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성장한다는 교회들은 많은데 왜 사회가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같이 변하고 있는가?"
"바르게 하려는 교회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하며 결국 '기도의 부족' 혹은 '기도 없음'(혹은 바른 기도가 전무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느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레오나드 레이븐힐)를 접하고 너무나 큰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현재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품절 상태입니다. 하지만 갓피플 몰 같은 기독교 전문 서적 사이트나 교보문고 등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레이븐힐의 대부흥 시리즈 2, 3탄(무릎 부흥,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은 생명의 말씀사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규장 출판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서문만 발췌하여 올립니다. 많이 읽고 뜨겁게 바른 기도를 드립시다.
지금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당신 때문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1. 독일의 신학자 이자 역사가)은 기독교를 이렇게 정의(定議)했다. “기독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숭고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시간 속에서 영원을 위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영원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며 살아간다면, 언제나 심판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면, 기도할 때마다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한 눈으로는 심판대를 바라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저주받은 인류를 바라보며 복음을 전한다면….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부흥이 일어나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무수한 영혼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분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둘째,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셋째, 성경을 아는 사람이다.
소돔은 성경과 설교자, 전도 책자, 기도회 그리고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성경과 교회와 목사가 넘쳐난다. 그런데도 돼 그토록 죄악이 만연한가? 건축가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만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인쇄업자들이 성경을 인쇄하지만 그것을 읽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그분이 구주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부르지만 그것을 곧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때 어떤 결과가 나아올는지 나는 심히 두렵다.
“우리의 죄와 세속성(世俗性)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거짓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처럼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참고). 우리는 죄를 대적하지 않고 죄와 타협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세속적이고 비판하기 좋아하고 근심 찌든 교회는 음란하고 방종한 이 시대를 결코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없다.
교회는 희생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은 대중문화 때문에 아니다.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도덕적 타락의 궁극적인 원인은 교회의 잘못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교회는 세상에게 가시였다. 평균 이하의 도덕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도덕적 기준을 세상에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 부흥을 가로막는 상업주의 왜 부흥이 지체되는가?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기독교가 상업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호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부흥회나 전도 집회에 많은 청중을 끌어 모은다. 시장(市長)과 같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순진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동기로 성의를 다해 자신의 물질을 바친다. 하지만 그들이 바친 물질은, 명성은 높지만 속이 좁은 사역자들이 대중문화의 스타처럼 호화롭게 생활하는 데 사용되어버린다.
호화저택도 있고 호숫가에 별장도 있고 은행에 거액의 예금이 있는 사역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기 배만 불리는 불의(不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흥의 열쇠를 맡기실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양복을 갈아입기 때문에 겉모습이 번지르르하다. 그들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전하면서 자신들은 고급 호텔을 전전한다. 그들은 설교 예화를 위해 데나리온 한 닢까지 다른 사람에게 빌려야만 했던 분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청중에게 돈을 짜낸다. 볼품없는 옷을 입었던 분을 기리기 위해 일류 스타들처럼 옷을 입는다. 광야에서 홀로 금식하신 분을 기억한다면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를 즐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거액의 사례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자기들의 은행 예금이 매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심판날’이 그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날이 될지 생각하라!
○ 싸구려 복음과 게으른 사역자가 부흥을 가로막는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방송에서, 기독교 음반에서,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찬송가를 ‘부기우기’ (템포가 빠른 재즈풍의 댄스 음악) 템포에 맞춰 부른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하는 노래를 향락적 댄스 곡조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교회의 설교단은 엔터테이너들의 쇼 무대가 되어버렸다. 초청을 받고 교회를 방문하여 이 일 저 일을 하는 소위 ‘사역팀’을 보고 있으면 마치 마네킹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당신은 이 시대의 프로 간증꾼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하여 청중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개구리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연주하기를 기대하라. 돈에 팔려 다니는 일부 만담꾼 부흥사들을 보라. 십자가를 걸러낸 저들의 처세술 강론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쉽게 죄를 짓고 쉽게 회개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제달을 타락시켰다. 제단은 ‘싸구려 복음’을 거래하는 시장(市場)이 아니다. 제단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곳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단을 떠나야 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단에서 무릎 꿇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가운데 ‘영적 노숙자’가 봇물 터지듯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두려움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두려움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포용력 없는 독선적인 종교인’이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아, 슬프다! 이 말씀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편협한 독선으로 들리는가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무능을 경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없는 이단들과 기타 다양한 종교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현상을 보고 어지 진노하시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누가 경고의 나팔을 불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프로테스탄트'는 본래 ‘저항하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에 저항한 ‘개신교 신자’를 가리킨다.)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누구에게 저항하는가?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神)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죽는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 신앙은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세상의 향락적 풍조에는 발정난 망아지처럼 달려간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뜨겁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만큼만 뜨겁다면, 우리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십분의 일만큼만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물과 불의 세례뿐만 아니라 피(血)의 세례까지 받을 것이다.
