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1. 들머리 차한 박사
지난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분당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피랍되었다. 탈레반은 자국내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의 철수와 탈레반 죄수 23명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에 불응시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탈레반은 인질석방 협상이 실패하였음을 선언한 후 배형규 목사를 살해하였고 7월 31일에는 심성민 씨를 추가로 살해하였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8월 1일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였다.
8월 10일 우리나라 정부와 탈레반 대표가 가즈니서 첫 대면을 하고 인질석방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고 사흘 뒤 탈레반은 아픈 여성인질 2명을 석방하였다. 8월 27일 우리 군 당국은 아프간에 파병된 동의․다산 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한국과 탈레반 대표가 가즈니 적신월사 건물에서 대면협상을 재개하여 나머지 인질 19명 전원을 석방키로 합의하였다. 드디어 8월 30일 모든 인질이 석방됨으로써 아프간 피랍사태가 42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상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프간 피랍일지이다. 그런데 이번 아프간 사태는 아마도 한국 기독교 역사상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반기독교 정서를 촉발시킨 사건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특히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을 보면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 맺혔던 각종 응어리들이 이 아프간 사태에 덧붙여 무섭게 분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교계 안팎의 충고와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며 또 모든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선교의 방법론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을 통해 선교의 기초들(basics)을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principles)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히6:1,2). 2. 선교(宣敎)
아프간 사태를 보는 국민들의 상당수가 반기독교 정서에 쉽게 편승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샘물교회 교인들이 선교를 하러 갔는데 왜 샘물교회 측에서는 순수한 봉사활동이라고 거짓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사건 발생 이후 교회는 피랍자 생명을 위해 ‘선교’를 ‘봉사’로 써줄 것을 언론에 요청했고 예배, 교회, 목사 등 기독교적 용어가 보도되지 않게 하기 위해 피랍자 가족 사무실을 샘물교회에서 한민족복지재단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이후 재단 측 항의가 잇따르자 다시 사무실을 교회로 옮기고 교회 건물 이름인 ‘분당타운’으로 써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선교는 얼마든지 순수한(?) 봉사활동으로도 대체가 될 수 있는 개념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선교는 그 정의상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른 지역이나 타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을 일컫는다. 둘째는 “선교(mission) = 복음전파(evangelism) + 봉사(service)”의 공식으로 정의가 된다. 이 공식은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압살라(Uppsala) 회의 후에 존 스타트(John Stott)에 의해 제안이 된 것인데 그 후 스타트는 ‘교회가 세상에서 활동해야 할 모든 것’을 포함하기 위해 선교의 정의를 ‘복음전파’(proclamation)와 사회활동(social action)을 포함하는 ‘사랑의 봉사’(love and service)로 수정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고전적인 선교의 정의에 의하면 ‘봉사’ 또는 ‘사회활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 ‘선교’의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사회활동이 복음전파의 수단(행18:1-3; 20:34,35)으로, 또는 동반자(partner, 눅4:16-32)로, 또는 전도의 표현(요14:11)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들 중 어떤 식으로 적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선교의 모습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급기야는 본말이 전도되어 ‘봉사’가 ‘전도’를 잡아먹는, 즉 전도가 완전히 사라진 경우까지도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회의 선교가 로터리클럽이나 다른 어떤 NGO의 사회활동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점차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선교는 단지 순수한 봉사활동으로 변질되어 소위 기독교인들조차 ‘봉사’라고 하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을 복음인양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고후11:3,4).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3,4, 흠정역)
3. 선교(mission)
