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주가 저절로 형성되어 우연의 과정을 통해 현재처럼 복잡하게 되었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은 우주가 과거의 엄청난 세월 동안 존재해 왔으며 다가올 시대에서도 본래의 진화론적 궤도를 따라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혹시 지구에서 앞으로 이런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멀리 떨어진 별들에서라도 계속해서 진화가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실 마귀가 세운 이 같은 인본주의 체계는 인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성경적 세계관과 맞서 왔다.
이러한 끊임없는 과정들이 삶, 죽음, 그리고 윤회라는 반복되는 주기 안에서 일어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해 왔다. 이 부류 중 어떤 이들은 또한 복잡한 생명체의 점진적 발달이 태초의 어떤 혼돈으로부터, 아마도 어떤 형태도 없는 물 덩어리 또는 에너지를 띤 분자들의 원형질로부터, 심지어는 어떤 우주론적 사고 체계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진화론은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여러 형태를 취하였지만 그 형태에 상관없이 진화론 추종자들은 항상 지금까지 엄청나게 긴 세월이 흘렀다고 주장해 왔으며 또한 인격적이며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온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 왔다.
한편 성경은 우주가 진화론적 발전에 필요한 긴 세월을 거쳐 생성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으로 인한 6일간의 짧은 창조 행위의 연속 과정을 통해 신속하게 초자연적으로 생성되었음을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 준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시33:6).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긴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장차 올 완전한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정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구속하실 세상을 예비하시는 데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투쟁,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 점철된 과거 속에 즉 여러 국가들이 창건되고 멸망해 온 지나간 수천 년의 세월 속에 날과 해와 세기가 역사 속으로 흘러가 잊혀지고 말았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주의 눈앞에서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과 같을 뿐이다”(시90: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며 구원받은 우리도 다가오는 영원 속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터 인류 역사의 끝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다. 비록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인류의 반항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 계획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고(성육신) 이로써 우리의 창조주는 또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야만 했다. 그 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고 묻혔다가 부활하셔서 죽음 권세를 물리치셔야만 했다. 사실 그분께서는 천국에 잠시 동안 계신 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을 이루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며 그 후에 새로 창조될 땅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다. 그 구원받은 인류가 새롭게 만들어진 땅에서 자기들의 위대하신 창조주/구원자를 영원토록 기쁨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가 사는 이 땅에서 그들을 예비하고 계신다(‘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그림 참조).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경 안에 재림의 약속들을 기록하셨고 이 약속들과 더불어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일시적 거주지에서의 삶에 필요한 지침도 다 기록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의 짧은 기간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약 성도들이 말세가 가까이 옴을 잘 알 수 있도록 많은 지침들/표적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표적들이 매일 매일 또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세계 여러 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흥분 속에 기다리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이래로 지난 2,000년 동안 각 세대마다 많은 믿는 자들이 그분의 재림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부주의한 성경 연구자들의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사례들도 있었으며 결국 그렇게 정해진 날들은 그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모두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마24:44; 25:13)라고 이미 명백하게 경고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실패 사례들에 대해 결코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가오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많은 표적들을 제시해 주며 사실 이러한 지침들은 우리의 이해와 인내를 위해 꼭 있어야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막13:29).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의심스러운 해석이나 ‘감정을 부추기는 일’(sensationalism)이나 ‘날짜 정하기’(date-setting)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고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큰 기쁨과 기대를 갖기만 하고 이러한 표적들을 무시하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난 수년간 재림의 표적들은 분명히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나는 나의 할머니께서 어떤 전도자가 다가와서 주의 재림의 날에 예상되는 표적들을 독재자 무솔리니의 출현과 연관시키면서 주님께서 1933년에 오실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정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분의 재림의 때가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는 확신에 차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기로 거의 결심했었다. 나는 그 후 지금까지 거의 50년 동안 내 사무실 벽에 “어쩌면 오늘”(Perhaps Today)이라고 적힌 액자를 걸어 놓고 날마다 이것을 바라보곤 했으며 50년 전에도 그렇게 명백하게 보였던 재림의 표적들이 지난 반 세기동안 더욱더 확실하게 증가하고 있음에 주목해 왔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곧 오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그분의 포도원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면서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눅19:13)고 명령하신 대로 묵묵히 순종하며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것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 또 그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요일2:28)는 말씀 또한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우리는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실’(히9:28) 그분을 매일 바라보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관이 약속되어 있음’(딤후4:8)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장(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표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 안에 은혜로이 제공해 주신 많은 표적들의 중요성을 연구하고 요약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이러한 것들에 대해 친숙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 친숙한 독자나 그렇지 못한 독자나 -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딛2:13)을 계속해서 사모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상쾌한 일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몇 가지 이유들이다.
