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I A True Believer?
나는 참된 믿는 자인가?
In this brief study we want to consider the important, soul-searching question: Am I a true believer? To help you answer this question, consider the following questions. Think about each one in an honest, personal way. Take time to look up the Bible verses that are given along with each question. Ask yourself: Who am I really trusting for my eternal salvation?
Do I see myself as a guilty, lost sinner who stands condemned before a holy and righteous God (Romans 3:10-19,23)?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은 상태의 죄가있는(유죄의), 잃어버린 바 된 죄인으로 보는가(로마서 3:10-19,23)?
Do I recognize that my own heart is deceitful and wicked and incurably sick (Jeremiah 17:9; Mark 7:21-23)?
나는 나 자신의 마음이 거짓되고 악하며 고칠 수 없이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예레미야 17:9; 마가복음 7:21-23)?
Do I see myself as deserving of death and hell (Romans 6:23)?
나는 나 자신이 죽음과 지옥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가(로마서 6:23)?
Do I realize that if God were to give me what I deserve and repay me for the way I have lived, then I would be totally destroyed (Psalm 130:3; compare Psalm 103:10)?
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받을만한 것과 내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내게 돌려 주실 것을 나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가(시편 130:3; 시편 103:10과 비교하라)?
Do I recognize that there is absolutely nothing I can do to save myself (Titus 3:5)?
나는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가(디도서 3:5)?
Do I understand that trying my best to perform good works will never gain me or earn me an entrance into heaven (Ephesians 2:8-9)?
나는 선한 행위들을 행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를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혹은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가(에베소서 2:8-9)?
Do I realize that my church or my religious system cannot save my soul (Jeremiah 17:5)? 나는 나의 교회 혹은 나의 종교적인 체계가 나의 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가(예레미야 17:5)?
Am I convinced that my own righteousness and my own goodness falls far short of the righteousness that God requires and demands (Romans 3:10-12; 1 Corinthians 6:9-10)? 나는 나 자신의 의와 나 자신의 선함이 하나님께서 바라고 요구하시는 의로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확신하는가(로마서 3:10-12; 고린도전서 6:9-10)?
Do I, in and of myself, have any personal credentials that are acceptable before God (Isaiah 64:6)? 나는 나 자신 안에 그리고 나 자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만한 어떤 개인적인 자격을 가졌는가(이사야 64:6)?
Do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God’s only Solution to my sin problem (Acts 4:12)?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을 믿는가(사도행전 4:12)?
Do I recognize Him as the only way to God (John 14:6), the only Door to salvation (John 10:9), the only Saviour for sinners (Matthew 1:21) and the only One who can give me eternal life (John 10:28; 17:3)?
나는 그분(예수님)을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서(요한복음 14:6),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요한복음 10:9)으로서,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자(마태복음 1:21)로서,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요한복음 10:28; 17:3)으로 인정하는가?
Do I understand that Jesus Christ is the eternal God (John 1:1-3) who came into this world and became a man to save me (John 1:14; 1 Timothy 1:15; John 3:17)?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영원한 하나님(요한복음 1:1-3)이시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1:15; 요한복음 3:17)을 이해하는가?
Am I convinced that He loved me even when I was a great sinner (Romans 5:8; John 3:16) and that He died and rose again to save my soul (Romans 4:25)?
나는 그분께서 내가 큰 죄인이었을 때(로마서 5:8) 조차도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의 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신하는가(로마서 4:24)?
Am I persuaded that the Lord Jesus died on the cross for my sins and that He died in my place as my perfect Substitute, dying in my stead and paying completely the full penalty for my sins (Isaiah 53:6; 1 Peter 3:18; 2 Corinthians 5:21)?
나는 주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나의 완전한 대속물로서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고, 나의 죄들에 대하여 완전하게 온전한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을 확신하는가(이사야 53:6; 베드로전서 3:18; 고린도후서 5:21)?
Am I trusting in Him and in Him alone to save me (Acts 16:31)?
나는 그분께서, 그분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고 있는가(사도행전 16:31)?
Have I come to Him in simple, child-like faith (John 6:35,37; Matthew 11:28)?
나는 단순히,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가(요한복음 6:35,37; 마태복음 11:28)?
Have I, by faith, personally received the Lord Jesus Christ as my Saviour (John 1:12)? 나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서 개인적으로 영접하였는가(요한복음 1:12)?
Am I resting my entire self on who He is (John 8:24), on what He has done (1 Cor. 15:3-4) and on what He has said (John 6:47)?
나는 나의 전체 자아를 그분이신 것과(요한복음 8:24), 그분께서 하신일과(고린도전서 15:3-4),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요한복음 6:47)에 의지하여 안식하고 있는가?
Do I believe that He is able to completely save all those who come unto God through Him, including me (Hebrews 7:25)?
나는 그분께서 나를 포함하여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모두를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히브리서 7:25)?
Do I believe the statement of Christ found in John 5:24?
나는 요한복음 5:24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가?
Is John 3:16 true of me? 요한복음 3:16말씀은 나에게 해당되는가?
Have I ever shared with others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ur (Romans 10:9-10; Matthew 10:32)? 나는 다른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이야기해 본적이 있는가(로마서 10:9-10; 마태복음 10:32)?
Am I able to say from my heart: “My hope is built on nothing less than Jesus’ blood and righteousness. I dare not trust the sweetest frame but wholly lean on Jesus’ Name.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Edward Mote]
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가: "나의 소망은 바로 예수님의 피와 의로우심에 의지한 것이다. 나는 다른 가장 좋은 어떤 것(사람,환경,감정 등)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나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서있다 --- 모든 다른 땅은 무너지는 모래이다, 모든 다른 땅은 무너지는 모래이다!"(마태복음 7:24-27)
Another helpful question that I can ask myself is this: If I were to die today and stand before God and He should ask me, “Why should I allow you to enter My holy heaven?” what would my answer be? If my answer in any way points to MYSELF (my own credentials, my own works, my own religious deeds, etc.) then I am not standing on solid ground. Here are some examples of people putting their trust in SELF:
내가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또다른 도움이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내가 오늘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그분께서 나에게 "왜 내가 너를 나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오도록 허락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무엇이 될까? 만약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대답이 나자신(나 자신의 자격, 나 자신의 행위, 나 자신의 종교적인 실행 등)을 가리킨다면 나는 반석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자기 자신에게 신뢰를 둔 사람들의 몇 가지 예들이 있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n my life I have done more good than bad.”
•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생애 동안 나쁜 짓보다는 선한 일들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 try to keep the ten commandments.”
• 하나님께서는 내가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m a member of a certain church” etc. All such answers point to ME, but salvation is not of ME; salvation is of the LORD!
•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교회의 회원이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등등. 이러한 모든 대답은 나를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There is only one reason why I can enter God’s holy heaven. The appropriate response is this: “I will enter God’s holy heaven for one reason and one reason only. It is only because of Jesus Christ my Saviour. Apart from His work on the cross I could never be saved. Apart from His life which He has given to me as a free gift, I could never enter His holy heaven. He is my only hope. He is the only righteousness I have and He is all the righteousness I need. Thank You Lord for saving my soul and making me whole.” Notice how this answer points away from SELF and clearly points to the Saviour and to Him alone!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적합한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만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분께서 나에게 값없이 주신 그분의 생명이 아니고는 나는 결코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분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은 내가 가지고있는 유일한 의로움이며 그분은 내가 필요로하는 모든 의로움이다. 주님 나의 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 대답은 자신을 강조하지않고 명백하게 구원자 그분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나를 100%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런 값없이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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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1 23:07:36 | 신혜경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만약 2천년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처음엔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과연 그때 그 시절에 있었다고 해도, 예수님을 과연 믿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예수안에" 사이트가 있었기에
제가 올바른 지식을 접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지식을 접하곤 합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춘 분의 블로그를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지동설을 말씀하시길래, 천동설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지동설이 맞다고 하더군요.
분별력이 뛰어나신 분이라도 (내가 보기엔) 틀린것을 믿을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렇든 우리는 우리가 믿어왔던 것이 공격받을때 즉각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저항합니다.
내가 믿던것이 틀렸다는 것이 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믿어왔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것이 정말 쉽지 않지요.
지동설을 믿던, 천동설을 믿던 본인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의지에 달린것 같습니다.
(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이 믿는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미신자(未信者 : 아직 믿지 않는자)들은 예수님 믿는것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는듯 합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춘 분 또한 본인이 지동설을 믿겠다고 작정하신것이지요.
그분의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남겨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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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성도들끼리도 의견충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지체들끼리...
오죽하면 사도들도 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용한 성경구절을 다시 보니 엄밀하게 사도들끼리의 분쟁은 아니었네요)
사도행전 15장.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작지 않은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니라. 이에 그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자기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니라.
