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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해석에 익숙한 대부분의 한국 성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기가, 한 단계 발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 보입니다. 목사님,장로님, 수 십년 믿은 성도들 할 것 없이 "개역성경"에 다소 이의를 제기하면 귀를 막아버리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는 것이 순종이 아닐까요~ 킵바이블의 균형잡힌 글들과 목사님의 분별력 있는 설교를 보고 듣고도 위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정말이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돌이 갓 지나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다 바로 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믿음에서 바로 서는 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2012-08-30 10:19:53 | 양희석
국어를 이해 못하고, 말귀를 못 알아듣고, 부실한 성경에, 보는 눈도 없는 소경을 소경이 인도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사례네요. 최악입니다. 이런 수준이 대세라는 게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안 듣고 안 믿고 생각 안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만 바랍니다.
2012-08-30 01:14:14 | 김재욱
안녕하세요?   한 성도님이 다음의 글을 보고 염려가 되어 제게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거기서 개혁헌장zoomin이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비방의 글을 썼습니다.   -------------------- 최근에 독립침례교회인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의 최근 설교를 듣던 중 왜곡된 구원론과 비성경적 주장들이 난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정동수목사는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이므로 믿는자는 어떠한 죄악을 범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술을 마셔도, 흡연을 해도,  아비의 하체를 범해도, 자살을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예로 구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1세들과 사울왕 및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정동수 목사는 미국의 제임스 낙스 목사를 초청했는데 제임스 낙스는 그의 책 "영원한 구원보장"에서 한번 믿은 사람은 도중에 믿음을 포기해도, 심지어 사탄의 행위를 해도 한번 받은 구원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정동수목사는 킹제임스만 올바른 유일한 성경이라면서 개역성경이 수백군데가 변개된 잘못된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한국교회가 부패하여 잘못된 길을 걷는 것도 성경이 부실해서 그렇다는데 황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역성경으로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아 거듭난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제외한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정동수목사는 창세기 6장을 근거로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여자와 결혼하여 천사의 후손, 즉 아낙네 자손을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천사가 종종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생식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이 땅에 오셨으니까요. 따라서, 여자의 몸을 통해 나지 않은 천사가 여자와 결혼하여 생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외에 정동수목사는 마태복음은 이스라엘한테만 적용되고 아직은 환란 때가 아니므로 베리칩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개역성경을 읽으면서 정동수목사의 주장이 크게 잘못되었고 자칫 많은 사람을 실족시킬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봅니다.   댓글 4  주의검을보내사 12.08.28. 12:29  정동수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 것임을 지혜 있는 자는 보고 알찌어다.   sungsan 12.08.28. 14:45  정말 큰일 날 주장을 하고 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케노시스 08:50  신종이단 납시요~       믿음63 18:29  구원은 예수님께 있지 우리가 결정할 부분이 아닙니다. 다만 진심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구원 받는 자는 스스로 죄악을 범하지 않습니다.   -----------------------   이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요.   저분들도 바른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정동수   
2012-08-29 19:04:47 | 관리자
kjv흠정역을 발견하고는 바로 확대 보급에 동참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읽기를 약속하면 선물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단순한 진리를 붙잡고 믿음을 갖고 성경기록을 대하는 모든 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샬롬