영국 국교회는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영국의 열정적인 전도자로서 감리교의 창시자) 앞에서 문을 닫고 그를 배척했다. 심지어 로우랜드 힐 (Rowland Hill, 1744~1833. 영국의 대중설교가) 은 “존 웨슬리는 부랑자, 넝마주이, 마부, 굴뚝청소부 같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독초를 먹이고 있다.” 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로서 18세기 신앙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도 몹시 조롱당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았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악한 본성은 여전한데, 어찌하여 오늘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조롱당하지 않으며 돌에 맞지 않는가? 어찌하여 지금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가?
○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유명한 목사가 부흥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부흥회에 임하면서 나는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나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실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 중에 손을 들고도 기도하지 않는 위선자가 없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부흥회 주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심야기도회가 열렸는데, 정작 이 목사가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이 한 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목사! 이러고도 부흥을 기대하는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부흥이 왜 지체되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도라는 해산(解産)의 고통 없이 부흥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산의 고통 없이 기획과 홍보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야고보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약 5:17,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절히 기도한즉”과 “다시 기도한즉”이다. 우리는 대개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사실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 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 피 흘리며 기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피는커녕 땀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되면 되고 안 되면 말지”라는 태도로 기도한다. 기도하기 위해 다른 것을 눈곱만큼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 줄기차게 기도하지 못한다.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 책을 많이 쓰지만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는 않는다. 기도에 관한 한, 오늘의 교회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씨름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듯 기도의 씨름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는 영적 능력이든 일반적인 능력이든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느라 핏대를 세운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된 교리적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교하거나 책을 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사탄의 요새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사탄의 요새를 쳐부술 것인가? 누가 사탄에게 “노”(No)라고 말할 것인가? 좋은 음식, 재미있는 친구들, 꿀맛 같은 휴식을 거부하고 ‘기도’라는 고투(苦鬪)에 몰두할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귀신들을 제압하고,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며, 지옥에 떨어질 자들을 구해내고, 수많은 영혼들을 어린양의 보혈의 강(江)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마지막으로,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4).
설교단에서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지 마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지마라. ‘나의’ 교회, ‘나의’ 교인, ‘나의’ 건물, ‘나의’ 책, ‘나의’ 방송프로그램의 높여서 영광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 많은 교회의 설교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설교단에서 사회자가 강사를 소개할 때 그의 학벌이 어떻다느니, 그가 무슨 조직의 대표라느니, 심지어 그가 구각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는 말까지 한다. 이런 거창한 소개는 결국 그 강사의 육신적인 부분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회자의 번지르르한 소개가 끝나고 등장하는 강사도 그런 소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설교 한다. 그러나 그가 설교를 끝마쳤을 때 청중은 그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에 비해 그의 설교가 너무 빈약하다고 느낀다. 만일 사회자의 거창한 소개가 없었다면 청중은 그 강사라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거창한 소개의 뒤를 잇는 빈약한 설교!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맥 빠지게 하는지 아는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목회자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는 것이다. 교인들이 말씀으로 각성되어 있다면 목회자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인기나 학벌을 선호하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기호에 아부느라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풍조를 목회자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한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더럽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라는 무서운 말씀을 실행에 옮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오, 하나님! 썩어 문드러진 우리를 치료하소서. 완전히 잘못 된 생활방식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가 깨어지는 복을 주소서. 우리가 먼저 심판대 앞에 서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