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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이단 싸움에서부터 영적 성장에 이르기까지의 신앙 여정조회수 : 13503
    • 작성자 : 김용묵
    • 작성일 : 2012년 3월 20일 22시 33분 24초
  • 1. 기독교에는 왜 이리 이단이 많은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꺼리는 불신자들이 내세우는 구실 중 하나로는 “기독교계엔 왜 이리도 골치 아프게 이단들이 많냐(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 아닌 줄 내가 어떻게 확신하고 가겠냐)”가 있다.
     
    옛날엔 본인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낙담하고 시험에 든 적에 있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만 항변하는 건 너무 나약하고 궁색해 보였다. 이에 반해 전세계적으로 잘 통합된 단일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천주교가 일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먼 훗날 성경을 통해 알게 되면서 본인은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이런 열등감이 사라졌다. 성경의 조명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과 육신의 깡만 있었다면, 본인은 과거 시대엔 분명 교황이나 종교 재판소 관원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독교에다 세상 권력을 접목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단들을 잡아 족치는 일에 열심을 냈을 것이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조무래기 이단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 기독교계의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전 11:19 같은 뜻밖의 구절이며, 대처법은 딛 3:10 정도가 고작이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 주변에만 진딧물이 들끓듯, 인간의 혼이 달린 영적 전쟁터의 입구는 ‘당연히’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험한 꼴이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그 꼴 보기 싫다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마다한다면, 마다한 사람만 손해이다!
     
    기독교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기독교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언뜻 보기엔 이건 비논리적인 아전인수 자기도취 정신승리법 같은 주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진짜로 그것 때문이다. 왜 전세계의 신흥 종교 교주들 중에 부처나 공자, 마호메트를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자처하거나 대체한다는 부류는 넘쳐나는 걸까?
     
    우리끼리 통하는 비유를 동원하자면 이렇다. 왜 전세계의 성경들은 NIV나 NRSV 같은 역본을 대체하지 않고 오로지 KJV하고만 자신을 비교하며, KJV만을 극복과 타도, 대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그런 맥락인 것이다.
    작정을 하고 특정 이단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회심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글이라도 쓰려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 믿음만을 방어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이단들에 대해서 공부하려 애쓸 필요 없다.

    일례로, 한국의 기성 교계에서는 신천지 때문에 교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신천지 출신의 위장 신자들을 가려내는 매뉴얼을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성도들을 별도로 교육시킬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자들이 성경대로만 잘 대처하면 이단들은 아무도 힘을 안 보태 주니 제풀에 지쳐 없어지게 돼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교회의 에러 복원 알고리즘인 것이다. 저런 수준 낮은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되며, 물리력, 행정력, 폭력 같은 것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교리의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방황하고, 어쩌다 혹세무민하는 이단 교리에 훅 가 버리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이 킵바이블이라든지 청지기 같은 사이트를 찾은 분이라면 일단 웰컴이다. 잘 찾아왔으며, 방향을 바르게 잡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아마도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며, 어쩌면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 진영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은 무료로 차려 놓은 자료라는 뷔페 밥상은 아주 풍부하지만, 여러분에게 일일이 떠먹여 주고 서빙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그래서, 그런 분들께 당부하는 점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라도 자신의 연령대와 신앙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건 필수이고, 또 스스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도 가능한 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작문하면서 올릴 것을 권한다.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이트에서 긴 글을 달랑 복사-붙이기만 해 놓고(혹은 링크만), 반박해 달라는 식의 성의 없는 글은 어느 사이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그건 완전 비매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분야이든 고수는 태어날 때부터 고수 딱지를 달고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묵묵히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붙고 노하우가 저절로 생길 뿐이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작은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인은 영적으로 어리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2. 나의 이단 퇴치 사례
     
    (1)
    먼 옛날, 2000년 말의 일이다. 고등학생 신분이 끝나가던 시절에 본인은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둘로스 데우)라는 책을 아주 우연히 접했다. 이 책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이니, 출간된 지 몇 달쯤 뒤의 일이다.
    그땐 내가 비록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죽고 나면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생과 윤회가 웬 말이냐 싶었다.
     