2012-08-17 20:31:53 | 임원섭
샬롬! 형제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생각나는군요. 평소에 말씀도 글 쓰듯이 하시면 되겠습니다. ^^ 하지만 저도 말은 글처럼 안되는게 사실이고 글로도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워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말은 희미한 기억과 함께 사라져도 글은 오래 남으니 가끔은 자기 생각을 이렇게 글로 정리해두는 것도 좋을성 싶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12-08-15 12:33:12 | 류인선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듯 진솔하고 좋은 글에 어찌 이리 늦게 댓글을 올리게 되었는지....... 또 늦었지만 부질없는 제 격려의 한 마디를 보태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구구절절 의견을 달고 픈 부분이 많지만 다 각설하고 저는 김용묵 형제님의 솔직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진리를 향한 열정을 참으로 사모합니다. 윗글에 녹아 있는 형제님의 선한 고민들이 꼬~~옥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결실로 수확되기만을 바랍니다 마음의 깊은 것이 녹아있는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2-08-06 10:46:19 | 김대용
예전에 글을 통해 몇 차례 내 자신에 대해 소개했듯이, 본인은 개인적인 취향 및 성향이 심각하게 마이너하다. 컴퓨터에서 쓰는 글자판부터 마이너하고, 프로그래머라지만 주 관심사와 주력 개발 소프트웨어도 엄청 마이너한 분야에 속해 있다. 종교관도 마이너하고, 취미는 가히 안드로메다 화성인 급이다.   청개구리마냥 일부러 속세와 담을 쌓기로 작정하고 이런 길을 간 건 절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다. 난 태생적으로 남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저런 거 도대체 왜 하나” 싶어서 관심이 안 가고, 내가 양심적으로 옳다고 여기고 지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엔 지지자가 별로 없는 걸 난들 어떡하겠는가?   난 성격이 굉장히 직설적이고 다혈질적이고 내 진심을 못 숨긴다. 그리고 뭔가 이념적인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잘 받고 잘 감화하는 편이었다. 쉽게 말해서 좀 순진해 빠진 구석이 있다. 나도 내 성격에 대해 경험적으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남에게 천박해 비치지는 않으려나 우려하여 요즘은 이 성격을 자제하려 애써 보기도 하지만, 천성을 부정하고 가식을 부리는 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해야 할 말을 당장 내뱉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   1990년대 말, 뭔가 감화를 받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세벌식 글자판을 쓰기 시작했다. 전국민의 1%도 채 쓰지 않는 걸로 추정되는 듣보잡 글자판을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옳다는” 강한 확신이 왔다. 한글은 두벌식으로만 쓰기엔 너무 아까운 문자인 게 와 닿았으며,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얼마나 편리하고 활용 가능성이 더 높은지를 알아 버린 이상 여기에 완전 몰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무렵엔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희한한 성경을 밀기 시작했다. 안 믿을 거면 아예 완전히 때려치우고 안 믿고 말지, 성경을 믿는다면서 변개된 역본을 옹호하는 건 내가 보기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뒤, 나는 이 분야에서도 여러 글들을 쓰고 이런 저런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미 굉장한 요주의(?) 인물이 됐다.   어디 그뿐이겠는가?2004년, 철도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내 인생은 또 완전히 뒤바뀌었다. 철도로 인해 내 인생에 생긴 선한 변화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기쁘게 보고를 드릴 수 있을 수준이 됐다.   이런 마이너 분야들을 섭렵하면서 본인은 철도는 차치하고라도 세벌식이면 세벌식, KJV면 KJV처럼 자신이 속한 분야를 남에게 알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곤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반인들에게 이들의 인지도는 정말 안습한 수준이다. 세벌식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도 많고,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아직도 KJV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했거나, 혹은 ‘KJV = 말보회 = 이단’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렇듯,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심하게 마이너하고 당장 돈도 안 되는 밑 빠진 독 같은 분야에, 지지자를 많이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본인은 여기에 대해 지금까지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와중에 나의 대학 후배이고 현재 본인과 같은 교회에 나오고 있는, 아라크넹(필명)이라는 친구가 세벌식 사용자로서 꽤 시원시원하고 단호한 어조로 세벌식 evangelism에 대한 비평을 자기 블로그에다 올렸다. 