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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종교와 복음-천주교와 기독교조회수 : 2402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8일 16시 12분 44초
  • 종교와 복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죄 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을 찾으면서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에”(히9:26), “마지막 날들에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2). 죄들의 용서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돋는 해가 되어 위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셨다”(눅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고 말씀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고 말씀하신다.

    복음(Gospel)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 중의 하나인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 천사들의 대 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눅2:10). 천사가 “큰 슬픔의 종교를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겼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나니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언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책망하셨다.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선언 즉 “카톨릭 교도는 기독교인보다 더 종교적이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 천주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을 때 사실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없는 ‘복음’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가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잘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종교(Religion)란 단어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님도 종교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해 단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이다(행26:5; 갈1:13,14; 약1:26,27). 반면에 신구약 성경에 120여 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즉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고 말씀한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 상태에까지 끌고 가서 결국 복종하게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을 종교라는 감옥에 처넣고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정신을 말살하여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후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하면서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가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열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실 수 없는 분이다. 종교는 전통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 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사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이 결단성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더 편리하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들 때까지 변형된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라는 우상의 고향이다.

    기독교인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되리라.”(마5:18)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히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 백성이다. 이렇듯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종교와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늘 돌질로 맞이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23:37)라고 탄식하셨다.

    오늘날 예루살렘 시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던 예루살렘 시 바깥에 위치한 베들레헴의 구유 통에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복음은 예루살렘 시 바깥에 있던 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인간의 전통에 중독된 자들의 질문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등과 같이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의 스캔들이 되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꼭대기 변화산 상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 주셨다.

    종교 안에서는 ‘나’를 부르짖지만 복음 안에서는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주님 제일 주의가 생긴다. 종교는 전통 자랑, 건물 자랑, 이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dung) 즉 똥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하고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그래서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를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에는 저 옛날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 낸 고백 즉 ”화로다 나여…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한 대로 말씀을 써 먹지만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셨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가지고 종교 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분께서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 3년 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회칠한 무덤들아…”(마23장).

    그들은 육백 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한 가지 명령은 지키지 못했다(요13:34-35). 실로 그분은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했다. 그 결과 그들의 교만은 시기 증오로 변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분은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 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에서 나온 ‘복된 소식’이다. 이 길은 ‘좁은 길’(마7:13,14)이기에 우리 주님은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눅12:32)고 위로하셨던 것이다.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하고 내가 헌신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다(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낙타와 하루살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21세기 초엽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배교(살후2:1-8)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탄이 수 천 년 동안 동원한 수법 즉 “대화로 풀어 보자.”는 등의 감언이설에 속아 천주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진 자들 곧 하나님보다 더 선한 체하며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양들을 이끌고 이리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저들의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을 보지 못하는 소경 지도자들은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및 타협의 명수’로 둔갑하였고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한국 교회는 이제 로마화 즉 바빌론화 되는 재난에 처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붕괴되는 아파트와 같을 것이다.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온 침입자(사탄의 에큐메니즘 세력)에 의해 아파트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데도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있는 주민들(교단 및 개 교회)은 자기 집 하나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결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타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 색을 검다고 힘주어 말할 때 사탄의 세력은 그를 부정적인 자, 종교적으로 완고한 자로 몰아 부친다. 그래서 때로는 검은 색을 희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자 즉 진정한 의미의 완고한 자가 논쟁에서 승리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래서 비열한 인신공격은 결코 크리스천다운 행위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결코 이런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기만해 오고 있는 조직 즉 ‘한 몸에 두 흔’(종교와 정치)을 공유한 바빌론 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그 엄청난 가공할 교리들과 그 끔찍한 과거의 역사 앞에 어찌해서 다 벙어리가 되었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탄의 최대 보루인 천주교에 무지하여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 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요, 초대형 이단(Super Cult)이라 할 수 있는 천주교(낙타)는 삼키는 일치 운동에 깊숙이 빠져 있다. 또 마땅히 입을 열어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이 모양 저 핑계로 입을 다물고 있어 요한복음 12장 42-43절 말씀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되 바리새인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가 진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지도자가 죽어도 흩어지지 않는 이단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요직을 잡고 있는 이러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다. 지금이야말로 먼저 교회 안을 급히 돌아 볼 때가 아닌가?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가지고 단순하고도 순전한 복음을 요란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자들 즉 스스로 지혜롭다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이제는 점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없이 멀리 떠났고 그래서 이제는 바빌론 종교를 답습하여 저들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심지어 저들이 변한 것으로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한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천주교와 일치 운동에 빠져 있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믿고 있는 천주교도들은 성경과 로마 카톨릭 주의 이 둘을 다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생명과 사망을 가른 것처럼 옛 대언자들의 기개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가르지 않는다면 양들은 계속해서 여전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바빌론 종교의 심벌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세계 통치를 꿈꾸었던 카이사르(시이저 혹은 가이사)의 재를 담은 청동 지구본을 올려놓았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하며 지상의 세속 통치권을 주장해 온 로마 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 권세를 추구해 왔다.