    그 책에 담긴 주장 중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원래 기독교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n세기경에 무슨 공회를 거치면서 이 교리가 부당하게 삭제되었다. (가톨릭이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줬구나! 세상에!)
    -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국가별로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불공평하기 그지없는데, 인생이 겨우 1회로 끝이라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다. 각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다.
    - 욥 3:11-26은 자신의 전생에 대한 회상이다.
    -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다. (마 11:14)
     
    글쓴이가 누구인지, 한국 교계에서 어떤 평판이 있는 사람인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다른 저서들을 보아하니 글쓴이는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고 이단끼가 농후한 사람이긴 하다. 그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명제 자체를 공격하는 듯했다.
     
    본인은 사람이나 소속 교단에 대한 편견을 일체 배제하고, 주장과 교리만을 오로지 성경적으로 스스로 비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비평을 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성경 지식이 부족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인생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하는 교리를 어찌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의 선택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렸다.
    마치 불치병 환자를 미래에 의료 기술이 개발될 때를 염두에 두고 냉동 창고에 보관해 두듯, 본인은 그 책을 내 머릿속 냉동 창고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수많은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2003~2004년 사이에 ‘서서히’ 솔루션이 나왔다. 책의 저자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전생· 환생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내세나 부활 문맥인 구절을 어떻게 이상한 교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지 디버깅이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본인이 가장 긴 시간을 두고 혼자 힘으로 이단 교리를 교리 증명을 통해 퇴치해 낸 첫 사례가 되었다.
     
    (2)
    2000~2001년 사이엔 천주교 교리도 접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형제들을 위한 천주교 이야기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아주 자상하고 박학다식한 신부와 대담을 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고, 천주교가 기독교계의 큰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로 개종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변명과 해명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면죄부가 아니고 다른 개념인데 개신교 쪽에서 악의적으로 천주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거나, 마리아 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다를 게 없다는 식. 막 6:3에 대해서도, 원어를 들이대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사촌이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고 둘러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개신교가 태생상 지닌 약점과, 그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천주교 관행을 빌미로 개신교도 결국은 천주교가 큰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진짜 교회사를 알기 전까지는 이들의 주장을 도저히 완벽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니다 싶었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나중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거기서는 고전 3:15 ‘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연옥을 거쳐서 구원받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써 놨었다! (아예 대놓고 ‘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이라는 묘사가 들어간 성경 역본도 있다)
    특히 본인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 옛날에 영국에서 위클리프라는 어느 악당이 갱을 만들어서 이단 교리가 들어간 잘못된 성경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3)
    여호와의 증인이야 일단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맹렬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도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와 배척의 대상이 돼 있다. 포교하는 모습이 좀 지적이고 논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얘들이 성경을 변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본인은 거부 모드로 들어갔다. 아직 KJV를 모르던 시절이어서 NIV를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런 변개된 역본과 비교해 봐도 이들의 신세계역 성경은 워낙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KJV 덕분에 요일 5:7과 ‘독생하신 아들’(요 1:18) 같은 아킬레스건까지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완전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게임 끝.
     
    (4)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성경적으로 맞다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안식교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었고, 그때 본인은 지금과 같은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라든가 신· 구약 바르게 나누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문제 없이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인데 제4 계명은 그럼 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에 걸렸다.
     
    이것은 나중에 출 31:17을 통해 완전히 결론이 났다. 성경 역본 문제가 해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십일조 문제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해결됐다. 주일 예배는 그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에서 유래된 신약 성도들의 전통일 뿐이다.
     
