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교육에서 잃어버린 도구들 (Lost Tools of Learning)
저자 : Dorothy L. Sayers 역자 : 정동수
교육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교육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변명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사실 현세대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 주교들이 경제학에 대해 논하거나 생물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논하며 무기화학자가 신학에 대해 논하는 등 어떤 주제에 대해 그리 관련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적인 것을 논하도록 임명을 받으며, 평범하고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엡스타인이나 피카소 등이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특히 온건한 비평과 함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활동들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전문성을 띄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된다. 따라서 진실한 아마추어가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문교사는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다 한번씩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참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 교육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제 나는 소위 교육 혹은 가르침이라 불리는 주제에 대해 다룰 것을 제안한다. 내가 제안하는 교육개혁사항들이 앞으로 참고가 될지는 참으로 미지수이다. 부모나 교육대학이나 시험기관이나 주지사 회의나 교육부 등에서 잠시라도 이런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내용들이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육받은 사람들의 사회 곧 현대사회의 복잡한 압력 속에서도 자기들의 지적 자유를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진보의 수레바퀴를 400-500년 정도 뒤로 돌려 교육이 그 참된 목표를 잃어가기 시작한 시절 즉 중세암흑시대의 끝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러분이 반동주의자, 낭만주의자, 중세주의자 등과 같은 용어를 써 가면서 나를 흉보기 전에 나는 여러분이 내 모든 생각의 뒷면에 남아있는 한두 가지 부차적인 질문들 곧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주십사고 부탁드린다. 튜도 왕조 때와 같이 젊은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대학에 들어가고 그 이후로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성숙한데도 지적으로는 어린아이나 사춘기 시대에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편안한 감을 느낄 수 하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자꾸자꾸 뒤로 미루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문제를 수반하며, 비록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어떤 흥미를 유발시킬지 모르지만, 개인이나 사회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는 일을 늦추고 점점 더 교육의 기간을 늘이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중세에 비해 지금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현대의 소년 소녀들은 참으로 여러 과목을 배운다. 하지만 과연 이 사실이 그들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뜻할까? 서구 유럽사회의 문맹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 시대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광고나 대중매체의 선전 영향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에 대하여 당신은 이상하게 느끼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혹은 신문방송 등이 보다 넓은 지역에 어떤 사실을 좀더 쉽게 선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기계적 사실로 인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현대 교육 방법에 인한 생산물 즉 현대 학생들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증명된 것과 가정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불안하게 의심하고 있는가? 당신은 혹시 어른들 혹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대부분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논쟁의 요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함을 보고 초조하게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위원회 모임 등에서 참으로 별 것 아닌 문제들이 수없이 튀어나오며, 위원회 의장으로서 회의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고 또 동시에 우리의 공무의 대부분이 논의와 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이 철렁하고 가라앉지는 않는가? 혹은 신문 등에 실린 논설에서 저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주고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그 글에 대해 답변하면서 그 사람이 정의 내린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로 그 용어를 정의 내려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당신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문장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가? 만일 그랬다면 당신이 괴로움을 느낀 것이 그 글이 우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글이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인가? 혹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떠나서는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것은 당연한 결과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정말로 그것에 대해 알았는지조차도 모르며 또한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것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또한 당신은 건전하고 학적이며 적절하게 문서로 입증된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분간 할 줄 모르는 수많은 남녀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혹은 참고문헌을 주어도 거기에서 자기들이 찾고있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적당한 구절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또한 당신은 평생토록 어떤 과목을 그 과목 자체로만 인식한 채 다른 과목이나 주제하고는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수학의 대수와 탐정소설간의 관계나 혹은 하수처리와 연어의 가격 등의 관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과 경제학과의 관계나 화학과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하여 이 과목들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해 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종종 다 큰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기록한 글로 인하여 불만을 느낀 적이 없는가? 