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좋은 소식을 알리려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신학생들과 목사님들이 미션소프트에서 만드는
디럭스 바이블이라는 성경 소프트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격도 비싸서 33만원입니다(1개 사면 3대까지 설치 가능).
저는 주로 미국 소프트웨어(PC Study Bible)를 사용하는데 미국 것보다 훨신 더 잘 된 부분이 많습니다.
참고로 미국 것은 600달러나 합니다(물론 영어로 되어 있지요).
정말로 디럭스 바이블은 한국 분들이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입니다.
www.misoft.co.krwww.missioncom.co.kr 지금부터 6년 전에 저희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거기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 보존 학회가 이단으로 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주 전에 거기 대표 목사님께서 제게 연락을 해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자기네 소프트웨어에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한성서공회의 성경들(6종) 바로 다음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넣어 주면 파일을 주겠다고 했더니
대표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서 앞으로 한 달 내에 자동으로 미션 바이블을 소지한 모든 사람들에게 흠정역 성경이 배포됩니다. 적어도 수만 카피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디럭스 바이블은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모든 내용이 자동으로 업데이트 됩니다.
아주 좋은 특징 중 하나입니다.
또한 에스라 성경 사전도 컬러 지도와 선도와 함께 탑재될 것입니다.
이제 흠정역 성경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앞으로 흠정역 성경이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도록 모든 분들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 앞에 좋은 길들이 열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2-04-03 15:33:01 | 관리자
제가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만난 지도 10년 남짓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도 많이 없고 해서 이해하는
데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출판사를 통해서 좋은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
다.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킹 제임스 영어에서 쓰인 단어들에 관한 것과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80% 이상을 만들었
던 하나님의 사람인 틴데일에 관한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경과 함께 많은 은혜를 누리셨으면 합니다.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특징을 보여 주고, 킹 제임스 영어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
1. In Awe of thy Word : 'New Age Bible Versions(뉴에이지 성경 버전들)', 'The Language of the King James Bible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를 쓰신 게일 리플링거 박사님의 책입니다. 우리말로 아직 번역되어 있는 것은 없으며, 킹 제
임스 영어 성경의 영어의 탁월함과 그 특징들, 뉴 킹제임스, NIV 등의 교리와 언어학적으로서의 문제점, 킹 제임스 영어
성경에 있는 알파벳의 의미, 역사 등을 잘 설명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내용이 길므로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2. 알파벳만 알면 영단어가 보인다/최재봉/21세기북스 : 위 책에서 영감을 얻은 최재봉 형제님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의 알파벳 A부터 Z까지 알파벳 자체가 '어떤'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게일 리플링거 님의
책이 어려우신 분께서는 이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내용이 재미가 좀 없
을 수 있겠지만,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3. By Definition : 제임스 낙스 목사님께서 지으신 킹 제임스 영어 성경 중의 어려운 단어들을 영영 사전 식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저도 선물 받은 책이라서 요즘 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 Begat : 최근에 나온 책으로 영국의 David Crystal이 지은 책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 속의 영어가 요즘 현대인들, 대중
매체, 노래 등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 해외 배송을 통해 구입했
습니다.
마지막으로 틴데일의 일생과 그 당시 영국 사회의 상황과 주변 인물들(토마스 모어, 헨리 8세, 앤 불린 등)을 잘 보여주
는 번역서를 소개해 드립니다. 틴데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강력 추천해 드립니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에 대
한 여러 가지 설명도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베스트셀러/브라이언 모이너핸 지음, 김영우 옮김/민음in
앞으로는 제가 알고 있는 좋은 책들과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나누고 공유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0:1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4-02 12:46:27 | 송호
잠언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로운 길을 가는 자, 부지런한 자, 겸손한 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 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순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제 잠언에 기록된 내용을 한 말씀 한 말씀씩 따라가 보면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명철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잠언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결국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명철과 지식조차도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6). 그런데,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얻을 수 있으며 (9:10), 그것을 얻게 되는 자들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3:18).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하며, 이로써 ‘순종’하는 자가 ‘생명나무’를 얻게 됨이 자명 해진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담은 이에 대하여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롬 5:19)
결국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순종하는 자이며, 생명나무를 얻게 되는 자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계속해서 지혜가 으뜸가는 것이고 (4:7)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고 (4:11) 말하고 있다.
잠언에서 명철은 지혜와 거의 동등하게 사용되어져 나온다. 예를 들면 잠언 3장 13절에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니”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2:2),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4:5), “지혜가 외치지 아니 하느냐? 명철이 자기 음성을 내지 아니하느냐?” (8:1),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직접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명철들로 하늘들을 굳게 세우셨도다” (3:19)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지혜와 명철은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로 봤을 때는 거의 동의어처럼 바꿔 사용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볼 부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세운 명철을 의지하거나 (3;5), 자신의 눈에 지혜로운 자, 즉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주의하라고 (3:7) 잠언 기자는 주의를 주고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의 동의어처럼, 그러나 다른 뉘앙스로 반복과 강조의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지식은 지혜와 어떤 관계일까? 지혜로운 자는 학식 (혹은 지식)을 더하게 된다 (1:5). 지혜는 재치 있는 창안물들에 대한 지식을 찾아낸다 (8:12). 지혜로운 자들은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쌓게 된다 (10:14).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가르치게 되고 그 결과 그의 입술에 학식을 더하게 된다 (16:23).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분별 있는 자라 불릴 것인데 (16:21), 분별 있는 자 즉,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에 지식을 얻고 그 귀는 지식을 구하게 된다 (18:15).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지식도 얻거나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 즉, 지혜의 시작을 이루는 것 (9:10) - 이 이제는 잠언 기자가 적은 것처럼 지식의 시작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1:7).