본인은 이를 재미있게 읽었다. http://j.mearie.org/post/27713540987/what-is-wrong-with-sebulsik-evangelism   이 친구는 워낙 똑똑하고 아는 게 많으며, 세상을 보는 안목도 나보다 더 객관적이고 냉철하다 보니, 이념적인 면모 같은 건 일단 배제하고 그냥 두벌식보다 객관적으로 정말 빠르고 편하니까 세벌식을 의도적으로 익힌 케이스이다. 그에게 세벌식에 대한 지식은 자신의 여러 많고 많은 지식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적인 떡밥(글자판의 역사, 타자기 어쩌구저쩌구)에 대해 무지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며, 오히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라크넹은 맹목적인 세벌식 우월주의에 들어있는 허상과 이것이 잠재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역효과에 대해서 잘 짚었다. 나 역시 당연히 공감한다.   그는 어떻게든 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용자를 늘리려면, 주변에 최대한 조용하게 딱 이렇게만 말하라고 권한다.     “한국어로 타자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세벌식 최종이라는 글자판이 무척 좋을 텐데 관심 있으면 써 봐라. 표준 두벌식보다 손이 편하고, 더 빠르게도 칠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 운영체제에서나 설정만 바꾸면 바로 세벌식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다.”   저 글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는 지금 당장 세벌식 글자판을 쓰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곁다리는 처음부터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강조한다. 타자기 시절부터 시작된 한글 기계화 왜곡의 역사, 한글 창제 원리 드립, 두벌식 도깨비불 현상, 세벌식 모아치기, 기계식 타자기, 기계간의 글자판 통일, 무한 낱자 수정, 직결식 글꼴 등등등!   골수 세벌식 매니아라면 저런 주제에 대해서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겠지만, 진정 남을 배려하고 한 명이라도 세벌식 사용자를 더 늘리고 싶다면 일단 참으라고 말이다. 그건 일단 세벌식 개종자를 만들어 놓은 뒤, 그 친구가 차츰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 설명해 줘도 늦지 않다. 그래, 그게 백 번 옳은 접근 방식이다.   하지만 저건 내게는 개인적으로 좀 가혹하게 느껴지는 요구사항이다. 나는 아라크넹 형제와는 정반대이다. 세벌식이 그저 손이나 약간 편하고 영문 쿼티와 드보락 자판의 관계처럼 배열만 더 효율적으로 바꾼 수준이라면, 난 애초에 세벌식에 이 정도로 애착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글쇠배열 몇 개나 바꾸는 수준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 두벌식과 세벌식의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차이를 감지하고서 세벌식 매니아가 됐다. 한글 기계화의 역사와 공병우 박사의 삶에 대해서 완전 감화를 받아서 지금과 같은 길을 가게 됐다. 철저하게 이념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남에게 세벌식을 소개할 땐 내가 세벌식에 대해 가장 강점이라고 여기는 특징을 배제하라니? 그 친구도 세벌식의 진짜 강점이 뭔지를 몰라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딜레마이다. 사실은 그런 원론적이고 이념적인 부분은 얘기해 봤자 사람들은 혼동만 할 뿐 당장 이해를 못 한다.;;   복음 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넘쳐나고 선한 사람들이 고통 받나?”,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다 죽어서 무조건 지옥으로 갔나?”, “평생 착하게 산 사람도 예수 안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 가나?” 복음에 대해서 별 희한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많다. 신앙 변증에 이미 다 통달해 있는 베테랑 복음 전도자가 그런 고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해서 쩔쩔맬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그런 불신자가 그 성경적인 답변의 문맥과 배경을 이해할 리도 없다. 그러니 그런 불신자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나도 화려한 성경 지식과 신학 논리로 맞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선한 의도로 시작했던 복음 전파가 어느 샌가 논쟁과 병림픽으로 바뀐다. 그럼 어떤 결과가 야기될지는 흠..   그 불신자는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며, 그 의문이 해결되면 선뜻 예수 믿겠다는 의향으로 질문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할 때는 FM대로 죄와 심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죽으심과 부활, 대속, 복음, 하늘과 지옥 같은 개념만 진심을 담아 전할 뿐, 쓸데없는 논쟁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음 다음으로 성경 이슈 문제로 넘어가 보자.과거에 킹 제임스 성경을 전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충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정보들에 너무 압도당한 나머지 전하는 자세가 서툴렀다. 오로지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13구절과 6만여 군데의 변개된 구절에만 열폭하기에 바빴다. 