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처럼 전철을 타고 영업과 거래처 방문을 하였습니다.
전철 안에서 읽었던 책은 옥성호 형제의 "마켓팅에 물든 기독교" 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식을 가지고 조금만 생각해 봐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은 것들을
알 수 있을텐데.... 왜 그걸 모를까??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 걸까? 알아도 건의를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그냥 체념하거나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는 걸까?
하지만 책을 읽는 가운데 제 나름대로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것 입니다. (정말 놀랍지요?)
유명한 무신론자인 버트란트 러셀은 기독교인을 비난하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진짜 현대인이 얼마나 생각하고 사는가에 대한 조사(기존에 반하는 새로운 사실을 접했을때)를 하였더니
50% 사람들이 즉각 새로 받아들였고
30%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거부를 한다고 합니다.
15% 사람들은 즉각적인 판단을 유보한체 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 수용 또는 거부의 입장을 취하는데
추가적인 조사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5%의 사람들만이 기존의 사실과 비교해서 새로운 사실의 정당성 여부등에 추가적인 조사를 한 후에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80%의 사람은 전혀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15% 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결국 생각을 하지않는 점에서는 80%와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옥성호 형제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엔터테이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켓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한국에서 수십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별로 크게 한국 교회가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위 내용과 비슷하게 대비해 보면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을 100%라 보면
진짜는 약 5% 정도이고 가짜는 약 95%라고 합니다(추정치니 근거를 찾거나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하시면 아니아니 아니되옵니다 ^^;).
문제는 가짜인 95%가 자신들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가짜임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정말 무섭고도 소름끼치지만 사실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 글과 비슷한 내용의 영화가 있습니다. 원래는 소설로 먼저 나왔고 김** 형제님의 글 (하나님은 빠지세요?)에서도
언급이 되었습니다. c.s.i 뉴욕의 반장역으로 나오는 게리 시나이즈가 주연한 임포스터(impostor) 라는 영화입니다.
오늘은 유난히 "머리는 노랗게 염색을 하거나 장식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신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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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5 23:44:58 | 송재근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장기 근속자 표창을 주었습니다.
저도 1992년 3월 1일에 학교에 부임하여 만 20년이 지났기에 오늘 참석하였고 이 기회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1982년에 유학을 갔으니 그 시기부터 따지면 제가 홀로 독립하여 산 시간이 만 3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유학을 갈 때의 제 모습과 그 당시 꿈꾸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살펴보면 정말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 - 성경 번역 및 목회 - 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 차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행적을 읽으면서 그분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 것을 통해 성경 전체와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10년 전의 목회 실패와 그 이후의 방황기 속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고 이전보다 조금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립 개체로 산 지난 30년 동안의 경험과
특히 국내에 복귀하여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고 하는 여러 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성경 읽기를 통해 종합적으로 몇 가지 교훈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마귀와 아담과 이브의 죄악이 모두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남보다 더 가진 사람, 더 배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겸손히 행할 것을 주문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특히 교회의 리더들은 이 점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교만에는 드러난 교만과 숨겨진 교만이 있는데 숨겨진 교만이 실로 무섭더군요.
남의 잘못을 잘 비판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투명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주장만을 펴고 막무가내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나 결국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일에 충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하나님의 일이든 사람의 일이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열매를 거둡니다.하나님과 게으름 그리고 무기력은 극과 극입니다.
4.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보았습니다.
저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예절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내버려두면 훗날 부모의 통곡이 극에 달할 것입니다.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하는 아이는 점수를 따고 들어갑니다.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함을 보았습니다.권위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나중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모들은 이 점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5. 목사는 많이 책을 읽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명연설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위스턴 처어칠의 자서전을 이번 주에 읽고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설교도 잘 하게 됨을 보았습니다.
마음껏 책을 사서 보게 해 준 교회에 감사합니다.
6.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아내의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만 함을 보았습니다.
목사를 비판할 사람은 많은 경우 목사의 아내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말버릇, 손놀림, 앉는 자세 하나까지도 지적하고 교정해 줄 때
듣기 싫어도 들으면 살고, 안 들으면 발전하지 못함을 보았습니다.
또한 목사가 자기의 실수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도움을 구할 때 교회가 흥함을 보았습니다.
완벽한 목사 앞에서는 성도들이 주눅들어 할 말을 못하게 되고 교제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나의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강하심이 일한다는 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7. 좋은(선한) 사람들이 모여야 교회가 잘 됨을 보았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보았습니다.
심성이 좋은 사람이 좋은 가정을 꾸리고 좋은 교회를 하며 좋은 시민이 됩니다.
아직 시집장가가지 않은 분들은 이 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서는 저는 행복한 목사입니다.
8. 교회가 흥하려면 자매님들이 활발해야 함을 보았습니다.
자매들을 억누르면 교회가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단정하면서도 활발하게, 솔직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사귀는 자매님들이 있어야 교회의 부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9.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결국 나의 친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흔들리는 사람과 사귀면 끝이 좋지 못하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10. 성경을 많이 알고도 죄를 짓는 이 죄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또 긍휼히 여기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찾지 의인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성도들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자꾸 불쌍히 여기는 것이 목사의 사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과는 이것도 잘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교만이 가장 크고 무서운 원수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1. 성경 출판과 교회 이전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말없이 희생하고 돈을 써야 할 때 쓸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 주심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구나 하고 절실히 느끼고 반성을 한 적이 많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돈을 써야 할 때 쓸 줄 아는 성도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부자임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12. 한국 교회에 진리가 없어서 애통하는 사람이 너무 많음을 보았습니다.
"무지와 헛된 열심 속에서 인생을 허비하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바르게 인도할까?" 하고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리스트를 더 적어 보겠습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두서 없이 몇 자 적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 경험에서 얻은 단편적인 교훈들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사항: 이것들은 어쩌면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일지 모르므로 잘 판단해서 흡수하기 바랍니다.
(**) 또한 댓글(덧글)은 사양합니다.
샬롬
정동수[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6:4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25 18:09:4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약 3년 전에 저는 김재근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로버트 사전트 목사님의 확고한 책
"English Bible: Manuscript Evidence"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하려고 원고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출간을 미루다가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이 책이 꼭 필요하다는
김재근 목사님의 요청에 따라 PDF 파일로 무료로 책을 공개하오니 필요한 대로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제목은 "킹제임스 성경과 사본들의 증거"입니다.
원 제목과 출처는 다음과 같고 저희는 출간 허락을 받았습니다.
"English Bible: Manuscript Evidence"
Pastor Robert SargentBible Baptist Church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여러 가지 책들 중에서 독자들이 보기에 가장 좋고
이해하기 쉬운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을 무료 PDF 파일 책들에 첨가하였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151
감사합니다.
