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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패션오브크라이스트조회수 : 2853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8일 16시 8분 17초
  • 패션오브크라이스트

    ● 차한

    1. 프롤로그(Prologue)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개봉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교계의 엄청난 호응과 매스컴의 지대한 관심 속에 (4월 2일~11일) 현재 전국 극장가에서 흥행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12시간을 생생하게 그린 이 영화는 독실한 전통보수파 카톨릭 신자 멜 깁슨(Mel Gibson)에 의해 제작, 감독되었는데 그는 할리우드에서 이 영화에 대한 투자를 받는 데 실패하자 사재 약 3,000만 달러(약 350억 원)를 쏟아부어 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반(反)유대정서를 부추길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투자자를 확보할 수 없었겠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이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 등에 의해 ‘유혈이 낭자한 난도질 무비’라고 폄하되는 등 논쟁거리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많은 홍보효과도 얻을 수 있었기에 미국에서 개봉된 지 수주가 지난 지금도 박스오피스 1위라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무튼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리면서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멜 깁슨 필름(a Mel Gibson film)이 선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특히 국내외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종교영화로까지 평가되면서 평소 문화생활이란 것을 모르고 살던 크리스천들도 멜 깁슨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열광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진정 ‘그리스도의 수난’(행1:3)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다루고 있는 영화인지 제한된 지면을 통해서 진단해보고 아울러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이 시대의 표적을 통해 우리의 영적 좌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마16:2,3).

    2. 멜 깁슨(Mel Gibson, 1956~)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멜 깁슨의 영화’(a Mel Gibson film)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떠한 철학과 세계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마12:34,35).

    멜 깁슨은 매드 맥스(Mad Max), 랜섬(Ransom), 러셀 웨폰(Lethal Weapon), 패트리어트(Patriot),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 등의 영화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뉴욕의 보수적인 카톨릭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14살 때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주하였고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호주에서 매드 맥스에 출연함으로써 스타덤에 오른 후 다시 미국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배우와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수퍼스타이다.

    깁슨은 17살부터 약 18년 동안 방황하며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다시 카톨릭 신앙(traditionalist Catholic)을 회복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여 년간 제작을 시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라틴어와 아람어로만 영화를 찍고 영어 자막도 넣지 않을 것이라는 깁슨의 고집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전통적이고 신비적인 라틴어 미사가 행해지는 경우에만 미사에 참여하는 (그리고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에큐메니즘(ecumenism)을 비롯한 제2바티칸공의회에서 새롭게 바뀐 여러 결정사항들을 거부하는) 근본주의 천주교인으로서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를 카톨릭 신앙에 봉헌(dedication)하기 위해 제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한 인터뷰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그의 신앙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Peter Boyer, "The Jesus War" The New Yorker, Sept. 15. 2003).

    3. 앤 캐서린 에머리히(Anne Catherine Emmerich, 1774~1824)

    이 영화를 사실에 가능한 한 가깝게 만들기 위해 깁슨은 오랜 시간 동안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났다고 하였지만 그가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그리고 영화의 시나리오로 사용한) 책은 바로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쓴 ‘우리 주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집사재> 간, ‘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TAN books and publishers> 간)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신비주의 작가인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쓴 이 책이 우연히 자신의 집 선반 위에서 떨어지자 깁슨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이 에머리히의 책을 영화화하기 위해 십여 년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이 책은 에머리히가 본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환영(visions)을 기록한 것인데 한 네티즌이 언급한 대로 ‘신앙 이상의 것을 교화하고 고무시키기 위해 대단히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매우 놀랍고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한 내용을 담고 있고, 또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나와 있는’ 전형적인 카톨릭 교리를 담고 있는 비성경적인 신비서(神秘書)이다.

    에머리히는 독일 북부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침모 겸 하녀로 일하다가 28살에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녀가 된 후 건강 악화로 인해 병상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녀의 몸에는 소위 ‘성흔(聖痕)’(예수님의 손과 옆구리 쪽의 상처)이 생겼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환영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머리히가 죽고 난 뒤 그녀가 보았다는 환영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수난’(1833년), ‘성모 마리아의 삶’(1852년), ‘그리스도의 삶’(1858~1880년) 등 세 권의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런데 에머리히의 환영(visions)에 따르면 기독교인들(Protestants)도 연옥에 가게 되지만 아무도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천주교인들보다 더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4. 사순절(四旬節, Lent)