결국 이 모든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자가 되면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얻게 됨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꺼이 순종하기 원하는 그 지혜가 있으면 지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며 세상적인 지식 - 꼭 구원과는 직접 관계없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 유용한 지식들을 말함 - 조차도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더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오해 하듯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수행이나 명상이나 선한 행위를 통하여 명철(깨달음)을 얻어, 점차적으로 지혜에 이르게 됨이 아님을 유의 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뉴에이지와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우리가 지식에서 명철로, 명철에서 지혜의 순으로 단계별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인 '호루스의 눈'은, 우리들이 수양과 참선과 선행을 통하여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그들이 말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 지혜를 그들은 ‘광명’이라고 부르며, 거기서 소위 ‘일루미나티 (Illuminati)’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그 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순종’을 택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깨달음 가지고는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지혜를 받게 되면 (말씀에 순종을 의미) 우리는 오히려 지식에도 풍성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비밀이요 세상과 믿는 자를 구분 짓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다.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 칭함을 듣는 것은 바로 순종을 이룰 때이다. 그리고 그때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지식은 지혜를 얻으면 더 얻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더라도 위에서 부어 주는 은혜가 없이는 결단코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지혜의 근본이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는) 구원의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다! (빌립보서 2:5-11 참조).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순종함으로만 그 생명을 같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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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19:57:26 | 김정훈
성경 지킴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해 드린 대로 저희는 4월말경에 새 장소로 예배 처소를 옮깁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428
음향 및 영상 시설, 시스템 에어컨, 복층, 주방 등을 새로이 설치해야 하므로 많은 재정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사치스러운 일은 결코 안 합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재정을 지출할 것입니다.
혹시 저희 교회 예배당 이전에 재정적 도움을 주실 분들은 사랑침례교회 사이트 우측 상단에 있는
후원 안내를 보시고 사랑침례교회계좌로 입금해 주시면 감사히 받아 이전을 위해 쓰겠습니다.
http://cbck.org
늘 말씀드리지만 신약성경의 헌금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6 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니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것이라. 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1.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1-2).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목사이기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려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 건물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를 통해서 구약 시대 성도들의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심과 헛된 열심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출애굽기 35, 36, 40장 역대기상 28, 29장 학개1, 2장, 말라기서 1-4장, 이사야서 1, 66장, 호세아 6장, 아모스 8장, 로마서 10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정동수
2012-03-27 10:37: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 깜짝 놀랄 뉴스를 접했습니다.
엊그제부터 서울 시내 6개 노선의 6대 버스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광고가 부착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거금 390만원을 털어 한 달 동안 일단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귀한 일이라 속히 알리고자 합니다.
같이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연락해 주세요.
버스 광고 카페 등을 만들어 그분이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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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19:58:2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 깜짝 놀랄 뉴스를 접했습니다.
엊그제부터 서울 시내 6개 노선의 6대 버스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광고가 부착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거금 390만원을 털어 한 달 동안 일단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귀한 일이라 속히 알리고자 합니다.
같이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연락해 주세요.
버스 광고 카페 등을 만들어 그분이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2-03-25 19:58:22 | 관리자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넬슨 사 등에서 출간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를 조금만 적었습니다.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상세한 것은 기밀 상 할 수 없습니다.
400주년 기념판 한영대역은 1611년 판과 똑 같은 순수 텍스트입니다.
사도행전 11:11-13을 보세요. 11절의 sent와 12절의 spirit은 소문자 s로, 13절의 Send와 Simon은 대문자 S로 되어 있지요.
1611년판
And the spirit bade me go with them, nothing doubting. Moreover these six brethren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into the man's house:
대부분의 현대 판
And the Spirit bade me go with them, nothing doubting. Moreover these six brethren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into the man's house:
여러분과 저의 손 안에는 100% 순수한 영어 본문 즉 100%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글 흠정역은 이것은 최대한 우리말에 맞게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일대일 직역하여 만든 우리말 성경입니다.
바른 성경, 바른 믿음, 바른 구원, 바른 교회, 바른 성화를 이루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우리말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2012-03-24 15:00:01 | 관리자
* 흠정역성경후원회에서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성경을 선물로 보내드립니다.
2011년에는 적은 수의 회원들이지만 매달 1만원, 2만원씩 모금해서 400주년 기념판 광고를 후원했습니다. (기독텔레비젼, 국민일보, 잡지, 생명의 말씀사)
이제 2012년에는 성경 기증 사업을 펼칩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선물하고 싶은 대상을 알려주시면 성경후원회에서 400주년 기념판을 구입하여 선물로 보내드립니다.
신청자와 기증대상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성경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특이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원하시는 분은 신청자와 기증대상과 기증이유를 정확하게 기록하시어 이메일로 전송해 주세요. 확인 후 성경선물을 기증대상에게 보내드립니다. 택배로 배달되기에 정보가 정확해야 합니다. 예쁜 선물 포장으로 갑니다.
givesup@hanafos.com
<신청자> 성명, 전화번호, 출석교회,
<성경 기증 대상> 성명, 주소, 전화번호 ** 기증하는 이유
특별한 요청이 없는 경우 '스터디 바이블'로 기증하게 됩니다.
또한 흠정역성경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교회의 성도는 기증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신청자가 많을 경우 월별 순차적으로 처리할 예정이며 예산을 초과할 경우에는 통보없이 일시중단합니다.