그래, 그건 크리스천에게 당연히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그게 중요하지 않거나 그 자체가 글러먹었다고 반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성경이 잘못되면 왜 큰일나는지 관념 자체가 아직 없는 사람들에게 앞뒤 문맥 다 끊고서 개역성경은 사탄의 성경이고 NIV는 불쏘시개감이라고 욕하고, 비성경적인 이단들과 기존 개신교회의 비성경적인 관행을 욕하고 비판밖에 할 줄 모르면, 일반 신자들은 당연히 마음을 꽝 닫게 되지 KJV로 전향을 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그런 중요하고 충격적인 성경 이슈에 대해서 절대로 KJV 진영에게 문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네 교회 목사에게 문의를 할 것이고, 그 목사는 당연히 하다못해 자기 기득권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KJV에 대해서 부정적인 답변을 할 확률이 99.9%에 수렴할 것이다. 그럼 게임 끝이다. 겨우 이러려고 KJV를 믿고 성경 번역까지 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요즘은 흠정역의 경우 광고를 할 때 처음부터 자극적인 변개/삭제 내역부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냥 종교 개혁자들이 쓴 성경, 뿌리와 연륜이 있고 정통성이 있는 성경, 역사적으로 부흥을 가져다 준 성경, 정확한 문법으로 읽기 쉽게 번역된 성경이라고만 홍보한다. KJV는 이단은 절대 아니라고 기성 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한다!   10년이 넘게 KJV 연구만 한 KJV 골수 프로 전문가들이 오죽 하고 싶은 얘기가 없겠는가? 뉴에이지 사상이 들어간 구절, 성적 문란함을 부추기는 구절,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구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부정하는 구절,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뚜껑 열리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들이다. 그래도 일단은 참는다. 왜? 역설적으로 KJV 개종자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이다.   어휴, 끝으로 이런 원리를 내 개인적으로는 철도에다가도 적용해야 할 것 같다. 나야 개인적으로는 Looking for you를 들으면서 신흥 종교 교주에 맞먹는 천지개벽을 경험하고 철도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는지 간증하자면 시간과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얘기만 늘어놓으면 오히려 난 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고, 특히 여자친구를 사귈 확률은 0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ㅠㅠㅠㅠㅠ   결정적으로 오늘날은 새마을호는 은퇴 직전이고 Looking for you 실황 연주는 없어진 지가 수 년째이다. 그러니 내 철도 간증은 남들에게는 덕이 되지도 못한다. 마치 타 언어가 타 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듯이 말이다. (고전 14:4, 9, 11)   그러니 남들에게 철도를 전하려면 “서울에서 부산 갈 때는 가능한 한 열차를 이용해 보세요. 철도는 정체가 없고 멀미도 없고 이산화탄소 배출도 없는(전기 철도 한정) 저탄소 친환경 녹색 교통수단입니다.” 이런 말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전동차 구동음이 음악 소리 같다는 식의 오타쿠스러운 주제는 좀 나중에..;;   그래, 나야 철도가 그저 멀미 없고 안 막히는 저탄소 친환경 교통수단에 불과하다면 애초에 철덕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철덕 spirit을 전수해 주려면, 여타 마이너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부터 유추해 보더라도 일단은 철덕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면모부터 차근차근 순서대로 알려 주는 게 순서일 거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원리를 장터에서 약을 팔려는 약장수에다 비유하는 분이 계셨다. 처음에는 원숭이든 코브라든 꺼내서 재주를 부리게 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게 되면 그때야 약을 꺼낸다. 처음부터 심각한 본론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모일 수 없다.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나는 그 심각한 본론에만 미친 듯이 몰두하고 목숨을 걸다시피하며 연구하면서 인생을 살아 왔다. 그것 말고 원숭이를 어떻게 키워서 재주를 부리게 해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다. 약을 빼면 할 얘기가 없다. 이 때문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다들 내가 완전 별종 괴짜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진지하고 심각하고 내 진심이 바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우회 없이 온라인 공간에다 덥석 써 버리고, 정치관이나 종교관도 대놓고 자주 노출하는 편이다. 양심적으로 정말 해야겠다 싶은 말은 안 하고는 도저히 못 배기는 습성으로 지금까지 살아 왔다. 외람된 말씀 인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유하자면 렘 20:9 같은 기질이다.   이왕 이런 기질을 천성적으로 못 버린다면 그 기질이 목숨과 재산과 명예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정말로 진리를 위해서도 발휘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전시 상황이 아닌 평시에는 앞에서 여러 예를 들며 언급했듯이, 조금만 더 대중 친화적으로(?) 나의 마이너한 취향을 남에게 소개하는 기법을 익혀 나가야 할 것 같다.