    카톨릭 교회로부터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 칭호를 받은 에머리히의 책을 근간으로 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인 깁슨이 제작 및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 개봉일을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맞춘 것은 충분히 예견될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회에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야(Easter Eve)까지의 40일 간인데 깁슨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하여 카톨릭 신앙에 봉헌코자 하였던 이 영화를 탄식과 참회를 행함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사순절 시작과 더불어 개봉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후 6세기경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이 사순절 절기는 (물론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종교개혁 이후에도 기독교 내에 유입되어서 오늘날도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되새기는 기간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 사순절은 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랄프 우드로우(Ralph Woodrow)가 쓴 ‘바빌론 신비 종교’(Babylon Mystery Religion)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 전설에 따르면 태양신인 담무스(Tammuz, 겔8:14)는 살해당한 후에 지하세계로 내려갔으나 그의 어머니 ‘이슈타르’(Ishtar, Easter, 행12:4)의 통곡으로 인해 신비하게 봄에 살아났다고 한다. 이슈타르의 고통으로 인한 담무스의 부활은 매년마다 극적으로 재현되었는데 이것은 농작물의 다산과 사람들의 다산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매년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이슈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신(god)의 귀환을 축하했는데 이것은 그 여신(goddess Ishtar, Easter)으로부터 새로이 호의와 은덕을 얻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식물이 싹을 내며 나올 때 고대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자’가 지하세계로부터 나와서 겨울을 끝내고 봄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믿었던 사실은 성경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언자 에스겔이 “거기에 여자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더라.”(겔8:14)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도 매년 거행되는 이교도들의 봄 축제 의식과 교리들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히슬롭(Alexander Hislop)은 이 40일(四旬日)에 대해 언급하면서 - 전설에 따르면 담무스는 40세가 되었을 때에 멧돼지에 의해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40일은 담무스가 땅에서 살았던 40년을 나타낸다. - 이 기간이 ‘담무스를 위해 우는 날’로 정해졌다고 지적한다. 즉 이교도들은 이 사순절(四旬節)을 태양신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중 대축제에 없어서는 안 될 예비 기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이교의식이 바빌론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카톨릭에서 발견되고 또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개봉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강조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도 타당한 일이라 하겠다.

    5. 성경에 첨가함(adding to the Bible)

    사순절과 같은 절기뿐 아니라 앞서 언급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대본(script-x)이 된 앤 캐서린 에머리히의 책을 포함한 수많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언급하면서도 결코 성경에 최종권위를 두지 않는 데 있다.

    이는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관한 100가지 질문’이란 부제가 붙은 책 ‘그리스도의 수난’(톰 알렌 외 지음, <다른 우리> 간; a guide to the Passion, by Tom Allen, etc; 이하 ‘100가지 질문’이라 약함) 중 제3부 ‘계속되는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로써 잘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략한 글들(신약성경)은 사도들이 그분과 함께 한 삼 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전달할 의도에서 쓰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진실들 곧 입으로 전해진 말, 사례, 산 체험으로 전달된 많은 진실들은 ‘거룩한 전통’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속에 성경에 없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보다 그들이 인정하는 ‘전통’에 더 권위를 두고 있는 사실로써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비성경적인 내용들 곧 성경에 첨가된 것들이 단지 성경에 반(反)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메시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의 눈을 까마귀가 쪼는 장면은 정말 관람객들에게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어찌 아무런 영향이 없겠는가. 이 장면뿐 아니라 모든 첨가된 내용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 잘못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22:18, 이하 흠정역)

    6. 성경에 반(反)함(contrary to the Bible)

    그러면 이제 성경과 완전히 상반되는 영화의 장면들 중 일부를 열거해 보도록 하자.

    먼저 깁슨의 영화는 아람어와 라틴어로 구성이 되었지만 신약성경은 다수사본이건 소수사본이건 다 그리스어로 기록이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막달라 마리아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으로 그려졌지만 성경에 명시된 증거는 없는 내용이다(요7:53-8:11).

    사탄은 남자 목소리를 하는 여자로 묘사되지만 성경에서 사탄을 포함한 영계의 모든 피조물들의 성(性)은 남성이다. 그리고 사탄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유혹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것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뿐이었다(마4:1-11; 눅4:1-13). 사탄은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때 수없이 나타나지만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대어(reclining, leaning) 있지 않고 다 앉아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13:23).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성경은 그가 예수님과 떨어져 식사했음을 기술하고 있다(요13:24,25).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목을 매고 죽는 것은 소위 ‘마귀 들린’ 어린이들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다(마27:3-5).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에 여러 명의 제자들이 싸우는 장면이 있지만 성경은 오직 베드로만을 언급하고 있다(요18:10).