예를 들어 한 유명한 생물학자는 주간지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사실 그는 이보다 더 강한 어조로 썼지만 불행히도 참고문헌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훨씬 약하게 그의 요점을 적은 것이다.) -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이와 똑같은 변이가 개나 고양이 등을 번식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다는 이 사실은 창조주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지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읽고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논지는 이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논지가 증명하는 것은 이중 교배 등을 통한 염색체의 재결합 같은 어떤 물질적 원인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변종에 대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피아노의 열세개의 음반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소리나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서 아무렇게나 건반을 누를 때 내는 소리를 만드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은 결코 베토벤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으며 증명하지 않지도 않는 것이다. 이 생물학자의 논지에 의해 증명된 것은 결국 그가 물질과 최종적인 원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문장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즈 문학 증보」(Times Literary Supplement)의 첫머리 기사보다 더 학적인 데서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에피나스(Alfred Epinas)는 개미나 말벌 같은 특정한 종들이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서로 연관 지으며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사실 그 프랑스 사람이 무어라 말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적은 영국 사람의 글을 따르자면, 그 프랑스 사람의 발언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개미에게 있어서 과연 삶이 어떤 두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도 없으며 나와 당신이 창문에서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말벌이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지 맞이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 글의 주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대중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의 동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요 명제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어떤 예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 논지는 그 논지가 증명하려 한 것을 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이것이 좀더 형식을 갖춘 삼단논법으로 제시되었을 경우 즉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지적한 것은 많은 책을 파고드는 해악의 한 종류로서 특히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나 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타임즈 문학 증보」의 같은 호에서 나온 다음의 예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잘 정리해 준다. 이번에는 리빙스톤경의 「교육을 위한 과제들」(Some Tasks for Education)의 논평에서 취한 것이다. 독자는 한번 이상 최소한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가치가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며 이로써 "지식의 의미"를 알게 되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정확성과 인내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해도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자기 이웃들 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지는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특히 마지막 문장 곧 저자가 "괴로운 사실"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설명을 주는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다시 말해 그 "괴로운 사실"은 우리의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적 기능 혹은 기술이 우리가 그런 기술을 습득한 그 과목 혹은 주제 이외의 다른 과목이나 주제에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웠는가를 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곧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의 모든 불안한 현상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문제점은, 곧 우리가 학생들에게 어떤 주제나 과목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잘하지만 그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배워도 유독 교육 혹은 학문의 예술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학생에게 "금발의 제니"같은 유명한 곡을 치는 것은 가르치지만 음보를 읽는 것이나 스케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학생은 "금발의 제니"를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떠나서 또 다른 "스와니강"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비유를 들은 것일까? 예술이나 공예 같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학생이나 아이에게 색깔이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술자는 결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새로운 소재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자기의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배웠고 올바른 목적으로 물건을 취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어떻게 하면 바른 도구를 사용할까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새로운 소재를 놓고 두들겨보며 감을 잡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세시대의 교육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즉 학교들의 교수방법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혹은 나이가 든 학생들을 위해 개발된 것이냐 하는 것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습득해야 하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중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여 올바른 교육 과정이 어떤 것인가를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세 교육 과정은 트리비움(Trivium)과 콰드라비움(Quadravium)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콰드라비움은 여러 가지 과목으로 이루어졌고 당분간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주제이다. 