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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영상 문화 시대에 필요한 청각 교육조회수 : 1446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12월 23일 18시 37분 46초
  •                 영상 문화 시대에 필요한 청각 교육
     

    비디오 세대와 시각 우위의 사회
     
    흔히들 요즈음 젊은 세대를 가리켜서 비디오 세대, 영상 세대라고 부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메신저를 이용한 채팅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매체의 보급으로 인한 사회 환경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수동적으로 듣기보다는, 능동적 감각 기관인 눈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정보를 추적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시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는 현대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공기 중에서 짧은 시간 동안 진동하다가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보존이 어렵고, 말하는 이의 발음 상태나 듣는 이의 주의집중 정도에 따라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시각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종이, 돌, 자기매체 등에 저장이 되어 동일한 내용을 여러번 반복하여 열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문자나 도형으로 표시된 정보는 소리에 비해 객관적이며 메시지의 왜곡이 적은 편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청각 정보보다는 시각 정보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 셋이 모여서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없는 호랑이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반복적으로 하면 진실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뜻인데, 이는 청각 메시지는 조작과 왜곡이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완전한 청각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것을 권유하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말하기와 듣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지만, 글을 해독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은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말"보다는 지식인의 "글"을 우대하는 유교 문화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우리 말 자체에는 듣기와 관련된 표현들보다 보기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듣기에 대해서는 "듣다, 엿듣다, 귀를 기울이다, 귀담아 듣다"와 같은 몇 가지 표현들이 있지만, 보기에 대해서는 "보다, 엿보다, 째려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쳐다보다, 내려보다, 돌아보다, 살펴보다, 깔보다, 얕보다, 넘보다, 돌보다, 봐 주다, 본때를 보여주다" 등 다양한 언어표현들이 발달해 있으며, 심지어는 시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맛이나 냄새도 "간을 보다, 맛을 보다, 맡아보다"로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통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편집 방향을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바꾸었고, 인터넷 게시물에도 사진이 없으면 "시각적 증거"(사진)를 요구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개인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서도 사진이 있어야 조회 수가 높아지고, 사진이 있어야 사람들이 믿어줍니다. 사진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는 게시판도 있으며, 이런 게시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 "짤방용"(게시물 짤림방지용, 사진이 없어 게시물이 삭제 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 사진을 억지로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시각 편향 현상을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기에 대한 오래된 기억
     
    제가 어렸을 때에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신문에는 한자를 비롯하여 어려운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쉽게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릴 때 듣던 라디오는 어린 아이 주먹만한 건전지 8개를 직렬로 연결하여 넣어야만 진공관에 불이 켜지면서 한참 뒤에 소리가 들리는 큰 가방만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등장했고, 그 다음에는 집적회로를 사용한 소형 라디오가 시중에 보급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매체였습니다. 초창기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는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청취하는 매체였습니다. 시골에서는 이장님 댁에 있는 라디오에 스피커를 연결하여 동네 느티나무에 올려두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라디오 방송을 공유하며 들었습니다. (그래서 맥루한 같은 학자는 라디오가 고대 부족사회의 전통으로 돌아가게 하는 매체라고 합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서 족장의 말씀에 모든 부족민들이 귀를 기울이던 고대사회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지요. 히틀러가 라디오를 이용하여 독일 국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것도 바로 이런 라디오의 특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라디오가 소형화되고, 가격이 내려가고, 매체 내부에서 스피커와 같이 무거운 부분을 빼고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연결하여 듣게 하면서부터 점차 이것이 혼자서 듣는 사적인 매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그 당시에는 온 가족이 함께 라디오 앞에 모여서 뉴스를 듣고, 라디오 연속극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일곱 살 때, 저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집이 다른 집보다 형편이 넉넉했던 건 아니고, 친척 중 한 분이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미군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한국 돈으로 바꾸어 주던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텔레비전을 한 대 얻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저녁 시간만 되면 어린이 만화영화를 보려고 동네 아이들이 다 저희 집으로 몰려올 정도로 텔레비전의 인기는 대단했답니다.
     
    (혹시, 요괴인간, 서부소년 차돌이, 해치의 모험, 이겨라 승리호, 날아라 태극호, 달려라 번개호, 타이거마스크,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그로이저 엑스, 짱가, 마린보이, 우주소년 아톰, 달려라 009, 독수리 5형제, 공룡수색대, 정의의 소년 캐산, 닐스의 모험, 밀림의 왕자 레오, 요술공주 샐리, 요술공주 밍키, 빨강머리 앤, 쾌걸 조로, 철인 28호, 이상한 나라의 삐삐 등을 즐겨보신 분이 있다면 저와 거의 비슷한 세대일 겁니다.)
     