    천주교 사제 플레처(Philip Fletcher)는 그가 편집하는 천주교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면 그는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일명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Hon. G.A.Spencer) 경은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1899-1981) 박사는 그의 시리즈 설교 ‘마귀의 간계’(엡6:11)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 교회 즉 천주교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약 로마 교회가 변한다면 스스로 과거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로마 교회는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69년 영국복음주의협회에서 선포한 메시지에서 고린도전서 14장 8절 말씀 즉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할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예수께 나오세요.’ 혹은 ‘그리스도께 나오세요.’ 라고 설교하는 기독교는 로마 종교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복음주의 전도 캠페인을 벌리는 사람들이 ‘당신은 천주교인이세요? 그렇다면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 전도자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고전 어학자이자 영국 왕실의 헨리 8세의 주치의로서 완미한 로마 카톨릭 교도로 말년에는 로마 교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던 리나크러(Thomas Linacre 1460-1524)는 생전 처음으로 신약 성경을 읽다가 견디지 못해 그 책을 던지면서 “이 성경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첫 눈에 로마 교회의 조직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회의 개념과는 상반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로욜라 심리연구소 창설자로서 세계 천주교 심리학자 및 정신병 학자 모임의 국제 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요직을 겸하고 있던 전 예수회 사제 신학자 파드로사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학 논쟁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다가 거듭난 후 로마 교회를 떠났다. 이것은 1950년대 전 유럽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후에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여러 책을 집필하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는 기독교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36판이나 인쇄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 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렸고 맥도웰도 이단들의 특성 11가지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들의 특성에 완전하게 부합될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큰 바빌론의 신비’ 즉 천주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눈이 가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바빌론의 신비는 전 성경의 구석구석에 밝혀져 있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저 큰 도시’(계17:18)에 대하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석가들도 별 수 없이 저들의 교부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두 번째 바빌론 로마, 서방의 바빌론 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Jerome, 342-420)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빌론으로 지칭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가이자 변증학자였던 이탈리아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 추기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빌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 예수회 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 추기경은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빌론이라 부르고 있다.”고 썼으며 루이14세로 하여금 낭뜨 칙령을 번복하게 함으로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인 보쉬에(J. B. Bossuet, 1629-1704) 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나도 분명하여 바빌론에서 로마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빌론이 로마라고 가르쳤다.”고 시인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1890) 추기경은 1840년 로마 교회에 가담하기 전에 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 즉 매우 후미지고 으슥한 땅’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 예수회 학자 헌터(S. J. Hunter)는 그의 저서 「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빌론이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다.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의 특성은 바빌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 1970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판 천주교 성경의 계시록 14-18장에 나오는 바빌론에 대한 관주 설명은 모두 그것이 로마임을 밝히고 있다.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되 곧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그자를 멸하시리라.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 모두가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8-12).

    로마 교황권 제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 예수회 사제로 지낸 휀스브뢰흐(G.p. Von Hönsbröch)가 지은「사회 문명에 미친 교황권 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 제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제도로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 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교황권 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하며 넓으면서도 은밀히 세워지고 고도로 마무리 된 조직이다.

    또 그는 자기의 다른 저서 「교황권 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황권 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 정치 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세계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 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 자칭하지만…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어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다.

    영국의 사회 철학자이며 정치 경제 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이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 교회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 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 교회 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 1901)은 이보다 더 단호하다.

    로마 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즉 전제 독재국이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 성경을 꿰뚫고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18:36)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 로마 제국 주의의 영광인 세상 권력을 추구해 온 로마 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그것은 패망한 로마 제국의 유령으로 그 무덤 위에 왕관을 쓴 채로 앉아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바빌론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K.Clifford, 1845-1879) 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 사제로부터 피신시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전(C.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축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그는 또 미래의 사역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를 약탈하고 있다.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로마 종교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이 본질이 언젠가는 선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대 바빌론의 신비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복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회의 종교화 현상을 쳐다보는 것보다 슬픈 것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우상의 소굴처럼 둔갑한 오늘날의 교회 내의 장식과 강대상을 보라. 이것은 타락의 극치이자 최대의 위기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탄의 종교가 자기와 닳은 기독교에 침투한다. 그들은 기독교 용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이끌어 간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 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 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 세례”, “그리스도를 영접함”, “은사 경험”, “케리그마” 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그들은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 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아 넘어간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 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이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처럼 “과거 카톨릭과 현대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바티칸 공회 이후 카톨릭의 신학 사상은 개방적으로 변했다.”라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바티칸 공회의 교황 요한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무엇이 바뀌었단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 성자, 전통 숭배가 해제되는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탄의 세력이 “빛의 천사로 변장하고”(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자들도 속이리라.”(마24:4-28)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새 시대 (뉴에이지) 운동과 새 세계 질서

    유럽공동체의 대부 노릇을 해 온 로마 교황청은 유럽 통일뿐만 아니라 세계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새 시대 운동과 새 세계 질서를 추진해 왔으며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세력의 조종 하에 있는 동일한 것이다. ‘질서’(Order)로 알려진 이 단어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피라미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 교회의 교단들을 부를 때 사용되는 명령 용어이다. 독일 튀빙겐 대학 로마 카톨릭 신학부의 실천 신학 교수인 글라이나헤르(N. Gleinacher)는 마가복음 10장 24-44절을 인용하여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 인간 사회에 남아 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하였다.

    비오 12세 이후의 모든 교황들이 새 시대 운동(NAM)과 새 세계 질서(NWO)를 지지해 왔으며, 제2 바티칸 공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의 측근으로 로마 교황청 신학교 교수였던 전 예수회 사제 마틴(M. Martin) 박사는 최근에 자신의 저서에서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머지않아 로마 교황의 주도 하에 세계단일정부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였다.

    예수회 창설자 로욜라는 생전에 로마와 파리를 자신의 꿈을 펴기 위한 거룩한 도시로 여겼는데 오늘날 정확하게 이 두 도시는 로욜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으며  한 몸에 두 얼굴을 가졌던 야누스의 후예들은 이제 이 도시들을 본거지로 삼아 종교와 정치 권력을 가지고 새 시대 운동, 새 세계 질서를 조종하고 있다.

    “외적인 종교로서의 로마 천주교와 법률과 권력의 국가로서의 로마카톨릭교는 복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아니 근본적으로 복음과 모순이 된다.”는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의 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그리고는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열심히 묻고 상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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