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요즘 옥성호 형제가 한국의 비뚤어진 기독교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맹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 옥 형제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저희 근본주의 성도들이 주장해 왔던 것인데 우리는 워낙 수가 적고 괴상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주류들이 우리 말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책을 내니 그들도 참으로 난감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맹공격이 쏟아지고 있고 이에 옥 형제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속시원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제 아내가 알려줘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옥 형제를 통해서 근본주의 신앙을 일깨우고 나중에는 킹제임스 성경까지 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옥 형제가 칼빈주의의 틀 밖으로 나와서 더 넓은 성경의 지식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게시판도 활성화 되어 있고 너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자주 가셔서 보고 격려도 하고 킹제임스 성경도 소개하고 알리기 바랍니다.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옥성호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게시판에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히 대립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옥성호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쓰고 또 ‘방언’에 대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얼마 전 제가 모 신문사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2.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조엘 오스틴,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등 미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을 실명 비판한 사실과 좀 더 명쾌한 신학적 시도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을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책을 펴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저보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구도자 예배’나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 있는 신학보다는 제 책 속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조엘 오스틴의 책들 속에 무슨 ‘신학’이 있습니까? 그 친구 스스로가 자기는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분들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무신학’ 또는 ‘얄팍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책에 대해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썼다는 점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비판 내지 아쉬움’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분들이 내는 책들을 향해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더 많이 요구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유명한 분들의 책들을 향해 좀 더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제대로 검증해왔더라면 아마도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못 잡은 강도를 시민이 잡았더니 경찰이 나타나서 시민에게 ‘강도 잡는 법’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책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폭넓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간증집’으로 넘치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나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가 이번에 나온 책과 관련해 바라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옥성호씨, 저는 당신이 고전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에 대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이런 근거로 볼 때 그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놓고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보는 논쟁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토론을 통해서 이곳에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는 옥성호는 성령을 방해하는 자이다’라는 말보다.....“왜 사랑이 없어요? 왜 당신은 기독교 안에 분열을 조장하시나요?”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듭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가 납니다. (물론 이 경우도 '더 안타깝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요....) 교회 안의 이런 식의 만연한 태도가 한국 교회를 오늘날 이 상황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부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강조했듯이... 크고 성공하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으로 가득 채운 황당무계한 책을 번역한 조용기 목사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를 성경 외에 천국에 대한 다른 계시를 들이밀며 분열을 조장하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성공했으니까요. 성공은 진리이고 선이니까요. 분별이 정죄가 아니듯이 사랑도 무조건적인 용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게 좋은거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심부기’에서 썼듯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아니....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느끼는 ‘불편함’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분열이 무엇입니까? 돌팔이 의사가 우연히 몇 명 병을 고친 후 소문이 나서 병원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돌팔이 의사의 정체를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병원에 앉아있는 환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사람 엉터리 의사에요.” 그러자 누가 벌떡 일어납니다. “환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다줍니까? 환자들에게는 특히 ‘심리적 절대 안정’이 필요한 걸 모릅니까?” 마틴 루터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는 ‘분열주의자’라는 딱지입니다. 카톨릭(원래 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 일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으로 하나 되어 잘 나가던 교회를 아예 완전히 산산조각 분열내지 않았습니까?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의 종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협력하지 않고 영국 교회 내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켰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람이 완전합니까? 빌리 그래함이라고 약점이 없겠습니까? 몇 가지 맘에 안 드는 점들은 눈 좀 감고 넘어가면 어디가 탈이 납니까? 교계를 초월해 모두가 하나되어 빌리 그래함을 선두로 ‘복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는 영국 교회에 왜 혼자 잘났다고 반대를 해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습니까? 왜 존 맥아더 목사는 그토록 ‘극단적’인 책들을 계속 씀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왜 교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근본주의자’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합니까? 가끔씩 나오는 래리 킹 쑈 같은 곳에서 좀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꼭 그렇게 고집스럽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의 냉소와 조소를 받아야 합니까? 그럴 거면 왜 TV에 나와서 기독교 망신을 시킵니까?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우리 예수님까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지켜온 각종 율법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습니까?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은 일을 하면서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교계에 일대 분열을 일으키셨습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분열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어떤지 아십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목사님이요? 물론 하는 소리는 다 틀리지요. 성경의 ‘성’자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참 저 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정말 사랑이 넘쳐요. 저 표정 한번 보세요.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런 표정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게 아니거든요. 저는 저 분 얼굴만 봐도 은혜를 받아요. 설교 필요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되요. 내 평생 저 분 설교에서 딴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는걸 못 들었어요. 참...대단해요. 다 사랑으로 용납해요. 얼마 전에는 이단들까지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였데요. 정말 은혜스러워요.” and "저 분 말이 뭐 일리는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분 목소리가 왜 저래요? 표정을 꼭 저렇게 딱딱하게 해야되요? 좀 웃으면 안되나? 말은 일리가 있는데 영 은혜가 안되요. 사랑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안타깝네요.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 아니에요?“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일치입니가? 그런데....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한 가지 덧붙이지요. 다수는 또는 주류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수는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민노당 주장이 일리는 있는데 너무 과격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말입니까? 소수는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폼을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 외침은 소수입니다. 아니, 극히 소수입니다. 소수는 외치고 또 외쳐도 들릴까 말까입니다. 저는 분열을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는 부부가 밖에서는 다정한 채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곪아 터진 관계를 터뜨리려니 우리가 잉꼬 부부인줄 알았던 이웃들이 충격받을까봐 계속 친한채 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이게 정상적인 부부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부부사이의 관계입니까? 이웃에 대한 체면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100% 맞는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옳다는 주장 속에도 반드시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랑과 연합 구호’ 때문에 나날이 실종되어가는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과 분열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치....아니 ‘무관심’이야 말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게시판에 오시는 분들은 다른 어떤 게시판들에 방문하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신 분들입니다. 그 누구도 옥성호라 ‘이렇다’라고 한다고 ‘이렇다’라고 생각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이런 글 쓰는 거 또 이런 싸움 하는거 재미없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저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합니다. 괴롭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일개 집사가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책을 많이 읽고 가장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갓피플에서도 ‘하늘의 언어’의 내용에 대해 수백 명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가는 이 상황이 안 보이십니까? 지금이 5백 년 전 종교개혁의 시기 카톨릭보다 우리 개신교가 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 때보다 말씀이 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빗 웰즈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사랑과 일치’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을 거부하자는 주장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진짜 사랑은 진리로 하나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