    그런데 볼 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보면서 웃고, 울고, 긴장하고, 환호하고 하다가 막상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언제나 뭔가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텔레비전을 볼 때에는 즐겁고 재미있지만, 실제로 그런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이 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라디오는 제게 언제나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어린이 프로그램 <무지개동산>과 라디오극 <마루치 아라치>는 제가 즐겨듣는 방송이었고, 저녁시간의 뉴스나 라디오 연속극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화려한 화면도 움직이는 영상도 없는 라디오가 제 관심을 끌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각 매체 시대에서 시각 매체 시대로
     
    원래 인간이 처음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시각 매체인 문자가 아니라, 청각 매체인 목소리였습니다.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은 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하던 미개한 사람들이 문자가 발명된 이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문명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은 결코 돌도끼를 휘두르며 짐승을 사냥하던 원시인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고래는 제외하고)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아주 뛰어난 두뇌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시각적인 문자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a mark)"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인간이 범죄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문자 기록이 널리 보급된 것도 노아 홍수 이후의 일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았고, 기억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암기하여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말로써 전달하여 물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에 내리신 홍수 심판이 있은 후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사람들이 지녔던 우수한 능력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지식과 정보의 단절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겁니다.
     
    옛날 음유시인들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같은 장편 대서사시를 모두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정도의 기억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된 이후,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께서 주신 암기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런 좋은 능력들을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 경우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고, 1번부터 70번까지의 반 친구들 이름을 순서대로 다 외웠고, 주요 기관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모두 다 외웠는데, 지금은 전화번호부나 수첩을 찾기도 귀찮아서, 휴대폰에 등록된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통화 연결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이나 책 등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전파된 후로는 사람들이 점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스승에게 묻고 배우며,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나 주인공과 상호작용을 하고, 책을 스승으로 삼고, 신문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들어 학자들은 인쇄술의 발명이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를 촉진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스스로 읽으며 생각할 기회라도 제공하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물은 미리 정보를 가득 채워서, 완전히 만들어진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정보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하거나, 제공되는 내용에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덧붙일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마샬 맥루한(캐나다 출신의 문명비평가, 매체사학자)의 미디어 이론에 의하면, 라디오가 제공하는 청각 정보는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시청각 정보에 비해, 정보의 정세도(definition, TV의 해상도와 같이 정보의 조밀한 정도)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진에 비해, 캐리캐쳐나 만화는 정세도가 낮으며, HDTV에 비해 흑백 아날로그 TV가 정세도가 떨어지며, 6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에 비해 30만 화소의 휴대폰 내장 카메라는 정세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정세도가 떨어지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경우, 그 정보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 수용자는 정보의 빈 여백을 메우고자 그 정보에 자발적으로 참여(invlovement)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경우에는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 카메라의 움직임과 영상 효과를 통한 자연스러운 장면 처리, 현실세계와 유사한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사실은 24분의 1초 단위의 불연속 프레임의 나열이지만)를 통해서 아주 정세도가 높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정보의 수용을 위해서 영화의 관객이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보면서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만화책으로 만들면, 만화의 한 컷과 다음 컷은 불연속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컷들 사이에는 많은 벌어진 틈(동작과 동작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은 그 사이의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신의 머리 속으로 상상하여 그 내용을 재구성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로 꾸며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하게 되면 정보의 정세도는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정보의 정세도가 떨어지는 대신 수용자는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여 이해합니다. 정보가 조밀하게 꽉 차 있는 "토끼와 호랑이"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그보다는 약간 정세도가 낮은 그림책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은 호랑이의 모습에 대해서 화면이나 그림책에 나온 그 모습으로만 지각하지, 머리 속으로 다른 모습의 호랑이는 상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옛날에 토끼 한 마리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라고 음성으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아이의 머리 속에는 바위에 기대누워 있는 호랑이가 그려지고, 다른 아이의 마음 속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호랑이가 토끼를 위협하는 장면이 떠오르고, 또 다른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토끼와 호랑이가 모두 옷을 입고 두 발로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즉, 정보의 정세도가 낮을 경우 수용자는 정보 수용과정에 자발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참여 과정을 통하여, 수용자는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그 매체에 몰입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라디오 음악방송을 들으면서 방송진행자(DJ)에게 빠져드는 것이나, 히틀러의 라디오 연설에 독일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에 동조한 것이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변정담 프로그램이라는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징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위 시간 내에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정보의 정세도, 이용의 편의성 등을 따진다면 단연 시각 매체, 그 중에서도 시청각 정보를 제공하는 영상 매체가 청각 매체보다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 매체는 시각 매체가 갖고 있지 않은 장점들, 즉 수용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며, 창의적인 사고를 촉진시키며, 수용자의 몰입을 유도한다는 좋은 점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성경 말씀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우리의 혼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벧후 2:8).
     