지동설을 믿건, 천동설을 믿건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천동설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생각, 논리, 믿음보다 성경이 맞다는 믿음이 우선합니다.어느 성도가 말했듯이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우리의 생각이 성경과 충돌할때, 무엇을 선택할것인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긴 하나, 성도라면 성경을 우선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40년을 넘게 당연히 지동설이 맞는것이지라고 살다가, 성경말씀과 지동설이 충돌한다는것을 알게 되었을 때,커다란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본인들의 지식이 우선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과 같이 되시지 말길 바라옵니다.-------------------------------------------------------------------------------------------------
의견 차이....
어찌보면 의견차이가 없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이렇든 우리는 다 제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신비이자 기적인듯 합니다.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으니 말씀대로 이뤄질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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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12:49:12 | 김형욱
현재 미국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오랫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던 수잔 콜린스(Suzanne Collins)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헝거게임(Hunger Game)>이다.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는 평을 듣는 소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영화는 소설과는 또 다른 장르이니만치 평가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아직 소설은 읽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영화만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야기는 미래의 어느 시점, ‘팬암’이라는 제국이 지배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팬암의 수도인 ‘캐피톨’은 1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전체 영토를 지배하며 관할하고 있다. 각 구역의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정부의 체제에 순응하며 별다른 저항을 할 엄두도 못 내며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캐피톨’의 사람들이 누리는 부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매년 한 번씩 개최하는 소위 <헝거게임>이라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방식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각 구역마다 매년 2명의 10대 남녀를 자원 또는 강제로 선발하여 이렇게 모인 총 24명의 소년 소녀들을 일정한 공간 (산도 있고 강도 있는 매우 넓은 공간 임) 안에 집어넣고,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생존경쟁 게임을 시킨다. 더군다나 이 경기를 TV로 생중계하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보면서, ‘캐피톨’의 시민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걸면서 열광적으로 즐기는 이 나라 최고의 축제 이벤트가 바로 말 그대로 ‘배고픈 자들의 게임’ 즉, <헝거게임>이다.
여러 구역 중에서도 최고로 가난한 구역인 12구역에서, 어느 날 추첨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헝거게임에 나가야만 하는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16살 여주인공 ‘캣니스’는 이 경기에 자원하게 된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이제 그녀가 펼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담과 로맨스로 관객 몰입도를 한층 높여 주며, 뒷이야기 들을 끌어간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 영화의 호불호는 갈려지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눈이 적어도 아마추어 수준은 조금 벗어났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필자의 눈으로 볼 때도 이 영화.. 꽤 괜챦은 편이다. 나머지 이야기의 결과와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필자가 논의할 주제는 아니어서 생략하기로 하고,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본 영화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팬암제국은 크게 3개의 작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12구역으로 나눠진 보통 사람들의 세계다. 둘째는 캐피톨로 불리는 소위 엘리트 시민들의 세계.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엘리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공간인 세 번째 세계, 즉 헝거게임이 있다. 엘리트 시민들은 보통 사람들을 구역 안에 가두고 통제한다. 여기에 순응하고 살아가면 비록 가난하고 질은 떨어지지만 생명은 보장된다. 그래도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이들의 반란을 제어하기 위해서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이 가능한 게임의 룰을 제시하며, 보통 사람들을 헝거게임의 틀 속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살아남는 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며 반란의 기운은 사그러든다. 왜냐하면 엘리트들이 누구라도 원하면 헝거게임을 통해 정당한 (?) 방법으로 엘리트 사회로 진출하면 된다는 희망을 심어 놨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나타난 팬암제국의 모습은 매우 단순화된 구도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근본 구조가 많이 닮아 있다. 영화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있고, 대다수의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 엘리트 그룹은 독점하다시피 세상의 부를 거머쥐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삶의 질고에서 힘들어 하며 꿈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룰을 바꿔 가며 헝거게임 같은 구도를 만들어 준다. 가령 여러 가지 정치적 이념으로 판을 짜 주기도 하고, 다양한 철학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며, 때로는 경제 활동의 방식을 여러 형태로 바꿔주기도 해 가며 그 룰에 따라 게임을 하라고 한다. 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하여 엘리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피 흘리는 서바이벌 게임을 뛰며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게임의 룰 속에서 더러는 성공을 거머쥐며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희망’의 얼굴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서바이벌 게임이란 것이 본래 그렇듯이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자 혹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무한경쟁의 치달음 속에서 비록 승자로 살아남을지라도 그 성공에 상응하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 어떤 게임의 룰을 따라 헝거게임이 진행이 되고 있는가? 성장위주의 자본주의 이념 속에서 적자생존적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유물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의 룰인가? 아니면 좌파니 우파니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한물간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벌여야 하는 정치 논리의 룰인가? 서바이벌 게임 속을 바삐 뛰어 다니는 동안 우리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어느새 한명씩 숨죽어져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는 있는가? 우리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게 되었는지는 과연 제대로 알면서 뛰어 다니고 있기는 하는 것인가?
본래 3부작으로 쓰여진 소설에 맞추되, 영화는 그 표현과 시간적 제약의 한계를 감안하여 총 4부작으로 계획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명과 팬암제국의 결말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현실 세계의 결말은 어찌될지를 알고 있다. 팬암의 세계에는 없으나, 현실세계에는 존재하는 바로 그 '책'이 한 권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영화 속에 보면,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소년 소녀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각자의 오른팔에 칩을 심는 장면이 나온다. 헐리우드 영화가 잘 쓰는 서브리미널(subliminal) 기법이라는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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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1 00:38:31 | 김정훈
누군가 미명으로 작성한 글인데
인테넷 메일로 저한테 보내 왔습니다.
바른성경으로 바른예배들 드리고 바르게 교회를 하고 있는 우리도 읽어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올립니다. 참고 하세요
"기독교 자폐증"
----- Forwarded Message -----
교회는 하루아침에 부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소망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핍박 받는 자의 종교에서
부자의 종교, 배부른 자, 핍박하는 자의 종교로 변질 되었다.
주기 위해 믿었던 종교에서 가지기 위해 믿는 종교가 되었다.
평화를 위한 종교에서 전쟁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한 종교에서 내가 살기 위한 종교로,
사랑하기 위해 믿는 종교에서 사랑 받기 위해 믿는 종교가 되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지만,
예수의 교회는 하늘 보다 높은 종탑을 쌓았고,
황금으로 치장 된 제단을 세웠다.
제사를 위해 바쳐졌던 제물은 제물을 위한 제사가 되었고,
오늘도 교회는 헌금 봉투에 적힌 이름을 줄줄이 읽어대며
헌금 액수를 주보에 떡 하니 적어놓고 있다.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걸어 놓은 교회는
넘쳐나는 재물로 치장 되어졌고,
교회 안에서 예수는 아직도 벌거벗겨진 채 피를 흘리고 있지만,
피 흘리는 예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두꺼운 비단 옷을 걸친 채,
주체하지 못하는 비만의 기름을 흘리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교회의 성벽은 높아만 간다.
그럼에도 예수 믿고 천당만 가면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회 밖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는 분명 한국 교회가 처한 심각한 자폐증 증상이다.
한국 교회의 자폐증은 치료 되어야만 한다.
치료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버려야 한다.
돈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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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3:35:31 | 정구만
일루미나티가 당당히 자신을 나타내는 이유...
예전엔 프리메이슨 자체가 미스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가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려면 상당히 어려웠으나
이제는 과거(5년전)보다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의 책이나 글은 가능한 멀리 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반진리가 섞여 있을 때 어떤 것이 반진리인지 분별하기에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진리를 말하다가, 아주 간혹 예를 들어 연옥에 대한 교리를 아주 애매하게 섞어 놓으면, 그냥 따라가게 되더군요.
니므롯의 후예들 세미나를 통해서 알게 된 일루미나티 카드.
저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상당히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물론 이 세상이 사탄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간혹 까먹어서 탈이지요)
(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5-19)
이 세상이 사탄에 속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사탄이 의도한 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볼 때,
왜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계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과연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글입니다.
일루미나티(루시퍼)의 예언 사역 http://blog.naver.com/esedae/90138077833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실현되는 때 일 겁니다.
루시퍼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흉내내었듯이,
루시퍼가 예언하고, 그 예언을 이뤄나가는 것처럼 보여 줌으로 세상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고,
대중(일부러 분별하려 하지 않는)들에게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사탄의 음모(계획)가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
소위 말하는 신세계질서(NWO New World Order)를 수용하도록 세뇌 혹은 주입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탐하여 왔듯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불과 몇년 전)에는 숨어서 은밀하게 진행하던 일들을 이제는 버젓이 드러내놓고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중매체가 이미 오염되어 사탄의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eminem0814/10135690756
아마도 이젠 어느 정도 힘이 있다고 그리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신호"라는 책은 아마도 하나님의 교회에게 각성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의도일수도 있습니다.
http://truthnlove.tistory.com/1229
http://blog.naver.com/yoochinw/130095097472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사탄에게 속하여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권능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는 고아처럼 내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벧전5-7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1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이사야 41-10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벧전1-5
요약하면, 일루미나티가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는
이제 자신들의 때가 왔고, 그리고 힘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동안 거짓 대언자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로버트 슐러, 조엘 오스틴 등등), 교회 내의 거짓된 활동 (알파코스, 예수전도단(관상기도)등) 대중매체, 도서 등을 통해 세뇌를 시켜왔고 현혹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때 입니다.