아울러서 후원회에도 참여하시어서 1만원으로 만드는 놀라운 일들을 함께 이루어 갑시다. 함께 모이면 1만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후원회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KJB1611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후원회에서 알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3 00:29:57 | 김재근
현대를 가리켜 과학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과학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이 만큼,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의 혜택을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이 누리고 살고 있다. 집집마다 전기를 이용하여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며, 비행기를 타면 지구상의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단 하루면 다다를 수가 있다. 인공위성은 안방에 앉아서 전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며, 컴퓨터는 인간의 생각까지 대신하여 준다. 그런가 하면, 사시사철 언제라도 원하는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병원에 가면 심장도 새 것으로 바꾸어 준다. 그야말로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 까지 과학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과학이 우리 앞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갖고 있는 학문적 방법의 특수성에 그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은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하여, 반복되는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그 현상 배후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고 이 원리를 다시 사물에 적용함으로써,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실험적이라는 말로 환원될 수 있으리만큼, 과학에서 실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물론, 실험을 하지 않고 단지 이론만으로도 과학적 활동을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이 소위 ‘과학적’ 이라는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적으로 입증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본질상 그 성격이 다른 과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창조론이나 진화론 같이 기원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기원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과학과는 달리 현재가 아닌 ‘과거’를 다루며, 따라서 과학적 방법의 고유한 성격인 관찰과 실험을 적용할 수가 없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는 소위 ‘과학적’ 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렵지만, 현재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인 이론을 추론해 내고 그 이론의 타당성을 또한 새로운 이론에 맞추어 점검해 볼 수 있으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차이점을 고려하여, 미국 Dallas 신학교의 Norman Geisler 교수는 기원의 문제를 연구하는 과학을 ‘기원과학 (origin science)’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도록 문명의 혜택을 제공해 주는 일반과학을 ‘기능과학 (operation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기원과학’과 ‘실험과학’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결국, 기원과학은 실험과학과는 달리 실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원의 문제는 과학적 연구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과학은 단지 그 이해를 돕는 한 방편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진화론자가 무슨 ‘과학적’ 주장을 하더라도 그 배후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 접근의 해결 방식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실험과학과 같은 권위를 갖기는 어렵다. 물론 이것은 창조론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으로 기원에 관한 문제를 절대 ‘증명’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증거’를 논할 수 있을 뿐임을 십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다고 선포한다. 과학의 눈으로 보아도 우주의 기원을 창조주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결론이다. 정직한 과학은 성경과 모순이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을 도저히 우리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분명히 보이게 하며 깨달아 알게 하고 있으니 (롬 1:20),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고 피조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기원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우주와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 발견할 수 있음이 하나의 커다란 감격이 될 뿐만 아니라, 실험과학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세세한 과학적 사실들을 통하여도 남다른 즐거움을 얻게 된다. 과학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성질로, 그리고 어떤 기전으로 그것들을 움직이게 만드셨는지를 알 수 있는 특권은 과학적 통찰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모르고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일단 하나님을 가까이 알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솜씨를 같이 느끼며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 같아서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과학자’가 아니신가~!
과학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물론 그것은 말씀에 기초한 바른 신앙 안에서 발견되고 사용되어져 갈 때에 한하여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법칙을 드러내주는 과학적 발견들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채우고 정복해 갈 뿐만 아니라 (창 1:28),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찌 이 또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2 17:54:05 | 김정훈
정목사님의 설교와 글들을 읽으며 많은 깨달음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마귀인가 귀신인가'를 읽으며 몇가지 질문을 올립니다.
1. 사탄과 마귀의 구분
2. 마귀와 마귀들의 차이점
3. 성경에 보면(한 예로)
마 8:28 또 예수님께서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스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시매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그분을 만났는데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가지 못하더라.
'마귀 들린 두 사람'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마귀는 타락한 천사인데 천사가 사람의 몸에 들어 갈 수 있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1 05:15:14 | 길공태
1. 기독교에는 왜 이리 이단이 많은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꺼리는 불신자들이 내세우는 구실 중 하나로는 “기독교계엔 왜 이리도 골치 아프게 이단들이 많냐(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 아닌 줄 내가 어떻게 확신하고 가겠냐)”가 있다.
옛날엔 본인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낙담하고 시험에 든 적에 있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만 항변하는 건 너무 나약하고 궁색해 보였다. 이에 반해 전세계적으로 잘 통합된 단일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천주교가 일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먼 훗날 성경을 통해 알게 되면서 본인은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이런 열등감이 사라졌다. 성경의 조명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과 육신의 깡만 있었다면, 본인은 과거 시대엔 분명 교황이나 종교 재판소 관원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독교에다 세상 권력을 접목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단들을 잡아 족치는 일에 열심을 냈을 것이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조무래기 이단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 기독교계의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전 11:19 같은 뜻밖의 구절이며, 대처법은 딛 3:10 정도가 고작이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 주변에만 진딧물이 들끓듯, 인간의 혼이 달린 영적 전쟁터의 입구는 ‘당연히’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험한 꼴이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그 꼴 보기 싫다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마다한다면, 마다한 사람만 손해이다!
기독교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기독교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언뜻 보기엔 이건 비논리적인 아전인수 자기도취 정신승리법 같은 주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진짜로 그것 때문이다. 왜 전세계의 신흥 종교 교주들 중에 부처나 공자, 마호메트를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자처하거나 대체한다는 부류는 넘쳐나는 걸까?
우리끼리 통하는 비유를 동원하자면 이렇다. 왜 전세계의 성경들은 NIV나 NRSV 같은 역본을 대체하지 않고 오로지 KJV하고만 자신을 비교하며, KJV만을 극복과 타도, 대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그런 맥락인 것이다.
작정을 하고 특정 이단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회심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글이라도 쓰려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 믿음만을 방어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이단들에 대해서 공부하려 애쓸 필요 없다.
일례로, 한국의 기성 교계에서는 신천지 때문에 교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신천지 출신의 위장 신자들을 가려내는 매뉴얼을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성도들을 별도로 교육시킬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자들이 성경대로만 잘 대처하면 이단들은 아무도 힘을 안 보태 주니 제풀에 지쳐 없어지게 돼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교회의 에러 복원 알고리즘인 것이다. 저런 수준 낮은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되며, 물리력, 행정력, 폭력 같은 것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교리의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방황하고, 어쩌다 혹세무민하는 이단 교리에 훅 가 버리기도 한다.그런 와중에 이 킵바이블이라든지 청지기 같은 사이트를 찾은 분이라면 일단 웰컴이다. 잘 찾아왔으며, 방향을 바르게 잡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아마도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며, 어쩌면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 진영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은 무료로 차려 놓은 자료라는 뷔페 밥상은 아주 풍부하지만, 여러분에게 일일이 떠먹여 주고 서빙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그래서, 그런 분들께 당부하는 점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라도 자신의 연령대와 신앙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건 필수이고, 또 스스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도 가능한 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작문하면서 올릴 것을 권한다.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이트에서 긴 글을 달랑 복사-붙이기만 해 놓고(혹은 링크만), 반박해 달라는 식의 성의 없는 글은 어느 사이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그건 완전 비매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분야이든 고수는 태어날 때부터 고수 딱지를 달고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묵묵히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붙고 노하우가 저절로 생길 뿐이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작은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인은 영적으로 어리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2. 나의 이단 퇴치 사례
(1)먼 옛날, 2000년 말의 일이다. 고등학생 신분이 끝나가던 시절에 본인은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둘로스 데우)라는 책을 아주 우연히 접했다. 이 책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이니, 출간된 지 몇 달쯤 뒤의 일이다.그땐 내가 비록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죽고 나면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생과 윤회가 웬 말이냐 싶었다.
