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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성인들의 신화 : 프란시스와 어거스틴조회수 : 1011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7월 9일 15시 38분 5초
  •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성인들의 신화 :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성자가 아닌 성도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이다. 먼저 ‘성자’ 혹은 ‘성인’(Saint)이란 단어로 회칠 당한 ‘성도’(Saint)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한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인 것이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다. 그들은 구원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부터 인간들에게 두려고 온갖 술수를 꾸며 왔다.

    살아 있는 죄인인 교황이 성자 추대식이라는 기이한 의식을 통해 죽은 죄인들을 성자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지막 나팔불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감히 죄인인 한 인간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까지 2천 명이 넘는 성자들을 생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트남 성자를 추대해 주지 않는다고 로마 교황청에 항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은 성자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는 로마 교황청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날조된 성자들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승려)이었다가 진리를 찾아 로마 종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다시 살아난 중」(The Monk Who Lived Again)이란 책을 펴낸 몬타노 박사는 카톨릭 도미니칸파 소속의 유능한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레스(Porres, 1579-1639)의 전기를 쓰라는 명령을 시달 받았다. 그리하여 남미 페루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포레스를 성자로 추대하기 위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전기를 써야만 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를 갖고 성자 추대에 필수적인 기적에 관한 자료를 보완해야만 했던 몬타노 박사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포레스의 전기를 꾸며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포레스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순전히 몬타노 박사에 의해 조작된 이 성자는 오늘날 페루의 사회 정의 구현의 수호 성인이 되어 있고 이 날조된 성자는「브리태니커 백과사전」안에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Porres, San Martin de 란 참조 바람).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백년이란 세월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혀지고 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종교 성자들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볼란디스트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는 그의 저서「성자들의 전설」(The Legends of the Saints)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학자인 아트워트는「성자 사전」(The Dictionary of Saints)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된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라고 시인하였다.

    프란시스의 신화

    이탈리아의 종교사에서 앗시시의 프란시스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매우 겸손했고 단순했으므로 카톨릭 교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확실히 그는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수도승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전성기에 또 카톨릭 교회가 세속화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기에 이 보잘것  없는 수도승은 가난과 단순한 삶과 어떤 신비적인 것을 가르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격동의 시기에 프란시스는 가난을 외치며 단순한 삶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명예가 훼손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프란시스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큰 욕망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런 욕망을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는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따라서 자기 아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의 품위에 걸맞은 매우 섬세한 옷과 멋있는 갑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비록 그가 젊어서는 난폭했지만 후일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언젠가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볼 것이오.

    성 보나벤튜어에 따르면 앗시시에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마치 예언자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프란시스를 만날 때마다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시스의 발 밑에 펼쳐 놓고 프란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나는 후대에 그가 전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쉽게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영구히 자리를 잡곤 한다. 실제로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그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앞서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인 엥글레베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야망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옷을 재거나 자기 돈으로 먹여 살린 무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프란시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영적인 것을 기대했다. 그는 프란시스가 귀족의 대열에 낄 것을 바랐다.  사실 영광스럽게 이러한 것을 성취하는 길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1201년에 페루지아는 앗시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은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1201년 11월에 프란시스는 폰테산 지오바니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포로로 잡혀 페루지아에서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매우 즐겁게 생활을 했고 그래서 그의 동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도대체 당신 미쳤소? 우리가 이렇게 감옥살이를 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프란시스의 대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생각해 보고 언젠가 온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슬퍼하려야 슬퍼할 수가 없군요.”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교황청과 아플리아 지방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의 돈으로 산 멋있는 갑옷을 입고 그와 그의 종자는 교황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로마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떠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매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꿈은 프란시스가 야망을 이루는 것을 도와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날 밤에 프란시스가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셀라노의 토마스는 최소한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감 파는 가게가 멋있는 무기와 안장 등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방에 앉아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었다. 프란시스가 영문을 몰라 놀라자 어떤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아름다운 여인과 군인들이 모두 다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프란시스는 아마도 이 꿈이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어두움 같은 것이 그를 덮으면서 그가 내린 해석이 틀렸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 그가 스폴레토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음성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도대체 이 모습을 하고 어디에 가고 있느냐?”