    로마 군인들은 매우 잔인하고 고통 주는 것을 즐기는 자들로 설정되어 있지만 성경에는 (백부장을 포함하여) 긍휼이 많은 로마 군인들도 소개가 되고 있다(마8:5-8; 27:54; 행21:32; 23:10,27; 27:43; 28:16).

    예수님이 시몬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성경은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27:31,32; 눅23:2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심한 싸움과 소요가 일어났지만 성경은 이와 관련된 어떠한 소동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슬피 울고 애통하며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짧지 않은 위로의 말씀도 하실 수 있을 정도였다(눅23:27-31).

    지진이 일어나 성전의 지성소 마루가 갈라지며 성전이 손상되는 장면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지진시에 성전이 손상되지 않았으며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던 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마27:50,51; 요19:30).

    예수님의 몸이 로마 군인들과 두 마리아 및 요한 등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졌지만 성경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등이 예수님의 몸을 가져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눅24-46-53; 요19:38-40).

    부활 장면에서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시기 전에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지며 태양 빛이 비췄지만 성경은 돌이 굴려진 것은 제자들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날이 밝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이전에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마28:1-6).

    7.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을 연기한 배우는 짐 카비젤(James Caviezel)이다. 대사가 절제된 이 영화에서 그는 거의 마임에 가까운 연기로 예수님의 고통과 번민을 매우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아니라 ‘예수 역’이었지만 그도 가혹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특수분장에 매일 7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로마병사 역을 맡은 배우의 잘못으로 실제 갈고리 채찍을 맞기도 했다. 심지어 영화를 촬영하다 벼락을 맞고,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어깨가 탈골되기도 했다.

    매일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드릴 정도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카비젤은 영화를 찍을 당시 극중 예수님의 나이인 33살이었다고 하는데 이 카비젤이 열연한 예수님과 관련되어서도 반(反)성경적인 내용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카비젤에 의해 (그리고 에머리히에 의해) 키가 크고 핸섬한 코카서스인(전형적인 백인, 야벳의 후손)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당시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이뤄지기 전이었고 기껏해야 다른 셈족이나 함족의 피가 간혹 섞였을 정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코카서스인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도 분명히 예수님이 셈의 후손인 유대인으로서 인간적으로 볼 때 할리우드 스타 카비젤과 같은 미남이 아니라 오히려 볼품이 없는 분으로 증언하고 있다(마1장; 사53:2).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하)

    예수님은 여자와 같은 긴 머리를 하였는데 이는 주님 자신이 제정하신 남자의 표준(고전11장)과 어긋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나사르 사람’(Nazarite, 삿13:5)이 아니라 단지 나사렛 출신인 ‘나사렛 사람’(Nazareth, 마2:23; … 행26:9)이셨을 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내가 그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영화에서는 아무도 성경에 나온 대로 뒤로 물러가 쓰러지지 않았다(요18:6).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발로 밟으셨지만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가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는다(히2:14).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여섯 번이나 넘어지셨으며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던 시몬에 의해 계속 격려를 받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유약함을 증언하고 있지 않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중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50여 년이 지나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 언급이 되고 있다(계:21:5).

    8. 고난(Sufferings)

    성경의 사복음서는 결코 독자의 연령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17세 이상 관람가인 R등급으로 제한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 불신을 떠나 이 영화의 잔인성에 대한 혹평이 많이 나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포커스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에 맞춰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몇 대인지는 모르나 오직 한 번만 채찍질 당하셨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예수님은 채찍으로 각각 39대를 두 번에 걸쳐서 맞고 난 후 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도 계속 채찍질 당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27:26; 막15:15; 요19:1).

    깁슨은 관람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해 당한 고난을 느낄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정말 냉정하게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만약 예수님께서 영화 속에서와 같은 매질(trauma)을 당하셨다면 아마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고 그전에 돌아가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히4:15).

    어찌되었든 이 영화의 포커스와 달리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은 그분의 ‘육체적’ 고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화해헌물’(propitiation of God's wrath) 곧 ‘우리를 위한 죄’(sin for us) 자체가 되신 사실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요일4:10, 고후5:21, 롬5:9,10).

