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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은사주의 질문(1): 병고침이 속죄의 일부인가? 조회수 : 10590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3일 15시 14분 19초
  • 은사주의 질문(1): 병고침이 속죄의 일부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질문이란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답을 안다면). 그래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는 말씀은 매우 고무적이며 또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소망이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합니다(골1:23).

    우리는 성경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목사나 집사 혹은 교회 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종이나 아내나 남편들에게 주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8절과 그 이후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는 지침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목사를 구실로 삼아 이러한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목사는 목양 사역의 일부로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목사를 찾아가서 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만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필요한 연습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곁에 성경을 잘 아는 목사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논쟁이 되는 교리 하나를 갖고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목사는 그 교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해 놓은 건전한 책 한 권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정답을 말해 주세요. 그럼 믿겠어요!” 이러한 부인의 태도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의 칭찬할 만한 태도와 비교됩니다. 사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통해 비추어 보고 상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요한1서 2장 27절 말씀은 멋진 균형을 이룹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어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인 제사장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 년 전보다 우리 믿음에 대해 더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 중 몇몇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종종 은사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믿으며 다른 표적 은사들(기적을 행함, 병 고침 등)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캘리포니아주의 밴누이스(Van Nuys)에서 시작된 이 은사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최근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19% 가량(2900만 명)이 자신을 은사주의자 혹은 오순절주의자로 여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가히 놀랄 만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따르면 이런 은사주의자들의 21%가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진영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초교파 운동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교리 설명이 없고 사람들이 표적이나 이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각 사람이 믿는 바(정통이든 비정통이든)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원 명부도 없습니다. 단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같이 공부하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 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자, 여기 몇몇 은사주의자들 특히 성경을 믿는 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성경대로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에게 묻는 열두 가지 질문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1: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속죄의 한 부분인 병 고침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도전적인 성격의 질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채찍에 맞아야겠군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채찍은 분명히 그분의 죽음과 실제 처형 중에 당하신 채찍질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고침을 받도록 채찍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처럼 고침을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체의 치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성령님께서 육체적인 치료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가 여기 있습니다.

    1. 성경 전체에서 ‘고침’(healing)이란 단어는 여러 종류의 고침을 나타내는 데 쓰였습니다. 이 말은 주로 육체적인 치유를 나타내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 데도 쓰였고(눅4:18) 마귀의 억압을 제거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으며(행10:38) 또 죄악된 행실을 버리거나(히12:13)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할 때에도 ‘고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벧전2:24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잘 아시는 ‘stick’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빗자루, 성냥개비 혹은 접착제 같은 단어가 함께 나온다면 아마 이 단어의 뜻을 문맥을 통해 미루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고침’이라는 단어의 뜻도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벧전2:24 전체 내용이나 또 전후의 문맥에 육체적인 치료를 연상하게 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여러 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고침이 영적인 치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체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독자 여러분)는 죄를 짓지 않으신(2:22-23)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2:21).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실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죄들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24).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 양처럼 방황하지 않고 우리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2:25).

    이처럼 여기서의 ‘고침’(healing)은 영적인 치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의 고침을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로 본다면 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24절의 마지막 구 즉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와 25절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6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범법과 불법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치유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이사야서 1장). 대언자 이사야가 다룬 환자인 이스라엘 민족은 죄 많고 불법에 싸여 있으며 주님께서 버리신 악인들로 가득합니다(1:4). 하나님은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1:5-6).

    이 환자의 병세가 신체의 부위별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사, 그것도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주님을 꾸짖자 주님은 자신이 왕진을 나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진을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마9:10-30). 정확한 때에 위대한 의사께서 영적인 치료의 일을 마치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오르시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즉, 손수 내리신 처방에 필요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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