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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조회수 : 7451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9월 28일 13시 15분 40초
  • 가톨릭의 신비적 영성에 중독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김성건 논설위원/서원대 교수

    지성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히피 그룹을 위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기성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반(反)문화운동이 잇달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대표한 거대 관료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럽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세계의 보편적 교회를 표방하는 가톨릭교회로서는 그 같은 비판적인 저항의 시대 조류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해 모종의 신학적 대타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톨릭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년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타종교에 대한 종전의 권위주의적, 배타적 태도를 바꾸어 종교 간에 대화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초교파주의)의 선봉에 서는 등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일대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개신교회의 가르침 양자 사이에 종래 존재했던 뚜렷한 간격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게 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지난 18세기 말 조선에서 포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적 희생자 곧, 순교자를 내는 등 줄곧 강하게 이단시하고 금지했던 유교적 조상제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제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돌연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1세기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후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공인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있었던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요소를 상당 부분 수용한 전통이 오늘까지도 면면히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1960년대의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을 배경으로 지난 1980년대에 출현한 ‘탈근대’, ‘다원주의’, ‘개인주의’, ‘감성’ 등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과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나타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아래 세계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 전반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약 10년 전부터 ‘제도 종교’와 구별되는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크게 고조됐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측면은 바로 2006년 말 오늘에 이르러서는 본질적으로 다분히 주술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가톨릭 영성’이 16세기 말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등 각종 주술 타파를 목표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에 마저도 조금씩 미묘하게 침투해 이제는 사실상 거의 지배하게 된 새롭고도 자못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종교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회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소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신앙은 마땅히 가톨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믿는 한 사람의 개신교 신자로서 최근에 한국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이것의 위험을 제대로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재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의 이노베이션을 위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스타일의 영성’ 혹은 달리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영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영성은 많은 경우 이방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의례적인 기도 혹은 지루한 되풀이 기도, 영창, 곧 시편 따위의 글귀를 단조롭게 읊는 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명상(meditation),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단순히 안식을 취하는 명상적 행위 등이다.

    그래서 약 12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래 현재까지도 미국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미의 주요 신학교중 거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초교파적 풀러신학교의 ‘영성’ 코스 관련 주요 필독 도서 목록에는 물론 한국의 대표적 신학교들의 각종 ‘영성’ 과목의 경우도 저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등 로마 가톨릭 신자인 것을 새삼 주목할 수 있다.

    한편, 금년 여름 한국을 잠시 방문해 연일 개최한 집회를 통해 국내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 남가주 소재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 이 릭 워렌 목사 역시 명상, 집중기도 및 여타 가톨릭의 이교도적 영성 형태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저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 예로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존 메인(John Main)을 인용하고 있는데, 메인은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지도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같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워렌 목사는 북미 기독교계에서 현재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도 있는 <영적 훈련과 성장>과 <기도>의 저자인 퀘이커 출신의 신비주의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강조하는 ‘명상’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를 대표하는 목사로 이미 잘 알려진 포스터가 창시한 이른바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은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 교회를 위시해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의 각종 테크닉에 바탕을 둔 레노바레 운동은 본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진보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교파주의(ecumenism)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이다. 주지하듯이 교파 간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은 기본적으로 교리(doctrine)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로써, 필자는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가톨릭) 신비주의’와 ‘성서적 영성’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 내의 ‘신비주의의 발전’과 ‘성령운동의 번성’ 양자 사이에 매우 흥미 있는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과 카리스마 운동들은 놀랍게도 많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속에서 발전한 신비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John Wimber) 같은 이가 그의 책 <파워 이반젤리즘(Power Evangelism)>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아무런 문제없이 추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 진영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관점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 부흥을 위한 예언자적 충동(자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경험, 비전(환상), 내적 목소리, 황홀감과 엑스터시, 진위가 의심스러운 예언하기, 모종의 힘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각종 방언 따위 같은 카리스마 운동과 오순절 성령운동의 주요한 표현들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와 일치한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오순절 성령운동 및 카리스마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톨릭신앙과 새로운 복음주의가 기묘하게도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까? ‘교리’(doctrine, 신조)와 ‘헌신/신앙심’(devotion)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헌신/신앙심을 갖다 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차제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감정주의’(religious emotionalism)를 ‘기독교 영성’과 잘못 동일시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유명한 간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중생 체험과는 뚜렷이 모순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구굿닷컴 이영주 기자의 2006년 12월 25일자 글 ‘드라마틱한 간증의 함정’ 참조). 이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대한 강단의 가르침(설교)과 기독교계 언론의 수준 양자 모두가 아직 매우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끝으로, 필자는 신비적 경험에 대한 우리 개신교 크리스천의 사고를 기본적으로 틀 지우는 데 중심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가 나타나 있는 시편 131편과 천사숭배와 금욕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는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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