We are in this world, but not of this world.
(P.S. 제가 링크를 한 블로그의 내용을 전부 지지하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의견들이 있음으로 분별에 도움이 되고자 함 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쓸까 말까 한참(3일)을 고민했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7: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10 08:02:40 | 김형욱
예전에 간증에서도 썼듯이, 본인은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그리고 기존 개신교회로부터는 별다른 실족이나 분쟁· 충돌이 없이 자연스럽게 분리가 이뤄졌으며(타지에서 학교 다님), 자습을 통해 KJV 진영에 입문했다. 기존 신앙 노선에다 KJV가 그대로 추가, 보충, 보강되는 형태로 신앙관이 발전한 사례이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서 본인은 이단들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비판하고 공격한 전적(?)이 있으나 우리나라 현대사나 교회사는 심지어 정치적인 관점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미우나 고우나 내 정신세계의 고향이니까. 예를 들면,
- 우리나라 정부가 잘못한 것보다는 북한이 저지른 만행을 훨씬 더 규탄한다.
- 과거의 독재 정권은, 민주화 인사나 용공분자들을 탄압하긴 했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적은 없는데,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들보다 그들이 더 카리스마 있게 훌륭한 큰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 옛날에 좀 무고한 사람들이 정치 정적으로 몰려 죽은 것보다는, 오늘날 국가가 흉악범에게 사형 집행을 안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열불나는 일이고 그거야말로 인권 침해이다.
- 한국 교단이 과거에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보다는(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몇몇 순교자들,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이라든가 제헌 국회가 기도로 시작한 것 등에 더 애착이 간다.
이런 식이다.
내가 자유가 있고 이만한 기독교 인프라가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를 바탕으로 KJV에 대한 믿음도 쉽게 추가될 수 있었다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 (1)
비록 모교회는 여전히 KJV를 잘 모르고 심지어 이단시하고는 있지만, 그건 걔네들 사정이고.
또한 나는 우리나라 사회와 국가 제도에 대해 피해의식이 없다.그 열악하던 여건에서 그나마 이 정도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것이 다행이고, 옛날에 저질러진 부조리는 피아식별도 안 되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게 많았다고 생각한다. 세상 정부가 교회처럼 행동하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나라 현대사에 피해의식이 많은 진영의 사람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시나리오가, 내가 보기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과 같은 사고방식은 대체로 우파 내지 보수라고 불리는 듯했다.
나는 그 반대편 성향의 진영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했다.현대사에 대해 편협한 정보로 자꾸 쓸데없는 피해의식과 반체제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주 거북스러웠고, 또 그런 진영이 대체로 반기독교 성향도 강하며 반성경적인 사회 운동도 대개 그쪽 주관이니까 말이다. 체벌 반대, 동성애와 낙태 합법화, 사형 폐지 운동 같은 것들.
글쎄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내가 미국 산골짜기에서 자랐으면 전형적인 redneck 같은 꼴통 부류가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개인적인 성향은 그렇다.난 오만하게도 킹 제임스 성경을 믿고 세상 정세를 성경으로 판단하는 크리스천일 정도이면, 사회· 정치관도 당연히 그런 쪽으로 기우는 게 마땅하다고 한동안 생각했다.
비록 내가 국가 교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지 않은가?기독당 같은 것이야 정말 멍청한 짓이지만, 까놓고 말해 학생 인권 조례 반대 서명 같은 건 공감할 만하지 않냐 말이다.
그랬는데 KJV 진영 내부에도, 교리적으로 알 거 다 알 만한 분들 중에도, 진보 성향이 강한(명백하게 성경과 어긋나는 교리는 제외하고 나머지 다른 성향이)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는 걸 훗날 알게 됐을 때 나는 굉장한 culture shock을 경험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연구와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얻은 해답은 이렇다. 이런 분들은 기존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썩어빠진 기성 교계의 '대안'으로 기독교 안티 대신 KJV 진영을 선택한 관점이다. ... (2)
기존 개신교회에서 정말 산전수전 다 겪고 힘들게 KJV 진영으로 오신 분들, 메이저급 교회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리적 배도와 부정부패, 몰상식한 짓들을 직접 본 분들은 기성교회들의 치부가 눈에 훨씬 더 빨리 들어오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수준은 정말 어지간한 기독교 안티들을 능가한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안 좋은 부분을 더욱 부각시켜 보는 듯하다.
가령, 난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을 존경할 줄만 알았지, 신사 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한국의 주류 기독교계로 이어졌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을 안 해 본 관점이었다. 한 마디로 놀랐다.
요컨대 KJV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경로로 이쪽으로 유입되었으며, 신앙 배경도 의외로 다양하다. 이것이 정치 견해라든가 기성 기독교계에 대한 호불호 차이로도 나타나는 듯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과 (2)를 비교해 보기 바란다.
물론, 성경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정치 중립적이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엔 수구 기득권층과 외세뿐만이 아니라 민중들도 똑같이 기여했다.한편으로는 부자들, 통치자들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도 똑같이 악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그런 성경으로부터 한 논조만 뽑아서 자기 프로파간다의 정당화에 써먹는 것은 잘못이다.사실은, 세상에 왜 이런 지저분한 이념 대립이 생기는지조차도 성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성장 배경과 취향의 특성상, 특정 논조에 대해 사람이 저마다 bias와 preference를 갖는 것 자체는 개인 자유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리스천도 국가 시민이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허나 반역을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이것으로 사람 인격을 판단하고 불필요하게 싸우는 일은 없어야겠다. 좌빨이든 수꼴이든 똑같이 죄인이고, 예수 믿어 거듭나면 각각 구원받은 좌빨과 구원받은 수꼴이 될 뿐이다. ^^;;
아, 물론 상대방 편을 보고 네놈들이 하는 짓이 반역과 똑같다고 싸우는 경우도 있긴 하다. ㅜㅜㅜ 답이 없네 그럼. 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판단하시길 원한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7: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9 11:56:56 | 김용묵
진화론은 도대체 성경과 조화가 될 수 있는 이론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진화론 사상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윈은 한때 신학도로서 본래 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믿게 되면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은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는데, 유명한 진화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나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같은 사람은 모두 진화론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과 진화론을 같이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지켜야 마땅할 신학교에서 조차도 진화론과 타협한 신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으나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든지, 이를 조금 변형하여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의 중간 중간에 필요에 따라 개입하여 창조를 하셨다는 ‘점진적인 창조론’,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지질학적 연대로 해석하는 소위 ‘날-시대 이론’ 등이 모두 진화론과 타협하여 나온 이론들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 사실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진화론과는 혼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의 본질은 반-성경적이다.
우선 먼저 진화론이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열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에 안식을 취하심으로 (창 2:2-3; 히 4:3, 10) 지질학적 연대와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심으로, 수억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부정케 하셨다. 넷째, 예수님 자신께서 직접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셨다 (마 19:4-6; 막 10:6).
그럼 이제 진화론이 왜 반-성경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의 조상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0 만 년 전으로서,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생존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된다. 성경은 잘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과 사람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창세기 1장), 이 말은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같이 어울려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가 있은 후에,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죽음이 들어 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더 분명하게 명시되어 나타나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롬 5:12) 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한사람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전 15:22).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물들도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기록 (롬 8:22) 함으로써, 결국 생물계에 나타나는 죽음이 사람의 존재 이후에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혹은 이것의 변형인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에 빠지는 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과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부활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요 (고전 15:12-19),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의 죄악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죽음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으로 죽음은 우리의 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가 부활을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만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진화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이 갖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우 열심이면서도 정작 그 복음의 기초를 두고 있는 부활의 사실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진화니 창조니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부활의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엡 4:13) 성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험해본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 옆에 같이 있던 한 범죄자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 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었겠지만 (눅 23:40-43),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아직 이 땅에 살면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엡 4:13), 믿음 안에 거하되 터를 다지고 정착해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골 1:23)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오직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성경과 진화론을 혼합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들이 그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졌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를 하셨으며, 따라서 창세기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에 걸맞게 재해석 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적 접근 방식의 모순을 아주 예리하게 웅변적으로 잘 지적했던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 소문이 나있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이었다. 그는 아주 열렬한 진화론의 신봉자로서 ‘다윈의 불독’ 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다윈 자신보다도 더 진화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화론을 가지고 성경 기록의 진실을 파괴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즐거워하였다. 반면에 진화론을 성경과 혼합하여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공격을 통하여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부당성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성경 구절을 직접 펼쳐 보이면서, ‘성경의 창조 기록에 진화론을 합치는 일은 결국은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창세기를 진화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리를 진리로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고 조롱하고 다녔다. 물론, 그의 말의 요점은, 결국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타협을 그만두고 진화론을 제대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성경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진화론은 잘못된 사상이다. 진화론은 우리의 신앙을 노략질하는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이다 (골 2:8). 그러나 헉슬리의 지적은 옳았다. 비록 그 자신은 성경을 불신하였었지만, 무엇이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인 줄을 잘 알고 그것을 정확히 공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공헌 할 수가 있었다. 진화론자였던 헉슬리가 오히려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진화론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지 백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며, 교회가 지켜내야 할 성도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을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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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8 18:36:20 | 김정훈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4, 17).