세계에 편재해 있는 진화론적 인본주의 비록 성경 예언에 관한 서적들을 쓴 다른 저자들이 대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장 주요한 표적은 아마도 진화론적 인본주의 철학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추세일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의 한 형태 또는 다른 형태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범신론적(pantheistic) 세계 종교들뿐만 아니라 고대 이교도들의 모든 종교들에게 특징을 부여해 왔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단지 한 가지 새로운 것은 전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일신론적(monotheistic) 세계관을 가졌던 민족들도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는 점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에서 말세에는 이러한 상황이 심지어 기독교 국가라고 고백하는 나라들에서도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벧후3:3-4). 여기서 마지막 날들에 등장할 비웃는 자들이란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기 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임이 확실하다. 그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이거나 최소한 기독교회의 ‘하나님 아버지’와 ‘재림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기독교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자의로 거부해 왔고 지금 이 시간에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것들을 비웃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이유는 진화론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기 때문에 피조 세계는 과거를 통해 늘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계속되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창조란 하나님께서 창조의 6일 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창2:1-3) 이미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므로 “재림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서 믿는 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비웃고 있다. “처음에 초자연적인 창조가 없었으므로 말세에도 초자연적인 멸망이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기독교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말로 거부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키려 할 것인지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떤 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구호는 저 악명 높은 ‘제2차 인본주의 선언’(1973)에서 인본주의자들이 채택한 발언으로 이것은 실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의 발언이었다. 사도 베드로의 예언은 19세기 중반에 다윈(C. Darwin)의 진화론적 세계관이 대두되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현재 이러한 인본주의 세계관은 학교, 대학, 뉴스 미디어, 정치 체제, 오락 산업, 비즈니스 세계, 각종 직업, 법정 그리고 심지어는 소위 기독교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의 주요 교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본인의 저서 「하나님께 대한 긴 전쟁」(The Long War against God - Baker Book House, 1989)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로서 간략히 언급만 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정통파 유대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 공동체들과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정통파 모슬렘의 소수를 제외한 전 모슬렘 세계의 대부분도 이런 범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고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창조주와 그분의 구속(救贖) 약속의 관계에 대해서도 크게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2,000년 전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이 오늘날 명백히 성취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최근 몇 십 년 간 여러 나라에서 진화론에 대항하는 창조주의가 되살아나고 있으나 이것은 전 세계를 삼켜 버린 - 특히 그 지도자들 사이에 밀물처럼 퍼져나가는 - 진화론적 인본주의와 비교해 볼 때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과학적/역사적 증거들이 모두 창조론을 뒷받침하고 진화론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어 「과학적 창조론」과 「창조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미국창조과학회의 책들을 참고하기 바람 -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 사도 베드로가 예언했던 것처럼 그들은 두 개의 초자연적이며 세계적인 역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이 6일만에 특별히 창조된 것과 노아의 대홍수에 의해 전 세계가 급작스럽게 멸망한 것(벧후3:5-6)에 대한 성경의 증거와 자연계의 압도적인 증거들을 제멋대로 무시해 버린다. 모든 체계의 복잡한 구조 안에 있는 증거들과 이런 증거들을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커다란 지질학적 구조물과 그 안의 화석 묘지들도 노아의 대홍수를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만물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는 비웃는 자들은 이미 예언된 것처럼 자기 멋대로 이 모든 증거들을 무시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이 땅에 다시 오심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만연되어 있는 도덕의 붕괴 하나님께서 창조에 대해 명백히 이야기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거부할진대 그들이 그분의 명령들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만약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혹은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분께서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시공간 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셔서 인류의 역사에 간섭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표준들에 의거하여 우리의 행동을 제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세계관은 현재 전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도덕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 되어 왔다. 