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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진화론의 붕괴 11조회수 : 827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7월 17일 14시 1분 29초
  • 진화론의 붕괴 11

    ● 스콧 휴즈

    창조의 생물학적 증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참으로 놀라우며 불가사의한 곳이다. 이 지구는 시간당 100km를 달릴 수 있는 치타, 17년간이나 잠잘 수 있는 곤충들, 45분 동안이나 물속에 머물 수 있고 500m나 잠수할 수 있는 웨델 물개(Wedell seals), 자신의 팔을 먹으면 또 새로운 것이 자라곤 하는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잉크를 쏘는 낙지, 물을 5m나 쏘아 벌레를 잡는 사수어, 시간당 230km의 속도로 먹이를 덮치는 송골매 등의 고향이다.

    이러한 생명체들과 그들의 놀랄 만한 능력을 다 나열한다는 것은 아마도 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지구는 진화론적 설명을 완벽하게 무시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한 ‘적응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자연 안에는 독창적인 설계와 목적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이 흘러넘친다. 우리가 사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목적과 설계라는 개념은 ‘목적론’(teleology)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생명체들이 그것들의 환경에 대해 불가사의하게 적응하는 것과 그것들의 놀라운 상호 관계를 경외의 눈으로 지켜본다. 그들은 이러한 복잡하고도 정밀한 ‘적응품들’이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전혀 없는 자연적 진화의 점진적 과정에 의해서는 절대로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온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광범위한 생명체들의 아름다움, 복잡함, 그리고 완벽함이 초지성적인 창조자와 설계자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믿고 있다.

    자연 속의 뛰어난 설계

    유명한 여론 조사 기관의 창시자인 갤럽(Georgy Gallup)은 한때 하나님의 존재를 통계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을 생각해 보라, 각각의 모든 기능이 저절로 생길 수 있는 확률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인체의 모든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들을 표면적으로라도 짚고 넘어갈 만한 충분한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당혹케 할 정도로 복잡한 인체의 작은 부분인 눈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대자연 속에 있는 뛰어난 설계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인간의 눈

    진화론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인간의 눈을 점진적인 우연적 발달로 설명하려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자동으로 목표를 찾으며 초점을 맞추고 알맞게 조리개를 열 수 있는 인간의 눈은 거의 완벽한 어둠 속으로부터 눈부신 태양 빛 사이의 전 영역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며, 머리카락과 같이 가는 물체들도 볼 수 있고 매일 평균 10만 번의 서로 다른 동작을 취할 수 있으며, 컬러 입체 화면을 연속적으로 우리에게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보통 아무런 불편 없이 행해지며 우리가 잠잘 때 그것은 스스로 정비하는 일을 수행한다.

    인간의 눈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해서 과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의 복잡한 기능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 움직여서 인간의 시각을 만들어 내는 복잡한 구조와 작동은 정말로 놀라우며, 고도로 정교한 눈의 동시성 등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눈이 점진적인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눈이란 완전히 발달되기 전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것은 더 분명한 진리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집적된 완전한 기능체로서의 역할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단계적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상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개념이다.

    다윈(Charles Darwin)은 눈과 같은 구조물을 설명하려 할 때 진화론이 전적으로 부적절함을 시인했다. “눈과 같이 거리에 따라 초점을 맞추고,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입체적 및 색채적 차이를 종합할 수 있는 독특한 장치가 자연 선택에 의해 저절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스스럼없이 고백하건대 터무니없는 일이다. 눈만큼 완벽한 조직체가 자연 선택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신념은 모든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우호적이며 종합적이며 동시적인 돌연변이들이 무한히 생긴다면 혹시 눈과 같은 기관이 만들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에게 관대히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와이송(Wysong)은 그런 식으로 눈이 형성 될 가능성이 번 중 단 한 번 정도뿐임을 계산하였다. 만일 진화론이 주장하는 대로 눈이 지금의 눈처럼 진화하기 위해서는 우연이 단 한 차례만이 아니고 여러 차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의 문제들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샐리스배리(Frank Salisbury)는 이런 의심스런 추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의심은 소위 평행 진화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데 그것은 심지어 눈과 같이 복잡한 것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오징어나 척추동물 혹은 절지동물 등에서 매번 우연한 발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단 한 번에 이러한 것들의 기원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진화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이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내려야만 하는 결론은 더욱더 명백해졌다. 눈은 진화적 발달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처음부터 완벽하고 놀라운 형태로 창조되어진 것이다. 스터미우스는 다음과 같은 현명한 말을 했다. “눈에 대한 조사는 무신론에 대한 해결책이다.”