샬롬
정동수 드림
(*) PDF 파일이 다운되지 않으면 다음 기사를 클릭해 보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146
(**) 참고로 이 책은 책으로 제본하려는 계획이 현재는 없습니다.
2012-04-24 10:46:06 | 관리자
저는 솔직히 성경(신학)을 잘 모릅니다.
사실 킹제임스성경을 접하게 된 것도 극히 세상적인 이유였죠.
성경을 읽으면 좋을것같은데, 영어성경을 읽으면 일석이조라는 참으로 기특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어성경...뭘 읽으면 좋을까? 하고 찾아보았죠.
대부분 NIV를 권합니다. 서점에 가도 대부분 NIV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그리스도예수안에" 지금의 "성경지킴이"싸이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음...KJV는 뭐지? 이단인가? 왜 올바른 성경이라는데 왜 안 알려졌지? 과연 믿을 만한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었죠.
그때가 아마도 8년 전인가 봅니다.
10여년전 예전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할 때 멍한 적이 있습니다.
어 뭔가 이상한데. 뭐지? 한참 지나서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대부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할수도 있구나...
예전 교회에서 거의 항상 예수님을 "님"자를 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는 말씀이 멍하니 저의 마음을 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자의 귀중한 이름을 부르는데, 우리나라 글에 아주 좋은 "님"을 빼고 마치 친구이름부르듯이 부르는게 솔직히 마음이 편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읽던 개역성경 또한 "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성경은 "예수님"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이것이 제가 킹제임스성경을 권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존경하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리고 전 개역성경의 이 말씀이 정말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39절 :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바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접하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묵은것. 즉 예전것. 세상의 일들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을 접하고도 예전것을 더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그건 어쩔수 없는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성경에서는 또한 아무도 묵은 포도즙을 마시고 즉시 새 것을 원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묵은 것이 더 좋다, 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5 : 39
"즉시"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더군요. 정말 위안이 됩니다.
즉 저도 복음을 접했지만 "즉시" 좋아하지는 않을수도 있구나. 그리고 "즉시"는 아니지만 차차 좋아질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접했습니다.
사소한 글자 하나이지만 그 글자 하나가 큰 차이를 가져오는구나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계시는 구절입니다. 역대상4장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개역한글)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원하건대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그에게 주셨더라. (킹제임스흠정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개역한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또한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하라, 하시니라.(킹제임스흠정역) 누가복음 11 : 4
물론 환난도 벗어나고 시험에 들지말아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개역한글)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킹제임스흠정역) 베드로전서 5 : 7
킹제임스흠정역은 누락되거나 빠진부분이 없고, 변개(수정된)부분도 없습니다. 순수한 말씀 자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아내가 이 말씀을 접하고 가슴이 벅차올랐었다는 구절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편 31 : 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개역한글)
{주}께 소망을 둔 모든 자들아,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라. 그분께서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로다 (킹제임스흠정역)
과연 어떤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지요?
저는 킹제임스흠정역을 읽으면서, 아..성경이 이렇게 쉽게 읽히고, 이해가 될 수 있었구나!
특히 시편은 정말 아름다운 시(詩)였구나!
부디 킹제임스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정말 쉽고 이해가 쉬우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정말 지극히 세상적인 이유로 우연히 킹제임스흠정역을 접한 성도의 고백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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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23:50:09 | 김형욱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2:6-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 그리고,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그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즉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한
지금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대로 성경 원문이 보존된 성경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이 바로 그 성경입니다.
세상에는 성경이라는 책들이 수 백 가지 나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참 성경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며 결코 간과 해서는 안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권위이기 때문입
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이 순간에 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참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참 하나님께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된 성경(?)을 믿으면 잘못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물론 부패된 성경(?)에도 진짜가 90% 내외가 포함되어 있어 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은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올바른 교리의 출처가 됩니다. 교리는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달린 중대사 입니다. 교리가 잘못되면 망합니다.
다른 수 많은 성경이라 불리는 책들은 원수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
의해 부패한 즉 삭제되고, 첨가되고, 내용이 바뀐 원문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에 10% 내외가 킹제임스 성경과 다릅니다.
성경 변개는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이브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
되었고 그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마귀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이며, 우리의 대적
마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최초의 원본을 믿으려 하는 원본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초의
원본은 모두 사라졌고 현재는 사본만 존재합니다. 원본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의 말씀인, 참 성경이 그들의 손에 들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원본주의자들은 현재 성경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원본이 사라졌으니 사본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하나님의 말씀인, 참 성경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니 불쌍하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대단히 교만하고 못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의 제임스 왕의 명령에 의해 당대 최고 석학들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히브리 맛소라 원문과 다수 필사본을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표준원문에서 번역한, 권위 역본 킹제임스 성경이 현재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참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는 이를 한글로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참 성경으로 우리 손에 '지금'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패한 성경(?)을 보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절대 복종해야만 합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오늘 우리들의 손에 들려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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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9:35:40 | 이진호
안녕하세요?
뭐 그다지 이슈가 될것도 아닌데...궁금한게 있습니다.
예전 교회에서는 기도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로 끝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엔 "기도드렸습니다"라고 했다가 "기도드립니다"가 맞다보다 생각했지요.
사소한것이긴 한데, 습관이라는게 무섭더군요.
정말 별것 아니지만 궁금합니다. 그래서 여쭈어봅니다.
"기도드립니다" 와 "기도드렸습니다" 둘 중 차이가 있는지? 어떻게 기도를 마치는 것이 좋은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오늘은 참 힘든 하루였습니다.
월요일이기도 하고.... 회사에서 뭔가 개선(변경)하는것이 있어 설명회를 개최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뭔가 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참 오래 참으시는구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해 즉시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참으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마 지금도 "저"에 대해서 참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쯤이나 저는 하나님께 기쁨이 될런지......[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6:4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23 17:54:03 | 김형욱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크게 작용한 요인들
-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교주가 부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또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방대한 증거와 증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 인간이 자기 노력과 근성으로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주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치므로
- 없어졌으면 애시당초 진작에 씨가 말라 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당당히 존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시할 수는 없고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 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압도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면, 웬지 이 바닥에 분명 진리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 성경은 그 논조와 내용을 볼 때 인간이 쓸 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가령,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음. 인간 자신에게 절대 이롭지 않은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게-_- 많이 들어있음)
- 그래도 몇몇 증명 불가능하고 이해가 안 되는 사항들만 일단 믿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각종 교리와 윤리관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건전하다는 게 너무 분명하게 확 느껴져서
- 죄 문제라는 인간에 대한 상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너무나 공감이 가서. 최소한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온갖 상대주의· 다원주의보다는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하고 건전하고 뒤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사회 구조 탓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등등)
그래서 믿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예전 글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참고.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2281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조금 작용한 요인들
- 개독안티들의 무례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사실 여부를 떠나 괜히 반발심과 환멸을 느껴서 (다른 건 몰라도 저놈들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식)
-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과오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은 크리스천들도 오히려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
-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수준의 간단한 변증론. 가령,“지금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없는 게, 지금 안 믿었는데 진짜로 지옥이 있어서 낭패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리스크가 적다.”“신이 없다고 단정짓기엔 인간의 지식은 너무 좁고 빈약하다” 같은 식.