    사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적 고난은 그분에게 전가된 온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 이상의 육체적 고난을 당했지만 그들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에 견줄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만한 ‘영적인’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의(義)를 이루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이란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로마 카톨릭 신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9. 미사(Mass)

    천주교인들이 사용하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이 고통 중에 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로마 카톨릭 교리로 볼 때 우리의 의(義)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수난은 아직 ‘다 이루어진 것’(요19:30)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현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뿐 아니라 모든 천주교 의식과 기도와 성물들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깁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과 미사(Mass)의 희생이 동일한 것이라는 카톨릭 교리를 철저히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하나의 ‘미사’로 봉헌한 것인데 우리는 ‘100가지 질문’에서 이를 확인해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몸이신 빵과 그분의 피의 잔인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습니다.”(‘100가지 질문’의 머리말 중)

    “십자가형 중 최후의 만찬 회상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뭔가요? … 그분은 유월절 빵이 그분의 몸이며 포도주가 그분의 피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이 새로운 제사를 실행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만찬이나 카톨릭의 영성체를 통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 모두를 위해 단 한 번 십자가 위에서 그분 몸을 희생하심은 제대 위의 희생-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로 변하는-으로 이 땅 위에 명백하게 재현됩니다. (필자 주: 이것이 바로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 유월절 음식을 그 새로운 형식을 통해 먹고 마심은 생명을 여러분 안에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100가지 질문’의 83번째 질문과 답 중)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하여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음이라.”(히10:10-14)

    10. 마리아 숭배(Mariolatry)

    깁슨은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대속주와 중보자가 됨을 믿는다’고 하였다(David Neff, "Mel, Mary, and Mothers," Christianity Today online, Feb. 20, 2004).

    그리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근간이 된 에머리히 책 ‘우리 주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의 헌사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며, 하늘과 땅의 여왕이시며, ‘매괴’(the Most Holy Rosary)의 여인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시며, 인류의 피난처이신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하신 심장에 이 책을 바칩니다.”

    또한 ‘100가지 질문’의 머리말에서 톰 알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모범이신 마리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화 안에서 그녀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시종일관 마리아 숭배를 부추기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100가지 질문’에서 마리아 숭배와 관련된 내용만 발췌하여 요약해보도록 하겠다.

    “왜 감독은 베드로가 마리아의 발치에 쓰러져 ‘어머니! 저는 그분을 부정했나이다.’라고 울부짖도록 한 거죠? 이 장면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경하였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간구하면 받아들여진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을 묘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46번째 질문과 답)

    “마리아가 어떤 곳으로 들어가서 돌바닥 위에 엎드립니다. 그 돌바닥 밑에 방이 있고, 이 돌바닥의 아래 부분은 예수님이 쇠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는 천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의 더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요? 감독이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사이에 영원한 연결을 묘사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예언의 완결자이며 구세주인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자신을 포기한 마리아는 영원히 결합되어 있습니다.”(47번째 질문과 답)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마리아가 능동적인 참여자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확대해석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48번째 질문과 답)

    “예수님이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감독은 악마와 마리아가 서로 반대편에서 그분을 따라 걷는 장면을 교차 편집합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눈이 놀랍도록 조용하게 마주치는데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 갈보리 언덕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장면은 마리아와 악마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마리아를 혐오합니다. … 하나님 앞의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그녀의 완전한 신앙심 때문입니다.”(68번째 질문과 답)

    “영화 후반부에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그녀의 죽은 아들을 안은 채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은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이 장면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나요? 혹자는 이 장면이 아름다움과 신랄함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필적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처 받았음에도 자애로운 마리아의 눈길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었고 그분의 죽음이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음을 절실히 깨닫고 느끼게 해줍니다.”(98번째 질문과 답)

    11. 마리아와 예수(Maria & Jesus)

    1)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장면이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넘어졌을 때 마리아가 껴안아주던 것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마리아의 품 안에 있는 존재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묘사가 되고 있다.

    또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를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면 곧 여성인 악마(사탄)의 품에 안긴 어린 마귀의 등장은 더욱 더 마리아와 ‘아들’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실 때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가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요, 내 영에서 나온 자”(에머리히의 책에는 "the flesh of her flesh, the bone of her bone, the heart of her heart"로 기술되어 있음)라고 한 독백은 영화 속 여러 장면들에서 나타나는 모자관계를 결론지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너무나도 반(反)성경적이며 특별한 ‘마리아와 예수’의 모자관계는 ‘마돈나와 아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게 된다.