또한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성경이 기록한 인간의 기원과 타락,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속하심의 역사, 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것은, 바로 기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본주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심들을 제기해 왔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하셨으나 실제로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으셨다는 사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숨을 거두셨는지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으신 고통은 어느 정도쯤 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로마 병정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채찍질을 받으셨다. 이 채찍은 플래그럼(flagrum)이라고 불렸는데, 가죽 끝에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와 납 조각을 붙여 만들어,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을 뜯어냄으로, 여러 번 내리치게 되면 피부 밑에 근육까지 뜯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피부 조직을 망가뜨리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는 대략 50kg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게로 인하여 고통은 가중되고, 마침내 언덕에 다다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있었을 것이다. 의사인 트루만 데이비스(Truman Davis)는 그의 저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온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 팔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고, 결국은 숨을 못 쉬게 됨으로, 십자가상에서 질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주면 막힌 숨을 내뿜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리를 꺾어 주게 되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할 수가 있는데, 성경 (요 19:31-34)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 곁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의 다리를 꺾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그가 이미 죽은 관계로 꺾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 19:33-34). 상처가 난 곳에서 많은 물과 피가 흘러내리는 경우는 십자가상에서 심장파열로 죽은 경우에 나타난다고,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증언(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서, 더블린 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사무엘 호우톤(Samuel Houghton)의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피만 나왔을 것이나, 피와 물이 같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로마 병사는 그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고 4 복음서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또한,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막 15: 44-46),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심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자,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은 갖추어 졌다. 하지만, 부활이 문자 그대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조쉬 맥도웰은 그의 저서 <부활의 요인(The Resurrection factor)>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될 일곱 가지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봉인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 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이다.
셋째, 당시에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의 무게는 대략 1,400~1,800 kg 이라고 한다.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다고 가정했을 때,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렇게 큰 돌을 그들에게 전혀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나셨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 하려고 하였겠는가?
증거의 신빙성을 다루는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로서, 하버드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 분야의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증거의 법칙에 관한 논문>을 남긴 바 있는 싸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조사해 본 끝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그 어느 사건보다도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확실한 증거들 앞에 더 이상 어찌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모두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게 외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하셨으니,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다 같이 소리 높여 부활하신 우리 주를 찬양 할 찌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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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7 17:26:31 | 김정훈
아픔은 아파 본 사람 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그렇듯이 고통의 감각 또한 매우 상대적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하여 느끼는 반응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되며, 주변에서 같이 아파함으로 어느 정도 고통의 경감은 가져 올 수 있을지라도,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고통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하며, 그래서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 몸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비명과 함께 손을 떼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손은 다 타버리고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은 또한 우리의 성격 형성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크게 앓고 난 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통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조직의 세포막이 부서지면서 주변에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호르몬 같은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근처에 있는 통각전달신경세포에 신호를 보내어 그 신경세포의 반응 문턱을 낮추게 한다. 이제 반응 문턱이 낮아진 신경세포는 평상시에는 무시해 버리던 동일한 크기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반응은 뇌로 전달되어져 우리에게 통증을 느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만일 프로스타글란딘의 역할을 방해 한다면 진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먹는 ‘아스피린(aspirin)’이나 ‘이부프로펜(ibuprofen)’ 같은 성분이 들어 있는 약들이 이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함으로써 진통제로써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우리에게 타이레놀 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한 진통제도 그 안에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 이라는 성분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으며, 역시 간접적으로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진통제들은 일반적으로 몸의 통증을 억제하는 데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불안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같이 수반될 때에는 아편류 만큼 진통효과가 큰 물질은 없다. 보통 양귀비에서 추출해낸 모르핀(morphine)이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모르핀은 우리의 뇌와 척수 속에 들어가 통증 전달의 신경경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우리 몸의 통증을 전혀 못 느끼게 하는 매우 강력한 진통제로 병원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그 양을 너무 많이 늘리게 되면 우리의 뇌 속에 황홀감을 만들어 결국은 중독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힘도 가지고 있는데, 일부 십대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점점 사용 증가 추세에 있는 헤로인(heroine)도 이 모르핀의 변형체인 것을 보면 그들이 헤로인에 탐닉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중독성 때문에 만성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일지라도 의사들은 모르핀을 처방하는데 상당히 신중을 기하고 있고, 일단 처방이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 양을 조절하는데 따른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의 몸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모르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endogenous 인데, 여기에 morphine을 결합하여, endogenous morphine 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엔돌핀(endorphine)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엔돌핀은 아편 속의 모르핀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속에서 스스로 생성과 분해가 이루어짐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중독을 일으키거나 할 염려가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진통제이다. 엔돌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분비되어 우리 몸의 통증을 완화시키고 행복감을 갖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감수 해내야 할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진통의 선물도 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실 때에 병사들로부터 아편류성 진통제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들이 쓸개를 섞은 식초를 그 분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그분께서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아니 하시더라”(마 27:34)
여기에서 나오는 쓸개란 단어는 히브리어 ‘Rosh’에서 온 말로서 이 말은 보통 쓴 맛을 내는 독성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신명기 29장 18절에서는 ‘쓴 것’으로, 그리고 신명기 32장 32절에서는 ‘쓸개 포도’등과 같은 말로 붙여져 사용되고 있다. 특히 Gesenius가 쓴 히브리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양귀비를 뜻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죄수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줄 목적으로 이와 같이 쓸개를 탄 식초나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도 이와 같이 관습에 따라 일종의 모르핀과 유사한 효능을 발휘하는 아편류성 진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약을 거절하셨다. 우리 몸을 친히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직접 만드신 예수님께서 어찌 마약의 진통효과를 모르시겠는가? 하지만 그 분께서는 능히 유혹을 물리치시고 스스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사야서에 그 답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53:3)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53:4)
“그는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53: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53:5)
그렇다. 예수님께서 친히 받으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 하사 그를 고통에 두셨은즉..” (53:10)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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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고난 주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신 구원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함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자 예수님께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고통’을 일체 피하지 아니하시고, 몸소 직접 겪으셨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감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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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5 22:41:39 | 김정훈
제가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만난 지도 10년 남짓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도 많이 없고 해서 이해하는
데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출판사를 통해서 좋은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
다.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킹 제임스 영어에서 쓰인 단어들에 관한 것과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80% 이상을 만들었
던 하나님의 사람인 틴데일에 관한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경과 함께 많은 은혜를 누리셨으면 합니다.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특징을 보여 주고, 킹 제임스 영어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
1. In Awe of thy Word : 'New Age Bible Versions(뉴에이지 성경 버전들)', 'The Language of the King James Bible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를 쓰신 게일 리플링거 박사님의 책입니다. 우리말로 아직 번역되어 있는 것은 없으며, 킹 제
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탁월함과 그 특징들, 뉴 킹제임스, NIV 등의 교리와 언어학적으로서의 문제점, 킹 제임스 영어
성경에 있는 알파벳의 의미, 역사 등을 잘 설명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내용이 길므로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2. 알파벳만 알면 영단어가 보인다/최재봉/21세기북스 : 위 책에서 영감을 얻은 최재봉 형제님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의 알파벳 A부터 Z까지 알파벳 자체가 '어떤'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게일 리플링거 님의
책이 어려우신 분께서는 이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내용이 재미가 좀 없
을 수 있겠지만,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3. By Definition : 제임스 낙스 목사님께서 지으신 킹 제임스 영어 성경 중의 어려운 단어들을 영영 사전 식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저도 선물 받은 책이라서 요즘 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 Begat : 최근에 나온 책으로 영국의 David Crystal이 지은 책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 속의 영어가 요즘 현대인들, 대중
매체, 노래 등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 해외 배송을 통해 구입했
습니다.
마지막으로 틴데일의 일생과 그 당시 영국 사회의 상황과 주변 인물들(토마스 모어, 헨리 8세, 앤 불린 등)을 잘 보여주
는 번역서를 소개해 드립니다. 틴데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강력 추천해 드립니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에 대
한 여러 가지 설명도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베스트셀러/브라이언 모이너핸 지음, 김영우 옮김/민음in
앞으로는 제가 알고 있는 좋은 책들과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나누고 공유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0:1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2 12:46:27 | 송호
잠언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로운 길을 가는 자, 부지런한 자, 겸손한 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 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순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제 잠언에 기록된 내용을 한 말씀 한 말씀씩 따라가 보면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명철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잠언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결국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명철과 지식조차도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6). 그런데,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얻을 수 있으며 (9:10), 그것을 얻게 되는 자들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3:18).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하며, 이로써 ‘순종’하는 자가 ‘생명나무’를 얻게 됨이 자명 해진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담은 이에 대하여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롬 5:19)
결국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순종하는 자이며, 생명나무를 얻게 되는 자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계속해서 지혜가 으뜸가는 것이고 (4:7)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고 (4:11) 말하고 있다.