- 내세와 심판이 있을 거라는 양심의 자극.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몇몇 자료들
- 이 정도 교리면, 정말 만에 하나 성경의 내용이 다 거짓이고 허구이고 설령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되어
※ 내 신앙관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은 것들
- 좋든 싫든, 주변 교회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
-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해당 종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언행 (그 사람들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냄)
- 세상 불신자들로부터의 평판, 매스미디어에 묘사된 이미지
- 육신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종교심. 나는 그런 부류의 종교심은 이미 철도교로 다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에다 내 영원을 걸지는 않는다.
- 기복신앙
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나가거나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ㅜㅜ
※ 지금은 발현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깊은 시험에 들고 신앙 면역 체계가 무너졌을 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암적 요소들
- 성경에서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이 안 된 의문이나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 몇 군데. 목사님에게 여쭈거나 주석서를 봐도 알 수 없는 것들
- 성경이 밥 먹여 주냐... 같은 부류의 유치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험. 현실의 염려 (눅 8:14)
- 신앙생활이 매너리즘으로 변질돼 가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는 것[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6:4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23 09:49:51 | 김용묵
Am I A True Believer?
나는 참된 믿는 자인가?
In this brief study we want to consider the important, soul-searching question: Am I a true believer? To help you answer this question, consider the following questions. Think about each one in an honest, personal way. Take time to look up the Bible verses that are given along with each question. Ask yourself: Who am I really trusting for my eternal salvation?
Do I see myself as a guilty, lost sinner who stands condemned before a holy and righteous God (Romans 3:10-19,23)?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은 상태의 죄가있는(유죄의), 잃어버린 바 된 죄인으로 보는가(로마서 3:10-19,23)?
Do I recognize that my own heart is deceitful and wicked and incurably sick (Jeremiah 17:9; Mark 7:21-23)?
나는 나 자신의 마음이 거짓되고 악하며 고칠 수 없이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예레미야 17:9; 마가복음 7:21-23)?
Do I see myself as deserving of death and hell (Romans 6:23)?
나는 나 자신이 죽음과 지옥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가(로마서 6:23)?
Do I realize that if God were to give me what I deserve and repay me for the way I have lived, then I would be totally destroyed (Psalm 130:3; compare Psalm 103:10)?
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받을만한 것과 내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내게 돌려 주실 것을 나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가(시편 130:3; 시편 103:10과 비교하라)?
Do I recognize that there is absolutely nothing I can do to save myself (Titus 3:5)?
나는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가(디도서 3:5)?
Do I understand that trying my best to perform good works will never gain me or earn me an entrance into heaven (Ephesians 2:8-9)?
나는 선한 행위들을 행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를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혹은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가(에베소서 2:8-9)?
Do I realize that my church or my religious system cannot save my soul (Jeremiah 17:5)? 나는 나의 교회 혹은 나의 종교적인 체계가 나의 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가(예레미야 17:5)?
Am I convinced that my own righteousness and my own goodness falls far short of the righteousness that God requires and demands (Romans 3:10-12; 1 Corinthians 6:9-10)? 나는 나 자신의 의와 나 자신의 선함이 하나님께서 바라고 요구하시는 의로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확신하는가(로마서 3:10-12; 고린도전서 6:9-10)?
Do I, in and of myself, have any personal credentials that are acceptable before God (Isaiah 64:6)? 나는 나 자신 안에 그리고 나 자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만한 어떤 개인적인 자격을 가졌는가(이사야 64:6)?
Do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God’s only Solution to my sin problem (Acts 4:12)?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을 믿는가(사도행전 4:12)?
Do I recognize Him as the only way to God (John 14:6), the only Door to salvation (John 10:9), the only Saviour for sinners (Matthew 1:21) and the only One who can give me eternal life (John 10:28; 17:3)?
나는 그분(예수님)을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서(요한복음 14:6),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요한복음 10:9)으로서,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자(마태복음 1:21)로서,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요한복음 10:28; 17:3)으로 인정하는가?
Do I understand that Jesus Christ is the eternal God (John 1:1-3) who came into this world and became a man to save me (John 1:14; 1 Timothy 1:15; John 3:17)?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영원한 하나님(요한복음 1:1-3)이시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1:15; 요한복음 3:17)을 이해하는가?
Am I convinced that He loved me even when I was a great sinner (Romans 5:8; John 3:16) and that He died and rose again to save my soul (Romans 4:25)?
나는 그분께서 내가 큰 죄인이었을 때(로마서 5:8) 조차도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의 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신하는가(로마서 4:24)?
Am I persuaded that the Lord Jesus died on the cross for my sins and that He died in my place as my perfect Substitute, dying in my stead and paying completely the full penalty for my sins (Isaiah 53:6; 1 Peter 3:18; 2 Corinthians 5:21)?
나는 주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나의 완전한 대속물로서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고, 나의 죄들에 대하여 완전하게 온전한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을 확신하는가(이사야 53:6; 베드로전서 3:18; 고린도후서 5:21)?
Am I trusting in Him and in Him alone to save me (Acts 16:31)?
나는 그분께서, 그분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고 있는가(사도행전 16:31)?
Have I come to Him in simple, child-like faith (John 6:35,37; Matthew 11:28)?
나는 단순히,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가(요한복음 6:35,37; 마태복음 11:28)?
Have I, by faith, personally received the Lord Jesus Christ as my Saviour (John 1:12)? 나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서 개인적으로 영접하였는가(요한복음 1:12)?
Am I resting my entire self on who He is (John 8:24), on what He has done (1 Cor. 15:3-4) and on what He has said (John 6:47)?
나는 나의 전체 자아를 그분이신 것과(요한복음 8:24), 그분께서 하신일과(고린도전서 15:3-4),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요한복음 6:47)에 의지하여 안식하고 있는가?
Do I believe that He is able to completely save all those who come unto God through Him, including me (Hebrews 7:25)?
나는 그분께서 나를 포함하여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모두를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히브리서 7:25)?
Do I believe the statement of Christ found in John 5:24?
나는 요한복음 5:24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가?
Is John 3:16 true of me? 요한복음 3:16말씀은 나에게 해당되는가?
Have I ever shared with others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ur (Romans 10:9-10; Matthew 10:32)? 나는 다른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이야기해 본적이 있는가(로마서 10:9-10; 마태복음 10:32)?