    천주교 국가로 알려진 나라에서는 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 이전의 모든 예술 특히 건축, 음악, 미술의 중심은 이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로 가득 차 있다. 천주교도들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잘못 알고 있는 이 ‘마돈나와 아기’의 뿌리는 옛 바빌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 어미(MOTHER, 계 17:5)라는 단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로마라는 종교는 늘 ‘거룩한 어머니’(어미, 聖母, Holy Mother) 교회라고 불렀다. 천주교의 수많은 노트르담(Notre Dame/Our Lady/Maria/Semiramis) 사원(寺院, 절)들은 ‘아베 마리아’(Ave Maria)로 변신한 이 바빌론의 어미를 위해 건축되고 헌당되었다. 바빌론 종교는 구약에서는 사탄이 니므롯을 통해 여호와(LORD) 신앙을 대적하여 일어난 바빌론-“바빌론은 주의 손에 있어 온 땅을 취하게 한 금잔이라. 민족들이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미쳤도다.”(렘51:7)-이며, 신약에서는 ‘신비의 큰 바빌론’(계17:5)으로 나타난다.

    2) 세미라미스와 니므롯/담무스(Semiramis & Nimrod/Tammuz)

    니므롯(Nimrod, 창10:8,9)은 구스(Cush, 창10:6-8)의 아들이었는데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구영재 저) 등에 의하면 니므롯의 어미 세미라미스(Semiramis)는 당대의 절세미인이면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 니므롯이 바빌론의 군주가 되자(창10:8-14), 그와 결혼하여 바빌론 군주의 어미이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다가 니므롯이 셈(Shem, 창10:1,21)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해짐을 느낀 그녀는 재빨리 자기가 낳은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Tammuz, ‘생명의 아들’, 겔8:14)를 죽은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으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씨(seed,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담무스를 태양신(sun-god)으로 신격화하여 ‘바알’(Baal, 주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신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알티’(Baalti, 여주인) 혹은 ‘레아’(Rhea, 위대한 ‘어머니’ 여신)라 하여 ‘월신’(moon-god) 곧 ‘하늘의 왕후’(queen of heaven, 렘7:18; 44:17-19,25)로 숭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제2장 ‘사순절’에서 언급되었지만) 그녀는 숭배자들이 죽은 니므롯(담무스)을 위해 애곡하는 것을 바빌론 비밀종교의 중요한 예배의식으로 정해 놓았다(겔8:14).

    이러한 사실은 욥기 31장 26-28절에서 이미 족장 시대인 욥의 시대에 태양신과 월신 숭배가 성행했었던 기록으로써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세미라미스는 ‘이시스’(Isis)로, 니므롯은 아기 ‘호루스’(Horus)이자 어른이 된 ‘오시리스’(Osiris)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바빌론의 왕후인 세미라미스는 각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Ashtaroth, 삿2:13),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공인이라는 사탄의 음모가 있었을 때 이 ‘세미라미스와 니므롯(담무스)’ 곧 ‘마돈나와 아기’는 로마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재포장이 되었다. 따라서 앞 장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천주교의 예수란 거의 언제나 이 어미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D. 431년에 사탄은 에베소공회를 통해 피조물에 불과한 마리아에게 창조주의 어미가 되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신성모독의 칭호를 씌웠다. 아울러 오리겐 이후로 떼오토코스는 헬라의 교부들에 의해 사용되어 ‘처녀’(동정녀, the Virgin)로 불려졌다.

    즉 ‘위대한 여신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에 대한 에베소 사람들의 열정과 이들에 대한 바울의 권유가 있은 지 400년이 지난 후, 에베소 공회는 마리아로 둔갑한 이 음녀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가증한 칭호를 선사하게 되었고 이후 이 칭호는 카톨릭의 핵심 교리로 자리를 잡아 2004년 최고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그 중심 메시지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12. 에필로그(Epilogue)

    세실 B 드밀 감독의 흑백무성영화 ‘왕중왕’(1927년작), 니컬러스 레이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왕중왕’(1961년작),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2년작),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위대한 생애’(1965년작), 노먼 주이슨 감독의 뮤지컬 영화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년작),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사렛 예수’(1977년작), ‘지저스 필름 프로젝트’의 ‘예수’(1979년작),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년작), 알렉산드로 달라트리 감독의 ‘가든 오브 에덴’(1999년작) 등 지금까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이 기존의 모든 종교영화들의 아성을 일순간 무너뜨리면서 전세계인들을 열광시키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지저스 필름 프로젝트’에 의해 수백 개의 언어로 더빙되어 수많은 천주교인들도 구원받게 한 ‘예수’(Jesus) 영화에서와 달리 (이미 살펴본 대로) 완벽한 ‘천주교 복음’(Catholic Gospel) 곧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이다(갈1:6-8).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욱 왜곡되고 에큐메니즘은 더욱 증대되는 마지막(digital) 수난의 시대를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단2:31-35,43-4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 계3:22)!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그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살후2:3)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another gospel)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는 어떤 자들이 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 하는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any other gospel)을 선포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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