이것 또한 말세의 표적으로서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나니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1-7). 말세의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 철학을 묘사한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경고와 같이 사도 바울의 이 생생한 마지막 경고는 말세의 자기 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자기중심적 행동은 자기중심적 철학이 낳는 당연한 결과이다. 사도 베드로의 예언은 특별히 기독교 국가들 안에 있을 인본주의 철학의 대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사도 바울의 예언은 이 같은 기독교 국가들의 인본주의적 행동의 기승 즉 도덕의 붕괴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들 -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믿음을 시인하기는 하나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인본주의자들 - 의 특성 즉 자기 사랑, 교만, 신성 모독 등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바 있는 고대 이교도들의 특성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롬1:29-31). 이것이야말로 말세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들의 인본주의적 신념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까지도 받아들여 이교도 문화에 굴복 당할 것임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도덕 붕괴는 정말로 오늘날 소위 기독교 국가로 불리는 나라들 안에서 개탄할 정도로 급속도로 일어나고 일이며 이런 상황은 해가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 누구나 이러한 도덕 붕괴 특성들에 대한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위에 열거된 말세의 특징들에 대해 한 두 마디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1. 자기를 사랑하며 - 이것은 오늘날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현상 즉 ‘자기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과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 탐욕을 부리며 - 이것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층 즉 여피(yuppie) 세대와 그들의 물질욕을 말하는 것인데 현대에는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번영과 성공의 복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3. 자랑하며 교만하며 - 교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탄이 지어 온 죄인데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큰 교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 신성모독하며 - 이것은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도 평범한 일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신성의 ‘비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분별하게 문학, 영화, 음악, TV 등에서 계속해서 헛되이 일컬어지고 있다. 5.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 마약과 떠들썩한 음악과 부도덕이 유행하는 오늘날의 뉴에이지 사회에서 심지어는 기독교 가정에서조차도 순종하는 십대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6. 감사하지 아니하며 - 유복한 미국 기독교인들과 다른 부유한 나라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자기들이 누리는 복에 대해 하나님께 거의 감사하지 아니하며 이런 복과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7. 거룩하지 아니하며 - 거룩한 생활양식보다는 하나님 없이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국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8.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 어린이 학대와 보편적인 가족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낙태와 동성연애가 급증하고 있다. 9. 협정을 어기며 - 국가 간의 조약, 사람들 간의 계약, 일반적인 약속들이 아무 때나 깨지고 있으며 고소/고발 사례는 이제 천문학적 수치에 달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이 구절은 ‘화해하지 않으며’로 볼 수도 있다. 10. 거짓 고소하며 -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매일같이 읽고 들을 수 있는 악담 뿐 아니라 중상모략, 명예 훼손, 모욕, 허위 선전 등이 여기 속한다. 11. 절제하지 못하며 - 이 구절은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이혼율이 이교도 국가들의 이혼율보다 훨씬 더 높고 부도덕한 행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행하는 성행위, 부부 사이의 부정과 심지어는 동성연애 등의 통계 수치가 급등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또한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도 지적하고 있다. 12. 사나우며 - 그리스어에서 이 말은 물리적인 난폭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현대에 널리 파급된 죄와 폭력의 급증을 가리키며 특별히 태어나지도 않은 수 백만 명의 아이들을 낙태시키는 것도 포함한다. 13. 선한 자들을(것을) 멸시하며 - 한 때는 악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 예를 들어 동성연애, 도색문학, 포르노 영화 등 - 지금은 시민의 권리로 간주되고 있으며 반면에 전에는 좋은 도덕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기도하는 것 - 지금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4. 배신하며 - 이 단어는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적 배신행위에 적용될 뿐 아니라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이 자행되는 인간관계 및 종교적 믿음의 배신에도 적용된다. 15. 고집이 세며 -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권리에 대한 부주의와 성급함을 내포하며 결과에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때마다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6. 높은 마음을 품으며 - 이것은 다른 곳에서 ‘우쭐대며’로 번역되기도 했으며 개인적인 자만과 지식인들 사이에 서 찾아볼 수 있는 우월감을 말해 주고 있다. 17.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하며 - 유럽, 호주,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통계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기독교 국가라 하는 미국에서만 보더라도 일요일에 쾌락을 위한 소풍이나 여행을 가는 사람들에 비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수는 훨씬 적다. 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 비록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국가들의 경우에도 학교나 통신매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창조와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을 부인해 왔다. 19.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며 - 이것은 본질상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진리의 존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진리를 위한 탐색’은 쉬지 않고 계속하는 현대 교육에 대한 정의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의 모든 특성들이 짝을 이루며 잘 들어맞았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제 이러한 특성들이 이교도 국가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국가들을 특징짓는 잣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이교도 국가들의 인본주의 문화는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롬1:25) 진화론적 철학에 기초를 두었는데 오늘날에는 심지어 기독교 국가에서도 이런 문화가 득세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생긴 ‘위험한 시기’ 즉 마지막 날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표적이 된다.