    삼엽충의 눈

    비록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삼엽충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자연 안에 있는 독창적 설계와 목적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살아 있는 유기적 조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눈의 수정체와는 달리 삼엽충의 눈은 무기적 방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삼엽충의 눈의 수정체들은 화석의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왔고 따라서 화석학자들은 그것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하나의 수정체로 이루어진 인간의 눈과는 달리 삼엽충의 눈은 종류에 따라 한 개의 눈에 100~15,000개의 수정체를 갖고 있으며 매우 독특한 이중의 수정체 구조로 설계 되었다. 이 특별한 구조는 삼엽충으로 하여금 물속에서도 찌그러짐 없이 완벽하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애비의 ‘사인의 법칙’(Abbe's Sine Law)과 ‘퍼르맷의 원리’(Fermat's Principle) 그리고 다른 여러 광학의 원리에 대한 지식들이 이 같은 삼엽충의 수정체들의 설계 속에 담겨져 있다. 그것들은 매우 지식 있는 물리학자(하나님)에 의해 조심스럽게 설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실 창조주의자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동의한다.

    해삼

    해양 생물 가운데 존재하는 가장 흥미로운 신비 중 하나는 놀랍게도 해삼에서 발견된다. 해삼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의 해안을 따라 거주하며 주로 말미잘을 먹고 산다. 말미잘은 그다지 해삼의 마음에 드는 저녁거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그는 촉수 위에 있는 수천 개의 날카롭고도 작은 세포를 사용하여 침입하려는 적을 독이 있는 침으로 찌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찔리게 된 침입자는 전신이 마비되고 결국 말미잘의 위로 빨려 들어가 소화되어 버리고 만다. 비록 말미잘이 이러한 놀라운 방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해삼은 결코 말미잘에게 찔리거나 그것의 날카로운 세포를 자극하지 않고도 혹은 그것들을 소화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먹을 수 있다. 대자연 안에 있는 이러한 환상적인 신비들 중 하나는 해삼이 이 불쌍한 말미잘의 날카로운 세포들을 어떻게 처치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해삼이 먹은 말미잘의 찌르는 세포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 위와 연결된 섬모가 있는 관을 따라 내려가서 끝에 있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찌르는 세포들은 이 작은 주머니들 안에서 정렬되고 저장되어 해삼의 방어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삼이 공격을 받게 되면 그것은 가련한 말미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침을 사용해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믿기지 않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도로 복잡한 변형의 과정은 진화론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무엇보다 이 찌르는 세포들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삼은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중성화 시킬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화학적 수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해삼은 말미잘의 조직만 소화하고 날카로운 세포들은 소화하지 않는 새로운 소화 시스템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해삼은 날카로운 세포들을 정렬하고 저장하고 유지하는 고도로 복잡한 구조뿐 아니라, 섬모가 있는 매우 정교한 관과 작은 주머니를 교묘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결국, 진화론의 기대와는 반대로 말미잘은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해삼의 계획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명백하게도 이렇게 놀라운 적응 설계의 존재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렇게 신비한 관계에 대한 유일하며 합리적인 설명은 이러한 조직체들이 그들의 생태학적 지위에 맞게 창조자에 의해 특별히 창조되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개미