잠언에서 명철은 지혜와 거의 동등하게 사용되어져 나온다. 예를 들면 잠언 3장 13절에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니”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2:2),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4:5), “지혜가 외치지 아니 하느냐? 명철이 자기 음성을 내지 아니하느냐?” (8:1),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직접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명철들로 하늘들을 굳게 세우셨도다” (3:19)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지혜와 명철은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로 봤을 때는 거의 동의어처럼 바꿔 사용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볼 부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세운 명철을 의지하거나 (3;5), 자신의 눈에 지혜로운 자, 즉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주의하라고 (3:7) 잠언 기자는 주의를 주고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의 동의어처럼, 그러나 다른 뉘앙스로 반복과 강조의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지식은 지혜와 어떤 관계일까? 지혜로운 자는 학식 (혹은 지식)을 더하게 된다 (1:5). 지혜는 재치 있는 창안물들에 대한 지식을 찾아낸다 (8:12). 지혜로운 자들은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쌓게 된다 (10:14).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가르치게 되고 그 결과 그의 입술에 학식을 더하게 된다 (16:23).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분별 있는 자라 불릴 것인데 (16:21), 분별 있는 자 즉,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에 지식을 얻고 그 귀는 지식을 구하게 된다 (18:15).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지식도 얻거나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 즉, 지혜의 시작을 이루는 것 (9:10) - 이 이제는 잠언 기자가 적은 것처럼 지식의 시작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1:7).
결국 이 모든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자가 되면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얻게 됨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꺼이 순종하기 원하는 그 지혜가 있으면 지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며 세상적인 지식 - 꼭 구원과는 직접 관계없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 유용한 지식들을 말함 - 조차도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더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오해 하듯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수행이나 명상이나 선한 행위를 통하여 명철(깨달음)을 얻어, 점차적으로 지혜에 이르게 됨이 아님을 유의 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뉴에이지와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우리가 지식에서 명철로, 명철에서 지혜의 순으로 단계별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인 '호루스의 눈'은, 우리들이 수양과 참선과 선행을 통하여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그들이 말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 지혜를 그들은 ‘광명’이라고 부르며, 거기서 소위 ‘일루미나티 (Illuminati)’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그 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순종’을 택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깨달음 가지고는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지혜를 받게 되면 (말씀에 순종을 의미) 우리는 오히려 지식에도 풍성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비밀이요 세상과 믿는 자를 구분 짓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다.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 칭함을 듣는 것은 바로 순종을 이룰 때이다. 그리고 그때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지식은 지혜를 얻으면 더 얻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더라도 위에서 부어 주는 은혜가 없이는 결단코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지혜의 근본이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는) 구원의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다! (빌립보서 2:5-11 참조).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순종함으로만 그 생명을 같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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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19:57:26 | 김정훈
현대를 가리켜 과학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과학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이 만큼,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의 혜택을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이 누리고 살고 있다. 집집마다 전기를 이용하여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며, 비행기를 타면 지구상의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단 하루면 다다를 수가 있다. 인공위성은 안방에 앉아서 전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며, 컴퓨터는 인간의 생각까지 대신하여 준다. 그런가 하면, 사시사철 언제라도 원하는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병원에 가면 심장도 새 것으로 바꾸어 준다. 그야말로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 까지 과학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과학이 우리 앞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갖고 있는 학문적 방법의 특수성에 그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은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하여, 반복되는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그 현상 배후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고 이 원리를 다시 사물에 적용함으로써,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실험적이라는 말로 환원될 수 있으리만큼, 과학에서 실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물론, 실험을 하지 않고 단지 이론만으로도 과학적 활동을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이 소위 ‘과학적’ 이라는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적으로 입증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본질상 그 성격이 다른 과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창조론이나 진화론 같이 기원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기원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과학과는 달리 현재가 아닌 ‘과거’를 다루며, 따라서 과학적 방법의 고유한 성격인 관찰과 실험을 적용할 수가 없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는 소위 ‘과학적’ 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렵지만, 현재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인 이론을 추론해 내고 그 이론의 타당성을 또한 새로운 이론에 맞추어 점검해 볼 수 있으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차이점을 고려하여, 미국 Dallas 신학교의 Norman Geisler 교수는 기원의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을 ‘기원과학 (origin science)’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도록 문명의 혜택을 제공해 주는 일반과학을 ‘기능과학 (operation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기원과학’과 ‘실험과학’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결국, 기원과학은 실험과학과는 달리 실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원의 문제는 과학적 연구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과학은 단지 그 이해를 돕는 한 방편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진화론자가 무슨 ‘과학적’ 주장을 하더라도 그 배후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 접근의 해결 방식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실험과학과 같은 권위를 갖기는 어렵다. 물론 이것은 창조론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으로 기원에 관한 문제를 절대 ‘증명’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증거’를 논할 수 있을 뿐임을 십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다고 선포한다. 과학의 눈으로 보아도 우주의 기원을 창조주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결론이다. 정직한 과학은 성경과 모순이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을 도저히 우리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분명히 보이게 하며 깨달아 알게 하고 있으니 (롬 1:20),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고 피조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기원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우주와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 발견할 수 있음이 하나의 커다란 감격이 될 뿐만 아니라, 실험과학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세세한 과학적 사실들을 통하여도 남다른 즐거움을 얻게 된다. 과학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성질로, 그리고 어떤 기전으로 그것들을 움직이게 만드셨는지를 알 수 있는 특권은 과학적 통찰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모르고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일단 하나님을 가까이 알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솜씨를 같이 느끼며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 같아서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과학자’가 아니신가~!
과학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물론 그것은 말씀에 기초한 바른 신앙 안에서 발견되고 사용되어져 갈 때에 한하여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법칙을 드러내주는 과학적 발견들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채우고 정복해 갈 뿐만 아니라 (창 1:28),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찌 이 또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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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17:54:05 | 김정훈
정목사님의 설교와 글들을 읽으며 많은 깨달음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마귀인가 귀신인가'를 읽으며 몇가지 질문을 올립니다.
1. 사탄과 마귀의 구분
2. 마귀와 마귀들의 차이점
3. 성경에 보면(한 예로)
마 8:28 또 예수님께서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스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시매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그분을 만났는데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가지 못하더라.
'마귀 들린 두 사람'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마귀는 타락한 천사인데 천사가 사람의 몸에 들어 갈 수 있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1 05:15:14 | 길공태
1. 기독교에는 왜 이리 이단이 많은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꺼리는 불신자들이 내세우는 구실 중 하나로는 “기독교계엔 왜 이리도 골치 아프게 이단들이 많냐(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 아닌 줄 내가 어떻게 확신하고 가겠냐)”가 있다.
옛날엔 본인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낙담하고 시험에 든 적에 있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만 항변하는 건 너무 나약하고 궁색해 보였다. 이에 반해 전세계적으로 잘 통합된 단일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천주교가 일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먼 훗날 성경을 통해 알게 되면서 본인은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이런 열등감이 사라졌다. 성경의 조명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과 육신의 깡만 있었다면, 본인은 과거 시대엔 분명 교황이나 종교 재판소 관원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독교에다 세상 권력을 접목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단들을 잡아 족치는 일에 열심을 냈을 것이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조무래기 이단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 기독교계의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전 11:19 같은 뜻밖의 구절이며, 대처법은 딛 3:10 정도가 고작이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 주변에만 진딧물이 들끓듯, 인간의 혼이 달린 영적 전쟁터의 입구는 ‘당연히’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험한 꼴이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그 꼴 보기 싫다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마다한다면, 마다한 사람만 손해이다!
기독교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기독교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언뜻 보기엔 이건 비논리적인 아전인수 자기도취 정신승리법 같은 주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진짜로 그것 때문이다. 왜 전세계의 신흥 종교 교주들 중에 부처나 공자, 마호메트를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자처하거나 대체한다는 부류는 넘쳐나는 걸까?
우리끼리 통하는 비유를 동원하자면 이렇다. 왜 전세계의 성경들은 NIV나 NRSV 같은 역본을 대체하지 않고 오로지 KJV하고만 자신을 비교하며, KJV만을 극복과 타도, 대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그런 맥락인 것이다.
작정을 하고 특정 이단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회심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글이라도 쓰려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 믿음만을 방어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이단들에 대해서 공부하려 애쓸 필요 없다.
