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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구원의 지식과 확신조회수 : 1240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8일 13시 46분 44초
  • 구원의 지식과 확신(Safety, Certainty, and Enjoyment by George Cutting, 두 번째 부분 Certainty)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이미 영생을 혹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장 13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서 제시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느낌들을 준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위의 구절과 아래 구절을 대조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보십시오.

    이 두 개를 비교하면서 다윗의 고백도 들어 보기 바랍니다.

    내가 허탄한 생각들은 미워하나 주의 법은 사랑하나이다(시119:113).

    첫 번째 유월절 밤 곧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처음 난 것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시던 밤에 이스라엘의 자손의 맏아들들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이 안전함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출애굽기 12장 참조)? 이제 그 당시 이스라엘의 두 가정을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첫째 집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죽을 지경이 되어 불안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집의 맏아들에게 이유를 묻자 그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 밤에 파멸시키는 천사가 우리 집을 지나갈 것입니다.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고 했으므로 제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 온 가족이 안절부절못하고 떨고 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행히 파멸시키는 천사가 우리 집을 그냥 넘어가고 새벽이 온다면 그때는 제가 안심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옆집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장담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억측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그저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 길고 무서운 밤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요?”

    그는 대답합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1년 된 어린양을 잡고 우슬초에 그 피를 적셔서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불안에 떨고 있는 첫째 집을 떠나 그 옆집으로 가 봅시다. 언뜻 보기에도 그 집의 분위기는 첫째 집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평안이 있었고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서 구운 고기를 먹으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처럼 엄숙한 밤에 이 같은 평안이 있다니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실 것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나고 작업반장의 잔인한 채찍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요. 오늘 밤이 이집트를 심판하는 밤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맏아들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거든요.”

    “바로 옆집도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던데요?”

    “아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피를 뿌린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출12:13). 우리 하나님은 밖에서 그 피로 인해 만족하실 것이고 우리는 안에서 그 말씀으로 인해 안전할 것입니다”

    문에 뿌려진 피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우리를 확신하게 만듭니다.

    문에 뿌려진 이 피보다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요?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요? 이제 저는 여러분에 묻겠습니다. “이 두 집 중에서 어느 집 맏아들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평안히 거하고 있는 두 번째 집이라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틀렸습니다. 두 집 모두 안전합니다. 그들의 안전은 하나님께서 밖에 뿌려진 피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지 안에 있는 그들의 느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의 복을 누리려면 당신의 속에서 나오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변하는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6:47).

    이제 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골에서 한 농부가 자기의 가축을 위해 좋은 초장을 얻으려고 물색하던 차에 자기 집 근처에 좋은 초장을 세놓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주인에게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주인에게서는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찾아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분명히 그 초장을 임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주인이 당신에게 선물을 푸짐하게 보내왔고 지난번에는 그분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당신을 보고는 손을 흔들기도 했지 않았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 농부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농부는 다른 이웃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번에 당신이 그 목초지 사용 승낙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실은 주인과 친한 사람이 그 목초지 임대 신청을 했다는데 요즈음 그 사람은 문턱이 닳도록 주인 집을 드나든다고 합디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농부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고 한 때 희망으로 부풀었던 가슴은 이제 절망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어제는 희망으로 인해 기뻐서 날아갈 듯 했는데 오늘은 온통 걱정과 의심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집배원이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주인에게서 온 편지를 뜯으면서 그는 주인의 글씨가 분명함을 보고는 얼른 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는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습니다. 농부는 그것을 읽고 또 읽고 환호성을 올리며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젠 됐어! 이젠 안심해도 돼. 이 편지를 보라고! 주인이 내가 필요한 대로 그곳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고 임대 조건도 아주 유리하게 해 주었어. 이제 됐어. 끝이야. 다른 사람이 무어라 말하든 아무 상관없어!”