Am I able to say from my heart: “My hope is built on nothing less than Jesus’ blood and righteousness. I dare not trust the sweetest frame but wholly lean on Jesus’ Name.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Edward Mote]
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가: "나의 소망은 바로 예수님의 피와 의로우심에 의지한 것이다. 나는 다른 가장 좋은 어떤 것(사람,환경,감정 등)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나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서있다 --- 모든 다른 땅은 무너지는 모래이다, 모든 다른 땅은 무너지는 모래이다!"(마태복음 7:24-27)
Another helpful question that I can ask myself is this: If I were to die today and stand before God and He should ask me, “Why should I allow you to enter My holy heaven?” what would my answer be? If my answer in any way points to MYSELF (my own credentials, my own works, my own religious deeds, etc.) then I am not standing on solid ground. Here are some examples of people putting their trust in SELF:
내가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또다른 도움이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내가 오늘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그분께서 나에게 "왜 내가 너를 나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오도록 허락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무엇이 될까? 만약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대답이 나자신(나 자신의 자격, 나 자신의 행위, 나 자신의 종교적인 실행 등)을 가리킨다면 나는 반석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자기 자신에게 신뢰를 둔 사람들의 몇 가지 예들이 있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n my life I have done more good than bad.”
•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생애 동안 나쁜 짓보다는 선한 일들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 try to keep the ten commandments.”
• 하나님께서는 내가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 “God should let me into His holy heaven because I’m a member of a certain church” etc. All such answers point to ME, but salvation is not of ME; salvation is of the LORD!
•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교회의 회원이기 때문에 나를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셔야만 한다 등등. 이러한 모든 대답은 나를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There is only one reason why I can enter God’s holy heaven. The appropriate response is this: “I will enter God’s holy heaven for one reason and one reason only. It is only because of Jesus Christ my Saviour. Apart from His work on the cross I could never be saved. Apart from His life which He has given to me as a free gift, I could never enter His holy heaven. He is my only hope. He is the only righteousness I have and He is all the righteousness I need. Thank You Lord for saving my soul and making me whole.” Notice how this answer points away from SELF and clearly points to the Saviour and to Him alone!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적합한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만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분께서 나에게 값없이 주신 그분의 생명이 아니고는 나는 결코 그분의 거룩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분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은 내가 가지고있는 유일한 의로움이며 그분은 내가 필요로하는 모든 의로움이다. 주님 나의 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 대답은 자신을 강조하지않고 명백하게 구원자 그분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나를 100%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런 값없이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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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1 23:07:36 | 신혜경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만약 2천년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처음엔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과연 그때 그 시절에 있었다고 해도, 예수님을 과연 믿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예수안에" 사이트가 있었기에
제가 올바른 지식을 접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지식을 접하곤 합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춘 분의 블로그를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지동설을 말씀하시길래, 천동설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지동설이 맞다고 하더군요.
분별력이 뛰어나신 분이라도 (내가 보기엔) 틀린것을 믿을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렇든 우리는 우리가 믿어왔던 것이 공격받을때 즉각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저항합니다.
내가 믿던것이 틀렸다는 것이 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믿어왔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것이 정말 쉽지 않지요.
지동설을 믿던, 천동설을 믿던 본인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의지에 달린것 같습니다.
(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이 믿는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미신자(未信者 : 아직 믿지 않는자)들은 예수님 믿는것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는듯 합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춘 분 또한 본인이 지동설을 믿겠다고 작정하신것이지요.
그분의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남겨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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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성도들끼리도 의견충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지체들끼리...
오죽하면 사도들도 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용한 성경구절을 다시 보니 엄밀하게 사도들끼리의 분쟁은 아니었네요)
사도행전 15장.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작지 않은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니라. 이에 그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자기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니라.
지동설을 믿건, 천동설을 믿건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천동설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생각, 논리, 믿음보다 성경이 맞다는 믿음이 우선합니다.어느 성도가 말했듯이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우리의 생각이 성경과 충돌할때, 무엇을 선택할것인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긴 하나, 성도라면 성경을 우선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40년을 넘게 당연히 지동설이 맞는것이지라고 살다가, 성경말씀과 지동설이 충돌한다는것을 알게 되었을 때,커다란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본인들의 지식이 우선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과 같이 되시지 말길 바라옵니다.-------------------------------------------------------------------------------------------------
의견 차이....
어찌보면 의견차이가 없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이렇든 우리는 다 제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신비이자 기적인듯 합니다.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으니 말씀대로 이뤄질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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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12:49:12 | 김형욱
안녕하세요?
다음 사이트에는 여러 가지 유용한 자료가 있습니다.
영어로 되어 있지만 설명해 주기에는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살펴보세요.
샬롬
http://visualunit.me/
2012-04-12 10:35:01 | 관리자
현재 미국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오랫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던 수잔 콜린스(Suzanne Collins)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헝거게임(Hunger Game)>이다.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는 평을 듣는 소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영화는 소설과는 또 다른 장르이니만치 평가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아직 소설은 읽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영화만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야기는 미래의 어느 시점, ‘팬암’이라는 제국이 지배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팬암의 수도인 ‘캐피톨’은 1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전체 영토를 지배하며 관할하고 있다. 각 구역의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정부의 체제에 순응하며 별다른 저항을 할 엄두도 못 내며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캐피톨’의 사람들이 누리는 부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매년 한 번씩 개최하는 소위 <헝거게임>이라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방식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각 구역마다 매년 2명의 10대 남녀를 자원 또는 강제로 선발하여 이렇게 모인 총 24명의 소년 소녀들을 일정한 공간 (산도 있고 강도 있는 매우 넓은 공간 임) 안에 집어넣고,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생존경쟁 게임을 시킨다. 더군다나 이 경기를 TV로 생중계하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보면서, ‘캐피톨’의 시민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걸면서 열광적으로 즐기는 이 나라 최고의 축제 이벤트가 바로 말 그대로 ‘배고픈 자들의 게임’ 즉, <헝거게임>이다.