일례로, 한국의 기성 교계에서는 신천지 때문에 교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신천지 출신의 위장 신자들을 가려내는 매뉴얼을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성도들을 별도로 교육시킬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자들이 성경대로만 잘 대처하면 이단들은 아무도 힘을 안 보태 주니 제풀에 지쳐 없어지게 돼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교회의 에러 복원 알고리즘인 것이다. 저런 수준 낮은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되며, 물리력, 행정력, 폭력 같은 것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교리의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방황하고, 어쩌다 혹세무민하는 이단 교리에 훅 가 버리기도 한다.그런 와중에 이 킵바이블이라든지 청지기 같은 사이트를 찾은 분이라면 일단 웰컴이다. 잘 찾아왔으며, 방향을 바르게 잡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아마도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며, 어쩌면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 진영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은 무료로 차려 놓은 자료라는 뷔페 밥상은 아주 풍부하지만, 여러분에게 일일이 떠먹여 주고 서빙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그래서, 그런 분들께 당부하는 점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라도 자신의 연령대와 신앙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건 필수이고, 또 스스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도 가능한 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작문하면서 올릴 것을 권한다.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이트에서 긴 글을 달랑 복사-붙이기만 해 놓고(혹은 링크만), 반박해 달라는 식의 성의 없는 글은 어느 사이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그건 완전 비매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분야이든 고수는 태어날 때부터 고수 딱지를 달고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묵묵히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붙고 노하우가 저절로 생길 뿐이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작은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인은 영적으로 어리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2. 나의 이단 퇴치 사례
(1)먼 옛날, 2000년 말의 일이다. 고등학생 신분이 끝나가던 시절에 본인은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둘로스 데우)라는 책을 아주 우연히 접했다. 이 책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이니, 출간된 지 몇 달쯤 뒤의 일이다.그땐 내가 비록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죽고 나면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생과 윤회가 웬 말이냐 싶었다.
그 책에 담긴 주장 중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원래 기독교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n세기경에 무슨 공회를 거치면서 이 교리가 부당하게 삭제되었다. (가톨릭이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줬구나! 세상에!)-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국가별로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불공평하기 그지없는데, 인생이 겨우 1회로 끝이라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다. 각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다.- 욥 3:11-26은 자신의 전생에 대한 회상이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다. (마 11:14)
글쓴이가 누구인지, 한국 교계에서 어떤 평판이 있는 사람인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다른 저서들을 보아하니 글쓴이는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고 이단끼가 농후한 사람이긴 하다. 그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명제 자체를 공격하는 듯했다.
본인은 사람이나 소속 교단에 대한 편견을 일체 배제하고, 주장과 교리만을 오로지 성경적으로 스스로 비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비평을 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성경 지식이 부족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인생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하는 교리를 어찌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의 선택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렸다.마치 불치병 환자를 미래에 의료 기술이 개발될 때를 염두에 두고 냉동 창고에 보관해 두듯, 본인은 그 책을 내 머릿속 냉동 창고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수많은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2003~2004년 사이에 ‘서서히’ 솔루션이 나왔다. 책의 저자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전생· 환생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내세나 부활 문맥인 구절을 어떻게 이상한 교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지 디버깅이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본인이 가장 긴 시간을 두고 혼자 힘으로 이단 교리를 교리 증명을 통해 퇴치해 낸 첫 사례가 되었다.
(2)2000~2001년 사이엔 천주교 교리도 접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형제들을 위한 천주교 이야기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아주 자상하고 박학다식한 신부와 대담을 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고, 천주교가 기독교계의 큰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로 개종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변명과 해명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면죄부가 아니고 다른 개념인데 개신교 쪽에서 악의적으로 천주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거나, 마리아 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다를 게 없다는 식. 막 6:3에 대해서도, 원어를 들이대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사촌이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고 둘러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개신교가 태생상 지닌 약점과, 그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천주교 관행을 빌미로 개신교도 결국은 천주교가 큰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진짜 교회사를 알기 전까지는 이들의 주장을 도저히 완벽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니다 싶었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나중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거기서는 고전 3:15 ‘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연옥을 거쳐서 구원받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써 놨었다! (아예 대놓고 ‘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이라는 묘사가 들어간 성경 역본도 있다)특히 본인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 옛날에 영국에서 위클리프라는 어느 악당이 갱을 만들어서 이단 교리가 들어간 잘못된 성경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3)여호와의 증인이야 일단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맹렬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도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와 배척의 대상이 돼 있다. 포교하는 모습이 좀 지적이고 논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얘들이 성경을 변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본인은 거부 모드로 들어갔다. 아직 KJV를 모르던 시절이어서 NIV를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런 변개된 역본과 비교해 봐도 이들의 신세계역 성경은 워낙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KJV 덕분에 요일 5:7과 ‘독생하신 아들’(요 1:18) 같은 아킬레스건까지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완전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게임 끝.
(4)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성경적으로 맞다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안식교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었고, 그때 본인은 지금과 같은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라든가 신· 구약 바르게 나누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문제 없이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인데 제4 계명은 그럼 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에 걸렸다.
이것은 나중에 출 31:17을 통해 완전히 결론이 났다. 성경 역본 문제가 해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십일조 문제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해결됐다. 주일 예배는 그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에서 유래된 신약 성도들의 전통일 뿐이다.
(5)다른 대부분의 이단 교리들은 pre-KJV era 때 접한 것들이고 KJV 진영 내부에서 완전히 격파에 성공한 반면, 딱 하나 KJV 진영 내부에서 접한 유일한 이단 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이다. 다른 진영이나 교계는 종말론이 더 엉망이고 전천년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런 문제로 논쟁을 할 배경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환란 통과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온갖 교회사 자료와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은 이 문제는 더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앙 논리와 상식 수준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내가 보기엔 이건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부정하는 짓이고, 자기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3. 이단 판별을 넘어서 더 큰 목표를 추구해야
본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던 2004~2005년경에는 지금과 같은 교리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교회 대환란 논쟁을 끝으로 본인은 지금까지 무슨 이단 교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하거나 싸운 적이 없다. 신앙 논리, 기독교 변증, 교리 노선에 관한 한은 완전에 가까운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가져다 준 영적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예전에는 물증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힘겹게 방어해야 했던 이단 교리들을 총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그나마 남에게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는 건, 나는 KJV를 모르던 아주 먼 옛날부터 기독교의 근간은 성경이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이 위조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관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교리가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지, 또 궁극적으로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창조· 구원· 성화· 부활·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끝나는지를 늘 검증했다. 이렇게 하면 이단에 빠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겨우 이단 교리 가려내고 논쟁이나 하려고 KJV 성경 공부를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마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목적이 오로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수준이 낮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고,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비교 잣대는 이단들도 아니요, 같은 진영 안의 다른 성도도 아니요, 예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생 중에도 일부 머리가 좋은 애는 한자와 영단어를 줄줄 외우고 수학 미적분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초등학생이 알아서 남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고, 부모가 때려서 양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영재’가 존재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10대 때 죄와 심판, 이신칭의 구원을 이해했으며 구원의 확신을 느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KJV가 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지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이단 교리의 자체 필터링 기술까지 갖췄다. 하지만 그런 교리 공부의 중심에는 ‘나’와 ‘개인적인 지적 만족’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이 내 정신 연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가 막힐 때는, 쓰는 글에 육두문자도 막 들어가고 글에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딱히 증오나 피해의식, 악이 받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사랑의 의분도 아니었다.
“남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 글 내용을 알아듣고 동지가 될 사람만 여기 알아서 붙어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가 당장 열불이 나 있는데 억지로 감정을 죽이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위선과 가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키보드 배틀이 붙었고, 검색 엔진에서 내 이름을 치면 천주교 사이트에서 내 욕을 해 놓은 게 뜰 정도로 악명(?)도 떨쳤다.
겁도 없이 이런 무모한 생각으로 수 년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여러 글을 올렸는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와 내 글을 통해 자기 구원을 재정립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을 뜬 분들이 몇몇 생기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세가 격분한 나머지 바위에게 말로 안 하고 바위를 막대기로 쳤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려 주신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뭐, 그 시절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 열정과 패기(?) 덕분에 그때 ‘가~끔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옛날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잘 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쑥스럽다.
본인은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와 성화, 최종 완전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최근에야 정립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옳다구나 교제를 끊고 짤라 버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마음밭을 갈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나의 신앙관을 심으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어울리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믿고 행하는 모습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보면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됐다.
나의 말과 행실로 인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갈면서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저놈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저 작자가 믿는 걸 믿느니 차라리 교황, 우리 신부님 말씀을 듣겠다” 이러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결국은 눈높이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의 수위 자체에다가 물을 타라는 소리도 절대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단번 속죄, 킹 제임스 성경, 구원의 영원한 보장, 환란 전 휴거 체계를 만든 분께서 크리스천들을 바로 하늘로 안 데려가고 남겨 놓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 주고 남을 나보다 더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을 상대로 스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독교회의 reproduction(믿음의 전수와 재생산)과 error-correction(외부로부터의 이단 교리와, 교회 내부의 불화 등에 대처) 전략은 응당 이를 염두에 두고 수립되어 있다.
