누리옹호자들의 항의가 있어 아래 자료를 올립니다.
http://inyouwithyou.blog.me/10110010842
제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들은 이야기, 언론 기사에 주로 근거합니다. 추가 정보나 세부적인 정보가 있으면 업데이트하고자 합니다.
온누리교회 잔혹사
http://inyouwithyou.blog.me/10125434606
1. 온누리교회 양재 성전 - 지역교회초토화
온누리교회가 횃불회관을 인수(?)하여 소위 양재성전을 세우자마자 인근 양재동, 서초동 인근의 수십 개 개척교회가 문을 닫았고 여러 중소형교회가 사실상 몰락하였다. 사랑의교회 한 청년은 전에 양재동에 소재한 교인 300명 정도의 견실한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온누리 양재 성전이 세워지자 6개월이 안 되어 교인 100명만 남게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수지지역으로 교회를 이동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회자와 남은 교인들이 받은 상처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양재 성전은 서빙고와 함께 양대 항공모함 모선 구조로 전국적인 선단망을 갖추는 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투자하였다. 온리교회서빙고본당에 다니던 교인들이 양재성전으로 이동하기도 하였지만 양재성전의 성장 과정은 한 마디로 지역교회에 대한 침탈의 과정이었다. 양재 성전에 신도 1만명이 증가되면 서울 지역 특히 인근에서 적어도 100개교회에서 100명씩의 교인들이 빠져나간 것이 된다. 특히 수평이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20-40청년 그룹이므로 지역교회들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서초구청 통계에 의해면 서초구 관내 10년 전 283개 교회였는데 현재 187개로 거의 30%의 교회들이 사라졌다. 그 모두가 온누리교회 때문은 아니지만 양재동 서초구청 인근의 경우 양재성전의 영향력은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수원 영통 온누리교회 지성전 건립 시도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어 온누리교회 비전교회의 허구성과 비윤리성이 드러난 대사건이었다. 지역 중소교회들이 대책위를 만들고 항의하고 하용조목사 면담을 하여 여론에 밀려 온누리교회가 한 발 물러선 사건이었다.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저항이 약한 지역에 쳬계적으로 지성전 캠퍼스를 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더욱 은밀하게 더욱 치밀하게. 문어발식으로. 지역교회들의 반대와 항의가 거세자 독립교회로 추진하겠다는 듯이 제스처를 하고서는 캠퍼스를 세웠으며 결국은 독립교회를 세운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침내 온누리교회는 전국적인 캠퍼스망을 갖추고 전세계적인 비전교회 시스템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 아래 언론기사 참고 -
3. 얼바인 온누리교회
2003년인가 2004년인가 온누리교회 부목사 한 사람이 미국 남가주 지역의 얼바인에 온누리비전교회를 세웠는데, 그야말로 교회개척이 아니라 교회 선전과 서울 온누리교회 시스템과 물량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얼바인온누리교회는 내가 살던 곳과 지근거리에 있고 나는 인근의 미국인교회에 출석하고 있어 그 진행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Church Planting이 아니라 임플란트였다. 단번에 수백 명의 교인들을 모아 온누리비전을 선전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하용조 목사가 야망에 찬 경영인이자 장사꾼이 되어간다는 평가가 그 당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용조 목사의 초기의 순수한 진정성과 거룩한 비전은 아마 그 때부터 퇴색되고 교회가 속물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4. 보스톤 온누리교회 이웃교회 침탈
보스톤 온누리교회는 치밀하게 지역 한인교회들의 지성인들을 흡수하거나 뻬내어간 대표적인 경우이다. 보스톤온누리비전교회가 세워지자 마자 보스톤 지역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휘청거렸다. 일례로 캠브리지의 어느 한인교회는 백수십명의 교인들이 출석하는 알찬교회였는데 온누리교회가 세워지자 마자 단 2주만에 교인이 60명만 남게 되었다. 청년들이 다 떠나고 하바드대학출신 소그룹의 리더가 맴버들을 몰고 온누리교회로 갔다. 담임목사는 하용조 목사를 직접 만나 항의를 하였고 하용조 목사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연신 사과만 하고 위로할 따름이었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받은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온누리교회는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어도 핵심맴버들은 치밀하게 접촉하여 온누리신화를 만드는데 동참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를 쉽게 옮기는 이민교회의 문화가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그러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부추기는 가장 대표적인 초대형교회에 해당된다.