    잠깐 생각해 봅시다. 수많은 영혼들이 가련하게도 이 농부와 같이 불안해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기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허탄한 생각으로 인해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의심과 초조함을 물리치고 확신 가운데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이 옵니다. 불신자에게 멸망을 선포하신 말씀이든,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말씀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거기에는 100% 확실함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8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나이다.

    민수기 23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나는 어떤 다른 논쟁도 논리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청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성도들은 여기에다 다음을 붙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저도 당신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올바르신 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을 믿고 그분만을 신뢰하십니까?”

    올바른 믿음이란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믿을 만한 분을 믿느냐 하는데 즉 질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처럼 그분을 꽉 부여잡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신히 그분의 옷단을 살짝 붙잡습니다.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안전할까요? 한 사람이 더 안전하거나 더 불안하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처럼 꽉 붙잡았다고 해서 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둘 다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만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만 유일한 구원의 근거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6:47).

    이제 확실히 아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선한 행위를 하거나 엄격한 종교 생활 혹은 종교 의식을 잘 지키거나 경건해졌다고 느끼거나 혹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려서부터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당신이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엄청나게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런 확신은 당신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좋은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주 연약할지라도 바로 그 믿음이 여러분과 저를 영원토록 구원합니다. 이 외의 인간의 어떤 다른 선한 일도 우리를 구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100% 확신을 갖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촉구합니다.

    어느 날 어떤 여인이 울상이 돼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예수님을 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다가와서 저보고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혹시 구원받지도 못했으면서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아버지는 미드랜드에서 도살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날에 시장이 열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 올 때에 당신이 아버지에게 “아빠, 몇 마리나 사오셨어요?”라고 묻는다고 합시다. 또 그때에 아버지가 “열 마리를 사왔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웃 사람이 와서 “당신 아버지가 양을 몇 마리나 사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글쎄요. 아빠가 말씀해 주셨지만 그게 거짓말이 될까 봐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옆에 있는 어머니가 분노하면서 “그것은 네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야”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여기 이 젊은 여인처럼 실제로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며 그분께서는 분명히 내가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믿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을 해 왔지만 모두가 허사였어요. 내 자신을 드려다 볼수록 확신은 고사하고 내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어요. 내 믿음을 보면 볼수록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여! 지금 당신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믿으려고 무척 애르 쓴다는 것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제 말에 잠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른 예를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당신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찾아와서 역장이 철도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합시다. 그런데 지금 찾아와 이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요?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당신은 그 사람 말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믿으려고 노력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왜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없습니까?”라고 반문한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어 줍니까?”

    이로 보건대 어떤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은 우리 속의 우리 믿음이나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전해 준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그 말이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또 다른 이웃이 찾아와서 역장이 화물 열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다시 전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아마도 당신은 그것이 정말이라고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 말을 조금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 내부의 믿음이나 감정 때문입니까?” 그러자 그는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알려준 사람에 의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자마자 아주 절친한 친구가 찾아와서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당신은 “자네 말이라면 여부가 있겠나? 딱하게도 역장이 교통사고로 희생을 당했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친구의 말을 고스란히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거짓말을 한다거나 저를 속인 적이 없습니다.”

    결국 당신은 사건 현장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또는 당신의 맘속에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그분 즉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내 감정이나 내 속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언은 더 크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언이니 곧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이 증언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언을 그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일5:9-10).

    아브라함은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증언을 받았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롬4:3).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한 불쌍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종에게 나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도무지 믿어지질 않으니 어쩌면 좋죠?” 그때 상담을 하던 설교자는 조용하고도 슬기롭게 반문했습니다. “그러세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그분이 누구시지요?”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사람은 이 악순환의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바라보고 믿는 대신 그리고 이에 대하여 증언하는 성경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 즉 자기 밖에서 이루어진 일에 대한 믿음이 없이 - 자꾸 자기 자신이 자기 속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속에서 증거를 찾고자 했던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밖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의 안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가 앞을 어둡게 하지만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가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내 자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는 사람은 이 일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 밖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성하신 구속 사업을 통해 이미 독자와 저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원의 방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성취하신 일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구원의 확신과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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