2012-07-29 08:18:34 | 김용묵
    성경의 구원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시간이 생기기 전에 신격 안에서 교제를 나누신다. 성경은 시간이 생기기 전의 어떤 언약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시고, 온 인류를 위한 속죄물로 자기의 아들을 제공하시고, 복음을 믿는 자들을 선택하시고, 믿음에 따라 걷든지 혹은 육신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을 성령님을 통해 성화시키기 위해 일하신다.   아들은 또한 창조자 하나님이시며 온 인류를 위해 대속물로 죽으시고, 구원의 선물을 주시며,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인 자신의 의(義)와 칭의(稱義)를 주신다.   성령님은 창조 세계와 양심과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이끄신다.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특별한 내적 준비 같은 것은 없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부활을 확증해 주신다. 성도들은 섬기기 위해 재능을 부여받았다.   죄인들 중에서 복음을 믿고,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만 자신의 믿음을 두려는 자들은 이때에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다. 믿는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 놓이며, 그분의 의로 옷 입고, 구속의 보증으로 성령님을 받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교제한다. 이 외에도 성도의 신분상의 다른 변화들이 나타난다.   믿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본성을 갖는다. 첫째는 능력이 파괴된 옛 사람과 육신의 몸 안에 여전히 거하는 죄의 본성이다. 둘째는 이미 이루어진 새 사람인데 이것은 곧 성도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 선택하는 그리스도이다. 성도는 구원을 유지하면서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삶으로써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내지만, 육신을 나타내는 삶을 통해 어떤 때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구원은 복음을 믿으며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십자가에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거나 그분을 배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난다.       칼빈주의의 구원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은 신격 안에서 교제를 나누시고 구속(救贖)의 언약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창조를 작정하시고, 타락을 작정하시고, 어떤 자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 이를 통해 다른 자들은 정죄를 받도록 작정하신다 - 자신의 아들이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속죄를 이루도록 작정하시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하도록 작정하신다.   아들은 (1) 선택받는 자들을 위해 대속물로 죽으시고 (2) 그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땅에서 율법의 의를 획득하시면서 완벽한 삶을 사신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 모두가 구원에 필요하다).    성령님은 내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 (1) 그 속죄를 선택받은 자들에게 적용해서 그들이 믿기 전에 그들을 거듭나게(중생하게) 하시고 (2) 선물로 주어진 믿음을 그들에게 가져와서 그들이 칭의(稱義)를 얻기 위해 - 중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 복음에 반응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 이끌림을 받은 ‘선택된 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1) 믿기도 전에 거듭나고(중생하고) (2)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받는데, 이 믿음은 선택된 자들이 예수님께서 땅에 사시면서 이룩한 의(義) 즉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를 획득할 수 있도록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해 준다. 이 의는 칭의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무조건적인 선택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은혜로 주어진 믿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삶이 모두 필요하다.   선택받은 자는 단 하나의 새로운 본성만 갖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믿음의 선한 행위 속에서 견디면서 인내해야만 한다. 만일 행위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도 겉으로는 성령님에 의해 창조 세계와 양심과 복음을 통해 이끄심을 받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죽어 있고 또한 믿음을 살려서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는 ‘그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없으므로 믿을 수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일이며 선택받은 사람들 편에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선택받은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려진 피를 통해 믿기도 전에 구원을 받았다.   성경의 구원과 칼빈주의 구원을 요약한 글을 올립니다. PDF 파일은 우리말과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2012-07-26 17:33:18 | 관리자
네, 백 번 공감합니다. 음행으로 인한 이혼은 극단적인 경우에 정 안 되겠으면 허락한다는 뜻일 뿐이죠. 크리스천이 세상을 상대로 다른 곳에서도 본을 보여야겠지만, 결혼 생활에서도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다 툭하면 이혼한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한번 결혼하면 평생을 가고, 지조가 있다는 평판이 있어야겠습니다. (과거 로마 시대에도 그런 선한 간증이 전해졌다고 하네요.)