우리가 흥미 있게 살펴 보려는 것은 트리비움의 구성요소인데 이 트리비움은 콰드라비움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으로 콰드라비움을 택하기 위한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여기에는 문법, 변증, 수사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먼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런 과목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개는 실제로 과목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문법은 실제로 말을 배우는 것이므로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물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이라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트리비움은 한 마디로 학생들이 학문의 도구들을 어떤 과목에 적용하기에 앞서 그런 도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먼저 학생은 말을 배우되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조 혹은 말 그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모으는 방법과 말이 이루어진 방법을 배웠다. 그 다음에 학생은 말을 사용하는 방법과 자기의 용어를 정의 내리는 방법과 정확하게 진술하는 방법과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과 어떤 논지의 허점을 찾아내는 방법 (학생 자신의 논지든 혹은 다른 사람의 논지든)을 배웠다. 변증학은 곧 논리와 반박을 포함했다. 세 번째로 학생은 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결국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우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에 그는 자기 스승이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여 교수진의 비평에 대응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을 배워야했다. 이때쯤 되면 그는 글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단에서 큰소리로 지적으로 말하며 질문 공세를 받을 때 곧장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큰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이미 혹독한 논증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강력하며 힘든 질문들을 하곤 했다. 중세 교육 전통의 일부가 아직도 우리 학교 시스템에 남아 있거나 부활되고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문법 지식이 여전히 필요하며 나는 "그것이 반드시 다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우리는 명사, 동사 등의 어형 변화를 가르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그런 단계를 거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알면 된다고 배웠다. 학교의 토론 단체들이 붐을 이루었고 에세이를 써야만 했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그것만을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대개 주요 과목들과 분리되어 이루어졌으며, 어떤 특별한 과목에 대해서만 그것도 비둘기장의 구멍처럼 조그만 일부분으로 취급되었고 모든 과목들에 영향을 미치는 지적 훈련 과정의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문법은 특히 외국어 과목에만 속하게 되었고 에세이 쓰는 것은 영어 과목에만 한정되었다. 한편 변증은 교과 과정 전체에서 삭제되어 아무런 체계도 없이 정규학교 시간 이외에 과외 활동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학문을 배우는 것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 교육과 중세 교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 교육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각하고 논평하고 결론을 내리는 방법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득하게 하고 있다; 반면에 중세 교육은 먼저 학문의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연마하고 배우는데 강조점을 두었으며 어떤 과목을 사용해서 이를 가르치든지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학생의 제2본성이 되기까지 가르쳤다. 물론 학문에서 어떤 종류의 과목이 있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실제의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문법이론을 배울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없다. 중세의 토론 주제는 대개 신학이나 혹은 고대의 윤리와 역사였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주제들이 너무 닳고닳아 - 특히 중세 말에는 더욱 심각했음 -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논증이나 논지 등이 밀톤과 같은 사람을 부추겨서 심지어 오늘날에까지도 즐거움을 주는 글을 쓰게 했다. 이런 주제들이 현대 학생들의 에세이 쓰기 주제보다 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휴가의 여러 날 중 하루를 지겹게 여기게 되었고 그 결과 나머지 날들도 다 지겹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교육의 즐거움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토론 주제의 목표와 목적을 이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브레인즈 신용회사 즉 두뇌 신용회사의 입심 좋은 한 연사는 중세의 경우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장이 춤을 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사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토론 시합이었고 그 주제는 천사들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천사들이 사람과 같이 물질적 존재였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공간을 차지했을까? 내가 믿기로는, 대개 사람들이 옳다고 판단한 대답은 천사들은 순수한 지적 존재로 물질적 요소는 없되 제한적이어서 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며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이 바늘 끝과 같은 어떤 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면 생각 그 자체가 거기에 있으므로 어떤 점에서 생각은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바늘구멍과 같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지의 합당한 주제는 공간상에서의 위치와 공간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피나 거리간의 구분인 것이다. 이 논지를 논하는 주제는 천사의 본질이며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사실 주제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이 논지에서 얻어내려는 실질적인 교훈은 당신이 "거기에"라는 단어를 "거기에 위치해 있냐?" 혹은 "거기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냐?" 