여러 구역 중에서도 최고로 가난한 구역인 12구역에서, 어느 날 추첨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헝거게임에 나가야만 하는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16살 여주인공 ‘캣니스’는 이 경기에 자원하게 된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이제 그녀가 펼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담과 로맨스로 관객 몰입도를 한층 높여 주며, 뒷이야기 들을 끌어간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 영화의 호불호는 갈려지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눈이 적어도 아마추어 수준은 조금 벗어났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필자의 눈으로 볼 때도 이 영화.. 꽤 괜챦은 편이다. 나머지 이야기의 결과와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필자가 논의할 주제는 아니어서 생략하기로 하고,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본 영화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팬암제국은 크게 3개의 작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12구역으로 나눠진 보통 사람들의 세계다. 둘째는 캐피톨로 불리는 소위 엘리트 시민들의 세계.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엘리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공간인 세 번째 세계, 즉 헝거게임이 있다. 엘리트 시민들은 보통 사람들을 구역 안에 가두고 통제한다. 여기에 순응하고 살아가면 비록 가난하고 질은 떨어지지만 생명은 보장된다. 그래도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이들의 반란을 제어하기 위해서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이 가능한 게임의 룰을 제시하며, 보통 사람들을 헝거게임의 틀 속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살아남는 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며 반란의 기운은 사그러든다. 왜냐하면 엘리트들이 누구라도 원하면 헝거게임을 통해 정당한 (?) 방법으로 엘리트 사회로 진출하면 된다는 희망을 심어 놨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나타난 팬암제국의 모습은 매우 단순화된 구도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근본 구조가 많이 닮아 있다. 영화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있고, 대다수의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 엘리트 그룹은 독점하다시피 세상의 부를 거머쥐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삶의 질고에서 힘들어 하며 꿈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룰을 바꿔 가며 헝거게임 같은 구도를 만들어 준다. 가령 여러 가지 정치적 이념으로 판을 짜 주기도 하고, 다양한 철학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며, 때로는 경제 활동의 방식을 여러 형태로 바꿔주기도 해 가며 그 룰에 따라 게임을 하라고 한다. 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하여 엘리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피 흘리는 서바이벌 게임을 뛰며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게임의 룰 속에서 더러는 성공을 거머쥐며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희망’의 얼굴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서바이벌 게임이란 것이 본래 그렇듯이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자 혹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무한경쟁의 치달음 속에서 비록 승자로 살아남을지라도 그 성공에 상응하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 어떤 게임의 룰을 따라 헝거게임이 진행이 되고 있는가? 성장위주의 자본주의 이념 속에서 적자생존적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유물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의 룰인가? 아니면 좌파니 우파니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한물간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벌여야 하는 정치 논리의 룰인가? 서바이벌 게임 속을 바삐 뛰어 다니는 동안 우리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어느새 한명씩 숨죽어져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는 있는가? 우리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게 되었는지는 과연 제대로 알면서 뛰어 다니고 있기는 하는 것인가?
본래 3부작으로 쓰여진 소설에 맞추되, 영화는 그 표현과 시간적 제약의 한계를 감안하여 총 4부작으로 계획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명과 팬암제국의 결말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현실 세계의 결말은 어찌될지를 알고 있다. 팬암의 세계에는 없으나, 현실세계에는 존재하는 바로 그 '책'이 한 권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영화 속에 보면,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소년 소녀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각자의 오른팔에 칩을 심는 장면이 나온다. 헐리우드 영화가 잘 쓰는 서브리미널(subliminal) 기법이라는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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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1 00:38:31 | 김정훈
여호와 이레 (창22:14)
제가 올해 들어서면서부터 제가 사는 나라에서 전국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모여서 수양회를 한번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이곳에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또한 한국에 목사님들에게도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해버리고 나니 점점 근심이 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장소의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서 정부의 허락이 없이는 문제가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고 둘째는 장소가 있다고 해도 형제자매님들이 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수양회에 오라고 하면 그 먼 곳에서 긴 시간 차를 타고 오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괜히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또한 한국에 목사님들 앞에 말을 했다는 마음이 들어서 참으로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또 연변 지역 형제자매님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저의 마음에 말씀을 주셨고 또한 일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연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설교 원고에 작성도 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했을 적에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위하여 양을 번제 헌물로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근심하고 걱정하고 절망을 하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셨고 그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양을 보여주고 그 양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도록 명을 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전하게 되면서 갑자기 저의 마음에 수양회를 놓고 믿음이 없는 생각을 가진 부분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었고 그 부끄러운 생각을 가졌던 것을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털어놓으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자는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전하고 나니 허자매님이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귀가 번쩍 뜨여서 어데 있느냐고 물으니 허자매님 여동생이 몇 년전에 산을 하나 사놓았는데 그 산에 집이 있고 방도 넓고 모임을 가지기에 참 좋은 곳인데 자기 여동생에게 말하면 쉽게 허락을 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허자매님 여동생이 이번에 제가 연변에 가서 복음 교제를 하여 구원을 받은 자매님이었습니다.
허자매님이 그런 좋은 장소가 있다는 말을 저에게 할 적에 바로 이거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허자매님 여동생 남편에게 말씀을 올렸는데 쉽게 언제든지 마음대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허자매님과 자매님 여동생을 모시고 산에 모임 장소를 보러 갔는데 참 좋고 조용한 곳에 모임하기 좋은 장소가 있었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거두지 않아서 많이 어지러워 있지만 한 사흘간 와서 치우고 청소를 하면 정말 좋은 모임의 장소가 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산이지만 전기도 다 들어와 있고 물 조건도 다 잘 되어있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생각을 뛰어넘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를 했습니다.
이번에 연변에 가서 자매님 집에서 두 번 그리고 호텔에서 한번 이렇게 세 번이나 모임을 가지면서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들을 함께 보냈고 두 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차를 타서 오늘 아침에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번에 연변에 가서 주님이 장소를 예비해 놓으신 것을 보면서 정말 감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양회를 하려면 많은 물질이 들어가고 특히 이부자리나 밥을 해먹을 사발 그릇이나 많은 것을 준비가 되어야 하고 또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형제자매님들을 모으는데도 주님이 일을 해줘야 됩니다.
저는 지금도 근심이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일을 하신다면 그런 것 까지도 주님이 일을 해주시지 않겠느냐는 마음도 듭니다.
그리고 수양회를 한다면 강사도 한국에서 목사님들을 강사로 모셔오고 싶은데 그것도 주님이 해주셔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기도가 되어 집니다.
[여호와이레](창22:14)
주님이 중국 수양회를 위해 일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중국 수양회를 위해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시님의 사람 올림.
2012-04-10 14:20:42 | 시님사람
누군가 미명으로 작성한 글인데
인테넷 메일로 저한테 보내 왔습니다.
바른성경으로 바른예배들 드리고 바르게 교회를 하고 있는 우리도 읽어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올립니다. 참고 하세요
"기독교 자폐증"
----- Forwarded Message -----
교회는 하루아침에 부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소망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핍박 받는 자의 종교에서
부자의 종교, 배부른 자, 핍박하는 자의 종교로 변질 되었다.
주기 위해 믿었던 종교에서 가지기 위해 믿는 종교가 되었다.
평화를 위한 종교에서 전쟁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한 종교에서 내가 살기 위한 종교로,
사랑하기 위해 믿는 종교에서 사랑 받기 위해 믿는 종교가 되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지만,
예수의 교회는 하늘 보다 높은 종탑을 쌓았고,
황금으로 치장 된 제단을 세웠다.