    (5)
    다른 대부분의 이단 교리들은 pre-KJV era 때 접한 것들이고 KJV 진영 내부에서 완전히 격파에 성공한 반면, 딱 하나 KJV 진영 내부에서 접한 유일한 이단 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이다. 다른 진영이나 교계는 종말론이 더 엉망이고 전천년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런 문제로 논쟁을 할 배경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환란 통과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온갖 교회사 자료와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은 이 문제는 더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앙 논리와 상식 수준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내가 보기엔 이건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부정하는 짓이고, 자기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3. 이단 판별을 넘어서 더 큰 목표를 추구해야
     
    본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던 2004~2005년경에는 지금과 같은 교리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교회 대환란 논쟁을 끝으로 본인은 지금까지 무슨 이단 교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하거나 싸운 적이 없다. 신앙 논리, 기독교 변증, 교리 노선에 관한 한은 완전에 가까운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가져다 준 영적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예전에는 물증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힘겹게 방어해야 했던 이단 교리들을 총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그나마 남에게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는 건, 나는 KJV를 모르던 아주 먼 옛날부터 기독교의 근간은 성경이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이 위조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관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교리가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지, 또 궁극적으로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창조· 구원· 성화· 부활·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끝나는지를 늘 검증했다. 이렇게 하면 이단에 빠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겨우 이단 교리 가려내고 논쟁이나 하려고 KJV 성경 공부를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마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목적이 오로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수준이 낮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고,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비교 잣대는 이단들도 아니요, 같은 진영 안의 다른 성도도 아니요, 예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생 중에도 일부 머리가 좋은 애는 한자와 영단어를 줄줄 외우고 수학 미적분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초등학생이 알아서 남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고, 부모가 때려서 양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영재’가 존재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10대 때 죄와 심판, 이신칭의 구원을 이해했으며 구원의 확신을 느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KJV가 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지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이단 교리의 자체 필터링 기술까지 갖췄다. 하지만 그런 교리 공부의 중심에는 ‘나’와 ‘개인적인 지적 만족’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이 내 정신 연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가 막힐 때는, 쓰는 글에 육두문자도 막 들어가고 글에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딱히 증오나 피해의식, 악이 받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사랑의 의분도 아니었다.
     
    “남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 글 내용을 알아듣고 동지가 될 사람만 여기 알아서 붙어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가 당장 열불이 나 있는데 억지로 감정을 죽이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위선과 가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키보드 배틀이 붙었고, 검색 엔진에서 내 이름을 치면 천주교 사이트에서 내 욕을 해 놓은 게 뜰 정도로 악명(?)도 떨쳤다.
     
    겁도 없이 이런 무모한 생각으로 수 년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여러 글을 올렸는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와 내 글을 통해 자기 구원을 재정립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을 뜬 분들이 몇몇 생기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세가 격분한 나머지 바위에게 말로 안 하고 바위를 막대기로 쳤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려 주신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뭐, 그 시절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 열정과 패기(?) 덕분에 그때 ‘가~끔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옛날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잘 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쑥스럽다.
     
    본인은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와 성화, 최종 완전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최근에야 정립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옳다구나 교제를 끊고 짤라 버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마음밭을 갈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나의 신앙관을 심으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어울리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믿고 행하는 모습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보면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됐다.
     
    나의 말과 행실로 인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갈면서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저놈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저 작자가 믿는 걸 믿느니 차라리 교황, 우리 신부님 말씀을 듣겠다” 이러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결국은 눈높이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의 수위 자체에다가 물을 타라는 소리도 절대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단번 속죄, 킹 제임스 성경, 구원의 영원한 보장, 환란 전 휴거 체계를 만든 분께서 크리스천들을 바로 하늘로 안 데려가고 남겨 놓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 주고 남을 나보다 더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을 상대로 스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독교회의 reproduction(믿음의 전수와 재생산)과 error-correction(외부로부터의 이단 교리와, 교회 내부의 불화 등에 대처) 전략은 응당 이를 염두에 두고 수립되어 있다.
     
    본인은 성경에 입각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내 영리를 위해서나 내 감정 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남을 생각해서 독자가 영적으로 잘 되고 딤전 2:4처럼 되길 원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게 독자들에게 ‘오해 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들로부터 당장 동의는 못 얻더라도 “저 녀석 정말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혼의 회심률도 옛날보다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도 이단들을 폭로하고 교리 분석하는 것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마치 튜닝의 끝은 순정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곳에 오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본인이 오랜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진리를 이렇게 공유하길 원하며, 우리 모두 질문을 올리든 간증이나 칼럼을 올리든, 그 큰 목표를 잊지 말고 온라인 공간에서 교제할 것을 감히 권해 본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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