5. 국내 캠퍼스 부천, 중국 등등
내가 목격하거나 그 교회 관련자에게 직접 들은 경우는 한국의 부천의 경 경우와 중국 어느 도시 온누리비전교회의 경우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캠퍼스의 담당목사가 담임목사가 아니요 지역비전교회가 별도의 재정권 인사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서빙고 본당에서 담당목사의 해임을 통고하면 비전교회 혹은 캠퍼스의 담당목사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지고, 발령을 내리면 부목사 신분으로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재정 역시 지역캠퍼스에서는 결정권이 없다. 현재 서빙고성전에서 교인투표로 담임목사로 청빙된 이재훈 목사는 서빙고의 담임이 아니라 전세계 온누리비전교회와 캠퍼스의 담임목사이자 최종결정권자이다. 왜 이러한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서빙고 성전에서 돈과 인력, 자본을 동원하여 직접 세운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즉 온누리비전교회들과 캠퍼스는 독립교회도 아니라 온누리그룹의 지사인 셈이다. 문제는 각 여러 캠퍼스나 비전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가 서울 온누리교회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 사실상 독립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사에서 전무하였던 교회구조가 온누리와 하용조목사의 욕망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건강한 방식의 교회 개척과 설립이란 옥한흠 목사가 그 부교역자에게 독립적인 개척교회를 하도록 돕거나 유진소 목사가 LA온누리교회를 세우는 방식의 독립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LA온누리교회를 유진소목사가 세웠다고 하용조목사가 그를 적대시하고 관계가 단절된 것은 미국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문이다. 이러한 것이 대형교회 목사의 겉과 속이 다른 이미지의 실상이자 대형교회의 화려함과 웅대함 속에 숨겨있는 허상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일종의 욕망의 바벨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ACTS29비전의 실체와 온누리교회의 기형적 확장 과정은 사실상 유럽 제국주의의 동인도회사나 대기업의 지사 확장 시스템과 다를 바 없다. 브랜드의 힘이요 돈과 자본의 역사이다. 하지만 온누리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고 성경적인 비전의 실현이라고 한다.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행위이다.
6. 언론기사들 - 지성전 체제의 방식의 특징과 신학적 윤리적 문제점 해부
지난 2003년 온누리교회는 장기 계획의 하나로 2010년까지 국내외 30개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대형 프로젝트인 ‘액츠 29’에 따라 수원의 신도시 지역인 영통지구에 지성전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수원 지역의 목회자들은 ‘온누리교회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대응했다. 온누리교회의 지성전이 교세를 확장하는 전략에 불과하며 수원 지역 중소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책위의 김창주 목사는 “온누리교회라는 브랜드를 이용해 지역 교회의 신자들을 뺏는 형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라며 매섭게 비판했다.
온누리교회의 ‘액츠 29’는 지성전에 관한 기독교계의 논란을 불러왔다. 지성전을 건립하는 대형 교회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명의 목회자가 있다. 그리고 예배는 중앙에서 송출하는 예배 프로그램으로 대신한다. 마치 네트워크 방송을 통해 원격 예배를 하는 셈이다. 본 교회에 재정·인사·행정 등 사실상 교회 운영을 위한 모든 권한이 예속되어 있고 본 교회의 명칭을 그대로 쓰면서 단지, 위치한 지명을 머리말에 붙여 구분하고 있다. 지성전을 건립하면서 대형 교회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다른 지역에 퍼뜨렸고 신자 수를 확대해왔다. 대기업의 본사와 지역 지사와 같은 개념이다.