제사를 위해 바쳐졌던 제물은 제물을 위한 제사가 되었고,
오늘도 교회는 헌금 봉투에 적힌 이름을 줄줄이 읽어대며
헌금 액수를 주보에 떡 하니 적어놓고 있다.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걸어 놓은 교회는
넘쳐나는 재물로 치장 되어졌고,
교회 안에서 예수는 아직도 벌거벗겨진 채 피를 흘리고 있지만,
피 흘리는 예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두꺼운 비단 옷을 걸친 채,
주체하지 못하는 비만의 기름을 흘리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교회의 성벽은 높아만 간다.
그럼에도 예수 믿고 천당만 가면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회 밖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는 분명 한국 교회가 처한 심각한 자폐증 증상이다.
한국 교회의 자폐증은 치료 되어야만 한다.
치료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버려야 한다.
돈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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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3:35:31 | 정구만
일루미나티가 당당히 자신을 나타내는 이유...
예전엔 프리메이슨 자체가 미스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가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려면 상당히 어려웠으나
이제는 과거(5년전)보다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의 책이나 글은 가능한 멀리 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반진리가 섞여 있을 때 어떤 것이 반진리인지 분별하기에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진리를 말하다가, 아주 간혹 예를 들어 연옥에 대한 교리를 아주 애매하게 섞어 놓으면, 그냥 따라가게 되더군요.
니므롯의 후예들 세미나를 통해서 알게 된 일루미나티 카드.
저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상당히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물론 이 세상이 사탄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간혹 까먹어서 탈이지요)
(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5-19)
이 세상이 사탄에 속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사탄이 의도한 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볼 때,
왜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계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과연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글입니다.
일루미나티(루시퍼)의 예언 사역 http://blog.naver.com/esedae/90138077833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때는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실현되는 때 일 겁니다.
루시퍼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흉내내었듯이,
루시퍼가 예언하고, 그 예언을 이뤄나가는 것처럼 보여 줌으로 세상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고,
대중(일부러 분별하려 하지 않는)들에게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사탄의 음모(계획)가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
소위 말하는 신세계질서(NWO New World Order)를 수용하도록 세뇌 혹은 주입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탐하여 왔듯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불과 몇년 전)에는 숨어서 은밀하게 진행하던 일들을 이제는 버젓이 드러내놓고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중매체가 이미 오염되어 사탄의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eminem0814/10135690756
아마도 이젠 어느 정도 힘이 있다고 그리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신호"라는 책은 아마도 하나님의 교회에게 각성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의도일수도 있습니다.
http://truthnlove.tistory.com/1229
http://blog.naver.com/yoochinw/130095097472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사탄에게 속하여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권능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는 고아처럼 내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벧전5-7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1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이사야 41-10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벧전1-5
요약하면, 일루미나티가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는
이제 자신들의 때가 왔고, 그리고 힘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동안 거짓 대언자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로버트 슐러, 조엘 오스틴 등등), 교회 내의 거짓된 활동 (알파코스, 예수전도단(관상기도)등) 대중매체, 도서 등을 통해 세뇌를 시켜왔고 현혹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때 입니다.
We are in this world, but not of this world.
(P.S. 제가 링크를 한 블로그의 내용을 전부 지지하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의견들이 있음으로 분별에 도움이 되고자 함 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쓸까 말까 한참(3일)을 고민했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7: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10 08:02:40 | 김형욱
안녕하세요?
저희 사랑침례교회에서는 5월말에 펜사콜라 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는 김문수 형제님을
부목사로 초빙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김 형제님과 가족(이주옥 자매님, 예성, 예찬 아들들)은 6월 3일에 한국에 돌아오십니다.
그 뒤부터 저희와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진력할 것입니다.
돌아오시면 곧바로 적정한 절차를 통해 목사 임명을 받고 교회의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실 것입니다.
또한 본 사이트에 좋은 글도 올리고 여러 가지 좋은 강의, 설교 등도 올리게 될 것입니다.
온 가정이 무사히 귀국해서 주님의 왕국을 확장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정동수
2012-04-09 12:22:37 | 관리자
예전에 간증에서도 썼듯이, 본인은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그리고 기존 개신교회로부터는 별다른 실족이나 분쟁· 충돌이 없이 자연스럽게 분리가 이뤄졌으며(타지에서 학교 다님), 자습을 통해 KJV 진영에 입문했다. 기존 신앙 노선에다 KJV가 그대로 추가, 보충, 보강되는 형태로 신앙관이 발전한 사례이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서 본인은 이단들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비판하고 공격한 전적(?)이 있으나 우리나라 현대사나 교회사는 심지어 정치적인 관점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미우나 고우나 내 정신세계의 고향이니까. 예를 들면,
- 우리나라 정부가 잘못한 것보다는 북한이 저지른 만행을 훨씬 더 규탄한다.
- 과거의 독재 정권은, 민주화 인사나 용공분자들을 탄압하긴 했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적은 없는데,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들보다 그들이 더 카리스마 있게 훌륭한 큰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 옛날에 좀 무고한 사람들이 정치 정적으로 몰려 죽은 것보다는, 오늘날 국가가 흉악범에게 사형 집행을 안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열불나는 일이고 그거야말로 인권 침해이다.
- 한국 교단이 과거에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보다는(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몇몇 순교자들,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이라든가 제헌 국회가 기도로 시작한 것 등에 더 애착이 간다.
이런 식이다.
내가 자유가 있고 이만한 기독교 인프라가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를 바탕으로 KJV에 대한 믿음도 쉽게 추가될 수 있었다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 (1)
비록 모교회는 여전히 KJV를 잘 모르고 심지어 이단시하고는 있지만, 그건 걔네들 사정이고.
또한 나는 우리나라 사회와 국가 제도에 대해 피해의식이 없다.그 열악하던 여건에서 그나마 이 정도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것이 다행이고, 옛날에 저질러진 부조리는 피아식별도 안 되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게 많았다고 생각한다. 세상 정부가 교회처럼 행동하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나라 현대사에 피해의식이 많은 진영의 사람들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시나리오가, 내가 보기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과 같은 사고방식은 대체로 우파 내지 보수라고 불리는 듯했다.
나는 그 반대편 성향의 진영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했다.현대사에 대해 편협한 정보로 자꾸 쓸데없는 피해의식과 반체제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주 거북스러웠고, 또 그런 진영이 대체로 반기독교 성향도 강하며 반성경적인 사회 운동도 대개 그쪽 주관이니까 말이다. 체벌 반대, 동성애와 낙태 합법화, 사형 폐지 운동 같은 것들.
글쎄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내가 미국 산골짜기에서 자랐으면 전형적인 redneck 같은 꼴통 부류가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개인적인 성향은 그렇다.난 오만하게도 킹 제임스 성경을 믿고 세상 정세를 성경으로 판단하는 크리스천일 정도이면, 사회· 정치관도 당연히 그런 쪽으로 기우는 게 마땅하다고 한동안 생각했다.