그런데 “선교 = 봉사”라고 하는 잘못된 개념은 사실 선교(mission)의 어원을 살펴볼 때 충분히 납득이 갈 수가 있다. 우리말로 선교로 번역되는 영어의 ‘미션’(mission)은 라틴어 ‘미시우스’(missius)에서 나온 말로서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 곧 사도(apostle)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도권 계승이라는 이단 교리에 기초하여 성경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던 로마 카톨릭은 처음에 교황만을 사도라고 가르치면서 교황의 선포를 실제적으로 성경의 권위 위에 두었다가 이것이 성경의 권위에 밀려 흔들거리게 되자 교황뿐 아니라 사제들도 사도직에 해당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실제로 사도란 말의 의미처럼 사도회를 조직하여 해외에 파송하였는데 그것마저 성경의 권위에 위축된 나머지 사도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라틴어로 돌려서 ‘밋쇼나리’(선교사, missionary)라 하게 된 것이다. <그후 로마 카톨릭은 아예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일으키면서 모든 평신도들도 사제들과 협동하여 사도적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1921년 마리아 군단(Legio Mariae, Legion of Mary)이라는 평신도 조직망을 형성한 다음 도제제도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카톨릭 교회에 의한 세계정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직이 대언자(선지자)직과 함께 교회 설립의 기초에 해당되는 일시적 직분임을 밝혀주고 있으며(엡2:20; 4:11) 마지막 사도인 바울 이후에는 결코 사도라 불릴 자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9:1-5; 엡3:5; 벧후3:2; 유1:17; 계21:14). 사도들과 대언자들은 성경을 위해 부름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경으로 기록하며 성경을 맡아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이 활동할 당시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등하게 인정될 정도로 그들은 특별한 존재들이었다(행2:42).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끝났고 그후부터 성경 자체가 사도권과 대언자직을 대체하면서 모든 것의 최종권위로 드러나게 되었다(고전13:8-10).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사도권의 계승을 직접, 간접으로 주장하게 되면 바로 성경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적 위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비성경적인 어원을 가진 선교(mission)가 (비록 우리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이지만) 복음을 담지 못하고 대신 봉사(service)라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고후11:13-15). “그러한 자들은 거짓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흠정역)
4. 제자 삼기(making disciples)
이번에 아프간에서 피랍된 샘물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적 열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틀림없이 마태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개역)
그런데 여기서 ‘제자 삼는다’의 헬라어 원어인 ‘마쎄테스’(mathetes)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비인격적이고 상업적인’ 성격으로 주로 도제제도에서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제자 삼는다’란 번역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문에서 ‘마쎄테스’는 주님의 가장 긍정적인 지상명령의 동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의 ‘가르친다’로 번역이 되어야 적합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흠정역)
모든 민족들에게 말씀을 가지고 가서 ‘가르치는 것’이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인위적이고도 비인격적인 개념보다 주님의 의도에 더 가까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소위 제자훈련을 시키는 사람의 제자가 만들어져왔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겠다.
또 제자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한 ‘배가의 원리’(the principle of multiplication) 혹은 ‘재생산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복음화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들이 이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개역)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흠정역)
그런데 제자운동가들은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이 말씀이 바울로부터 시작하여 디모데와 충성된 사람들을 거쳐 다른 사람들까지 이어짐으로써 배가의 모델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배가의 모델이라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성경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즉 사도 바울은 이미 디모데가 들은 것이 건전한 말씀들(sound words, 딤후1:13)임을 설명하였기에 바로 이 말씀들을 신실한 사람들(faithful men)에게 맡기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딤후2:15) 곧 ‘거룩한 성경기록들’(딤후3:14,15)임을 바울은 계속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제자운동가들이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그 말씀을 신실하게 보존하는 자들을 길러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 삼는 자에게 충성된’ 자들을 만들어보기를 원하고 있다. 즉 배가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조직에 충성을 다하고 리더의 권위에 복종하는 제자들을 양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5. 복음전파(傳道)
이번에 아프간에서 풀려난 어느 자매의 싸이월드를 본 많은 네티즌들이 ‘과연 그들이 선교를 간 것인가 관광 문화체험을 하러 간 것인가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필자는 그래도 그 자매가 복음을 들고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자신이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며 감격한 사실에 긍정적인 점수를 주고 싶다.