사회적 다윈주의, 노예화와 전쟁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붕괴 외에도 임박한 멸망에 대한 사회 정치적 및 경제 산업적인 표적들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마지막 서신들을 살펴보았으며 이제 사도 야고보의 서신을 살펴보려 한다. 자 이제, 너희 부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너희의 비참한 일들로 인하여 슬피 울며 울부짖으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부식되었으니 그것들의 녹이 너희를 대적하는 증인이 되고 불과 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해 재물을 함께 모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곡식을 거둔 품꾼들의 품삯 곧 너희가 사기 쳐서 숨겨 둔 품삯이 소리를 지르며 곡식을 거둔 자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약5:1-8). 위의 예언은 마지막 때의 사회적 불안 상태에 대한 것이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 주인과 노예 간의 끊임없는 갈등이 마지막 날 즉 마침내 고생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할 ‘살육하는 날’이 되면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적 표적은 ‘산업혁명’에서부터 성취되기 시작했다. 비록 산업혁명이 대단한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부자 소유주의 공장에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층의 큰 불행도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미국의 노예농장보다 그 폐해가 더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남북 전쟁뿐만 아니라 피의 프랑스 혁명 그리고 그 후의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다른 나라들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런 ‘살육하는 날’이 노동자층의 운명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긴 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무자비한 집권자들과 귀족층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이런 혁명들이 부르주아 계급(부유층)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저소득층) 혁명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 유럽과 미국의 국제적 은행가들과 상인들이 이런 혁명들을 부추기고 자금을 조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전쟁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살육하는 날에 자기들의 마음을 살찌웠다. 전쟁과 노예제도, 노동자 착취, 자본주의에 기초한 제국주의와 이와 비슷한 예들은 진화론 특히 산업혁명 이래로 자연 선택,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적자생존 같은 진부한 표현들에 의해 촉진된 진화론의 한 형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이를 정당화시켜 왔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 체제는 사회적 다윈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은 특별히 영국의 경우 스펜서, 맬더스, 다윈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독일의 경우 니체, 헤겔, 비스마르크, ‘독일 황제 빌’과 결국 히틀러에 의해서 발전되었으며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록펠러, 카네기, 그리고 또 다른 ‘약탈자 귀족들’을 통해 강성해졌다. 이들은 다 열렬한 진화론자들이었는데 비록 이들이 자기들의 방법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는 대중들이 크게 착취당하는 고난을 가져왔다. 불간섭 자본주의, 공산주의, 히틀러의 나치주의, 인종차별,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의 진화론적 배경은 전에 언급한 책인 「하나님께 대한 긴 전쟁」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위의 성경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구원할 어떤 혁명이나 법령을 찾지 말고 이러한 표적들이 예고하는 ‘주의 재림’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가난한 대중들의 운명은 더욱 더 비참해지고 있으며 - 최근에 공산당의 착취로부터 도망 온 사람들과 집 없는 사람들과 미국의 빈민가 인구의 증가를 포함해서 이디오피아, 인도, 수단과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굶어 죽는 인구를 생각해 보라 - 사실 마지막 날의 이 표적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전보다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희망이 바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배교, 이성주의와 신비주의 우리는 사도 베드로, 바울, 야고보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 즉 마지막 때의 중요한 예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예언들은 한결같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세의 종교적 배교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며 공통적으로는 말세에 전 세계에 널리 만연될 인본주의 철학, 도덕, 그리고 경제적 타락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편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들을 기록한 두 저자들은 직접적으로 종교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마지막 날’에 대해 언급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니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함을 너희가 들은 것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가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한편 사도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들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마지막 때에는 자기들의 경건치 아니한 정욕대로 걷는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알려 주었나니니 이들은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유17-19).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한 명의 마지막 ‘적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으며 사도 유다는 거듭나지 못한 채 조롱만을 일삼는 이단 종파주의자들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두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말세에 이러한 자들이 신앙인으로 자처하면서 교회에 참석하여 가능하면 교회 사역을 파괴하고 훼방하며 사탄이 원하는 일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 ‘마지막 때’(the last time)로 번역된 구절은 ‘마지막 시간’(a last hour)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많은 지역 교회가 대개 거듭나지 못한 지도자들의 활동과 가르침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그것은 그 교회와 교회 사역에 대한 마지막 시간 즉 위험한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이며 이때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다. 