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부활하는 자
성경말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 빌3:21
요즘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지냅니까? 행정 수도, 보안법, 과거사 입법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일들입니다. 10년, 20년 전에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그리 많이 들리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주변에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두 달 전에는 유학 중인 제자가 갑자기 방문해서 인사를 했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테네 올림픽 취재에 갔던 매형이 KBS 직원인데 갑자기 죽어서 장례를 치르러 왔다고 합니다. 나이가 서른여덟입니다. 그리고 8월 말에 미국에 다녀왔더니 제 이종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 자메이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이 나빠져서 수술 받으러 혼자 갔다가 즉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도 역시 서른여덟입니다. 그리고 추석 바로 전에는 잘 아는 대학 교수의 부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도 서른일곱 여덟 정도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열흘 전에는 제 장모님이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정정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주변에서 죽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인생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입니까? 조금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누린 솔로몬의 탄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사람의 영을 괴롭게 한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삶을 누린 사람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요즘 저는 일주일에 두 명씩 학생들을 면담합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부류는 갈 곳을 알고 있고 다른 부류는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갈 곳을 알고 있습니까? 창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며 즐겁게 여행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왜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에스더를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정육점 앞을 지납니다. 그러면 큰 냉동 트럭에서 사람들이 소와 돼지 몸통을 갈고리로 들고 등에 멘 채 정육점으로 나릅니다. 여러분과 저의 몸이 소나 개나 돼지처럼 그런 몸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저 흙에 녹아 없어지는 그런 존재입니까? 교회에 와서도 영과 혼이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기만 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려는 마음이 없이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과 혼과 육이 여기 온전히 있습니까? 아니면 정육점의 고기처럼 육만 와 있습니까? 왜 우리가 예수 믿습니까? 지금부터 15년 전 쯤에 박사 학위를 했다고 하니까 동년배의 한 분이 만나자고 해서 차를 마셨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분은 제게 “왜 예수 믿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매우 실망한 눈초리였습니다. 그래도 박사가 되고 공부를 했으면 좀 고상한 이야기, 철학적인 이야기, 멋있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영원히 살기 위해 믿는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 믿으십니까? 제가 “왜 교회에 나오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묻는 자에게 온유함으로 그 이유를 보려 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 믿으십니까? 저는 대통령, 판사, 검사, 부자, 변호사, 의사, 박사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생선 장수, 연탄장수, 고무신 파는 사람, 무식한 할머니,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는 고지식한 사람들 좋아합니다. 물론 배우고 재물이 있고 명예도 있으면서 예수 믿으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예수 믿지 않으며 소유한 모든 것은 나팔 소리 나는 날 모두 잿더미로 변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아요. 그분만이 제 구원자예요. 성경은 다 몰라도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어요. 구원을 확신해요”라고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좋아합니다. 제 처형의 아들이 이제 22살인데 정치외교과를 졸업하게 되어 지난여름에 경험을 쌓기 위해 백악관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그 날 부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저는 에릭 안입니다”라고 소개하자 부시 대통령은 악수하면서 다짜고짜“에릭, 너 예수 그리스도를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새벽에 열리는 기도회에 오기 바란다” 저는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배웠든지 안 배웠든지,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명예가 있든지, 없든지,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위선의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설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이가 우리의 행위를 낱낱이 회계장부에 적어 두었다가 계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비하고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까?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행위가 없어야 합니다. 행위가 행위가 되려면 은혜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롬 11장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공식입니다. 창세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공식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을 합쳐서 무엇을 이루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며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 아내는 장례를 치르고 잘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있는데 단지 숨이 없습니다. 이렇게 숨이 없으면 활동을 못하므로 땅에다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여러분, 예수님 밖에서 죽은 자들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울음이 많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그 자리에 있었으면 참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고통을 당한 제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어머니가 주님을 사랑하다가 돌아가셨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의 아픔을 통해 저는 큰 아이와 e-mail을 나누는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딸만 있어서 외할머니가 얼마나 이 아이들을 귀여워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할머니가 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모두 보았고 엄마 아빠 대신에 졸업식에도 참석하고 피아노 레슨도 데려가 주고 쇼핑도 해 주고 음시고 만들어 주고 옛날이야기도 해 주고 참으로 얼마나 귀중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큰 아이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번에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큰 아이는 풍요한 미국에 살면서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결국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잠시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인생을 쏟아 부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모두 영원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고 본인도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이것을 보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할머니의 심장이 멎으려고 맥박의 수치가 80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해서 20까지 내려가다가 결국 멎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제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후5:1-8절 말씀을 주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 우리가 옷 입고 있으면 벌거벗은 채 드러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아이는 이 글을 받은 뒤 장례식 조사에서 그대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삶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짐을 진 채 신음함이 없으면 예수 믿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모든 일에서 승승장구하면 예수 믿기 어렵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도 기뻐합니다. 