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성경교리

  • 성경공부
  • 성경교리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진화론의 붕괴 01조회수 : 875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7월 17일 13시 38분 26초
  • 진화론의 붕괴 1

    ● 스콧 휴즈

    한 번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딸이 학교에 갔다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이들이 우리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말하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이것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듣게 되는 질문일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과연 우리 부모들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원숭이를 만드셨고 그것이 수십 억 년의 진화를 통해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대학교에서 진로와 인생 상담을 하면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학생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자기 조상이 원숭이일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 나는 누구인가?(Who am I?)

    2. 나는 어디서 왔는가?(Where did I come from?)

    3.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Why am I here?)

    4.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Where am I going when I die?)

    짐승들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끝이다. 그런데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지 않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고 철학의 주제 역시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인간적인 답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이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빅뱅에 의해 흙덩어리에서 나와 아메바로 변했다가 무수한 진화 과정을 거쳐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무슨 목표가 있을까? 그들은 왜 살까? 짐승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한편 고차원의 창조주가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설계해서 이 땅에 내놓았다고 믿는다면 설계자의 설계 목표를 완수해야 하는 삶의 목적이 존재하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다. 주변을 보라.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을 판단하여 폐기 처분한다. 이와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흙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가 그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때가 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시킨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폐기 처분되는 것을 ‘유황 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계20:10).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목적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내게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화론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인간 사회 전체를 지배해 왔고 특히 교육 기관들은 진화론 지배의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방송 매체들은 TV 프로그램과 진화론의 관점에 충실한 신문의 사설들을 통해 마치 유기체 진화가 ‘사실’인 것처럼 선전해 왔다. 대개 이 같은 중독 현상은 뚜렷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며 특히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침투할 때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우 효과적으로 사회 속으로 파급된다. 독재자 히틀러는 이런 점을 잘 파악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큰 목소리로 오랫동안 여러 차례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된다. 특히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도덕적 문제의 대부분은 진화론적 사고에 의해 부화된 인본주의적 철학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소위 ‘신윤리’라 하는 것은 사실상 ‘윤리 부재’ 철학에 의한 결과이며 이처럼 유행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관점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사상이나 생명에 관한 분야는 오늘날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25년에 미국에서 ‘스코프스 재판’이 열린 이후에 일반인들은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고 성경적 창조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고 내동댕이쳐 버렸다. 무기력한 기독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진화론자들의 대폭격 앞에 무릎을 꿇어 타협하거나 뒤로 후퇴해 버렸으며 실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많은 신자들의 믿음은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 전 세계의 모든 학생들은 살아있지 않은 물질로부터 생명이 나온다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배우고 있다. 레디, 파스퇴르, 그리고 스팔란자니는 생명이란 반드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른 생명으로부터 나옴을 증명했다. 그 결과 더러운 옷에서 쥐들이 태어난다는 것과 같은 우스운 생각들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발생설의 부당함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자연발생에 의해 생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얼마나 역설적이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생명체인 흙덩이라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메바로 바뀌고 고등 동물로 변한다고 배우고 있다. 실제로 유기체 진화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자연발생설이 유행했던 16세기경의 불합리한 사상이 다시 한 번 세련되게 꾸며져 복구된 것에 불과하며 결국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의 아이러니는 ‘유기체 진화’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하며 모순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된다. 합법적이며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이런 생각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편 ‘성경적 창조론’은 최근에 와서 다시 회복되고 있으며 매우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크게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진화론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 설계’ 혹은 ‘지적 설계자’라는 개념을 믿고 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이 그냥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수많은 비기독교인 과학자들이 창조론/지적 설계론을 선호하며 진화론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 내의 여러 주(洲)들은 과학 교재 안에 창조론을 넣을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 캠퍼스 내에서도 창조론에 대한 강연과 논의들이 많이 진행되어 왔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각 방면에 뉴에이지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큰 서점에 가보면 뉴에이지 문서들을 취급하는 난이 기독교 및 다른 종교들의 문서들을 다루는 난만큼이나 될 정도로 이제 뉴에이지는 대중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CD나 레코드판들을 취급하는 곳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며 특히 인기 연예인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상이 쉽게 전파되고 있다. 그렇다면 뉴에이지 운동이 그처럼 인기를 끌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뉴에이지 운동은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사람의 윤회를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그렇다면 사람의 윤회란 무엇인가? 윤회란 사람이 주어진 삶 속에서 진보(혹은 진화)하게 되면 그 다음의 삶에서는 더 좋아지고 이렇게 수천 번의 진화를 통해서 결국에는 신(혹은 부처)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인간의 진화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고 결국에는 신(혹은 부처)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영적 진화에 대한 가르침이나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었다는 육적 진화의 가르침은 결국 동일한 것으로 모두 사탄 마귀에게서 나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인류와 우주의 모든 기초는 창세기 속에서 발견된다. 죄, 사망, 질병, 결혼 등의 기원, 올바른 윤리관, 성경적 구속사, 구원자의 필요성 등이 모두 창세기 속에 있다. 이 세상의 책 중에 사람이 죽는 이유를 가르쳐 주는 책이 있는가? 죽는 이유를 안다면 살 수 있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창세기의 처음 11장을 신화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사고 체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우주에는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 ‘보이면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눈에는 무한대에 이르는 빛의 스펙트럼 중에서 가시광선이라는 미세한 스펙트럼만 보인다. 이것을 크기로 비유하자면 지구와 10원짜리 동전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이 정도로 유한하다. 그러므로 무한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이 필요하며 사람은 짐승과 달리 바로 이런 능력을 부여받았다. 우리가 늘 당연히 아는 것으로 간주하는 ‘믿음’(Faith)이란 무엇인가? 보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않고 통찰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킹제임스 흠정역 고후5:7).