적그리스도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a false christ)임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처녀 탄생과 부활을 강조하는 그분의 말씀들을 삭제해 버리거나 설명에서 제외해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화시키려는 자유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 예수와 신 그리스도를 구별함으로써 - 대개는 ‘우주의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나 그와 비슷한 같은 것들을 기록된 성경 말씀에 첨부시킴으로써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려 하는 광신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일 것이다. 전자는 사람들을 이성주의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신론에 이르도록 하며, 후자는 신비종교와 이단 무속 신앙 및 다신론에 이르도록 한다. 이 두 종류의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배교, 종파 분립 개념들을 진화론의 어떤 형태 - 어떤 경우에는 진화론적 자연주의에 또 다른 경우에는 진화론적 다신론 - 에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성경의 하나님 곧 진정한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런 적그리스도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전보다 더욱 심하고 사실 이들은 사도 유다의 서신에서 ‘당을 짓는 것으로 표현된 것같이’ 실제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분쟁을 일으켜 왔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마지막 서신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계22:18-19). 현대에는 새로운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는 새로운 이단 종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실제적으로 모든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종파들은 - 사실 이것들은 그리스도나 성경의 진리에 관한 차이로부터 생긴 것이라기보다 성경 해석의 차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성과 인성을 그리고 성경의 오류 없는 권위를 파괴시키려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큰 소동과 분열의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일들을 마지막 때의 표적으로 본다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표적들이 나타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사실은 확실히 이런 예언의 말씀들이 이 시대에 성취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날의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다른 성경 구절이 많이 있으며 그 중 몇 가지는 추후에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된 성경 말씀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점을 알리기에 족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 구약 성경은 많은 예언서를 포함하고 있으나 신약 성경의 계시록을 제외하고 다니엘서만큼 말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책은 없다. 다니엘에게 이 모든 계시를 전해 준 권능의 천사는 이 책의 예언적 요소들의 대부분을 보여 준 후에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에서 그에게 이 모든 계시가 성취될 때를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표적을 줌으로써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러나, 오 다니엘아, 너는 끝이 임하는 때까지 그 말씀들을 닫아 두고 그 책을 봉인하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단12:4).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의 의미가 ‘마지막 때에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성경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연구해서 마침내 다니엘의 난해한 예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리저리 달음질하고’(running to and fro)라는 표현을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것이 ‘이러한 예언서의 해석이 증가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합당하다 볼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이 예언서의 주요 의미일 리가 없다. 대신에 우리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달음질(running) - 단순히 여행(traveling)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경주함을 뜻함 - 하리라고 평이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시대에 여행의 속도가 증가하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면 예언될 수 없는 심오한 진리이다. 다니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뉴턴의 시대에도 사람이 가장 빨리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은 재빠른 말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그를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여겨질 뉴턴은 이 구절에 기초해서 사람들이 언젠가는 한 시간에 80킬로미터를 달리며 심지어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빠르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에 프랑스의 적그리스도 신봉자인 볼테르는 뉴턴의 기독교 정신이 그의 이성에 영향을 미쳐 그가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뉴턴이 소개한 과학의 시대 안에서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증기기관,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지금은 놀라운 속도로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의 발명을 보아 왔다. 다니엘의 이 예언은 지금의 ‘마지막 때’에 더욱 더 명백히 성취되고 있다. 그의 예언의 나머지 반 즉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과학이 증가하리라’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 즉 ‘지식’과 ‘과학’은 그 의미와 어원에 있어서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라디오, TV, 거의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전기 장치, 고속도로, 핵무기, 컴퓨터, 자동화 장치, 전파 탐지기, 플라스틱, 마이크로칩, 로봇 등 지난 30년 동안에 이루어진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세계의 모든 과학자를 한 강당에 소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수 백 종류의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수백만의 과학자들이 있다. 지금의 과학시대의 기초를 연 사람들 즉 뉴턴, 케플러, 보일, 파스퇴르, 페러데이, 주울, 갈릴레오, 오일러, 맥스웰 등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창조론을 믿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천문학, 생물학, 인류학 혹은 다른 분야에서 진화론자들이 이루어 놓은 연구는 인간의 수명, 생산과 생활수준을 진보하게 한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적 발명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 거짓 과학을 신봉하려는 과학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마지막 때의 한 표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기록한 예언서 기자들의 예언적 통찰력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성경 기자들의 예언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 (1)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이르러 교통/통신의 급속한 발전과 과학의 대진보가 있을 것임을 말했다. (2)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진화론적 인본주의인 자연주의 철학이 세계를 지배할 것을 강조했다. (3) 바울은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이 인본주의 철학으로 팽배하고 이런 인본주의의 산물로서 극심한 영적, 도덕적 타락이 있을 것임을 예언했다. (4) 야고보는 마지막 날에 큰 전쟁과 혁명을 초래할 산업 경제적 갈등을 예언했다. (5) 요한과 야고보는 모두 마지막 날에 진정한 기독교를 흐리게 할 무신론, 다신론과 더불어 기독교 내에서의 배교를 강조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끝 부분에 기록된 예언 즉 ‘올리브 산 설교’(Olivet discourse)로 잘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살펴보자. 