비록 내가 국가 교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지 않은가?기독당 같은 것이야 정말 멍청한 짓이지만, 까놓고 말해 학생 인권 조례 반대 서명 같은 건 공감할 만하지 않냐 말이다.
그랬는데 KJV 진영 내부에도, 교리적으로 알 거 다 알 만한 분들 중에도, 진보 성향이 강한(명백하게 성경과 어긋나는 교리는 제외하고 나머지 다른 성향이)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는 걸 훗날 알게 됐을 때 나는 굉장한 culture shock을 경험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연구와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얻은 해답은 이렇다. 이런 분들은 기존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썩어빠진 기성 교계의 '대안'으로 기독교 안티 대신 KJV 진영을 선택한 관점이다. ... (2)
기존 개신교회에서 정말 산전수전 다 겪고 힘들게 KJV 진영으로 오신 분들, 메이저급 교회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리적 배도와 부정부패, 몰상식한 짓들을 직접 본 분들은 기성교회들의 치부가 눈에 훨씬 더 빨리 들어오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수준은 정말 어지간한 기독교 안티들을 능가한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안 좋은 부분을 더욱 부각시켜 보는 듯하다.
가령, 난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을 존경할 줄만 알았지, 신사 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한국의 주류 기독교계로 이어졌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을 안 해 본 관점이었다. 한 마디로 놀랐다.
요컨대 KJV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경로로 이쪽으로 유입되었으며, 신앙 배경도 의외로 다양하다. 이것이 정치 견해라든가 기성 기독교계에 대한 호불호 차이로도 나타나는 듯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과 (2)를 비교해 보기 바란다.
물론, 성경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정치 중립적이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엔 수구 기득권층과 외세뿐만이 아니라 민중들도 똑같이 기여했다.한편으로는 부자들, 통치자들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도 똑같이 악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그런 성경으로부터 한 논조만 뽑아서 자기 프로파간다의 정당화에 써먹는 것은 잘못이다.사실은, 세상에 왜 이런 지저분한 이념 대립이 생기는지조차도 성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성장 배경과 취향의 특성상, 특정 논조에 대해 사람이 저마다 bias와 preference를 갖는 것 자체는 개인 자유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리스천도 국가 시민이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허나 반역을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이것으로 사람 인격을 판단하고 불필요하게 싸우는 일은 없어야겠다. 좌빨이든 수꼴이든 똑같이 죄인이고, 예수 믿어 거듭나면 각각 구원받은 좌빨과 구원받은 수꼴이 될 뿐이다. ^^;;
아, 물론 상대방 편을 보고 네놈들이 하는 짓이 반역과 똑같다고 싸우는 경우도 있긴 하다. ㅜㅜㅜ 답이 없네 그럼. 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판단하시길 원한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7: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9 11:56:56 | 김용묵
진화론은 도대체 성경과 조화가 될 수 있는 이론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진화론 사상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윈은 한때 신학도로서 본래 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믿게 되면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은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는데, 유명한 진화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나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같은 사람은 모두 진화론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과 진화론을 같이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지켜야 마땅할 신학교에서 조차도 진화론과 타협한 신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으나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든지, 이를 조금 변형하여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의 중간 중간에 필요에 따라 개입하여 창조를 하셨다는 ‘점진적인 창조론’,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지질학적 연대로 해석하는 소위 ‘날-시대 이론’ 등이 모두 진화론과 타협하여 나온 이론들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 사실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진화론과는 혼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의 본질은 반-성경적이다.
우선 먼저 진화론이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열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에 안식을 취하심으로 (창 2:2-3; 히 4:3, 10) 지질학적 연대와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심으로, 수억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부정케 하셨다. 넷째, 예수님 자신께서 직접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셨다 (마 19:4-6; 막 10:6).
그럼 이제 진화론이 왜 반-성경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의 조상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0 만 년 전으로서,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생존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된다. 성경은 잘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과 사람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창세기 1장), 이 말은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같이 어울려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가 있은 후에,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죽음이 들어 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더 분명하게 명시되어 나타나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롬 5:12) 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한사람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전 15:22).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물들도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기록 (롬 8:22) 함으로써, 결국 생물계에 나타나는 죽음이 사람의 존재 이후에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혹은 이것의 변형인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에 빠지는 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과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부활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요 (고전 15:12-19),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의 죄악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죽음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으로 죽음은 우리의 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가 부활을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만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진화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이 갖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우 열심이면서도 정작 그 복음의 기초를 두고 있는 부활의 사실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진화니 창조니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부활의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엡 4:13) 성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험해본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 옆에 같이 있던 한 범죄자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 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었겠지만 (눅 23:40-43),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아직 이 땅에 살면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엡 4:13), 믿음 안에 거하되 터를 다지고 정착해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골 1:23)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오직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성경과 진화론을 혼합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들이 그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졌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를 하셨으며, 따라서 창세기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에 걸맞게 재해석 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적 접근 방식의 모순을 아주 예리하게 웅변적으로 잘 지적했던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 소문이 나있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이었다. 그는 아주 열렬한 진화론의 신봉자로서 ‘다윈의 불독’ 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다윈 자신보다도 더 진화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화론을 가지고 성경 기록의 진실을 파괴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즐거워하였다. 반면에 진화론을 성경과 혼합하여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공격을 통하여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부당성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성경 구절을 직접 펼쳐 보이면서, ‘성경의 창조 기록에 진화론을 합치는 일은 결국은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창세기를 진화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리를 진리로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고 조롱하고 다녔다. 물론, 그의 말의 요점은, 결국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타협을 그만두고 진화론을 제대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성경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진화론은 잘못된 사상이다. 진화론은 우리의 신앙을 노략질하는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이다 (골 2:8). 그러나 헉슬리의 지적은 옳았다. 비록 그 자신은 성경을 불신하였었지만, 무엇이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인 줄을 잘 알고 그것을 정확히 공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공헌 할 수가 있었다. 진화론자였던 헉슬리가 오히려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진화론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지 백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며, 교회가 지켜내야 할 성도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을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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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8 18:36:20 | 김정훈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4, 17).