논란은 ‘종교 대 기업’이라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선 일각에서는 ‘프랜차이즈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성전이 중앙 교회의 전도 전진 기지로 기능하면서 주위의 작은 교회를 고사시킨다는 주장은 항상 제기되는 문제점이다.
마치 지역에 진출한 대형 마트가 소규모 슈퍼마켓을 고사시키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지역 담임 목사의 예배가 아니라 TV 모니터를 통해 중앙 교회의 목사가 진행하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시사저널 2009. 1. 7 부분 발췌
월간 ‘기독교사상’은 오는 27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심포지엄 ‘한국교회 지성전체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통해 지성전체제를 심층 해부한다.
◈지성전 설립에 반발하는 중소교회들〓지난 4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담임목사 하용조)는 300억원을 들여 2010년까지 전국에 30개의 비전교회(지성전)를 설립하는 ‘액츠(ACTS) 29’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하 목사는 ‘28장으로 끝난 사도행전을 잇는다’는 의미의 ‘액츠29’에 대해, “모교회인 서빙고동 온 누리교회와 양재 온누리교회가 항공모함이라면 신자수 2000∼3000명 규모의 30개 교회를 구축함으로 세우는 전략”이라고 밝혔다.
온누리교회는 1호점 양재 온누리교회에 이어 지난달까지 부천· 수원·대전에 2∼4호점을 잇달아 세웠다. 온누리교회 수원 입성 소식에 위기감을 느낀 수원 팔달구 영통지역 중소교회들로 구성된 대책위 총무 정재현(45·새순교회)목사는 “대기업들이 사세 확장을 위해 직영점을 차려 운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프랜차이즈 행태”라며 지성전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태세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수원 영통지역에 1000여평의 새 지성전을 건립해 이전할 예정이던 온누리교회 측은 일단 ‘독립교회’로 형태를 전환키로 했다. 대책위는 “수원온누리교회의 경우 건립 예정지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있는 같은 교단 교회 측의 동의도 구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기업윤리’마저 어겼다”며 의혹의 눈초 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지성전 무엇이 문제인가〓지성전이란 한마디로 본교회에 종속된 교회다. 독자적인 운영권을 상실한 채 본 교회 목회정책과 행정 지시를 받는다. 지성전 예배때는 카리스마를 갖춘 교회창립자인 본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위성방송 등을 통해 영상으로 방영된다. 신학자들은 대체로 지성전체제를 교회성장제일주의와 개(個)교회주의가 낳은 종교상업주의의 산물로 규정한다.한국일 장신대 교수는 “대형교회의 인지도와 브랜드, 풍부한 인력과 재정적 힘을 자본으로 삼아 대기업의 분점을 여는 방식으로 개교회를 확장시키는 지성전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원리 를 교회성장에 결부시킨 종교적 세속주의”라며 “똑같은 교회들을 복제품 방식으로 양산하려는 시도”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는 “교회론적 시각에서 볼 때 지성전체제는 동종교배로 교회를 열등한 기관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조기연 서울신학대 교수는 “설교자와 신자 간의 인격적 접촉과 교감, 친밀감이 배제된 지성전의 중계예배는 예배라기보다 신앙집회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문화일보 2003. 10. 22 부분발췌
2014-03-07 10:18:51 | 관리자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옥성호 형제가 지은 "서초 교회 잔혹사"라는 책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왜 교회가 이 모양일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꼭 참조하기 바란다.
