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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왜 천년왕국에서 유대인들이 희생 제물을 드리는가?조회수 : 1316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8일 14시 54분 56초
  • 우리는 히브리서 9장 12절, 10장 10절 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과 신약 시대의 사람들 즉 과거에 이 땅에 산 모든 사람들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이 땅에 살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전히 영원토록 단 한 번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셨음을 믿고 있고 이에 감사를 드린다. 보통 이것은 예수님의 ‘영 단 번 속죄’라고 불린다. 그런데 문제는  ‘영원한 단 번 속죄’가 이루어졌는데 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 헌물 같은 희생 예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겔43:18-27절에 보면 분명히 제사장들이 죄 헌물, 번제헌물 그리고 화평 헌물을 드린다.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기 전에 먼저 천년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천주교회와 및 천주교회에서 항의하고 나온 프로테스탄트(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등)의 대부분은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1000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지는 왕국이 아니고 단지 ‘영구히 지속되는 영적인 왕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믿는 분들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런 구절들을 영적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즉 이 시대에는 실제의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으므로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런 것들은 모두 가상의 세계에서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믿음을 존중하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싶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이루어지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가 확고히 서고 그들은 분명히 레위인 체계와 제사장 체계를 갖는다. 에스겔서 40-48장은 분명히 천년왕국 때에 이 땅에 세워질 문자적인 성전(41-43장)과 문자적인 제사장들(42장, 44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이사야서 66장 21절도 천년왕국 때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세워짐을 보여 주고 말라기 3장 3절도 레위 사람들이 세워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외에도 크고 무서운 주의 날 이후에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문자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록들은 분명히 제사장/레위 사람 체계와 성전의 건립을 보여 준다.

    이런 것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참고로 밑에 있는 인용문 (1)과 (2)의 출처는 http://blog.daum.net/11christ/10411012이고 저자는 김정우로 되어 있다.

    (1) 에스겔 47장: 여기에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예언되고 있다.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큰 강이 되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으로 나타난다(5절). 그리고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고 강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며 바닷물(사해)이 소성함을 얻는다고 한다(9절).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사해까지 적시며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고 고기가 살 수 있도록 할까? 이 예언의 배후에는 명백하게 에덴동산 이미지가 깔려 있음을 주목하라. 에덴동산에 흐르는 물과 모든 나무와 산의 모티프가 에스겔서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28)고 말씀하심으로 에덴동산을 성령강림으로 재해석하셨다. 요한계시록 22:1-4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나오며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개의 실과를 맺는다고 한다. 즉 에스겔의 상징적인 강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여기에서 바라보고 있지 문자 그대로 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올 것을 내다보고 있지 않다. 구약의 성전은 그 자체가 예표적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처소를 본 딴 복사판이다(출25:40, 왕상8:29-30). 성전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로서(히8:5) 하나의 모형으로 주어졌다. 이 모형은 그림자로서 솔로몬의 돌 성전은 보다 완전한 것이 나올 때 폐기될 수 있었다(히10:9). 이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실체가 나타나고(요1:14) 종말론적인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22). 이 성경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에스겔서의 강물과 나무 이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2) 스가랴서에 나타난 예언: 메릴 엉거(Unger 1978)는 스가랴서 전체가 메시야의 강림과 천년왕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라는 관점 속에서 주석을 하고 있다. 예로서 2:1-13의 측량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환상은 "그 도시가 미래에 천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1978:43). 즉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고 교회가 될 수 없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깨끗함을 받는 환상(3:1-10)은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회개할 것을 그리고 있다(55쪽). 11장은 미래에 거짓 목자 즉 적그리스도가 올 것을 말하며, 12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예언한다고 말한다(206쪽). 미래의 예루살렘이 다시 이방인들에게 포위될 것이며 (12:1-9), 메시야 왕이 두 번째로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 온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이다(12:1-13:9).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승리를 거둘 것이나 메시야가 감람산에 오심으로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 산이 변형되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는다(14장). 따라서 14장은 전적으로 예언적이다(wholly prophetic). 이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과거 역사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238쪽). " 스가랴 14장은 현 시대의 관점에서도 전적으로 예언적이다. 그 의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석법은 문자적인 해석이다 " (239쪽). 그리고 엉거는 파인버거(Feinberg)를 인용하고 있다: "이 장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 스가랴가 지금까지 계시한 것과 성경전체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성에 대한 예언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