그 책에 담긴 주장 중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원래 기독교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n세기경에 무슨 공회를 거치면서 이 교리가 부당하게 삭제되었다. (가톨릭이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줬구나! 세상에!)-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국가별로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불공평하기 그지없는데, 인생이 겨우 1회로 끝이라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다. 각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다.- 욥 3:11-26은 자신의 전생에 대한 회상이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다. (마 11:14)
글쓴이가 누구인지, 한국 교계에서 어떤 평판이 있는 사람인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다른 저서들을 보아하니 글쓴이는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고 이단끼가 농후한 사람이긴 하다. 그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명제 자체를 공격하는 듯했다.
본인은 사람이나 소속 교단에 대한 편견을 일체 배제하고, 주장과 교리만을 오로지 성경적으로 스스로 비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비평을 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성경 지식이 부족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인생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하는 교리를 어찌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의 선택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렸다.마치 불치병 환자를 미래에 의료 기술이 개발될 때를 염두에 두고 냉동 창고에 보관해 두듯, 본인은 그 책을 내 머릿속 냉동 창고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수많은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2003~2004년 사이에 ‘서서히’ 솔루션이 나왔다. 책의 저자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전생· 환생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내세나 부활 문맥인 구절을 어떻게 이상한 교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지 디버깅이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본인이 가장 긴 시간을 두고 혼자 힘으로 이단 교리를 교리 증명을 통해 퇴치해 낸 첫 사례가 되었다.
(2)2000~2001년 사이엔 천주교 교리도 접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형제들을 위한 천주교 이야기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아주 자상하고 박학다식한 신부와 대담을 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고, 천주교가 기독교계의 큰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로 개종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변명과 해명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면죄부가 아니고 다른 개념인데 개신교 쪽에서 악의적으로 천주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거나, 마리아 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다를 게 없다는 식. 막 6:3에 대해서도, 원어를 들이대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사촌이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고 둘러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개신교가 태생상 지닌 약점과, 그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천주교 관행을 빌미로 개신교도 결국은 천주교가 큰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진짜 교회사를 알기 전까지는 이들의 주장을 도저히 완벽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니다 싶었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나중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거기서는 고전 3:15 ‘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연옥을 거쳐서 구원받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써 놨었다! (아예 대놓고 ‘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이라는 묘사가 들어간 성경 역본도 있다)특히 본인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 옛날에 영국에서 위클리프라는 어느 악당이 갱을 만들어서 이단 교리가 들어간 잘못된 성경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3)여호와의 증인이야 일단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맹렬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도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와 배척의 대상이 돼 있다. 포교하는 모습이 좀 지적이고 논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얘들이 성경을 변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본인은 거부 모드로 들어갔다. 아직 KJV를 모르던 시절이어서 NIV를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런 변개된 역본과 비교해 봐도 이들의 신세계역 성경은 워낙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KJV 덕분에 요일 5:7과 ‘독생하신 아들’(요 1:18) 같은 아킬레스건까지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완전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게임 끝.
(4)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성경적으로 맞다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안식교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었고, 그때 본인은 지금과 같은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라든가 신· 구약 바르게 나누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문제 없이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인데 제4 계명은 그럼 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에 걸렸다.
이것은 나중에 출 31:17을 통해 완전히 결론이 났다. 성경 역본 문제가 해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십일조 문제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해결됐다. 주일 예배는 그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에서 유래된 신약 성도들의 전통일 뿐이다.
(5)다른 대부분의 이단 교리들은 pre-KJV era 때 접한 것들이고 KJV 진영 내부에서 완전히 격파에 성공한 반면, 딱 하나 KJV 진영 내부에서 접한 유일한 이단 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이다. 다른 진영이나 교계는 종말론이 더 엉망이고 전천년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런 문제로 논쟁을 할 배경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환란 통과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온갖 교회사 자료와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은 이 문제는 더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앙 논리와 상식 수준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내가 보기엔 이건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부정하는 짓이고, 자기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3. 이단 판별을 넘어서 더 큰 목표를 추구해야
본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던 2004~2005년경에는 지금과 같은 교리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교회 대환란 논쟁을 끝으로 본인은 지금까지 무슨 이단 교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하거나 싸운 적이 없다. 신앙 논리, 기독교 변증, 교리 노선에 관한 한은 완전에 가까운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가져다 준 영적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예전에는 물증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힘겹게 방어해야 했던 이단 교리들을 총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그나마 남에게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는 건, 나는 KJV를 모르던 아주 먼 옛날부터 기독교의 근간은 성경이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이 위조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관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교리가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지, 또 궁극적으로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창조· 구원· 성화· 부활·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끝나는지를 늘 검증했다. 이렇게 하면 이단에 빠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겨우 이단 교리 가려내고 논쟁이나 하려고 KJV 성경 공부를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마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목적이 오로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수준이 낮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고,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비교 잣대는 이단들도 아니요, 같은 진영 안의 다른 성도도 아니요, 예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생 중에도 일부 머리가 좋은 애는 한자와 영단어를 줄줄 외우고 수학 미적분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초등학생이 알아서 남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고, 부모가 때려서 양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영재’가 존재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10대 때 죄와 심판, 이신칭의 구원을 이해했으며 구원의 확신을 느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KJV가 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지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이단 교리의 자체 필터링 기술까지 갖췄다. 하지만 그런 교리 공부의 중심에는 ‘나’와 ‘개인적인 지적 만족’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이 내 정신 연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가 막힐 때는, 쓰는 글에 육두문자도 막 들어가고 글에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딱히 증오나 피해의식, 악이 받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사랑의 의분도 아니었다.