또한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성경이 기록한 인간의 기원과 타락,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속하심의 역사, 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것은, 바로 기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본주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심들을 제기해 왔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하셨으나 실제로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으셨다는 사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숨을 거두셨는지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으신 고통은 어느 정도쯤 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로마 병정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채찍질을 받으셨다. 이 채찍은 플래그럼(flagrum)이라고 불렸는데, 가죽 끝에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와 납 조각을 붙여 만들어,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을 뜯어냄으로, 여러 번 내리치게 되면 피부 밑에 근육까지 뜯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피부 조직을 망가뜨리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는 대략 50kg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게로 인하여 고통은 가중되고, 마침내 언덕에 다다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있었을 것이다. 의사인 트루만 데이비스(Truman Davis)는 그의 저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온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 팔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고, 결국은 숨을 못 쉬게 됨으로, 십자가상에서 질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주면 막힌 숨을 내뿜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리를 꺾어 주게 되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할 수가 있는데, 성경 (요 19:31-34)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 곁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의 다리를 꺾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그가 이미 죽은 관계로 꺾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 19:33-34). 상처가 난 곳에서 많은 물과 피가 흘러내리는 경우는 십자가상에서 심장파열로 죽은 경우에 나타난다고,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증언(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서, 더블린 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사무엘 호우톤(Samuel Houghton)의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피만 나왔을 것이나, 피와 물이 같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로마 병사는 그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고 4 복음서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또한,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막 15: 44-46),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심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자,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은 갖추어 졌다. 하지만, 부활이 문자 그대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조쉬 맥도웰은 그의 저서 <부활의 요인(The Resurrection factor)>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될 일곱 가지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봉인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 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이다.
셋째, 당시에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의 무게는 대략 1,400~1,800 kg 이라고 한다.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다고 가정했을 때,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렇게 큰 돌을 그들에게 전혀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나셨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 하려고 하였겠는가?
증거의 신빙성을 다루는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로서, 하버드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 분야의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증거의 법칙에 관한 논문>을 남긴 바 있는 싸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조사해 본 끝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그 어느 사건보다도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확실한 증거들 앞에 더 이상 어찌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모두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게 외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하셨으니,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다 같이 소리 높여 부활하신 우리 주를 찬양 할 찌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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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7 17:26:31 | 김정훈
아픔은 아파 본 사람 만이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그렇듯이 고통의 감각 또한 매우 상대적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하여 느끼는 반응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이 되며, 주변에서 같이 아파함으로 어느 정도 고통의 경감은 가져 올 수 있을지라도,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고통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하며, 그래서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 몸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비명과 함께 손을 떼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손은 다 타버리고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은 또한 우리의 성격 형성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크게 앓고 난 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통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조직의 세포막이 부서지면서 주변에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호르몬 같은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근처에 있는 통각전달신경세포에 신호를 보내어 그 신경세포의 반응 문턱을 낮추게 한다. 이제 반응 문턱이 낮아진 신경세포는 평상시에는 무시해 버리던 동일한 크기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반응은 뇌로 전달되어져 우리에게 통증을 느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만일 프로스타글란딘의 역할을 방해 한다면 진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먹는 ‘아스피린(aspirin)’이나 ‘이부프로펜(ibuprofen)’ 같은 성분이 들어 있는 약들이 이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함으로써 진통제로써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우리에게 타이레놀 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한 진통제도 그 안에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 이라는 성분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으며, 역시 간접적으로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진통제들은 일반적으로 몸의 통증을 억제하는 데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불안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같이 수반될 때에는 아편류 만큼 진통효과가 큰 물질은 없다. 보통 양귀비에서 추출해낸 모르핀(morphine)이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모르핀은 우리의 뇌와 척수 속에 들어가 통증 전달의 신경경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우리 몸의 통증을 전혀 못 느끼게 하는 매우 강력한 진통제로 병원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그 양을 너무 많이 늘리게 되면 우리의 뇌 속에 황홀감을 만들어 결국은 중독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힘도 가지고 있는데, 일부 십대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점점 사용 증가 추세에 있는 헤로인(heroine)도 이 모르핀의 변형체인 것을 보면 그들이 헤로인에 탐닉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중독성 때문에 만성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일지라도 의사들은 모르핀을 처방하는데 상당히 신중을 기하고 있고, 일단 처방이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 양을 조절하는데 따른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의 몸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모르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endogenous 인데, 여기에 morphine을 결합하여, endogenous morphine 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엔돌핀(endorphine)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엔돌핀은 아편 속의 모르핀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속에서 스스로 생성과 분해가 이루어짐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중독을 일으키거나 할 염려가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진통제이다. 엔돌핀은 우리가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분비되어 우리 몸의 통증을 완화시키고 행복감을 갖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감수 해내야 할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진통의 선물도 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실 때에 병사들로부터 아편류성 진통제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들이 쓸개를 섞은 식초를 그 분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그분께서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아니 하시더라”(마 27:34)
여기에서 나오는 쓸개란 단어는 히브리어 ‘Rosh’에서 온 말로서 이 말은 보통 쓴 맛을 내는 독성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신명기 29장 18절에서는 ‘쓴 것’으로, 그리고 신명기 32장 32절에서는 ‘쓸개 포도’등과 같은 말로 붙여져 사용되고 있다. 특히 Gesenius가 쓴 히브리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양귀비를 뜻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죄수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줄 목적으로 이와 같이 쓸개를 탄 식초나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도 이와 같이 관습에 따라 일종의 모르핀과 유사한 효능을 발휘하는 아편류성 진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약을 거절하셨다. 우리 몸을 친히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직접 만드신 예수님께서 어찌 마약의 진통효과를 모르시겠는가? 하지만 그 분께서는 능히 유혹을 물리치시고 스스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사야서에 그 답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53:3)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53:4)
“그는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53: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53:5)
그렇다. 예수님께서 친히 받으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 하사 그를 고통에 두셨은즉..” (53:10)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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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고난 주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신 구원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함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자 예수님께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고통’을 일체 피하지 아니하시고, 몸소 직접 겪으셨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감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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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5 22:41:39 | 김정훈
안녕하세요?
오늘은 좋은 소식을 알리려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신학생들과 목사님들이 미션소프트에서 만드는
디럭스 바이블이라는 성경 소프트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격도 비싸서 33만원입니다(1개 사면 3대까지 설치 가능).
저는 주로 미국 소프트웨어(PC Study Bible)를 사용하는데 미국 것보다 훨신 더 잘 된 부분이 많습니다.
참고로 미국 것은 600달러나 합니다(물론 영어로 되어 있지요).
정말로 디럭스 바이블은 한국 분들이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입니다.
www.misoft.co.krwww.missioncom.co.kr 지금부터 6년 전에 저희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거기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 보존 학회가 이단으로 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주 전에 거기 대표 목사님께서 제게 연락을 해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자기네 소프트웨어에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한성서공회의 성경들(6종) 바로 다음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넣어 주면 파일을 주겠다고 했더니
대표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서 앞으로 한 달 내에 자동으로 미션 바이블을 소지한 모든 사람들에게 흠정역 성경이 배포됩니다. 적어도 수만 카피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디럭스 바이블은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모든 내용이 자동으로 업데이트 됩니다.
아주 좋은 특징 중 하나입니다.
또한 에스라 성경 사전도 컬러 지도와 선도와 함께 탑재될 것입니다.
이제 흠정역 성경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앞으로 흠정역 성경이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도록 모든 분들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 앞에 좋은 길들이 열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14:10 공지사항에서 복사 됨]
2012-04-03 15:33:0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