서초 교회 잔혹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1953
"...김건축 목사의 등장과 더불어 날로 번창하는 서초교회. 그러나 김건축 목사의 눈부신 활약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한 인터넷 언론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가면서부터다. 글로벌 미션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생명을 건 기도의 사투를 벌이고 왔다는 김건축 목사가 수염을 기른 채 나타나 사탄의 무리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저자 :옥성호
기독교 내에서는 드물게 교단을 초월하여 널리 존경받는 사랑의교회 설립자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자 ‘부족한 기독교 3부작’으로 알려진 기독교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다. 아버지가 유명한 목사였음에도 정작 본인은 20대 후반 어느 시점, 기독교에 회의를 느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다 2005년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 강좌 시리즈』를 읽던 중 기독교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탄탄한 논리 위에 영성을 더한 설교로 유명한 아버지의 일면을 빼닮아, 2007년 ‘부족한 기독교 3부작’을 통해 비판과 성찰이 사라진 한국 교회에 일침을 가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이드 존스가 그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문학의 세계로 안내한 건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경험한 후, 솔제니친의 모든 저작들을 끌어안고 많은 밤을 지새웠다. 감동은 자연스럽게 창작으로 이어졌다. 밤은 여전히 고독하고 치열했으며, 절망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 고뇌와 열정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생각과 상식이 실종된 채 방황하는 한국 기독교에 작지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자 첫 장편소설 『서초교회 잔혹사』를 탈고하여 오늘 선보인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주 노터데임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특허 전문 솔루션 벤처기업 위즈도메인 시카고 지사를 설립하고, 10년간 미국 전역의 유수한 회사들을 상대로 특허 분석 소프트웨어 포커스트(FOCUST)를 세일즈했다. 2010년 가을, 아버지의 소천 이후 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의 본부장으로 일했으며, 2014년 현재 본인의 1인 출판사 '은보'에서 출판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옥성호의 한 마디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와서 얘기하면 부모님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 학교에서 매년 서울대를 몇 명이나 보내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느냐고도 하셨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고교 선배 중 한 명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말죽거리 잔혹사>
그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영화니까 당연히 재미를 위해 내용을 꽤나 과장했을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 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영화가 과장은커녕 오히려 실제로 그 학교 내에서 있었던 많은 일을 완곡하게 표현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책을 읽은 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에이, 세상에 이런 교회가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안됐지만 그거야말로 편견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 책 속에 표현된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황당무계할 뿐 아니라 무자비하기까지 하다. 그게 현실이다. 마치<말죽거리 잔혹사>가 내가 실제로 다닌 고등학교의 일면만, 그것도 부드럽게 보여준 것처럼.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드러낸다. 그건 성역과 금기가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종교를 대상으로 무언가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종교는 여전히 성역이자 금기다.
소설가 황석영은 ‘작가’를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작가란 당대의 한계와 금기를 깨뜨려 일상화하는 사람이다.”
내가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황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정의 비스무리하게라도 다가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는 금기를 혐오하고 성역을 경멸한다. 무엇보다 금기와 성역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거짓을 양산한다. 더욱이 그 금기와 성역이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선과 거짓이 난무한다.
교회에서는 보통 이런 말을 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신본주의자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인본주의자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신본주의야말로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본주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 가장된 인본주의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양심’마저 쉽게 마비시킨다. 신의 이름으로 가장된 인본주의는 인간이 인간이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단 한순간이라도 도대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럼 이 글을 쓴 내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다. 덧붙여 아직도 한국에 만연해 있는 각종 금기와 성역이 ‘상식의 관’을 통과하며 정화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제 역할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책의 제목은 ‘서초교회 잔혹사’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연을 쌓은 서초교회는 한 곳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소설 속의 교회 이름을 ‘서초교회’로 정한 이유는 서울 강남의 ‘서초동’이 지닌 부유함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특정 교회를 지칭한 것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서초교회는 단지 부유한 동네 안에 위치한 대형 교회를 상징할 뿐이다. 이 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묻는다면, 내가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풍자이며, 이는 단지 조소가 아닌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정할 때<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힌트를 얻는 빚을 졌다. 