“남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 글 내용을 알아듣고 동지가 될 사람만 여기 알아서 붙어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가 당장 열불이 나 있는데 억지로 감정을 죽이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위선과 가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키보드 배틀이 붙었고, 검색 엔진에서 내 이름을 치면 천주교 사이트에서 내 욕을 해 놓은 게 뜰 정도로 악명(?)도 떨쳤다.
겁도 없이 이런 무모한 생각으로 수 년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여러 글을 올렸는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와 내 글을 통해 자기 구원을 재정립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을 뜬 분들이 몇몇 생기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세가 격분한 나머지 바위에게 말로 안 하고 바위를 막대기로 쳤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려 주신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뭐, 그 시절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 열정과 패기(?) 덕분에 그때 ‘가~끔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옛날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잘 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쑥스럽다.
본인은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와 성화, 최종 완전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최근에야 정립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옳다구나 교제를 끊고 짤라 버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마음밭을 갈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나의 신앙관을 심으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어울리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믿고 행하는 모습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보면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됐다.
나의 말과 행실로 인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갈면서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저놈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저 작자가 믿는 걸 믿느니 차라리 교황, 우리 신부님 말씀을 듣겠다” 이러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결국은 눈높이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의 수위 자체에다가 물을 타라는 소리도 절대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단번 속죄, 킹 제임스 성경, 구원의 영원한 보장, 환란 전 휴거 체계를 만든 분께서 크리스천들을 바로 하늘로 안 데려가고 남겨 놓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 주고 남을 나보다 더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을 상대로 스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독교회의 reproduction(믿음의 전수와 재생산)과 error-correction(외부로부터의 이단 교리와, 교회 내부의 불화 등에 대처) 전략은 응당 이를 염두에 두고 수립되어 있다.
본인은 성경에 입각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내 영리를 위해서나 내 감정 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남을 생각해서 독자가 영적으로 잘 되고 딤전 2:4처럼 되길 원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게 독자들에게 ‘오해 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들로부터 당장 동의는 못 얻더라도 “저 녀석 정말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혼의 회심률도 옛날보다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도 이단들을 폭로하고 교리 분석하는 것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마치 튜닝의 끝은 순정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곳에 오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본인이 오랜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진리를 이렇게 공유하길 원하며, 우리 모두 질문을 올리든 간증이나 칼럼을 올리든, 그 큰 목표를 잊지 말고 온라인 공간에서 교제할 것을 감히 권해 본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22:33:24 | 김용묵
김재근 형제님의 글을 읽고 저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흠정역 성경 번역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했던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했습니다.
너무 공격성 있는 질문은 홈페이지 이미지 차원에서 삭제를 해서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동안 웬만한 질문들은 친절하고 성실하게 여러 형제님들이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동안 흠정역 성경의 번역을 놓고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슨 설명을 해도 자기 주장만 펴고 결코 이해나 설득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영어를 웬만큼 아는 분들은 정말로 한두 단어나 문장의 해석 차이를 가지고 정말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으쓱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흠정역 성경이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녹아 있고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바른 말씀을 한국 땅에 남겨야 한다는 일념 하에 번역과 우리말 바루기에 힘써 왔는데 그 수고를 인정하고 믿기보다는 한두 군데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돌아서거나 아예 본인이 번역에 나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저마다 만족할 수 있는 성경을 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 번역에 대한 설명에 매달렸더라면 지금의 흠정역은 아직도 고민하며 진행 중으로 완성을 못했으리라 봅니다.
어떤 이는 한국말로 번역된 흠정역이 무색하게 영어를 공부해서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읽고 이해해야겠다는 야심찬 의욕도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심지어 이민의 사유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다소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김재근 형제님의 글을 지지한 사연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두 단어를 가지고 떠들어 대거나 제가 경험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고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은 모두 잊고 평안한 가운데 바른 성경을 찾아 나선 무수히 많은 지체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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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20:47:08 | 오혜미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자 하여 책을 폈을 때 제일 먼저 대하는 말씀이 창세기다. 그런데 현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분이 또한 창세기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이 사실(fact)로 믿어지면 이어지는 성경의 다른 모든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셨음을 믿는 자라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이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기록된바 그대로 믿겨지느냐 하는 것은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 안의 모든 생물과, 그리고 인간을 어떤 순서와 과정으로 창조하시는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 즉, 공간(하늘)과 시간(처음에), 그리고 땅(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로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물 위에서 움직이시며 그 모습을 만드셨다 (2절). 이때 ‘움직이다’로 표현된 히브리어 ‘rachaph’는 예레미야 23장 9절에서는 ‘떨리며’로,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너풀거리며’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과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어떤 에너지가 전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상상해 보라. 마치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지구를 품고 그 안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넣으시며 지구를 빚고 있는 장엄한 창조의 모습을!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는데, 이 빛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태양 빛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성질로서의 빛 그 자체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은 물론이고 전자기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빛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 빛은 우주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며 지구를 향하여 비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분 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는 어둠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시고, 지구에는 첫째 날이 오게 된다(5절).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을 의미하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넷째 날 나오게 될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지구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저녁과 아침은 어떤 형태이든 빛을 향하여 지구가 한 바퀴 스스로 도는 자전을 하면 생기는 것이지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중에 넷째 날 이후 태양이 생길 때 지구는 이제 태양 주위로 도는 공전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훗날 이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이때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땅에 뿌리어 오랜 기간 식물이 자라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곧바로 이미 다 자란 식물이 땅에서 나오게 하셨다 (11-12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이미 그 잎사귀 안에 일정 기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이미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도 굳이 태양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있어 하등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바로 다음 날 태양을 또 만드시고, 그 태양으로 하여금 지구를 비추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 식물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양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과일 맺는 나무의 출현을 바다의 많은 생물들이 나타나고 수백만 년이 지난 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식물이 먼저라고 말함으로 진화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흥미롭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가치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서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들과 물속의 생물들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여기에서 다시 한 번 ‘bara’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히브리어에는 보통 ‘만들다(make)’혹은 ‘짓다(form)’로 번역되는 ‘asah’와 ‘yatsar’라는 동사가 따로 존재한다. 이들 단어는 ‘bara’와는 달리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을 가지고 다만 형태와 조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bara’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동물을 창조하실 때 넣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20절에 보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생명(life)’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히브리어 ‘nephesh’를 번역한 말로서, 보통 우리가 ‘혼(soul)’ 또는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식물은 비록 ‘몸(body)’은 동물처럼 흙의 요소를 비슷하게 갖고 있지만,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는 ‘혼’이 존재하지 않는 구별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다 (24-31절). 앞서 20-23절에서 동물을 만드실 때 ‘bara’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는데, 25절에서는 ‘asah’즉, ‘만드시니라(made)’를 사용하신다. 왜 그럴까? 앞에서 물과 공중에 거하는 동물들을 만드실 때 ‘nephesh’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거주지만 다른) 같은 종류의 동물을 만드실 때에‘asah’가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bara’가 다시 한 번 (27절), 그리고 ‘asah’와 함께 (26절) 동시에 사용 된다. 여기서 ‘asah’가 사용되었다는 말은 이미 다른 피조물에게도 존재하는 것 즉, 사람의 몸과 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27절에 사용된 ‘bara’는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근본적인 새로운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새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세밀하게 우리 사람을 위하여 공간과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을 미리 채우시고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오직 사람에게만 주셨다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실이다. 할렐루야!