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비과학적으로 느슨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려는 열정을 보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조소했다. 그러나 책이나 강단에서 애매모호하며 주제를 흐리게 만드는 함축적인 말들을 담은 논쟁거리 표현들이 뻔뻔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속에서 모든 독자나 청취자가 자기의 교육을 통해 철저히 무장되어 그들에게 "분별하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처럼 갑옷이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전혀 무장하지 않는 채 학교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읽을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인쇄되어 나온 말들의 손아귀에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맡기고 있다. 영화와 라디오 등의 발명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의 폭격에서 그들을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들을 물리치거나 세력을 약하게 하거나 혹은 되받아 치는 것을 알지 못한다. 1940년에 우리는 군사들에게 단지 총만을 주고 무장한 탱크들과 싸우라고 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젊은 남녀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겉핥기 식으로 가르쳐주고 세상에 나가서 대중매체의 공격에 대응하여 싸우라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 지금 모든 교실에서 모든 민족들이 웅변가의 기교에 빠져 최면에 걸렸는데도 우리는 놀랄 만큼 뻔뻔스럽다.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늘 입으로만 말하고 가끔씩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학교를 떠나는 일을 자꾸 늦추고 크고 더 좋은 학교를 지으려 하여 교사들을 학교의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혹사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가 믿기로는 이런 모든 노력이 대개 다 실패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육의 도구들을 잃어 버렸고 그 대신에 조금씩 임기웅변 식 누더기질로 교육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물론 중세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우리에게 익숙한 외침이다. 과연 우리가 되돌아 갈 수 없는가? 아니면 돌아갈 수 있는가? 분별하기 바란다. 나는 위의 명제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정의 내리기 원한다. "돌아간다"는 말은 시간상으로 뒤로 간다는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수정한다는 것인가? 우선 첫 번째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두 번째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일 행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세기가 결코 14세기도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말한 "중세"가 문맥상에서 단지 어떤 교육 이론을 보여주는 구절로 이해된다면 우리가 이미 돌아갔던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며 물론 여기에도 조금 수정할 것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정할 것이 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연극들을 기록한 것 같이 그의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지, 결코 연극 진보 과정에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 여겨져서 추앙을 받는 키버와 가릭의 현대판 연극들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이 일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해 보자. 또 우리가 교육 권세를 잡은 모든 단체나 인물 등을 싹 쓸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년 소녀들을 예비하여 조그만 학교로 들이고 실험적으로 그들에게 앞으로 맞게 될 지적 갈등을 이겨 나가게 교육시켜 보자.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유순한 부모들을 허락하고, 트리비움의 목적과 교육방법들을 잘 알고 있는 교사들로 학교를 채우고, 학생들을 적당한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건물과 교사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또한 시험 위원회가 우리가 키우는 학생들을 입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처럼 예비한 후에 우리는 수정된 현대판 트리비움이라는 교과과정을 시험하고 과연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살펴 보려한다. 먼저 학생들의 연령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이들을 색다른 차원에서 교육시키려 한다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고쳐서 다시 새로이 배울 것이 없는 상태가 좋을 것이다. 또한 좋은 것은 일찍 배울수록 좋은 것이다. 트리비움은 그 성격상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교육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택하되 오직 그들이 읽고, 쓰고, 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만 요구할 것이다.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내 견해는 정통 견해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 개화된 견해도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내 자신을 살려보건대 (사실 나야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아이이며 나야말로 내 속에서부터 정말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에 세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단계를 좀 거칠긴 하지만 앵무새, 까불이, 시인의 세 단계로 부르고자 하는데 이 시인의 단계는 대개 사춘기가 시작되는 점이라 보면 되겠다. 앵무새 단계는 암기하는 것이 아주 쉬우며 대개 즐거운 단계이다. 반면에 추론하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대개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쉽게 사물의 형태나 모습을 외우고, 자동차 번호판을 암기하며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긴 단어나 리듬 등을 중얼거리고 외치며 여러 가지를 모은다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바로 그 뒤에 오는 까불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논쟁하고, 대꾸하며, 자기보다 윗사람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 하고, 수수께끼를 잘 해석하곤 한다. 또한 남에게 방해를 주는 정도가 매우 심한데 대개 이 단계는 중학교 2학년 즈음에 수그러든다. 시인의 단계는 대개 다루기 어려운 나이로 더 잘려져 있다. 이 때에 학생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나타내려 하고 남에게 오해받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며 독립하려 하고, 행운과 함께 좋은 지도가 뒷받침되면 창조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하려 하며 어떤 것을 알고자 노력하며 어떤 한가지를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트리비움의 구성 그 자체는 이런 세 가지 나이 그룹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법은 앵무새 단계에서, 변증은 까불이 단계에서, 수사학은 시인의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 먼저 문법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문법은 특히 어떤 특정 언어의 문법을 의미하는데 이 언어는 굴절언어 이어야 한다. 