    킹제임스 영어 성경의 단어를 살펴보면 ‘본다’는 의미의 ‘sight’는 ’믿음’(faith)과 정반대로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믿음’은 ‘sight’의 반대말인 ‘insight’ 즉 ‘통찰’(보지 않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3)고 기록한다.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한다’의 ‘Create’라는 단어는 단순히 ‘만든다’의 ‘Make’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창조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부터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만든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무엇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 있는 히브리서 말씀은 분명히 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無)에서 만들어졌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음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혹은 우주가 수십 억 년 전에 형성되어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랬을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다. 즉 ‘창조’나 ‘진화’와 같은 개념은 ‘믿음’의 문제이지 결코 증거를 눈앞에 제시해야만 그 진위를 알 수 있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창조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설계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비우며 거기에 순응하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반면에 진화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며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결국은 마귀를 자기들의 구원자로 믿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이가 어떠한 믿음을 갖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 여정이 결정되며 그가 앞으로 영원히 가서 살게 될 장소가 결정된다. 이렇게 창조의 믿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모든 사람의 삶의 목표를 정해 주는 필수불가결한 기초이다.

    미국에서 10년간 유학 및 이민 생활을 하다가 다시 모국에 돌아온 지 벌써 16년이 되었다. 대학에서는 물리학의 한 부류인 열역학을 학기마다 강의하고 있다. 이제 추후의 글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열역학은 ‘물질 및 에너지 보존의 법칙’(제1법칙)과 ‘만물 쇠퇴의 법칙’(제2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재로 채택한 영어 교과서의 저자는 기계공학적 관점에서 제1, 제2법칙을 모두 설명한 뒤 과연 이 법칙들이 우리의 사고 및 우주의 영역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를 학생들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이 부분에 오면 나는 학생들에게 ‘창조와 진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 뒤 내 딸이 물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한다. 그들에게 ‘믿음’과 ‘과학’의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대부분의 학생들도 자신들이 단순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자신들의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믿을 뿐이며 그것이 과학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앞으로 이 칼럼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보여 주려 한다. 첫째,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의 예를 들어가며 유기체 진화론의 허구점들을 과학적으로 밝히 보여 줄 것이다. 둘째, 성경적 창조론과 노아의 대홍수/대격변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성경이 얼마나 과학적인가를 보여 줄 것이다. 마음을 열고 상반되는 견해를 비교해 본 뒤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바란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 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도 네게 밝히 알려 주리라.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욥12:7-1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