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옥성호 형제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형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분이 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건전한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합니다. 요즘 비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면서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사의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침례 교인이 장로 교인의 글을 읽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교단에 가입하지 않은 독립 침례교회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장로교인의 글을 읽거나 추천하면 그 일은 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고요,크리스천들이 배격해야 할 분파주의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독립침례교회 성도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고 오직 그분만을 자신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구원자로 믿으며 그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다 그분의 몸의 지체요, 그분 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어이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은 모두 형용사입니다. 주어가 중요하며 형용사는 꾸며 주는 것으로서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립 침례교회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에 가장 가깝다고 믿고 있으며, 기회가 오면 이런 교회의 목회자로 살다가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역 교회는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믿는 바를 고치며 생활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구원 받기를 선택하고 지역 교회를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지역 교회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뒤에 어느 교회가 성경을 따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활하는지 판단하고 거기에 나가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교제하고 섬기게 됩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혹은 성경적으로 하는 교회 - 라고 주장하면 그런 사람과 그런 교회를 주목하고 피하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제는 무익합니다. 무엇이든지 믿는 것은 자유지만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역행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통일교를 보십시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 혹은 유일하게 성경적인 교회 -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상적인 교회치고 어느 교회도 자기 교회만 유일한 교회라고 믿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회(이송오 씨 담임)는 자기들의 교회가 한국에서 세워진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주장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주장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킹제임스 성경을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악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보수 장로교 청교도 목사들도 이런 사상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세련된 사람들이라 겉으로 이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형제 교회, 지방 교회, 구원파 교회 등도 거의 이렇게 생각하지요. 이런 데서는 대부분 자기들이 믿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지상의 교회는 모두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늘 살펴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귀환하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내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고치겠다는 부드러운 자세로 믿음 생활을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와 형제/자매님의 생활에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옥성호 형제의 글, 어느 자매가 추천하며 보내 주어서 올립니다. 원래 글은 부흥과 개혁사의 옥성호 형제 컬럼에 있다고 합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메릴 스트립에게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안긴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소피라는 여자에게 독일 장교는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녀의 아이 두 명 중 살아남을 한 명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소피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한 명의 자녀를 선택합니다. 아마도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겠지라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택되지 못한 아이는 엄마를 울부짖으며 독일 군인들에 의해 끌려갑니다. 엄마, 엄마를 울부짖는 그 아이의 음성에서 소피는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마침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과연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소피에게 원하시는 당신의 선한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소피에게 만약 이 상황을 놓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을까요? 소피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면 무슨 뾰족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처럼 마구 남용되는 말이 없는 듯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확신으로 그토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내세울까요? 저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한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특히 수많은 목회자들에 의해 남용되는 이 말은 더 큰 위험요소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왜 분명 나름의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개척된 교회들이 매년 한국에서만 수천 개씩 문을 닫습니까? 교회가 세워졌다가 망하는 것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중간에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바뀌기 때문인가요?
성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맞는 신학교를 가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신학교를 나오면 반드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여건이 갖춰져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자금이 모이면 꼭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정말로 팔복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위해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그 목마름이 있다면 행동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기 전에 나의 결정 속에 내 욕심이 얼마나 있는지를 스스로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내가 돈을 낼까 말까를 놓고 망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으니까요. 만약 식사비가 신경 쓰인다면....그 사람은 정말로 앞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지요.
제가 앞의 어떤 글에서도 썼듯이.....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남을 이용하는 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 결과 이 기도원을 구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 대신....
“우리 교회가 좀 더 성장하려면 기도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마침 좋은 물건이 싸게 나왔어요. 이거 정말 놓치기 아깝습니다. 이번에 삽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자매님, 기도한 결과 자매님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점잖은 말 대신....
“나 사실 너가 좀 지겨워졌어...미안하다. 그만 만나자.”라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나는 솔직하게 이것을 원한다.”라고 왜 말 못합니까?
기독교 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글쎄요....
“교회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이거 영 열 받아서....이번에 국회의원 뽑아서 한번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줘야지. 이주일 선생께서 타계하신 이후 이 사회 속에 진정한 ‘뭔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너무도 없어. 이번에 우리 교회가 한번 확실히 보여주겠어.”
또한 어떤 상황을 놓고 많은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좀 더 기도해 봅시다....하나님의 뜻을 찾아야지요.....”
물론 맞습니다.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속으로 결론은 다 내려놓고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신앙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압박하려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많은 경우에 질문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각종 메커니즘 내지 방법론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냥 나를 내던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정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사랑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실패일까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열심히 된장찌개를 끊인 신혼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된장찌개보다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된장찌개가 실패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굳이 문제라면 남편이 아직까지 아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는 점이겠지요.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너무도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하기 전에 “잘 몰라...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하지만 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요?
분명 자식 둘을 다 사랑했던 소피는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요? 한 명을 선택했던 소피의 선택이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선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선택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한다면 같은 상황에 대한 결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2 더하기 2는 4와 같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결정에 의해 아무리 겉으로 나타난 결과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 이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과라도 하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나는 사랑합니까? 사랑해서 내린 결정입니까?”
이것이 내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