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
성경말씀: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눅24:26)
지금부터 약 1975년 전 4월경의 한 일요일 오후에 유대 지방의 먼지 나는 길을 두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로서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기록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남자 형제든지 아니면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입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면 다 왔다는 생각에 기뻐하지만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가는데 전혀 기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머리를 숙인 채 한숨을 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기에 누가 보아도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갑자기 그들 앞에 낯선 나그네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길을 가면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기에 이렇게 침통한 표정입니까?”그러자 그 중에 한 사람이 의아해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이 생소하여 요즘 거기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그러자 그 나그네가 되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말합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는 로마의 학정 아래서 죽을 고생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나타나셔서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왕국과 자유와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분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말 같지 않았습니다. 또 그분은 자신이 구약의 대언자들이 오리라고 대언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며 진실로 메시아의 표적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구속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대적하고 모함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자 빌라도는 결국 그분을 로마의 죄수로 정죄하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 했습니다. 오늘은 그 일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의 어떤 여자들이 그분의 돌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몸을 보지 못하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실제로 우리와 함께 있던 자들 중 몇 사람이 거기에 가 보니 여자들이 말한 바가 사실임을 알게 되었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그 낯선 사람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아니하겠느냐?”영어로 가서 보니까 “O fools”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 바보들아”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자들아”를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 뒤에 영광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대언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서 더디 믿느냐”라고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성경공부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펴지 않고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눅24:2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7 [그분께서]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경을 배우기 원합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성경의 모든 난해 구절들이 그분의 무릎 앞에서 배우면 일시에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성경공부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들은 곧장 예수님을 떠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32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에게 이런 성경공부가 있었습니까? 저는 바로 이런 성경공부와 말씀 선포가 우리 독립침례교회에서 나와야 되리라 믿으며 그래서 저 자신도 이것을 위해 애를 쓰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풀어 주신다’는 말은 영어로 ‘open’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그들에게 성경 기록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많이 읽었으나 여전히 그것은 그들에게 닫힌 책이었습니다. 성경 기록들을 열어서 풀어 주는 성경공부와 말씀 선포가 있어야 비로소 교회가 부흥합니다. 말세를 당한 성도들이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 동료들에게 이 모든 일을 고할 때에 예수님이 전체 회중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44-46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4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 즉 모든 히브리 성경에 -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바로 이것들이라, 하시고 45 그때에 그들의 지각(知覺)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46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기록되었은즉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경 기록을 깨닫게 되면 메시아 예언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줄기는 메시아가 실질적으로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메시아 왕국을 세우며 이 땅에서 통치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줄기는 이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난당하는 메시아’와 ‘영광을 받는 메시아’ 즉 두 명의 메시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메시아가 두 번 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한 번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왕으로 통치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어린양으로 고난을 당하고 세상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 메시아가 두 번 오십니다. 초림 때는 고난 받기 위해 오시며 재림 때는 통치하며 영광을 받기 위해 오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먼저 그리스도로 인해, 의로 인해 고난당하고 핍박받는 일이 있고 그 뒤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뀌면 문제가 생깁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에 대해 벧전1장 10-11절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의 많은 대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대언하면서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탐구하기만 하였다고 말합니다. 10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11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 뒤에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도표를 보기 바랍니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산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앞의 것은 작고 뒤의 것은 큽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이 산들을 멀리 앞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산의 두 꼭대기가 마치 하나로 보였습니다. 즉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계곡이 교회 시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이 지나고 재림이 가까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없지만 작금의 상황으로 보아 우리의 시대가 이미 두 번째 산의 꼭대기 근처에 이르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 예언이 매우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하면 200여 가지가 되지만 그것들을 한 번에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다섯 가지 중요한 예언만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메시아의 출생지, 메시아 탄생의 기적, 메시아의 성격, 메시아의 초림 시기, 그리고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경 기록들을 펴셔서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 때에 그들 안에 성령의 뜨거움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런 뜨거움이 오늘의 성경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메시아의 출생지 먼저 미가서 5장 2절을 보겠습니다. 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메시야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빵이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들을 연관시켜 보면 참으로 그분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와 룻의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 고을입니다. 대언자 사무엘이 이곳에 가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었으므로 이곳은 보통 다윗의 도시라 불립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은 별 볼일 없는 미천한 마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그리 뛰어난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자체도 미천했지만 그곳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영광에 비하면 정말로 형편없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정확한 분입니다. “너 베들레헴아”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또 다른 베들레헴이 나옵니다. 