이제 창세기 2장으로 넘어 가보자.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과정을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 그 결론을 2장 3절에 이르러서 일단락을 짓고 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며, 일부 내용 중에는 1장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창세기 2장 4절이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the generations’- 참고로, 영어 성경에는 4절에 위치한 이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어순에 따라 5절 중간에 ‘생성 세대’라는 말로 번역되어 위치하고 있다 -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toledoth)’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총 열한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을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에서 1장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고 흔히들 지적하는 부분은 2장 18-19절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동물이 먼저 창조되었고(1:21-25),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동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2:18-19),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배경 없이 단지 2장 19절만 따로 떼어서 읽게 된다면, 마치 아담이 먼저 있고 그리고 아담 앞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나오게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피조물의 창조 순서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고, 여기서는 특별한 목적 즉, 1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담을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이 밝히 드러나 있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동물들 중에서 일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데, 20절에 보니까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심을 보아 동물들로는 아담의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심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자 - 즉, 이브 -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대로 아담을 잠재우시어 여자를 창조하시게 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어 이브를 창조 하시지만 (몸과 혼), 창세기 1장 27절의 기록처럼, 이브에게도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독립적으로 주신 사실이다. 1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조하다에 히브리어 ‘bara’가 사용 됨)
그러면 2장 19절에서 아담 앞으로 나온 동물들은 어떤 종류인지 알아보자.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모든 종류의 동물 가운데서, 단지 모든 가축, 공중의 날짐승, 그리고 들의 모든 짐승(every beast of the field) 만이 아담에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2:20). 물에 사는 동물은 다 빠져 있고, 기어 다니는 동물과 땅의 짐승(beast of the earth) 또한 빠져 있다. 여기서 특별히 들(field)이란 단어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어 형성되어질 땅을 의미한다고 보여 지고, 따라서 ‘들의 모든 짐승’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서의 ‘땅의 짐승’과는 달리 아담이 앞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주 만나게 될 동물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결국 아담에게 나온 동물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아담과 근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동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한 이해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끝으로 하나만 더 생각을 같이 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7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백만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상당히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하루가 수백만 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여섯째 날 즉, 수백만 혹은 수천만 년 뒤에 출현하게 되는 곤충의 도움 없이 어떻게 꽃가루 수분을 할 수 있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천만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고 단호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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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5:44:11 | 김정훈
억울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제 아내가 저에게 시집와서 억울한 일이 참 많았었습니다.
그 억울한 일들을 저에게 애기했었는데 저는 그냥 '참아라'. 혹은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고 넘겼습니다.
아마도 저의 그러한 행동이 제 아내의 억울함을 더 크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미안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다지 억울하다는 감정/생각을 해본적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때, 친구가 장난치는 바람에 제가 혼이 난적이 있었죠. 그때도 억울하긴 했었는데...
회사에서 승진에 누락(누락된적이 있었나?)되어도 뭐 그다지... 빨리 승진하고 싶은생각도 없었으니까요. ㅎㅎ
(뭐 세상이 그런거지 하고 넘긴것 같기도 하고요)
억울하다... 는 감정을 정확히 깨닫은 건 작년입니다.
갑작스럽게 장인어른/장모님과 같이 살게되다보니 차가 비좁더군요.
그래서 차를 좀더 큰차로 바꾸려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덜컥 꼼곰히 살펴보지도 않고 중고차를 사버렸습니다.
중고차 딜러만 믿고요. 그런데 중도차 딜러는 제가 파는 차만 꼼꼼히 살폈을뿐, 자신이 파는 차는 저만큼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덜컥 중고차를 사니, 담배를 피웠는지, 차를 오래타면 가슴이 아프고. 냄새나고
문짝은 한달만에 고장나고... 이것 저것 살피니 한마디로 바가지를 쓴 겁니다.
속상하더군요. 억울합디다.
차를 탈때마다 억울한 감정이 치솟으며 내가 참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제 잘못인데요.
이때 제 아내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잘못으로 중고차 잘못 산것도 억울한데,
잘못도 없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아내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참 미안합니다. 제가 무심하게 그냥 저 편하자고 억울함을 알아주지도 않고 살펴주지도 않은 제가 참 미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에 달려 돌아가신것을 생각할때,
저라면 참 억울했을것 같습니다.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어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범죄자중의 하나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했듯이
잘못에 합당한 보응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요. 마치 죄를 짓고 도망치는것보다 죄값을 치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신 말씀처럼 억울해 하지 않은신듯 합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여 우리의 죄들(과거의 죄, 앞으로 행할 죄들)을 완전히 제거하여 주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억울하게 식당같은곳에서 대접받거나,
억울하게 선생님깨 혼나거나, 상사에게 혼나거나.
억울하게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 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하게 시부모에게 당하거나
억울하게 내가 쓴 글이 오해를 받거나 곡해되거나
억울하게 비판받거나
억울하게 소명할 기회조차도 받지 못하고 당하거나
억울하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등등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겠습니까?