예수 믿으면 믿을수록 어려움이 와도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귀중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고전1장 26-29를 보십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육신적인 가난함이나 쓸모없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과 벌거벗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나 학식이 있는 자도 영이 가난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소유가 학식이 우리 것이 아니기 때입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맞이하고 여러분의 재능과 학식과 재물과 모든 복을 영원한 것을 위해 투자하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서 오는 집을 입혀 주실까요? 어떤 사람은 죽어서 짐승의 밥이 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죽은 지 2,000년이 되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즘 연금술사라는 책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말씀 즉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자 그녀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자신의 동생은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그녀를 좀 나무라달라고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대목을 인용하며 시작하며 이 발췌문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나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려 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은 당연하지만 현대인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보려는 고민을 담고 있기에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연금술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체계화되어 중세 유럽에 퍼진 주술적 성격을 띤 일종의 자연학으로 비금속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연금술에는 금속전환을 실현하여 사람에게 불로장수를 부여하는 힘을 가진 ‘철학자의 돌’ 즉 엘릭서’를 만드는 실천적 연금술과 물질적인 금속전환을 단순한 비유로 여기고 종교에 귀의하여 기도 등을 통해 죄 있는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신앙적 차원의 신비적 연금술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연급술사라는 책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금술은 헬레니즘의 이집트에서 싹트면서 그리스 자연철학의 물질관과 이집트, 바빌론 등 중동지역의 신비주의 관념과 천체와 금속을 관련짓는 점성술 사상을 포함하였고 페르시아, 시리아 등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8세기 이후에는 수은과 황을 적절히 배합하여 금속 특히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 생겼고 그 결과 금으로 떼돈을 벌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경을 변개시키고 또 허황된 신비주의 사상을 만들어 지난 몇 천 년 동안 사람의 혼을 빼앗아 지옥으로 쳐 넣어 왔습니다. 그러면 과연 물질의 근본인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뀌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불가능하면 우리의 부활도 불가능합니다. 현대 원자 물리학은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운 해법을 제공합니다. 오늘날에는 원소들의 성질을 바꾸는 변성이 가능하고 그래서 언제라도 원자력 연구소나 공장 등에서 이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1919년에 러더포드가 처음으로 변성에 성공한 이후로 원자 변성은 이제 연구 기관에서 매일 행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소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의 기본 구성 요소는 어디에서나 같습니다. 그것이 금이든, 은이든, 황이든, 탄소든, 산소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양자와 중성자와 전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원소인가는 이것들의 수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원자핵이 일곱 개의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고 그 주위를 일곱 개의 전자가 돌면 우리는 그것을 질소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것들의 개수가 여섯 개면 그것은 탄소입니다. 여든 개면 수은이고 일흔아홉 개면 금입니다. 그런데 만일 원자핵이 한 개나 그 이상의 양자나 중성자를 얻거나 잃게 되면 그 원소는 다른 것이 됩니다. 즉 변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라늄은 방사에 의해 라듐이 되고 라듐은 납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은 원자의 핵에서 중성자를 쏠 수 있다면 수은이 금으로 바뀌며 결국 중세 연금술사들의 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연금술사들이 여러 세기 동안 구하려 애쓰던 엘릭서 즉 변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자는 바로 수백만 볼트의 전기입니다. 수백만 볼트의 전기만 있으면 수은을 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다이아몬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와 연탄 혹은 연필심은 다 같은 탄소입니다. 단지 엄청난 압력과 온도를 받을 때 같은 탄소가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원자핵에 폭격을 가해 양자와 중성자를 제거하면 한 원소를 쉽게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이것은 다시 말해 값싼 금속을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변성을 통해 이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진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원소들을 다른 종류의 원소로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만일 사람이 수은을 금으로 만들 수 있을진대, 연탄을 다이아몬드로 만들 수 있을진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물을 포도즙으로 바꾸지 못하시겠습니까?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런 일은 실로 너무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변성을 이루려면 엄청난 전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전기 요금이 너무 들므로 수은에서 금을, 연탄에서 다이아몬드를 못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발전소보다 더 크고 무한한 동력원의 소유자가 아닙니까? 참으로 그분은 창조의 시작부터 이런 원자들의 능력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결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원자력은 사실 그분의 능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원자들의 조성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썩어 분해된 우리의 천한 몸을 예수님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우리의 부활할 몸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될 몸입니다(빌3:21;요일3:1-3). 이런 몸은 살과 뼈로 되어 있지만(눅24:39-40) 결코 중력과 시간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요20:19; 눅24:31,36). 이런 몸은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는 몸이며 (마8:11; 눅16:3; 고전13:12) 또 영원한 몸입니다(고후5:1). 궁극적으로 이런 몸은 영이 지배하는 몸입니다(고전15:44,49).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 즉 부활한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처럼 죽음에 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이런 소망이 있습니까? 주님을 신뢰하여 이 소망을 내 것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까?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변화될 것을 믿으십니까? 어려움을 겪을 때마나 이 부활의 소망을 되새기며 위로받기 바랍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삶에 풍성히 넘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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