    자연에서 관찰 되어왔던 또 다른 흥미 있는 관계는 중남미의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 것이다. 이 나무는 사납게 먹어대는 개미들이 서식하는, 속이 텅 빈 커다란 가시들을 갖고 있다. 또한 나무에 있는 작은 혹들은 개미들에게 음식을 공급한다. 따라서 개미들은 이 나무로부터 음식과 피난처를 동시에 공급받는 것이다. 이 나무는 이들 개미들과의 거래 조건으로 모든 동물 침입자와 식물 경쟁자로부터 완벽한 보호를 제공받는다. 이 개미들은 모든 침입자들을 무섭게 공격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생 관계의 참으로 놀라운 면은 이 개미들이 모두 훌륭한 정원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자기들의 집이 되는 나무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규칙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그 나무 주위에서 감히 머리를 내미는 모든 녹색의 어린 가지들을 물어 뜯어버린다. 그 결과로 이 특별한 나무는 풍부한 태양빛과 공간을 갖게 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한 경쟁이 항상 치열한 열대의 정글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것은 드물다. 실험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나무들 중 하나로부터 모든 개미들이 제거되었을 때 그 나무는 2~15개월 안에 죽고 말았다. 진화론자들은 보통 이러한 유형의 공생 관계를 상호 순응의 예로 분류한다. 물론 그들은 결코 이처럼 뒤얽힌 관계가 진화론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관점은 과학이 아닌 믿음과 가정의 문제로 계속 남게 될 뿐이다. 이러한 경이적인 관계들이 전지하신 창조자의 손에 의해 계획적이고 지능적으로 설계되었다고 인식하는 창조론자들의 믿음은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다.

    정화 공생

    진화론적 생각이 옳지 못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자연계의 경이로운 관계는 청소하는 공생 관계이다. 예를 들어, 작은 물고기나 새우를 잡아먹으러 돌아다니는 큰 물고기들의 입은 고기 부스러기들과 기생충 등으로 인해 결국 더럽혀지게 된다. 몇몇 종류의 물고기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지역의 청소를 담당한 부서를 찾아간다. 청소 담당 부서에서 큰 물고기는 입과 아가미실을 열어 무서운 이를 드러낸 채 서 있고 용감한 작은 청소 물고기들과 새우들은 자신들의 임무인 청소를 하며 입속을 헤엄쳐 다닌다.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 작은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의 입에서 무사히 헤엄쳐 나오고, 큰 물고기들도 유유히 헤엄쳐 사라진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쌍방이 이익을 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실이 이렇게 특별한 관계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같은 관계가 성립된 이후에는, 오직 생존 가치라는 것이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유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포식성 물고기와 청소 고기 그리고 작은 새우의 여러 종류들이 이러한 운영 체계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진화론자들을 더 당황하게 만들어 버린다.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관계는 결코 단순한 기회나 진화론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생겨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동물들의 자기 보존 본능은 작은 물고기들이 이치에 맞지 않게 자살 행위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쉽게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유혹(작은 물고기들)과 귀찮게 하는 청소자들에 대한 역반응(큰 물고기)은 이러한 관계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공생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들이 어떤 특별한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는 정화 공생이 단지 물고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말하려 한다. 놀랍게도 어떤 이집트 물새는 나일 강에 사는 악어의 음식 찌꺼기와 기생충을 치우기 위해 악어의 입 안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가 청소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 새 역시 전혀 자기 몸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온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별 창조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았다. 이런 증거들이 너무나도 명백히 창조를 가리키는데 어째서 과학자들은 혹은 많이 배운 사람들은 이런 증거를 묵살하고 진화를 택하는 것일까? 어제도 이 질문을 받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명체와 온 우주에 관한한 창조와 진화 둘 중에 하나뿐이 없음을 시인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창조를 인정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주인이요 심판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자기가 창조물이라고 시인하게 되면 자기를 만든 창조주에게 자기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며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를 원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와 믿음이 나오게 되며 그 중에서 가장 편만한 것이 바로 인본주의/진화론 종교체제이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며 이들 모두가 죄인임을 증언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그들은 곧 모든 불의와 음행과 사악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롬1:28-32)

    창조주를 바로 알고 창조물로서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혹시 독자들 가운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분이 있으면 진지하게 깊이 고민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솔직하게 갈구하는 심령에게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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