    “저는 지금 아플리아로 가서 전쟁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주인과 종 중 누구에게서 네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물론 주인에게서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의지하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왜 종을 따르느냐?”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프란시스는 물어 보았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할 일을 계시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언젠가 내가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위대한 왕자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고 앗시시의 거리를 통과하여 음악 행진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그는 강물같이 넘쳐나는 사랑 속에 빠져들게 되어 황홀감에 젖게 되었고 꼼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고 토마스 사제는 기록한다

    그때부터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되었으며 급기야 프란시스파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프란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를 내시며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지만 프란시는 모든 종류의 노여움이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폭력이든지 다 증오했다. 심지어 그를 흠모하는 엥글레베르트조차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용감했던 프란시스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려 했고 어떤 새로운 업적을 고안해 내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 했으며 순교자가 되려 했고 끝내는 수난의 표적과 함께 죽고자 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란시스는 디도서 3장 5절과는 대조적으로 선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 했으며 또한 갈보리에서의 예수님의 승리를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스스로 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글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청하노니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은 은총으로 더불어 이 편지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귀한 말씀으로 이 편지를 받으라.

    크게 되고자 한 프란시스의 야망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크게 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만이 달라졌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스스로 기사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서까지도 자신이 꿈꾸어 온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회심 후 몇 년간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자요 위대한 왕의 전령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원탁의 기사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각각 부인이 있어야 했으며 그의 부인은 ‘가난’이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꿈에 본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밖에서 그는 포베렐로 즉 ‘가난한 소자’였지만 안에서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위대한 기사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란시스의 작품 중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널리 배포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유명한 프란시스의「평화의 기도」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섯 개의 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절은 음악에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며 따라서 카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절을 아는 곳이 없다. 이 구절만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카톨릭 교회가 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프란시스의 작품을 교묘하게 편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그의 신학이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행위 신학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구원은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오게 된다. 그 예로 평화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란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로마서 4장 4-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이 구절은 한 마디로 그의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되 행위 즉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하신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저주받을 다른 복음을 전했으니 이는 그가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구원이 오직 그 믿음만을 통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한 행위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인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카톨릭 신앙에 매달리자.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신부들을 공경하되 죄인일지도 모를 그 사람들(신부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성직 때문에 그들을 공경하자. 이 신부들만이 제단 위에서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몸과 피를 거룩하게 만들며 그것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이 구절의 문맥상 우리는 프란시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 즉 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를 극구 칭찬하는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어쩌면 한번도 그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음의 글에는 미사와 신부직에 대한 프란시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신부에게 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부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니 이는 그의 몸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공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를 드릴 때에 그분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력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킬 것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된다.

    심지어 프란시스는 성체 즉 빵 조각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귀하고 거룩하므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들과 기타 다른 모든 것은 귀한 것으로 존중히 여겨야 한다.

    프란시스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관대해야만 하나니 이는 구제하는 것이 죄로부터 사람의 혼을 깨끗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해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준수하며 과다하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늘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여 사랑과 긍휼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행위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선한 행위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을 감사하는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속죄 값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8-10절에서 먼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적고 그 뒤에 선한 행위의 삶을 적었던 것이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런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이 점을 깨닫지 못했고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예식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프란시스는 자신이 청빈 생활을 주장했으므로 그 당시 카톨릭 교회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및 권위에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제 이 ‘가난한 소자’는 예언된 대로 전 세계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앗시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며 이 사실은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을 버리면서까지 유명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시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는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이제는 ‘메시지’ 대산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자신들의 해석 체계를 정립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대인들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도 이를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했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국가 체제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고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 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 원제목은 「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 - 이라는 역사 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 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 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 만한 논리성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미화되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비드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교회-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주후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 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편 3장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했으며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하나님의 도성」은 이 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옛 바빌론의 ‘도시-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 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 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 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 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 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의 영역에서 주교는 기독 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 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가에서의 반란 진압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회(고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셋째로,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한 결속 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의 지도 아래 흠 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파를 향하여는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파를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카톨릭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파를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하에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 W. 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 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인 교회로 대치시켜 버림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이 말씀해 주듯이,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 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 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그 이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기 위해 교황 하드리안 1세를 방문한 샤를마뉴 대제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해한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사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칸파는 여우로, 도미니칸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e, 1330-1384)는 계속해서 갈멜파 및 어거스틴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 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스부르크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Reformation)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의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 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만인 제사장(벧전2:9-10)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제사장/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11:4)로 둔갑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을 보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적 출세를 위해 이미 아들까지 낳고 동거 중인 그의 내연의 처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 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고백록」이 들려 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 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그는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계급에 절대 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atholic Church)의 통일성으로 삼고 -  참고로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 교회의 특성을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전통’에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다 ‘성물 숭배 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죄인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이 무려 164회나 기록되었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 온 카톨릭 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 교회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음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빌3:13-14) 그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이고 있는 것인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는 것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 공회가 결정하고 발표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어거스틴파에 속했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에서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살아 계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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