본인은 성경에 입각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내 영리를 위해서나 내 감정 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남을 생각해서 독자가 영적으로 잘 되고 딤전 2:4처럼 되길 원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게 독자들에게 ‘오해 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들로부터 당장 동의는 못 얻더라도 “저 녀석 정말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혼의 회심률도 옛날보다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도 이단들을 폭로하고 교리 분석하는 것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마치 튜닝의 끝은 순정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곳에 오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본인이 오랜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진리를 이렇게 공유하길 원하며, 우리 모두 질문을 올리든 간증이나 칼럼을 올리든, 그 큰 목표를 잊지 말고 온라인 공간에서 교제할 것을 감히 권해 본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22:33:24 | 김용묵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자 하여 책을 폈을 때 제일 먼저 대하는 말씀이 창세기다. 그런데 현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분이 또한 창세기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이 사실(fact)로 믿어지면 이어지는 성경의 다른 모든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셨음을 믿는 자라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이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기록된바 그대로 믿겨지느냐 하는 것은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 안의 모든 생물과, 그리고 인간을 어떤 순서와 과정으로 창조하시는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 즉, 공간(하늘)과 시간(처음에), 그리고 땅(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로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물 위에서 움직이시며 그 모습을 만드셨다 (2절). 이때 ‘움직이다’로 표현된 히브리어 ‘rachaph’는 예레미야 23장 9절에서는 ‘떨리며’로,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너풀거리며’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과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어떤 에너지가 전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상상해 보라. 마치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지구를 품고 그 안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넣으시며 지구를 빚고 있는 장엄한 창조의 모습을!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는데, 이 빛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태양 빛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성질로서의 빛 그 자체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은 물론이고 전자기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빛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 빛은 우주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며 지구를 향하여 비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분 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는 어둠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시고, 지구에는 첫째 날이 오게 된다(5절).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을 의미하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넷째 날 나오게 될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지구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저녁과 아침은 어떤 형태이든 빛을 향하여 지구가 한 바퀴 스스로 도는 자전을 하면 생기는 것이지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중에 넷째 날 이후 태양이 생길 때 지구는 이제 태양 주위로 도는 공전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훗날 이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이때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땅에 뿌리어 오랜 기간 식물이 자라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곧바로 이미 다 자란 식물이 땅에서 나오게 하셨다 (11-12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이미 그 잎사귀 안에 일정 기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이미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도 굳이 태양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있어 하등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바로 다음 날 태양을 또 만드시고, 그 태양으로 하여금 지구를 비추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 식물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양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과일 맺는 나무의 출현을 바다의 많은 생물들이 나타나고 수백만 년이 지난 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식물이 먼저라고 말함으로 진화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흥미롭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가치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서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들과 물속의 생물들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여기에서 다시 한 번 ‘bara’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히브리어에는 보통 ‘만들다(make)’혹은 ‘짓다(form)’로 번역되는 ‘asah’와 ‘yatsar’라는 동사가 따로 존재한다. 이들 단어는 ‘bara’와는 달리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을 가지고 다만 형태와 조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bara’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동물을 창조하실 때 넣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20절에 보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생명(life)’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히브리어 ‘nephesh’를 번역한 말로서, 보통 우리가 ‘혼(soul)’ 또는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식물은 비록 ‘몸(body)’은 동물처럼 흙의 요소를 비슷하게 갖고 있지만,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는 ‘혼’이 존재하지 않는 구별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다 (24-31절). 앞서 20-23절에서 동물을 만드실 때 ‘bara’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는데, 25절에서는 ‘asah’즉, ‘만드시니라(made)’를 사용하신다. 왜 그럴까? 앞에서 물과 공중에 거하는 동물들을 만드실 때 ‘nephesh’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거주지만 다른) 같은 종류의 동물을 만드실 때에‘asah’가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bara’가 다시 한 번 (27절), 그리고 ‘asah’와 함께 (26절) 동시에 사용 된다. 여기서 ‘asah’가 사용되었다는 말은 이미 다른 피조물에게도 존재하는 것 즉, 사람의 몸과 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27절에 사용된 ‘bara’는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근본적인 새로운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새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세밀하게 우리 사람을 위하여 공간과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을 미리 채우시고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오직 사람에게만 주셨다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실이다. 할렐루야!
이제 창세기 2장으로 넘어 가보자.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과정을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 그 결론을 2장 3절에 이르러서 일단락을 짓고 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며, 일부 내용 중에는 1장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창세기 2장 4절이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the generations’- 참고로, 영어 성경에는 4절에 위치한 이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어순에 따라 5절 중간에 ‘생성 세대’라는 말로 번역되어 위치하고 있다 -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toledoth)’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총 열한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을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에서 1장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고 흔히들 지적하는 부분은 2장 18-19절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동물이 먼저 창조되었고(1:21-25),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동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2:18-19),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배경 없이 단지 2장 19절만 따로 떼어서 읽게 된다면, 마치 아담이 먼저 있고 그리고 아담 앞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나오게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피조물의 창조 순서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고, 여기서는 특별한 목적 즉, 1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담을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이 밝히 드러나 있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동물들 중에서 일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데, 20절에 보니까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심을 보아 동물들로는 아담의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심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자 - 즉, 이브 -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대로 아담을 잠재우시어 여자를 창조하시게 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어 이브를 창조 하시지만 (몸과 혼), 창세기 1장 27절의 기록처럼, 이브에게도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독립적으로 주신 사실이다. 1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조하다에 히브리어 ‘bara’가 사용 됨)
그러면 2장 19절에서 아담 앞으로 나온 동물들은 어떤 종류인지 알아보자.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모든 종류의 동물 가운데서, 단지 모든 가축, 공중의 날짐승, 그리고 들의 모든 짐승(every beast of the field) 만이 아담에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2:20). 물에 사는 동물은 다 빠져 있고, 기어 다니는 동물과 땅의 짐승(beast of the earth) 또한 빠져 있다. 여기서 특별히 들(field)이란 단어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어 형성되어질 땅을 의미한다고 보여 지고, 따라서 ‘들의 모든 짐승’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서의 ‘땅의 짐승’과는 달리 아담이 앞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주 만나게 될 동물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결국 아담에게 나온 동물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아담과 근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동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한 이해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끝으로 하나만 더 생각을 같이 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7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백만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상당히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하루가 수백만 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여섯째 날 즉, 수백만 혹은 수천만 년 뒤에 출현하게 되는 곤충의 도움 없이 어떻게 꽃가루 수분을 할 수 있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천만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고 단호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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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5:44:11 | 김정훈
억울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제 아내가 저에게 시집와서 억울한 일이 참 많았었습니다.
그 억울한 일들을 저에게 애기했었는데 저는 그냥 '참아라'. 혹은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고 넘겼습니다.
아마도 저의 그러한 행동이 제 아내의 억울함을 더 크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미안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다지 억울하다는 감정/생각을 해본적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때, 친구가 장난치는 바람에 제가 혼이 난적이 있었죠. 그때도 억울하긴 했었는데...
회사에서 승진에 누락(누락된적이 있었나?)되어도 뭐 그다지... 빨리 승진하고 싶은생각도 없었으니까요. ㅎㅎ
(뭐 세상이 그런거지 하고 넘긴것 같기도 하고요)
억울하다... 는 감정을 정확히 깨닫은 건 작년입니다.
갑작스럽게 장인어른/장모님과 같이 살게되다보니 차가 비좁더군요.
그래서 차를 좀더 큰차로 바꾸려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덜컥 꼼곰히 살펴보지도 않고 중고차를 사버렸습니다.
중고차 딜러만 믿고요. 그런데 중도차 딜러는 제가 파는 차만 꼼꼼히 살폈을뿐, 자신이 파는 차는 저만큼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덜컥 중고차를 사니, 담배를 피웠는지, 차를 오래타면 가슴이 아프고. 냄새나고
문짝은 한달만에 고장나고... 이것 저것 살피니 한마디로 바가지를 쓴 겁니다.
속상하더군요. 억울합디다.
차를 탈때마다 억울한 감정이 치솟으며 내가 참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제 잘못인데요.
이때 제 아내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잘못으로 중고차 잘못 산것도 억울한데,
잘못도 없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아내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참 미안합니다. 제가 무심하게 그냥 저 편하자고 억울함을 알아주지도 않고 살펴주지도 않은 제가 참 미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에 달려 돌아가신것을 생각할때,
저라면 참 억울했을것 같습니다.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어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범죄자중의 하나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했듯이
잘못에 합당한 보응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요. 마치 죄를 짓고 도망치는것보다 죄값을 치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신 말씀처럼 억울해 하지 않은신듯 합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여 우리의 죄들(과거의 죄, 앞으로 행할 죄들)을 완전히 제거하여 주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억울하게 식당같은곳에서 대접받거나,
억울하게 선생님깨 혼나거나, 상사에게 혼나거나.
억울하게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 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하게 시부모에게 당하거나
억울하게 내가 쓴 글이 오해를 받거나 곡해되거나
억울하게 비판받거나
억울하게 소명할 기회조차도 받지 못하고 당하거나
억울하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등등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겠습니까?
혹여 여기 자유게시판에 쓰는 글들이 논쟁이 되고, 이건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과 혹은 소소한 의견차이로 시각차이로
마음이 상하거나 등등해서 억울한 감정이 들 때
바로 그런때에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위로받고,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오길 생각해봅니다.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할때도 있지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이 세상이 그나마 덜 부패하도록 하는 세상의 소금일겁니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을까 염려하노라.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염려하노라.