비굴절 언어의 문법구조는 너무 분석적이어서 변증과정을 거치지 않는 학생이 다루기는 너무 어렵다. 또한 굴절 언어는 비굴절 언어를 해석할 수 있지만 비굴절 언어는 굴절 언어를 해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즉각적으로 교육을 위한 최상의 기초가 라틴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라틴어가 전통적 언어이고 중세 언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에 대한 초보지식만 있어도 다른 어떤 과목을 배울 때 필요한 노력과 수고를 50%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라틴어는 모든 로만스 언어와 튜톤 언어의 어휘와 구조에 핵심이 되며 동시에 모든 과학 분야의 기술 어휘와 지중해 문명 문학 및 이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핵심이 된다. 살아있는 말을 공부해야 한다는 학자적 관점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서 라틴어의 이런 장점들을 빼앗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러시아말을 선택해도 되는데 러시아말은 라틴어보다 더 원시적이다. 물론 러시아말은 다른 슬라브족들의 방언들과 함께 유익하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라틴어를 좋아한다. 이제 여러분 중의 고전파들을 즐겁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일반 학생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신고전주의 시대의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듯한, 아주 교묘하고 인위적인 형태의 웅변이나 구절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현명한 일도 아니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려 한다. 물론 이에 대해 고전파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라틴어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다시 말해 굴절 언어가 이 놀라운 세상에서 그리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하는 때 즉 "아모, 아마스, 아맛"하고 흥얼거리는 것이 "이니 미니 마이니 모"하고 흥얼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좋다는 것이다. 이런 나이에 우리는 물론 라틴 문법 이외의 다른 것들도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주 활발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현대 외국어를 배우려면 이 때 곧 얼굴과 생각의 근육이 이상한 억양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 문법과 함께 프랑스어나 독일어 회화를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다. 영어의 구절과 산문은 쉽게 외울 수 있으며 학생의 기억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 즉 고대 신화, 유럽의 전설 등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간다. 나는 고전적인 이야기나 고대 문학 작품을 문법 기교를 연습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속할 필요가 없는 중세 교육의 잘못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어로 즐기고 기억하면 되고 그 후에 그들의 기원 등을 살펴보면 된다. 크게 암송하는 것은 늘 연습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나 함께 코러스로 하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변론과 수사학에 대한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입문은 시간과 사건과 일화와 인물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학생이 나중에 배울 역사 지식에 사용할 수 있는 연도 등을 쉽게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서 실로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어떤 연대나 연도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국 왕들의 연대기 등이 그 당시 의복과 건축과 기타 다른 일상용품 등과 함께 제시되고 그런 것들을 외움으로써 그 당시 연도만을 대도 그 시대를 그림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지리 역시 여러 사실과 지도와 지형적 특징과 관습, 의복, 식물, 동물 등의 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몇몇 나라의 수도와 강과 산 바다 등을 외우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또한 우표를 수집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앵무새 단계에서 과학은 저절로 이루어지며 특히 무엇인가를 수집하면서 샘플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것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다. 대개 "자연 역사" 혹은 "자연 철학"이라는 자체가 과학인 것이다. 이 나이 또래에서는 사물의 이름과 특성 등을 아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것이며, 마귀의 수레를 끄는 말을 보고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비록 모습은 그래도 그 말이 침을 쏘지는 않음을 확신시켜주며, 카시오피아와 플레이아데스 별자리를 구분하며,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등이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주며, 독사와 독사가 아닌 뱀을 구분하고 독버섯과 독이 없는 버섯 등을 구분하는 것 또한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수학 입문은 구구단 표와 함께 시작되는데 사실 구구단을 이때 외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겁게 외울 수 없다. 또한 이 때에는 기하학적 형태나 숫자를 모으는 것 등도 배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히 간단한 덧셈에 이르게 하고 학생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 그 때까지 성취한 모든 재주는 좋은 것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제 곧 보여 줄 이유들 때문에 이보다 더 어려운 수학 과정은 추후에 배우는 것으로 연기되어야 할 것이다. (라틴어 공부를 빼고는) 지금까지의 교과과정이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 차이는 교사들의 태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개별 과목으로 보지 말고 트리비움의 다음 단계를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외워서 기억에 넣어야 할 모든 것을, 그것들이 지성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바로 이 시기에 외워서 기억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판 교육의 경향은 너무 어릴 때에 아이들의 생각 속에 합리적인 설명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성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기들이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이런 일들이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거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거나 다어휘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것은 신학 입문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것 