비단 이 자매뿐이랴. 선교의 열정에 불타는 많은 젊은 크리스천들이 특별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종족을 향해 달려가기를 소원하고 있는데 이는 이를 통해 주님의 재림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개역)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 곧 우리가 구원받게 된 복음(고전15:1-4; 마1:21; 요1:12; 3:16; 행4:12; 16:31; 롬10:9,10,13)이 선포되어야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구절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왕국의 이 복음(this 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흠정역)
그렇다. 그냥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란 단어의 의미가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어떤 복음이건 그 의미가 다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왕국의 복음(마24:1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 요3:16; 롬1:1,16; 고후10:14; 엡6:15), 영광스러운 복음(고후4:4; 딤전1:11; 히2:10), 영존하는 복음(계14:6) 등은 그 의미가 다르다. 왕국의 복음은 누가복음 1장 32절과 33절에 예언된 것으로서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실 지상왕국을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 한다는 좋은 소식이다. 성경에서 이 복음이 선포된 것은 두 번 나오는데 처음에 뱁티스트 요한의 사역과 함께 왕국의 복음의 선포가 시작되었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이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다인들이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끝이 나고 말았다(마3:1-6; 4:17,23-25; 9:35; 막1:14). 그러나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이 왕국의 복음은 다시 선포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있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마24:14)은 현재 각 민족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복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지 하늘의 왕국의 복음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증거를 위한 것으로 왕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통보하는 것이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대환난 때에 선두주자 엘리야(말4:5-6)와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것을 위임받은 다른 사람들이 선포할 것인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모으는 것이다. 6.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
아프간에서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몸값이 탈레반에게 지불이 되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탈레반과 약속한 게 있어서 밝힐 수 없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 이외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얘기할 수 없다.”고 답을 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탈레반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간 내 한국인 선교사 철수와 한국 선교사 아프간 활동 중지를 공식적으로 약속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피랍자 측에 실비정산을 하기로 하여 사실상의 구상권을 행사키로 결정을 하였다. 정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적용할 전례를 만들겠다는 정책적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부의 행동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통해 얻은 기독교회의 정체성에 너무도 심각한 훼손을 가져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라고 하는 성경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교회와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리되어야 하며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통제할 수 없음을 믿어왔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서로 독립적인 관계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마22:15-22). 그렇다. 교회와 국가는 각각 독립적이며 그 관여하는 영역이 다르다. 교회는 영적인 영역에 관여를 하고 국가는 세속적인 영역을 다룬다. 이 두 영역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쳐져야 한다(마22:21). 우리는 이것을 정교분리(政敎分離) 또는 정종분리(政宗分離)의 원칙이라고 한다. 만약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게 될 경우 실제적으로 교회는 국가라고 불리는 기관의 한 부속물이 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교회는 독립적인 지위나 목소리를 상실하고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엘리트들의 손아귀에서 조종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왕국인 교회와 세상 국가를 분명하게 구분하셨다(요18:36). 사도들도 교회의 사역인 전도와 교육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함이 마땅하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행5:29). 그러므로 정부관리는 교회 곧 신앙의 영역에 관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와 국가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도 있지 말아야 한다. 교회와 국가를 서로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민등록증과 천국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중국적자이다(빌3:20).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각각 다른 부분으로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다. 죽은 이후에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지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 연합하여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7. 마무리
“정부는 탈레반에 건넨 몸값에 대해 국민에게 공개하고 구출비용 전액을 피랍자와 교회단체에 구상권을 행사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국가가 보호할 수 없는 국민의 생명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을까요? 해외봉사활동 가시는 분들은 유서와 구출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갑니다. 아프간 피랍사건에서 정부가 탈레반과 협상하지 않는다 하여도 정부를 탓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피랍된 23명 중 21명을 구출하였습니다. 피랍 기간 중 국민들은 40여 일 동안 가슴 졸이며 피랍자의 죽음에 아파해야 했습니다. 국제사회는 납치범과 협상하고 몸값을 건넨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피랍자와 피랍에 관련된 교회단체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아닐까요! 이런 청원마저 하지 않는다면, 또 정부가 피랍자와 단체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이 또다시 재발될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 정부와 국민은 서로를 바보처럼 느끼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구출된 피랍자들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보다 국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분은 하나님이지만 당신들을 구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가슴은 따뜻하지만 머리는 차가운 많은 국민 여러분들의 서명을 부탁합니다.” 이상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려진 ‘아프간 피랍자 구출비용 청구하라.’란 제하의 서명운동 발의문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가? 정녕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만약 다시 떠난다면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무해하라.”(마10:16, 이하 흠정역)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일을 불평이나 시비가 없이 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무해한 자 곧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민족 가운데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빌2:13-15)
필자는 소망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오늘 아프간 딜레마를 겪고 있는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기회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빌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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