2012-07-26 09:04:12 | 김용묵
이혼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마태복음 19장의 앞에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혼 이야기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간음이 이혼 사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 자신의 배우자를 용서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또한 이혼 후 어린아이들이 겪게 될 아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2012-07-25 23:45:19 | 김문수
귀한 글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사실 결혼이란 것은 많은 떨림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일이기에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이에 대해서 엄숙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야겠습니다.
2012-07-25 20:34:35 | 소범준
사람의 인생에서 결혼이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성경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다.이미 다음과 같은 몇몇 URL에 이와 관련된 좋은 글이 많으나, 본인은 그 내용을 내 식대로 해석하고 다시 풀이해 보았다.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2604http://av1611.net/3166   사실, 이 글은 쓰기는 수 개월 이상 아주 오래 전에 해 놨다. 그러나 정작 결혼 생활을 한 적도 없는 주제에 이런 글을 연장자 어르신들까지 보는 공간에다 덥석 올리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심적 부담을 느꼈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공개된 장소에서의 게시를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 생활을 실제로 한 분들이 이런 주제에 대해 자기 입으로 또 공공연히 말하는 건 좀 구태의연하고 민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아무튼, 기혼자든 미혼자든 이 글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 성경적으로 허용되는 이혼/재혼 사유   1. 배우자와 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기약 없이/영영 단절되어 버렸을 때   사별, 실종, 집 나가서 떠난 뒤 일방적으로 잠적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사별은 아예 결혼 주례사에 “죽음이 둘을 갈라 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도 할 정도이니 제일 확실하다.그런데 확실하게 사망이면 차라리 나은데, 우리나라 한정으로 부부가 남북으로 이산가족이 돼 버렸다거나 하면 어떡하면 좋을까?현실을 인정하여 그냥 재혼하는 것도 성경적으로 문제되지는 않으리라 본다.   2. 음행(신 24:1; 마 5:32)   이것은 인간의 질투심과 죄성을 감안하여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제한적으로 허락하신 필요악이다. 배우자가 상대편에게 끝까지 신실하지 못했을 때, 도저히 용서를 못 하겠고 부부간에 살인극이 벌어질 바에야 차라리 이혼으로 조용히 끝내는 걸 허락한다는 뉘앙스에 가깝다.   3. 불신자 배우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을 때(고전 7:15) 예수 믿기 시작한 배우자가 맨날 집 내팽개치고 교회만 쫓아다녀서가 아니라, 진짜 성경적으로 똑바로 다른 배우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데도 불구하고 “난 정말 예수 믿는 꼴 못 봐 주겠다. 너랑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고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을 때 하나님도 그걸 말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이혼을 그렇게도 싫어하는 하나님조차 그런 이혼은 예외적으로 막지 않으실 정도인데, 크리스천이 아예 대놓고 처음부터 불신자와 덥석 결혼을 하는 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얼마나 안 어울리고 괴상망측하고 위태롭게 보일까?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위의 3은 처음엔 부부가 다 불신자였다가 나중에 한 명만 구원받았을 때에나 발생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독실한 신자끼리만 결혼해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경의 방법대로 가정을 꾸리고 같이 성령 충만을 유지하며 평생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이 2인용 자전거를 한데 타서 같이 앞으로 페달을 밟아도 오르막은 오르기가 힘든데, 하물며 한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페달을 밟으면 이거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 “이번 주는 내가 오빠 교회에 따라 가 줬으니까 다음 주 일요일엔 같이 등산(혹은 성당, 절, 계모임 등등..) 