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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 4 - 네 번째 편지 조회수 : 1102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3일 16시 12분 13초
  •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네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이번에 저는 중재(Mediatorship)와 변호(Advocacy)라는 주제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명백한 말씀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5).

    흔히 크리소스톰의 글로 알려져 있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설교’에 들어 있는 진술 즉 “성경 말씀과 배치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보편적(Catholic)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중보라는 주제에 관한 천주교의 교리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어거스틴은 “성경을 믿는 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중재자는 오직 한 분뿐이며 다른 중재자는 없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만일 천주교가 이와 상반된 것을 가르친다면 천주교는 결코 거룩하고도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th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될 수 없습니다.

    사제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 즉 은혜와 구속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변호자와 중재자를 많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요셉이 매우 거룩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 중재자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록 사제께서 한 중재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셨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천주교의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제께서 말씀하는 것 즉 유일한 중재자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천주교 신학자들의 교리 서적이나 경건 서적에서조차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실 저는 의심이 갑니다.

    천주교가 우리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밑에서 제가 인용한 구절들, 즉 교황들이 허락한 기도 모음집인 「라콜타」(Raccolta) - 리틀튼이 편집하여 권위를 부여함 - 에서 인용한 기도문들을 통해 천주교가 마리아의 위치를 극도로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 인용문들의 권위를 인정하시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왕이시요, 긍휼의 어머니시요, 우리의 생명이요 감미로움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신 이에게 찬양을 드릴지어다! 이브의 추방당한 자손들인 우리는 당신께 울부짖나이다. 우리는 이 눈물 골짜기에서 당신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탄식하나이다. 오 우리의 변호자시여, 당신의 긍휼의 눈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이제 우리가 추방되었사오니 당신의 태의 축복의 열매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오, 긍휼이 많은 분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의 동정녀 마리아시여!

    오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거룩한 이시여, 우리가 당신의 보호 아래로 날아가나이다. 곤궁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간청을 멸시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항상 구하여 주옵소서. 오 영광스러운 축복의 동정녀시여.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동정심 많은 마리아여…천사들과 사람들의 존경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여…선으로 가득하신 분이시여, 항상 우리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는 분이시여, 부디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 주옵소서…거룩한 교회가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얻게 하시오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의 기쁜 피난처와 망대와 힘이 되어 주옵소서.…곤궁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시험에 빠질 때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며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위험에 처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소서….

    친애하는 마리아의 마음이시여,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내 어머니시여, 나를 내 손안에 버려두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나이다. 내가 오직 당신께만 매달리게 하옵소서. 나의 희망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지옥에서 구원하소서.

    리구오리가 지은 「마리와의 영광」(Glories of Mary)에서 발췌한 다음의 인용문을 읽고 난 뒤에 마리아가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간주됨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피난처요 도움이요 은신처이시다. 고대 유대에는 여러 개의 도피성이 있어서 범죄자들이 보호받기 위해 이곳으로 도피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같은 도피성이 많지 않으며 유일한 도피성은 오직 하나 즉 마리아뿐이다.

    마리아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죄인들을 징계하려 하는데 일어나서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셨다. 사실 그분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무는 우리의 복 받은 마리아 즉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그분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분이 맡아야 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리 응답을 받고 또 보호를 받는 길이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마리아께 구하면 얻을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명령에는 만물이 복종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복종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마리아의 사랑과 보호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가 말만하면 그의 아들이 모든 것을 집행한다.

    천주교회는 죽어 가는 자들의 입 속에 “은혜의 어머니요, 긍휼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죽음의 시간에 나를 받아 주소서”라는 구절을 넣어주지 않는가? 이 말은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죽으면서 한 말 즉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아 주소서!”와 얼마나 다른가?

    이제 다시 「라콜타」(Raccolta)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발견되는 다음의 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거룩한 동정녀시요, 하늘의 여왕이시요, 온 우주의 여주인이시요, 영원한 아버지의 딸이시며 그분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시며 성령님의 가장 사랑 받는 아내인 마리아시여, 나는 당신을 인정하며 당신을 존경하나이다! 위대하신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겸손히 기도하나이다. 하늘로 들어가실 때에 그토록 풍성하게 소유하셨던 하나님의 긍휼로서 부디 내게 은혜와 동정심을 베푸소서. 또 나를 취하사 당신의 가장 안전하고 신실한 보호막 아래 놓으시고 당신의 행복하고도 총애 받는 신하 중 하나로 삼으소서. 또한 나의 이름을 당신의 처녀 가슴에 새기시옵소서.

    사제께서는 중보의 본보기로 성 요셉을 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요셉의 중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요셉에게 바친 「라콜타」(Raccolta) 기도들 가운데 들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인용문을 볼 때 과연 제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보호자이신 자애로운 요셉이시여, 우리와 성 교회를 보호하소서.

    동정녀들의 수호자요 거룩한 아버지이신 요셉이시여, ‘죄 없으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신실하게 보호하신 분이시여, 내가 사랑스런 두 보증인 곧 예수와 마리아를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하며 간청하나이다. 나를 모든 불결함에서 보존하사 흠 없는 생각과 순결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항상 정조를 지키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경건 기도서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제쳐놓고 그분보다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천사들과 성자들을 중재자로 내세운 예를 수도 없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20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일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오직 그분께만 간청할 수 있다.”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한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70년에 삼위일체 이단 교리인 아리우스 주의를 비난하면서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신격의 영광을 격하시키면서도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이시다.”라는 성경 구절의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을 조롱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연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 즉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런 구절이 주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 성도들이 결코 창조된 존재를 가리켜 자기들의 도움이요 피난처라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성경 말씀과 일치합니다.

    성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1-2).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의와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마음은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인자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언제나 풍성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따른 자신의 어머니나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에게 간청할 어떤 성자나 천사 같은 중간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중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제사장으로 동정심이 많은 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가 됩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다른 어떤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하신 중재자이십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사제께서는 신자들이 땅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하늘의 성도들이 변호해 주는 것과 것으로 여기시면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그 편지의 끝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료 신자인 당신을 위해 제가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나도 당신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 곁에서 나의 중보자와 나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당신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성령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중재자와 변호자의 신분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 크리스천으로서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할 뿐이며 결코 저의 개인적인 공로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사제께서 읽으라고 보내 주신 설교 말씀 즉 사제께서 성 요셉의 중보에 관해 설교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과 저의 생각이 분명히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친근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경계할 만큼 조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어떤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바로 이 복을 원합니다. 제가 만일 천주교가 제시하는 수많은 작은 중보자들 즉 마리아와 성인과 천사들을 원하여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저는 영원토록 이 복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추신 - 저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가 천주교 성당의 사진을 정면에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정문 위에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영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마리아에게로 오라. 그녀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마리아를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여긴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닙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을 이보다 더 무섭게 왜곡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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