그분께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행하신 개인적인 가르침을 제외하면 이 ‘올리브 산 설교’는 그분의 마지막 공식 메시지였는데 여기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한 많은 표적들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큰 표적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마24: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여러 차례 자신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의 약속된 메시아로서 곧 로마의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그분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라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부분들이 중복되고 있기는 하나 각 복음서 기자는 다른 두 복음서에는 없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세 답변을 동시에 연구해야만 한다. (1)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가? (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표적은 무엇인가? (3) 세상의 끝이 언제 이를 것인가? 첫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들이 사실은 표적이 아니며 인류 역사를 통해 늘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 또 너희가 전쟁과 난리에 대하여 들을 때에 무서워하지 말라. 이런 일들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하되 곧 끝이 오지는 아니하느니라(눅21:8-9). 정말로 주님의 승천 이후로 수 세기 동안 많은 동요와 전쟁의 소문과 전쟁과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래서 이 특별한 예언은 명백히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나머지 예언들도 당연히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더욱 더 확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특별한 질문에 계속해서 답을 주시기 전에 잠시 이를 중단하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으며 또 하늘로부터 두려운 광경과 큰 표적들이 있으리라(눅21:10-11).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에 대한 표적은 제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여러 면을 동시에 가질 것이다. 그 첫 번째 구성 요소는 단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닌 여러 나라들 사이의 큰 전쟁일 것이다. 적어도 두 민족과 두 나라가 싸울 것이며 실제로 이런 표현은 많은 나라 특히 세계의 주요 나라들이 참전하는 전쟁을 일컫는 관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늘의 두려운 징조 뿐 아니라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을 것이다. 이 복합 표적이야말로 분명히 제자들이 요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서는 이 시기에 하늘의 두려운 징조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누가복음에서의 이 말은 마지막 날의 표적 중 마지막 단계에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신 이래로 이 세상에는 지진, 기근, 역병 및 여러 종류의 재난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민족들 간의 첫 번째 큰 전쟁은 1914-1918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역사상 아마도 가장 무서운 역병이었던 1918년의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이어졌고 또 중국 및 러시아와 다른 나라에서의 심각한 기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의 대지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정말 그분의 재림에 대한 표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이것이 단지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산모가 느끼는 ‘산고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적이 완성되기 전에는 간간이 육체적 고통이 수없이 많이 있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출산의 첫 진통일 뿐이었으며 이것은 곧 다른 것들로 이어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략과 1939년 히틀러의 전격작전이 있었고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모든 나라가 미래의 전쟁을 막기를 희망하면서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을 설립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 역시 끝은 아니었다. 곧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절정을 이룬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에는 많은 나라들이 참전했다. 최근에 (1990/1991) 전 세계는 이라크에 대항한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의 전쟁을 실제로 목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중동에는 계속해서 소동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세계 모든 민족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다민족 전쟁과 함께 첫 진통 이래로 지난 70년 동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 차례의 국지전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과 기근, 지진 등이 있을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지구 종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은 확실하다. ‘하늘로부터의 두려운 광경과 큰 표적들’은 이 시기에 있을 UFO 현상이나 하늘로 쏘아 올린 다양한 우주 비행선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세상 끝 날에 대한’ 첫 번째 큰 표적을 주신 후에 가까운 사도 시대에 있을 일반적 성격의 예언을 주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전에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그들이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너희를 핍박하고 회당과 감옥에 넘겨주며 왕들과 치리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눅21:12) 이 핍박의 최초의 물결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대인들의 분산이 이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 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 예수님의 이 예언 부분은 제3장에서 다시 논의 될 것이다. 이것은 로마 장군으로 후에 황제가 된 타이투스의 성전 파괴로 주후(主後) 70년에 성취되었으며 그 뒤 주후 135년에 헤드리안 군대의 예루살렘 파괴가 있었고 그 뒤 지난 1,800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로 유대인들을 떠돌게 한 강제 추방이 있었다. ‘올리브 산 설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한 예언 메시지에는 다른 표적들이 들어 있으나 이것들은 뒤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