수19:15에 보면 갈릴리 근처에 스블론 지파를 위한 베들레헴이라는 또 다른 도시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곳이 아니고 유다에 속한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창35:19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은 뒤 묻힌 곳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도 베들레헴 시 외곽에는 라헬의 무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많은 이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선명도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며 인도, 미국, 스웨덴, 계룡산에는 많은 자칭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는 유다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시작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육신을 입고 출생하셨으나 그분에게는 시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나아가심 - 즉 행하시는 일들 - 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랍비들의 전통을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통치자가 다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미가서는 다윗이 죽은 지 200여년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지금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미래형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2) 메시아의 특이한 탄생 방법 이사야 대언자는 사7:14에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에서 표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기적을 뜻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가 아들을 낳는 기적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피를 갖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임마누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21-23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대문이라, 하니라. 22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 여기서 조심할 것은 임마누엘이 개역성경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부처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잠언 30:4를 보기 바랍니다. 4 하늘에 오르신 이가 누구냐 혹은 내려가신 이가 누구냐? 바람을 자기 주먹 안에 모으신 이가 누구냐? 물을 옷에 싸신 이가 누구냐? 땅의 모든 끝을 굳게 세우신 이가 누구냐?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지난주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편 2편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시2:7,12 역시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처녀 탄생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처녀라고 번역된 ‘알마’라는 히브리어가 ‘젊은 여자’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말에서 처녀를 가리킬 때는 대개 ‘베툴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근거로 현대역본인 ‘ 미국표준역’ 등은 각주에서 이 단어를 ‘젊은 처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단어는 앞뒤 문맥을 통해 그 뜻을 잘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이 기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매일 수천 건씩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여기서 하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들을 낳는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알마’는 구약 성경에 총 7번 나오며 모든 경우에 처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창24:43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러 가면서 기도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알마’가 처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서 창24:16은 리브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이 소녀- 즉 리브가- 는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지금까지 남자를 알지 아니한 처녀더라.”그러므로 메시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에서 나사 하나님의 피를 소유한 존재여야 합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3) 메시아의 특성 이사야 대언자는 계속해서 사9:6-7에서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계획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7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것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 이 구절이 메시아와 메시아의 왕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녀 탄생으로 태어난 그 아이의 이름이 ‘강하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1919년에 영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하면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음역해 버렸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펠레 요위츠 엘기보 아비 아드사 샬롬이라.” 여러분, 이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메시아가 히브리어로 ‘엘기보’즉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이렇게 번역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들의 특성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강하신 하나님’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4) 메시아의 초림 시기 자, 이제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유다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며 다윗의 왕국을 세울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그분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 메시아는 앞으로 올 것입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메시아가 오는 때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자기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10절에서 유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 여기의 실로가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홀은 왕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의 첫 부분은 메시아가 오기까지는 유다에 왕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86년경에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붙잡아서 눈을 빼고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다 혹은 유대 지방의 마지막 왕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 이후에 마카비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왕정이 복구되고 예수님 당시에 헤롯 가문으로 왕권이 넘어가면서 유대 땅의 마지막은 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후 44년경에 죽었고 그 이후에는 유대 땅에 왕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주후 44년 전에 와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법을 주는 자’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을 뜻할 수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마지막으로 법을 집행하던 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였으며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될 때에야 비로소 유대 땅에서 법을 주는 기관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주후 70년 전에 이 땅에 와야 합니다. 이 구절보다 더 정확하게 메시아의 초림을 보여 주는 곳은 다니엘서 9:25-26절입니다. 대언자 다니엘은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70 이레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25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26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에 대해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70 이레가 “70*7” 즉 490을 뜻하며 이것이 곧 490년을 의미한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의 죽음까지의 69 이레는 483년을 뜻합니다. 그때가 되면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 죽음은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여기서도 “이 죽음이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구절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까? 그것은 주전 454년경에 아닥사스다 왕의 칙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느2:1-8). 여기에 483년을 더하고 주전 1년 다음에 주후 1년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메시아는 주후 30년경에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때에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메시아는 주전 4년경에 태어나서 주후 30년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이 유대인들을 위해 남아 있으며 보통 이것을 우리는 환난기라고 부르고 후반부 3년 반을 대환난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메시아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5) 메시아의 죽음 이제 마지막으로 메시아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53장에 너무나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이 남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상 명백한 구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여셔서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시고 자신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 일어났으며 이것을 깨달은 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사렛 예수님 곧 먼저 고난을 받아 모든 사람의 죄악을 대속하려고 어린양으로 와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이 말하는 참 메시아임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선포가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초점이요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먼저 성경의 메시아를 바로 알고, 누구든지 이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바른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은 요17:3에서 한 마디로 잘 요약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성경의 예수님이 이 번 한 주간 내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입으로 간증되길 원합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생기 있게 드러나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