P.S 만약 제가 중고차 살때의 억울함을 못 느꼈다면, 아마도 지금도 제 아내의 억울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감사합니다. 저에게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좀 더 이해하게 해주신 사건을 통해서 조금이나 제 아내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나마 알게 됨을. 그리고 제 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볼겁니다) 제가 참 미안했었고, 지금도 미안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07:59:09 | 김형욱
* 참고로 이 글은 본래 <자유게시판> #1531의 글에 달린 댓글 및 답 글의 형식으로 쓰여 졌던 것인데, 내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독립된 하나의 글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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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그 유명한 ‘짐승의 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계 13:16-17)”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 ‘그’는 큰 이적들을 행하며 (계 13:13),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고 (13:14),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죽이게 하는 자로서 (13:15), 결국 그의 정체는 ‘거짓 대언자’인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19:20).
그런데 그 거짓 대언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의 형상을 향하여 경배하도록 옭아매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짐승의 표’인데, 이것을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게 됨으로 (13:17),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표 받는 것을 쉽게 거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는 언제 이 땅에 출현하고, 거짓 대언자에 의하여 사용되어 지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짐승의 표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짐승의 표가 상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고,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앞에서 기술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모든 자 ... 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은 단지 짐승이 나타난 이후에 그가 - 즉, 거짓 대언자가 -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받게 하는 그 표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 혹은 그 이전에라도 사용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하여는 딱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 ‘표’라는 것이 어떤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라고 본다면, 짐승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이전일지라도, 그의 길을 예비하는 다른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장차 짐승의 표의 기능을 하게 될 어떤 ‘표’를 미리 기술적으로 완성 시켜 놓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미리 받게 함으로 (가령 표를 받으면 얻게 될 각종 건강 및 보안 등의 편리성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에 친숙하도록 해 놓은 뒤에, 어느 날 비로소 ‘때’가 이르렀을 때에 거짓 대언자가 이제 그 동일한 표를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로서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받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딱히 그렇다 안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위의 성경 구절을 읽고 짐승의 표는 아무래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환난 전 휴거를 이룰 성도들에게는 전혀 표를 받을 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하면 큰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에 주의가 요망 됩니다.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니 빌라도가 다음과 같이 행함이 나옵니다.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니라.” (마 27:26)
자, 십자가는 도대체 언제부터 사형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을까요? 누군가가 이 말씀을 읽고, “저는 십자가가 빌라도의 출현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이 지고 가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빌라도가 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미리 지고 다니게 하다가,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그 때에 가서 예수님도 그것을 지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빌라도가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른 설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지식을 통해 십자가 형벌이 언제부터 출현하였는지를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십자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빌라도의 출현이후부터 십자가가 나오게 되니, 따라서 그 이전에는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게 되겠지요. 바로 이와 같습니다. 빌라도가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십자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도구로 사용함으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듯이, 거짓 대언자 또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널리 퍼져 있는 ‘표’를 짐승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쓰게 됨으로 그것이 ‘짐승의 표’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도록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계시록으로 가서 13장 16-17절 말씀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16절의 표를 받게 한다는 말씀은 곧 바로 17절의 표 없는 자는 곧 매매를 못하게 된다는 말씀과 이어지면서 결국 이 뜻은, “짐승의 표란 그것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하는 표”라는 의미로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더욱이 영문 KJV 성경에는 16절과 17절 사이에 콜론 (:) 문장부호를 둠으로써, 이 두 구절의 의미가 떨어지지 않고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주목해 봐야 할 점은, 결국 거짓 대언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16절의 표는 매매통제 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하여 특별히 그가 권력을 행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받게 하도록 한다는 뜻을 의미할 뿐, 이 표가 그 전에도 유사한 목적 혹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던지 안 되었던 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성경이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단지 거짓 대언자가 짐승의 표를 받게 하여 매매를 못하게 하는 통제 수단으로 사용할 것임을 말해 줄 뿐, 그 표가 반드시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만 나오고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표의 출현과 그 표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사용되는 시점은 (비록 그것이 다른 목적일지라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음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표’와 연결된 구원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장차 ‘때’가 이르렀을 때에 짐승의 표로 사용될 어떤 형태의 ‘표’를, 휴거가 일어나기 이전일지라도 휴거로 들림 받을 성도들 또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음을 유념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때는 경배를 요구하기 전이므로 ‘표’를 받아도 믿음을 통해 이루게 될 구원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고, 경배를 요구하기 이전에 휴거가 먼저 일어난다면 결국 그 표는 구원과는 상관없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활 침해와 개인의 자유의사를 통제 또는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알고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우리 가운데는 환난을 겪고 늦게 구원 받을 성도들이 또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일지 모르는 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일 것이며, 그렇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될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 준비하며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 여분의 기름을 채워 준비된 신부로 기다리고 있으려면, 이런 시대를 정확히 읽는 지식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종말의 시대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함은 성도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요한 태도이겠지만, 요한 계시록 같은 말씀을 통해 사탄이 말세에 행할 일을 미리 알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유익하고 또 중요합니다. 지금은 거센 배도의 물결이 일고 있는 때입니다! 적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 움직임을 알고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도 뱀의 간교함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이브와 아담이 결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또한 비록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도록 강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그 어느 책보다도 사탄의 마지막 될 일과, 짐승의 표, 환난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소상히 알림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깨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짐승의 모습이 확연히 눈앞에 드러남을 주목하여, 시대의 물결을 따라 미혹되지 않고 굳건하게 믿음 승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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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19:38:11 | 김정훈
제 생각에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맞는 성경같아요...우리교회는 개역개정이고요... 주변의 많은 교회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안 가르치는것 같아요...
왜죠?
성경 버전 선택에서 잘못되는 엄청 큰일 아닌가요?
저희 목사님은 개역개정판이 가장 옳은 번역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 예수보혈.. 그리고 천국과 지옥! 말씀을 중점적으로 외치시는
아주 열정적인 목사님이십니다 제 느낌에 이단적 요소는 하나도 없어요...
근데 교회를 옮기는 것도 감행해야 할까요?그리고 베리칩이 악마의 숫자라고 저는 믿는데 우리 목사님은 사단의 인 이나 성령의 인 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이전엔 바코드다 말이 많았지만 그런건 없다고 말씀하셔서 혼란스럽습니다베리칩 나중에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 없는건가요?정말 궁금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0: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3 09:25:43 | 한아름
안녕 하세요...
저는 아직은 초심자 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흠정역을 알게 되어 요즘 보고 있습니다(올해구입)
문의를 드림은 궁금한점을 문의할때에 사람 마다, 교회마다 조금씩 틀리고,저 같은 초심자가 물어볼때에
어떤적은 자세히 말씀 해주시기 보다는 마치 이상 하다는 듯이 보시는 분들도 계시기에 마음놓고 질문 하기가
난감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용기를 내어 의문을 청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믿음' 과 "구원" 에대해서 궁금 합니다.
저는 믿음으로써 구원 받는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 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 은혜로(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받는다 . 라고 저희 목사 님이 저번 설교 에서 말씀 하시던데요...
"믿음으로는 받지 못하고 , 믿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라는 말씀에 ...
믿는다와 구원이 같은게 아니라 구분 된건지...
같은 말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닌것 같기도 하고 , 아직도 헷갈립니다.
믿으면 당연히 구원 받아야 하는게 아닌지요?
마치 믿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말 처럼 들려서 혼란 스럽습니다.
어느것이 올바른 말 인지 ,아님 어느것이 정확한 말 인지 부탁 드림니다. 꾸벅...[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2 16:09:56 | 김동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놀라운 주의 은혜 (Wonderful Grace of Jesus)
http://www.cyberhymnal.org/htm/w/o/wondergj.htm
개인적으로 주찬양 선교단 이후로 제일 감명깊게 들었던 찬양입니다. 세상에 당김음 하나 없이도 이렇게 명랑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찬양곡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멜로디에다가 가사에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진정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담겨 있고 예수님을 높이는 교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왜 이런 곡이 우리나라 제도권 교회의 찬송가에 수록된 적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통일, 새찬송가에 모두 없던 걸로 기억)
이 찬양은 노르웨이계 미국인인 Haldor Lillenas가 1918년에 작사· 작곡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이고 한국에서는 3· 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죠. 그는 패니 크로스비만치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Wonderful grace of Jesus만은 그가 지은 수천여 편의 찬송시 중에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곡에 대해서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첨부하는 파일은 이 찬양의 번역곡인 <놀라운 주의 은혜>의 1절을 4성부 합창으로 부른 아카펠라입니다. 요즘은 워낙 비주얼 시대여서 UCC라는 것들이 다 사진 아니면 동영상인데, 소리만 올리는 건 교회 설교가 아니면 무척 드물죠.
제가 여자친구라도 있다면 듀엣으로 녹음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1인 4역이 됐습니다.어젯밤에 방에서 별다른 장비 없이 컴퓨터로 생목소리를 녹음해서 합성한 것입니다. ^^즐겁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링크 클릭)
듣기[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1 20:58:16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