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다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지난번 편지의 결론 부분에서 사제께서는 비록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결국 영생은 기독교의 여정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킨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적절한 예로서 사제께서는 주인의 명령을 끝까지 잘 지킨 자에게 주인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크게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결코 서로를 혼합시킬 수 없는 진리의 두 선(線)이 확연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중 한 가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왕좌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값으로 친히 사신 구원 즉 우리가 값없이 얻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로써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시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난 이 칭의의 복에 관해서 성경은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공로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행위와 공로는 이처럼 엄청난 구속(救贖)을 얻는 데 필요한 속죄 값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들은 구원받은 뒤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이 엄청난 선물을 유지하는 데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선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수고하셔서 친히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지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 명쾌한 설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제께서 성경을 펴서 로마서 3장 1절부터 5장 11절에 이르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완전히 길을 잃었음을 발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들로 인한 화목 제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더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이것에서 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요 완성된 사역으로 이미 끝이 난 사역입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미 끝난 일에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것을 망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에는 사람의 어떤 공로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도 필요 없고 성자나 천사의 중보도 필요 없으며 의식이나 예식도 물론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게 만든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유효합니다.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버나드)가 죽는 순간에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은혜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께서는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시여, 당신의 상처만이 내가 내세울 공로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그분의 공로 위에 서 있네. 나는 더 이상 안전한 기반을 알지 못하네. 임마누엘의 땅 영광이 거하는 곳이라도 그분보다 안전하지는 못하리. 이것은 행위와 상관없는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빚더미 속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서 나지 않고 모든 신자가 선한 일을 했으므로 이로 인해 각 신자에게 빚을 지신 하나님께서 어쩔 수없이 그 빚을 갚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은 이런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며 사람의 의(義)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공로는 오직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단 번에 성취하신 사역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로는 행하는 데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공로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행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도 완전히 제외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 큰 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 2장에서도 똑같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또한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6절). 우리는 결코 이 두 원리를 혼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둘 중 하나로만 구원받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제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과 또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사 지키고 따르라고 하신 지침들에 순종할 때에 마지막 날에 이에 대한 보상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성경 구절이 영혼 구원의 문제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보상을 주실 자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제께서도 확인해 보시면 이 점을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은혜로 영생을 소유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 의롭게 된 이후에 그들의 몸에서 이룬 행위들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보상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련한 처지의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그는 본성과 행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영원히 불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그 순간 영생을 소유합니다. 저 큰 대적자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고소한다 해도 그 모든 고소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한한 효능에 의해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영원토록 구원받습니다. 전도서 3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리라.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무엇을 뺄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그에 부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이제 무한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주님께 복종해야 하며 말씀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따라 걸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제 상태가 바뀌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처럼 것을 책임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 함께 모일 때에 여기 이 땅에서 그분을 섬긴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됩니다. 보상과 그에 따른 관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 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의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딤후4:7-8).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그 날을 바라보며 그때에 거기에 자신을 위해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 일이 자기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여기서 관은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여기의 관(Crown)은 왕들이 쓰는 관(Diadem)이 아니라 경기의 승리자들에게 주는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획득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가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사제께서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도 결코 이 사실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드러난 은혜를 나타내야 하며 성령의 열매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믿음 고백이 거짓 고백이 아니라 참 고백임을 분명히 보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에 동의를 표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마음속에 받아들여 우리 속에 그 증거를 소유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선한 행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열매를 맺으며 특별히 선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이같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1-22). 사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노인이었으며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그는 장차 자기에게 씨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의 출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메시아가 이삭을 통해 오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래서 사실은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 행위를 가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유했던 믿음이 산 믿음임을 보여 준 증거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보통 ‘신실한 말’(faithful saying)이라 불리는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밀이로다.”이며 다른 하나는 디도서 3장 8절로서 “이 말은 신실한 밀이로다. 원하건대 너는 확고하게 이것들을 단언(斷言)하라. 그 목적은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진리의 양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그분에게 모든 찬양과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부지런히 선한 행위를 이루어야 한다고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선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다 같은 정도의 영적 기쁨을 맛보지는 않습니다. 그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도 보상에 관한 한 서로 다른 등급의 보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도 동일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많이 맞으며 어떤 자들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에서 쫓겨나 바깥의 어두운 곳에 즉 불 호수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지만 그들이 받는 형벌의 정도는 그들의 죄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들도 그들의 유일하신 구원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영원히 하늘나라에 거할 것이나 그 영원한 왕국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고 어떤 보상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므로 과연 누가 이와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께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실 것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성경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과연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그 믿음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제 편지가 사제님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편지에서 길게 답변을 적기보다는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제기한 문제 중 하나라도 가볍게 대하고 싶지 않으며 사제께서 제게 보낸 답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저는 사제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싶지 않으며 단도직입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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