역시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야말로 과학의 여왕으로 이것이 없이는 전체 교육과정이 최종적인 합성 과정을 잃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학생들의 교육을 합당한 목표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덜 중요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교육의 도구들이 강화될 무렵에 다다르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신학을 다루게 되고 아마도 그렇게 하려고 주장하며 그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문제는 이유 있게 다루기 위하여 늘 준비된 상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입문/문법을 배우는 나이에 학생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하며 다시 말해 사람의 창조, 타락, 구속 등의 이야기를 열거한 신구약 성경과 신조, 주기도문, 십계명 등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수준으로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익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나이에 트리비움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할 지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다. 학생이 민첩함을 보이고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자 할 때 옮기면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기능이 관찰과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요한 기능이 광범위한 판단력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라틴어 문법이 기타 다른 모든 재료의 핵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단계에서는 형식적 논리가 핵심사항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트리비움 교과 과정은 현대 표준과 크게 다르다. 형식적 논리에 대한 나쁜 평판은 전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실 이것을 무시한 결과 현대 지성인에게서 늘 볼 수 있는 현상, 즉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형식적 논리를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증명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공통적인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통적인 전제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설령 공통적인 전제들이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A는 B다"라는 모든 삼단 논법이 다른 형태의 가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논쟁하는 기술로 "A는 B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A의 추론적 성격에 의해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참으로 오늘날 형식적 논리의 실제적 가치는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확립하는데 있다기보다는 유효하지 못한 추론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알리는데 있다 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재료들을 신속히 점검하고 과연 이것이 변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려보아야 한다. 언어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어휘와 어형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문장론과 분석론 즉 말할 때의 논리적 구성요소와 언어 발달 즉 우리가 사상을 전하려 할 때 어떻게 우리의 말을 정리하는가에 대한 것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낭독은 에세이와 논리와 비평 등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에서부터 시작되며 학생은 이런 종류의 것들을 쓰기 위해 손을 놀리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지 많은 수업이 변론의 형태를 띄게 될 것이며 개인적으로 혹은 그룹으로 낭송하는 일 대신에 연극을 하되 특별히 논지가 연극의 형태로 되어 있는 연극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수학 - 대수, 기하 및 좀 더 차원 높은 연산학 등이 이제 교과과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되 개별적인 과목이 아니라 논리의 하부 과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수학은 이것을 수나 계량등에 적용할 때에 삼단 논법 법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어둠에 가려진 신비나 혹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이 특별한 계시 등이 아닌 것으로 가르쳐야 하며 또한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주제로 가르쳐서는 결코 안 된다. 역사는 신학 입문에서 나온 간단한 윤리체계의 도움을 받아 논의에 필요한 합당한 재료를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 정치가의 행동은 옳은가? 그런 법의 제정이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형태의 정부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헌법역사개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주제는 사실 나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논증하거나 변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신학 그 자체도 행동과 윤리 등에 대해 논할 재료를 제공하므로 간단한 교리 신학(즉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성적 구조)을 통해 그 내용을 확장시켜야 하며, 교리와 윤리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윤리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 즉 결의론이라 할 수 있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지리학이나 과학 등도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레슬리 폴이 지은 「산울타리」라는 책에는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자기들의 도시에 내린 아주 이상한 비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여러 소년이 논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참으로 이상해서 그 도시의 주도로의 반에만 내려 그쪽만 적시고 나머지 반은 적시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이 날 비가 도시 위에 혹은 도시 너머에 혹은 도시 안에 내렸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비가 되려면 도대체 물방울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등등. 이에 대한 논쟁은 그와 비슷한 문제들, 예를 들어 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 자는 것과 걷는 것, 시간을 무한히 작게 나누는 것 등등으로 아이들은 이끌고 갔다. 그 책의 그 부분은 사람의 추리 능력을 순간적으로 개발하는 것과 용어들의 정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는 이성을 향한 당연하고도 합당한 갈증 등에 대한 아주 풍성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건이 사실상 이런 것에 대한 입맛을 충족시키는 재료가 된다. 