혹여 여기 자유게시판에 쓰는 글들이 논쟁이 되고, 이건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과 혹은 소소한 의견차이로 시각차이로
마음이 상하거나 등등해서 억울한 감정이 들 때
바로 그런때에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위로받고,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오길 생각해봅니다.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할때도 있지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이 세상이 그나마 덜 부패하도록 하는 세상의 소금일겁니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을까 염려하노라.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염려하노라.
P.S 만약 제가 중고차 살때의 억울함을 못 느꼈다면, 아마도 지금도 제 아내의 억울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감사합니다. 저에게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좀 더 이해하게 해주신 사건을 통해서 조금이나 제 아내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나마 알게 됨을. 그리고 제 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볼겁니다) 제가 참 미안했었고, 지금도 미안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07:59:09 | 김형욱
제가 헤아려보니 킹제임스성경(KJB)은 114만 9502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절수는 3만 1102절로 되어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 중 고작 한두 단어나 한두 구절을 찾아서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듯이 번역이 어떻고, 뜻이 어떻고, 원어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어 댑니다. 사실 성경전체에서 몇 단어/몇 구절 찾아서 분석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114만 9502 단어를 반복해서 읽고, 반복해서 찾고, 반복해서 묵상하는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글/우리말로 옮겨놓은 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부지런히 묵상하고, 부지런히 전파합시다.
그것은 혼을 회심시키고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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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01:14:31 | 김재근
* 참고로 이 글은 본래 <자유게시판> #1531의 글에 달린 댓글 및 답 글의 형식으로 쓰여 졌던 것인데, 내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독립된 하나의 글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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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그 유명한 ‘짐승의 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계 13:16-17)”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 ‘그’는 큰 이적들을 행하며 (계 13:13),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고 (13:14),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죽이게 하는 자로서 (13:15), 결국 그의 정체는 ‘거짓 대언자’인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19:20).
그런데 그 거짓 대언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의 형상을 향하여 경배하도록 옭아매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짐승의 표’인데, 이것을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게 됨으로 (13:17),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표 받는 것을 쉽게 거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는 언제 이 땅에 출현하고, 거짓 대언자에 의하여 사용되어 지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짐승의 표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짐승의 표가 상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고,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앞에서 기술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모든 자 ... 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은 단지 짐승이 나타난 이후에 그가 - 즉, 거짓 대언자가 -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받게 하는 그 표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 혹은 그 이전에라도 사용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하여는 딱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 ‘표’라는 것이 어떤 '기술'을 요구하는 하나의 발명품이라고 본다면, 짐승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이전일지라도, 그의 길을 예비하는 다른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장차 짐승의 표의 기능을 하게 될 어떤 ‘표’를 미리 기술적으로 완성 시켜 놓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미리 받게 함으로 (가령 표를 받으면 얻게 될 각종 건강 및 보안 등의 편리성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에 친숙하도록 해 놓은 뒤에, 어느 날 비로소 ‘때’가 이르렀을 때에 거짓 대언자가 이제 그 동일한 표를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로서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받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딱히 그렇다 안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위의 성경 구절을 읽고 짐승의 표는 아무래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환난 전 휴거를 이룰 성도들에게는 전혀 표를 받을 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하면 큰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에 주의가 요망 됩니다.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니 빌라도가 다음과 같이 행함이 나옵니다.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니라.” (마 27:26)
자, 십자가는 도대체 언제부터 사형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을까요? 누군가가 이 말씀을 읽고, “저는 십자가가 빌라도의 출현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이 지고 가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빌라도가 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미리 지고 다니게 하다가,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그 때에 가서 예수님도 그것을 지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빌라도가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른 설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지식을 통해 십자가 형벌이 언제부터 출현하였는지를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십자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빌라도의 출현이후부터 십자가가 나오게 되니, 따라서 그 이전에는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게 되겠지요. 바로 이와 같습니다. 빌라도가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십자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도구로 사용함으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듯이, 거짓 대언자 또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널리 퍼져 있는 ‘표’를 짐승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쓰게 됨으로 그것이 ‘짐승의 표’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도록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계시록으로 가서 13장 16-17절 말씀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16절의 표를 받게 한다는 말씀은 곧 바로 17절의 표 없는 자는 곧 매매를 못하게 된다는 말씀과 이어지면서 결국 이 뜻은, “짐승의 표란 그것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하는 표”라는 의미로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더욱이 영문 KJV 성경에는 16절과 17절 사이에 콜론 (:) 문장부호를 둠으로써, 이 두 구절의 의미가 떨어지지 않고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주목해 봐야 할 점은, 결국 거짓 대언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16절의 표는 매매통제 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하여 특별히 그가 권력을 행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받게 하도록 한다는 뜻을 의미할 뿐, 이 표가 그 전에도 유사한 목적 혹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던지 안 되었던 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성경이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단지 거짓 대언자가 짐승의 표를 받게 하여 매매를 못하게 하는 통제 수단으로 사용할 것임을 말해 줄 뿐, 그 표가 반드시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이후에만 나오고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표의 출현과 그 표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사용되는 시점은 (비록 그것이 다른 목적일지라도) 짐승 혹은 거짓 대언자의 출현 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음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표’와 연결된 구원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장차 ‘때’가 이르렀을 때에 짐승의 표로 사용될 어떤 형태의 ‘표’를, 휴거가 일어나기 이전일지라도 휴거로 들림 받을 성도들 또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음을 유념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때는 경배를 요구하기 전이므로 ‘표’를 받아도 믿음을 통해 이루게 될 구원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고, 경배를 요구하기 이전에 휴거가 먼저 일어난다면 결국 그 표는 구원과는 상관없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활 침해와 개인의 자유의사를 통제 또는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알고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우리 가운데는 환난을 겪고 늦게 구원 받을 성도들이 또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일지 모르는 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일 것이며, 그렇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될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 준비하며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 여분의 기름을 채워 준비된 신부로 기다리고 있으려면, 이런 시대를 정확히 읽는 지식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종말의 시대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함은 성도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요한 태도이겠지만, 요한 계시록 같은 말씀을 통해 사탄이 말세에 행할 일을 미리 알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유익하고 또 중요합니다. 지금은 거센 배도의 물결이 일고 있는 때입니다! 적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 움직임을 알고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도 뱀의 간교함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이브와 아담이 결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또한 비록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도록 강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그 어느 책보다도 사탄의 마지막 될 일과, 짐승의 표, 환난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소상히 알림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깨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짐승의 모습이 확연히 눈앞에 드러남을 주목하여, 시대의 물결을 따라 미혹되지 않고 굳건하게 믿음 승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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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19:38:11 | 김정훈
안녕하세요 진리침례교회 이우진 형제입니다.