    (벧후 2:8, 킹흠정) (이는 저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물론,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모두 조심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보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죄를 범하였습니다(창 3:6). 아간은 여리고 성에서 노략한 물건들을 "보고" 탐심을 일으켜 죄를 범하였습니다(수 7:21). 다윗은 지붕 위를 걷다가 이웃집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아름다우므로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 11:2).
     
    (창 3:6, 킹흠정)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
     
    (수 7:21, 킹흠정) 내가 노략한 물건들 중에서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좋은 옷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것들을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것들을 내 장막 한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고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니라.
     
    (삼하 11:2, 킹흠정)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의 집 지붕 위에서 걷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
     
    이교도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형상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기묘한 문양이 들어간 부적을 만듭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에서도 믿는 자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하고, 그 대신 성당 벽화를 그려서 성경 내용을 보여주고, 마리아 상, 성인들의 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그림, 부적, 형상들과 같은 시각 자료들을 다 파괴하도록 하셨고(민 33:52),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출 20:4).
     
    (민 33:52, 킹흠정)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
     
    (출 20:4, 킹흠정)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는 도마에 대해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20:29,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상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는(마 4:8), 지금도 성도들을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합니다(요일 2: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셨으며(고후 4:18), 보는 것으로 걷지 말고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5:7).
     
    (요일 2:16, 킹흠정)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고후 4:18, 킹흠정)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고후 5:7, 킹흠정)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거듭 강조하셨고, 그 분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주로 청각 매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 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를 원하시며(신 6:4), 또한 자녀들에게 "말하여"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신 11: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강론하는 것을 듣고 울며 회개하였습니다(느 8:8-9).
     
    (신 6:4, 킹흠정)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
     
    (신 11:19, 킹흠정)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라.
     
    (느 8:8-9, 킹흠정)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에서 명료하게 낭독하고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들을 듣고 울므로 디르사다인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친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날은 주 너희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애곡하지 말며 슬피 울지 말라, 하고
     
    이처럼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교육한 방법은 시각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청각 정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시각 매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지창조의 장엄한 광경을 환상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앞으로 세상에 오실 메시야의 초상화를 그려서 집집마다 붙여놓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 분께서 원하시면 밤하늘의 별자리 배치를 바꾸어서 하늘에 요한복음 3:16 말씀을 새겨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또한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법규와 법도를 들으라"(신 5:1),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그 안의 것을 읽으라"(신 17:19), "주의 말씀을 외치라"(사 40:6),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청각을 통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문화 시대의 청각 교육
     
    제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 아들들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제 목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아들에게 동화도 들려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편지를 써서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목소리를 들으면 배 속의 아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태동을 하곤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들들은 제 목소리를 듣고, 저를 잘 따릅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든 후에 직접 목소리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들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우기 전부터 아들들에게 성경 구절을 한 마디씩 나누어서 들려주고 그것을 외우도록 했는데 지금도 어른들 못지 않게 암송을 잘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유희왕 카드, 만화책, 컴퓨터 게임 등의 시각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기독교 서점에 데려가도 글자가 많은 책은 안 읽고, 성경 만화만 보려고 해서 큰 일입니다. 이제는 만화와 컴퓨터 대신 제 목소리로 더 많이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습니다.
     
    비록 각종 그림과 영상물이 넘쳐나는 영상 문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저희 가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청각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매일 아침 가족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다들 한 자리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고, 제가 성경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읽고 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하거나, "내가 주께로 돌이켜야 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하며 자백하는 기도를 하거나, "이 말씀에서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믿어야 할 약속이 있는가?" 등에 대해 기도를 합니다. 밤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들들이 성경책을 들고 제게로 와서 함께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읽었더니 어느 덧 구약성경 중 시편과 잠언을 다 읽었고, 이제 며칠 후면 신약성경 읽기를 마치게 됩니다. 제 아들들은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저희 가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녀 교육의 특징은 청각 매체를 통한 말씀 교육, 즉 성경 강론과 성경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들을 부지런히 말로 가르치면서, 저 역시 청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소리내어 읽기"입니다. 저는 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크게 소리를 내어서 성경을 읽으면서 제 입으로 그 말씀을 제 귀에 들려줍니다. 이렇게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으면 눈으로 보면서 귀로도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에 말씀을 두 배로 섭취할 수 있게 되며, 성경을 읽는 도중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으며, 성경 말씀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혹시 성경을 눈으로만 보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한 번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 차이점은 직접 해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그래픽, 현란한 동영상,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에 속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주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읽으며 잠잠히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상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계 1:3, 킹흠정)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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