주목받는 영화로 좋은 영감을 주신 유하 감독에게,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감사함을 전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좋은 조언을 아끼지 않은 후배 유인호와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우리 사회를 잔혹하게 만드는 성역과 금기가 사라지도록 만드는 데 책보다 더 중요한 매체는 없다고 확신한다. 스마트폰 대신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독자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하나님은 십자가 장식을 한 그 거대한 건물에 거주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묻는 촌철살인의 블랙코미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지속적이고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해온 옥성호의 첫 장편소설이다. 다수의 저서가 기독교 분야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 교단에선 이미 진보적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에게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다. 사랑의교회 설립자이며 원로목사였던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라는 사실이다. 옥한흠 목사가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국 기독교 교단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존경받아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0년에 작고했음에도 옥한흠 목사는 최근 사랑의교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해 거듭 회자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저자가 중요한 발언들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3부작’을 포함한 저자의 기독교 관련 저작들은 선친이 평생을 두고 실천해온 종교적 양심의 연장선에서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서초교회 잔혹사』 또한 방황하는 한국 기독교와 목회자의 일탈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그동안 천착해온 작업의 문학적 버전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 『서초교회 잔혹사』는 현실에 빗대어 그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는 알레고리와 일관성 있는 주제의식, 유머러스한 상상력과 재기 발랄한 문체 등이 문학으로서의 독자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는 단지 글재주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고유의 영역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등단이란 절차를 밟은 적 없는 사람의 첫 장편소설이 본격문학의 영역 안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다. 더구나 첫 소설을 통해 확고한 자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기대를 품게 할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그에게는 또 다른 작품의 초고들이 있거니와, 이 소설을 굳이 첫 장편소설이라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단지 사용되었을 뿐이다. 믿음과 위선, 신앙과 욕망에 대한 가장 유쾌한 방식의 질문!
소설 속의 김건축 목사는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사업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는 사람이다. 그의 신앙은 교회의 신도 수와 십일조 액수, 사업의 규모에 비례하여 깊어진다. 이 모든 게 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일이므로 방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속임, 모략과 배신, 협박과 폭력도 하나님의 사업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한인교회를 운영하던 김건축 목사가 서초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한다.
김건축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특유의 화법과 카리스마로 단숨에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사로잡는다. ‘쌀루리 긴다 꼰다리 말까…’ 그는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언어로 만들었다는 찬양을 가르치고, 교역자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목청껏 따라 부른다.
그리고 글로벌 미션(세계 선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토익시험을 치를 것이며, 교역자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교회 내에 언론홍보팀이 신설되고 교역자들은 담임목사와 전무목사, 부장목사, 과장목사, 목사, 파트타임 목사 등으로 철저히 수직 재편성된다. 그리고 글로벌 미션 팀을 이끌 마이클 서 목사와 알렉스 리 목사가 소개된다. “에이멘~” “핼럴루야~” 마침내 교역자들의 발음도 서서히 바뀌어 간다.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황당무계하고 코믹하기까지 한 상황들이 이후로도 이어진다. 김건축 목사는 지식경제부에서 주관하는 신지식인에 선정 되고, 『글로벌 마인드로 정복하는 영어회화』라는 책도 출판된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건축 목사의 등장과 더불어 서초교회는 날로 번창한다. 서초교회를 통해 글로벌 미션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꿈은 그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김건축 목사의 눈부신 활약은 마침내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한 인터넷 언론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가면서부터다. 글로벌 미션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생명을 건 기도의 사투를 벌이고 왔다는 김건축 목사가 수염을 기른 채 나타나 사탄의 무리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팩트에 기반한 르포르타주도 아니다.
신도 수 늘리기에 급급한 일부 대형교회와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위선적 태도에 대한 비유적 성토이며, 금기와 성역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가하면 참담한 종교적 현실에 대한 포복절도할 풍자(諷刺)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풍자이며, 조소가 아닌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풍자이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금기와 성역을 깨고 상식의 관을 통해 정화되는 데 이 소설이 기여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목차
프롤로그
사자 사냥꾼의 등장과 살생부요루바족 언어가 준 교훈잇 해즈 섬 굿 포인트글로벌 미션을 수행하라마침내 올 것이 오다하나님의 거룩한 뜻보이느냐, 공중의 저 새가중용된 이유가 밝혀지다운명을 건 최후의 영적 전쟁소나무야, 소나무야, 푸른 소나무야작가의 말
출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1953
2014-03-07 10:16:3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