가는 거야?” 이런 타협안을 제시할 배우자와 결혼을 하여 남녀가 한 몸이 된다고? 이런 결혼은 좀 심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결혼한 뒤에 나중에 전도하면 된다”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저건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결혼 전에 준비할 것과 결혼 후에 부부에게 주어지는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결과이다. 결혼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런 소리는 절대로 못 한다. 물론, 결혼한 뒤에 나중에 전도하는 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안 해도 될 고생을 쓸데없이 하고 영적으로 얼마나 큰 손해와 갈등과 다툼을 대가로 치른 뒤이겠는가?   이렇듯,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믿는 사람과만 결혼해야 한다)는 명제는 단순한 권고의 수준을 넘어서 사실 단호한 계명이고 교리이며, 배우자 선택 기준의 최후의 마지노 선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편협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의 영적 건강을 정녕 배려하는 차원에서 존재하는 교리이며,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와 증명도 가능하다.   성경에서는 고후 6:14-15의 응용 적용이 흔히 근거로 제시된다. 이것은 결혼뿐만이 아니라 같이 동업을 하는 것, 그리고 음지에서 활동하는 불신자들의 무슨 비밀 결사 단체에 불쑥 가입하는 것에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다만, 불신자가 경영하는 일터에 단순히 고용된 일꾼으로 취업하는 정도라면, 나쁜짓만 아니라면 문제될 게 없으며 굳이 '멍에'에까지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인 이혼/재혼의 원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음행을 몸서리치게 미워하시고, 따라서 원칙적으로 이혼도 싫어하고 절대 금지하신다. 성격 차이, 혼수· 예단 문제, 시댁과의 갈등 같은 건 세상의 통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가당치 않은 이혼 사유이다. 우리나라는 결혼이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기가 불가능한 구조로 가고 있는 게 요즘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여섯 사람이 하는 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이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는지 나같은 미경험자의 머리와 인생 경험으로는 답을 못 내리겠다.   2. 아울러, 성경의 하나님은 신앙을 빌미로 가정 파탄과 이혼 조장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없어야 한다. 이혼도 불신자 쪽에서 먼저 요구했을 때이지 우리가 먼저가 결코 아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끝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갔다면, 지옥에서라도 그가 “아아, 그래도 예수 믿는다던 내 배우자와 같이 살던 시절이 제일 천국 같던 순간이었다.. 내 잘못이 컸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구원받은 배우자가 처신을 잘 해 줘야 한다!   3. 하나님은 그렇다고 홀로 남은 배우자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한편으로 가정이 유지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감안하신다.(우리는 천주교와 불교의 성직자 금혼 제도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당당한 권리가 있다.)   4. 앞에서 소개된 사별, 음행 등의 사유는 다들 극단적이고 예외적이며 어지간한 사람들이 겪을 일은 잘 없을 상황이다. “앗싸, 난 저 조건 중 하나에 해당하니까 이혼할 수 있네” 하면서 팔자를 펴는 방법이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적이고 불행한 상황에서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5. 하나님은 이런 신비로운 결혼 제도와 이혼/재혼 원칙에 대해서 인간들이 오해하거나 오· 남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신 듯하다. 불륜을 재혼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살인에 대해서 이미 성경에 언급하고 있다(다윗의 범죄). 그리고 현 세상에서 사별로 인한 재혼 때문에 생긴 여러 배우자들이, 내세에서 한데 만났을 때는 서로 어떻게 되느냐는 알쏭달쏭한 질문에 대한 답도 성경에 친절히 써 놓았다. (마 22:23-33) 흥미로운 사실이다.
2012-07-25 11:44:30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