    그렇다면 스가랴서에서 감람산이 나누어지고 에스겔서에서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만드는 이미지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을 알리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엘이 말세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일하시는 시대를 예언하면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알았을까? 선지자는 신약시대의 도래에 대해 상징과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 상징과 비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선지자의 의미를 바로 캐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결정하는 것이 종말과 연관된 본문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준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고난 가운데서 꿈과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이 이기고 있고, 역사의 마지막에 개입하시며 그의 성도들을 신원하시고 그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말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구체적인 종말의 때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종말론적인 최후의 승리를 제시하며 고난 받는 믿음의 공동체를 위로한다. 신자들이 고난 받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상징(symbolism)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 체계와 믿음을 가진 분들 중 상당수가 진지한 크리스천임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 부분에 관한 한 그들의 진지함을 따르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믿는다. 즉 에스겔서에 기록된 대로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흘러 사해를 회복시키며 재림 때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오셔서 땅이 갈라지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스가랴서 14장 4절에서 우리 주님의 발이 올리브 산에 닿는 것은 곧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 승천하면서 주신 약속의 말씀 즉 올리브 산에서 승천한 그대로 올리브 산에 오신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 사람들의 문제는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의로 무시하고 영해하여 모두 교회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어거스틴 사상에서 나와 칼빈을 통해 장로교회에 고착된 잘못된 믿음이다.

    자, 그러면 히브리서와 에스겔서의 상충되는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영해하거나 왜곡하여 우리의 주장을 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그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님은 왜 재림하시는가? 그분의 재림이 죄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히브리서 9장 27,2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주님의 재림은 죄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에서의 희생 제사도 죄와 상관이 없다.

    히브리서 10장 16-18절에는 교회에게 또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성취될 말씀이 있다. 

    16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 17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8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

    18절은 분명히 죄로 인한 헌물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의 헌물은 죄로 인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 헌물들은 다른 목적으로 드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것들을 드리는 목적이 자기들이 죽인 메시아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이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라고 믿는다. 즉 구약 시대에는 다가올 메시아를 기대하며 예표로 유대인들이 희생 헌물을 드렸고 천년왕국에서는 이미 모든 일을 이루신 메시아를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희생 헌물을 드릴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 시대는 구약시대와 비슷하게 신정 정치 형태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유일하게 장막절이 지켜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장막절에 주님을 뵈러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스가랴서 14장 16-19절을 보자.

    16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남은 모든 자가 심지어 해마다 올라와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리라. 17 땅의 모든 가족들 중에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그분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터인즉 18 만일 이집트 가족이 올라가서 거기에 이르지 아니하면 비를 받지 못하리니 곧 주께서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교도들을 칠 때에 내리실 재앙을 거기에 내리시리라. 19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민족들이 받을 벌과 이집트가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우리는 이대로 될 줄 믿는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이것만이 유일한 대답이라고 믿지 않으며 이 외에 다른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기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이유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믿는다. 이렇게 믿으면 세대주의자요 심지어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바른 성경 해석 방법이요 하나님이 주신 뜻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렇게 믿지 않는 분들(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의 믿음도 존중하며 특히 그들의 성화 노력을 크게 반긴다. 하지만 종말론의 이 부분에서는 그들이 틀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대중적 기독교는) 바른 것을 원치 않는다. 그냥 유명한 사람들의 해석 체계를 따르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형제들에게도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는 귀와 눈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또 바르게 본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에게는 칼빈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극도로 순수하게 살고자 노력했기에 칼빈주의자들은 영국에서 퓨리탄(Puritans)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게 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본받고 싶다(다만 종말론의 영적 해석 체계와 죽은 정통으로 정형화 된 칼빈 우상주의를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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