심판의 결정: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이들은 대개 나면서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결의론자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천부적 경향은 계속해서 개발시키고 훈련시켜야 하며 특히 어른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지적인 관계를 갖게 해야한다. 사실 신문에는 이런 것을 위한 재료가 수없이 많다. 근본 이유가 너무 난해하지 않은 법적 결정들, 누구라도 쉽게 그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름 있는 통신 칼럼 등 아주 많이 들어있는 잘못된 추론과 얼빠진 논쟁 등. 어디서 변증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든지 간에 우리는 훌륭한 예나 혹은 잘 이루어진 논지의 아름다움과 질서 등에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판 혹은 비평은 반드시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며 이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은 동시에 잘못된 것, 바르지 못한 추론, 애매 모호한 것, 적합하지 않은 것, 중복되는 것 등을 발견할 태세를 갖추고 쥐에게 달려들 듯이 이런 결함들에게 달려들어 이것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확하게 글을 쓰는 것이 유용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에세이를 쓴 뒤에 그것을 25∼50% 줄이는 연습 등을 수행하게 된다. 까불이 나이에 속한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변증을 하라고 권면하게 되면 그 아이들이 너무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찮은 아이들이 될 것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나이의 어린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논쟁하려 하는 것을 잘 살려 좋은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런 본능을 모래바닥에 던져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면 집에서는 덜 눈에 거슬릴 것이다. 어쨌든지 아이들은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건전한 원리를 저버린 어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단계에서의 교육 과정 내용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과목들은 재료를 제공하지만 이것은 제분소 기계에서 처리해야 할 제분용 곡식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도서관과 참고서적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떤 자료들이 권위가 있고 어떤 것을 권위가 없는가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단계의 끝 부분에 다다르면 학생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며 자기들이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소화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까불이 나이에 잠복되어 있는 상상력은 그들을 다시 일깨워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의심해 보게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시인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제 수사학을 공부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식 창고의 문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배웠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고 무미건조하게 분석한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얻는 통찰력이 모든 발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들은 곧 공리가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사학 공부에 대한 교과 과정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다시 한번 감상하는 일이 파괴적인 비평을 앞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예리하게 잘 다듬어져서 깨끗하게 자르며 양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들과 함께 앞으로 전진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르게 제대로 익힌 학생이라면 그 도구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의 학생이 한 두 과목은 정말로 잘하고 다른 부수 과목을 들음으로써 마음을 넓혀서 모든 지식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러 과목을 분리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에서는 모든 종류의 학문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을 가르쳤지만 이제 수사학에서 모든 지식이 결국 하나임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이것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여왕인 과학인의 역할이다. 학생이 신학을 공부했든지 공부하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최소한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려는 아이들이 반드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임무를 수행한 라틴어 문법은 현대어를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이 듣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수학을 사용하거나 관심이 아예 없는 학생들도 이 시점에서 그만두게 해도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다 뒤로 물러가게 해도 되며, 훈련받은 지성을 예비시켜 학생이 트리비움을 다 마쳤을 때에 스스로 완전히 해결해야 하는 과목들을 전공하게 해야 한다. 트리비움의 최종 과정 즉 논문의 준비와 발표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회복되어야 하며 아마도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대치하면 좋을 것이다. 수사학의 범위는 학생이 16세에 이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에 따라 따르게 된다. 대개 수사학을 14세 정도에 들어야 하므로 우수한 학생들은 9세에서 11세에 문법을 배우고 12세에서 14세까지 변증을 배우고 나머지 2년은 수사학에 전념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수사학은 전문화되고 직업화된 것으로서 학생이 곧장 실질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범주의 학생들은 예비학교에서 변증 수업을 끝내고 공립학교에서 첫 2년 동안 수사학을 택한다. 16세에 그는 대학에서 공부할 과목들을 접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그의 교육은 중세의 콰드리비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16세에 정규교육을 끝내는 학생들은 트리비움만을 택하고 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은 트리비움과 콰드리비움을 둘 다 택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트리비움만으로도 평생 동안의 교육이 될 수 있는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변증 교육의 끝부분에 이르면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과목의 상세한 지식에 관한 한 영국에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현대 방식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보다 떨어지게 보일 것이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