이곳에 쓰는 첫 글이 답글이 되었네요.
글이 길어질거 같아 답글로 달지 않고 따로 글을 올리는 점 양해해 주세요.
부족한 지식이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7절의 “그것들(them)”은 6절의 “주의 말씀들”이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뿐더러 유일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보존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학자들은 7절의 “그것들”이 5절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5절에 나온 그 누구도 그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대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NIV의 경우 7절의 “그것들(them)”을 “우리들(us)”라고 바꾸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 말씀들이 아니라 사람인 것처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히브리어 원문도 1인칭 복수대명사(us)로 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그것들(them)”이라고 3인칭 복수대명사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7절의 “그것들”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다윗의 세대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7절).
학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히브리 원문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방법 중 하나가 히브리어(혹은 그리스어) 문법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법을 통한 설명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7절의 그것들이 남성복수이고 6절의 말씀들이 여성복수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말씀들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학자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 시편 12:6-7에서는 예외적으로 받았다고 보면 그만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성이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욥기 31:11에서는 “이것은(for this)”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나 10절의 “아내”는 여성 단수입니다.
11절의 “이것은”은 9절과 10절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여성 단수인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10절에서도 여성 단수인 아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11절에서는 9절과 10절의 이야기를 남성 단수로 받고 있습니다.
즉, 욥기 31:11에서도 성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기본적으로 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경우에 따라서는 성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문법을 들먹이며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말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마세요.
특히 킹제임스성경이 어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면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시편 12편은 말(word)에 대한 것입니다.
2절- 입술, 말하다
3절- 입술, 말하다, 혀
4절- 혀
6절- 말씀들
인간의 말은 악하고 헛된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주께서 보존하셨기 때문에)는 것이 시편 12편의 내용입니다.
문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을 말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존하신다고 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설득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 1:28)
킹제임스성경은 항상 옳습니다.
부족한 지식이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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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00:59:40 | 이우진
안녕하세요 ...시편12편 7절에 대한것으로 큰 걸림돌에 직면했습니다.도움을 요청하고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시편7절의 them의 선행사가 바로 앞 6절의 words로 이해하고 있습니다.그런데요...
<문법적 논쟁에서 일단 진행된 내용입니다.>
첫째 -영어적 문법은 7절의 them이 가르키는 선행사가 6절의 words도 될수 있고 5절의 the poor이나 the needy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이건 뭐 논쟁으로 어찌해볼 만합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7절의 them이 6절의 words를 받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단어마다 문법적인 성이 있다고 합니다...7절의 them은 남성복수이고 6절의 words는 여성복수라는 겁니다. 따라서 7절에 지키시는 것은 사람들이지 말씀들이 될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6절의 words의 히브리어 문법적인 성에 대해 설명해 주실수 있으신분 부탁드립니다...
또한 6절의 silver의 히브리어 문법적인 성도 알고 계신분은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KJV>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의 학대받는 것과 궁핍한 자의 탄식하는 것으로 인하여 이제 내가 일어나 그를 향해 우쭐대는 자로부터 그를 떼 내어 안전하게 두리라, 하시는도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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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5 14:14:30 | 전성실
제 생각에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맞는 성경같아요...우리교회는 개역개정이고요... 주변의 많은 교회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안 가르치는것 같아요...
왜죠?
성경 버전 선택에서 잘못되는 엄청 큰일 아닌가요?
저희 목사님은 개역개정판이 가장 옳은 번역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 예수보혈.. 그리고 천국과 지옥! 말씀을 중점적으로 외치시는
아주 열정적인 목사님이십니다 제 느낌에 이단적 요소는 하나도 없어요...
근데 교회를 옮기는 것도 감행해야 할까요?그리고 베리칩이 악마의 숫자라고 저는 믿는데 우리 목사님은 사단의 인 이나 성령의 인 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이전엔 바코드다 말이 많았지만 그런건 없다고 말씀하셔서 혼란스럽습니다베리칩 나중에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 없는건가요?정말 궁금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0: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13 09:25:43 | 한아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미국의 최대 설교 사이트인 sermonaudio.com에 제 설교를 올립니다.
미국이나 외국에 계신 분들은 이제부터 버퍼링 없이 다음 사이트에서 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sermonaudio.com
여기 가셔서 Dongsoo Jung 혹은 Jung 혹은 Charity Baptist Church를 치면 설교 목록이 뜰 것입니다.
어제 설교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www.sermonaudio.com/sermoninfo.asp?SID=3121225480
아이폰, 안드로이드, 블랙베리 폰 등에서 직접 설교 듣기
지금까지는 직접 폰애서 설교를 들을 수 없어서 다운로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아이폰, 아이패드는 앱스토어에서, 안드로이드는 마켓에 가서 sermonaudio라고 쳐서 앱을 찾아 설치하면 무료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Dongsoo Jung 혹은 Jung 혹은 Charity Baptist Church를 치면
폰에서 직접 설교를 들을 수 있고 다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다운로드해서 MP3나 폰에 넣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3G나 WiFi가 있으면 마음대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모든 강해 설교와 과거의 설교들도 다 올릴 것입니다.
그러면 영구히 그 사이트에 보존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 앱 안에서 이메일, 카톡, 문자 등으로 각 설교의 사이트 주소를 친구에게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 오늘은 어제 설교한 결혼을 위한 능력만 되고 있습니다.
샬롬.
정동수 드림
2012-03-12 19:31: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